영화 열정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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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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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다큐 <전택이 편> [소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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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다큐 <전택이 편> [소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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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다큐 <전택이 편> [소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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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인터뷰 녹취풀이 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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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범 인터뷰 녹취풀이 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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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 인터뷰 녹취풀이 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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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한국영화걸작선]수절: 1월의 영화
미성숙한 작가의식 < 수절 >(1973)은 하길종 자신의 말과 글에 의해 한동안 신비화된 작품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UCLA 대학원 동문이었으며 졸업 작품으로 MGM에서 주는 주요한 상을 받았고 귀국해서는 한국사회의 폭압성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풍의 전위적인 스타일로 형상화환 데뷔작 < 화분 >(1972)으로 비평적 스캔들을 일으켰던 하길종은 당시의 충무로를 활동사진적 의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 장터와 같은 곳으로 비유했으며 자신을 그 불모지에 처한 순교자 내지는 희생자로 여겼다. 대학원 동문 코폴라는 <대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본인은 영화예술의 폐허 한국에서 검열과 낙후된 시스템의 이중고 속에서 고통받는, 미완의 영화작가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순교자로 여겼다. 이 나르시시즘은 그의 예리한 평문이 지닌 설득력 덕분에 한동안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그 예시가 되는 작품 중 하나가 <수절>이었다. “<화분>을 연출한 후 써낸 나의 시나리오는 매번 제작자의 거부반응을 받거나 칼자루를 든 관(官)에서 항시 보이코트를 받아왔다.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해서 만든 <수절>은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는 이유로 20분이 커트 당했고 극장에서는 알맹이가 빠진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졌다.” 사지가 잘려나갔다는 고통을 하길종 스스로 느꼈다는 <수절>의 검열 수난사는 그의 말대로 검열에 다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공개됐다면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함의를 남긴다. 1970년대의 엄혹한 유신정권 시대의 검열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남아 있는 필름 <수절>에서 하길종의 영화작가로서의 재능은 그의 자의식에 비해 별로 드러나는 게 없다. 그보다는 한국영화의 부족한 물적 시스템을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에 비해 이상만 높았던 야심가의 무모한 시도가 참혹하게 실패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수절>의 배경은 한사군 시대. 행복한 삶을 살던 유는 아내 길과 딸 영을 남겨두고 전쟁터로 떠난다. 유는 적군의 포로가 된다. 10년 만에 돌아온 유는 아내와 딸을 만나지만 그들이 귀신임을 알게 되고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는다. 유의 귀환을 믿었던 아내와 딸은 빈곤과 전염병, 가뭄을 이겨내지만 도읍의 실력자인 장군에게 모녀가 함께 윤간, 살해당한다. 마지막 시퀀스는 유와 장군의 결투. 폭정에 대한 저항이라는 알레고리는 쉽게 드러나지만 장면의 컨티뉴어티 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쇼트의 연결은 조악하다. <수절>의 전반적인 문제는 아무리 검열과 열악한 제작환경의 이중고를 겪었다고 하더라도 1970년대의 다른 한국영화에 비해서도 완연히 처지는 구성감각이다. 쇼트와 쇼트가 붙는다는 느낌이 없이 쇼트 하나에 잔뜩 힘을 주지만 그 다음 쇼트와의 배열에는 무능한, 검열에서 잘린 탓이라고 하기엔 장면들내의 리듬이 아예 성립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초반에 유가 귀신이 된 아내와 딸을 만나는 장면을 비롯해 이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의 < 우게츠 이야기 >의 영향이 희미하게 어른거리지만 이걸 인용, 참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이 수평적 비교가 아예 불가능한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한때 하길종의 동료였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홍파 는 이에 관해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영화>지에 실은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매섭게 지적했다. “하길종이 ‘활동사진’論을 약간 늦춘 것은 그 자신이 두 번째 연출한 <수절> 이후쯤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그 작품이 그가 그렇게 매도해 마지않았던 ‘활동사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결과의 양심이었음에 분명했다. 그는 비로소 한국영화 풍토를 익혔으며 진정한 추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제작 실태의 과정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고독해 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만났지만 더욱 고독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그를 어느 제작자도 찾지 않았다. 괴팍하고 열기찬 그는 제작자들이 원하는 고분고분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서라벌예대, 서울예술전문교의 학생들에게 영화 열정을 심어주려 애쓰기도 했다.” 그 이후의 하길종의 삶은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다. 그는 지속적으로 매서운 필봉을 휘둘렀으며 (감독으로서만큼이나 비평가로서 하길종이 한국영화사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한국영화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 자신의 영화적 호흡을 가늠하게 하는 준수한 영화를 만들었다. < 바보들의 행진 >과 < 속 별들의 고향 >, < 병태와 영자 >는 동시대의 한국영화계를 내려다보는 오만 없이 수평적으로 영화인들과 소통하면서 해낸 상대적으로 성공한 그의 작업결과물이다. <수절>까지의 그는 병사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돌격을 명하는 전쟁터의 무모한 장군과 같았다. <수절>에는 그런 지휘자의 돌격 구호에 따라 배우들이 느꼈을 엄청난 물리적 고통이 화면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다. 구원에의 전망이 사라진 고대 세계를 묘사하면서 하길종은 당대의 한국사회를 비유하려 했다. 그것이 너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만큼이나 폭정, 억압, 가난, 전염병에 시달리는 <수절>의 화면 속 인물들의 고통도 생생하다. >> 수절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해룡 - 배우
배우 이해룡 은 1936년 서울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만주로 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손이 귀했던 외가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개구쟁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이 되었고, 성동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기에는 피난과 귀경의 반복이었고, 이러한 불안정한 삶은 호기심 많던 그를 공부보다는 다른 길로 이끌었다. 휴전 후인 1954년 대동상고를 중퇴하고, 마도로스가 되어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를 꿈꾸며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선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을 마쳐야 했으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김명제 촬영감독을 만나 윤봉춘 감독을 소개받게 된다.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구술자에게 많은 문학예술인들이 모이는 명동은 매력적인 공간이었고, 늘 새로운 상황을 만나야 하는 영화 일은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1955년 < 처녀별 >( 윤봉춘 , 1956)과 < 피아골 >( 이강천 , 1955)의 단역 겸 제작부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김승호 , 양일민 , 조항 , 성소민 등의 선배들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논개 >(윤봉춘, 1956)에서 장군의 비서인 사동 역할을 맡게 되는데, 장군의 부인이 운명했다는 비보를 알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때 윤봉춘 감독은 이해룡 에게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라는 연기를 주문했고, 배우로서 재능이 있었는지 눈물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이후 < 유관순 >(윤봉춘, 1959)에서의 유관순 오빠 관옥 역할 등을 하면서 본격적인 연기자의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만희 감독과의 인연과 ‘17클럽’으로 만난 영화 동반자들 이해룡 을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한 사람이 윤봉춘 감독이라면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관계, 동료애를 통해 영화 현장의 참맛을 알게 한 사람은 이만희 감독이다. 5.16 직후인 1961년 말 구술자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해병연예대에 소속되어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 많이제작되었는데 연예대 소속이었던 구술자는 군 생활 내내 수많은 전쟁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 살아있는 그날까지 >(이만희, 1962)에 출연한 구술자를 눈여겨본 이만희 감독은 이후 대부분의 영화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때 이만희 감독을 중심으로 장동휘 , 최무룡 , 허장강 , 박노식 , 문정숙 , 태현실 , 이대엽 , 독고성 , 장혁 , 김운하 , 최성 , 구봉서 등의 배우들과 서정민 촬영감독, 전정근 음악감독, 시나리오작가 백결 과 한우정 , 그리고 구술자 등으로 조직한 ‘17클럽’은 ‘이만희 사단’이라 불리며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공유하며 영화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영화에 대한 꿈을 함께 꾸었다. 이 시간을 통해 동료애를 돈독히 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면서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는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해룡 의 구술은 이 작업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재산이 되었다. 영화계 안팎으로 보여준 끊임없는 영화 열정 1960년대 홍콩과의 합작영화 붐이 일던 시기 신필름의 전속배우가 되어 1969년 홍콩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 13인의 무사 >(장철, 1970), < 철낭자 >( 고버슈 , 197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했고, 다시 대만으로 가 < 5천리 대도망 >( 강대선 , 유가창, 1974), < 금강혈인 >( 김진태 , 198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이 시기의 구술을 통해 홍콩 쇼브라더스의 촬영 환경과 합작영화, 위장 합작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당시 합작영화가 만들어지는 풍경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불황기라 하는 1970~80년대 이해룡 은 한국과 홍콩, 대만을 오가며 촬영을 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한국영화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고, 임권택 , 이두용 , 김호선 감독 등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인정받는 감독들과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1년 배창호 감독의 < 흑수선 >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고 있지만 대신 현재는 1957년부터 몸담았던 영화배우협회 내 복지회 활동을 통해 원로 배우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천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스태프, 배우로 영화에 참여했다. 그중에서 몇몇 사람은 이름을 날리기도 하고, 후대에까지 기억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레딧에만 존재한 채 잊혀갔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구술 사업을 통해 한국영화 전면에서 목소리를 낸 영화인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갔던 스태프들, 조연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까지 주도적인 몇 명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한국영화사의 빈틈을 메우고, 새로운 시각을 형성해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이해룡 은 낯설지만 친숙한 배우로서, 한국영화를 만들어간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따뜻한 시선으로 배우의 삶 전체를 바라보고 스스로 살아가는 영화인으로서, 후대 연구자들에게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영화의 중요한 지점들을 미시사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