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 감독
- 자크 오디아드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타하 라힘, 니엘스 아레스트륍, 레다 카텝, 질 코헹, 안토니 바슬러, 레일라 벡흐티, 알라 오무주네
켈리 레이차트는 가장 소박한 형식으로 동시대 미국인의 삶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지역의 고유한 풍광 속에서 삶을 버티다가 무뎌지고 바스러지는 인물의 현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녀의 6번째 장편영화인 < 어떤 여자들 >(2016)은 전작을 관통했던 그만의 인장도 찾을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스케치한 몬태나의 풍경과 여성들의 삶은 ‘오리건 3부작’보다 쓸쓸하고 스산하며 적막하다. 현재 직면한 문제들과 씨름하던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 굳게 입을 다문 채 저 멀리로 시선을 던지거나 묵묵하게 계절을 견뎌가는 숲과 나무, 하늘과 구름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한다. 그들은 이미 사라진 것들의 흔적으로 남거나 곧 사라질 것처럼 고요하고 삭막하다. 레이차트의 고유함은 로컬, 독립,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지만 그녀의 온화하고도 단호한 시선은 이러한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오리건 3부작’은 지역의 상황을 통해 미국의 동시대적 문제를 진단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독립적인 제작형태를 통해 미국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주류의 흐름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그녀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인 자유와 해방이라는 가치와 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잃어버린 중년 남성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이미 사라진 세대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인지,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온전하게 지켜질 사람 간의 예의가 존재하는지 탐색한다(< 올드 조이 >(2006)). 젊은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이동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고 그녀의 개가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된다. 낯선 공간에 남겨진 그녀는 불안과 대면해야 하며 알래스카에서 맞이하게 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웬디와 루시 >(2008)). 새로운 삶을 찾아 서부로 이동하는 개척민들이 길을 잃고 사막을 통과하게 된다. 황량하고 피폐한 노정에서 그들이 만난 인디언과 폭력적인 길잡이를 통해 서부라는 지형과 남성의 전유물이 된 서부극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믹의 지름길 >(2010)). 레이차트는 공간을 통과하는 행위에 주목함으로써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거나 제한적인 관심사의 바깥에 버티고 선 삶의 풍경을 탐색하고 인물들의 노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도록 제안한다. 특히 미국인의 꿈과 이상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좌절되는가라는 질문을 짊어진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들은 미국이라는 국가로부터 비롯된 은근하고도 끈질긴 불안을 거쳐 악몽이 되어간다. 그녀의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낯선 곳에 머물러야 하고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우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살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인물과 마주하고 우회로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들의 절박한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들이 당면한 삶의 조건은 영화 바깥의 우리와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점점 줄어드는 돈, 일자리를 찾는 것, 먹을 것과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 안전하게 잠들 장소, 부당한 합의금에 대한 소송처럼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또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자본의 횡포와 실용주의적 사고에 맞서 환경을 구하는 것, 신념과 실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태도에 대한 질문, 9.11 테러-미국이 벌인 전쟁-2008년의 금융위기와 같은 부시 정권의 악행과 무능함의 폭로에 이른다. 레이차트는 미국인들을 위협하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위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면서도 개인의 내밀한 삶을 작동시키는 동력을 꾸준히 모색한다. 그녀의 영화는 지역의 풍광 속에 새겨진 당대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세밀한 삶의 순간으로 인해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선사한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소녀의 빛나는 눈동자, 사랑하는 개를 낯선 곳에 떼어놓을 수밖에 없던 웬디의 절망스런 손짓, 낯선 곳에서 만난 경비업체 직원이 건네준 꼬깃거리는 지폐, 깊은 밤 적막한 소도시를 유유히 활보하는 말의 우아하고도 힘찬 발걸음, 개척시대 학교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사암 더미, 특별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하루를 담은 편지, 목동을 따라 뛰어다니는 사냥개의 활기찬 모습은 일상 속에 감춰진 비범하고 고귀한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겸허함과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관계의 풍요로움(< 올드 조이 >의 두 친구, < 웬디와 루시 >의 두 존재, < 믹의 지름길 >의 강직한 신념을 지닌 부부)도 있지만 한편으로 실패한 여정과 균열되는 관계(오랜 친구인 중년 남성들이 온천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의 삶은 잃어버린 지난날에 대한 향수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불안정하고,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가던 중 사랑하는 루시를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웬디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차마저 잃게 된다. 믹과 인디언이라는 두 길잡이를 동원해서 신앙공동체를 세울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순례자 가족에게 닥친 공포와 두려움의 확산은 서부라는 공간이 배태한 이주와 정착이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2013)는 환경을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젊은 운동가들의 회의와 좌절을 통해 머릿속에서 생산되는 신념과 육체를 통해 실천되는 행위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은 희박하기만 하다.)에서 파생된 곤경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풍경과 인물에 대해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레이차트의 완고한 태도가 중심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인물들은 타인과의 관계가 회복되거나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불가능한 꿈에 대해 전력을 다해 거부한다. 불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없을지라도 삶은 이어질 것이며, 삭막한 여정에서 친밀한 존재와 교감하거나 이별할지 모르고,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 사막의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흩어져 흔적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솔직하고 겸허하다. 오랜 시간 묵묵히 존재하는 풍경과 대면한 인간의 유한성을 수용하고, 미완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당도하고자 애쓰는 노정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레이차트의 카메라를 통해 동시대 서부의 풍광과 세밀한 삶의 기록이 조우한다. < 어떤 여자들 >은 네 여성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녀들이 어떤 삶을 꾸려나가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어떻게 대하는지, 서부라는 풍경이 그들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 믹의 지름길 >이 서부의 횡단기라면, 이 영화는 서부를 맴도는 인물이 그들을 에워싼 풍경을 응시하거나 회피하는 시선으로 건네받는 풍경과 역사에 대한 사색이다. 그런데 응시의 연결망이 너무 쓸쓸하고 음울해서 서부라는 풍경과 그 시대에 대한 종언처럼 느껴진다. 개척기 서부를 통과했던 이주민과 오랜 시간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이 사라진 곳에 사암 덩어리나 황야를 달리는 철길, 드문드문 남아 있는 목장이 서부임을 드러낸다. 정착지를 향해 걷는 고된 행렬, 카우보이와 악당들이 허다하게 뿜어내던 총성, 달리는 말들의 격렬한 운동과 추격은 차갑고 어두운 겨울이라는 계절, 마을을 에워싼 산, 고립된 목장, 길게 뻗은 도로에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레이차트는 퇴적물이 되어버린 서부, 이미 죽어버려 생동하는 힘이 사라진 서부를 사색하기 위해 풍경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으로 기입하는 자들(노인과 인디언 소녀), 풍경과 무관하게 살아가거나(리빙스턴에 거주하는 중년의 변호사와 법대생), 서부를 소유하려는 자(집을 지으려는 여성)를 등장시킨다. 그렇기에 <어떤 여자들>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겨울의 황량한 풍경을 관찰함으로써 경관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응시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풍경에 기입된 서부의 원초적인 기억과 사라진 존재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세밀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보다 잔뜩 흐린 하늘과 낮게 깔린 구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바싹 말라버린 목초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이 주인공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척박한 풍경과 고된 인물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친구라고는 말이나 개가 전부인, 삭막한 겨울을 보내는 인디언 소녀나 골칫덩어리 의뢰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중년의 변호사, 대출금을 갚기 위해 왕복 8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법대생, 고즈넉한 숲에 집을 짓기 위해 개척시대의 사암이 필요한 일 중독자의 겨울은 반복되는 노동과 고립된 생활, 소원에 대한 과도한 집착, 무기력함과 공허함,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피로에 잠식되어 있다. 변호사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의뢰인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며, 잠이 부족한 법대생은 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풍경(과 사람)으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된다. 숲속에 집을 지으려는 여성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도 그녀가 자연을 응시한다기보다 사이가 틀어진 사춘기 딸과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남편과의 단절이 강조된다. 조깅을 하거나 숲길을 걷고 집이 지어질 장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녀조차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집의 미래를 떠올릴 뿐, 현재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겐 눈을 감고 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이웃 노인이 소유한 사암뿐이고, 본고장에서 나는 돌로 집을 짓겠다는 소원조차 소유와 과시, 약탈의 행위로 변질된다. 그녀는 노인이 애틋하게 집과 땅의 역사에 대해 회고할 때에도 그저 사암을 가져가라는 허락만 요구할 뿐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기어이 사암을 싣고 가던 날, 노인이 집 안에서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하면서도 절망적인 선언처럼 다가온다. 집의 형태를 갖춘 가족의 텐트/노인 홀로 사는 미완성의 집, 오랜 시간 녹지 않았을 눈이 더께로 앉은 산을 배경 삼아 서부의 무덤처럼 놓인 사암더미/여인의 텐트 근처에 차곡차곡 정리된 사암, 필요에 따른 거래/증여의 행위 끝에 마치 무덤에 갇힌 왕의 미라처럼 보이는 노인의 끈덕진 응시가 놓여 있다. 개척기의 서부, 마을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교회보다 먼저 지어진 학교의 흔적만 남은 돌무더기가 치워진 곳은 노인이 거주한 지 50년 넘게 지켜온 터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노인의 집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마치 개척기의 역사가 스며든 대지와 몬태나의 스산한 풍경이 노인의 응시와 더불어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예언자 같다. 비록 기억하고 응시하는 행위자가 사라질지언정 레이차트는 인물보다 먼저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만이, 그들의 사라짐까지 목도하는 것이 서부와 그곳에서 살았던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이 자신의 죽음과 서부의 소멸을 염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 어떤 여자들 >에서 가장 서부와 닮아 있는 사람은 목장 소녀이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국가보다 더 오랫동안 서부와 함께 살아온 존재이자 삶의 터전으로써의 서부와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목장, 말, 카우보이로 대표되는 서부를 공유하고 있으며 원주민인 선조들의 삶을 기억함으로 인해 온전히 풍경에 속해 있는 존재가 된다. 소녀는 우연히 학교법 강의에 참석하게 되고 법대생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낀다. 마구간과 목장 숙소를 규칙적으로 오가면서 일하는 그녀의 단조로운 삶에 파장이 일기 시작하지만, 피로에 찌들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운 법대생은 인사도 없이 강의를 그만둔다. 소녀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리빙스턴으로 향하고 도시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카우보이모자가 진열된 상점을 구경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결국 법대생을 찾게 되지만, 정작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자신을 기다리는 유일한 존재인 동물들에게로, 자신이 속한 서부로 돌아가던 길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소녀의 차가 스르륵 미끄러지다가 마른 목초지에 멈춰 선다. 이 움직임은 중년의 변호사가 쇼핑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디언들의 전통춤 공연과 대비를 이룬다.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삶이 한낱 구경거리가 되면서 도시의 상품으로 전락했고, 그렇게라도 연명해야 하는 삶의 스산함은 쇼윈도에 진열된 모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념품이나 상징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소녀는 야생의 삶에 대한 열망과 자신에게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아직 지니고 있기에 존귀하다.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도시를 찾았을지 모를 소녀의 방문은 실패한 여정이었어도 깊은 감동을 남긴다. 백인 가족의 단란한 식사를 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우아하고 당당한 자세로 말을 타고 활보하는 모습은 정성껏 말의 갈기를 매만지는 손길과 말과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발, 목초지를 가로지르는 생생함과 더불어 그녀의 존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오랜 시간 거주했던 선조들의 땅을 떠났다가 씁쓸한 감정을 지닌 채 돌아오는 소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녀의 자동차가 갓길로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지만 다시 소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은 여행 이후 소녀의 변화 여부를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는 아직도 단단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목장에는 그녀와 겨울을 함께 보내는 동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그녀의 의지로 말을 길들이거나 돌보는 행위가 그녀를 지탱할 것이며, 그녀를 품고 있는 서부 또한 소녀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고심한다. 일상을 영위하는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것 같지만,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거나 노동하는 매 순간 첨예하게 개입된 정치적 사안은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과정에 놓인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 불온한 시대에 잠시나마 온기를 더하는 숨결, 인물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미국의 풍경들 속에 깊이 스며든다. 나아가 < 어떤 여자들 >은 서부의 지형과 지리적인 풍경에서 서부라는 역사와 영화적 기억을 덧대어놓는다. 그것은 서부와 이별했던 남자들, 사막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 사막을 달려 멀리 사라지는 기차와 같은 회고의 대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위대한 풍경이 된 서부는 적막할지언정 그녀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서부를 되살리거나 망각한다. 하지만 사라짐에 대해 무심한 응시가 되었건, 끈질기게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는 시선이건 서부를 떠돌던 그녀들의 고단하고 피로한 삶을 향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과 삶의 감각이 지닌 힘을 믿으며,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삶의 가치를 탐색하는 것이 영화가 해야 하는 일’임을 실천하는 그녀의 영화가 아름답고도 위대한 것은 미완의 시간을 견디면서 목적지에 도달조차 하지 못한 인물들에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그녀의 시선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이 살아내고 응시한 것은 정직하고 윤리적이며 풍경에 대해 겸손하고 솔직한 레이차트를 향하고 있으며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에 깃든 과거와 현재를 대면하도록 인도한다. 그들이 사라진 존재들과 생성되는 것들에게 통감할 때 정치, 사회적 표명과 내밀한 감정이 일체를 이룬다.
< 타바코 로드 >(1941)는 당대에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했으며 오늘에도 존 포드의 영화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영화에 속할 것이다. 앤드루 새리스의 표현을 옮기면 이 영화는 “1940년과 1941년에 거둔 존 포드의 엄청난 성공행렬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사람들은 최고의 위치에 오른 포드가 왜 이런 프로젝트에 손댔는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포드의 열렬한 찬미자인 태그 갤러거의 두꺼운 저서도 이 영화에는 단 세 문장만 할애한다. “시나리오를 쓴 누널리 존슨은 < 타바코 로드 >가 엉성하고 서투른 구식 코미디에 의존함으로써 대실패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몇몇 마술적 순간들이 등장하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하층민을 바라보는 포드의 단순명료한 시선이 여기선 들뜬 포퓰리즘의 과장된 제스처로 대체되었다.” < 타바코 로드 >의 원작은 브로드웨이에서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최장기 공연기록을 세우며 대성공을 거둔 연극이다. 어스킨 콜드웰Erskine Caldwell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잭 커크랜드Jack Kirkland가 희곡을 썼다. 앤드루 새리스는 이 영화의 실패 이유가 당시 할리우드 제작준칙(hollywood production code)이 콜드웰의 재기 넘치는 음란함과 커크랜드의 화장실 유머를 용인하지 않는 바람에 존 포드와 누널리 존슨이 원작의 많은 부분을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판단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이 영화의 제작 경위에 대해선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어 당시 포드의 의중을 알긴 힘들지만, 적어도 포드가 그의 영화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음란함과 화장실 유머 때문에 원작에 이끌리진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1937년 오마하, 연극 <타바코 로드>가 공연되는 극장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이 영화의 지지자는 두 사람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2014년 서울과 부산에서 존 포드 회고전이 열릴 무렵 간행된 「씨네21」에 보내온 자신의 존 포드 10베스트 명단에 < 타바코 로드 >를 포함시켰다. 이 명단에는 포드 전문가들도 잘 거론하지 않는 무성영화 <버킹 브로드웨이>(1917) <켄터키 프라이드>(1925)도 들어있다. 그리고 하스미다운 코멘트가 덧붙여져 있다. “< 철마 >(1924) 혹은 < 3인의 악인 >(1926)에서 시작해 < 수색자 >(1956)으로 끝나는, 그리고 < 밀고자 >(1936) < 역마차 >(1939) < 젊은 날의 링컨 >(1939) 등이 포함되는 포드의 10베스트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도쿄의 유난히 더운 날씨 때문에 내 마음은 포드의 덜 알려진 영화들로 향한다. 물론 추운 날에는 이 명단이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포드 열광자인 린지 앤더슨이다. 그는 “관점의 일관성을 고수하면서도 무드와 악센트를 교차시키는 포드의 재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 타바코 로드 >를 제시한다. 앤더슨은 이 영화를 “회한에 찬 애상과 격렬한 슬랩스틱, 냉혹한 풍자와 부드러운 감상성을 오가며 무드를 끝없이 변주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특출한 솜씨”를 보여주는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내로라하는 포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만큼 극단적으로 견해가 갈리는 영화는 <타바코 로드> 외엔 찾기 힘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노부부인 지터 레스터와 에이다 레스터는 목화농업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황폐화한 타바코 로드에 살고 있다. 17명 정도의 자식을 두었지만(그들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이젠 모자라고 착한 딸 엘리 메이와 역시 모자라지만 거의 미친 아들 듀드, 그리고 유령처럼 주위를 서성이다 불현듯 사라지는 노모가 가족의 전부이며, 끼니를 잇기 힘들만큼 가난하다.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의 땅이 은행에 차압당하고, 며칠 안에 농지 임대료를 내지 않으면 3대째 살아온 타바코 로드를 떠나야 할 처지다. 위기의 지터 노인은 엉성한 작전을 벌인다. 사적인 소감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2005년쯤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정상이 아니어서 마음이 가는 인물은 하나도 없는 데다, 특히 소란스럽고 경박한 아들 듀드는 때리고 싶을 만큼 짜증 나고 거슬렸다.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는 사실상 없으며,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인물들이 벌이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헛소동과 실소가 새 나오는 촌스런 유머와 슬랩스틱이 영화의 거의 전부였다. 난센스 코미디를 넘어선, 요즘의 은어로 ‘병맛’ 코미디였다. ‘이건 위대한 존 포드의 영화일 수가 없다.’ 황당무계한 영화 리스트라는 게 있다면 당장 최상위에 올리고 싶었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엔 즉각 해명하기 힘든 과격하고 대담한 몸짓이 관류하고 있다는 느낌,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사적이고 무모한 그 몸짓이 모종의 해방감을 빚어낸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이 영화보다 1년 전에 만들어져 모두에게 절찬 받은 < 분노의 포도 >를 다시 본 뒤에 더욱 강해졌다. 만일 누군가 <분노의 포도>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면 < 타바코 로드 >를 당분간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에서 뭔가 답답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사적인 느낌의 몇 자락을 말해보려 한다. < 분노의 포도 >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례없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메시지의 노골적 언명이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여기서 하층민인 톰 조드 일가는 나쁜 세상에 의해 상처 입고 수탈당해 떠도는 순결하고 가련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우리는 이 시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같은 의미에서 이 시선이 규범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의 견해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라면 특별히 칭송할 것도 문제 삼을 것도 없는 이 규범적 시선이 존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가 봐온 바와 같다. 존 포드의 영화는 대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스테핀 페칫이 연기하는 흑인은 충직하지만 멍청하며, 인디언은 강직한 전사와 잔혹한 살육자를 수시로 오간다. 여성들은 <일곱 여인> 등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수동적이며, 하층민들은 대체로 선량하지만 소란스럽고 잘 속는다. 포드의 탈규범적인 성향은, 그의 정치적 보수성을 비판하는 진보적 비평가들에 의해 종종 경시되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특별한 활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포드는 지금 세대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전력투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거침없다는 포드의 각인이 새겨졌다”고 말할 때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 분노의 포도 >는 공백과 비약의 수사학(<분노의 포도> 편 참조)에도 불구하고 < 러틀리지 상사 > < 샤이엔의 가을 > 등과 함께 포드의 드문 규범적인 영화에 속한다. < 굽이도는 증기선 >(1936)이 하층민의 악덕과 무지 그리고 미덕과 용기가 난장을 벌이는 축제의 영화라면, <분노의 포도>는 무고한 하층민의 고난과 시련이 점화한 분노의 영화이며 정의의 영화다. 두 영화 사이에 놓인 1939년의 ‘젊은 링컨’은 난장의 도취에서 정의의 소명으로 망설이며 느리게 이행한다. < 타바코 로드 >의 놀라운 점은 중년의 포드를 성공으로 인도한 이 궤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스스로 탈선한 열차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가난한 주요인물 모두가 동정할 여지도 없는 금치산자에 가까우며, 서사는 비루한 소동들의 연쇄일 뿐이다. 얼핏 보기에 포드는 < 분노의 포도 >에서와는 정반대로 이 가련한 하층민들을 조롱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터 노인은 가족과 합세해 아내(지터의 막내딸)가 도망갔다며 징징거리는 사위 러브(놀랍게도 워드 본드가 연기한다)를 구타해 그가 갖고 있는 무를 빼앗아 먹으며, 도망간 막내딸 대신 언니를 그에게 반강제로 보낸다. 지터는 어렵사리 구해온 옥수수를 먹느라 아이들 몰래 삶아 먹느라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집을 떠났다가 얼떨결에 돌아온 지터가 “어제부터 할머니(그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듯)가 안 보이네. 저기 숲으로 가서 죽었나 보군”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기가 막힌다. 물론 등장인물의 슬픔에 카메라가 깊이 동조하는 ‘마술적 순간’들이 간혹 등장하지만, 이 장면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왜소해 아무리 봐도 애상과 풍자, 슬랩스틱과 감상이 균형을 맞추었다는 린지 앤더슨의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런 표현은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젊은 날의 링컨 >에나 어울릴 것이다. 무엇보다 포드는 이 영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시키길 거부하려는 것처럼 결말조차 터무니없어 보이도록 만들었다. 모든 소동이 엉겁결에 정리되었을 때, 그가 얻은 건 10달러밖에 없다. 7년 동안 멈춘 목화 농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했을 두 아이는 그사이에 떠났다. 그는 이미 농사지을 힘이 남아있지 않아 보일 만큼 늙어버렸다. 그런데도 이 추레하고 왜소한 노인은 어이없게도 “올해가 내 인생 최고의 해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 모든 면에서 < 타바코 로드 >는 < 분노의 포도 >를 뒤집어버린다. 마치 <분노의 포도>가 자기 영화가 아님을 강변하려는 듯, 같은 사회적 처지의 주인공을 내세워 놓고 인물도 사건도 모두 저열화하며, 진지한 감정과 의미 있는 행동의 가능성을 봉쇄한다. 간혹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되 균형과 조화를 파기한다. 자기 반동 혹은 자기 파괴의 시도처럼 보이는 포드의 이런 선택의 동기를 짐작하기는 힘들다. 다만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면 포드를 불균형의 충동, 불협화음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는 작가로 다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뿐이라면 < 타바코 로드 >는 ‘흥미로운 실패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난감함 속에서도 내가 매혹된 건 이 영화의 어떤 몸짓과 운동의 형상들이다. 난센스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방향의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부서짐의 운동이고 유일하게 일관된 행위가 있다면 사물을 부수는 행위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1 #2 #3 타바코 로드로 불리는 이 공간은 이미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다. 이웃의 저택도 지터의 초라한 오두막집도 모두 폐허의 형상이다. #4 #5 폭발음을 내며 위태위태하게 마을 길을 달려오는 지터의 작은 지프는 담을 부수며 진입하고 스스로도 바퀴가 하나씩 내려앉는다. 비가 쏟아지면 지터의 헛간도 현관도 내려앉는다. 이런 붕괴의 형상이 도입부에 제시되었다면 통상적 서사는 붕괴의 반대방향 즉 재건과 재생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 타바코 로드 >의 서사도 표면적으로 그런 방향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을 출신 중에서 제일 멀쩡한 청년 팀이 지터를 도우러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거의 핑계다. <타바코 로드>의 진정한 관심사는 이 붕괴 직전의 공간에 고급승용차가 소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다. 경위를 간단히 밝혀두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온 이웃 여인 베시는 이 마을의 엉터리 목회자이자 얼치기 예언자다. 그녀는 지터의 정신 나간 아들 듀드(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게 유일한 취미인 저능아다)에게 반해 그와 결혼한 뒤 자신의 재산 전부인 보험금 800달러를 고급승용차(Ford Super De Luxe Convertible)를 사는 데 써버린다. 지터는 1년 치 농지 임대료 100달러가 없으면 쫓겨나게 되므로 이 승용차가 향후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놓일 것으로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사태는 황당무계하게 전개된다. #6 #7 #8 #9 모자란 듀드는 차를 사자마자 나무를 들이받고 덮개를 미친 듯 뜯어내며 차를 부수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손봐주겠다며 전조등을 만지던 지터는 차를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결과 하루 만에 고급승용차는 초라한 고물이 되어버린다. 차를 몰래 팔아 100달러를 마련하려는 지터의 시도 외엔, 이 고급승용차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다. #10 그리고 이 영화의 백미가 등장한다. 운전을 방해했다고 듀드가 러브에게 시비를 걸자, 칭얼거리던 러브는 이제야 워드 본드답게 말없이 듀드를 때려눕힌 뒤 길가에 처박힌 차를 뒤집어 박살 내버린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헛소동의 심장이다. 붕괴 직전의 이 공간에 고급승용차가 소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 타바코 로드 >의 진정한 관심사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그것도 함께 부서져야 한다. 이 이질적 사물이 빨리 타바코 로드 자신의 형상처럼 무너져 내려야 한다. < 타바코 로드 >는 표면의 서사와는 무관하게 부서짐의 운동이며 붕괴의 유희다. 지터의 마지막 대사는 붕괴운동의 완료를 위장하며 동시에 암시하는 말이다. 사태가 호전될, 다시 말해 붕괴가 멈추고 재건이 개시될 어떤 전망도 없을 때, 가장 좋은 일은 죽음이다. 지터도 할머니처럼 사라져 죽어갈 것이며 이것이 타바코 로드의 형상이 이를 종착지일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다만, 서사의 표면적 흐름과는 정반대의 운동과 형상이 전개되는 기괴한 영화를 달리 본 적이 없다.(계속)
증기선이 질주한다. 목재를 태우고, 목재가 떨어지자 뜯어낸 갑판을 태우고, 구명보트를 태우고, 밀랍인형을 태우고, 악마의 음료이자 만병통치약인 럼주를 태우며 질주한다. 닥터 존(윌 로저스)이 이끄는 낡은 ‘클레어모어 퀸’ 호는 폭발할 듯 불꽃을 뿜으며 1890년대의 미시시피 강을 달린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태우자(존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는 여전히 술에 취한 채 동료 선원도 태우려 한다) 비로소 결승점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이르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간발의 차이로 닥터 존의 조카 듀크는 교수형을 면하고, 그들 가족은 또 다른 증기선 ‘프라이드 오브 파둑’을 획득한다. 증기선은 자기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리며, 영화는 서사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린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이 걸출한 액션영화라면(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영화를 최고의 액션영화 50편 중의 하나로 뽑았다), 증기선의 물리적 운동감 때문이 아니다. 사실 이 증기선은 그렇게 날렵하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영화의 서사도 민첩하기는커녕 태평스럽고 느리기 짝이 없다. 태워질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던 것들,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기 힘들었던 차이들이 화로에서 한몸이 되어 불타오른다. 불타오르며 둔중한 증기선을 힘차게 밀고 간다. 우리를 사로잡는 건 배의 속도감도 불의 물리적 형상도 아닌, 배의 육체도 서사의 육체도 다 태워버릴 듯한 난폭하고도 맹렬한 불의 활동이다. #1 #2 1939년 < 역마차 >가 나오기 전까지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위대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윌 로저스를 주연으로 기용한 세 작품(< 닥터 불 > < 저지 프리스트 >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순례여행 > <에어 메일> 등을 제외하면 그가 <역마차> 이전에 만든 20여 편의 유성 영화들은 어딘지 허술하고 독창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물론 < 밀고자 >(1935)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긴 했지만 이 영화는 과대평가된 포드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동년배인 킹 비더와 조셉 폰 스턴버그가 무성 시대의 말기와 유성시대의 첫 10년 동안 자신의 대표작들을 쏟아낸 것과 비교하면,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차라리 탐색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은 이 탐색기의 의심할 수 없는 최고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 포드의 거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처음엔 자신을 한 사건의 서사로 제시하지만 사건이 거의 잊혀질만큼 그것의 장악력이 느슨해지면서, 그 틈새들 사이로 유머와 헛소동, 잉여의 몸짓과 표정들, 그러니까 삶의 조각들과 세계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빛을 내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포드는 이 조각들의 난장을 플롯의 기예로 정리할 생각이 없다. 대신 하나의 결정적 활동 안에 그들을 밀어 넣는다. 미시시피 강에서 증기선 경주가 벌어지는 마지막 20여 분의 시퀀스는 그 조각들이 불타오르며 벌어지는, 영화사가 기억해야 할 황홀한 축제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닥터 존은 미시시피 강 일대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럼주를 만병통치약으로 속여 판다. 그는 한때 항해사였고 유일한 가족은 조카인 항해사 듀크다. 두 사람은 닭장처럼 초라하고 낡은 증기선 ‘클레어모어 퀸’을 최근에 구입해 들뜬 상태다. 듀크가 늪지대에 사는 소녀 플리티 벨과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리고 나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에게 추근대던 선원을 살해한 것이다. 선원이 먼저 칼을 뽑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이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얼뜨기 예언자 ‘새로운 모세’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듀크의 사형이 확정되고 항소는 거부당했다. 사형은 증기선 경주가 끝나는 시점에 경주의 결승점에서 집행될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듀크의 결백을 증언할 ‘새로운 모세’를 찾아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여기엔 멀쩡한 사람이 없다. 주인공인 닥터 존은 사기꾼 약장사이며, 그의 조카는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 자신을 새로운 모세, 새로운 엘리아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예언자들, 자수하러 온 살인자에게 귀찮다는 듯 감옥 열쇠를 던져주는 보안관, 사형집행을 앞두고도 증기선 경주에 더 관심이 많은 주지사, 항상 취해있는 알콜 중독 기관사 에페(프랜시스 포드) 등등, 이곳은 사기꾼과 가짜 예언자와 주정뱅이와 게으른 관리의 세계다. 여기엔 영웅도 악인도 없다. 신기하게도 포드는 이 비루한 세계를 더없이 평화롭고 따뜻한 곳으로 그려놓았다. 닥터 존과 ‘새로운 모세’는 적이지만 둘은 부딪히는 일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기 치며 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미 벌어진 정당방위 살인과 곧 벌어질 부당한 사형집행.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문제를 포드는 사소하게 다룬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그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의 서사는 스스로 종종 그 문제를 잊어버린 것처럼 진행된다. 인물도 서사도 주어진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다. 포드는 때로, < 황야의 결투 > 혹은 < 웨건 마스터 >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심각한 문제를 다룰 때조차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가 사건을 등장시킨다 해도 사건을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중심 사건조차 서사의 한 조각일 뿐이거나 때로 핑계에 가깝다.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살인과 사형집행은 무엇의 핑계인가. 혹은 살인과 사형집행을 사소화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결국 증기선의 연료가 될 두 소재, 럼주와 밀랍인형을 먼저 떠올려보자. 닥터 존은 럼주가 전설의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의 처방약이라고 선전한다. ‘새로운 모세’는 럼주가 악마의 음료라고 주장하며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성령의 리본을 판매한다. 각각 전설과 성경을 근거로 럼주를 찬미하거나 규탄하는 것이다. 의미의 원천인 전설과 성경이 여기선 두 사기꾼의 효과적인 선전도구로 작동한다. 하지만 포드는 이 사기행각들의 악덕을 드러내기는커녕 그것에 유쾌한 활력과 정감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주정뱅이 에페가 성령의 리본을 달고 악마의 럼주를 들이키며 즐거워할 때, 그는 사기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조작된 의미들과 유희를 벌이는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존재처럼 보인다. 증기선 안에 설치된 밀랍인형 박물관은 모세와 선지자들, 나폴레옹, 조지 왕, 그랜트 장군 등 위대한 전설을 거느린 역사적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영리한 사기꾼 닥터 존은 그들을 남부의 농부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로 바꿔버린다. 조지 왕은 조지 워싱턴으로, 북군의 그랜트 장군은 남군의 리 장군으로, 모세는 무법자 제시 제임스로 명찰을 바꿔단다. 이 영화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박물관을 부수러 온 성난 농부들이 제시 제임스로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리 장군에게 경례를 하는 장면이다. 총을 든 제시 제임스는 좀 전까지 모세였고, 리 장군은 좀 전까지 자신들이 싫어하는 그랜트 장군이었다. 물론 둘 다 밀랍인형이라는 모조품이다. #3 #4 #5 #6 럼주와 밀랍인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들 속에서 역사와 전설, 신화와 성경은 제멋대로 전용되며 조작된다. 진리의 원천, 의미의 심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이곳에서 모든 것은 표층의 유희로 전유 되어 끝없이 변형된다. < 굽이도는 증기선 >가 기호 놀이라면 기의를 따돌린 기표들의 아방가르드적 유희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일회적이며 종종 기만적인 의미작용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기호놀이다. 이제 이 영화에서 사건의 역할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집행은 사건으로서의 중대성 때문이 아니라 이 기호놀이의 종결자로 동원된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유일한 증인 ‘새로운 모세’를 찾아 사형집행 전까지 결승점에 도착해야 한다. 그 둔중한 육체를 전속력으로 약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에너지이며 힘이다. 이제 주변 사물들은 그것의 유동하는 의미와 상징이 아니라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수한 물질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조지 워싱턴, 리 장군, 제시 제임스, 악마의 음료, 만병통치약은 사라지고 오직 연료로서의 물질들만 남았다. 사형집행은 기만적이고 유희적인 기호놀이를 중단시키고, 모든 것을 힘과 속도의 문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목재는 물론이고 갑판도 구명보트도 태워버린 뒤, 닥터 존이 외친다. “박물관을 태워.” 이제 이름들과 의상들이 상징들이 사라지면서 밀랍인형들이 불탄다. ‘박물관’마저 다 태워버리자 화로는 다시 죽어간다. 부당한 사형집행을 막을 시간도 사라져 간다. 이때 주정뱅이 에페가 화로 곁에서 럼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를 본 ‘새로운 모세’가 화를 내며 술병을 빼앗아 화로에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악마의 음료가 그토록 가공할만한 연료인지 몰랐을 것이다. 누가 주정뱅이를 비난할 것이며, 거짓예언자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우연의 간계는 때로 악덕을 천상의 미덕으로 바꿔놓는다. 럼주가 마지막 연료로 등장해 화로에서 폭음을 내며 배를 집어삼킬 듯 불꽃을 내뿜을 때, 탄성을 참기 힘들다. 닥터 존에게 럼주는 이제 조카의 죽음을 막은 진정한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새로운 모세’에게 이것은 악마의 음료를 태워 없애며 한 생명을 살린 신성한 의식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사기꾼이며 엉터리 예언자였고 또한 서로 적이었지만, 어떤 논쟁도 대결도 없이 럼주를 함께 불태우는 행위 하나만으로 자신의 사기와 엉터리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정당화한 것이다. #7 의지와 우연, 미덕과 악덕들이 모두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르자 비로소 간발의 차이로 행복한 목적지에 이른다. 이 대책 없는 서사의 낙천성은 세계관의 낙천성과 무관하다. 그것은 의지의 뜨거움이 아니라 운명의 차가움에 대한 긍정이며, 운명의 차가운 힘을 알게 된 자의 유희정신이다. 존 포드는 후에 “이건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나서기 좋아하는 새 매니저(대릴 F. 자눅을 말한다)가 와서 코미디를 다 덜어내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불평했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는 여전히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중 하나이고, 소란과 난장의 활력이 영화 전부를 지배하는 포드의 첫 유성영화이며, 그의 후기 대표작들을 예기하는 걸작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3주 전인 1935년 8월 15일, 윌 로저스는 비행기 사고로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를 누빈 카우보이, 신랄하고도 유머러스한 칼럼니스트, 보드빌과 연극과 영화를 오간 배우이자 타고난 익살꾼이었던 로저스는 대통령에서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당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한 사내였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의 원래 엔딩은 로저스가 또 다른 증기선 선장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었지만, 그의 죽음 직후 그가 증기선에 편히 누워있는 지금의 엔딩 장면으로 바뀌었다. 원래 엔딩으로 상영할 경우 극장이 울음바다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