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
- 감독
- 스티브 쉴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조셉 모건, 스테판 캠벨 무어, 에밀리 밴캠프, 크리스틴 크룩, 레이 윈스톤, 벤 크로스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 펜과 수채, 이스라엘 박물관, 예루살렘.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던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그림을 기억해? 벤야민은 그의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파울 클레의 이 그림을 보며 역사의 잔해 더미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지. 날아오르려는 천사는 역사의 잔해 더미 앞에서 눈을 감지도, 날개를 접지도 못해. 폐허가 된 현재를 바라보고 있지. 과거의 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진보라는 폭풍 앞에서 말이야. 우리는 산개해 있는 역사의 잔해 더미를 더듬는 영화를 보려 했고, 글을 읽으려 했고, 그러한 글을 쓰고자 해왔던 것 같아. 우리는 영화 앞에서 눈을 감을 수 없었지. 아마 늘 주변화된 것에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의 성정을 감히 벤야민과 천사에 이입해 왔던 것일지도 몰라. 사실 이렇게 글을 계속 쓰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우리는 그저 늘 함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필요로 해왔고, 그렇게 기꺼이 서로에게 동료의 자리를 내어주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글을 찾아 헤매다 결국에는 스스로 읽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글을 끝내는 찾지 못했잖아.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 ‘그’ 영화와 그 ‘영화’, 그리고 ‘영화’ 자체에 관해 말하는 글. 그러니까, 그러한 글은 어디에 있을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질문을 되뇌면서, 이 끝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처음에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가 점점 질문에 대한 문장을 찾았지. 문장의 끝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우리의 것이 되었어. 글로써 완성되는 영화. 그럼 이건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물음과는 상반되잖아. 결국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은 없고, 주변을 맴도는 글만 남아있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것만 말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비평의 흐름에서 아주 작은 귀퉁이의 잔해가 되겠지. 오늘날 한국에서의 비평은 주류와 비주류, 프로와 아마추어가 구분되어 있다기보다는 사실 모두가 비주류라는 조각으로 맞춰지지 않은 채(혹은 프로는 아마추어인 체하고, 아마추어는 짐짓 프로인 체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비평과 작품의 ‘쓰루패스’를 지향하는 《마테리알》, 서버와 리시버가 편지를 보내고 응답하는 ‘비평의 편지’, 《씨네21》이나 《필로》… 그들까지 우리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어. 더는 비평의 독자를 상상하지 못하게 된 걸까? 우리가 비평과 한 발짝 떨어진 존재인지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퍽 만족스러워. 우리는 사라질 기회를 찾고 있어. 천사 앞에 놓일 잔해가 될 날을 기다리며. 우리가 사라지게 될 날은 매년 갱신하는 《 해파리 》의 도메인을 결제해야 하는 가을이 될까? 행방불명이 되자. 사라진 작가들처럼, 사라진 배우들처럼, 사라진 감독들처럼, 사라진 영화관들처럼, 사라진 필름들처럼. 그리고 신재인 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화를 위해. (좌)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중 (사진: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KOBIS ) (우)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신재인 감독은 2000년대 초반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 단편영화 < 소세지 >(2000),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2001),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2002), 그리고 장편영화 < 신성일의 행방불명 >(2005)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지. <김갑수의 운명>, <심은하의 잠적>, <어머니가 상했다>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말이야. 신재인은 『포도주』(2007)라는 책을 한 권 남기기도 했는데(사실 로맨스 소설을 꾸준히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은 그가 쓴 66개의 단편을 한 데 묶었고, 2000년에 대산문화재단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세상에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에 출판의 형태로 공개됐어. 『포도주』의 단편 「남이 먹을 때1」과 「너의 진실1」은 영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의 원전이기도 해. 단편의 화자는 모두 다른 듯 보이지만, 신재인 스스로가 ‘작가의 말’에서 화자는 “다중인격자”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목소리로 느껴지기도 해. 「리얼 드림1」에서 주인공 ‘나’는 꿈을 꿔. 그는 눈을 뜨자마자 꿈을 기록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꿈을 꾸는 시간은 더욱 길어져만 가. 꿈도, 어머니도 없는 그의 사적 시간은 줄어만 가고, 그는 결국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돼. 완결 없는 결말로 향해 가는 그의 이야기는 신재인의 영화와 같아. 신재인의 영화는 절대 문턱을 넘지 않아. 지점을 향해 나아갈 뿐, 그저 시도할 뿐이야. 2006년 신재인 감독의 <어머니가 상했다>(가제) 연출팀 모집 공고글 발췌 신재인의 영화는 체제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등장으로 하여금 규범을 흔들어. 이방인은 체제의 안과 바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의 세계에서 규범이란 죄의식과 위선, 성스러운 것과 천한 것, 그리고 신성모독으로 뒤틀린 정상성의 형태야. 그리고 이방인, 혹은 메시아는 뒤틀린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정상의 세계를 뒤흔드는 시도에 가까워. <신성일의 행방불명>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먹는 행위는 죄악이 돼. 보육원의 아이들은 아버지(신)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음식을 보급받으면, 불이 켜짐과 동시에 흩어져 버리는 바퀴벌레처럼 재래식 화장실이나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 공중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수평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배설과 섭취를 등가로 만들어. 먹는 행위가 수치스러운 행동이 되는 보육원에서 남들보다 ‘뚱뚱한’ 성일( 조현식 )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천사를 만나. 성일은 이 뒤틀린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일까? 보육원에는 바깥에서 들어온 이영애( 문슬예 )가 있어. 영애는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아이야. 영애는 권사의 주방에 들어가 몰래 음식을 훔쳐 먹거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배고파”를 외치며 음식을 먹어. 아이들은 영애를 두려워하면서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보육원의 규범은 점차 흔들리고, 마침내, 그곳을 통치하던 원장( 예수정 )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영애를 교단에 올려 억지로 음식을 먹는 벌을 줄 때, 아이들이 반기를 들려고 하는 순간, 폭력의 문턱을 넘어가려는 바로 그 순간, 영화는 폭력을 중지하고, 보육원 안과 바깥의 경계를 만드는 철문 앞에 서 있는 성일의 쇼트로 이동해. 보육원 바깥에 있던 카메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상승’하여 문을 넘어 다시 성일을 쫓지. 흑백의 영화는 컬러로 전환되고, 보육원의 성일은 터미널에서 눈을 뜨게 돼. 성일은 행자와 같은 모습으로 모텔촌과 먹자골목을 돌아다니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먹고, 사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지. 신재인이 영화에서 흑백과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흥미로운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 “흑백은 아름답기에 억압받는 보육원 장면은 흑백으로 아름답게, 해방 공간인 바깥세상은 현실적으로 추하게 담고 싶었다”라고. (상2) 흑백의 보육원 장면 (하2) 컬러의 바깥세상 아이들을 통치하던 원장이 벌을 받는 뒤집힌 보육원의 시간과 성일이 돌아다니는 시간은 이리저리 중첩돼. 성일은 보육원의 안과 밖, 모든 시간에 있어. 아이들이 교단 위의 원장에게 돌을 던지고 음식을 던질 때, 바깥의 쇼트와 교차되던 성일이 보육원 안에서 폭력을 막는 장면이 프리즈 되고, 반복되며, 영화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폭력의 물리적 접촉을 막아. 영화의 마지막, 성일이 원장과 그의 아들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치킨을 뜯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과 동석하게 됐을 때, 카메라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창의 바깥에서 점점 물러나지. 흥미로운 점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을 은유하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도, 보육원 건물에 높이 매달려 있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낡은 나팔형의 스피커라는 존재야. 신재인 영화에서 신을 위시하는 카메라는 신이 될 수 없어. 오히려 신은 낡고 기능하지 않는 버려진 모습을 하고 있지. 이러한 시점의 카메라는 신재인의 다른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해. <소세지>는 남성, 여성, 아이로 구성되는 소위 ‘정상 가정’으로 보이는 구도를 유지해. ‘소세지’는 남성 성기의 직접적 대리물이 되고,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소세지를 핥을 때, 아이는 “나도 먹어보자”라고 말해. 재미있는 점은 여성-남성-아이의 구도가 계속 바뀌고 있음에도 삼각형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 같은 구도는 가부장을 환기하면서도, 남성의 소세지를 핥는 데 집중하던 여자가 아이가 재촉하니, 남성 성기와 가부장을 대리하는 소세지를 다른 길쭉한 야채들과 함께 싹둑싹둑 절단 내고, 소세지 야채볶음으로 만들어내는 코미디로 무너지지. 여자와 아이는 소세지 야채볶음을 맛있게 나눠 먹고, 카메라는 투샷에서 물러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을 보여줘. 마치 르네 지라르가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서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과 욕망의 주체, 그리고 욕망을 모방하도록 하는 매개자가 있다고 했을 때, 영화는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던 남성을 결말부에 욕망으로부터 아예 배제해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신재인 영화는 오히려 욕망의 매개자를 영화 바깥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세계의 질서와 규범을 계속해서 조롱하는 거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마찬가지로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는 주인 없는 시점 쇼트가 많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의사( 홍승환 )는 환자의 머리에 진실을 넣었고 그것을 깨끗하게 봉합했다고 말해. 이때 카메라는 환자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환자는 죽고, 법정에 선 남자는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봐. 떨어지는 물의 시점은 남자를 내려다보고, 영화는 법정과 교회의 연단, CCTV의 시점 쇼트를 제외하고는 의사의 시점을 제외한 인간의 시점으로 느껴질 만한 쇼트를 배치하지는 않아. 의사가 진실을 넣은 환자의 머리를 봉합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영화는 영화의 안과 바깥을 시점으로 연결해 봉합하는 데에도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거지. 의사는 교회와 법원을 오가며 자신의 죄를 고하는데, 목사( 정인기 )와 판사( 권택기 ) 앞에서 물을 토해내며, 자신이 토해내는 진실에 잠겨 버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남자 앞의 모두는 도망을 가. 판사, 목사, 변호사, 소위 “‘사’짜”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경건한 십자가 앞에서 진실은 마침내 물고문실로 연결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진실을 고해야 하는 그의 정신세계에 빠져 있다가 CCTV 화면을 통해 빠져나와. 이러한 주인 없는 시점과 그것의 물성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규칙이나 명령, 진실과 거짓, 그리고 성경의 인용이라는 언술로부터 순응주의적 진실을 전복해. 마치 신재인이 유명인의 고유명사를 쓰면서 실제 세계의 아우라, 숭고를 벗겨내는 방식을 전유하는 것처럼 말이야. (특히 재미있는 점은 ‘성일’이 영화감독 신성일과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모두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고.)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비위가 좋은 사나이인 소년 준섭이 지우개나 배설물을 먹을 때, 그를 보여주는 부감 쇼트와 같은 방식은 영화 바깥의 타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지. 준섭은 이 영화에서 똥을 먹음으로써 사랑을 쟁취하고, 외계인의 우주선을 먹음으로써 인간을 구하며, 음식난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자폐적 상상력은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처럼 망가진 메시아의 형상으로 작동하는 거지. 신재인 영화는 일상적이고 동질적인, 즉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기능을 수행하는 영화 플롯과 규정적 한계의 바깥에서 규범을 소격화하여 불균질하게 연결함으로써 자아로 필연적으로 빠져버리는, 영화와 영화 바깥에 초월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우리는 이런 조각나고 어긋난 것 같은, 주인공의 상상으로 치부될 법한 영화의 장면들이 산란함으로써 ‘진실’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그래서 신재인이 『포도주』에서 말하듯 영화들은 모순 없는 매끄러운 이야기로서 영생하지 않고 언젠가 사라지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필멸하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장면은 진실로 향하게 되겠지. 신재인은 운동하는 진실을 포착해 불쑥 솟구쳐 오르도록 글과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너머의 무언가는, 현실에 천착해야 하지만 현실에서의 도망침을 꿈꾸는 우리에게 닿으며 필연적으로 주변화되는 비평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그러므로 신재인 영화는 영화 속 세계 바깥에서도, 그저 쌓이고 잔해가 되어, 사라짐 후에도 우리 앞에 놓인 영화처럼 ‘새로운 천사’ 앞에 놓일 거야. 다시 돌아와,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과거를 들여다보되 지금의 시간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야. 메시아를 이야기하면서도, 메시아를 신격화하지 않는 벤야민처럼, 우리는 신재인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고, 복수적인 시간의 공존과 긴장을 경험해. *** 주1. 1) 배장수, " 장편 데뷔작으로 주목 받는 두 감독 '신재인·박성훈 '", 《경향신문》, 2006. 2. 16. 해파리(영화웹진) l www.haepari.net.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및 전시 도록을 쓰거나, 영화계 인력을 인터뷰하고, 독립상영회를 기획한다.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에서 영민은 짝사랑하던 혜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인내하며 기다림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연말,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 <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에서 (마찬가지로 배우 안성기가 연기한) 청년 병태는 경주의 첨성대를 보기 위한 여행길에 나선다. 전자가 오랜 시간의 흐름을 경유한다면, 후자의 서사는 장소와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개된다. 얼핏 보면 상반된 면을 보이는 이 두 영화는 사실 배창호 (裵昶浩: 1953~)라는 감독의 세계관 안에 하나로 수렴되는 동전의 양면들이다. 사뭇 달라 보이긴 하지만 이 두 영화는 시간을 통해서든, 아니면 공간을 통해서든 일종의 긴 탐색의 여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물들은 ‘사랑’이라는 가치에 눈뜨게 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풍 하루 전날 뇌성마비에 걸려 몸져누운 병태는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 몰래 집을 나선다. 그에게 있어 경주행은 유년기에 멈춰버린 인생의 시간을 되찾기 위한 꿈의 여정이다. 그러나 장애의 몸에 홀로 여행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단순히 서울역을 찾는데도 버스를 잘못 타고 길을 헤매는 그에게 조력자 역할로 시인 한민우, 무임승차한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춘자가 동행으로 붙는다. 인물의 설정은 다르지만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는 감독의 성공작 < 고래사냥 >(1984)의 또 다른 변주에 가깝다. 실연의 고통을 달래고자 무작정 길을 나서 방랑하던 병태는 구체적인 목적지를 얻으며, 거지 왕초 민우는 시인으로 바뀌었지만 병태를 돕는다는 점에서는 같으며, 사창굴에 빠져들어 삶의 험난함을 겪었던 춘자는 홀로 만삭의 몸을 끌고 다니는 미혼모로 바뀌어 있다. 여행은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v)이다. 배창호 영화에서의 인물들은 여행(또는 방랑)을 나서서 고난과 역경을 거친 뒤 성장 내지 각성을 얻고 돌아오는 신화-동화의 서사적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여행은 <고래사냥>처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거나, < 황진이 >(1986), (일견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연상케 하는) <꿈>(1990)처럼 종교적 깨달음의 추구이기도 하며, 때로는 < 적도의 꽃 >(1983)의 미스터 M(한민우와 더불어 이명세 의 < M >(2007)에서 재활용되는 이름)이 선영의 죽음을 겪고, 한국과 멕시코, 미국으로 계속 이동하는 < 깊고 푸른 밤 >(1984)에서 백호민이 끝내 자신이 추구하던 성공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바와 같이 냉혹한 현실 인식 내지 자기 성찰에 직면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국에 맞는 상황이 다를 뿐이지, 배창호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은 가치관에 대한 탐색의 과정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배창호식 로드 무비 중 가장 낙관적이고 따스한 정감을 지닌 버전이며, 지금에 와서도 눈여겨볼 만 한 보편통시적인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주인공들은 사회의 정상성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주변부를 맴도는 방외인(房外人), 시대의 소수자(minor)들이다. 병태는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고, 춘자는 처음엔 시댁으로 간다고 했지만, 실은 남자에게 속아 이용당한 뒤 홀몸 아닌 몸으로 버려진 미혼모(그녀가 정표로 간직하던 보석은 전당포에서 보통의 유리 조각으로 판명된다.)였으며, 보헤미안 시인 민우는 원래는 교사 출신으로 합창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전복사고로 학생들의 죽음을 겪고는 자취를 감춘 불행한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상흔(傷痕)을 안고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연대. 영화는 이러한 인물들의 사연을 여정이 진행되는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서서히 드러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하고, 각 인물의 자아 찾기, 인간성 회복과 깨달음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여행 중 일행으로서 가족적 연대의식을 형성한 병태 일행은 각자의 소중한 것을 조금씩 희생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고자 한다. 춘자는 만삭의 몸임에도 자신이 굶는 대신 병태와 민우에게 자장면을 먹이고, 병태는 경주에 가서 그림을 그릴 물감을 전당포에 맡겨 일행을 위한 돈을 마련한다. 이러한 자기희생과 배려의 행위는 일행을 배불리 먹이고자 호텔 레스토랑에서 속임수를 쓰는 민우의 행동에서 정점으로 치닫는다. 무임승차로 역에 붙잡혔던 병태 일행이 서로를 부축하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의 롱테이크, 시골 학교 교실에서 민우의 풍금 연주에 맞춰 정상적인 몸으로 춘자와 춤을 추는 걸 몽상하는 병태의 환상은 불완전한 소수자들이 서로를 돕고 보듬으며 난관을 헤쳐나가는 영화의 인간미 넘치는 감성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민우의 풍금 연주에 맞춰 정상적인 몸으로 춤을 추는 병태와 춘자 이와 같은 인정(人情)의 베풂은 주인공 일행 사이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병태 일행이 여행 중에 만나고 스쳐 지나는 주변 인물들은 때때로 역무원처럼 박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버스를 잘못한 병태를 챙겨주는 우이동 버스 종점의 기사들과 샌드위치 노점 아저씨, 숙직 중 병태 일행을 맞아 잠자리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야식으로 감자를 대접해준 학교 선생님, 일행을 받아들이고 대접해준 환갑 잔칫집(<고래사냥>에처럼 스틸컷으로 전환되는 연출은 훗날 이명세의 <M> 에서도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병태의 물감을 받고서 선선히 돈을 내준 전당포 주인, 비 내리는 날의 이삿짐 트럭, 병태와 춘자를 돕고자 일어선 시외버스 안의 승객들에 이르기까지, 이방인을 환대할 줄 알며, 그들의 여정을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선량함을 품고 등장한다. 소수자에 가해지는 정상적 사회 일반의 차별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인 통속적 피해자 서사와는 사뭇 궤적을 달리하는, 당대의 관객에게 대안적 사회상을 영화적 유토피아로써 제시하고자 하는 배창호식 휴머니즘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여행 중 길과 사람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배창호식 로드무비의 휴머니즘은 경주를 지척에 두고 춘자가 출산하는 헛간 시퀀스에서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비약한다. 이 지점에서 경주로 향하던 병태 일행의 여행은 예수 탄생 직전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기독교 신화의 순례와 치환된다.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처럼 헛간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춘자의 주위에서 병태와 아이들은 (마치 페데리코 펠리니의 < 카비리아의 밤 >(1957) 엔딩에서 줄리에타 마시나를 둘러싼 광대들처럼) 노래하고 행진한다. 화사한 촛불 조명과 필터 처리로 연출된 병태의 환상과 더불어 이 장면은 유영길 촬영감독의 섬세한 조명 처리를 통해 낭만적이고 상징적인 순간으로 그려진다. 실내의 노란 빛은 차츰 문과 나무 벽 틈 사이를 관통해 안으로 비치는 신비로운 푸르스름한 빛으로 대체되며 일순간 신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른다. 현실적인 상황으로는 차별받기 십상인 미혼모의 아기는 구세주의 탄생과 동일시되며 축복받는 것이다. 이 아기는 병태 일행과 그들을 도와준 사람들 모두의 인정이 한땀 한땀 모여 빚어낸 사회적 사랑의 결실이다. 아이가 구원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아이가 바로 구원의 산물이자 징표이며, 그것으로 세상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신화적 분위기의 춘자의 출산 장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여행은 서울과 경주라는 출발점과 종착점을 갖는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행은 실상 실패한 여행이다. 목적지를 향한 여행은 진행되면서 여행자의 신체와 의식, 삶을 변화시키며, 종국에는 목적지가 아닌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토록 선망하던 첨성대에 도착했음에도 (배창호 영화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벤치에 앉은 채) 침울해 보이는 병태의 표정은 이러한 여행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정작 중요했던 건 첨성대가 아니라 그에 도달하기까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춘자와 병태는 일행을 떠났던 민우와 다시금 경주에서 재회한다. 지저분한 머리와 수염을 깔끔히 정리하고 다시금 교사로서 풍금을 연주하는 민우의 모습은 “경주에는 왜? 거긴 폐허와 무덤뿐인데”하던 극 초반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며 그가 여행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본연의 자아와 인간미를 회복했음을 보여준다. 이때 유아기적 순수성을 은유하던 병태의 노란색 모자는 견학을 온 유치원생들 모자의 노란색과 포개지며 봄날의 개나리꽃과 같은 화사한 분위기를 빚어낸다. 춘자, 병태 그리고 유치원생들 동시대 한국영화계는 열린 영화’의 개념을 주창하며 < 성공시대 >(1988)로 풍자적 리얼리즘의 전위에 섰던 장선우 , < 칠수와 만수 >(1988)로 사회적 리얼리즘을 제시한 박광수 의 등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배창호 감독은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각에 입각해 특유의 낭만주의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정립했다. 때론 이러한 감독의 성향은 진보적 평자들의 시선에서는 몽상적이며 현실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지 않고 안전한 지점에 안착한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오늘날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정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순수하며 인정이 넘친다. (또한 별개의 논의를 요구하는 바이지만, 여성 캐릭터를 남성에 의한 구원을 해야 하는 대상적 존재로서 그리는, 배창호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일관되는 감독의 여성관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다소 걸리는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돌이켜보면 영화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대상이 각박해졌다는 방증인 동시에, 한국영화의 사회적 상상력이 더 이상 유토피아적 사회상, 공동체와의 유기체적 관계성을 그려낼 수 없을 만큼 빈곤해지고 황폐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배창호 영화의 낭만주의는 암울한 시대상을 포장하고 뒤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상처 입은 당대 사람들의 내면적 치유를 갈망하고, 더 나아가 인간적 삶이 가능한 대안의 사회, 대안적 공동체의 잠재적 형태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감독의 본의에 더욱 근접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장애인(병태), 피해자로 내몰린 여성(춘자),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은 지식인(민우)을 주인공으로 함과 아울러, 언제든지 소수자들을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유쾌한 동료들, ‘도래할 민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30년 넘는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관객에게 다시 발견되고 재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세월호 사건의 증후를 겪는 한편, 페미니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봉인 당한 채 피해자 서사와 디스토피아에 주박된 오늘날의 한국영화계에 있어,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낭만주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차츰 잊혀가고 죽어가던 어떤 가능성을 일깨울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2018년 9~10월 VOD 기획전 <길 위에서 답을 찾다: 로드무비> 상영작 -> 바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