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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tyourkimchi][Kpop]SHINee_누난 너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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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굴맨][군대가는] 누난너무예뻐 안무 샤이니 Replay Dance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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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7차 외국수입영화전문심의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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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7차 외국수입영화전문심의회의록_통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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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매혹된 죄, 불가항력의 불안을 마주하는 시간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얼굴-물음의 시학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드는 영화적 순간들이 있다. 운동을 동결하는 프리즈 프레임처럼 무리 없이 흘러가던 기존의 판단과 감정을 괄호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섣불리 의미화 하지 않게 하는 정초(定礎)의 얼굴들. 특히 엔딩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넘어 스크린 바깥으로 급진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얼굴들 말이다. 인상 깊었던 한국영화의 그러한 순간들을 거칠게 꼽아보자면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 길소뜸 >(임권택, 1986), < 시 >,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같은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얼굴-물음의 성격은 모두 다르다. 메타 영화인 <반도의 봄>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춘향전> 제작기와 이성애 로맨스를 서사화한다. 이 영화는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착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영세한 조선 영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성장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총독부의 국책회사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영화는 여러 어려움과 오해에도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고 애정을 확인한 두 영화인 남녀가 선진영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을 떠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쇼트로 행복한 연인이 아닌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동료 영화인들의 어두운 얼굴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에서 그들이 기차의 선로를 따라 뻗어 나갈 수 없음을, ‘발전’은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실제로는 진퇴양난에 몰려있음을 드러내는 당혹감, 즉 픽션과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시간성을 묻는 얼굴들이다. <길소뜸>은 1980년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국가적 미디어 이벤트였던 ‘이산가족찾기’가 가진 이면을 보여준다. 화영(김지미)은 한국전쟁 중 잃어버린 아들과 연인을 극적으로 찾게 되고, DNA 검사로 그가 아들임을 확인받는다. 그러나 화영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들 부부를 끝내 뿌리치고 부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운전해 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검사를 진행한 의사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의사가 ‘과학’의 이름으로 민족과 가족의 가치를 설교하는 가운데 화영은 되돌아가려는 듯 차를 멈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화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살짝 눈시울이 불거진 얼굴은 ‘본능적 모성’이 그녀를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화영은 단호하게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녀의 행동은 민족-국가와 대중이 기대하는 얼굴을 부인하며, 부인을 재확인한다. 화영은 그로써 대중매체와 과학이 강요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혈연주의뿐 아니라, 여성 스타를 거대서사의 반응(reaction) 스크린으로 만드는 얼굴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질문한다. 한편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박두만(송강호) 형사가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된 평화로운 논밭을 다시 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면은 박두만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즉 직설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밝혔듯이 박두만의 얼굴-물음 쇼트는 당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호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박두만의 표정은 아련하게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처럼 보일까? 박두만은 그 시절을 ‘실수가 좀 있었지만 열심히 산 시절’로 추억할 수 있다. 여기서 범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질문받아야 하는 대상은 박두만을 비롯한 경찰 공권력 그 자체이다. 서태윤(김상경)도 처음에는 인권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도입하려 하지만 결국 대책 없고 폭력적인 박두만과 조용구(김뢰하)의 방식에 물든다. 박두만은 질문하는 얼굴인 동시에 질문 받아야 하는 얼굴이다. <시>의 얼굴-물음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스크린 바깥에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앞에서 말한 정초의 얼굴에 가장 가깝다. 최종적으로 미자는 자신의 자리에 타자의 얼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희생하는 급진적 선택을 한다. 양미자(윤정희)는 딸이 맡겨둔 손자 종욱(이다윗)과 함께 살고 있다. 60대의 미자는 신산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꽃과 시에 진심인 미자는 어느 날 한 자신의 손자가 집단강간 가해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를 따라 카메라가 패닝한다. 강가 모래밭에서 놀던 한 아이가 하늘을 보다 물에 떠내려 온 희진(한수영)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는 뒤집어져 있고 우리는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카메라와 소녀의 시체가 서로 가까워지며 소녀의 뒤통수가 화면 안에 가득 찰 즈음 ‘시’라는 제목이 화면의 왼쪽에 떠오른다. 집단강간 피해 후 자살을 한 소녀는 ‘시’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희진이 시와 영화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무얼까?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언어를 상실해 가는 미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의 죽음, 영화의 죽음 또한 반복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시대에 말이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죽어가는 것들의 연대를 말한다. 영화에서 ‘봄’은 시/영화 쓰기의 핵심적 실천으로 언급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시적/영화적 봄은 김용탁(김용택) 시인이 사과를 두고 말한 것처럼, 존재(방식)에 관심을 두고 돌보며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봄이다. 현상학적인 봄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나의 봄은 언제나 당신의 봄과 얽혀 있다), 관습적인 사용방식, 즉 도구화에 질문하면서 존재의 다양한 역량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시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듯 현상학적 봄도 쉽지 않다. 미자는 꽃을 비롯해 보기에 예쁜 것을 좋아한다.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에 하늘하늘한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늘 웃고 다니는 미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곱고 예쁘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자 역시 자신을 곱다고 하는 주변 사람들에 늘 “저 멋쟁이에요?” “나 예쁘다고 생각해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 없이 화제를 돌리기거나 자기 기준에 맞춰 에둘러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첫인상을 거리낌 없이 평가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상대방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빠르게 판단하고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손자 종욱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희진을 불쌍해 하지만 자기 아들들을 위해선 그녀의 피해를 지워버리려 하고, 희진 엄마를 쉽게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며, 심지어는 미자에게 “같은 여자”, “혼자 손자를 돌보는 불쌍한 할머니”로서 희진 엄마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한다. 공적 책임이 있는 기자와 교감조차 희진을 진정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익에 따라 이용한다. 간병을 받는 김노인 역시 미자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풀 성적 대상으로 본다. 그렇다고 피해자나 약자 역시 도구적 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희진 엄마는 결국 돈을 받고 합의를 해주기로 하고 미자 역시 김노인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자는 희진의 죽음과 울부짖는 희진 엄마를 가십거리처럼 동네 슈퍼에서 전한다. 미자가 다니는 병원 로비에선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엄마가 고통스럽게 인터뷰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자는 정말로 왜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는 행위에 집착하는 걸까? 시 강좌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고백하는 미자의 말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다. 미자는 자기 인생의 첫 번째 기억으로서 서너 살 즈음 아픈 엄마 대신 일곱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자신을 돌보며 예쁜 옷을 입혀주고 애정을 담아 돌봐줬던 순간을 기억한다. 언니의 ‘예뻐해 줌’은 존재의 첫 각인으로 남는다. 언니의 사랑은 그녀가 존재함을 감각하게 한 원초적 기억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아픈 엄마’처럼 고통과 함께 한다. 미자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알츠하이머로 언어를 잃고, 더 이상 손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관습적인 관계와 이해를 벗어던진다. 미자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으로 실천을 시작한다. 미자의 추도식에서 액자에 담긴 희진의 사진을 훔쳐오고, 그 액자를 손자가 보도록 식탁에 놓는다. 하지만 손자는 그 얼굴을 외면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미자는 다른 아버지들에게 떠밀려 합의를 요구하기 위해 희진 엄마를 찾는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희진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미자는 곧 자신의 목적을 잃고 따뜻한 햇살, 살랑대는 바람, 초록이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에 마음을 뺏긴다. 희진 엄마를 마주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읊는다. 미자는 뒤늦게 그가 희진 엄마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한다.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선 어쩌면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봐야할지 모른다. 미자는 이후 자기에 대한 몰입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질문하고 비우는 것으로 간다. 희진이 자살했던 다리를 찾아갔을 때 더 이상 습관처럼 적어 내려가던 아름다운 글귀들을 적지 못하고 비운 채로 남아있던 시상 노트는 미자의 얼굴이 된다. 자기를 비우고 타자의 얼굴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때야 원초적인 존재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미자는 희진의 존재를 삭제하지 않기 위해 홀로 손자를 경찰에게 신고해 수사가 이뤄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시를 쓴다.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진 미자의 시는 김용탁 시인이 읽으려고 하는 제스처에서, 미자의 목소리로, 그리고 아마도 희진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미자의 보이스오버로 시가 낭독되는 가운데 화면은 미자가 살았던 집, 미자의 집에 온 딸, 아파트 앞의 평상과 커다란 나무, 자주 이용하던 버스와 정류장을 따라간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볼 수 없는 부위는 얼굴이다. 눈이 포함된 얼굴은 다른 신체 부위를 직접 볼 수 있지만 스스로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얼굴은 비움이자 물음이 된다. 이 장면은 미자가 보아 온 삶의 흔적을 훑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미지의 흐름 자체가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은 고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을 때 타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서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네스의 노래’는 미자와 희진이 함께 쓴 시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를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로 읽게 하고 그 둘의 시점으로 보는 삶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희진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의 중반부터는 희진이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을 장면들이 주관적 시점으로 이어진다. 학교 운동장, 수업하는 교실, 희진의 집과 반가워하는 강아지, 버스와 경주하는 희진의 남동생, 그리고 희진의 친구들. 마침내 다리 위에 도달했을 때 카메라는 드디어 희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질문한다. 당신은 희진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다시 카메라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테마연재]에로티시즘의 대명사: <애마부인> 프랜차이즈 연대기 ⑴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영화는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코리안 뉴 웨이브’를 중심에 둔다면 그 시작인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이장호)일 것이고, 작가주의 예술 영화라면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배용균)이 떠오를 것이다. 대중적 상업영화의 규범으로는 배창호의 < 고래사냥 >(1984)과 < 깊고 푸른 밤 >(1985)이 있을 것이며, < 길소뜸 >(1986. 임권택)이 보여준 리얼리즘의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애마부인>(1982년)부터 등장한 시그니처 포즈 하지만 영향력으로 본다면 단연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이다. 이 영화 이후 충무로는 ‘에로티시즘’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이어지는 ‘애마 프랜차이즈’는 198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한국영화의 ‘에로 패러다임’을 규정한다. <애마부인>은 이전까지 한국영화가 애써 눈 감아 온 ‘여자의 욕망’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방향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그 표현이 미학적이거나, 그 서사가 논리적으로 수긍할 만하다는 건 아니다. <애마부인>은 거대한 시작이었고 수많은 에로 영화들은 이 영화를 모방하거나 변주했다. ‘애마’라는 캐릭터가 30년 넘게 그려온 연대기는 한국영화의 웬만한 에로틱 아이템은 모두 품고 있었고, 그 흐름은 이후 < 젖소부인 바람났네 >(1995. 김인수)로 만개한 에로 비디오 시장과도 직결된다. 1대 애마 안소영. <애마부인>은 애마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때 애마는 고개를 돌려 관객을 응시한다. 애마의 각성. 이 테마는 3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애마 프랜차이즈’의 핵심이다. 1982년은 분기점이었다. 이 해 안소영 과 임동진 이 부부/연인으로 등장하는 두 편의 영화가 개봉된다. <애마부인>과 < 산딸기 >(1982. 김수형)였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로틱 멜로드라마와 일제 강점기를 다룬 토속 영화. 만약 <산딸기>가 더 인기를 끌었다면, 1980년대 에로 트렌드는 후자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지만, 결과는 전자의 압도적 승리였고 이후 ‘애마의 세계’가 열린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 신군부 쿠데타와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겪은 남한 사회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여전한 공포 정치였지만, 그 표면은 훨씬 화려해졌다. 섹스와 스포츠와 스크린을 동원한 이른바 ‘3S 정책’의 시대였고, 통금 해제와 함께 ‘심야 상영’이라는 게 가능해졌으며, 그 첫 수혜자는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그 해 한국영화(당시엔 ‘방화’라고 불렀던) 흥행 1위였던 <애마부인>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극장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던 화제작이었다. 감독은 정인엽 . 1960년대에 데뷔해 반공 영화부터 청소년 영화까지 이런저런 장르를 섭렵하다가 호스티스 영화 < 꽃순이를 아시나요 >(1979)로 빅 히트를 기록한 정인엽 감독은 1970년대 말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다. 이때 아트하우스에서 접한 유럽과 미국의 에로티시즘 영화들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귀국 후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조수비의 『애마부인』(1981)을 영화화한 것이다. <애마부인>은 달랐다. 여성이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 자유 연애를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여성의 육체를 눈요깃감으로 전시한다는 점에서 꽤나 모순적인 영화였지만, 당대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1980년대식 욕망을 읽었다. 혼자 아파트에 살며,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고, 패셔너블하면서, 나이트 클럽이나 바에서 즐기는 여자. 여기엔 1960년대 멜로드라마의 모성에 대한 강박이나,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가 지닌 비극적 운명의 흔적은 없었다. 유명무실한 가부장제(애마의 남편은 감옥에 있다), 육아의 의무에서 해방된 솔로의 삶(시댁에서 아이를 빼앗아갔다), 경제적 풍족함(애마에겐 생계에 대한 고민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육체적 매력(남자뿐만 아니라 동성 친구도 눈독 들인다)…. 애마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였으며, 한편으론 남한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일부일처제가 붕괴중임을 몸으로 선언하는 인물이었다.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애마’는 ‘말’과 함께 ‘자동차’를 의미한다. 호스티스 영화가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여성들의 사연이라면, <애마부인>의 애마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오너 드라이버인 그녀는 직접 차를 몰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다. 사진은 <애마부인 6>. 모델인 애마(다희아)는 자동차 CF를 찍고 있는데, 이 영화엔 현대자동차가 공식 협찬을 했다. 산업적으로도 <애마부인>은 전인미답의 경지로 들어갔다. 이른바 ‘애마 프랜차이즈’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시리즈일 것이다. 1982년에 첫 선을 보인 후 최근 < 애마부인 2016 >(2016. 김미연)까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20대 초반의 관객이 어느덧 환갑에 가까워질 때까지, 애마의 역사는 세대를 가로질러 이어졌다. 연방영화에서 제작한 ‘정전’은 1996년까지 13편으로 이어지지만, 정전보다 많은 ‘외전’이 있었다. 극장용 영화에서 시작한 프랜차이즈는 비디오 시장과 모바일 시장을 거쳐 IPTV 시장까지 이어졌으니,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은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대한 산 증인인 셈이다. 그리고 애마 시리즈는 스타 시스템에 정면 도전했다. 배우와 장르의 인기에 힘입어 시리즈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프랜차이즈 자체의 동력을 통해 ‘O대 애마’라는 식으로 편마다 신인(급) 여배우를 등장시켰고 그들을 스타덤에 올렸다. 1대 애마 안소영, 2대 애마 오수비, 3대 애마 김부선. <애마부인> 시리즈의 초창기를 장식한 강렬한 섹슈얼 카리스마 배우들. 흔히들 <애마부인> 1편만 보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본 양 이야기하지만, 정인엽 감독이 연출한 1~3편을 모두 본 후에야 이 시리즈의 진수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애마부인>과 < 애마부인 2 >(1984. 정인엽)는, 배우는 안소영에서 오수비 로 바뀌지만,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을 지닌다. 1편의 마지막에서 애마는 젊은 애인과 남편 사이에서 결국 남편을 선택하고, 그들의 가정은 회복된다. 하지만 남편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일에 바쁘다는 이유로 밤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단장했던 애마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면서 영화는 끝난다. 2편의 시작 역시 애마(오수비)가 화장을 지우는 장면이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1편을 통해 애마는 각성했고, 2편의 그녀는 이미 이혼했으며 외국 항공사에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고 근사한 애인 성현( 신일룡 )이 있다. 1편이 애마가 불행한 이유로 ‘바쁜 남편으로 인한 외로움’을 제시한다면, 2편에선 단 한 줄의 대사로 그것은 모두 허울이며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린 함께 도달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 애마부인 3 >(1985. 정인엽)에 오면 더욱 명확하게 진단한다. 의사( 진봉진 )는 말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다수의 부인들은 남편이 무력하다는 이유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애마부인>의 엔딩(상단).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애마는 화장을 지운다.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의 엔딩(하단). 엠마누엘(실비아 크리스텔)은 짙게 화장을 한다. 과거의 모습을 지우고 새롭게 변신한 모습이다. <애마부인 2>의 첫 장면에서 화장을 지우던 애마의 모습은 1편의 엔딩과 연결된다. 하지만 <애마부인 2>의 엔딩에서 활짝 웃는 애마는 헤어스타일을 단발로 바꾸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모습이다. 남편, 애인, 연하남 등 ‘남자’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자존심을 죽이고 잠자리를 요구할 때마다 당신은 무참하게 날 거부했어요,”(애마) “난 당신이 그런 여자인 줄 몰랐어.”(남편) 이런 식의 대사로 변죽만 울렸던 게 <애마부인>이라면, <애마부인 2>는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부부 사이의 ‘섹스’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며 애마는 “난 이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어요”라며 선언한다. 그리고 3편에 오면 애마( 김부선 )는 남편을 집에 남겨두고 떠나 버린다. 종종 사람들이 <애마부인> 시리즈를 유부녀의 일탈과 불륜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여기는데, 이 시리즈는 시종일관 ‘부부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10년 후에 나온 < 결혼 이야기 >(1992. 김의석)는 <애마부인>에 로맨틱 코미디를 결합한 업그레이드다). 그런 점에서 <애마부인>은 20년 가까이 독재와 유신 체제로 억눌렸던 한국 사회가 폭발했던 1980년대의 ‘욕망의 사회학’이자 ‘부부의 심리학’이었다. <애마부인> 시리즈를 이야기할 때 애마 못지 않게 인상적인 캐릭터는 에리카이다. 1편과 2편에서 김애경 역할을 맡은(목소리는 박정자 의 더빙) 에리카는 “애마야, 제발 그 봉건적 사상 좀 버려. 사랑해주지 않는 그런 남자와는 같이 살 필요가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계몽적 멘트를 날리면서, 한편으론 “네 몸은 언제 봐도 정말 예뻐”라며 섹슈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애마부인> 시리즈는 당시로선 과감하게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해 가감 없이 표현했고, 이것은 억눌린 부부 관계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이국적 이름을 지닌 동성 친구’ 캐릭터는 3편의 세실리( 박원숙 )을 거쳐 < 파리 애마 >(1986. 정인엽)와 <애마부인> 4편과 5편엔 다시 에리카로 이어지고, 7편에선 루비아( 박혜란 )가 등장한다. 이후에도 이 시리즈엔 항상 예술계나 화류계에 종사하는, 개방적인 여성들이 등장해 애마의 곁에 머문다. 애마에겐 항상 자유로운 삶을 사는,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솔로 친구가 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과 2편의 에리카(김애경), 3편의 세실리(박원숙), <파리 애마>의 에리카(민복기), 4편의 에리카(윤지원), 5편의 에리카(전혜성), 7편의 루비아(박혜란). <애마부인>에서 애마와 에리카의 얼굴을 교차해 보여주는 신. 에리카는 말한다. “애마야, 네 몸은 언제 봐도 정말 예뻐.” 두 여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8편 이후 두드러지며, 이전엔 ‘노골적 암시’ 수준이었다면 매우 직접적인 베드 신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남자가 점점 싫어져.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아”라는 애마의 대사가 드러내듯, 10편은 퀴어 영화에 가까운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장 인상적인 섹스 신은 9편일 듯하다. 애마( 진주희 )는 여행 중 우연희 강희( 강선영 )라는 포토그래퍼를 만나 그녀의 모델이 되고 사랑을 나누는데, 그 베드 신은 아마도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격렬한 수위일 듯. 이때 강희는 말한다. “나는 구속 당하는 건 질색이다. 그런 날,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라 비웃더군.” 호모섹슈얼리티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테마였다. (상단 좌측부터 지그재그로) <애마부인 7>의 애마(강승미)와 루비아. <애마부인 10>의 애마(오노아)와 영주(유미희). <애마부인 9>의 애마와 강희. 한편 정인엽 감독은 <파리 애마>의 유혜리와 ‘엠마누엘’ 실비아 크리스텔과 함께 <성애의 침묵>(1992)를 찍는다. 이 영화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애마부인> 시리즈는 수많은 클리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건 말 타는 장면일 것이다. 애마의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은 말을 통해, 말을 어루만지는 행동과, 말을 타는 쾌감과, 말 위에서 느끼는 속도감 등을 통해 해소되는데, 종종 이 신은 판타지로 제시되며 일종의 마스터베이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전통은 최근작인 <애마부인 2016>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남편과 트러블이 있는 은혜(류현아)는 친구 유리( 백세리 )의 권유로 승마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다. ‘말’로 상징되는 자연은, 도시에서 해소되지 못하는 욕구의 해방구이기도 한데, <애마부인> 시리즈는 바닷가나 숲 속 같은 공간을 종종 섹스의 공간으로 설정하며, 여기서 말은 어떤 매개체가 된다. 한편 이 시리즈엔 ‘도시 VS 자연’처럼 수많은 이항 대립이 존재하며, 이것은 영화 전체를 구성하는 어떤 공식이 된다. ‘결혼 VS 불륜’ ‘남편 VS 애인’ ‘애마 VS 에리카’ ‘이성애 VS 동성애’ ‘현실 VS 판타지’…. 여기서 애마는 그 경계에서 고뇌한다. 이외에도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홀로 엑스터시를 느끼거나(이때 애마는 종종 안대를 한다), 고독이 몸부림 칠 때 침대나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 등도 시리즈에서 반복되는 ‘시그니처 포즈’들. 이 모든 것이 애마의 내면적 갈망을 표현한다. 훔쳐보기 신도 마찬가지다. 애마는 카페나 술집 같은 곳에 자주 가고, 그곳에서 우연히 낯선 커플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다. 그 모습에 격정을 느낀 애마는 몸을 비틀며 스스로를 느끼는데, 이때 그런 애마의 모습을 역시 훔쳐보는 음험한 남성의 시선이 있다. 그 남자는 애마에게 접근해 섹스를 요구하고, 애마는 뿌리친다. 이런 구도는 종종 스토킹이나 강간의 모티프와 결합되어 <애마부인> 후기 시리즈에 자주 등장한다. 흥행력이 떨어지던 시기 자극적 요소로 관객을 끌려는 시도일 수도 있지만, 그 시기 창궐하던 에로 비디오의 성폭력적 요소를 받아들인 면도 있다. (계속) <애마부인>. 전설의 장면. 말이라는 상징적 존재와 무의식. 그리고 판타지. <애마부인 2>. 욕조에서 목욕을 하던 애마는 말의 판타지에 빠지고, 그 안에서 젊은 남자와 섹스를 한다. 현실로 돌아왔을 땐 침대에 마치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 <애마부인>에서 애마는 바에서 어느 커플을 엿본다. 이때 그녀를 바라보는 낯선 남자가 있다.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커플. 애마는 다리를 비틀며 은밀한 마스터베이션에 빠진다. 엿보기와 마스터베이션의 결합은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여러 번 반복된 공식이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애마부인> <애마부인 2> <애마부인 3> <애마부인 9>의 애마들. 그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는 모습은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 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