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습
- 감독
- 김예슬
- 제작년도
- 2011
갑자기 왜 난데없이 그 자리에 < 우상의 눈물 >이 나타났는지는 알겠다. 단지 임권택 의 목록만을 따라온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난처하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당신의 난처함을 알고 비통한 웃음을 짓게 된다. 성급하고 딱딱한 도식화. 직선적인 설명. 하지만 임권택의 영화들은 종종 우리들을 한국영화의 상황 앞에 데려다 놓은 다음 우울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시스템의 압력과 경제적인 결정과 검열을 경유한 배제와 제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는 목록들의 위태로운 질서가 숨어있다. 임권택에게 상황은 (...)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금지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대신 (...)을 해야 한다, 라는 요구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화라는 시스템을 사이에 두고 다양한 관계들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일한 시스템.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임권택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영화에는 그런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토대 위에서 각자의 작동방식을 발명한 사람들이 있다. 간명한 비교의 예. 김기영은 자기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유현목은 그것을 만들지 못했다. 지금, 적어도 지금 한국영화에서 홍상수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시스템을 만들었다. 내게 이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할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빨리 원래의 시작에로 되돌아가자. 만다라(1981) 임권택 은 그때 < 깃발 없는 기수 >와 < 짝코 >을 완성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 만다라 >의 촬영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세상이 그의 영화를 아직 눈여겨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임권택의 영화는 충만하고 있었다. 그건 < 우상의 눈물 > ‘다음’을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영화 다음은 일정에 쫓기면서 (심지어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와 ‘가께모찌’로) 찍은 < 안개마을 >이다. <우상의 눈물>은 임권택이 시나리오 송길한 , 촬영 정일성 과 하나의 팀을 이룬 두 번째 영화이다. 그들은 이미 손발을 맞춰 본 다음이다. 그리고 그의 조감독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곽지균이었다. 하지만 <우상의 눈물>에는 임권택과 송길한, 그리고 정일성이 함께 있을 때만 만들 수 있었던 어떤 마법도 없다. 나는 여기서 없는 것을 채우거나 혹은 그것이 왜 없는지를 찾는 대신 이의신청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하나의 불가능. 그런데 왜 그것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일까. <우상의 눈물>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어떤 불가능을 증언하는 영화이다. 물론 그것을 끌어내기 위하여 과도하게 전기적 사실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문제에 다가가면 모든 담론을 망칠 것이다. 그 대신 여기서는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표현 불가능성의 어떤 영역이 때로 경험 불가능성과 연결 지어진 것은 아닐까, 라는 순간과 마주할 때의 당혹스러운 시간이 있다. 나는 그 시간과 마주하는 것을 오랫동안 미루어왔다. 일종의 블랙홀.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고유한 자리를 설정할 때가 왔다고 용기를 내보고 싶다. 왜냐하면 명백히 임권택은 그 불가능성에 대해서 자기 영화를 통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한국영화사는 1974년 ‘이후’를 영상시대 동인들의 시대라고 문서화한다. 물론 < 별들의 고향 >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 바보들의 행진 >과 < 영자의 전성시대 >가 그 뒤를 이었다. 그 영화들이 비평 담론을 만들어냈으며 이장호 , 하길종 , 김호선 , 홍파 가 충무로에 새로운 물결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벌어진 일이 단지 그 하나뿐일 리가 없다. 나는 지금 그 하나 곁에 있었던 다른 하나,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다른 하나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긴급조치 9호 발령 당시 신문 잠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1974년 1월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통과되자마자 5월에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하였다. 그 이듬해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해체하고 공연윤리위원회를 설립하여 그 악명 높은 이중검열을 시작하였다. 단지 검열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 제작사들이 통합되었고 운 나쁘게도 바로 그때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한 텔레비전은 한국영화의 가장 힘겨운 시기와 맞물렸다. 텔레비전은 값싼 시청료로 매일 저녁 제공하는 올 스타 드라마와 막 시작한 프로 야구로 대중을 매혹시켰다. 여기에 시장의 반지성주의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서방세계에서 누벨바그가 시작되었을 때 사실상 한국 극장은 그 흐름의 외곽으로 이탈한 다음 완전히 두절되었다. < 네 멋대로 해라 >는 보았지만 < 히로시마 내 사랑 >은 볼 수 없었다. < 카비리아의 밤 >은 펠리니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 태양은 외로워 >는 안토니오니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 소매치기 >는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서울에서 베리만과 파졸리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영화에 관한 담론들은 부정확한 정보에 의지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개념의 대상에 관한 근거로 다루는 영화를 볼 수 없었으며 그러면서 점점 관념화되어갔다. 더듬거리는 개념의 손짓, 진부한 사유를 때려 부술 수 있는 기회의 상실. 무엇보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게토가 되어갔다. 경찰국가와 다름없는 상황. 창백해진 대중, 문화는 검열관의 가위 아래 무자비하게 잘려나가고 있었다. 어른들은 극장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이때 극장을 메운 것은 경제활동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거의 경제적인 자율적 결정에 사실상 여유가 없었던 도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들과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여기서 1970년대 후반의 영화 관객에 관한 해설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논점이 아니다. 거의 교집합이 없는 두 개의 관객 집단 중에서 내가 지금 건드리려는 것은 교복이라는 기호를 입은 중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을 미성년자라는 말로 다시 번역하는 것은 1970년대 남한 자본주의를 잘못 설명하는 것이다. 그때의 서울, 구로공단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개미소굴과도 같은 거대한 노동현장은 값싼 노동인력을 미성년자들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노동법이 거의 작동하지 않은 그 시간에 이 무자비한 착취는 근대라는 과정 속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미성년자는 1970년대 남한에서 노동인구와 학생으로 그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분화되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교복은 그때 하나의 기호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감시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받았다. 물론 감시와 보호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때 학교는 사회로부터 그들을 방어하는 동시에 관찰하는 하나의 칸막이가 되었다. 교복을 입은 그들은 그 안에서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지식의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도 무자비한 서열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일정한 제도 기간이 끝나면 시험의 당락 여부와 관계없이 교복이라는 기호를 박탈당하고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핵심은 그때 학교 안과 바깥을 완전히 분리시킨 다음 ‘하이틴’ 혹은 ‘틴에이저’들의 독립된 세계인 것처럼 학교를 낭만적 유토피아로 각색해냈다. 물론 그것은 자기 최면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기제가 작동할 것이다. 그 깊은 밑바닥에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 중심 산업에로의 진입을 장기적으로 준비시키면서 제도의 학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자발적 복종의 규율이 반복적으로 요구되었다. 여고졸업반 (김응천, 1975) 열거한 항목들을 정식화시킬 차례이다. 어른이 철수한 극장은 새로운 관객을 찾고 있었다. 1975년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8월 23일 토요일 종로 낙원상가에 자리한 허리우드극장에서 < 여고졸업반 >이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뜻밖의 세 가지 효과를 거두었다. 첫 번째 효과. 중고등학생들은 경제적인 결정 외부에 놓여있지만 그들의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은 영화를 선택하기에 충분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여고졸업반>은 이 세대가 한국영화 수입구조에 진입하기 시작한 첫 번째 영화로 기록해야 한다. 나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반대로 이 세대가 21세기 한국영화에서 완전히 빠져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상상해보라. 그때는 어떤 배급업자도 웃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효과, 교복을 입은 관객을 목표로 한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제작 단계에서부터 제작자들과 감독을 예민하게 만든 검열로부터 마치 안전지대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중고등학생 관객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목표로 만든 영화에서 폭력과 섹스, 혹은 사회에 대한 문제를 확인시켜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단지 그들은 모르는 척할 뿐이다. 좀 기괴한 표현이지만 그들은 착한 관객의 역할을 했다. 이 영화들은 단체관람이 아니라 자발적인 관람을 통해서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중고등학생 관객들이 1970년대 후반에 일시적으로 왜 이런 집단 심리적 동의를 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들은 근본적으로 낭만적 유토피아의 꿈을 꾸는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장르이다. <여고졸업반>의 성공 이후 < 진짜 진짜 미안해 > < 진짜 진짜 좋아해 > < 진짜 진짜 잊지마 > 삼부작, ‘얄개’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세 번째 효과가 가장 이상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하이틴’ 영화들은 1979년 10월 26일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박정희가 사라지면서 이 장르의 효용성이 다하기라도 한 듯 사라졌다.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 장르의 대표적인 세 감독 김응천 , 문여송 , 석래명 은 거의 동시에 여기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들의 흥행의 마술도 사라졌다) 그래서 마치 여기에 전도된 사회의 낭만적 우울이 잘못된 충만함으로 가득한 채 투사되었다가 그 매듭이 풀린 순간 일시적으로 와해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시적인 마법의 매듭. 그런 다음 풀려나기의 반복. 과도할 정도로 낭만적인 이 세계는 단지 사회로부터 격리된 것일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의 생활세계와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동요의 호소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물론 그것은 그들도 가져본 적이 없(을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토피아적인 세계이다. 「우상의 눈물」 그런 의미에서 < 우상의 눈물 >은 약간 시대착오라고 여겨질 것처럼 뒤늦게 만들어졌다. 물론 그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소설인 전상국 작가의 <우상의 눈물>은 계간 세계의 문학 1980년 봄 호에 게재되었고 영화가 이듬해에 만들어졌으니 단지 원작 소설과 영화의 관계로만 보면 발표하자마자 만들어진 셈이지만 이미 주변에서는 아무도 ‘하이틴’ 장르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 <우상의 눈물>이 문단의 주목을 모으긴 했지만 영화사가 관심을 가질만한 베스트셀러는 아니었고 (게다가 단편소설이다) 임권택 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상국 작가는 그 전해에 발표한 「아베의 가족」이 훨씬 흥미롭게 여겨졌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아베의 가족」은 한국전쟁 중에 낳은 벙어리인 아베를 버리고 이민을 떠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결국 <우상의 눈물>을 만들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하이틴’ 영화는 이 영화 한 편뿐이다. 만일 주인공의 나이로만 셈을 하면 < 낙동강은 흐르는가 > 한 편이 더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두 영화의 주연은 모두 진유영 이다) 하지만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학도 의용군에 관한 전쟁영화이다. “원작이 좋았지요. 한 학급에 이야기를 몰아넣고 어떤 사회에서나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게다가 원작자가 고등학교 선생이었기 때문에 믿고 갈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차지했지요” 시나리오 작가인 송길한 도 다른 자리에서 거의 입을 맞춘 것처럼 같은 대답을 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촬영을 한 정일성 도 거의 이견이 없었다. “이건 권력에 관한 이야기이지 고등학생들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한번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을 한 거지” 임권택, 정일성, 송길한 우선 이 세 사람의 한계를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누구도 1970년대 고등학교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정일성 은 192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다음 거기서 자랐다. 그는 해방 전후에도 거기 남아있었다. 거기서 도쿄 제2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1951년에 서울에 와서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정일성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임권택 은 해방 직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부모님의 빨치산 입산으로 고통받는 나날이 되었다. 그가 알고 있는 고등학교는 어른들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통제 불가능 상태가 되어버린 집단이었다. 그들은 빨갱이 부모를 둔 임권택을 불러내 뒷산에 데려가 린치를 가했고 지금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백색테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어른들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무덤 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삶. 임권택은 어느 날 밤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고등학교에 관한 경험은 그날 밤 거기서 끝났다.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송길한 은 1940년생이다. 그의 고등학교 경험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직후였다. 게다가 그가 다닌 학교는 전라북도에서 우등생들만이 입학한 전주고등학교였다. “그저 공부만 한 거예요. 그래서 얼른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가는 것만이 효도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지요. 집안 어른들이 모두 그렇게 말씀하셨고, 게다가 고향에서만 자랐으니 세상을 모르잖아요. 전쟁이 끝나고 거기 뭐가 남은 게 있었겠어요” 그런 다음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1960년 4월의 봄을 맞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고등학교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는 단지 학교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차이만큼 벌어져 있다. “사실 < 우상의 눈물 >을 찍을 때 고등학교 입학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왜냐하면 내가 관심이 없으니까,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니까, 그냥 신문에 입학시험을 본다,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그때는 내가 결혼을 하기 전이니 더 모르는 거죠. 그래서 전상국 작가의 경험만 믿고 간 거죠” 전상국 작가가 교사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며 물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변수가 있다. 춘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라고 내게 반문할 것이다. 그때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행정적으로 매우 괴상하게도 전국에서 동시에 적용된 것이 아니라 서울과 일부 도시에서만 먼저 적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전학을 둘러싼 매우 복잡한 조건이 따라붙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단지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제도의 행정적 차이 때문에 서울과 춘천의 고등학교는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는 학교가 되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려도 할 수 없다. 소설 <우상의 눈물>을 읽고 있으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를 (서울에서 같은 시기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임권택 혹은 송길한이 믿을만하다고 말한 전상국 작가의 경험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본의 아니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 우상의 눈물 >은 괴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되었다. 그들이 < 여고졸업반 > 혹은 < 진짜 진짜 미안해 >로 설명되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유토피아적 낭만주의의 허구를 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고등학교라고 부르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임권택 , 송길한 , 정일성 은 처음부터 그 세계로 들어설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들 방식의 또 다른 완전히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우상의 눈물>이 사실주의 미학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고등학생들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목표를 세운 영화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약간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왜 교복의 기호가 필요해졌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어른의 세계에서 훨씬 설득력 있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와야만 이 이야기가 성립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야기의 다른 차원에로의 이동이나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교정 불가능성이 버티고 있다. 먼저 일차적인 대답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좀 더 현실적인 근거. 세경흥업 영화사가 이미 성공을 거둔 ‘하이틴’ 장르 영화를 여기서 복습하고 싶었다면 임권택에게 이 영화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임권택의 쓸모를 잘 알고 있었다. 충무로는 감독들을 분류하였고 그런 다음 그들을 관리하면서 올바르게 배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임권택은 로맨스, 혹은 코미디에서 성공한 적이 없는 연출자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세경흥업은 여기서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했다. 다른 무언가? 영화사는 <우상의 눈물>이 ‘하이틴’ 영화가 아니라 ‘문예’ 영화라고 (아마도) 생각했다. 그들은 원작(의 흔적)을 남겨놓아야만 했다. 흔적으로서의 기호. 하지만 여기서 임권택과 송길한 자신이 이 이야기에 매혹되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들은 < 만다라 >를 만들고 나서도 이 영화를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다라>는 임권택이 평생에 단 한 번 영화사에 “이 소설은 내가 꼭 좀 만들어야겠다”고 말한 유일한 영화이다. 그들은 <만다라>를 찍은 다음 함께 <우상의 눈물>을 찍겠다고 결정했다. 거기서 무엇을 찍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두 번째 대답이 중요해진다. 이야기의 개요. 먼저 소설의 판본을 따르겠다. 나는 차이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세부까지 건드릴 것이다. 이야기의 화자(話者)인 학생 유대는 같은 반의 재수파라고 불리는 패들에게 끌려가 담뱃불로 지지는 린치를 당한다. 단지 “메시껍게 군다”는 게 이유의 전부이다. 몇 차례 유급을 한 최기표가 이끄는 이 무리들은 반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새로 학년이 바뀌고 담임인 김 선생은 유대를 불러 최기표와 재수파 아이들의 정보를 얻으려 반장을 제안하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친구인 형우에게 떠넘긴다. 형우는 반장을 맡은 다음 “학급의 학내 등수를 올리기 위해 친구들을 도외주자”면서 우등생들을 불러 모아 최기표를 비롯한 열등생들에게 커닝 페이퍼를 건네주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시험 도중에 커닝 페이퍼를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에게 고자질한 것은 최기표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어떤 개새끼야?”라고 소리마저 지른다. 그때 형우가 일어나 “제가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우등생들이 차례로 일어나 서로 자기가 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감독 선생은 “여러분의 우정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말한다. 세 개의 같지만 서로 다른 말. 순식간에 이 말의 네트워크를 따라 예상치 않게 작동하는 힘의 이동. 유대의 예상대로 형우는 최기표와 재수파 일당에게 불려가 린치를 당한다. 몹시 심하게 당해서 전치 2주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다. 하지만 유대의 예상과 다른 것은 형우가 자신이 시비를 걸어 싸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누가 린치를 가했는지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병문안을 간 유대에게 형우는 의미심장하게 이제 재수파는 끝났다고 알려준다. 학교로 돌아온 형우는 아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된다. 하지만 형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이들에게 최기표의 가난한 집안 사정을 낱낱이 말하면서도 이야기를 미화시켜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지 몰랐고 그러니 우리가 반성의 의미로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고 웅변 한다. 최기표는 매일 초라해져갔고 형우의 말 대로 더 이상 그의 주변에서 부하 노릇을 하는 재수파는 남아있지 않았다. 담임선생은 이걸 방송국에 알리고 세간에는 유명한 인정 미담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최기표는 그 언젠가부터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그가 여동생에게 남기고 간 편지 맨 앞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첫 장면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야기의 중심을 약간 애매하게 만들었다. 유대를 그냥 남겨놓긴 했지만 영화에는 화자가 없다. 이야기의 소개에는 그게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은 사악한 인물들의 관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최기표는 단지 폭력을 휘두르는 불량배일 뿐이다. 형우는 똑똑하지만 교활하고 집단의 심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그는 자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어떻게 최기표와 재수파 아이들을 무너트려야 할 줄 잘 알고 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지나치듯이 말하지만 최기표에게 일말의 연민도 없다. 유대는 비겁하게 자기에게 온 짐을 슬그머니 라이벌인 형우에게 떠넘긴 다음 야비한 자신의 태도를 숨기면서 그가 겪을 곤경을 구경할 참이었다. 유대가 화자로 설정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담임선생은 이들 사이의 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 둘을 이용하여 학급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력을 쌓을 궁리만 한다. 말하자면 마지막 순간에 가까워지면 우리는 최기표가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내 이름은 권달호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야기의 외곽에 위치하다시피 한 담임선생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그를 주인공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 반대로 유대는 성격을 잃은 다음 거의 이야기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담임선생인 김 선생에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권달호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름이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연상시키거나 아니면 이야기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권달호는 이 학교에 새로 부임했으며 전국에서 그가 담임을 한 반이 여러 차례 우수학급으로 선정되어 우수교사로 표창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3학년 8반을 우수학급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래서 학습 진도가 부진한 반 학생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시험 준비를 시킨다. 권달호는 시간을 내서 가정방문을 하고 그들의 방과 후의 사연을 알고자 노력한다. 여기에는 어떤 나쁜 의도도 없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부당한 요구나 불미스러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권달호가 권위주의적이긴 하지만 그에겐 선한 의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 우상의 눈물 >이 계몽적이거나 따분한 유토피아 버전의 동화에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은 제도에 복종하는 권력의 위선적인 각색이 아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소설에서 다룬 교육 현장의 교사의 태도를 견디지 못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그들은 소설에 비친 거울을 마주 보지 못한다. 무언가 유보시켜야 할 현실.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완곡한 저항. 전상국 작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려낸 담임의 학급관리 기법. 더 엄밀하게 기법의 태도. 그들은 여기서 후퇴를 해야만 했다. 학급 안에서의 권력의 오작동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김 선생을 권달호의 자리까지 끌어올려야만 가까스로 이야기를 마주 볼 용기가 생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들도 이 이야기가 일종의 모델에 가까운 상징적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3학년 8반은 사실상 사회를 예습하는 일종의 통과제의에 가까운 수업 시간의 공간화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이때 권달호는 담임선생이라기보다는 스승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 그건 무슨 차이가 있나요? 3학년 8반은 근대적인 교육 제도의 기구(의 일부)라기보다는 학급을 관리하는 주인의 권위와 의무에 의해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교실은 규율 공간의 규칙에 따라 표준화되고 평균화 되는 대신 권달호의 이름으로 새로운 규율이 정해지고 요구된다. 근대 제도로부터 유교적인 가치가 담임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장소로서의 교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교실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형식으로 권달호와 학생 사이의 거리를 다시 조정한다. 권달호는 자신의 역할을 교실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설에서 김 선생은 최기표의 집을 방문할 생각이 없다. 권달호는 힘겹게 달동네를 찾아간다. 김 선생은 자기 반 학생들의 성적에 별 관심이 없다. 권달호는 아무런 조건 없이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자기 집에서 합숙을 시켜가며 가르친다. 권달호는 종종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학생들을 관리한다. 이때 권달호의 말은 3학년 8반 교실에서 법이며 명령이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여기서 권력이 오작동을 일으킨다고 가정한다. 최기표 이 차이의 간극은 두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소설에서는 미숙하지만 이미 어른들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3학년 8반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여기서 담임선생은 이 규율 제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제도의 수행자들은 최기표를 교정하는 대신 최기표라는 폭력의 기호를 무효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고 나간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면서 은밀하게 공모하고 있는 김 선생이나 형우는 최기표가 교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믿음도 없다. 그래서 최기표(와 그의 재수파)가 반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경유한 힘을 무효화시키는 전술을 사용한다. 유대는 형우에게 물어본다, “넌 지금 네가 기표를 구원했다고 보니? 기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네가 구원하고 있다고 말야” 그러자 형우가 대답한다. “그건 기표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같은 말의 다른 말. 그건 대상이 생각할 일이 아니야. 소설에서 최기표의 대사는 커닝 페이퍼를 감독관 선생에게 이르는 말 이외에는 전혀 없다. 그는 시종일관 대상으로 머문다. 최기표를 목표로 하여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는 한 번도 주인의 자리에 오지 못한다. 힘의 네트워크 안에서 대상의 추락. 그것을 목표로 한 전술의 수행. 그래서 최기표가 반에서 빈칸이 되었을 때 누구도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않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향한다. 이야기의 표면만을 보면 영화와 소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영화가 최기표를 교정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때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서 대상의 자리에 놓여있던 최기표에 대한 탐구로 옮겨간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준비가 되어있다. 소설에는 단지 없다기보다는 최기표의 일상생활 자체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래서 최기표가 방과 후에 무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종종 이야기의 진행과 별 상관이 없는데도 최기표를 따라 이야기 바깥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순수한 악마라고나 할까요” 주목할 만한 첫 번째 차이. 소설에서 최기표는, 그 주변의 재수파 아이들의 증언을 빌려 형우가 유대에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걔들이 모두 나한테 말했다. 기표는 악마라고, 자기들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영화에서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은 기표의 2학년 담임이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올해 담임이 된 권달호 선생이다. 그때 전하는 말은 조금 다르다. “놈은 순수한 악마라고나 할까요” 그 말은 선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앞에 놓인 생선 아구의 커다란 입을 보여주는 장면과 연결된다. 이때 나를 멈추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순수한, 이다. 악마가 순수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학년 담임선생은 최기표에게 선한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으며 교정될 수도 없는 무한정한 거리의 간극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쪽은 대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는다. 그때 권달호 선생이 흥미를 느끼는 것은 순수한 악마의 순수성에 흠집을 어떻게 낼 수 있을 것인가, 에로 이끌린다. 한 가지 더, 그 말에 붙여놓은 아구의 벌어진 아가리가 두려운 모습이기만 하지만 그것이 음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악마를 요리하기.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라는 전미래적 이미지. 두 번째 차이. 이 말을 하는 인물의 자리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말을 최기표와 같은 반 학생인 형우와 유대가 나눌 때 그 둘에게 이 말은 그들의 전술의 대상에 대한 정보이자 평가이다. 그런데 형우와 유대도 최기표와 같은 반 학생이다. 그들은 한 학급 안에서 최기표를 경험하고 있고 이미 그와 재수파의 린치를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각자 경험했다. 그런데도 형우와 유대는 경험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재수파 아이들의 고백을 빌려 최기표를 설명한다. 그때 최기표는 알 수 없는 대상이자 동시에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사악한 대상의 자리에 던져진다. 우리는 그를 알지 못했어요, 게다가 알고 보니 그는 더 나쁜 인간이었어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를 벌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이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했다. 형우와 유대는 자신들의 전술에 대한 실행을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말을 담임선생의 자리에 놓게 되면 단지 자리를 바꾼 것만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위쪽으로 옮겨진 다음 내려다보게 된다. 내려다보는 말. 그들은 “순수한 악마”를 내려다보는 중이다. 이 자리는 학교라는 제도에서 학생과 선생이 지니는 관계의 위계질서 안에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악마를 내려다보는 자리는 신의 자리가 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저 멀리서 근대적 제도교육을 외피로 두른 유교 교육의 절대적 권위와 폭력적인 강제성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세 번째 차이. 이제 맥락을 살펴볼 차례이다. 소설에서 형우와 유대의 대화는 거의 모든 사건이 모두 벌어진 다음 형우가 최기표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직전에 나온다. 이 말은 형우가 자신의 전술이 흡혈귀를 상대로 거둔 승리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거만하게 대상을 축소하는 수사적 포획에 다름 아니다. 상대방을 흡혈귀의 자리에 보낼 때 자신의 승리는 이미 예정된 것이다. 약점으로서의 흡혈귀. 자신은 이 흡혈귀를 물리칠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걸 알고 있는 한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 이것은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라 경멸의 수사이며 이제 마지막으로 가하게 될 일격에 부여하는 정의로운 정당성의 부여에 다름 아니다. 이때 형우는 자신의 잔인함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도 떨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2학년 담임 선생님과 권달호 선생의 대화는 영화 거의 앞부분에 나온다. 우리는 아직 최기표가 어떤 학생인지 알지 못한다. 이때 2학년 담임 선생님의 말은 소개에 가깝다. 이 소개는 우리들을 권달호의 자리로 데려간 다음 최기표를 관찰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미 같은 학급의 학생들은 최기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의 누군가는 이미 불려가서 린치를 당했고 그걸 오랫동안 지켜본 모두들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순수한 악마” 최기표에 대해서 임권택 (과 송길한 )은 부정적 이미지를 기대한 우리들을 배신하고 갑자기 그를 의협심 있고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친구들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인물로 보여준다. 최기표는 자기 학교 학생이 이웃 학교 학생에게 매를 맞자 그에게 요구한 것도 아닌데 구태여 그 학교에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복수를 한다. 이 에피소드는 (아마도) 임권택에게 인상 깊은 경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24년 뒤에 만든 < 하류인생 >의 앞부분에서 태웅은 자기 학교 학생이 맞고 왔다고 이웃 학교에 찾아가 상대방을 불러내 응징을 한다. “순수한 악마”라고 소개된 최기표가 그런 희생적인 수행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에 대해서 순수한, 이라는 수식어와 악마, 라는 정의가 서로 만나서 만들어내는 어떤 감흥에 매료되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최기표와 김두한(< 장군의 아들 >)과 태웅(<하류인생>)을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태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 동일한 인물처럼 다루고 싶다. 좀 더 이상한 것은 소설에서 최기표의 주변 인물은 맨 마지막 대목에 담임을 찾아오는 병든 어머니가 전부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최기표 곁에 대학생 애인 혜원이 등장한다. 대학생 혜원이 왜 유급을 거듭하고 학교에서는 학업을 사실상 포기했으며 폭력배 무리들인 재수파를 끌고 다니는 고등학생 최기표에게 이끌려 애인의 역할을 하는지는 영화 안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다. 혜원은 재수파의 아이들과 달리 자발적으로 그의 곁에 애인으로 머무는 중이다. 그런데 <하류인생>에서도 거의 동일한 상황에 놓인 고등학생 태웅에게 대학생인 혜옥이 이끌리고 그 둘은 결혼을 한다. 아마 혜원과 혜옥은 상대방에게 거의 동일한 감흥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야기에서 혜원이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비밀을 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기를 기대한 우리에게 아무런 사연도 없다는 것을 알려줄 때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대학생 애인 혜원은 오로지 최기표를 수사하는 인물에 머물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겼을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전상국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남겨놓은 상태에서 최기표를 형우와 유대, 그리고 담임의 포획 가능한 대상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인물에로 점핑 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이야기는 동일한 결말을 맞지만 그 둘은 완전히 반대가 된다. 소설에서 최기표가 무단결석이라는 방법으로 학교에서 사라질 때 그것은 도피로 읽힌다. “(...)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기표의 자리가 빈 것을 알았다. 다음 날도 그는 결석을 했다. 무단결석이었다. 담임선생이 한 아이를 기표네 집에 보냈다. “집에도 없어. 이틀 전에 집을 나갔데” (중략) 기표가 내리 사흘이나 결석을 한 아침나절이었다” 최기표의 “병색이 완연해 뵈는” 어머니가 담임을 찾아온다. 그 어머니를 “내쫓듯 교무실에서 밀어”낸 다음 담임선생은 형우와 유대에게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던져준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전문이 길기 때문에 발췌하듯이 원작에서 빌려왔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아마도 그는 더 나쁜 상황에로 추락할 것이다. 반대로 영화에서 최기표는 형우와 담임이 쳐 놓은 계략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탈출한다. 그래서 임권택 은 최기표가 학교를 뛰쳐나가는 장면을 찍었다. 그 날 방송국에서 최기표와 그를 돕는 반 아이들을 찍기 위해서 방문할 예정이었고 아이들은 모두 들떠서 기표에게 한마디씩 던진다. 그들은 무례하게 말하면서 기쁜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때 최기표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집어 던지고 공책을 찢어서 아이들에게 뿌린 다음 교실을 뛰쳐나간다. 정일성 은 뛰쳐나가는 최기표를 용의주도하게 따라가는 척하다가 교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창문 앞에 카메라를 세운다. 그때 창문에는 쇠창살이 걸려 있어서 교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미 여러 차례 교실을 외부에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들여다보면서 감옥처럼 찍었다. 그 창문 안쪽에 앉아서 그걸 지켜보다가 고개를 떨구는 유대의 얼굴을 다가가서(zoom_in) 바라본다. (S#_1) 최기표는 학교를 벗어나서 있는 힘을 다해 길거리를 뛰어간다. 그때 그가 막 지나치는 길거리에는 ‘보호구역’이라는 공사 현장의 표시판이 보인다. 학교라는 ‘보호 구역’. 여기는 정말 ‘보호구역’이었을까. 그런데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역’이었을까. 최기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이 표시판을 지나쳐 간다. 아마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S#_2) 권달호 선생은 교무실에서 3학년 8반 교실로 들어왔을 때 상황을 알게 되고 아이들에게 최기표를 찾아오라고 소리친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나갈 때 반장 이유대는 권달호 선생에게 “최기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면서 최기표가 남기고 간 공책을 건네준다. (S#_14) 거기에는 “혜원아 무섭다, 혜원아 무섭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라고 쓰여 있다. (S#_15) 유대는 꾸짖듯이 권달호 선생에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고발한다. 나는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선택인지에 대해서 단순하게 대답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차이는 단지 최기표를 중심으로 옮겨 놓았다거나 아니면 최기표를 주인의 자리에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최기표는 중심으로 이동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최기표가 이야기의 주인의 자리에로 재구성되지도 않는다.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최기표를 끝내 굴복당하지 않는 대상으로 다시 만들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전상국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의 작동방식을 완전히 인정하면서도 최기표를 전리품으로 삼는 승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의 제도. 전체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장치. 그걸 완전히 와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그럴 생각이 없다. 권달호는 조금도 나쁜 의도를 지닌 적이 없다. 그는 충실하게 이 장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형우와 유대는 숨겨놓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그들만의 악의적인 기쁨을 위해서 권달호를 돕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이 정의라고 믿으며 그걸 행하는 것이 자신들이 배운 것을 실행하는 의무라고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를 굴복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이 원작소설을 선택한 이유가 이 이야기로부터 최기표를 구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마저 갖게 만들 지경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황당무계한 상상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필요해진 것일까. 여기서 반복의 학습과 대면해야 한다. 학습이라고 했나요? 그렇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학습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임권택은 학습하고 다시 학습한다. 물론 배움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의 확장의 과정이지만 동시에 나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네트워크의 공동체 안으로 (약간 위험한 말이긴 하지만) 주체를 밀어 넣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젝이라면 (라캉을 경유하여) 훨씬 근사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결론만 빌려온 다음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다. 말하자면 동일성의 거대한 그림자. 이 그림자는 너무 무겁고 두터워서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반복의 재종합화라는 까다로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텍스트로부터 빠져나와 다소 기이하게 위장된 네트워크 사이에서 마주치는 불가능성이라는 자리에로 옮겨가야 한다. 나는 이미 시작하자마자 임권택의 영화에서 표현불가능성이라는 영역이 경험불가능성이라는 시간의 말소 안으로 들어선다는 말을 했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을 말하면서 잘 설명되지 않은 이 개념은 이따금 임권택의 영화 전체를 위기에 빠트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어떤 위기? 임권택은 자기 앞에 놓인 기호가 공동체 안에서 자의적인 가능성의 세계를 열려고 하는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그의 세계는 수축되고 종종 그만큼 앞으로 나아간 것을 포기하기조차 한다. 계산 바깥에 있는 그 무엇. 그런데 예술에서 성질의 공동체란 가능한 표현일까. 이때 임권택은 이따금 실패를 계산에 넣고 불가능성의 셈을 치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임권택은 공동체를 벗어난 질서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표현불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떤 결정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할 때가 있다. 그때 너와 나, 라는 차이의 구별 대신 우리라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해결되는 공동의 시간성이라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임권택 (과 송길한 , 그리고 정일성 )은 < 만다라 >를 막 찍고 난 다음이었다. 그들은 그때 여러 가지로 한국영화가 가지 않은 길을 밀고 나아갔다. 무엇보다 임권택은 그 이전에 그렇게 관념적인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었다. <만다라>를 미학적인 방법으로만 접근했을 때 임권택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마주쳤던 정신적인 이미지들의 기호, 그 기호들이 불러일으키는 한순간의 새로운 사유가 무언가 재현의 위기를 끌어들인다는 의심이 거기에 있다. 임권택은 경험불가능성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이미지의 위기라는 사실을 잘 아는 연출자이다. 여기서 연출자라는 말을 구태여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들여다본 영화들의 실패가 모두 거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이다. 나는 약간 과감하게 말해보고 싶다. 영화에 대한 태도로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적어도 어느 순간부터 임권택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로셀리니의 전통에 합류하였다. 내가 지금 떠올리는 것은 로셀리니가 잉그리드 버그만과 찍은 네 편의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재현은 언제나 세계에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아니, 거기 머물러야만 한다. 재현이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때 그건 덫에 걸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는다. 임권택에게 재현은 삶의 한 방식, 생명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만다라>는 세계로부터 연을 끊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경험의 고독함. 소승불교의 길. 하지만 세계 안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야만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무의미하다면 어떻게 거기서 영화를 더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공(空)의 이치를 따져 묻는 예술이 아니다. 임권택은 재빨리 가장 진부한 질서 안으로 되돌아와 안심하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어떤 회귀, 거의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공동체 안으로의 복귀. < 우상의 눈물 >은 임권택(과 송길한, 정일성)에게 실패의 상처가 아니라 안심의 표지이다. 우리들은 너무 멀리 간 것일지도 몰라요, 그러면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들은 이 영화가 실패할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로 되돌아옵시다. 세상의 속된 관심. 한국영화가 겪는 어떤 수난. 그 안. 임권택은 종종 남들이 모두 하는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만행 길을 마치고 온 동료들과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세계는 전상국의 소설이 아니라 충무로의 동료들이 만들고 있는 하이틴 로맨스의 장르 안이었다, 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기표 옆에 머물고 있는 여대생 혜원의 존재를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우상의 눈물>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클리셰를 끌어들인 다음 할 수 있는 진부한 방식으로 그것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둔다. 이때 혜원이라는 장치가 만들어내고 있는 도식의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혜원을 여고생으로부터 여대생으로 층위를 옮겨놓은 순간 그녀를 최기표가 착취할 수 있거나(이미 지적한 것이지만 환기하자면 소설에서 최기표는 자신의 주변 패거리들을 착취하고 있다) 반대로 구원할 수 있는(영화에서 최기표는 자신의 학교 학생이 다른 학교 학생에게 구타당하자 마치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듯이 그걸 복수하러 간다) 구도로부터 완전히 빼낸 다음 일정한 거리만큼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좀 더 간단하게 최기표와 혜원은 서로 다른 생활의 시간,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영역에 머물고 있다. 여기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들) 사이의 차이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차이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와 혜원을 수평으로 놓는 대신 비스듬하게 엇갈려 배치한다. 이때 혜원은 다른 어떤 인물과도 교제가 불가능해진다. 오직 최기표의 애인으로서의 자리만이 주어진 혜원은 <우상의 눈물>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모든 가능성의 배제. 형우와 유대가 최기표를 공격 목표로 삼고 있지만 여기서 혜원은 모든 계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녀는 형우나 유대에게 어떤 관심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형우나 유대도 혜원과 어떤 접촉의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는다. 만일 혜원이 여고생이었다면 송길한은 왜 그녀가 모범생인 형우나 반장인 유대에게 이끌리지 않는지를 설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혜원이 그들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도 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영화에 로맨스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반대로 그렇다면 형우와 유대가 최기표에게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왜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지를 설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만일 형우와 유대의 최종목표가 혜원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견디기 힘들만큼 음란하거나 사악해졌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임권택(과 송길한)은 그 이야기를 참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유급을 한 최기표에게 혜원은 애인이지만 형우와 유대에게 혜원은 누나의 자리라는 넘기 힘든 선을 이미 설정하고 시작한다. 이상한 셈법. 되풀이되는 불가능성. 혜원 이번에는 재빨리 돌아와 끝내 완결될 수 없는 셈을 할 차례이다. 그러므로 이건 이상한 셈법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 우상의 눈물 >은 < 여고졸업반 >이나 < 진짜 진짜 미안해 >와 같은 구도 위에 있으면서 다르다. 가장 상투적인 설명. 하이틴 로맨스 장르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과정은 그들의 로맨스가 일시적인 시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들은 성공적으로 그들의 시련을 이겨내고 성인들의 사회로 진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때 그들에게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미루는 것뿐이다. “우리 대학 갈 때까지만 참자”라는 마법적인 문장. 그런데 그들이 미루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마음껏 연애할 수 있는 사회, 좀 더 외설적인 판본은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사회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토피아 안에 있으면서도 그걸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척)한다. 물론 그들은 학교를 벗어나자마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금방 배울 것이다. 리비도는 계급적 분화 과정 앞에서 훨씬 제도적인 통치를 받기 시작할 것이다.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이틴 로맨스가 끝나고 나면 학교 바깥에서 성인들의 눈물과 비탄으로 가득 찬 저 가혹한 멜로드라마와 전쟁터의 알레고리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홈드라마의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김응천 과 문여송 , 석래명 도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다만 그들은 애써 그걸 외면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졸업한 이후를 찍을 생각이 없다. 여기까지는 잘 알겠다. 그때 이 장르 안으로 들어오면서 임권택 (과 송길한 )은 하이틴 로맨스라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걸 보여주면서 이 장르의 결함을 드러내 보여주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음에 틀림없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전상국의 소설을 경유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사라는 체험 안에 담겨있는 경험주의. 경험 안에서의 형상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진부한 이야기의 앙상한 무대를 마주 보게 만들어서 그 안에 담겨있는 낯선 현실을 마주 보게 만들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전술을 < 길소뜸 >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거의 아무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거의 아무 것도 구성되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교복이라는 기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을 할 차례이다. 나는 이 논의를 위해서 다소 긴 우회를 하였다. < 우상의 눈물 >이 < 여고졸업반 >이나 < 진짜 진짜 잊지마 >와 완전히 공유하는 것은 교복이라는 기호이다. 이 영화에는 사복의 세계가 없다.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교실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이따금 학교 바깥에 나갈 때조차 모든 등장인물들은 마치 다른 옷이 없다는 듯이, 이것이 하나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라도 하듯이, 차라리 교복을 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 기호 안에서만 활동한다. 흥미롭게도 <우상의 눈물>의 첫 장면에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아침 조회를 위해 학생들이 운동장에 누가 누군지 전혀 구별할 수 없는 검은 교복을 입고 수없이 많은 검은 점처럼 서 있는 모습이다. 우글거리는 교복의 기호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교복의 기호들로 이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루어지는 기호들은 단지 외양에 멈춘 것이 아니다. 교복은 상징이 아니라 표시이며 제도의 기입이다. 이 기호들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문제. 말하자면 교육. 권달호 선생은 3학년 8반이라는 기호의 구역을 책임지고 교실에서 그들에게 자신의 교육은 “자율이며” 이 교실을 배에 비유한다. 얼핏 보면 여기까지 소설과 영화는 동일한 진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도 김 선생은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이때 임권택(과 송길한)이 간과한 것은 교복의 기호들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상국이 이야기의 시작을 교복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장에서 시작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담임 김 선생을 외곽에 배치하고 이야기를 형우와 유대 사이의 심리적인 대결로 진행시키면서 교복들의 기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관찰한다. 담임선생과 반 아이들의 만남의 장면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그걸 바라보는 자리이다. 전상국은 담임선생과의 첫 만남을 유대의 자리에서 지켜본다. 유대는 담임선생의 첫인사를 “완숙한 연출가는 배우 스스로가 연출하도록 유도하는 비결”을 가진 것처럼 “단 며칠이면 허물어질 아이들을” 상대로 “가슴 부풀리며 앉아있게” 만드는 “대단한 담임선생”을 만나게 되었다고 “우습게” 생각한다. (전상국의 소설에서 순서를 다소 바꾸었다) 교복의 기호들은 그 안에서 재빨리 분화하기 시작한다. 기호로부터 기호를 바라보기. 기호들과 기호의 외곽. 기호의 경계선. 담임선생은 대상에 머물면서 그의 모든 행동은 유대에게 관찰의 자리에 머문다. 기호의 고정점. 그것이 세상에 대한 상징적인 매트릭스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서는 그다음 문제이다. 전상국은 끝까지 담임선생이 기호들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임권택(과 송길한)도 담임선생 권달호가 기호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실패했음을 (심지어 전상국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실패의 광경은 완전히 다르다. 소설에서 (반복하자면) 담임선생은 “편지 하나를 꺼내 우리에게 내던졌다.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 맨 앞줄에 이렇게 씌어있었다. -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소설에서 담임선생은 최기표의 편지를 먼저 읽었고 그걸 “우리들 앞에” (여기에는 ‘우리들’이라고만 되어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유대는 포함되어 있지만 형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던져줄 때 우리는 그 편지의 문장이 무얼 의미하는지 담임선생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최기표의 편지는 담임선생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 편지는 담임선생을 우회하여 유대(와 우리들)에게 배송된 편지이다. 아마 담임선생은 최기표의 편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임권택(과 송길한)은 완전히 반대의 배송 경로를 따라 전달한다. 최기표는 자기의 노트에 “무섭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는 문장을 여동생이 아니라 혜원에게 쓴다. 이 수신자는 가족으로부터 애인에게로 옮겨가면서 갑자기 이 편지의 네트워크를 하이틴 로맨스의 장치 안으로 옮겨놓는다. 하지만 이 문장이 담겨있는 노트의 오작동이 기다리고 있다. 최기표는 그 노트를 반 아이들에게 집어 던진 다음 뛰쳐나간다. 그들 중에서 그 노트를 혜원에게 전달할 준비가 된 친구는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기호 안에 던져진 메시지. 그때 노트를 집어 든 사람은 유대이다. 그런 다음 그 메시지의 올바른 수신자가 담임선생 권달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더해서 최기표의 노트를 전달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지는 기호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이면서 기호들 전체를 대표하는 대문자 메시지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이야기를 기호들 사이의 차이의 세계로부터 교복이라는 단일기호로 환원시켜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과정으로 바꿔 쳤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하게 이야기의 일반경제학에 따라 교환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기호들 사이의 차이의 정치경제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이 결론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간 것이다. 유대를 외곽으로 보내고 담임선생 권달호를 따라갈 때 이 결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런 다음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야기의 축을 담임선생 권달호와 기호들 사이의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최기표 사이의 대립의 구도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이야기가 규율권력에 관한 도식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것을 지나치게 빨리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대치시켜 버렸다는 의심이 든다.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순간은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나타난다. 최기표의 노트를 읽은 담임선생 권달호는 정확하게는 칠판을 향해 기대어 서서, 하지만 프레임의 구도상으로는 우리를 바라보고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라고 중얼거린다. 그게 우리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구도상의 이유로 그렇게 찍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영화는 여기까지 그런 구도로 찍은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갑자기 시간을 건너뛴다. 권달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의 동료는 커피숍에서 만나 다시 복직하기를 권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권달호가 최기표를 통해서 어떤 배움을 얻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만일 최기표의 메시지의 최종 목적지가 담임선생 권달호가 된다면 이 배송의 네트워크는 완전히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최기표의 메시지가 담임선생 권달호를 목표로 작성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기표는 반복해서 형우와 유대에게 자신의 노이즈를 전달했고 그것을 다시 메시지로 반송하려든 과정에서의 전술과 권력의 관계가 이 기호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기표가 자기의 메시지를 여동생에게 전달한 다음 담임선생을 경유하여 유대(와 우리들) 앞에 도착한 것은 정확하게 난 너희들의 전술을 잘 알고 있어, 라는 응답의 암호이다. 그것이 담임선생에게 읽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기호들 사이의 권력의 문제이다. 그런데 유대가 그걸 수신하는 대신 다시 담임선생인 권달호에게 떠넘길 때 그 메시지는 기호들의 네트워크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이때 이 영화는 거의 아무것도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기표의 메시지의 수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권달호는 동료와 헤어진 다음 두 번째 약속 상대를 만난다. 그 상대는 혜원이다. 나는 그 둘이 왜 만났는지 설명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최기표를 만나러 갈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준다. 그러자 권달호는 혜원에게 자신이 최기표를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최기표가 혜원을 향해서 쓴 노트가 전달되었는지는 여기서 (그리고 끝내) 알 수 없다. 다음 장면은 부산 영도다리 앞 공장에서 일하는 최기표를 보여준다. 그 둘은 데이트를 하면서 최기표가 내년에는 검정고시를 볼 결심이라는 말을 한 다음 끝난다. 하지만 혜원은 권달호가 그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지는 않는다. 최기표도 권달호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혜원이 권달호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권달호는 마치 괄호처럼 사라진다. 그렇게 해서 최기표가 노트에 쓴 메시지가 한 바퀴 돌아서 마치 최기표 자신에게 반송된 것처럼 마주 보는 장면을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표정이다. 아니, 그 말은 옳지 않다. 우리는 그 표정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최기표와 혜원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유히 최기표는 영화에서 빠져나간다. 아무것도 구성되지 않는 네트워크 속에서 메시지의 배달이 결국 실패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최기표는 자기 앞으로 쓴 메시지를 재귀 대명사처럼 수신한다. 물론 두 명의 최기표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학교 안에서 교복을 입었을 때의 최기표와 공장에서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은 최기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다른 행동을 한다. 어쩌면 비로소 최기표는 혜원과 수평적인 자리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처음부터 혜원을 수직 상승시킨 자리에 배치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지도 모른다. 이걸 성립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최기표는 복잡한 셈을 요구하지만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미 할 이야기는 다 했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그저 에필로그처럼 슬그머니 다룰 뿐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교복이라는 기호의 네트워크로부터 이탈한 이 메시지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메시지는 기호들의 네트워크 안에서만 활동하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하나의 불가능성이라는 상황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임권택이 마주해야 할 위험천만한 세계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가능세계는 현실로부터의 역산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나는 < 만다라 >를 다루면서 다시 이 문제와 만나게 될 것이다. 임권택이 난국을 해결하는 방식. 이 언저리에 놓인 심연. 나는 지금 그 어두운 심연 주변을 얼씬거리고 있는 중이다. (계속) 1981년 10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사 각본 송길한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김희수 음악 정민섭 진유영 박근형 김범기 이구순
“내, 실은 눈멀기로 말하면 타고난 놈인데, 그 얘기 한번 들어들 보실라우? 어릴 적 광대 패를 첨보고는 그 장단에 눈이 멀고, 광대 짓 할 때는 어느 광대 놈과 짝 맞춰 노는 게 어찌나 신나던지 그 신명에 눈이 멀고, 한양에 와서는 저잣거리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엽전에 눈이 멀고, 얼떨결에 궁에 와서는... 그렇게 눈이 멀어서... 볼 걸 못보고,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 가는 걸 못 보고. 그 마음이 멀어져 가는 걸 못 보고. 이렇게 눈이 멀고 나니 훤하게 보이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도 그걸 못보고... 그건 그렇고! 이렇게 눈이 멀어 아래를 못 보니 그저 허공이네, 그려. 이 맛을 알았으면 진작에 맹인이 될 걸.” 한탄인지 푸념인지 아님 깨우침인지. 장생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처연하면서도 담담한 이 대사는 영화의 모든 걸 아우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절대 권력자인 왕도 마음껏 누리지 못한 자유와 신명으로 세상을 풍자하고 조소하던 광대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을 담아낸 이 영화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한민국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2006년 초 < 왕의 남자 >가 < 실미도 >와 < 태극기 휘날리며 >를 넘어 1,230만명이란 초유의 관객동원 신기록을 세웠을 때 모두가 놀랐다. 연출자인 이준익 은 < 황산벌 >이 성공했지만 아직 감독보단 제작자 및 영화수입으로 더 유명했고, 주연배우들인 감우성 , 정진영 , 강성연 은 스타급 흥행배우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게가 떨어졌으며, 이준기 는 완전 신예에 불과했다. 원작인 연극 <이 爾> 역시 2000년 초연 당시 각종 상을 휩쓸며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지만, 엄연히 연극의 흥행과 영화의 흥행은 다르기에 이 정도 파괴력을 보일 것이라 예측한 이는 드물었다. 아니 사실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천만 영화는 강우석 과 강제규 란 검증된 흥행사가 만든 딱 두 편에 지나지 않았으니.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한 무오사화 즈음을 배경으로 전통적인 소리가 가득한 마당극에, 소학지희가 펼쳐지고,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까지 어느 것 하나 흥행할 요소라고 감히 말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와 ‘왕남폐인’들을 양산하며 흥행광풍을 불러왔는지 모른다. 가히 <왕의 남자> 신드롬이었다. 7개월 뒤 < 괴물 >에 의해 다시 순위는 바뀌었지만 <왕의 남자>는 < 7번방의 선물 >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적은 제작대비 최고 흥행수익을 올린 영화로 남아 있다. 음악을 맡은 이병우 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괴물>과 < 해운대 >까지 연이어 천만 영화를 터트리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음악가 중 한명이 되었다. 포크듀오 ‘어떤 날’의 멤버이자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그는 1994년 오스트리아 빈 국립 음악대학을 수석 졸업한 이후 1996년 < 그들만의 세상 >을 필두로 영화음악에 뛰어들었고, 미국 피바디 음악원을 졸업한 이후 2001년 애니메이션 < 마리이야기 >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영화계 행보를 이어나갔다. 2003년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와 < 장화, 홍련 >의 잇단 성공으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호러와 코미디, 가족물과 음악영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과 독보적인 멜로디 감각을 선보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왕의 남자>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사극으로, <스캔들>이 기존의 전통적인 국악 스코어에서 벗어나 바로크 시대의 챔버 사운드를 들고 와 사극에 새로운 시각과 독특하고 세련된 양식미를 부여했다면, <왕의 남자>는 그 챔버 스트링 앙상블을 유지하되 대금이란 전통악기를 전면에 내세워 보다 한국적인 색채와 스타일의 절충을 꾀하고 있다. 대금은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어두운 음색의 저취와 평취, 그리고 선 굵고 장쾌한 음색의 역취에 이르는 세 가지 음역대에서 변화무쌍하면서도 맑고 여무진 소리를 들려주는 악기다. 따라 장생과 공길, 연산이라는 복잡다단한 세 캐릭터의 슬픈 사연을 한데 엮어낸 선율을 연주하기에 더없이 탁월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이병우와 그가 음악을 한 영화들 영화에서 가장 처음 마주치는 오프닝 크레딧의 ‘프롤로그-먼길’은 바로 그 대금의 맑지만 투박한 음색을 확인할 수 있는 큐로, 토속적이면서도 처연한 감성을 담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메인 테마인 ‘반 허공’이 변주된 곡인데 이는 이후 ‘돌아올 수 없는’, ‘세상 속으로’, ‘행복한 광대들’, ‘꿈꾸는 광대들’과 ‘에필로그?돌아오는 길’ 등으로 영화 내내 이어지며 길목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위치해 극을 관망하고 정서적인 통일감을 부여한다. 특히나 반복적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저음의 첼로는 광대들의 목숨을 건 풍자와 연산의 피비린내 나는 황음무도, 처선의 절개와 녹수의 질투를 한데 모아놓은 - 불안하고 비통한 심리의 선율로, 하나같이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잔혹한 운명을 상징한다. 이 위에 얹은 아름답고 서글픈 멜로디만이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준다. 여러 테마를 사용하기보다 간단하면서도 다양한 변주를 통해 심리적인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그의 스코어들은 명료한 상징과 장치적인 효과를 갖는다. 주된 선율을 생략한 채 조심스런 감정을 드러내는 ‘연정’이나 주제부를 단순화시켜 연산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림자놀이-봉황은 울지 않는다’, ‘자궁 속으로’ 같은 큐들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밖에 ‘인형놀이’나 ‘반정의 북소리’처럼 간단한 타악 리듬으로만 그 상황의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불길한 조짐의 ‘파적심의 울음소리’나 ‘장생의 외침’과 같이 질주하는 스트링과 파열음의 대금, 강렬한 퍼쿠션을 조성해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신디 프로그래밍이 가미된 ‘광대 사냥’의 경우는 마치 제리 골드스미스나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를 듣는 듯 정석적이고 장르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연극과 달리 영화는 장생의 시점으로 극을 이끄는데, 이를 위해 이병우는 특별히 극 후반 장생의 테마를 배치했다. 처연하고 구슬픈 대금의 ‘눈먼 장생’이 바로 그 곡이다. 절제되고 담백한 메인 테마 ‘반 허공’과 달리 이 곡은 절절하고 거칠게 한(恨)을 토로하는 아름답고 강렬한 선율을 가졌다. 이 선율이 흐르며 장생은 지난 과거를 반추하며 지금의 심적/육체적 고통을 승화시키고, 이 선율이 흐르며 공길은 연산에게 반 허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연을 나타내는) 줄 위는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반 허공이라고. 결과적으로 ‘눈먼 장생’과 ‘반 허공’은 대비되면서도 서로 이어진 이란성 쌍둥이와 같은 테마인 셈이다. 이 곡은 이병우가 직접 장생의 심정을 담아 작사한 주제곡 ‘가려진’으로 장재형이 불러 사운드트랙의 맨 첫 트랙에 실렸다. 시종일관 광대놀음의 풍물패 소리와 궁중음악이 깔리지만 그럼에도 이병우의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큐들은 적재적소 빈 여백에 효과적으로 자리 잡아 내러티브와 캐릭터의 감정선에 밀접하게 연계돼 유기적인 호흡을 들려준다. 길이나 분량과는 다른, 밀도의 위력이다. 그간 이병우 영화음악에서 두드러진 건(물론 뛰어난 멜로디와 좋은 편곡의 힘도 무시 못 하지만), 감정과 경이의 순간을 포착한 놀라운 공명감이었다. 그 날카로운 울림이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고 가슴을 아리게 만들며 짙은 여운을 남겼다. 기타 디자이너로 직함을 늘리며 잠깐 동안 영화계에서 멀어진 이병우는 2013년 가을 세 번째 사극 < 관상 >으로 다시 영화음악가에 복귀한다. 이전의 두 사극과는 또 다른 한국적 울림과 아름다운 멜로디로 무장해 관객들의 감성적인 약점을 치밀하게 파고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왕의 남자> 사운드트랙으로 미리 예습을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사운드트랙은 영상자료원(K-0038)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이선희의 ‘인연’은 <왕의 남자>의 주제곡이 아니다. ‘인연’의 뮤직비디오에 <왕의 남자> 클립이 쓰였을 뿐이다. 따라 사운드트랙에서 그 곡을 찾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Track List 1. 가려진 - 장재형 2. 먼 길 3. 각시탈 4. 돌아올 수 없는 5. 너 거기 있니? 나 여기 있어 6. 세상 속으로 7. 위험한 제의 하나 8. 행복한 광대들 9. 내가 왕이 맞느냐? 10. 위험한 제의 둘 11. 꿈꾸는 광대들 12. 수청 13. 인형 놀이 14. 연정 15. 그림자 놀이 -봉황은 울지 않는다 16. 피적삼의 울음소리 17. 광대사냥 18. 광대의 죽음 19. 어서 쏴 20. 질투 21. 장생의 분노 22. 내가 썼소 23. 애원 24. 장생의 외침 25. 눈먼 장생 26. 자궁 속으로 27. 반정의 북소리 28. 반 허공 29. 돌아오는 길 30. 반 허공 Guitar Version
.... (계속) 그리고 임권택 은 < 안개마을 >을 찍기 위해서 재빨리 오던 길을 돌아왔다. 다행히도 아직 첫눈은 내리지 않았다. “원래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찍은 것도 속초에서 시작해서 삼척을 거쳐 도계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길을 찍고 난 다음 <안개마을>을 찍으러 돌아오면 된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냥 두 개가 서로 겹치면서 그게 그렇게 안 된 거요. 그때는 우수영화가 되면 외국영화 쿼터를 주었잖아요. 화천공사에서는 한편 찍으면 그걸로 우수영화 넣고 그게 되면 하나 수입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날짜가 막 쫓기고 그러니까 거의 포기하면서 박종찬 사장이 내가 있는 데서 들으라고 에이, 다 틀렸네, 그러면서 짜증을 내는 거요. 그래서 나도 오기가 생겨서 아, 그거 찍으면 될 거 아뇨, 하고 촬영에 들어간 거요. 처음엔 20일 정도면 찍을 거라고 생각했죠. 시나리오를 보면 계산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촬영을 12일 만에 마치고 눈이 내리는 걸 기다리는데, 거기서 눈이 오는 장면이 꼭 있어야 하는데, 그게 또 안 내리는 거요, 그냥 거기서 또 열흘을 논 거요. 날짜가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 그걸로 편집해서 검열을 넣고, 나중에 다시 내려와서 눈 내리는 장면을 보충촬영해서 바꿔 넣은 거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구태여 우회할 필요가 있을까. <안개마을>은 순식간에 찍은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걸 느낄 정도이다. 영화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즉흥연주 하듯이, 마치 세션을 벌이듯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맨 처음에는 이문열 의 단편소설 <匿名의 섬>(이문열은 이 소설의 제목을 ‘그렇게’ 썼다) 이 있었(을 것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 1982년 봄호에 발표한 고작 17장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물론 작품의 깊이와 길이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고작, 이라는 말을 한 것은 이 길이의 단편 소설로 장편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영화 쪽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놀라움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먼저 보았고 그런 다음 소설을 읽었다. 말하자면 반대의 순서. 두 개의 텍스트. 두 개의 작품.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반대의 방향. 임권택 에서 이문열에로, 영화에서 소설에로.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둘은 서로 전혀 다른 활동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을, 물론 반대로 말하는 것도 항상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도 이 짧은 단편소설이 1시간 31분 동안 계속되는 영화보다 훨씬 길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지금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길다는 말조차도 바보 같은 설명이다. 소설에서 지속되는 독서의 시간을 영화에서 제한된 물리적 관람의 시간과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둘 사이에 놓인 차이를 소설과 영화, 혹은 이문열과 임권택으로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독서의 장소에서 내가 보낸 시간과 영화의 시간에서 내가 바라본 시간 둘 사이의 불일치, 이쪽과 저쪽 사이의 명백하게 드러난 효과의 경계를 자꾸만 희미하게 지워나가는 분산, 그저 드러난 차이 바깥에서 활동하는 차이, 그 사이에 놓여있는 어떤 나선, 때로 알 수 없는 긴장관계의 효과, 거의 피할 수 없을 만큼 저쪽이 이쪽을 끌어당기는 텍스트 안에 내재한 요구들과 제약들, 그것들이 중얼거리는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형식 혹은 움직임에 대해서 따라가 볼 생각이다. 이문열 의 시작. (소설) “쯧쯧......” 늦은 저녁을 마친 뒤 TV를 보고 있던 남편이 한심한 듯 혀를 찼다. 짐작한 대로 화면에는 두 손이나 옷깃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린 남녀들이 경찰서 보호서 한구석에 몰려 있는 모습이 여러 각도로 잡혀 있었다. 도박인가 싶었으나 비밀 댄스홀이었다. 대낮인데도 어둑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다가 끌려왔다는 것인데, 아나운서는 ‘춤추다’라는 말 대신 남녀가 몸을 부비고 있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분위기를 더욱 부도덕하고 선정적(煽情的)인 것으로 이끌고 있었다. “도대체가 우리 시대는 너무 쉽게 익명(匿名)이 될 수 있어서 말이야” 남편이 그걸 보며 개탄조로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인가 들은 말이어서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어림잡을만 했다. 도회에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부터 버스 정류장 하나만 벗어나도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 손쉽게 자기를 감출 수 있다는 것, 즉 익명성(匿名性)의 획득은 사람들을 대담하게 만든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도덕적 타락, 특히 여성들의 성적(性的) 부패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남편은 대개 이런 식으로 몰고 가다가 결론은 그가 자린 고향의 동족부락(同族部落)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맺곤 했다. “면(面) 전체가 서로서로를 물밑 들여다보듯 아는 사이지, 그것도 태반은 멀건 가깝건 혈연으로 묶여있어, 여자들의 탈선이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일이야, 가끔씩 읍내를 이용해 보지만 그것도 이르든 늦든 알려지게 되어 있어.....” 하지만 남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게는 무슨 반발처럼이나 떠오르는 옛 일이 하나있다. 마땅히 남편에게 죄스러워하고, 어쩌면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만, 지금은 물론 그때조차도 그저 아득하기만 한 하던 십여년 전의 일이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시작이다. 영화에는 이 대목이 전부 없다, 물론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오면서 어떤 페이지는 남아있고 어떤 페이지가 사라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문열 과 임권택 은 같은 이야기 안에서 시간을 다른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막 저녁을 먹고 난 그 어느 날, 아마도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 곁에서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뉴스 시간. 그걸 보며 남편이 혼자 하는 말을 들으면서 아내는 십여 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나는 이 문장을 영화적으로 다시 옮겨 쓰고 싶다. 즉각적으로 번역되는 첫 번째 인상. 마치 새어나가는 듯이 다른 삶의 시간 속으로의 도피 기계가 작동하는 장면. 이 말의 방점. 장면, 혹은 광경. 남편의 부주의한 시선. 아마도 등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활동하기 시작하는 아내의 은밀한 기억의 시간.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한 배치. 마치 스크린 앞에서 화면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 그것이 꼭 묘사적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손에 붙잡힐 것만 같은 문자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남편 곁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떠올리는 플래시백의 형식 안에서 진행되는 기억의 시간이다. 이미 몇 번 들은 말이라면서 어림잡아 그 뒷말을 알 수 있을 만큼 남편은 이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청각의 신호에 관한 두 가지 설명. 남편은 면 전체가 물밑 들여다보듯 아는 사이일 뿐 더러 대부분 혈연으로 묶인 고장에서 자라났으며. 지금 도회에 사는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앞 대목이 사라지면서 남편의 향수도 영화에서 함께 지워졌다. 내게는 두 번째 설명이 훨씬 중요해 보인다. 아내는 남편 바로 곁에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지금 십여년 전의 일, 아직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기 전, 그때 ‘군청 소재지에서 육십 리 가까이 떨어진, 그것도 그 너머에는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높고 험한 재를 두 개나 넘어야 하는’(소설) 산골에 자리한 국민학교(이 소설에는 초등학교를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에 재임하던 시절, 깨철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듯이 ‘그와 한 차례 정사(情事)를 즐긴’(소설) 사건을 떠올린다. 같은 말의 반복. 남편 곁에서 떠올리는 다른 남자와의 섹스. 하지만 남편에게는 비밀스럽게 떠올리는 시간. 그때 그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몸을 내맡긴다고? 그렇다. 자기 자신 말고 그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낯선 몸.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몸에 관한 이 은밀한 기억의 시간. 그런 다음 몸의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 마치 남편의 장소로부터 멀리 달아나기라도 하듯이 소설은 한 줄을 띄어 쓴 다음 (소설) ‘그해 이른 봄 갓 교육대학을 졸업한 나는 굳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어느 시골학교에 첫 부임을 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그때 그 시간으로 뛰어넘는다. 대차대조표. 임권택은 결혼 ‘이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이문열은 결혼 ‘이후’의 자리에서, 십년도 더 지난 일을, 마치 그리워하듯이, 말을 꺼내들기만 하더라도 어림잡을 만큼 자주 듣는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사건의 장소로 달려간다. 왜 그녀는 그 순간마다 깨철과의 그 일, 그 시간, 그 사건 안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그녀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 아니다. 혹은 그 시간을 다시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시간 안으로 단숨에 뛰어들려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보존된 시간. 시간 안에서 살아남은 기억. 두 개의 시간의 계열. 나는 이 말하여지지 않은 부부 사이의 공백을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남편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고향의 동족부락 속에서만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공동체의 성적인 관계라면 (그것이 설혹 다른 동네에서였을 지라도) 지금 남편이 아내의 비밀을 미루어 짐작하고 알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두 번째 설명에 덧붙여진 주의를 기울일만한 지적. 이때 이문열이 건드리는 ‘익명성의 획득’은 단지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짧은 단편이긴 하지만 단 한 구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남편과 아내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문열은 슬그머니 도회의 익명성과 ‘군청 소재지에서 육십 리 가까이 떨어진’ 산골 마을을 겹쳐놓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내의 이름을 그녀가 부임한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수옥이라고 일러주고, 남편의 이름은 한수옥이 편지를 쓰면서 (보이스 오버로) 영훈, 이라고 호명한다. 나는 이것이 단지 진행상의 기능적인 요구나 편리한 설명을 위해서라고 믿기 어렵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임권택은 이문열의 소설 안에 들어간 다음 맨 먼저 소설의 이야기가 작동되는 방식을 일단 중단시켰다. 사라진 시간적 거리의 간격. 영화에는 현재라는 안전한 방어선이 사라졌다. 소설에서 수옥은 아무리 위험한 지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저 간단하게, 상상을 중단하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수옥은, ‘사방을 둘러싼 산들은 일평생 나를 가두어둘 거대한 감옥의 벽처럼 느껴졌고, 저만큼 보이는 백여호(戶) 정도의 마을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폐촌(廢村)인 것만 같은’ 장소에 도착한 다음 내내 거기서 진행된다. 물론 수옥의 보이스 오버가 눈앞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화면을 과거에로 데려간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송길한의 각색 속에서 보이스 오버의 대사들은 현재와 과거 사이를 에매하게 만들고 있다. 소설 제목 <匿名의 섬>에서 영화 제목 < 안개마을 >로 옮겨왔을 때 이문열 에서 임권택 으로 그저 단순하게 이동할 수 없는 교란이 거기 개입하고 있는 두 개의 판본 사이에서 오가는 망설임이랄까, 어떤 선택이 읽기와 보기 그 둘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틈 안으로 들어와 그 충돌의 어디에 내가 놓여있는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에서 ‘匿名의 섬’은 깨철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 중략) 깨철은 혈연이나 인척으로 속속들이 기명화(記名化)된 그 마을에 유일하게 떠도는 익명(匿名)의 섬이었다, 라고 설명한다. 소설은 수옥이 깨철이라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관찰한 다음 그와 (... 중략)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그날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는 소설에 없는 이미지를 불러 온다. 종종 이 마을은 안개 속에 숨어버린 것처럼 그 윤곽을 감추어버린다. 단지 그것은 기후만의 성질이 아니라 수옥에게는 이 마을 전체의 사람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공모랄까, 서로 간의 비밀을 공유한 채 안개 속의 마을처럼 그 모습을 바깥사람에게는 드러내지 않는다. 수옥은 이 마을에 와서 떠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특별하게 친해지지 않으며, 이야기 속에서도 (깨철을 제외하고) 어떤 인물이 다른 인물들보다 더 중요해지지 않으며, 그들 모두가 수옥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거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풀려버린 교집합.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갈 때 여기에는 반복을 중단시키는 회로가 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수옥은 이 마을의 국민학교에 부임한 다음 삼년이 조금 지났을 때 사표를 내고 그러고 나서도 (... 중략) 그런데 워낙이 머릿수를 맞춰둔 교원이라 내가 그날로 떠나버리면 그동안 맡아오던 학급은 후임자가 올 때까지 수업을 중단할 형편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사흘이나 더 기다려 후임자와 맞교대를 하고서야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다, 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수옥의 목소리를 빌려 voice_over_narration) “부임한 지 사 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군에서 제대한 영훈씨로부터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나는 그와의 결혼식을 위해 사표를 내고 동족마을과 작별을 하게 되었다” 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물론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약간 더 앞으로. 소설은 남편과의 연애 과정을 이 짧은 소설에서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 두 사람이 언제 만났으며, 그런 다음 언제 약혼을 했으며, 양가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그러고 나서 둘이 여행을 가서 나누었던 내밀한 시간까지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난 다음 남편은 입대를 했고 월남 전선에 차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이 설명이 모두 없어지고 단지 남편과 함께 여행을 가서 한 침낭 안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장면만을 짧게 플래시백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라진 시간.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무엇이 남고 무엇이 없어졌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 남아있는 시간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설명만큼 반대로 거기서 사라진 시간이 비워놓은 채 활동하는 설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장면을 건드려볼 것이다. 먼저 소설 속의 문자를 건드리고, 그런 다음 영화 안의 쇼트들을 마찬가지로 그렇게 건드려볼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둘을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효과의 형식과 의미의 힘을 만져보려고 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상상보다 멀 수 있다. 생각과 상상의 차이. 문자 안에 감추어진 승인된 전략들. 쇼트들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그것을 끈질기게 재전유하려 들 때 우리들은 두 개의 모델,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의 시작. 이문열 의 소설. (... 중략) 그 사이 함께 내린 두어 명의 승객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후여서 나는 가까운 가겟집에나 물어볼 양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너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나는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내 눈 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갈 정도였고,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좀 전의 그 강렬한 빛 같은 것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검고 깡마른 얼굴에 우뚝 솟은 코와 광대뼈-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다시 피부를 찔러 오는 것 같은 그 빛을 느꼈다. 이내 몽롱한 광기(狂氣) 속으로 숨어들어버렸지만 분명 그의 두 눈에서 쏘아져 나온 빛이었다. 어떤 무성한 숲길에 들었을 때, 그 잎 새에서 뱀을 보면 그것은 그 숲길을 다 지나갈 때까지 공포이다. 그러나 그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의 감정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 또는 묘한 기대와 같은 것으로서, 무사히 그 숲길을 빠져나오고 나면 일종의 허전함이나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사내의 두 눈에서 얼핏 비쳤던 그 빛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내 그런 느낌을 일순의 착각으로 만들어 준 것은 갑자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주인 남자였다. “깨철이 이노마야, 니 아까부터 거기 앉아 뭐 하노?” (중략... )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S# 20 S# 21 S# 22 S# 23 S# 24 S# 25 S# 26 임권택 은 이 장면을 26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버스가 마을 가게 앞에 도착하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수옥이 내린다. ( S# 1) 내린 수옥이 둘러보지만 ( S# 2) 수옥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S# 3) 심지어 이 동네가 마치 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처럼 가게 안에도 아무도 없다 ( S# 4) 수옥은 동네에 인기척을 느껴보기라도 하듯 두리번거리다가 ( S# 5) 갑자기 한쪽 마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한 사내, 깨철을 발견 한다. 수옥이 깨철을 다소 의아하게, 호기심을 갖고, 하지만 경계를 하면서 쳐다보지만 깨철은 희미한 표정만 짓고 있다 (S# 6_7_8_9) 그런데 갑자기 깨철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수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S# 10_11_12_13) 이 이상한 상황. ( S# 14) 그러다가 깨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몽롱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 S# 15)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수옥은 ( S# 16_17) 뒤로 물러나면서 방어하기라도 하듯 가방을 들면서 깨철을 바라보지만 깨철은 그저 잠든 것처럼, 원래의 자세 그대로 양지바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수옥의 목소리. (voice-over narration) “내가 임지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였는데, 그는 피부로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 강렬한 빛은 마치 숲 속에서 불현듯이 마주친 뱀 같은 공포를 주었다. 그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의 감정과 달리 신선한 충격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 S# 18_19_20) 그때 깨철이 앉아있던 툇마루 바로 곁 대문이 열리면서 집주인이 나와 “깨철이 이노마야! 니 아까 부터 여기 앉아 뭘 하노! 일마가 귀가 먹었나, 어서 일나라! 어허 일나라카이!”라며 깨철을 꾸짖는다. (S# 21) 수옥 그걸 유심히 바라본다. (S# 22) 수옥, 가겟집 주인에게 말을 걸며 ''''저, 여기 학교가 어디 있어요?'''' 리고 묻자 돌아보면서 '''' 학교예? 아, 그라고보니 새로 오신 여선생님이신 모양인데, 철아, 철아'''' 라고 부르자 (S# 23) 철이가 '''' 도곡아재, 와요?'''' 라며 집에서 나오다가 깨철가 부딪치가 밀쳐내며 ''''이노마야, 비키라마'''' 라고는 달려간다. 깨철 제 갈길을 가다 말고 돌아본다. (S# 24) 가겟집주인이 철이에게 ''''새로 오신 선생님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고 하자 ''''오학년 철이입니다''''라고 인사한다. 주인이 철이에게 ''''학교까지 좀 모시고 가그라이'''' 하자 ''''알았심더''''하고 길을 나선다 (S# 25) 길을 나서는 수옥과 철이를 깨철 뒤에서 유심히 바라본다. (S# 26) < 안개마을 >을 본 다음 <匿名의 섬>을 읽으면서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임권택 이 이문열 의 소설을 문자 그대로 찍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단순하게 각색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송길한의 시나리오는 이미 영화가 완성된 다음 영화를 보면서 다시 옮겨 쓴 것이 아닌가 할 만큼 소설보다는 영화에 친밀(하고도 내밀)한 이미지와 동선에 따르는 배치의 표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지문들. 나는 <안개마을>을 보면서 임권택의 이상한 독서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이상한 독서방법? 앙드레 바쟁이 조르주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로베르 브레송의 < 시골사제의 일기 >을 본 다음 했던 말. 세르주 다네가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를 본 다음 따라했던 말. 나는 지금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책을 읽는다는 문제. 이때 임권택은 <匿名의 섬>의 주제를 탐구한다든가 혹은 인물을 따라가거나 그 안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대신 그냥 자신이 읽은 책의 효과에 대해서 영화가 건드리는 방법을 따라가고 있다. 영화는 문학의 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그런 다음 무엇이 연결되지 않는가, 라는 낭패. 왜 문학의 어떤 부분들은 영화라는 기계 안으로 전체화되지 않느냐, 라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영화는 문학을 자기의 기호 안에서 통일시키지 못하는가, 라고 물어보고 있을 때 영화는 문학의 글자를 찍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임권택은 이 소설의 문자를 찍고 싶어 한 게 아닐까, 할 만큼 문자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광학효과에 이끌린 다음 그 효과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소설의 두 번째 문장.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 이라고 깨철을 문자가 건드릴 때 그것은 객관적 세계에서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는 인상에 의해 감각한 것이지 그것을 지각한 것은 아니다. S# 1 S# 2 S# 3 S# 4 S# 5 임권택 은 처음 세 문장을 다섯 개의 쇼트로 찍었다. 처음 버스가 마을에 들어올 때 기능적으로는 마스터 쇼트이지만 다소 어리둥절하게 진행된다. 이 버스를 따라서 느리게 물러나면서 쳐다보는 느낌을 줄 때(zoom_out) 이상하게 카메라는 마치 바닥에 앉아있기라도 하듯 불편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low_angle) 표준을 벗어난 첫 장면. 그 장면이 그것 자체로 보여 지지 않을 때, 그래서 대상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 개입할 때, 그 장면에 있는 얼룩은 단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시선이 덧붙여진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저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장면 안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좀 더 자세한 설명. 이때 첫 다섯 쇼트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버스가 도착해서 수옥이 내리는 장면( S# 1)과 수옥이 내린 다음 버스가 떠나가는 장면( S# 3)은 마치 누군가의 시선과 주고받은 것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쇼트가 접속하고 있는 것은 이 낯선 동네에 내려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옥의 클로즈업이다. (S# 2) 물론 그 사이에 약간의 미세한 데드 타임이 있긴 하지만 버스는 도착하자마자( S# 1) 서둘러 다시 떠난다. (S# 3) 이때 이상하게도 두 번째 쇼트는 무언가 다가와서 수옥을 더듬거린다는 느낌을 준다. 더 이상한 시선은 네 번째 쇼트이다. 마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빈 동네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빈 동네를 둘러보던 수옥은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문제의 네 번째 쇼트. 이때 상대 쇼트(reverse_shot)는 가게 안에서 수옥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 S# 4) 그러나 이 장면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점에서 점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장소 안으로 들어와서 상대 쇼트 저편의 사람을 쳐다볼 때 그 두 개의 쇼트를 연결하는 선은 시선의(point_of_view) 쇼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게는 텅 비어있다. 혹은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만일 이 장면이 성립된다고 말하려면 한 가지 설명만이 남는다. 가게가 수옥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하나의 인물이 되어버린 가게. 사물이 갖고 있는 인격. 나는 이 이상한 장면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카메라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거기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숨어있는 것도 아닌데, 그 가게를 기억시킬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함으로써 보는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도 없는데, 왜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을까. 그런 다음 세 번째 쇼트의 자리로 다섯 번째 쇼트가 돌아온다. 이 말의 방점. 세 번째 쇼트의 자리. 수옥은 가게가 빈 것을 확인한 다음 이 동네의 풍경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갑자기 손으로 들고(hand_held) 살펴보기 시작한다. 두 개의 쇼트는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데 그 방법이 전혀 다르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세 번째 쇼트와 다섯 번째 쇼트는 서로 이어 붙일 수 없다. 이때 여기서 다르게 찍었다는 것 말고 더 기묘한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다시 셈을 해보자. 버스가 마을에 도착한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버스. 그런 다음 멈추어선 버스에서 수옥이 내린다. 버스라는 동선. 수옥이라는 시선. 이때 영화는 하나의 선을 그어야 한다. 상상선. 그런 다음 그 선은 블록들을 만들어낼 것이며, 그 블록 사이에서 특정한 면들이 세워질 것이다. 면들의 사이. 사이라는 접속사. 이것이 영화가 무용의 운동하는 선이나 연극의 동선과 다른 활동의 구도이다. 첫 번째 활동. 수옥이 마을에 도착하는 것을 바라보게 만들려면 길을 중심으로 (버스가 다가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마주보면서) 먼저 왼쪽과 오른 쪽으로 나눈 다음 버스의 문이 열리는 왼쪽으로 수옥이 내린다. 이때 카메라가 길을 하나의 선으로 해서 맞은편으로 넘어간 다음 왼쪽의 건물과 오른 쪽의 건물로 진행하면 이 문제는 간단하다. 혹은 표준적 판본에서는 그렇게 다음 장면을 이어 간다. 그러나 이 씬 전체가 이상한 것은 그 길을 중심으로 일종의 가상선을 그은 다음 모든 동선을 왼쪽에서만 진행하기 시작한다. 마치 절대로 오른쪽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운 것처럼, 어떤 불가능한 장소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영화적으로 거기 무슨 블랙홀이 있기라도 하듯이, 오른 쪽을 모두 버리고 선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이 장소에서 180도에 이르는 공간을 모두 포기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불편한 문제와 만나게 된다.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인물을 움직이기 매우 까다로워진다. 하지만 임권택 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새로운 인물이 나올 때마다 모두 왼쪽 라인에서 등장한다. 차라리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세 번째 쇼트를 보여준 다음 길 건너편으로 넘어가느니 차라리 수옥 왼쪽 곁에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나온다. 평행선을 긋는 대신 길을 따라 수평선을 그은 다음 그 선을 뚫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 그래서 다시 바깥으로 카메라가 나왔을 때,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다섯 번째 쇼트는 수옥을 손으로 들고(hand-held)로 찍었다. 두 가지 표면적 기술. 하나는 이 쇼트가 흔들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쇼트를 역광으로 찍어서 렌즈에 빛의 얼룩(halation)이 생기고 있다. 그냥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이걸 차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일성이 모를 리가 없다. 이 영화는 역광을 이용한 촬영을 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역광으로 찍는다고 해서 항상 빛이 렌즈에 만들어내는 얼룩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마치 그 쇼트에서만, 오로지 이 순간에는 얼룩이 필요하기라도 한 것만 같은 번쩍이는 빛의 활동. 임권택의 광학효과. 이문열 의 가시적 문자. S# 5 S# 6 나는 이 쇼트를 이문열 의 문자와 연결시키고 싶다. 이문열의 소설 (.... 중략) 서너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나는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중략...)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그건 수옥이 느껴본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느껴본 것을 찍는 예술이 아니다. 무엇이 수옥을 멈춰 세운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돌아보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저 구석 편에 숨어있기라도 하듯, 처음에는 보지 못했지만, 비로소 지금 저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깨철을 발견하게 만든 것일까. 그건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이다. 수옥의 피부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은 눈빛. 흔들리는 시선으로(hand_held) 빛이 얼룩져서 바라보는 이 장면이 돌아보는 수옥의 시선으로 깨철을 발견하는 쇼트( S #6)와 서로 이어 붙어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다섯 번째 쇼트는 반대로 여섯 번째 쇼트가 바라보는 쇼트이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그건 깨철이 수옥을 바라보는 시선의 쇼트이다. 다소 비유적인 우회. 이때 깨철이 던지는 시선이 수옥의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그래서 거기서 번쩍이는 빛의 얼룩(halation)이 깨철의 안광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빛이라는 문제. 이때 깨철은 툇마루에 앉아서 오후의 따스한 빛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집도 없는 깨철이 달리 여기 어디에 앉아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영화에서 인물을 어디에 앉힐 것인가라는 문제. 그러면서 깨철은 이 동네에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낯선 새로운 방문객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수옥이 도착했다. 새로운 먹이.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는 깨철의 눈빛, 마치 피부를 찌를 듯한, 옷 속을 파고들 것만 같은, 그런 빛. 그 빛이 수옥의 몸에 던져질 때, 빛의 얼룩이 그녀의 이미지 위에 번쩍이고 있다. 그때 그 두 개의 빛을 찍기 위해서, 깨철이 자리 잡은 양지바른 툇마루 위의 빛과, 그가 쳐다보는 수옥의 피부를 찌를 듯한 빛을, 서로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빛을, 물리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조명인 저물어가는 겨울 오후 햇살아래서 찍기 위해서, 임권택 은 수평으로 가상선을 그은 다음, 그림자만이 남은 맞은편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그런 다음 이어지는 네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수옥과 깨철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시선의 교환이다. ( S# 6_7_8_9) 당신은 이 거리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이문열 의 문장. (... 중략)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갈 정도였고,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중략...) 나는 이문열의 문장을 영화로 다시 옮겨 쓰고 싶다. 카메라를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롱 쇼트로 멀리서 볼 때)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 갈 정도였고, (조금 더 다가가서 풀 쇼트로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임권택 은 정확하게 그렇게 찍었다. 하나의 문장을 쉼표로 둘로 나눈 것을 임권택은 두 개의 쇼트로 나눈 다음( S #6, 8),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을 고정점으로 하여( S #7, 9) 롱 쇼트와 풀 쇼트로 묘사의 거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이문열의 문장) 나는 좀 전의 그 강렬한 빛 같은 것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중략) 이 문장의 번역. 영화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필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냥 한 마디로 클로즈업. (S #10) 임권택은 마치 이문열의 문장이 그림 콘티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따라가면서 찍어나가고 있다. 이때 임권택은 이 클로즈업을 다시 네 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깨철은 몽롱한 눈빛에서 피부를 찔러오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몽롱한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련의 연속적인 표정을 세 개의 쇼트로 나눈 것이며( S #10, 12, 15) 그런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을 다시 두 개의 쇼트로 나눈 ( S #11, 13) 다음 교차 편집한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단순하다. 내 질문은 왜 깨철을 연속적인 하나의 표정으로 보여주지 않고 나누었느냐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왜 수옥의 쇼트( S #11)가 거기 개입할 필요가 생긴 것일까. 자, 이 열 개의 쇼트는 두 개의 다이어그램으로 나누어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다이어그램. 수옥이 깨철을 발견한 다음 쳐다볼 때( S #6_7_8_9) 이 네 개의 쇼트는 수옥이 바라보는 주어의 자리에서 깨철이 목적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유지되고 있으며, 서로 객관적으로 마주보고 있는 중이다. 이때 이 쇼트의 진행을 중단시키는 것은 갑작스러운 깨철의 클로즈업이다. ( S #10) 이 쇼트는 단지 거리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계의 좌표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수옥은 깨철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깨철이 수옥에게 다가온 것도 아니다. 그 둘은 서로의 거리를 여전히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카메라는 그 둘을 가까이서 거의 클로즈업에 가깝게 찍는다. 연속적인 표정. 깨철과 수옥. 여기서 두 사람이 교환한 것은 ‘본다’, 라는 동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로의 주어와 목적어의 자리이다. 이때 이상한 쇼트가 둘 사이에 개입한다. 쇼트 14. 시선을 둘러싼 이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도망이라도 치듯이 멀리 물러났을 때 이 자리는 단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둘 사이에 세워진 상상선 바깥으로 나가면서 무언가 이 시선의 망이 부서져버린다. 갑작스러운 시선의 중단. 이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수옥은 프레임 안에 있지만 깨철은 그 바깥에 있다. 프레임(cadre)의 팽창, 혹은 이제부터 있을 부서진 프레임(de_cadrage) 안의 숨겨진 몸과 시선. 시선의 망이 부서지면서 재빨리 이루어진 배치, 깨철이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말하자면 다시 수옥을 주어의 자리에로 되돌려주는 순환, 이 일순간의 미끄러져버린 듯한 쇼트는 수옥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voice_over_narration) 이 목소리와 함께 마치 다시 자기의 자리를 찾기라도 했다는 듯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의 시선을 따라 (S #17, 19), 혹은 그녀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맞추어서 카메라를 들고 따라간다. (hand_held) 이 활동은 우리에게 이제까지 어리둥절했던 그 모든 운동, 버스가 들어오면서 느리게 물러났던 줌의 이동, 그 버스에서 수옥이 내린 다음 동네 사람을 찾아서 가게를 기웃거릴 때 바라보던 카메라의 움직임이 깨철의 시선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S# 21 그 흔들거리는 카메라가 멈추는 것은 마치 프레임웰엽링?안에 다른 구멍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깨철이 앉아있는 툇마루 바로 곁에 자리한 대문이 열리면서 동네 사람이 화면 안으로 들어설 때이다. (S #21) 뚫린 구멍. 그 사이로 마치 빠져나가는 듯한 음악. 깨철을 발견한 다음 이미지에 달라붙어버린 듯이 시종일관 따라오던 이상하고도 불길한 음악을 멈추는 것은 바로 그 문소리이다. 모든 것이 다시 현실 속의 질서에로 되돌아오는 순간. 현실의 운동. 현실의 사운드. 이때 이 새로운 등장인물에게, 이 동네 사람에게, 큰 소리로, “저 여기 학교가 어디 있어요?”라고 말을 거는 수옥을 이상할 정도로 멀리서 찍었다. 혹은 이제까지 쇼트를 진행했던 것과 다른 렌즈로 수옥을 멀리 밀어내고 있다. 이때 사실은 이 거리가 실제로 수옥과 깨철이 떨어져있던 거리였을 것이다. 이문열 의 문장. 그런데 내 그런 느낌을 일순의 착각으로 만들어 준 것은 갑자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주인 남자였다. (... 중략) 일순의 착각으로부터 깨어나기. 임권택 은 주관적인 시선에서 객관적인 자리에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렌즈를 바꾼다. 하지만 여기서 이 씬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씬 전체에서 동선이라고 부를만한 쇼트가 등장하는 것은 깨철과 동네 어른이 함께 있는 프레임 안으로 수옥이 들어올 때 깨철이 귀찮다는 듯이 일어나서, 마치 수옥과는 한 프레임에 아직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듯이, 혹은 피하듯이 ( S #23) 다음 쇼트의 공간으로 도망치듯이 슬쩍 걸쳐서(match_cut) 빠져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수옥을 쳐다볼 때이다. ( S #24) 수옥은 더 이상 깨철을 쳐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수옥과 철이가 동네 어른에게 인사를 하고 빠져나갈 때 이 광경이 깨철의 시선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다시 한 번 이 쇼트를 가득 채우는 빛의 얼룩이다. ( S #25) 이문열 의 소설. (...중략) 순순히 앞장서는 소년을 따라나서려는데 여전히 깨철이란 사내의 눈길은 나를 쫓고 있었다. 그 사이 평온을 회복한 나는 짐짓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주고는 자리를 떴다. (중략...) 이문열은 둘 사이의 시선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임권택 은 철이와 함께 이 장소를 떠나면서 깨철에게 두 번 다시 시선을 주지 않는다. 혹은 수옥은 마치 그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 다음 재빨리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깨철은 이 장소를 떠나는 척 하면서 계속해서 수옥을 바라본다. 문학의 시선과 영화의 시선. 이때 이 세 개의 쇼트는 깨철을 따라가면서 서로 붙어있는 연결의 유기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나는 재빨리 두 번째 장면으로 넘어오고 싶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 장면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면에 기대어 행여 당신이 이 모델을 하나의 도식으로 만드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고 싶다. 먼저 이문열 의 소설. (... 중략) 남편이 오기로 되어있는 그 일주일을 나는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나치게 마신 바람에, 나에게서 보내려고 비워둔 이틀을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남편이 올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 막차까지 그냥 지나가버리자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허탈한 심정이었다. 결근이라도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함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언뜻 정신이 든 것은 버스 정류소와 하숙집 중간 쯤 되는 길 위에서였다. 이미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음에도 장대 같은 소낙비였다. 얼결에 주위를 돌아본 나는 길가에 있는 조그만 창고를 발견하고 그리로 뛰어갔다. 처음 나는 그 처마에서나 붙어 서서 비를 긋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워낙 빗발이 세고 바람까지 일어 차츰 빗장이 질려있지 않은 함석 문께로 밀리게 되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빗발은 점점 세어져-- 이윽고 나는 함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비료 같은 것들을 쌓아두는 그 창고는 그날따라 텅 비고 조용했다. 혹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그 지나친 고요에 차근히 창고 안을 살펴볼 생각도 않고, 열려진 문틈으로 쏟아진 소낙비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지나친 방심이라기보다는 작은 벌레처럼 스멀거리며 내 몸을 돌고 있는 그 묘한 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어쨌든 창고 안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 튀는 빗방울을 피해 내 몸이 완전히 창고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둠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 나와 창고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누구예요?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 나는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떠들어야 소용없어, 소나기 오는 들에 사람 나다니는 것 봤나?” 약간 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집게 같은 손이 내 팔목을 죄었다. 처음 그림자가 퍼뜩할 때의 직감대로 깨철이였다. 그가 누구인 것을 알자 이상하게도 나를 사로잡았던 공포가 일순에 사라졌다. “깨철이지? 이거 못 놔?” 나는 제법 마을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그는 대답대신 창고바닥에 깔린 짚 검불 위에 나를 쓰러뜨리더니 내 치맛자락을 거칠게 감아쥐었다. “험한 꼴로 하숙집에 돌아가기 싫거든 곱게 벗어”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썼다. 그런 나를 덮쳐누르고 있던 그가 다시 뜨거운 입김을 내게 뿜으며 중얼거렸다. “이 깨철이 다른 건 몰라도 언제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지금 네 몸은 달아있을 데로 달아있어” 그 말을 듣자 이번에는 묘하게도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대신 잠깐 잊고 있었던 묘한 열기가 다시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귀에다가 그가 다시 이죽거렸다. “오후 내내 지켜보고 있었지. 정류소에서 안절부절 기다리고 서 있을 때부터......” 그러면서 그는 능란하게 내 몸을 더듬었다. 나는 차츰 몽환(夢幻)과도 흡사한 상태에 빠져들면서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회상하기에도 민망스럽지만 어쩌면 그때 나는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함께 한 차례의 정사(情事)를 즐긴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남의 아내 된 여자로서 한 가지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 중략) 이 대목은 17쪽인 이 소설에서 두 쪽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1시간 31분 상영시간 중에 18분 40초를 차지하고 있다. 그냥 산술적으로 말하면 영화 전체 중에 거의 오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다. 만일 남편이 오기로 한 날 수옥이 아이들 수업을 가르치는 쇼트까지 셈에 포함시킨다면 더 많은 분량이 될 것이다. 나는 남편이 오기로 한 날 전체를 셈하는 대신 동료인 김 선생에게 수옥이 남편 마중을 가기 위해 아이들 수업을 맡기고 학교를 떠난 다음 쇼트부터 셈을 시작했다. 송길한의 시나리오에서는 이 대목이 10개의 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S #72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수옥의 몽타주_ #73 정류장 앞_ #74 돌아가는 길_ #75 방앗간 앞_ #76 방앗간 안_ #77 물레방아_ #78 물레방아_ #80 방앗간 안_ #81 물레방아 전경_ #82 마을길 낮) 임권택 은 65 쇼트로 찍었다.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S# 20 S# 21 S# 22 S# 23 S# 24 S# 25 S# 26 S# 27 S# 28 S# 29 S# 30 S# 31 S# 32 S# 33 S# 34 S# 35 S# 36 S# 37 S# 38 S# 39 S# 40 S# 41 S# 42 S# 46 S# 47 S# 50 S# 51 S# 52 S# 53 S# 54 S# 55 S# 56 S# 57 S# 58 S# 59 S# 60 S# 61 S# 62 S# 63 S# 64 S# 65 영화의 순서. 남편을 만나기 위해 버스 정거장으로 달려가는 수옥(S #1). 물레방아를 지나고( S #2) 커다란 나무들 사이를 지나( S #3) 단숨에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니 막 버스가 지나쳐간다. 멀리서 사내 하나가 오는데( S #4) 자세히 보니 화천댁 남편이다. 지금 아내 때문에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 S #5) 수옥은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서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는다. 가게 주인이 나와서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라고 권하지만 수옥은 그저 버스에만 관심이 있다. ( S #6) 마을 초입의 텅 빈 버스길. ( S #7) 돌아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이 주막 주모가 나와서 수옥에게 “차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이나 있어야합니다. 점심식사나 합시다” 라면서 주막에 데려간다. ( S #8) 집에 돌아가는 자기 반 아이들과 마주치자 수옥은 “공부들 잘 했니? 어서 집에 가서 예습 복습 잘해”라며 인사 한다. ( S #9) 주막집 산월이가 빵을 가지고 가다가 바깥에 앉아 우두커니 버스를 기다리는 수옥을 보고 빵을 권하지만 거절한다. ( S #10) 버스가 도착하지만( S #11) 남편은 내리지 않고 떠난다. ( S #12) 수옥은 벽에 기대어 운다. ( S #13) 그때 우체부가 도작해서 속달 전보를 전해주자 ( S #14) 사인을 한 다음( S #15) 그걸 열어본다. “미안하다, 수옥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웠지 뭐야, 친구들과 어울려 과음을 한 바람에 그리 됐어. 다음 정식 휴가를 얻으면 그땐 곧장 수옥에게 달려가겠어” (남편의 음성, voice_over_narration) 수옥은 찢어버린 다음 벽에 기대어 운다. ( S #16)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 S #17) 큰 나무들 사이로 돌아가는 수옥의 뒷모습에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 S #18) 걸어가던 수옥은 빗발이 거세지자 뛰어가기 시작한다. ( S #19_20_21) 저기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 S #22) 그 곳으로 뛰어가는 수옥( S #23) 물레방앗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빗발이 거세지자 그 안으로 들어간다. ( S #24)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닫히고 ( S #25) 수옥이 돌아보니 ( S #26) 빗장 문이 걸리고 ( S #27) 깨철이 덮쳐오자 수옥은 “놔!”라고 소리친다. ( S #28_29) 바깥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문은 단단히 잠겼다. ( S #30) 수옥은 몇 차례이고 “놔, 놔, 놔, 놔”라고 반복하면서 저항하지만 깨철은 더 거칠게 껴안고( S #31) 문은 꼼짝도 안 한다. ( S #32) 깨철은 좀 더 거칠게 끌어안고 수옥은 몸부림치지만 ( S #33_34) 깨철은 수옥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고 수옥은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버둥거리다가 잡아당기자 ( S #35)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물이 넘쳐흐른다. ( S #36_37) 도망치려는 수옥, 그녀를 감싸 안는 깨철. ( S #38_39_40) 깨철은 수옥의 웃옷을 벗기고 브라자를 내린 다음 ( S #41) 짚 검불 위에 쓰러트리듯이 눕힌다. ( S #42) 그리고 팬티를 끌어내리는 깨철, 완강히 저항하는 수옥 ( S #43_44_45_46_47_48_49) 수옥이 포기해버리는 듯한 표정을 짓자 ( S #50) 깨철은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 S #51) 수옥을 겁탈하는 깨철, 물이 넘쳐나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 S #52_53_54_55_56) 깨철은 수옥의 옷을 집어 들어서 ( S #57) 짚 검불에 쓰러져 누워있는 수옥을 덮어준다. ( S #58) 그리고 문을 열고 조용히 물레방아를 떠난다. ( S #59) 물레방아가 텅 빈 것을 확인하고 수옥은 무너지듯 다시 눕는다. ( S #60) 비 내리는 물레방아. ( S #61) 안개 속을 혼자 걸어가는 깨철 ( S #62_63) “회상하기도 민망스럽지만 어떤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가책으로 괴로워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것이나 아닐 지...” (수옥의 목소리. voice_over_narration, 그리고 이어지면서) 방에 혼자 앉아있는 수옥 “약혼자가 있는 여자로써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영훈씨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 S #64_65) 소설은 처음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잊지 않고 있다. 지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늦은 저녁 을 마친 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 곁에서 잠깐 동안, 그저 남편이 뉴스를 보고 혀를 차며 개탄조로 말하는 동안, 그렇게 떠오르는 십여 년 전의 일을, 죄스러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그저 아득하기만 한 시간을 불러오는 중이다. 그래서 남편이 그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앞질러 밝히고 있다. ( 이문열 소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나치게 마신 바람에, 나에게서 보내려고 비워둔 이틀을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 중략) 반대로 영화는 종종 수옥의 목소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임권택 은 여기서 앞질러 알려주지 않는다. < 안개마을 >은 목소리의 시제가 때로는 플래시백이라기보다는 종종 사건 바깥의 해설적인 자리로 물러나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자기의 존재 근거가 되기라도 하듯이, 혹은 자기 자신은 사건 바깥으로 빠져나와 재판의 자리에 가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알리바이를 내세우기라도 하듯, 그렇게 재빨리 후퇴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치 수옥의 목소리가 화면에 보여 지는 수옥을 쳐다보기라도 하듯이 진행된다. 말하자면 목소리라는 시선. 두 개의 분리된 수옥. 영화에서 수옥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한껏 들떠서 달려가지만 소설에는 이 대목 전체가 없다. 수옥은 이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이미 막차는 떠난 다음이며 허탈함 못지않게 수옥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돌아가는 길에 버스 정류소와 하숙집 중간쯤에서 만난 소낙비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이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듯, 미처 쓰지 않은 문장을 불러내기라도 하듯, 수옥을 따라가면서 찍어나가기 시작한다.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 미처 쓰지 않은 것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려고 할 때 거기서 그건 단순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소설은 그렇게 뛰어넘어도 되는 것을 영화는 함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 멈춰 서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S# 2 S# 26 만일 소설에 기대어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수옥이 (오지 않을)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달려 나가는 장면에서 전보가 도착해서 그 목소리로 내용을 통보받을 때까지 16개의 쇼트는 모두 데드 타임이다. 이때 이 16개의 쇼트들은 이미 우리가 본 쇼트들과 부딪치면서 마치 작은 타악기들을 건드리기라도 하듯 기억의 잔향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수옥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달려가는 네 개의 쇼트 중 두 번째 쇼트. 저 멀리 물레방앗간을 뒤로 하고 작은 뚝방길을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수옥이 약간 비스듬하게 가로 질러갈 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진동. 하나는 < 안개마을 >을 두 번째 볼 때에야 알 수 있다. 수옥은 이 길을 정확하게 되돌아올 것이다.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말하자면 반대방향. 그때 동선은 여기서 끊어지고 첫 번째 쇼트로 되돌아가는 대신 저 멀리 보이는 물레방앗간으로 방향을 돌린 다음 마치 블랙홀처럼 저 문 속으로 잡혀먹이듯이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다른 하나가 더 중요하다. 이 화면 구도는 이미 영화 앞부분에서, 훨씬 앞쪽에서, 씬의 순서대로 셈을 한다면 26씬에서 동일한 위치에서 저 멀리 물레방앗간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구도를 보았다. S #26. 개울가. 깨철은 커다란 돌을 치켜들고 개구리를 찾고 있다. 아이들은 깔깔 대고 웃으면서 구경하는 중이다. 지나가던 화천댁이 “야 이 빙신아, 거기 한 마리 안 가나? 바로 니 앞에 안 있나?” 하자 돌을 내리치던 깨철은 그만 미끄러져 물에 빠진다. 우리는 지금 (시나리오의 셈에 따르면) 76씬을 보는 중이다. 수옥이 지켜보았던 그 광경. 그 자리를 다시 수옥이 (오지 않을) 남편을 마중가기 위해 가로 질러갈 때 카메라는 구태여 같은 위치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다. 그 프레임에서 빠진 것은 마치 깨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만 같은 쇼트. 이 두 번째 쇼트부터 깨철은 거기 없으면서 이미 함께 동반하듯이 바깥에서 포함되어 있다. S# 4 S# 5 S# 6 S# 8 S# 9 S# 10 S# 11 S# 12 그런 다음 다시 영화는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온다. < 안개마을 >의 첫 번째 장소. 이 장소로 마치 거슬러 올라오듯이 수옥이 다시 올 때, 수옥은 온 길의 쇼트를 차례로 찾아서 돌아오는 대신, 비탈길을 헐레벌떡 단숨에 뛰어올라와 그 버스 정류장이라는 광경을 쳐다본다. ( S #4) 마치 사선처럼 그어진 동선. 그때 몽타주의 벡터는 무언가 질서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숨은 매개변수들은 무엇일까. 이때 수옥의 눈앞을 지나가는 버스는 영화적으로 번역하면 와이프(wipe_out) 효과이다. 지나간 버스 저편에 한 남자가 내려서 걸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남편이 아니고 화천댁 남편이다. (남편) “안녕하십니꺼, 마중 나오셨군예” (수옥) “예, 어디 다녀오세요?” (남편) “여편네가 읍내 병원에 입원했다 아입니꺼” (수옥) “그래 좀 어때요?” (남편) “차도가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두고 봐야 알겠심더, 안 가실낍니꺼?” (수옥) “전 막차를 기다려봐야겠어요” (남편) “어이구, 아직 멀었는데예”라고 말한 다음 그 자리에서 떠난다. ( S #5) 이 쇼트는 이례적으로 분할하지 않고 투 쇼트로 두 사람을 세운 다음 멈춰 서서 그냥 진행된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지금 이야기의 진행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후 진행될 어떤 이야기의 복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혹은 이제까지 진행된 이야기 중의 일부의 어떤 대답도 아니다. 그런데도 생략 없이 모두 찍었다. 마치 축 처져서 늘어진 것만 같은 시간. 화천댁 남편이 떠난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기다리던 수옥은 뒷걸음질 치면서 화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가로 질러 양지바른 툇마루에 가서 앉는다. 뒷걸음질이라는 제스처. 마치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만 같은 인상. 우리가 이미 보았던 구도. 불길하고도 기이한 쇼트. ( S #6) 이 쇼트는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첫 번째 씬 세 번째 쇼트와 거의 동일한 구도이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두 쇼트는 동일한 날에 촬영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사하다. 마치 첫 장면으로 되돌아온 것만 같은 기시감. 그때 우리를 엄습하는 것은 당연히 거기 감춰진 시선이다. 무언가를 조종하는 것만 같은 우연. 바깥에 놓여진 기억. 전혀 다른 두 개의 씬에서 동일한 기분이 다가올 때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까. 우리는 첫 번째 씬에서 수옥과 깨철 두 사람의 프레임에 마치 구멍이 생겨나듯이 문이 열린 다음 거기서 가겟집 주인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는 깨철 대신 수옥이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자마자 바로 곁에 (시커먼 어둠으로 구멍이 뚫린 것만 같은) 가게 안쪽에서 가겟집 주인이 나와 그녀에게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마실 거라도 드릴까예?”라고 말을 건다. 형태론적으로 거의 동일한 진행. 이 두 개의 씬은 거울로 마주보듯이 서로 다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장소에 오자 동일한 법칙이 작동하는 것처럼 수많은 기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버스가 지나갈 때 맞은편 주막에서 주모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수옥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고 “차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이나 있어야합니다. 점심식사나 합시다” 라고 데리고 들어간다. ( S #8) 화면에 가득 찬 빛의 얼룩들. 이때 이상한 것은 이어지는 세 개의 쇼트에서 동선이 모두 매번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이 세 개의 쇼트는 점프 컷이다. 우리는 이미 이 버스 정류장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물론 임권택 은 그걸 용의주도하게 인접 쇼트들과 이어 붙이면서 하나의 지도를 만들었다. 그걸 전제로 하고 수옥을 선으로 연결하는 대신 점에서 점으로 이동시킨다. 길 왼쪽에 자리한 주막에 주모의 손에 이끌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수옥 ( S #8)을 따라 카메라가 함께 길을 중심으로 한 상상선을 넘어가지 않는다. 반대로 다음 장면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화면 프레임 안에 가게의 프레임을 다시 만들어서 두 개의 프레임을 통해 바깥에 있는 수옥을 바라본다. 마침 학교에서 하교하는 수옥의 반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수옥은 주막의 반대편에 자리한 가게 쪽에서 나온다. ( S #9) 그런데 동일한 프레임의 다음 쇼트에서 주막집의 산월이가 가게에 와서 빵을 산 다음 다시 왼쪽의 주막집으로 돌아갈 때 수옥은 주막집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다. ( S #10) 우리는 주막집에서 나와서 가게 쪽으로 온 수옥을 보지 못했지만 또한 가게에서 주막집 쪽 의자로 간 수옥도 보지 못했다. 이 세 개의 쇼트는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인 점프 컷이다. 그렇다고 이 세 개의 쇼트의 빈 사이가 데드 타임에 대한 경제적인 생략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 한 가지 가설. 그렇게 하면 카메라는 첫 번째 씬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른쪽에 머물 수 있다. 만일 왼쪽으로 옮겨가면 우리는 새로운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우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아야 한다. 영화는 이미 본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공간을 지각하는 예술이다. 만일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하면 우리들은 새로운 지도를 그리거나, 혹은 동선의 연결 속에서 갑자기 이 선이 뒤엉키거나 미로에 빠져들 것이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설명. 이 점프 컷은 기이하게도 시간의 동선을 생략함으로써 반대로 (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수옥의 지루한 시간의 감각을 팽창시키고 있다. 동선에서 감각에로, 말하자면 가시적인 질서에서 비가시적인 몸의 주관적인 신경에로의 이동. 영화의 부사적(副詞的) 쇼트. 그때 막차가 도착한 다음 아무도 내리지 않고 그냥 떠난다. (S # 11_12). 버스가 떠난 다음 네 개의 쇼트.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수옥에게 우체부가 자전거를 끌고 골목에서 나타나 속달편지를 건네준다. 이 쇼트의 진행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쇼트는 소설과 완전히 반대의 전제 아래 이제부터 수옥의 감정선을 따라갈 것이라는 선언이다. 물론 나는 영화가 소설을 각색할 때 그 주인을 둘러싼 인정투쟁에 대해서 매우 긴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는 이야기의 작가를 둘러싼 기원에 관한 위태로운 대차대조표를 꺼내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두 개의 이야기에서 수옥을 둘러싼 문자로부터 영화에로 이동하는 시청각 기호들 사이의 감각적 성질들의 변화에 대해서만 쳐다볼 것이다. 소설에서 수옥은 그날 왜 남편이 오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문열 은 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수옥의 그 어떤 상상의 문장도 쓰지 않았다. 왜 그 사람은 오지 않은 것일까, 무엇이 그 사람이 내게 오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라고 질문하는 대신 (... 중략)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함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라고만 썼다. 영화에서는 막차가 떠나가고 남편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정되자 마치 기다린 것처럼 남편으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한다. 제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도착한 편지. 거의 목적론적 순간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정확한 자리. 지젝이라면 왜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라는 그의 글에 < 안개마을 >을 그 예 중의 하나로 넣고 싶을 지도 모를 지경으로 정확하게 바깥에서 날아와 빈 장소를 채운다. 그러나 그 편지가 올바른 목소리를 담고 있는 지를 따져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편지는 남편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나는 여기서 소문자 타자에 관한 술래잡기를 벌일 생각은 없다. 그 대신 이 편지의 존재에 대해서 신중하게 질문하고 싶다.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라면 이 편지가 도착하지 않아도 영화를 진행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혹은 어쩌면 그때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깨철과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다음, 그 편지가 도착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나는 단지 기능차원에서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중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편지가 먼저 도착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수옥이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길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S# 3 S# 17 S# 18 S# 19 S# 20 S# 21 S# 22 나는 이 셈을 가정하는 대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또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루고 있는 소설은 이문열 작가가 쓴 작품이다) 그걸 오로지 수옥의 몸에 새겨진 문자와 그 몸을 기술하는 시청각 기호들 사이의 경계만을 따라가면서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볼 것이다. 소설은 버스정류장에서 그 묘한 열기에 취해 몽롱한 기분이었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고 한 다음 수옥을 묘사하듯이 따라간다. 영화도 버스 정류장의 씬과 그 장소를 떠난 다음을 분리하듯이 수옥이 그 편지를 찢어버리고 벽에 기대어 운 다음 갑자기 하늘을 쳐다본다. ( S #17)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수옥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장면은 그녀가 이 길을 왔던 장면에 대구라도 되는 것처럼( S #3) 같은 위치에서 찍었다. ( S #18) 단지 수옥이 등을 돌리고 돌아가는 것 말고는 이 두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 쇼트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를 맞으며 걸어가던 수옥은 거세지자 뛰기 시작한다. ( S #19_20_21) 그리고 저 멀리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 S #22) 말하자면 수옥이 버스 정류장까지 올 때 진행했던 쇼트의 역순. 22번째 쇼트는 2번째 쇼트의 정확한 반복이며, 나는 이미 이 쇼트가 그보다 훨씬 앞서서 깨철이 동네 아이들과 화천댁 앞에서 개구리를 잡던 장면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뚝방 아래로 내려가서 개울에 카메라를 세운 다음 이 의미심장한 자리에서 올려다보는(low_angle) 카메라. 그러므로 22번째 쇼트는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지금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가는 수옥을 깨철은 카메라 뒤에 숨어서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반대로 소설에서는 깨철이 언제부터 수옥을 쫓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우연히 물레방앗간에 있다가 마주친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데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수옥이 물레방앗간에 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혹은 만일 소나기가 이보다 좀 더 이르거나 늦었다면 그녀는 이 길을 지나가더라도 여기 들렸을 리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흔적도 없다. 하지만 깨철은 수옥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오후 내내 지켜보고 있었지. 정류소에서 안절부절 기다리고 서 있을 때부터......” 나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 오후 내내 정류소에 함께 있었던 깨철. 그런데 그는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깨철이라는 흔적.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반복. 수옥이 버스 정류장에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서 왔을 때, 이 쇼트들이 다시 이미 본 쇼트의 형태를 반복할 때, 그 쇼트에서 지워져버린 깨철은, 동일한 쇼트가 반복될 때, 거기 결핍되어 있는 잉여인 것이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눈빛. 빛의 얼룩. 이 얼룩이 사라질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마치 덫에 걸려들기라도 하듯이 수옥은 물레방앗간으로 향한다. S# 25 S# 26 물레방앗간에서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간단하다. 첫 번째 차이. 여기서 깨철의 대사가 모두 사라졌다. 깨철은 벙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물레방앗간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수옥의 대사도 빗장 문이 닫힐 때 “누구야,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와 깨철이 수옥을 짚 검블 위에 쓰러트릴 때 “놔! 놓으란 말야”가 전부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물레방앗간의 문이 닫히자마자 수옥이 “누구예요?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 라고 날카롭게 소리친다. 깨철이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떠들어봐야 소용없어, 소나기가 오는 들에 사람 나다니는 것 봤나?”라고 대답하자 “깨철이지? 이거 못 놔?”라고 제법 마을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으름장까지 놓는다. 나는 먼저 이 장면을 그려보고 싶다. 소설 속의 물레방앗간은 영화보다 훨씬 어둡다. 소설에서 수옥은 문이 닫히고 나타난 사내가 처음에는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아서 날카롭게 소리치며 묻는다. 이때 수옥이 상대방이 깨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둠에 눈이 익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대답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의 음색을 듣고 나서이다. 영화는 수옥이 물레방앗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왼쪽에서 나타나서 문을 걸어 잠그자( S #25) 돌아보는 수옥을 클로즈업의 표정으로 찍었다. ( S #26) 돌아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리는 수옥의 표정. 그녀에게는 질문이 필요 없다. 둘 사이의 차이. 나는 좀 더 설명하고 싶다. 소설에는 두 사람의 정사에서 가시적인 묘사가 없다. 단지 두 가지 감각, 촉각과 청각에만 의지하면서 그 둘의 정사가 진행된다. 두 개의 문장. 하나, 깨철이 문을 걸어 잠그고 처음 수옥을 붙잡을 때, (... 중략) 약간 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집게 같은 손이 내 팔목을 죄었다. 두 번째. 수옥을 쓰러트리고 치맛자락을 거칠게 감아쥔 다음, (... 중략)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썼다. 그런 나를 덮쳐누르고 있던 그가 다시 뜨거운 입김을 내게 뿜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정사를 묘사하는 문장의 전부이다. 영화는 이걸 35개의 쇼트로 거의 분해하듯이 잘게 쪼개나가기 시작한다. 이때 정사의 진행 과정 사이로 물레방앗간이 활동하는 쇼트가 삽입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차이는 소설과 영화 사이에서 좀 더 결정적이 된다. 두 번째, 장소의 차이. 소설은 (... 중략) 얼결에 주위를 둘러본 나는 길가에 있는 조그만 창고를 발견하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런 다음 창고 안의 어떤 묘사도 하지 않는다. 단지 문자가 건드리는 것은 그날따라 텅 비고 조용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영화처럼 말하자면 미장센이 없는 공간. 영화는 이 물레방앗간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사건과 마주칠 때까지,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창고와 물레방앗간. 둘 사이를 형태론적으로만 비교하면 단순하다. 소설은 수옥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 다음 깨철과의 정사를 촉각과 청각에 의지해서 진행시킨다. 이 진행은 종종 수옥의 주관적인 설명을 거기에 덧붙인다. 이때 이 광경은 두 가지 전제를 담고 있다. 첫째,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 광경은 지금 수옥이 남편 곁에서 회상하고 있는 기억 속의 시간이다. 많은 것이 지워졌을 것이며, 또 어떤 것은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어쩌면 깨철의 말조차 기억 속에서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윤색된 것일지도 모른다. 둘째, 수옥은 지금 남편이 왜 오지 않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녀의 간절함. 그녀의 의심. 그러나 소설에서는 후회만 거기 머물러 있다. 후회? (... 중략) 결근이라도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문자를 내 멋대로 각색하고 싶어진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남편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이지만 이 후회의 내밀한 고백은 남편이 오지 않아서 깨철과 정사를 하게 된 사건 자체를 앞질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영화는 수옥과 깨철의 정사를 진행하면서 물레방앗간의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평행으로 진행한다. 다소 따분한 표현이지만, 물레방앗간은 수옥의 몸에 대한 의인화를 통해서, 은유적인 기계가 된다. 이때 물레방아는 멈춰 서 있다가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쌓여가는 리비도의 무게. 방향을 바꿀 수 없고, 길들여지지 않으며, 조절할 수 없는 힘. 수옥을 그 어딘가로 밀어내기 시작하는 에너지. 그때 충동이 신체의 일부 대상이라는 프로이드의 말에 따라, 충동이 국부적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대입하면, 수옥의 말단 기관, 성감대들, 국부적인 신체기관들이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마침내 물레방아가 활동을 시작한다. S# 35 S# 36 소설 안의 욕망의 문자들. 나는 발췌하듯이 건드려보고 싶다. (... 중략) 나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남편에게 썼다. 단 한 번,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 번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따뜻한 그의 체온과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싶다고 무슨 수를 쓰든 꼭 한 번 다녀가 달라고. (중략) 남편이 오기로 되어있는 그 일주일을 나는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냈다. (중략)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 중략) 말하자면 영화가 볼 수 없는 문자들. 이때 리비도는 모두 문자 뒤로 숨어들었다. 임권택 은 이걸 (영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인)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물레방앗간을 수옥의 몸에 은유하는 기계로 배치한 다음 물레방아를 활동시키기 시작한다. 이 활동을 설명하는 이상한 제스처. 깨철이 수옥을 움켜잡은 다음 웃옷을 벗기기 시작할 때 수옥은 그 손길을 뿌리치는 대신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더듬거린다. 그리고 그걸 붙잡고 잡아당기자 붙들어 매어 놓은 것이 풀리면서 ( S #35)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 S #36) 수옥과 물레방아 사이의 연결. 차라리 인물의 활동과 사물의 운동 사이의 접속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기적 조립. 소설에서 깨철이 수옥을 덮쳐누르면서 다시 뜨거운 입김을 귓가에 뿜으며 “이 깨철이 다른 건 몰라도 언제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지금 네 몸은 달아있을 데로 달아있어” 라고 중얼거릴 때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이 말이 이 상황에 대해서 지루할 정도로 설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깨철이는 수옥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정신분석 상담의사가 아니다. 지금 수옥은 깨철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기를 쓰고 있고, 깨철은 치맛자락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깨철은 한가하게 수옥의 귀에 대고 그녀의 심리를 읽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말이 성립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사후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이 광경은 지금 기억 속의 시간이다. 그때 도착하지 않은 남편의 자리를 깨철이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깨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만 같은 남편의 역할 놀이. 나는 이 말이 수옥의 기억 속에서 그녀 자신이 지어낸 말처럼 들린다. 소설이 해석적이라면 영화는 도식적이다. S# 27 S# 28 S# 50 S# 51 S# 52 S# 58 S# 59 씬 S# 24 씬 S# 25 나는 이미 소설에서 정사를 다루는 문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 대신 두 사람은 서로의 대화를 나눈다. 반대로 영화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대사 없이 정사가 진행된다. 나는 단지 대사의 여부를 놓고 이 묘사가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미묘한 순간이 있다. 빗장을 걸어 잠근 다음( S #27) 수옥이 돌아보는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았을 때( S #28) 나는 이 쇼트가 자동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렸다. 그런 다음 이상할 정도로 깨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쇼트가 거의 없다. 카메라는 대부분 깨철의 등 뒤에서 수옥의 얼굴을 보여주거나, 두 사람이 함께 보일 때는 어둠 속에서 얼굴을 구별하기 힘들만큼 뒤로 물러나거나, 아니면 수옥의 얼굴을 보여줄 때 깨철은 프레임 바깥에 있다. 이때 가장 이상한 순간은 수옥의 팬티를 벗기려는 동작이 반복되다가 문득 이 쇼트의 진행이 멈추기라도 하듯 수옥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 S #50) 그러자 그걸 내려다보는 깨철이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 S #51) 이 두 개의 쇼트가 가장 이상한 것은 그 두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혹은 그 표정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의미의 차원에서는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그냥 모호하게 남는다. 임권택 은 이 진행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설명할 생각이 거의 없다. 내 질문은 이 두 개의 쇼트가 서로 시선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옥을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이 쇼트가 깨철이 보는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쇼트에서 그 눈길이 깨철의 시선이 맞긴 하지만 깨철을 바라보는 시선은 갑자기 상상선 바깥으로 나와서 왼쪽 옆에서 쳐다보고 있다. 표준적 판본은 깨철을 아래서 위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변형하면 수직선을 놓고 45도 안쪽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카메라는 깨철과 수평으로 옮긴 다음 90도로 바라본다. 이건 누구의 시선일까. 물론 아무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물레방앗간에는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이 정사의 진행 바깥으로 나와 버린 것만 같은 카메라의 자리. 다소 수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깨철은 이 정사의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보는 것이지만 두 개의 쇼트는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 일련의 연쇄망에서 빠져나가버린 쇼트. 반사적인 긍정. 이제까지 내내 깨철은 없으면서 거기 있었지만 지금 깨철은 여기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나는 이 공식을 일반화의 전철을 따라 성관계는 없다, 라는 라캉의 판본으로 옮겨놓고 싶지 않다. 소설과 영화가 서로 완전하게 겹치듯이 공유하는 이 사건에 대한 수옥의 알리바이. (... 중략) 남의 아내 된 여자로서 한 가지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래요, 난 지금 깨철이 아니라 오지 않은 남편과 정사를 즐기는 중이예요. 의미심장하게도 깨철의 쇼트에서 수옥의 쇼트로 되돌아왔을 때 수옥의 눈길이 무엇을 보는지 애매하게 그 무언가를 본다. ( S #52) 거기서 단 한 가지 그 시선이 깨철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 차라리 그 시선은 깨철을 보지 않기 위해서 거기 그렇게 모호하게 눈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마치 그게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그보다는 대상 자체가 있지도 않기라도 하듯이 지나쳐 가버리는 눈길. 그때 깨철은 프레임 아래로 사라져버리고 난 다음 정사의 행위가 시작된다. 그저 수옥만이 보이는 화면. 상대가 사라진 쇼트. 이때 수옥의 쇼트를 마주 보는 것은 깨철이 아니라 돌아가기 시작하는 물레방아이다. 물론 미학적으로 이 편집이 푸도프킨의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때 이 정사는 마치 수옥 혼자서 진행하는 일종의 자위행위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이 모든 행위가 끝난 다음 누워있는 수옥에게 옷을 덮어주고 ( S #58) 깨철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떠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발뿐이다. ( S #59) 부분대상으로서의 깨철. 이 부분적 동일시에 대해서 수옥이 지난 일주일 내내 앓듯이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몸이라는 증환이 우울증인지 히스테리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혹은 그런 설명의 목표를 지니지 않고 수옥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이 한 차례의 정사에 대해서 (...중략) 그러나 남편에 대한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가책으로 괴로워 한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은 지금 와서 보면 한심스럽다기보다는 기이한 느낌이 든다, 라고 덧붙인다. 영화는 소설 속에서 이 정사에 대해 가졌던 수옥의 감정을 거의 고스란히 수옥의 목소리로 반복하면서도 앞 뒤 문장을 남겨놓고 이 구절은 감쪽같이 지워버렸다. 사라진 문자. 너무 당연해서 생략을 해도 상관없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게 너무 불편해서 그것이 주는 억압을 피하기 위한 외면이 아닐까. 무언가 영화는 이 장면을 그렇게 길게 찍고 있으면서도 이 순간을 외면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이 장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수옥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목이 없다. 영화에서 수옥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씬 S #24_25) “이번 시간엔 사회 141쪽 삼강오륜을 같이 공부하겠어요. 삼강오륜이란 유교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 기본 윤리를 말하는 겁니다. 먼저 유교란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가르침으로서 이미 먼 삼국시대부터 학문과 도덕으로 우리들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일찍이 세종대왕께서도 삼강행실도란 책을 펴내 말보다는 행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자, 적어요”라고 말한다. < 안개마을 >에서 수옥의 목소리(voice_over)를 제외한 가장 긴 대사. 물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과 그 자신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앞으로 있을 수옥의 외도에 대해서 미리 어딘가 모르게 방어선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처음으로, 두 개의 광경. 나는 그 둘을 문자와 쇼트로 다시 생각하면서 이 둘 사이에서 줄기차게 불화를 보았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 사이의 근본적인 대결의 문제라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상대방의 내부로 들어갈 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방법에 따라 마치 분리를 감행하는 듯한 순간들을 계속해서 마주보게 된다. 나는 이것을 그렇다고 이문열 과 임권택 의 대결이라는 식으로 따분하게 말을 피하고 싶지 않다. 임권택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소설가들, 특히 < 서편제 > 이후 이청준과 매우 긴밀하게 작업을 계속했다. 같은 방식으로 다시 질문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청준과의 작업에서도 동일한 불화를 계속해서 마주 보았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소설 안으로 들어갈 때는 배제의 기술을 활용한다. 임권택은 그런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 안개마을 >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문자가 광학효과를 발휘할 때 그것을 쇼트로 옮겨오는 순간들이다. 물론 여기에 이행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환원의 위험이 뒤따르고 있다. 이것은 저것으로 올바르게 옮겨질 것인가, 그런 다음 원래대로 작동할 것인가. 이때 여기에 각자의 근거에서 비롯된 기이한 강제력을 마주하게 된다. 문자가 끌어당기는 힘. 쇼트가 활동하는 순간 끌어당기는(attraction) 또 다른 힘. 나는 이제까지 영화 안에서 문자를 생각했다. 반대로 이문열의 소설 안에서 쇼트의 활동을 생각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둘이 서로 하나로 재구성될 수 없는 각자의 힘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을 구석구석에서 보았다. 사라진 문자, 나타난 쇼트. 때로는 거기 새겨진 문자, 그걸 반사하는 쇼트. 그 사이의 감각들. 문자를 영화는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둘 사이의 접촉. 문자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쇼트는 거기서 그것을 읽기 시작한다. 나는 두 개의 동사를 생각한다. 움직이는 것을 읽어야 한다. 리오타르가 내게 일러준 말. 문자는 형상을 잘게 부수고 그런 다음 내재화의 과정을 밟아나간다. 그때 바깥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본다는 것의 외재화. 나는 지금 담론의 시선이라는 말을 생각하는 중이다. 그때 형상은 담론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영화 사이의 은밀한 대화가 나타나는 서로의 방법. 하나는 오로지 문자 안에서 모델을 세운 다음 그것에 시선을 던질 때 비로소 거기서 영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다른 하나는 쇼트가 동사로 활동할 때, 혹은 자신의 시청각 기호들이 부사가 될 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임권택은 문장을 유심히 지켜본 다음 그 순간을 느껴본다. 나는 수 없이 많은 독후감을 보았다. 나는 읽었다고 쓰지 않았다. 영화는 문학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보았다고 쓰지 않았다. 그 중에서 임권택의 독후감을 보고 또 보았다. 그냥 한 마디로 <안개마을>은 문자의 독후감이다. (계속) 1982년 91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주)화천공사 각본 송길한 촬영 정일성 편집 김창순 음악 김정길 정윤희 수옥 안성기 깨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