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낙원
- 감독
- 권순재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최정훈, 오경아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본 글에는 <색깔있는 남자>의 반전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한국영화 산업은 여러 면에서 척박했던 시기로 회자된다.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한국영화 산업의 첫 르네상스라 평가됐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와 80년대는 독재 권력의 감시 하에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검열이 극심해지면서 산업적 토대와 시스템이 허약해진 시기로 평가된다. 1970년대부터 대중추수적인 에로티시즘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처럼 청춘을 다룬 영화들을 중심으로 주제와 형식 측면에서 저항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간간이 출현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한국영화의 전면적 시장개방이 일어나면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긴 했지만, 영화제작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검열제도가 심의제도로 전환되고 저항적인 학생영화운동을 포함해 새로운 영화세대가 부상하면서 독립영화와 코리안 뉴웨이브의 싹이 틀 수 있는 움직임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 색깔있는 남자 >(김성수, 1985)가 개봉된 1980년대 초중반은 전두환 정권의 적극적인 3S(Sex, Screen, Sports) 정책, 선정성과 폭력성이 극대화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할리우드 장르 관습, 흥행작의 끝없는 시리즈화, 컬러 비디오라는 새로운 부가시장의 저예산 문법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한국영화 산업 전반이 에로영화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색깔있는 남자> 역시 에로틱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당시 대부분의 에로영화들처럼 다양한 정사 장면을 넣기 위한 지나치게 복잡한 인물 구도와 설득력 없는 급작스러운 반전, 컬러 비디오 시대에 걸맞은 화려한 색상과 조명, 줌 쇼트와 프리즈 프레임 등의 과도한 사용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정성을 목표로 두면서 느슨해진 서사 그리고 부족한 예산과 시스템을 메우기 위한 표현적 과장은 오히려 이 영화를 급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 지점에서 김형석 은 <색깔있는 남자>를 < 디아볼릭 >(앙리 조르주 끄루조, 1955)이나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같은 놀라운 반전 서사를 가진 1980년대 대중영화의 숨겨진 걸작에, 이문우(「1980년대를 퀴어링하기」)는 범죄화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레즈비언을 가시화한다는 측면에서 퀴어적 독해의 텍스트로 위치시킨다. <색깔있는 남자>는 제목만 보면 김성수 감독의 전작, 장미희 와 이영하 주연의 < 색깔있는 여자 >(1980)의 후속작처럼 보이지만, 두 영화는 장르적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 <색깔있는 여자>가 신파적 특징이 강한 여성수난사라면, <색깔있는 남자>는 냉철하고 잔인무도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팜 파탈과 여성 착취적이고 이기적인 옴 파탈이 대격돌하는 스릴러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몇몇 에로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정적 재현을 위해 비규범적 성적 욕망과 관계를 소재로 가져온다. 유사 근친상간, 사도매저키즘, 양성애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도 전통적 젠더 역할을 뒤집는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패션 디자이너 샤르망 최( 임성민 )의 귀국 기자회견으로 시작한다. 세련된 매너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그는 돌아오자마자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샤르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여자들의 사랑과 욕망을 이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샤르망은 공사 모두에서 누나 같은 변수린( 오수미 )의 돌봄과 지원을 당연하게 받고 있지만 정작 그의 집착 어린 사랑은 모른 척한다. 또한 그는 김여사( 홍명진 )의 애인 노릇을 하며 후원을 받아 패션사업을 키워나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른 젊은 여자들과의 성적 관계를 거절하지 않는다. 저돌적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부티크 직원( 오경아 )과 다른 여자들과 달리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 오혜림 )이 그들이다. 모든 여자의 욕망의 대상인 샤르망은 이 모든 관계의 중심인 것처럼 보인다. 샤르망을 연기한 임성민은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한 스타로 신성일 이나 남궁원 같은 이목구비 뚜렷하고 키 큰 ‘미남배우’의 계보에 있긴 했지만 훨씬 세련되며 때로는 유약하기도 한, 그래서 이성애 여성들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미묘한 스타성을 갖고 있었다. 임성민이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장길수, 1994)에서 수많은 여성의 이상형으로 꼽히는 (그래서 여성운동 활동가 강민주에게 전략적으로 납치당하는) 스타 배우 백승하로 캐스팅된 것은 그의 실제 스타 이미지에 일부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매너 좋고 유약한 남성성에서 오는 그의 스타성은 에로영화의 선정적 노골성을 약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런 면에서 임성민은 에로영화의 타겟 관객을 이성애 여성으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여성 주인공들보다 임성민을 중심에 놓고 “에·놈·쌍쉬엘(Un homme sensuel)”이라는 카피를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는 주인공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스펙터클화 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좌) <색깔있는 남자> 포스터 (우) <색깔있는 남자> 중 배우 임성민 하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샤르망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옴 파탈이다. 샤르망은 사업 확장을 위해 공장을 구매할 자금이 필요하다며 김여사를 부추기고, 김여사는 기어이 병들고 늙은 (가학적 성욕을 가진) 남편( 변희봉 )을 복상사하게 만든다. 범죄와 그에 따르는 불안과 집착은 연쇄성을 갖게 되고 영화는 점점 에로보다는 스릴러에 집중한다. 자금을 확보한 샤르망이 김여사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변수린은 그렇잖아도 질투 때문에 마땅치 않던 그녀를 차로 여러 번 치어 살해한다. 변수린의 범죄를 알게 된 샤르망은 자신을 향한 집착이 부담스러워지고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과 새 삶을 계획한다. 주은몽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에게 집착하지 않는 ‘쿨’한 여자다. 결국 그는 변수린을 기찻길에서 잔인하게 살해한다. 하지만 주은몽과 형사들은 그를 살인자로 의심하고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 같은 이상한 징후들이 그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을 내놓는다. 그 반전을 예상하지 못한 건 영화가 반전을 위한 서사를 거의 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아볼릭>을 넘어선 파격적 혹은 허술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주변부 인물, 즉 조연이었던 직원과 영화 후반부에 등장해 존재감이 미미했던 주은몽이 이 모든 계략을 지배하며 완전범죄를 저지른 레즈비언 커플이었음이 매우 급작스럽게 밝혀진다. 주은몽은 변수린에게서 벗어나고픈 샤르망의 욕망을 자극해 공장을 판매한 대금을 자신에게 투자하도록 유도했으며, 아마도 사적, 공적 공간 모두에서 프레임 바깥에 상시적으로 존재했을 직원은 온갖 정보를 수집해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변수린과 샤르망의 대화를 녹음해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었을 것이다. 변수린, 샤르망, 주은몽을 훔쳐보는 제3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종종 암시하지만 서사적으로 그 눈이 직원의 것일 거라는 예측을 하기는 어렵다. 프레임 바깥 존재인 그들의 비가시성과 유령성은 완전범죄와 ‘완벽한(예측 불가능한)’ 반전 서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비가시적이고 유령적인 레즈비언 커플이 변수린의 유령을 위장하고 무대화할 때 과장되게 연출된 줌 쇼트, 화려한 번쩍이는 조명, 사각앵글 등은 그들 스스로 유령적 존재였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변수린이 김여사를 살해할 때 부띠크 직원을 용의자로 몰기 위해 그의 모습으로 변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과장과 위장은 1980년대 에로틱 스릴러의 문법이기도 하면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의 유령적 현현의 비틀어진 알레고리가 된다. 전말이 드러나는 에필로그, 즉 마지막 장면 바로 직전 쇼트에서 샤르망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형사들에게서 도망쳐 기차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간다. 기차와 부딪히기 직전 그의 신체는 프리즈 프레임 효과 속에서 동결된다. 기차의 헤드라이트 때문에 하얗게 날린 스크린은 종결보다는 다른 이미지와 서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하얀 스크린과 샤르망의 신체가 한중간에서 찢겨나가기라도 하듯 바로 이어지는 쇼트에서 창문 양쪽이 열리고 하얀 커튼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누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여자, 부띠크 직원과 주은몽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샤르망의 신체와 스크린(그리고 이성애 서사)을 찢고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 에이리언 >(리들리 스콧, 1979)에서 에일리언과 접촉했던 남자 승무원의 배를 찢고 아기 에일리언이 나오는 장면이, 직유적으로 (불가능한) 남성출산을 가리켰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까지 어떤 서사적 암시도 없었기에 그 반전은 그야말로 영화 전체를 헤집고 뒤집는 얼룩이 된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여자 등친 돈, 여자가 돌려받았을 뿐이야”라고 그럴듯한 범죄 동기를 던져줌에도 이 반전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이 예측 불가능한 에필로그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하며 그의 회화가 구상이나 추상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상을 뒤흔들고 해체하는 힘의 운동(강도)에 가깝다고 분석한 것에 가깝다. 들뢰즈가 ‘돌발흔적’이라고 부른 것 말이다. 돌발흔적은 구상에 가까운 그림 위에 우발적이고 맹목적으로 던져진 국지적이고 질료적인 손의 흔적을 지칭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에서 퀴어적인 것은 영화 내내 이어진 팜 파탈과 옴 파탈 간의 연쇄 범죄도,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도, 레즈비언 커플이 가시화되는 에필로그도 아니다. 그보다는 국지적인, 흰 스크린 위의 얼룩과도 같은, 마지막 한 씬으로 영화 전체를 뒤흔들고 반향을 만드는 힘의 강도다. 무엇도 선명하게 의도되지 않고 혼탁하기 그지없다. 외삽도 내삽도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며 우발적으로 스크린을 찢어내며 등장한 돌발흔적. 레즈비언 커플은 그야말로 샤르망의 몸, (혹은) 스크린을 찢고 자진 탄생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기존의 (이성애) 서사를 완전히 망쳐 놓는다. 영화는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듯 “아... 색깔있는 남자여 안녕”이라는 대사를 던지며 웃는 주은몽의 얼굴로 다시 한 번 프리즈 프레임하며, 샤르망의 프리즈 프레임을 취소시키고, 그 자신의 얼굴로 끝을 낸다. 에필로그 ‘얼룩,’ ‘돌발흔적’에 그칠 수밖에 없던 레즈비언 커플은 기껏해야 하나의 씬, 비밀스러운 작은 침실에서만 가시화될 수 있었다. 최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두 편의 퀴어 장편영화 <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3)와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는 사회와 공동체에 의해 지워버려야 하는 얼룩과 불쾌한 냄새로 취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의 가족구성권 혹은 자기 자리와 공간의 확보를 다루고 있다. <색깔있는 남자>의 ‘에필로그’는 국지적인 것이 바탕을 바꾼다는 면에서 퀴어적으로 독해될 수 있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반향을 만들어내는 얼룩의 자리는 강제된 것이고 실제로 그 자리 이외의 것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에 대하여>와 <럭키, 아파트>는 레즈비언 커플들이 더 이상 얼룩과 냄새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며, 돌발흔적은 오히려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넘어 상상된 관계들과 공동체들의 이접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말한다. 돌발흔적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촉지될 수 있다. <딸에 대하여>, <럭키, 아파트>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이지룡은 1954년부터 1992년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한 영화제작자이다. 외화수입업으로 영화계에 입문해 명보극장을 설립했고 정창화 감독을 비롯한 유명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한 인물이다. (사진1) 젊은 시절의 이지룡 그는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에서 치마대소학교와 대흥상업학교, 금정고등학교를 나와 함산금융조합 출납계원으로 일했다. 일제강점기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함흥 명보극장에 들어오는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안정적이었던 생활은 해방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그렇다해도 좌우대립이 심한 남한보다 그곳이 낫다는 생각에 그는 함흥에서 장사를 하며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곧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 만세교를 건너 함흥에 입성하는 국군은 그에게 해방군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진2) 함흥만세교 사진 (사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군이 입성한 뒤 그는 함흥 민사부 동원부장으로 국군을 도왔고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자 퇴각하는 1군단과 함께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다. 배는 예상과 달리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항에 닿았다. 단신에 무일푼으로 월남한 그는 국민방위군에 차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방위군이 해산되자 본격적인 피난생활이 시작된다. 부산에서 그는 친척인 삼양물산 주동태의 도움으로 쌀창고와 함흥냉면 장사를 하며 종자돈을 모아, 휴전되기 전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에서 건설업을 시작한다. 입찰과 재무 업무는 자신 있었지만 건설에는 영 취미가 없던 그는 친척인 이회극이 부사장으로 있는 수도극장에 자주 출입하게 된다. (사진3) 1951년 한국전쟁기의 수도극장의 모습과 2003년 스카라극장의 모습이다. 수도극장은 1930년 약초극장으로 개관해 1945년 수도극장,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재개관하며 유지되어 오다 2005년 근대문화재로 등록예고 된 뒤 소유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사진출처_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문화컨텐츠닷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극장 문 닫는 법이 없어. 손님이 오는 거야.”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극장에서 그는 영화사업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그는 먼저 외화수입을 통해 영화흥행에 대한 감을 익히며 명보극장 건설을 추진한다. 삼양물산의 주동태와 고향 친구이자 후에 연방영화사 부사장이 되는 양봉식을 설득해 투자유치를 하고 파리에서 귀국한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의뢰해 극장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부의장 조 모 씨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나타나 일신산업에게 공사를 맡기며 위기는 시작된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건설업체인 일신산업의 미숙으로 공사가 난항을 겪게 된 것이다. (사진4) 1956년 명보극장(공사 초기 명성극장) 기공식 현장. 오른쪽 끝이 양봉식, 그 옆이 이지룡으로 일신산업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5) 1956년 명보극장 기공식 현장. 양봉식과 이지룡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자본과 기술이 있는 대림산업에게 공사를 의뢰했고 대림산업은 초기 투자자들 보다 더 많은 지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림산업의 요구를 들어준 뒤 공사는 시작되었다. (사진6) 명보극장 상량식. 대들보에 돈을 넣은 하얀천을 묶고 있다. (사진7, 사진8) 명보극장 건설현장 1957년 여름, 드디어 명보극장은 완성된다.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건설된 현대식 영화상영관이자 그가 청년기 함흥 시내에서 영화를 봤던 명보극장이 서울 충무로에도 들어선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9세이다. 명보극장은 1957년 8월 25일 개관식을 갖고 개관작 <상류사회 High Society>(찰스 월터스, 1956)를 시작으로 극장영업을 시작한다. 그는 명보극장 부사장으로 자리한다. (사진9) 1957년 명보극장 개관기념. 극장종업원들과 명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당시 민의원 의장 이기붕이고 오른쪽이 부인 박마리아, 그 옆이 이지룡이다. 명보극장은 개관했으나 대림산업과의 알력다툼으로 친구 양봉식을 비롯한 초기 관계자들은 명보극장에서 손을 떼게 되고 그 또한 명보극장에서 나오게 된다. 대림산업 측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5.16으로 유야무야 된다. 그는 다시금 심기일전해 1960년대 중반 영화제작업에 뛰어든다. 1964년 <학생부부>(김수용) 등 다른 영화사의 이름을 대명해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만들어 자신의 메이커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사진10) <학생부부>(김수용, 1964) 촬영현장. 선글라스를 낀 이가 김수용 감독이고 그 옆에 양복을 입고 있는 이가 제작자 이지룡이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고 있는 이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그리고 1965년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로 정창화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 전선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황군으로 정체화한 조선인 지원병이 미얀마 게릴라 대원과 친구인 조선인 학도병들의 죽음을 통해 각성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지만 미얀마 게릴라 대장의 오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의 남방전쟁액션영화이다. 열대 지방인 미얀마 전선을 국내에 재연하기 위해 그는 미공보원에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정창화 감독과 함께 미공보원에 들어가 동남아 전투장면에 대한 영상을 살펴보고 자료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 초소와 열대 밀림을 광릉에 만들고 실제 동남아 전선을 촬영한 미공보원의 필름까지 복사해 영화에 사용했다. (사진1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동남아 분위기를 내기 위해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사용한 것이다. (사진12)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열대 전선 상공을 나는 전투기 장면도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13, 14, 15)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오픈세트로 만든 일본군 초소는 그 규모와 정교함에서 추석 대작프로그램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창화 감독은 본인의 구술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열대 야자수는 국내의 호사가에게 빌려서 촬영한 것이라 증언했다. 제작자 이지룡은 야자나무를 제작팀이 천이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쌀과자로 중국식 발을 만들었던 당시 소품팀의 재주라면 야자나무 또한 그럴듯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영화 속에 열대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야자나무 일부는 빌리고 일부는 만드는 식으로 처리한 듯하다. (사진16, 17)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야자나무가 화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옥의 티처럼 화면 왼쪽 하단에 화분이 보인다. 당시 촬영현장에는 따로 모니터가 없고 카메라의 작은 뷰파인더로만 촬영 중인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경우 카메라 뷰파인더에는 일명 쫄쫄이 화면이라 불리는 세로로 긴 왜곡된 화면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실수가 발생했을 것이다. (사진18, 19, 20)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광릉에 만들어 놓은 열대밀림과 서해안으로 보이는 곳에 만들어 놓은 열대의 바닷가 장면이다. 전쟁이 끝나고 회한에 젖은 주인공이 홀로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에는 큰 키의 야자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호사가의 야자나무인지 제작팀이 직접 제작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도 당시 대부분의 한국영화 처럼 지방배급업자들에게 지역판권을 선판매한 자금에 초기 투자금 및 초과되는 제작비를 제작자가 감당하는 방식으로 돈을 조달해 영화를 만들었다. 제작 초기 스틸사진만 보고 지방배급업자들이 어음을 끊어주고 시사회에서 개봉관 아카데미극장 방우영 사장이 일어나 박수 칠 정도로 평이 좋아 흥행을 기대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달랐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손해만 안겨준 작품이 된다. (사진2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포스터 깐깐하고 꼼꼼한 정창화 감독을 만족시키는 데는 많은 제작비가 들었다. “정창화한테 내가 밤낮 지지...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그러니까 다른 회사는 가지도 않고, 다른 회사에서도 정창화가 제작비를 많이 들인다 해가지고 정창화 쓰는 걸 겁내 한 거야.” 그럼에도 그는 정창화 감독의 가능성을 보고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연출로 1966년 <순간은 영원히>, <예라이샹>, <위험한 청춘>, 1967년 <비련>, <위험은 가득히>, <황혼의 검객>, <조용한 이별>, 1970년 <아랑곡의 혈투>(정창화·짱깅퍼)를 연이어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이 2년간 연출, 개봉한 작품의 70퍼센트를 그가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까다로운 연출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작사는 아세아영화사 말고는 없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사진22) 아세아영화사 사무실에서 이지룡, 정창화 당시 홍콩 굴지의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게 된 영화 <순간은 영원히>도 그가 한홍합작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정창화 감독이 아시아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한 제작자였다. 자칫 멜로드라마로 오해할 법한 제목인 <순간은 영원히>는 사실 홍콩을 무대로 남한 정보원들이 대남공작을 위해 막대한 금괴를 수송하려는 북괴 간첩단을 일망타진한다는 첩보액션영화이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인데 무슨 일인지 공보부는 개명을 권유했고 결국 <순간은 영원히>로 변경한다. 그래도 영문제목은 <Special Agent X-7>이다. (사진23)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의 포스터 <순간은 영원히>는 홍콩 로케이션 촬영을 위해, 국내에서 중화권 영화의 통번역을 맡았던 인물의 소개로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유린영화사와 합작해서 만들어졌다. 달러의 반출이 어렵던 시절 이국적인 홍콩배경이 필요한 경우 합작은 유리한 선택이었다. 국내 배우와 스태프들의 개런티와 국내 촬영 비용은 국내제작사가 부담하고 홍콩배우들과 홍콩촬영분은 합작한 홍콩 현지 제작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제작 방식은 홍콩이나 대만의 영화사들에게도 매력적인 일종의 공동제작, 투자방식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그는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 <비련>(정창화, 1967),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낮과 밤>(전우열, 1968),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대벽관>(부청화·장진원, 1970) 등을 한홍합작으로 제작했다. 홍콩에서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를 본 쇼브라더스사는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아세아영화사에 연락했고 그는 정창화 감독 외에 액션영화에 일가견이 있던 김기덕, 장일호 감독도 함께 소개해주었다. 또한 부족한 홍콩의 남자배우들을 채우기 위해 배우 성훈, 남석훈, 방수일, 오경아 등을 추천해 그들 또한 홍콩에서 한동안 활동하게 된다. (사진24)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에 출연 중인 오경아와 방수일 정창화 감독을 쇼브라더스에 소개한 인연으로 아세아영화사도 쇼브라더스와 함께 <아랑곡의 혈투>를 합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쇼브라더스의 영화를 합작영화로 둔갑시킨 위장합작 영화라는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당시 외국영화의 수입편수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다 보니 인기 있는 외국영화와 겉모습을 취할 수 있는 합작영화의 제작이 인기였다. 실제 국내영화사와 거래를 했던 홍콩과 대만의 영화사는 국내 영화법의 각종 제약(합작영화의 조건인 국내감독의 참여, 국내배우의 출연, 투자금액의 제한 등)을 인식하고 이에 맞춰 때로는 이면계약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홍콩이나 대만영화에 국내 영화제작사가 사전투자를 통해 합작영화 타이틀을 얻기도 했는데 이런 작품들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위장합작이다. 아세아영화사는 김진규의 추천으로 대만 영화에 사전투자를 했지만 결과물이 좋지 않아 추가 투자를 철회하고 판권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국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합작영화의 제작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진25) 쇼브라더스와 아세아영화사와의 합작영화인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포스터이다. 홍콩무협영화의 색채를 띈다. (사진26)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영광영업공사와 아세아영화사의 합작영화인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포스터이다. 주연 여배우인 홍콩 배우 정향이 신성일과 남정임 사이에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1971년에 그는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을 연출한다. 아세아영화사의 여배우 공모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인데 당시 공모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오디션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사진27)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포스터 (사진28)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여배우 공모전 사진 1972년에는 영화제작사인 유림흥업을 설립한다. 그리고 1973년 이성구 감독 연출로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일본의 고즈시마섬에서 로케이션으로 제작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쥬리아는 임진왜란기 일본에 입양된 조선 출신 여성으로 천주교도로 성장해, 천주교를 박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제안을 거절하여 유배당하고, 유배지에서 약자와 병자에게 헌신해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다. (사진29)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포스터 1973년 오타 쥬리아에 대한 기사가 국내에 소개되어 인기를 얻자 다섯 개의 영화사가 이 소재를 영화화하고자 경합했다. 영화사들이 기획안을 문화부에 접수했고 그 중 유림흥업의 작품이 선정된다. 유림흥업은 야심차게 일본 고즈시마섬에서 이 작품의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한다. (사진30, 31)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의 스틸 섬 사람들의 관심과 우호적인 협조 속에서 진행된 작품이라 벅찬 마음에 제작자는 영화 타이틀이 뜨기 전 작품의 취지에 대한 제작자의 당부 영상과 이를 일어로 통역하는 배우 김진규의 영상까지 넣어 완성시켰다. (사진32)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일본 고즈시마섬 촬영 현장. 보조출연을 해 준 섬 주민들과 함께한 사진으로 양복을 입은 이가 이지룡이고 오른쪽이 배우 김진규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관람도 기대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한 시사회에서 추기경이 관람 도중 나가는 사태가 발생할 만큼 영화에 불편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쥬리아가 유배를 가게 된 동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쥬리아의 성녀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된 것이 원인이라 지적했다. 흥행을 위해 외설적인 묘사를 시도한 것이 오히려 흥행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진33, 34)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도꾸가와 이에야스 역의 허장강과 쥬리아 역의 신숙 야심차게 제작한 작품의 부진으로 타격을 입은 그는 10년 정도 합동영화사와 한진흥업, 남아진흥공사에서 부사장으로 있으며 극장업과 영화제작에 대한 자문과 기획 활동을 했다. 극장업과 수입, 제작을 아우르며 폭넓게 활동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작사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6년 다시 다남흥업을 설립한다. 1992년까지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와 같은 흥행작을 수입했으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를 비롯하여 6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프리지스 오너>는 1986년 9월 다남흥업이 수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매일경제》 1986년 8월 13일 9면) 다남흥업은 <프리지스 오너>의 사전제작단계에서 수입을 결정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영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35, 사진36)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 개봉 당일. 종로 극장 단성사 앞의 풍경으로 관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길게 줄 서 있다. 단관 개봉관 시절에는 인기작의 경우 영화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관객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작자들은 이것 또한 광고라 생각하고 일부러 줄을 대로변으로 세우거나 티켓박스를 조금 늦게 열기도 했다. 1989년에 제작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는 작가 이문열의 요구에 따라 원작료를 러닝개런티로 선점하고,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 강수연을 캐스팅해, 영화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야심작이었다. (사진37, 38)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 홍보사진 이 작품은 음력설이었던 개봉일, 한파에도 불구하고 국도극장에서 을지로까지 줄을 선 관객들로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극장 문을 열었다. 31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그해 방화 3번째 흥행작이 된다. 그리고 1990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기획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해 흥행은 물론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영화가 된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만족시키고자 큰 투자를 감행했던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쳤으나 드디어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 작품이 나온 것이다. 그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의 성공 이후 소품 두 어 편을 제작한 뒤 40년 가까이 몸담은 영화계를 은퇴한다. 무일푼 단신으로 월남했지만 빠른 판단과 추진력, 도전정신을 통해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그의 다이나믹한 인생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2012년 원로영화인 구술에서 좀 더 깊이 있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는 이상했다. < 결혼 이야기 >(1992)가 ‘기획 영화’의 시대를 열며 충무로 체질 개선을 시작하고 < 쉬리 >(1999)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장르화 속에서 이른바 ‘웰메이드’를 추구하며 한국영화가 서로 닮아가기 시작했다면, 그 이전인 1980년대는 중구난방의 시대였다. 이 시기 남한의 엔터테인먼트가 ‘3S 정책’의 억압 아래 있었고 그 여파로 충무로에 에로티시즘이 창궐했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인과 관계가 형성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영화는 어떤 정책을 수행하기엔 그 산업적 토대가 너무나 부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한 편이 완성될 때 그 최종심급은 심의와 검열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나온 영화들은 시스템이 아닌 모순적 사회 구조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에 산업적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국영화가 1990년대에 재 산업화에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이색지대처럼 존재하는 1970~80년대는 일종의 혼란기였으며, 1980년대는 그 혼란의 정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1980년대 한국영화는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이 시기에 오면 한국영화의 정서적 기둥이었던 ‘신파 감성’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외국 영화가 맥락 없이 접목되며, 뜻하지 않는 장르적 시도들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며, 때론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마저 뒤흔드는 영화가 등장한다. 이런 증상은 이른바 ‘에로 영화’ 속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 어우동 >(1985)은 의도했든 안 했든 정치적 텍스트가 되었고, 위험한 섹슈얼리티 무비 < 사방지 >(1988)도 있었으며, <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1985)의 정신분열증적 아우라는 시대의 파격이었다. 이 불균질적이며 뒤엉킨 계보도 속에 김성수 감독의 < 색깔 있는 남자 >(1985)가 있다. 2004년에 세상을 떠난 김성수 감독은 1977년 < 돌아와요 부산항 >으로 데뷔한 후 1980년대에 장미희 , 원미경 , 이영하 등이 출연하는 < 색깔 있는 여자 >(1981)로 에로티시즘 멜로의 세계로 접어든다. 여기서 혹시 < 색깔 있는 여자 >와 < 색깔 있는 남자 >가 연작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 전작이 한 여성의 이중생활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 <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1977)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 디아볼릭 >(1955)를 연상시키는 악녀 스토리다. < 색깔 있는 여자 > 이후 정윤희 주연의 < 여자와 비 >(1982), 김부선 이 등장하는 <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1983) < 여자는 남자를 쏘았다 >(1984), 당대 급부상한 섹스 심벌 오혜림 이 마흥식 과 임성민 사이를 오가는 < 탄드라의 불 >(1984)까지 나름 일관성 있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던 김성수 감독은 < 색깔 있는 남자 >에서 정점을 맞이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패션 디자이너 최태욱, 일명 ‘샤르망 최’(임성민)가 귀국한다. 그는 후원자인 김문자 여사( 홍명진 ) 덕에 성공적으로 한국 패션계에 진입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질투한 변수린( 오수미 )은 김문자를 살해한다. 변수린의 사랑이 부담스러워진 샤르망 최는 재미 교포인 주은몽( 오혜림 )과의 관계를 통해 벗어나려 하지만, 변수린의 집착은 점점 그를 옥죄어 온다. 결국 샤르망 최는 변수린을 잔인하게(기차 레일 위에 올려놓는 방식으로!) 살해하는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돈을 노린 주은몽의 계략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진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샤르망 최의 부티크 점원( 오경아 )이 주은몽과 함께 묵직한 반전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 색깔 있는 남자 >는 한 명의 지골로를 네 명의 여자가 갉아먹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성적 위력은 진정 압도적이다. 김문자 여사에겐 성 기능을 상실한 나이 든 남편( 변희봉 이 역할을 맡았다!)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부실한 성기에 대한 대리물로 일본도에 집착한다. 여기서 진정 놀라운 장면이 나오는데, 김문자는 남편 앞에서 일본도 손잡이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그 광경을 본 남편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이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복상사 따위는 우습게 만드는, 퍼포먼스만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놀라운 캐릭터다. 하지만 그녀도 변수린에게 죽게 된다. 한국영화에서 팜므파탈을 평가할 때 만신전에 봉헌되어야 할 오수미는 이 역할을 만나 놀라운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그녀는 한 마리 음탕한 거미처럼 남자를 옭아맨다. 그녀의 대사는 당연히 직설법인데, 음산한 목소리로 샤르망 최에게 “누님이라는 소리 때려치워!” 일갈하다가도 “색깔 있는 남자, 당신 날 흥분시켰어”라고 속삭이는 모습은, 끈적끈적하면서도 헤어나올 수 없는 마성을 지닌다. 여기서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은 주은몽이다, 샤르망 최는 변수린을 살해한 후 결국 경찰에게 체포되고, 모든 것은 주은몽의 수중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녀는 샤르망 최에게 쿨하게 말한다. “여자 등친 돈, 여자가 돌려받았을 뿐이야.” 그리고 이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감춰왔던 관계가 드러난다. 샤르망 최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점원은 알고 보니 주은몽과 동성 연인이었던 것이다. 얼음송곳만 없었지 < 원초적 본능 >(1992) 못지않은 < 색깔 있는 남자 >는, 19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들 속에서도 가장 거친 욕정을 드러낸 영화다. 이 영화의 여자들은 절대로 욕망을 억누르지 않으며, 이 영화의 남자는 언제나 그들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강한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해 육체의 암투를 벌이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먹잇감이 되는 지옥도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섹스와 돈과 명예의 유혹이 넘실대는 에로틱 누아르 스릴러 <색깔 있는 남자>. 누구나 공감하는 걸작은 절대 아니지만, 이 영화만큼 강렬한 화면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