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 : 오두막의 악마
- 감독
- 마이클 크럼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카틀린 뉴베리, 샤넌 스네든, 조슈아 윈치, 데비 카지슈빌리, 리처드 S. 블레이크, 제임스 D. 프루이트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대개 기억들은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순간의 감각들로 남겨진다. 가령 유년 시절의 계곡을 떠올릴 때면 언제, 누구와 왜 갔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상황은 떠올릴 수 없다. 다만 물에 빠졌던 순간 느꼈던 알싸한 코끝의 감각과 함께 어디선가 습한 풀냄새가 흘러오는 것이다. 혀에 닿았던 철봉의 비린 쇠 맛, 몸에 들러붙는 젖은 옷의 찜찜함,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소리, 아릿한 손끝... 그렇게 지나간 순간들은 몸 어딘가에 고이게 된다.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기억은 과연 남겨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감각되지 않는 기억은 금방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남겨진다. 결국 오래도록 나에게 맴도는 영화들은 기승전결에 따른 이야기의 전체 몸뚱이, 그로부터 얻은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결국 남겨지는 건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들이다.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 < 로나의 침묵 >(장 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2008)을 본 날은 21살의 겨울이었다. 나는 지독한 시네필이었다거나 내 삶을 뒤흔든 영화를 만났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없이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영화과 학부생이었다. 학기 중 내가 본 영화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학을 맞이하여 전투적으로 매일 3편씩 영화를 보던 시기였다. 그저 방학 동안 최대한 영화를 많이 보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는 항상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곱씹을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바로 다음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데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을 본 후에는 쉽사리 다음 영화로 넘어갈 수 없었다.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클로디의 죽음에 대해 침묵을 강요받던 로나는 파블로의 감시를 피해 숲으로 도망친다. 이윽고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 숨어 들어간다. 어둡고 싸늘한 오두막에 주워 온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 로나는 자신의 빈 배를 부여잡고 존재하지 않는 클로디의 아기를 향해 말을 걸며 잠에 든다. 영화가 끝나고 나 또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을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 허하고 서글픈 뱃속의 감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클로디가 도와달라고 외치며 로나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클로디를 휘감았을 고독과 두려움의 통증, 자전거를 사고 힘차게 페달을 밟던 순간 마약으로 인해 마비되었거나 혹은 너무 날카로워졌던 클로디의 몸이 생의 활력으로 일깨워지는 감각. 이렇게 <로나의 침묵>의 장면들은 나에게 컷과 이미지가 아닌 몸 어딘가의 느낌으로 기억된다. 사진: " Lorna's Silence ", Rotten Tomatoes 이러한 내가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영화가 더 깊게 관객에게 남겨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면 당연히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도 고심하지만 각 씬이 품고 있는 기운 혹은 인물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된다. 늦은 밤 어린 소녀가 부모의 싸우는 통화 소리를 엿들을 때 그녀가 딛고 서 있던 타일의 싸늘함, 발바닥을 조용히 적시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 비밀을 품고 마주한 두 여고생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불의 열기. 영원히 진실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만 같던 모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녹은 아이스크림의 단 맛.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때로는 정말 실제로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인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손끝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의 혀에, 피부에, 코끝에 남겨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 컨테이너 >(김세인, 2018), < 불놀이 >(김세인, 2018) 중 <로나의 침묵>이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로나가 연속적인 변심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클로디의 청을 외면하던 로나는 점차 클로디를 적극적으로 돕고 이내 몸으로 보듬어 주기까지 한다. 거래 현장에서 갑작스레 아기에 대한 질문을 꺼내놓고 심지어 아기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끝내 부정하며 끊임없이 아기에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변심과 충동에 따른 행동들로 인해 로나는 사랑하던 애인과 이별하고 가게도 돈도 모두 잃게 된다. 급기야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진다. 영화의 초반 계산적으로만 행동하던 로나는 실속 없이 모든 것을 잃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대답 없는 빈 배뿐이다.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 또한 줄곧 변심과 충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냉철하고 실속 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나 같은 유형의 사람에겐 그건 영영 오지 않을 세계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닥쳐오는 상황들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일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도 모르겠는 건 모르겠고, 그중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언제까지 나 자신에게 당황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던 애인과 돈 계산을 한 뒤 이별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이외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로나의 답답한 눈물이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저 빈 배를 움켜쥘 수밖에. 그리고 믿어볼 수밖에. 내 연민과 사랑이 불러온 결과가 결코 빈 배가 아니라고. 이 배는 비어있지 않다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도 로나처럼 믿고 싶어서였다. 연민과 사랑으로 다소 유약하게 굴었던 나에게 남은 건 빈 배가 아니다. 여기 이 배 속에 무언가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중 김세인(영화감독) l 글을 쓰고 영화를 연출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등 연출 .
봉준호의 < 마더 >(2009)는 한적한 들판에 나타난 노년의 여인(김혜자)으로 열린다. 프레임의 뒤에서 가운데로 걸어 들어온 그녀는 배경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태어나서 처음 춤을 추는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양이 기괴하다. 마더의 캐릭터 안에는 이 춤과 같은 히스테릭한 제스처가 있고 그 내면에는 우유부단함이 있지만 이와 같은 미장센의 톤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흘러야 한다. 한국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상투적인 겉모습 외에는 마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첫 장면에서 그녀가 춤을 추는 동기는 불분명하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카메라에 대고 직접적으로 말하려는 듯한, 마더의 불안정하고 원시적인 춤사위이다. 여하튼 최초의 등장은 영화 전체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캐릭터에 이입하여 내러티브가 진행될 것임을 예고한다. 여기에 이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곤경, 즉 어떤 역사나 성격, 뒷배경도 헤아리기 힘든 이상한 여인에게 마음을 주어야 하는 난감함이 있다. 이야기의 경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오프닝 쇼트는 캐릭터와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대신 재현된 현실과 자연의 법칙 뒤에 숨겨진 무언가 다른 영역이 있음을 암시한다. 메마른 들판 한가운데서 히스테리적이거나 어쩌면 황홀한 상태로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마더의 춤이 이 드러나지 않은 영역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장면을 분석해보자. 스토리 영역 바깥에서 삽입된 논 디제틱(비(非) 동기) 음악을 동반한 카메라의 하강과 상승은 이 신의 미장센에 모호함을 가중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더가 스토리 바깥에서 침투한 사운드(음악)의 존재를 알고 있는 양 춤을 춘다는 것이다. 음악의 선율과 굴곡, 호흡에 따라 마더의 몸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는 여인은 스토리 세계 바깥의 드러나지 않은 영역과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플롯의 논리적 진행과 관련하여 이 쇼트를 대체하기에 적합한 장면이 있다. 도입부 마더의 춤은 서사의 3/4 지점에서, 아들 도준(원빈)의 살인혐의를 입증할 증인(고물상 노인)을 스패너로 내리쳐 살해하고 피를 뒤집어 쓴 마더가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벌판으로 흘러들어 넋이 나간 채 걷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모습과 겹쳐진다. 여전히 마더가 이런 모양으로 방랑하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이 신에서 주목할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재현(마더의 살인)과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인식(도준의 살인)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현실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다는 점이다. 봉준호가 구성한 내러티브는 처음엔 익숙한 자연법칙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물과 동일시하고 깊이 있게 그를 탐구하기 시작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대다수의 경우 서사는 중심인물의 주관에 의해 지배되고 일상적인 것과 불가능한 미스터리 영역의 혼합으로 미장센의 지위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실재와 반 실재를 혼합하여 모순적인 방식으로 이들을 병치함으로써 서사적 모호성을 구성하는 독특한 서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작동하는 또 다른 양상은 시간을 활용하는 특성에서 나타난다. 봉준호의 대다수 영화는 선형적인 시간 순서를 따르지만 곳곳에서 스토리의 진행을 파열하는 갑작스러운 플래시백을 활용한다. 이러한 현실(현재)과의 분리는 플롯 진행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배경 스토리로 삽입되기 때문에 서스펜스 효과를 이끈다. 오프닝 시퀀스 외에도 <마더>에는 누구의 것인지가 불분명한 짧고 갑작스러운 회상 신이 끼어든다. 인물이 보는 환각인지, 과거에 일어난 실재의 재현인지, 잠에서 본 꿈 장면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이 쇼트들은 스토리의 방향이 단기간에 전환될 수 있음을 표지하는 계시이다. 이 짧은 계시의 모호함은 살인자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들 도준의 무죄선고를 위해 애쓰는 동안 과거에 맞서는 마더의 모습에도 반영되어 있다. 마더가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우리는 마더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살인의 순간에 대한 요약을 보게 된다. 도준의 살인 시퀀스에서 현장에 대한 모호한 시선을 통해 봉준호는 관객들이 마더가 결코 볼 수 없었던 사건을 목격하도록 만든다. 폐가의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의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소녀를 능욕하는 음산함을 뿜어낸다. 그러나 살인자의 시선으로 짐작되었던 이 쇼트는 목격자의 그것이었고 살인자의 정체는 놀라운 전환에 의해 드러난다. <마더>에는 두 번의 살인 재현 장면이 있는데 후반부 재현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전반부 재현의 부연에 해당한다. 전반부 신에서 어두운 폐가 입구에 카메라가 머무는 동안 프레임 안의 도준은 누군가의 시선에 붙잡혀 있고 그의 앞에는 돌덩이가 던져진다. 철저하게 도준의 관점에서 묘사되는 전반부 재현에서 드러나지 않는 영역의 어둠 속 존재는 후반부 재현에서 밝혀진다. 다음 신에서 도준은 집으로 돌아와 팬티만 입은 채 오른손으로 마더의 왼쪽 가슴을 쥐고 잠든다. 이 쇼트는 옥상에 빨래처럼 널린 소녀의 시체를 보여주는 다음 쇼트와 잠깐 겹친다. 크로스 페이스 전환 덕분에 소녀의 시체(왼쪽)와 잠들어 있는 도준과 마더(오른쪽)라는 두 모티브가 몇 초 동안 화면에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시각적 연결은 두 모티프를 평행하게 연결하면서 소녀를 살해한 범인이 도준임을 알려주는 구문적 기능을 하지만 편집과 미장센은 살인 행위가 프레임에 나타나지 않도록 구성하여 관객이 살인자의 신원을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든다. 봉준호의 화자들은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제한된 관점을 가져와 그들이 재현하는 현실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마더)는 현실의 본질을 감지하는 면에서 결함이 있다. 살인에 대한 재현은 마더에 대한 신뢰성을 단기적으로 중단시키고 그녀의 인식에서 벗어난 범죄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가며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각기 다른 관점으로 기술한다. 그렇다면 마더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약초사이자 침술사이며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이다. 모자(母子) 간에는 구체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과거가 있고, 그 외의 비밀들에 겹겹이 감싸져 있는 마더는 기억을 떨치고 과거를 버리려 한다. 과거 회상에 대한 기억 편향을 보여주는 짧은 회상체 대화에서 우리는 마더가 약을 먹여 도준을 죽이려 했고, 그로 인해 도준이 정신장애를 갖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마더는 아들에게 자신의 원죄를 잊도록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망각하기 위해 다리를 침으로 찌른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관점에서 도준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틈새에 놓인다. 그는 과거를 망각하고 거의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속하지 않고 현재에 부적합한 사람으로 동요한다. 침술 치료의 영향인지 도준은 과거와 현재의 가치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연속성이나 일관성을 결여한 상태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이 도준이 살인을 저지르는 폐가 장면을 마더가 목격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여 마더는 과거를 잊기로 결심하지만 도준이 건넨 침통은 트라우마를 소환한다. 이런 사정을 고려했을 때 오프닝 시퀀스에서 마더의 춤은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허벅지 한 지점에 침을 꽂는다. 나이든 여성들이 가득 찬 관광버스 안에서, 다른 승객들이 춤을 추며 마을을 떠나는 동안 마더는 이 광란에서 배제되어 침술에 의지한 채 암울한 과거를 잊으려 한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가 자신만 알고 있는 나쁜 기억과 상처를 잊었는지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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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감독의 < 퍼스트 카우 >(2019)는 오프닝 타이틀 후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영화를 시작한다.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자연스럽지만, ‘man’은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 함의를 옮기기 위해 고심하게 하는 단어이다. man이 인간이라면 남성으로서(만) 인간이며, man이 남성이라면 인간 대표로서 남성(만)이다. <퍼스트 카우>는 블레이크에게,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20년대 서부 개척지라는 시공간에게 아무런 모순 없이 당연했을 인간-남성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고 해체하는 시도를 한다. 규범적 남성성 외부의, 즉 ‘인간’ 밖의 남성의 우정이 전면화 되고, 그 우정은 (개, 도마뱀, 올빼미, 고양이, 소와 같은) 동물과 여성, 즉 비남성-비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 <퍼스트 카우>는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진술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의심한다. 쿠키의 첫 등장은 단순하지만 다정하고 경쾌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버섯을 채집하는 섬세한 손으로 제시된다. 노란 버섯들 사이로 몸이 뒤집혀 노란색 배를 드러낸 작은 도마뱀을 조심스럽고 친절한 손길로 도와준다. 이 다정하고 충만한 분위기는 곧 외부의 사운드에 의해 깨진다. 쿠키는 떠돌이 모피 사냥꾼들의 무리에 고용된 요리사다. 사냥꾼들은 쿠키가 정성스레 채집한 버섯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들을 잡아서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위협하듯 말하거나 툭하면 주먹 다짐을 한다. 쿠키가 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환영 받지 못 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쿠키 자신도 비규범적 남성으로서 자신을 비애적으로 대하거나 이 세계에 안달복달하며 적응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대충 따돌리고 자신만의 텐트로 숨어들거나 도망가버린다.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 부츠를 장만해 신고 남자-인간들의 미개척지를 걷는다. 한편, 쿠키와 우정을 나누는 킹 루는 상승을 향한 도전에 불타는 기업가 기질로 충만해 있다. 개척지의 남성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성정을 갖추고 있지만, 인종적으로 남성-인간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 한다. 킹 루는 올빼미가 쿠키 일행의 텐트를 내려다 보는 날 밤 벌거벗은 채 나타나고, 쿠키로부터 온기와 먹을 것, 쉴 곳을 제공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연히 쿠키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작은 집으로 초대한다. 한참 숲길을 걸어 도착한 오두막에서 둘은 술을 나눠 마시고 킹 루는 장작을 패러 나간다. 오두막에 남겨진 쿠키는 잠시 어색해하다가 곧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쓴다. 이불을 털고 꽃을 구해와 오두막을 장식한다. 이후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 둘의 이러한 작은 일상들이다. 같이 먹을 것을 채집하고 집을 돌본다. 한 명이 빨래를 하면, 한 명은 낡은 옷을 기운다. 서부 개척 시대 백인-남성-인간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남성성 구현의 실패나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전에도 많다. 그러나 그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은 종종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매혹이나 열렬한 열망, 그리고 실현될 수 없음에 대한 비애, 자기연민을 동시에 노출한다. <퍼스트 카우>는 결론적으로 실패든 비애든 그러한 이상적 인간-남성 규범을 통한 남성성 탐구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이 두 남자의 이러한 필요에 의한 일상 노동으로 채운 시간을 보여주고, 애정 어린 다정함이 기반이 된 관계에 집중한다. 이 다정함의 관계는 인간- 남성의 규범적 관계를 전복하거나 감화시키기 보다, 즉 휴머니즘의 가치를 대체하기 보다 그 주변의 비인간적인 것들을 향한다. 쿠키는 ‘첫 번 째 소’(영화의 타이틀 롤!)의 우유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매일 밤 짜러 가지만, 소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닌 의존하는 공존의 자세로 소를 대하고 둘 사이에 애착이 형성된다. 영화에서 관객이 제일 먼저 보는 생명체는 개이다. 그리고 그 개 옆에는 여자가 있다. 개가 가장 먼저, 그리고 다음으로 여자가 이 둘의 오래 된 과거의 물질적 증거를 발굴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년들이었던 것이 (감독의 전작 <웬디와 루시>(2007)를 떠오르게 하는) 개와 여자로 바뀌었다. 영화는 종종 개와 소, 고양이, 올빼미와 같은 동물들이 무엇을 바라보는 눈이나 얼굴, 그리고 그들 시선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진행과 전혀 상관은 없지만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의 원주민 여성들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얼굴도 종종 포착한다. 즉,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에는 동물들과 원주민 (여성들)의 시점이 포함되어 있다. 쿠키와 루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지만, 영화에는 원주민 말을 하는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원주민 촌장의 아내와 영국에서 온 지역 권력자이자 ‘퍼스트 카우’의 소유자인 팩터의 아내이다. 두 여성은 서로 긴장 관계인 남편들 사이에서 말을 전달하는 도구거나 이국적 장식품처럼 기능하다가, 남자들이 방에서 사라지자 마자 자리를 옮겨 가까이 앉고 긴장이 전혀 없는 친밀하고 즐거운 얼굴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의 공기는 짐짓 대접하는 척하지만 허세와 과시, 긴장으로 가득 찬 남자들 사이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퍼스트 카우>는 이러한 다정함 관계와 비인간-남성적 시선들을 결코 이상화하지 않는다. 서부 개척 시대의 시간을 정복이 아니라 다정한 공존의 관계 비인간-남성적 시선들로 채우지만, 이것은 곧 부서지며, 영화의 시작부터 예정되어 있다. 1820년대로 가기 전, 영화는 현대를 경유한다. 관객은 두 주인공의 시체를 미리 보고서야 1820년대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개가 시체를 발견하기 앞서, 제시되는 것은 넓은 강에 굉음을 내는 거대한 증기선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기차나 마차가 지나가던 풍경을 포착하는 오프닝은 감독의 전작들과 겹쳐지며, 또한 영화의 끝에 감독이 경의를 표했던 피터 허튼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해 침범된, 조직된 자연이다. 그리고 ‘퍼스트 카우’가 배를 타고 지주 팩터의 소유지에 도착하는 모습은 이 증기선이 움직이는 모습과 겹친다. 쿠키가 공존과 애착의 관계를 소와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이 소는 등장할 때부터 개인의 사유재산, 가’축’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소유권으로 통제된다. 킹 루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쿠키의 관점과는 달랐다. 비버를, 소의 우유를 가공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채로 있는 미개척 서부는 킹 루에게 아직 역사가 시작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팩터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약탈권과 소유권은 보호되지만, 인종적 약자인 킹 루의 초기 자본축적을 위한 약탈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영토와 자원에 대한 독점 소유권과 강탈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초기 미국 개척 신화, 그리고 서부극과 다른 자리에서 서서 다른 시선들을 보여주지만, 역사의 진행에 대한 비관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종착점은 개와 함께 떠도는, 최종적으로는 그마저 함께 할 수 없는 <웬디와 루시>의 삶이다. 초기축적에 있어 불평등한 관계로 출발했던 자본주의는 소유권과 그 침탈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규칙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웬디와 루시>에서 웬디의 좀도둑질에 대한 마트 직원의 대사)며 웬디의 삶을 인간의 룰에서의 안착보다는 비인간 개와의 관계에서 애착으로 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