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정
- 감독
- 홍상수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정보석, 문성근, 이황의, 김영대, 박미현, 조원희, 정호봉, 이은주, 조련, 송미정, 구경은, 문홍식, 김소정, 임경미, 김경만, 조문의, 이성진, 최성숙, 한남철, 정유민
홍상수 감독의 영화 < 오! 수정 >(2000)에는 의미와 맥락을 추정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다. 소(小) 제목이 부여된 5개의 장으로 구성된 플롯에서 2장 ‘어쩌면 우연’과 4장 ‘어쩌면 의도’의 3일째(번호 ‘3’이 붙어있다)에 해당하는 삽화에 등장하는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이 대표적이다. 그저 지나가는 여인에 불과하여 관객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 여인은 2장과 4장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타난다. 2장에서 재훈(정보석)과 수정(이은주)이 호프집에 있는 시간, 영수는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박 기사와 출근 문제를 두고 크게 언쟁을 벌인다. 이어서 재훈과 수정의 술자리에 합류하기 위해 영수가 호프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직후, 이 여인은 영수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간다. 4장에서는 수정이 호프집을 나와 머플러를 매고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로 이동한 직후 바바리 코트 여인이 나타나 호프집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영수가 호프집으로 들어가고(2장), 수정이 호프집에서 나와 시야에서 사라진 뒤(4장)에도 이 여인이 호프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직하게 기다려준다. 시간과 기억의 차이를 매개로 하여 유희하는 <오! 수정>의 플롯에서 이 성명불상의 여인은 시간을 나타내는 기호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영수와 수정의 시간이 교차하는 좌표 위에 이 여여인이 서 있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보다 더욱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은 요리사이다. 이 인물은 1장 ‘온종일 기다리다’와 5장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에 등장한다. 1장에서 우이동의 호텔방에 있는 재훈이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쇼트에 이어 누군가의 시점을 암시하는 듯한 부감 쇼트가 뒤따른다. 호텔의 노상 주차장을 찍은 이 기울어진 구도의 쇼트에서 요리사는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을 향해 사선으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한다. 그의 이동 경로와 속도에 맞춰 카메라는 틸트-업하면서 요리사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야기가 종결되는 5장에서 요리사는 다시 나타난다. 1장에서와 동일한 구도의 쇼트에서 이번에는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걸어 내려온다. 즉, 요리사가 이동하는 형상은 두 장안에서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어떤 중요성도 부여되지 않은 것 같은 이 남자는 왜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가. 스토리나 인물, 사건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비 서사적인 존재로, 어떤 극적 기능도 담당하지 못하는 잔여로 그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시간과 기억을 조각내고 나란히 그것을 대조하도록 디자인한 <오! 수정>의 내레이션 전략에 의해 기능을 부여받은 에이전트이다. 요리사가 프레임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하는 이미지와 걸어간 길을 다시 되밟아 오는 이미지는 1장과 5장에 나란히 놓여 두 개의 시간을 종합하도록 한다. 여기서 요리사는 1장의 표제를 장식하고 있는 ‘온종일’이라는 시간의 층위를 함축한 정보-기호가 된다. 1장에서는 재훈이 택시를 타고 우이동 호텔방에 들어가 수정에게 전화를 거는 행위가 묘사되는데, 이 시간은 하루 중 이른 아침에 해당한다. 전날 재훈은 수정과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짝을 이루기’ 위한 충동에 사로잡혀 너무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조급한 마음에 잠을 많이 자지 못한 재훈은 호텔방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고 그 시간 요리사는 노상 주차장을 걷고 있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요리사의 쇼트는 따라서 이른 아침 자신의 일터인 호텔 식당을 향해 출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5장에서는 마침내 수정이 호텔에 당도하여 재훈과 ‘짝을 이루고’, 두 사람이 미래를 기약하는 듯한 삽화가 기술된다. 한 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다는 수정의 고백에 환희에 젖는 재훈의 이전 반응에 비추어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5장의 메시지는 남자의 아둔한 믿음을 희화화한다. 섹스를 한 후 침대 시트 위에 묻은 수정의 피를 욕실 안에서 씻어내면서 재훈과 수정이 나누는 미신을 주제로 한 대화에 이어 요리사의 쇼트가 삽입되어 있다. 1장에서의 묘사와 차이는, 요리사가 향했던 식당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5장에는 없으며 주차장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요리사의 쇼트 뒤에 수정이 호텔방 창문 앞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처리된 쇼트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1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모호하지만 5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암시된다. 요리사가 근무하는 식당은 1장에서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출발하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것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요리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1장과 5장에서의 두 쇼트를 종합하면 재훈은 ‘출근에서 퇴근까지’ 수정을 기다린 셈이 되고, 비로소 ‘온종일’이라는 지속된 시간의 형상이 완결된다. 재훈이 호텔에서 온종일 수정을 기다렸다는 명시적 증거가 이 요리사인 것이다. 서사 정보를 제시하는 홍상수의 방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홍상수는 구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긴요한 정보-기호들을 은폐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어떤 기능도 부여받지 못한 행인이나 아낙네, 사물들이 인상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오프닝에 프레임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약수 물통을 끄는 여인, 한식당 ‘큰기와집’의 주방 아주머니, 재훈과 수정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의 주인, 재훈의 벤츠를 모는 김 기사 등이 이런 존재들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프레임의 앞과 뒤를 서성이면서 미스터리를 자아낸다. 혁신적인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이들은 발견을 기다리는 보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오! 수정>의 흑백 이미지는 이들을 위한 조력의 형식이다. 흑백은 동일한 세팅 위에서 차이를 감지하는데 요긴한 스타일 상의 전략이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 여인은 그 차이를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이미지 특성에 따라 구분된다. <오! 수정>은 버려지는 디테일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내러티브의 꼴을 보여준다.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유습화된 권력 관계로부터 떠밀려 있던 사소한 것들의 위력, 그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성립되는 대안 서사의 한 유형이다. 홍상수는 쇼트의 형태를 결정하는 구도와 앵글, 프레이밍, 거리, 크기 등의 조형적 요소들이 어떻게 서사 정보에 대한 관객의 인지작용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구조를 활용한다. 여기서 홍상수는 조각난 쇼트를 조립하여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관객들에게 엄청나게 큰 책임을 지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홍상수 의 열아홉 번째 영화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독일 함부르크 해변에 서 있던 영희( 김민희 )를 업고 간 (1부의) 검은 옷의 남자는 그녀를 (2부의) 강릉에 데려다 놓는다. 그곳엔 폐인처럼 지내다 겨우 신작 준비에 들어간 영희의 옛 애인인 감독 상원( 문성근 )도 와 있다. 사실 홍상수에게 강릉은 낯선 곳이 아니다. 그가 영화에서 공간이 아닌 ‘장소’를 선택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선택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 강원도의 힘 >의 주인공 지숙( 오윤홍 )도 강릉을 두 번 찾아간다. 지숙의 (첫 번째) 강릉행 여정은 상권( 백종학 )에 의해서 느슨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상권이 지숙과 같은 강릉행 기차를 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관객들은 지숙의 이야기(편의상 1부)와 상권의 이야기(편의상 2부)를 포개 놓고 ‘부지런히’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지숙 일행이 지나쳤던 여자에게 상권은 ‘인상이 깨끗하다며’ 지분대고, 1부에서 사고사로 알려졌던 여자의 죽음은 2부에서 상권의 신고로 인해 살인 사건으로 밝혀진다. 낙산사를 찾은 지숙이 남긴 기와불사 메시지(‘어머니 건강하세요’) 역시 2부에서 상권이 발견하고, 지숙이 집 앞에서 발견한 낙서(‘조금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를 상권이 썼다는 것도 관객들은 나중에 알게 된다. 영화는 1부에서 던진 질문을 2부에서 답하기도 하고, 1부에서 무의미하게 보였던 것들의 의미를 2부에서 채워 주기도 한다. 두 개의 시간이 교차하고 공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반복과) 차이를 발견하고, 그 공백을 능동적으로 메우는 것은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부지런한’ 관객들은 이후 17편의 영화를 거쳐오면서 열심히 학습해 왔다. 실제로 그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 관객들은 홍상수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기꺼이 빠져들곤 했다. 홍상수의 영화들 20편 가까운 영화를 거치면서 홍상수 의 ‘차이와 반복’도 발전(혹은 변주)을 거듭해 왔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들에 의해 반복 재현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오! 수정 >) 꿈이나 판타지를 경유하여 반복되기도 하며(<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서로 다른/같은 인물들이 동일한/다른 공간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강원도의 힘 > < 생활의 발견 >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하하하 >). 어떨 땐 현실이 영화를 반복하기도 하고(< 극장전 >),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이 반복되기도 하며(< 자유의 언덕 >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유사한 사건을 모르는 척 서로 다른 인물들이 반복하기도(< 북촌 방향 >), 서로 다른 사건이 같은 인물(배우)에 의해 반복되기도 한다(<극장전> <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 심지어 최근작 두 편(< 밤의 해변에서 혼자 > < 그 후 >)은 홍상수 자신의 현실을 영화가 스스로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차이-반복’의 틈새는 커지기도, 혹은 작아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영화 ‘내(內)’ 리듬 이외에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를 가로지르는 영화 ‘간(間)’ 리듬도 흥미로운 고민거리이지만, 여기에서 논의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차이-반복-틈새’라는 ‘운동’을 학습해온 관객들은 그 관성(慣性)으로 인해 (능동적이다 못해) 무리할 정도로 영화의 틈새를 메우려 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에 남겨진 나머지, 잘 의미화되지 않는 ‘잉여’에 대해서는 슬며시 눈감아 버리고 만다. 홍상수는 날카롭게 (마치 퍼즐을 배치하는 것처럼) 이 점을 파고든다. 산에 오르다 지숙이 발견한 금붕어는 상권이 키우게 된 금붕어 일리 없다. 그리고 지숙이 산 채로 묻었기 때문에 상권의 금붕어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것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은 두 개의 사건을 지숙과 상권, 그리고 죽은 태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고 싶어진다. 두 개의 우연한 독립 사건을 ‘차이-반복-틈새’의 운동 안에 슬며시 밀어 넣은 건 홍상수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관객들이다. 그러니 홍상수가 영화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매번 ‘관객들이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대답해 온 건 그냥 하는 말의 유희가 아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운동의 관성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자전거 바퀴의 반복적인 회전 운동만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 자전거가 어디로 나가는지 절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도 홍상수이지만, 핸들을 잡고 있는 것 역시 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홍상수의 게임의 규칙, 그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운동이 어디로 향하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만이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홍상수 영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의 게임의 규칙의 출발점이기도 한 <강원도의 힘>을 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 강원도의 힘 >에서 지숙과 상권이 교차/반복하는 여정은 첫 번째 강릉행 일 뿐, 지숙의 두 번째 강릉행은 ‘차이-반복’의 패턴에서 벗어나 있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우연히’ 결정한 첫 번째 여정과는 달리 두 번째 여정은 지숙이 오롯이 혼자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강릉행이 첫 번째 강릉행을 ‘반복’ 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두 번째 강릉행은 앞서 언급한 홍상수 영화의 ‘잉여’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두 번째 강릉 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환기하기 위한 조금 자세한 줄거리. 대학생 지숙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1박 2일 강릉 여행을 떠난다. 민박집을 찾던 지숙 일행은 우연히 경찰관( 김유석 )을 알게 되고 도움도 받는다. 그날 저녁, 일행과 함께 술을 마친 경찰관은 술에 취한 지숙을 초소로 데려가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 지숙과 친구들은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지숙은 경찰을 만나겠다며 다시 강릉으로 떠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한편, 강릉으로 가던 지숙 일행의 기차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대학 강사 상권이 타고 있다. 유부남인 그는 최근까지 이어왔던 지숙과의 연인관계를 정리하고 후배의 권유로 강릉 여행에 나선 것이다. 길을 묻는 낯선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급기야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상권도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기다렸던 교수 임용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지숙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한다. 목욕탕의 저울, 낙서 첫 번째 강릉행의 끝, 지숙일행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다음 장면에서 지숙은 공중목욕탕에 가고 탕에 들어갔다가 나와 몸무게를 잰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적힌 (상권의) 낙서를 발견하고 수건을 꺼내 지운다. 다시 숏이 바뀌면 친구의 집에 찾아온 지숙이 다시 강릉에 가기로 했다고 말하며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걱정스럽다는 친구의 모습을 뒤로하고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 지숙은 왜 다시 강릉에 가는 걸까? 가장 쉬운 답. 경찰을 만나기 위해서. 친구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강릉에서 돌아온 지숙은 그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자신을 겁탈하려다 실패한,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경찰을 만나러 (지숙의 말에 따르면) 하루 만에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떠난다는 건 무리한 해석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첫 번째 강릉행과 두 번째 강릉행 사이의 두 개의 장면(목욕탕, 낙서)이 의미를 잃고 만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상수 는 숏을 낭비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욕탕 장면. 탕에서 나온 지숙이 체중계에 올라간다.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한참을 바라본다. 카메라 역시 그녀를 따라 체중을 바라보다 심지어 그녀가 체중계에 내려선 다음 바늘이 영점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체중계 앞을 한참 지키고 서 있다. 그녀의 몸무게를 보여주는 것이 왜 이토록 필요했던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지숙이 상권과 다시 만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2부의 상권 이야기가 한참 지나간 다음, 상권은 지숙에게 다시 연락한다. 그리고 둘은 (이전에 그래왔던 듯) 모텔로 가 섹스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섹스를 하려는 상권에게 지숙은 ‘애 떼는 수술’을 했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지숙이 체중계 위에서 보고 있던 것이 자신의 몸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체중에서 제거된 아이의 몸무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숙은 체중계 위에서 떠나간, 아니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몸무게를 참혹하게 바라본 것이다. 우리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지숙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아이의 빈자리를 홍상수 는 이 숏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중절수술 시점을 기준으로 첫 번째 강릉행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첫 번째 여정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와불사, 생매장 다시 처음. 강릉에 도착한 지숙과 친구들은 해변가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딸을 잃고 슬퍼하며 부르던 노래. ‘영영’ 인지 ‘너는’인지 가사를 놓고 반복하며 노래를 하는 친구들을 두고 지숙은 더 이상 부르기 싫다는 듯 가요집에서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노래를 찾아 선창하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행복하길...’ )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지숙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커피숍에 들어온 지숙은 고3 때 자신을 짝사랑하던 동네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간신히 살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후 소식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를 지숙은 문득 강릉에 와서 떠올린 것이다. 온천에 가겠다는 친구들과 헤어져 지숙은 (굳이) 혼자 낙산사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절에서 방생한 거북이 두 마리를 본다. 방생(放生). 불교 경전, ‘금광명경(金光明經)’에 나오는 유수장자는 늪에서 말라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구해낸다. 마치 영화는, 아니 강릉은 죽음으로 이끌리는 지숙을 삶으로 끌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낙산사에 오른 지숙은 불상 앞에서 절을 한 뒤 기와불사를 한다. (1부에서 기와불사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2부에서 상권이 지숙의 기와불사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가족을 향해 남긴 유서와 같은 메시지. 먼저 떠나는 자신 대신 오래 살아남아 달라는 기원. 혹은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길에서 발견한 ‘살아 있는’ 물고기를 그대로 매장해버리는 지숙의 단호함에는 어떤 결단의 공기가 서려 있다. 아이를 임신한 지숙은 어쩌면 (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강릉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자살이라던 낯선 여자의 죽음은 같이 있던 남자에 의한 살인으로 밝혀진다. 자살과 살인(낙태)의 흐릿한 경계. 지금 지숙을 그 경계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막으려는 강릉의 ‘힘’과 겨루고 있는 중이다. “미안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강릉에서의 마지막 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마치 지숙의 자살을 방조라도 하듯) 지숙을 ‘상투적’이라며 비난한 다음, 그 자리에 혼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난다. (강릉역에 도착해 길도 알지 못하는 지숙을 덩그러니 혼자 두고 역에 숨어 그녀가 헤매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두 친구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그녀의 자살을 막는 건 그 자리를 지키는 경찰이다. 술에 취한 그는 지숙을 ‘초소’로 데려간다. 초소(哨所). 경계와 감시를 하는 곳. 혹은 죽음으로부터 지숙을 지키는 장소. 경찰과 함께 (어쩌면 덕분에) 지숙은 그 밤을 무사히 넘긴다. 이렇게 지숙이 죽음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 강원도의 힘 >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인 이튿날 아침 민박집 앞에서의 숏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마치 큰 병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듯 지숙이 민박집 앞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다. 어젯밤에 사라진 친구들은 지숙의 흐트러진 머리를 대신 묶어주며 지숙 앞에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무엇이 미안해서? 너를 자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미안해.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이렇게 돌아온 서울에서 지숙은 함께 죽는 대신 아이만 죽게 하는 선택을 한다. (목욕탕 장면) 하지만 죄책감의 시달리는 지숙 앞에 상권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집 앞 낙서 장면) 지숙이 두 번째 강릉행을 결정하는 건 아마도 살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 아이를 죽이고도 끝나지 않는 굴레, 이 ‘긴 호흡’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마도 죽음밖에 없다고 지숙은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자살)을 (다시 한번) 막기 위해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이 두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이상한 장면(지숙이 자신을 늦게 데리러 온 경찰에게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는 장면)은 성립하지 않는다. 강릉에 도착해 경찰의 차에 탄 지숙은 사력을 다해 그에게 화를 낸다.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히스테리에 가까운 지숙의 분노는 ‘불안한 나를 혼자 죽게 하지 말아요.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한 외침처럼 들린다. 그렇게 강릉에 찾아온 지숙을 경찰이 모텔로 데려가 (마치 상권처럼)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경찰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거부한다. 머쓱해 진 경찰이 ‘내가 술 깰게’ 라고 말하며 고쳐 앉고, 지숙이 잠깐 화장실에 가자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베란다로 나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다. 하지만 난간 끝에 매달려 있던 경찰은 이내 다시 주섬주섬 방 안으로 들어온다. 생각해보면 홍상수 의 영화에서 섹스에 실패한 남자가 자살을 떠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섹스와 죽음이 가깝게 붙어 있다고나 할까? < 극장전 >의 상원( 이기우 )도 영실( 엄지원 )과의 섹스가 잘 되지 않자 깨끗하게 죽고 싶다고 말하고 수면제를 사와 (결국 실패가 예정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살시도 자체가 아니라 이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실패한 자살의 반복. 경찰이 난간을 다시 기어 올라올 때, 우리는 안도하면서 영화 초반, 지숙이 이야기한 (자살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죽음을 생각하며 강릉을 다시 찾은 지숙도 아마 ‘살아’ 돌아갈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통곡을 하는 지숙의 울음 속엔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와 (자신이 살기 위해 결국) 죽어야/죽여야 했던 아이에 대한 애도가 뒤섞여 있다. 그 후 상권이 다시 찾아와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임신시키려는 것이냐며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라고 말한다. 다시 강릉 행을 반복하며 죽음을 떠올리지/실행하지 않겠다는 지숙의 다짐은 병원을 나서며 담배를 끊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수( 김상경 )(< 극장전 >), 죽음의 문턱에 선 영희를 업어 강릉으로 데려온 검은 옷의 남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 >), 과거의 애인 창숙( 김새벽 )을 반복하지 않고 출판사를 박차고 나와 눈을 맞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아름( 김민희 )(< 그 후 >)(아직도 나는 아름이 출판사에 다시 방문하는 에필로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과 닮아 있다. 차이와 반복의 운동에서 벗어난 ‘잉여’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 ‘잉여’들이 홍상수 의 게임의 규칙의 단단한 힘의 균형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다. 상권은 과거를 반복하지만 그 자리에 지숙은 없다. 교수로 임용된 상권은 속물 같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서 인사 온 여학생을 탐욕스럽게 바라본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상권은 지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그가 교수가 되든 되지 않든 강원도에서 어떠한 배움도 얻지 못한 상권의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다. 상권도 지숙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그건 먼지가 만들어낸 ‘인공/가짜’ 눈물일 뿐이다. (“눈에 뭐가 들어갔었나 봐.”) 섹스에 대한 상권의 끊임없는 집착은 (죽음에 이끌리는 지숙과는 달리) 삶에 대한 집착에 다른 말처럼 보인다. ( 홍상수 의 남자들이 섹스에 실패할 때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설악산 권금성 정상에서 아슬아슬한 산행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과는 다른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라며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상권의 모습을 횟집 수족관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와 병치시킨다. 살아 있지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 “임신시키려고 그래요?”, 사라진 금붕어 하지만 동시에 섹스는 그들에게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사랑해’라고 말하며 지숙과 섹스를 하려던 상권은 그녀가 “임신시키려고 그래요?”라고 말하자 멈칫한다. 이후 십 여 편의 영화를 돌아온 우리는 홍상수 의 남자들이 ‘사랑’라고 말할 때 이것이 곧 ‘섹스 하고 싶어’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 밤과 낮 >의 성남( 김영호 )을 제외하면 이 말을 부인에게 한 (유부)남은 없었다는 점도 함께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성남조차 부인의 임신 소식에 불안해한다. (성남의 목욕탕 꿈 장면을 떠올려 보라.) < 극장전 >에서 상원에게 (부인도 여자친구도 아닌) ‘첩’이 되어주겠다는 영실의 말은 섹스는 하지만 부인/가족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엔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오! 수정 >)이지만, 그 짝이 ‘부인-임신-가족’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어하는 일종의 저항감이 깃들어 있다. 마치 이 저항감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어딘가 한쪽이 비어 있는 형태(<극장전> < 하하하 > <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로 나타난다. < 그 후 >에서 창숙과 사랑에 빠져 새벽에 집을 도망치듯 나오던 봉완( 권해효 )은 ‘아빠’라고 부르는 (부인 혹은 딸, 결국은 가족) 소리를 못 들은 척 하고 떠나 버린다. (부인의 임신, 혹은 딸의 등장에) ‘집’으로 돌아온 성남과 봉완이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집을 떠날 것이라는 예감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상권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갑작스럽게 후진하는 차에 부인과 아들이 치일 뻔 하자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아이/부인이 죽을 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아이/부인이 죽었으면 하는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깨달은 데서 오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서 상권의 가족은 어디론가 외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외출은 주차장에서의 에피소드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권에게 아이와 부인은 속물에 가까운 교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이유이자 ‘사랑’하는 여자들과의 섹스를 숨겨야 하는 번거로운 방해물에 불과하다. 강릉에 다녀온 다음, 사라진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디로 갔는지 상권은 알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숙은 아마도 다시는 상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죽음의 반대편에서 ‘산다’는 건, 탐욕스럽고(교수 임용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노교수는 상권이 잊고 놓고 간 우산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속물 스러운(상권은 자신의 심부름을 했던 여직원에게 잔돈을 가지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고, 지나가는 개에 물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원했던 교수직을 힘들게 얻은 다음 동료들과 고작 취중 섹스의 쾌감이나 논해야 한다.)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 강원도의 힘 >은 말한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상수 영화 모두를 아우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누군가 (홍상수의 ‘베스트’가 아니라) ‘홍상수 영화는 결국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 강원도의 힘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20년을 돌아 이제 <강원도의 힘>을 다시 생각해볼 시간이다.
한 감독의 새 영화를 보고 나서 그/그녀의 이전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과는 다른 일일 것이다. 특히, 홍상수 의 영화가 그렇다.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일관성 때문이다. ‘반복’은 그의 개별 영화들의 구성 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영화들 사이를 잇는 창작의 원리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들은 소급적인 ‘반향효과’를 통해서 더욱 두터워지고 깊어진다. 근 20편에 이르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단계를 설정하는 일, 그리고 그의 영화들 사이에서 걸작과 태작을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 보인다. 그의 모든 개별 영화들은 단 하나의 연작 중 일부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끊임없이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이항적 대칭 구조’의 형식을 취한 홍상수의 신작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를 보고 나서,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던 그의 초기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그 ‘반향효과’를 음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의 세 번째 작품인 < 오! 수정 >에 대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오! 수정 >은 표면적으로는 5개의 소제목이 붙은 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 안에 동일한 과정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기억 사이의 대비가 함축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영화다. 재훈( 정보석 )과 은주( 이은주 )는,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합(수정, 또는 결혼)’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 세계 속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커플이자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커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 시민 케인 >이나 < 라쇼몽 > 같은 ‘기억의 모호성’을 다루는 영화들의 계보 안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였고, 전작인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과 < 강원도의 힘 >(1998)에 비해 좀 더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나타나는 어떤 변화의 징후로 읽었다(부정과 냉소에서 긍정과 유머로의 이행). 하지만 ‘반향효과’ 안에서 본 <오! 수정>은, 그 첫인상이라는 것이 일종의 오해, 또는 절반의 이해에 불과했던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오! 수정>은 ‘기억의 모호성’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화도 아니었고, ‘낭만적 해피엔딩’의 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두 남녀 사이의 기억의 차이는, 홍상수가 이항적 대칭 구조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동원하는 다른 많은 이항들(가령, 서로 같은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경유하는 두 인물, 서로 다른 공간-분위기에 놓인 한 인물, 현실과 꿈 등)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 역시 낭만적 낙관의 반영하는 거울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성찰을 위한 거울이었다. 무엇보다 분명해진 것은, 홍상수 의 일부 영화(특히, 초기영화)에서 나타나는 ‘이항 구조’가 사실은 처음부터 ‘n항 구조’에 이르기 위해 취한 방법론적 선택이자 제약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후 영화에서 나타나는 삼항 구조나 옴니버스 형식과 같은 다양한 형식적 변주는, 어떤 질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이 ‘이항 구조’의 양적인 확장에 더 가까운 것이다. 홍상수에게 ‘구조’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구속이다. ‘불안’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집중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틀이다. 이 제약에는 서사형식으로서의 ‘구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스타일적 요소들(가령, 고정쇼트, 미디엄쇼트, 롱테이크 등)도 포함된다. 홍상수는 스스로 설정해 놓은 이 제약 안에서 ‘우연’을 기다리고, 마주친 우연에 따라 ‘즉흥연주’를 한다. 특정한 ‘공간-분위기’와 ‘배우-인물’이 조우하는 순간, 그의 반복되는 즉흥연주가 시작된다. 홍상수는 그 자유(우연의 수용)와 즉흥연주를 “어떤 당위나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 어차피 선택인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가 벗어나고자 하는 그 ‘당위나 나쁜 습관’은 세상의 그것(상식과 통념)이자 동시에 영화의 그것(관습적 재현 양식)이다. 대개는 ‘불륜관계’를 포함하는 남녀 사이의 다양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의 줄거리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TV 드라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그 줄거리 안에 결코 ‘법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데뷔작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 예외적으로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불륜’ 때문은 아니었다). 홍상수는 그가 발견하고 재구성해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굳이 법정에 서지 않아도 그 인물들의 내면에서 언제나-이미 작동하고 있는 어떤 ‘법의 힘’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하고 저항하고 있다. < 오! 수정 >의 밝고 귀여운 인물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적 방법은 가부장제의 법이 작동하고 있는 일상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이지만, 그의 근본적인 영화적인 화두는 그 법의 외부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어떤 삶’의 지평에 다다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홍상수 영화의 본질은 ‘일상의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삶의 리얼리즘’에 있다. 홍상수는 언젠가 그것을 “완전한 구체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