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영화
- 감독
- 정선안
- 제작년도
- 2010
알모도바르의 1997년 작 < 라이브 플래쉬 >에서 빅토르(리베르토 라발 扮)와 엘레나(프란체스카 네리 扮)가 싸울 때 텔레비전 화면에는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범죄의 리허설>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 <라이브 플래쉬>의 내러티브와 영화 속 영화 <범죄의 리허설>의 장면이 묘하게 중첩된다. 엘레나가 떨어뜨린 총이 발사되자 <범죄의 리허설>의 여자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범죄의 리허설>에는 다리가 떨어져 나간 마네킹이 나오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다비드가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범죄의 리허설>에서 마네킹이 불타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클라라(안젤라 몰리나 扮)가 빅토르로부터 결별을 통보받는 순간 불길에 갇힌다. 감독은 ‘범죄의 리허설’이 그 장면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밝힌 바 있다. 알모도바르는 <라이프 플래쉬>처럼 영화 속에 다른 영화를 삽입하여 내러티브를 중첩시키고 강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예견하게 하는 방식을 즐겨 쓴다. 이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미장아빔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문학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그의 1893년의 일기에서 가문의 문장(紋章, blason) 가운데에 문장의 축소판 혹은 비슷한 아빔(en abyme)을 새겨넣는 것과 같은 작법을 선호한다고 밝힌 것에서 착안, 60여년 뒤 비평가 매그니가 이 용어를 창안했다. 그리고 누보로망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들의 논의를 거쳐 오늘날 예술 전반에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장아빔 기법은 작품 속에 다른 작품을 삽입하여 심연에 빠지는 효과를 주거나 상호텍스트성 혹은 자기반영성을 통해 작품의 형식을 확장할 때 주로 사용한다. 알모도바르는 <라이브 플레쉬>처럼, 영화 속에 텔레비전 화면을 비추는 미장아빔을 선호한다. 이는 프레임 속에 프레임이 생성되어 영화적 심연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므로 다른 감독들도 종종 사용하는 낯설지 않은 기법이다. 그러나 알모도바르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더 개성적인 이유는 연극을 삽입하여 미장아빔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 이질적이고 낯선 연극 장르를 삽입하면 관객 사고를 영화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며 독특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극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는 연극 혹은 연극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의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그녀에게 >의 티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 페인 앤 글로리 >의 《중독》은 영화 속에 연극 장면이 직접적으로 삽입된 예다. 또한, <욕망의 법칙>,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은 연극적 세트에서 연극적 대사를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 휴먼 보이스 >는 장콕도의 《휴먼 보이스》를 각색한 작품이다. 감독의 정체성에 연극이라는 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는 바, 그의 작품은 영화와 연극이라는 이질적 타 장르가 혼재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확립된다.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 장면에는 독일의 저명한 무용가 (故)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춤연극)가 미장아빔으로 삽입되었다. 오프닝에 배치된 《카페 밀러》에서는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이 검정색 의자와 원탁, 회색 벽으로 가로막힌 무대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춤을 춘다.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남자는 여인이 달릴 때마다 필사적으로 의자와 원탁을 치우며 여인이 부딪치지 않게 보호하려고 애쓴다. 《카페 밀러》 공연장면의 롱테이크에 이어, 나란히 관람하고 있는 베니그노와 마르코의 미디움 쇼트가 연결된다. 눈을 감은 여인과 그녀를 보호하는 남성의 탄츠테아터는 코마상태에 빠진 알리시아(레오노르 와틀링 扮)와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 扮)를 돌보는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 扮)와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扮)의 모티프적 형상인 셈이다. 그리고 앤딩의 배경은 남겨진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관람하러 간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의 공연장이다. 무대 위의 초록색 풀과 그 사이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리고 무용수들의 꽃무늬 의상은 생명력 넘치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 남녀 커플로 구성된 무용수들의 춤은 오프닝과는 정반대의 경쾌한 분위기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듯한 두 남녀 무용수의 모습에서 관객은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연인으로 발전할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처럼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의 탄츠테아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압축적으로 암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카페밀러》 -눈감은 무용수의 길을 터주는 남성 《마주르카 포고》 -커플들의 경쾌한 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영화의 관통선을 갖는 중요한 연극으로 삽입되었다. 주인공 마뉴엘라(세실라 로스 扮)가 젊은 시절 이 연극을 하며 남편을 만났고, 남편이 떠나고 홀로 키워 장성한 아들과 함께 연극을 본 후 교통사고로 아들이 죽는다. 그리고 마뉴엘라는 연극의 스텔라를 다시 연기하며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영화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마뉴엘라에게 만남과 이별을 주는 애증의 매개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알모도바르는 연극을 활용한 미장아빔 외에도, 연극적 형식을 차용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한다. 비극적 전개 속에서 발리우드식 뮤지컬이 난데없이 난입하는 < 나쁜 버릇 >이나 < 하이힐 >을 보면 당혹스럽기도 하다. 알모도바르 초기 영화가 키치의 영역에 있다고 평가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이 없다면 알모도바르 영화가 아니다. 비일상적인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묘한 흥분과 긴장감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색이기 때문이다. <하이힐> 여성 수감소에서의 뮤지컬 댄스 또한, 감독은 공연이란 형식으로써 구현되는 배우와 관객, 다시 말해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로의 이분법을 연출에 활용한 것이다. <나쁜 버릇>에서 센터에 있는 키큰 금발 수감자를 뮤지컬 댄스를 통해 주목받게 하고 구경꾼들에게 그녀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게 함으로써 갑자기 내러티브에 끼어들 수 있도록 장치했다. 또한 < 귀향 >에서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부르는 《귀향》은 라이문다의 상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응축한 노래이지만, 동시에 차에 숨어 입을 틀어막고 울면서 딸의 노래를 듣는 어머니의 모습이 강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녀에게>에서 카에타노 벨로조가 부르는 《쿠쿠루쿠쿠 팔로마》 역시 영화 전반을 반영하는 슬픈 사랑 노래이면서 동시에 노래를 듣고 눈물 흘리는 마르코를 위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알모도바르는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를 모두 강조하기 위해 공연 장면을 종종 활용한다. 나아가, 감독은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 집단의 전경을 비추며 마치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페인 앤 글로리>의 극중극인 《중독》 공연장면에서 객석의 전경을 비추는가 하면, <그녀에게>의 《마주르카 포고》 공연장면에서 관람 중인 객석을 비춘다. 그밖에도 감독은 크고 작은 이벤트를 관람하는 집단의 모습을 영화에 삽입하곤 한다. <페인 앤 글로리>- 《중독》의 관객 <그녀에게>- 야외공연의 관객 감독은 관객 집단 쇼트에서 오히려 공연하고 있는 퍼포머를 측면에 위치시키고 관객의 모습을 전면에 배치한다. 영화를 관람하던 나는 관객들의 모습을 나와 동일시하며 별안간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쇼트의 주인공은 퍼포머가 아니라 관객 그리고 나다. 감독의 시선만을 쫓아야 하는 고독한 개인이었던 영화의 관객은 공연장의 관객 집단 쇼트로 인해 역동성과 시점의 자유를 제공받게 된다. 퍼포머에게 맞추어져 있던 포커스가 아웃 되고 확장된 시선을 따라 다른 관객들을 자유롭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매체적 제약은 파괴된다.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가 결코 실제로 만날 수 없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들이 만나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연극적 현장성을 고조시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장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연극을 잘 알고 쓰는 알모도바르의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영화라는 단일 장르만 사용하지 않고 연극과 연극적 형식을 활용하여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선보이는 알모도바르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혹여 그의 신작에 낯선 연극이 삽입되었다면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미장아빔으로 활용했는지 그 연극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영화와 연극의 레이어를 통해 스스로 의미의 퍼즐을 맞추며 영화를 200%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연극적 형식이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한다면 그저 이질적인 느낌 그대로를 새기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즐겁게 탐험하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다음 편은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마지막 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이 연재된다. 많은 관심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
손>은 유현목 이 1967년에 만들었던 50초 분량의 단편영화이다. 이 작품은 프린트의 소재가 불분명했으나 한국영상자료원이 2016년 5월 20일에 < 오발탄 >의 복원판과 함께 일반에 공개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 작품은 프린트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분류가 유효하려면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손>이 실험영화의 정전들로 분류되는 1960년대의 영화들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면 그런 수고를 거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작품을 보면 50초라는 짧은 길이를 감안하더라도 동시대의 실험영화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손>이 실험영화라면 어떤 개념적 정의에 따라 실험영화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손>의 타이틀 이미지 필자는 <손>과 유현목이 주도하여 1964년 1월 18일에 설립했던 전위적 단편영화 제작 동인인 “시네포엠”(시네포엠은 미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단체의 이름이기도 한데 이 글에서 단체로서의 시네포엠인 경우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고, 개념인 경우에는 별도의 표기를 달지 않도록 한다)에 관하여 두 편의 글을 쓴 바 있다. 첫 번째는 오큘로 온라인에 실었던 「유현목의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이고 두 번째는 『영화연구』 71호에 실었던 「이색적인 문화영화: 유현목과 시네포엠(1964-66)의 실험영화 개념에 관한 제안」이다. 첫 번째 글은 <손>과 관련된 공식 기록으로 신문기사에 실렸던 사실들과 당대의 정황 등을 고려하여 <손>이 몬트리올국제박람회를 준비했던 정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두 번째 글은 시네포엠이 지향했다고 하는 전위적 단편영화를 개념어보다는 지시어로 이해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들을 지칭했던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 개념이 이색적인 문화영화에 준하는 것일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손>에 관한 사실들은 첫 번째 글에서 정리해두었으므로 먼저 참고하기를 바란다). 두 글을 작성하면서 주로 검토해보았던 것은 유현목이 “시네포엠”을 결성하고 전위적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던 동기가 외부의 영향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의 문제였다. 유현목은 <오발탄>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1963년 10월 26일에 출국하여 12월 11일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8일에 “시네포엠”을 출범시켰기 때문에, 유현목이 40일이 넘는 방미 일정을 통해 실험영화를 접했고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도 첫 번째 글에서는 유현목의 방미와 “시네포엠”의 설립이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방미 일정, “시네포엠”이 설립 후 열었던 두 번의 상영회에 포함되었던 영화들,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을 일일이 따져보면 유현목이 당대의 북미 실험영화를 방미 기간에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현목은 1963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영화제 방문기에 해당하는 기사를 기고하는데, 이 기사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실험영화를 상영한다고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영화제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실험영화로 분류하고 있는 작품들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현목은 실험영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선을 국내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의 단서가 떠오르는데 시극동인회가 그것이다. 시극동인회는 1963년 6월 29일에 시, 연극, 영화, 무용, 미술 등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하여 결성되었다. 1963년 8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시극동인회의 발족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시극의 연구 창작의 발표 활동을 목적으로 한 시극동인회가 발족을 보았다. 시극의 이론, 창작, 연출, 연기, 미술, 조명, 음악 등을 연구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동인들의 모임인 동회에서는 월 1회의 정기연구 및 합평회, 연 2회의 시극에 관한 일반 공개강좌, 시극 무대공연, 동인지 시극 발간, 월 1회 이상의 방송을 통한 시극 발표 등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회에서는 제1회 8월 정기 연구 및 합평회를 24일(토) 하오 5시부터 중앙공보관에서 여는데 이인석(현대예술과 시극)의 발표와 장호 작 「열쇠장수」에 대한 합평이 진행된다. 시극동인회의 역원과 회원은 다음과 같다. 대표 간사 박용구, 창작 간사 장호, 사무 간사 최재복, 연출 간사 김정옥, 기획 간사 고원, 연기 간사 최명수, 회원 이인석, 김원태, 이흥우, 김요섭, 오학영, 박정온, 최일수(이하 생략). 이 기사를 “시네포엠”의 발족을 알리는 1964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위적인 단편영화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시네포엠」 동인회가 새로 발족. 지난 주말(18일) 하오 중앙공보관에서 발기총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시도되는 이 전위적 모임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유현목 감독을 비롯하여 수년 전부터 「시네포엠」의 주동성을 강조해온 최일수, 배석인, 김인걸 씨가 주동이 되어 발기한 것이다. 영화예술뿐만 아니라 자매예술의 각 분야에서 골고루 회원을 포섭할 예정인 이들 「시네포엠」 동인회는 연 일편이상의 작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연구발표회, 합평회 및 기관지발행을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먼 꿈은 해외의 전위적인 영화작가들과의 교류와 국제영화제의 출품 등으로 무척 화려하다. 외국의 전위영화 동인들이 불과 사(四), 오(五) 명씩 모여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데 비하면 이들의 발족은 좀 모순되는 곳도 있으나 그들의 이 활동에 일단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발기총회에서 선정된 임원과 회원은 아래와 같다. 대표 간사 유현목, 총무 간사 김인휴, 기획 간사 최일수, 제작 간사 이형표, 해외 간사 정일몽, 창작위원 황운헌, 연출위원 배석인, 연기위원 김석강, 기술위원 박익순, 미술위원 박영일, 음악위원 정윤주, 무용위원 임성남, 회원(18일 현재) 장호 노만 황운헌 최일수(이하 생략). 두 단체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일종의 종합예술을 지향하고 있고 활동의 목표와 세부 내용이 거의 같다. 또한 조직의 구성이 유사하며 회원의 이름이 일부 중복된다. 일부 자료에는 시극동인회 회원에 유현목 이름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유현목은 시극동인회의 발족 이후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단체의 성격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회원들 개개인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데,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다음으로 미룬다). 이 두 단체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은 장호와 유현목이고, 단체의 활동 목표와 미학을 정의해서 일종의 쌍둥이와 같은 관계로 만들었던 인물은 비평가 최일수이다. 최일수는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해서 주로 민족문학론과 관련한 글들을 썼다. 예외적으로 자신의 예술론을 전개하는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다루었던 핵심 문제가 시극과 시네포엠이다. 시네포엠에 관해서는 한 편의 글을 펴냈다. 『자유문학』 1961년 9월 호에 실었던 「종합적 이메지의 예술-시네포엠에 대하여」이 그것이다(1982년에 출간된 최일수의 평론집 『현실의 문학』에는 이 글이 「시네포엠과 종합적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최일수는 “시가 핵심이 된 종합적 이미지가 스크린에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시네포엠이라 하고 그것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는 시극이라 한다”고 정의했다. 그가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데 바탕이 되는 상황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시는 추상적인 소리에서 구상적인 이미지로 이행해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시가 스크린이나 무대로 진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2) 현대 사회는 개별 예술 장르들을 단독으로 두지 않고 하나의 종합을 이루도록 추동하며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3) 성격이나 형식이 전혀 다른 예술들의 종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현대시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만이 “근원적인 창조의 계기를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연극이나 영화는 모든 예술을 종합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가 지니는 근원적 창조의 계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종합을 이루어내는데 실패했다. (5) 시가 “스크린에 진출한 것”은 영화가 결여하고 있는 진정한 종합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 비추어 보면 최일수가 내리는 시네포엠의 정의는 시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 되므로 시를 통해서 개별 예술 장르들을 종합해내는 영화라고 풀어서 쓸 수 있다. 영화 대신에 무대라는 말을 쓰면 시극의 정의가 된다. 정의에 따르면 위에서 인용한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는 단체의 목적, 조직 구성 등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토록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를 어떻게 실현 가능한 방법론으로 만들 수 있는가이다. 최일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신이 제시한 시네포엠의 정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장르인 시네포엠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다. 그는 기존의 시네포엠을 “1차 대전 이후에 프랑스의 시인을 비롯한 미술가, 음악가, 영화인들이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하나로써 시도된 전연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 장르가 “현대시의 변천과 더불어 하나의 뚜렷한 양식을 갖춘 예술”로 세계화되었다고 파악했고 장 콕토, 만 레이, 폴 엘뤼아르, 기타가와 후유이코 등을 대표적인 작가로 꼽았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들의 시네포엠이 영화-시라는 단어 자체에만 치우쳐서 “영화적 수법의 시”라든가 “시적인 수법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시적인 영화라고 호칭하며 그 정의가 모호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시네포엠이 시적 형식 혹은 영화적 형식의 차용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가 주는 영상의 표출이 시각적인 상상(원문에는 이메지네이슈운)을 낳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이 곧 종합적인 광장인 스크린에 진출됨으로써 시네포엠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단어가 주는 인상을 영화로 시각화하면 그것이 시네포엠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최일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적 수법의 시, 시적인 수법의 영화, 시적인 영화 각각을 예로 들어 시네포엠과 다름을 보였다. 우선 영화적 수법의 시의 예로 장 콕토의 1920년 시집 『시 Poesie』에 실린 「첫 눈물 Premières Larmes」을 들었다. 최일수는 이 작품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을 마치 눈앞에 그리듯이 언어화했다는 의미에서 시각적인 영상의 성격을 갖고 있고 이러한 특성이 시네포엠으로 이끌어가는 계기는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각적 특성이 두드러진 시일 뿐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시적인 수법의 예로는 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의 1925년 작품 『길 위의 아름다운 결혼식 Les Belles Noces dans la Rue』을 들었다. 이 작품의 장르는 직역하면 벽장 시나리오가 되는 Closet Screenplay에 속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신조어로 레제시나리오(レ―ゼシナリオ)가 사용되었다. 영화로 만들어질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읽거나 혹은 소수의 그룹 앞에서 낭독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지칭한다. 최일수는 봉장의 작품이 시적 수법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영화적 수법의 시와 시적인 수법의 영화 각각은 시와 시나리오일 뿐이지 영화화를 전제로 하는 시네포엠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적인 영화의 예로는 오슨 웰즈의 <오델로>(1952), 잭 카디프의 <아들과 연인>(1960),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1959) 중에서 특정 장면을 뽑아 이 장면들이 “영화 이상의 그 무슨 심오한 시각적 이미지를 표상”해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 영화들에서 특정 장면들을 시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시네포엠은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존재해야 하며 시적인 장면들의 연쇄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교가 시네포엠이 영화시로 번역되었을 때 올 수 있는 개념적 혼란을 다루기 위해서, 시네포엠은 시나 시적 언어로 작성된 시나리오와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며 또한 특정 장면이 시적 인상을 준다고 해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논거를 갖출 수는 있다. 그러나 최일수의 목적은 자신이 정의 내리는 시네포엠이 고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애초에 비교 자체가 잘 못 되었다. 비교를 하려면 제르맹 뒬락, 만 레이, 한스 리히터, 장 콕토 등의 영화 작품들을 예로 들었어야 했다. 이 작가들이 1960년대 전까지 영화와 시에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교의 오류는 최일수가 시네포엠을 정의할 때 이에 상응하는 해외 작품들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식민지기에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번역된 초현실주의 문헌들이나 김기림의 시론과 관련된 글들만을 참조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최일수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해외의 시네포엠이 아니라, 국내에서 시네포엠이 이해되었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당대의 문헌들에 대한 추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네포엠”의 설립과 시네포엠의 정의가 1960년대 당시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라 식민지기 이후 국내에서 축적된 특정한 맥락에 따른 것임은 분명해진다. “시네포엠”의 설립은 당대 미국에서 형성되었던 독립적인 영화작가들의 조합과 같은 모델을 따른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19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동인지 중심의 활동이 문학, 연극, 영화 등에서 소환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시극동인회와 “시네포엠”에서 1920년대의 극복은 연극과 영화를 시를 중심으로 한 종합예술로 정의하여 이종 예술 간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단체를 대표하는 장호와 유현목이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김기림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같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과제는 김기림의 비판적 극복이라고 함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일수가 시도했던 비교에서 생각해보면, 김기림은 시와 영화를 기법의 측면에서만 접근했을 뿐 서로 다른 예술 장르로 남겨두었다면 자신들은 시를 통해 모든 예술을 종합하는 연극과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네포엠은 시가 중심이 되어 영화를 진정한 종합예술로 승격시키는 영화이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시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이 시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종합예술은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각각 독자적이면서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에서 이 두 요건이 충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손>은 짧은 내레이션과 함께 이미지가 전개되는데, 내레이션은 “There were hands in the beginning of the world”로 시작한다. 이 문구가 나올 때의 이미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There were 부분에 나오는 이미지 hands in the beginning에 나오는 이미지 of the world에 나오는 이미지 아기, 원숭이, 어린이의 손이 순차적으로 나오면서 해당 내레이션이 전개되는데, 작품의 나머지에서도 내레이션의 특정 단어들에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나온다.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든 간에 시네포엠의 첫 번째 조건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의 시각화는 충족한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결합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 요소를 굳이 찾아보면, 내레이션의 낭독이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의 낭독처럼 들린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 <손>의 내레이션은 최일수가 썼는데, 여기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최일수의 시극 이론을 생각해보면 최일수가 일종의 산문시로 내레이션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아서 <손>은 시, 이미지, 낭독을 결합해서 독립적인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손>에서 시네포엠의 두 번째 요건이 불충분했던 것이 50초라는 길이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화려한 인적 구성으로 시작했던 초기에 비해 “시네포엠”의 구심력이 약해진 시점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시네포엠”의 첫 번째 작품인 <선>을 볼 수 있어야 종합예술로의 영화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 수 있는데, 프린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시극동인회의 작품들은 기록이 보다 상세히 남아 있으므로, 종합예술의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으나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추후에 설명하고자 한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때 실험영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의미한다. 한때 유행했던 다원예술이나 최근에 등장한 융복합 예술이라는 말과 개념적으로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최일수가 시극과 시네포엠의 정의를 종합예술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에 영향력이 컸던 T.S. 엘리엇이나 장 콕토의 극복을 의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나 하필 왜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근거나 맥락 없이 예나 지금이나 예술 장르 간의 종합이라는 아이디어가 때때로 유행을 타는 결과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현목은 1970년에 변인식 , 하길종 등과 함께 전위적 영화운동을 벌이기 위해 소형영화동호회를 결성하는데, 이 시기에 언급했던 작품들이 동시대의 미국 독립영화 작품들이다. 유현목이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미국의 실험영화들을 일부 접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때 시네포엠에 준하는 개념은 아예 사라지고 취미로서의 영화 혹은 아마추어의 영화가 전면에 나타났다. “시네포엠”에서는 미학적 개념이 중요했다면, 소형영화동호회에서는 8mm와 16mm 포맷을 이용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제작방식이 더 중요해졌다. 전위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시네포엠”에서나 소형영화동호회에서나 마찬가지만, 둘 사이의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하기는 힘들다. “시네포엠”이 1920년대의 자장에 속해있다면, 소형영화동호회는 동시대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시기의 공백이 너무나도 크며, 활동에 대한 자기반성의 흔적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에서 실험영화를 말 할 때, “시네포엠”을 최초의 위치에 올릴 수 있겠지만 어떤 유산을 남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이고 갑작스런 전환들의 공백 사이를 최대한 메꾸어 보려는 노력이 한국에서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전위와 실험이 어떻게 자리바꿈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 이 글은 현재 작성 중인 논문의 일부를 추려서 실은 것으로, 시극동인회나 김기림에 대해 빠진 설명들을 포함하여 추후에 논문으로 낼 예정이다. 영화-시에 관한 전반적인 정리는 Fil Ieropoulos가 쓴 < Film Poetry: A Historical Analysis >에 잘 되어 있고, 참고문헌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최일수가 일본을 통해 수입되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제시나리오나 이론들은 Christophe Wall-Romana가 쓴 Cinepoetry: Imaginary Cinemas in Frech Poetry(Modern Language Initiative, 2013)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시극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이나 연극학 분야에서 축적되어 왔는데, 이현원, 「최일수와 장호의 시극 인식에 대한 연구」, 어문론집, 64, 2015를 참조하면 추가적인 자료들을 쉽게 따라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