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몽녀
- 감독
- 나운규
- 제작년도
- 1937
- 출연
- 윤봉춘, 노재신, 김일해, 임운학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 기억 이 나시나요, 이제?” “아냐, 정확하게는 기억 이 안 나네요. (사이)” - 한나리, 「김희진 1차 구술채록문」,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권: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트워크』, 한국영상자료원, 2024, 178쪽. 구술이라는 것은 대상자의 과거 경험을 듣는 일이기에, 구술채록문에서는 ‘기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기억이 난다’라든가, ‘기억에 남는다’라든가, ‘기억을 잊어버렸다’라든가, ‘기억이 없다’라는 등 우리는 기억을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무언가 또는 그 공간 자체인 것처럼 표현하곤 하는데, 특히나 아주 머나먼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야 하는 구술자들에게 그 공간은 바다처럼 넓고 깊어서 기억을 꺼내고 다시 넣는 것이 쉽지 않다. 이렇게 구술자가 기억의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혼자 기억을 이끌어내기 힘겨워할 때 면담자들은 조심스럽게 구술자와 함께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는 사실 매우 불안하고 또 긴장되는 과정이다. 일단 면담자는 구술자에게 어떤 기억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자칫 기억을 이끌어내려는 과정에서 면담자가 구술자에게 선입견이나 면담자의 견해를 심어주게 될 수도 있다), 혹여 특정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구술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트라우마를 일깨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면담자와 구술자 간의 이러한 교감은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낯선 두 사람이 기억을 공유해가는 과정에서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는 구술을 지커보는 이의 입장에서, 구술자와 면담자의 라포(rapport)가 형성되는 과정 에 대한 썰을 좀 풀어볼까 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구술채록문을 통해 구술자의 기억을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읽어나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날씨도 따뜻해지고 하니, 잠시 미스터리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에서 벗어나서 이번엔 가슴 따뜻한 휴먼드라마다. 그가 과거를 기억하는 법 앞서 ‘구술자가 기억을 꺼내고 넣는 것이 쉽지 않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구술자의 연령대가 높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기억의 쇠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고, 조바심을 내는 순간 오히려 기억은 더 꽁꽁 숨어버리기 때문에, 면담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구술자의 화법과 기억법을 파악하며 천천히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리고 때론 기억의 문제보다도 고령으로 인해 청력이 약해지며 의사소통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때는 필담을 준비하거나 목소리를 크게 내고 말의 속도를 늦춰 구술자가 입모양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불가능했던 시기가 있었으니,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한창이던 2020년이 딱 그랬다. 혹시 모를 코로나 감염을 막기 위해 면담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구술자와 면담자 사이에는 투명 아크릴판 가림막을 설치했다. 고령에 청력까지 약한 구술자는 마스크 때문에 면담자의 입모양을 읽을 수도 없었고 발음이 명확히 들리지 않았으며,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투명판 때문에 필담도 쉽지 않았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달부 선생님의 구술은 진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구술연구팀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구술팀은 구술채록문을 보는 이들이 조금 지루하고 산만하다 느끼게 될지라도 구술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여러 번 되묻고, 다소 대화가 반복되더라도 차근차근 사실 관계들을 확인하며 어둠 속을 헤쳐 나가듯 그렇게 나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매번 구술 인터뷰가 진행될 때마다 구술자의 가족분들이 함께 자리하여 쉬는 시간에는 구술자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면담자에게도 구술자의 부족한 기억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맡아주셨다. 그렇게 천천히, 그렇지만 그의 중요한 이력들이 구술채록문에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구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달부가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리기 전에 그는 항상 장소 나 공간 을 먼저 떠올렸는데, 그렇게 해서 떠오른 연쇄적인 기억들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길림성, 자하문 밖에서의 생활, 군 생활을 했던 논산훈련소나 고모가 살았다는 종로5가 등 구술자는 눈앞에 실제의 공간을 그려놓고 그 공간 안에 건물, 물건, 사람들을 하나씩 배치하며 그것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마치 그림을 그려 채우듯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1) 면담자(공영민) : (필담으로) 선생님, 불나고 난 다음에 바로 《아리랑》으로 가신 거예요? 구술자(문달부) : 예. 서울에 있다가, 한옥 뒤에. 그리고 청파동 앞에 칠성사이다 뒤에 있었어요. 밑에는 창고고, 서무과가 있었고, 2층 가니까 김규동 씨, 전봉건 씨, 김희수 씨. 카메라가 김희수 씬데, 섭외는 잘 했는데. - 공영민,『 2020~2021년도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5권: 문달부 』, 한국영상자료원, 2021, 63쪽. (이하 페이지만 표시함) (2) 공 : 잡지사에 처음 들어가셨을 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그때 왜 “창문으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놓고 간 도자기도 보이고…” 이러셨다 그랬잖아요. 문 : 청파동이고, 후암동에 조금 후진 사람이 살았고, 나가야 집이 있고. 계단식으로 지어있고. 자하문 밖에서 이제 서정범 씨하고 만나서 후암동에 왔고. …(중략) 자하문 밖에는 임철호 씨 별장에 살았고. 공 : 임철? 문 : 임철호. 공 : 임철호. 문 : 응. 바로 자하문 옆에 있었어요. 공 : 네네. 그리고 후암동? 문 : 후암동부터 서 선생하고 같이 다녔죠. (65~66쪽) 1970년대 청파동의 전경 (사진: 《서울신문》, 2013. 3. 11.) 첫 번째 인용문에서 구술자는 청파동이라는 공간을 먼저 그리고, 자신이 일했던 칠성사이다 건물 뒤에 위치한 《아리랑》 사의 건물을 그린 뒤, 마치 건물의 단면을 잘라내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밑에서부터 각 층에 대해 설명을 해나가며, 2층에 이르러서는 자신과 함께 작업을 했던 인물들을 하나씩, 마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소개하듯 이야기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그 공간이 조금 더 커졌다. 그의 기억은 청파동에서 후암동으로 지리적 이동을 거치며 그 공간에 연결된 사람 역시 임철호에서 서정범으로 자연스럽게 바뀐다. 특히 마지막 답변에서 ‘후암동부터 서 선생하고 같이 다녔다’라는 말에는 시간의 흐름을 공간의 이동으로 대치시켜 말하는 그의 독특한 화법과 기억법이 단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또 한 가지 문달부의 기억법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과거의 상황들 속에서 그가 느꼈던 정서적 경험은 종종 음식 과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1) 문 : 예. 그래 거기서 역전 에 살다가 해방돼서 북간도 에 잠깐 있다가. 그때는 보안대 시절이니까 남쪽으로 왔어요. 남쪽에 오니까 묘지에 미군들이 있더구만요. 거기 오니까 종이컵에 우유 하고 빵 하고 주더만요. 물론 무료로 받아먹고. 한참 올라오니까 국민학교가 있는데, 거기 오니까 국수 를 주더구만요. 콩가루 넣은 걸. 그때는 저 많이 먹을 때니까 주는 대로 다 먹고. 거기서 군용버스를 타고 남쪽 으로 왔어요. (32쪽) (2) 공 : 선생님, 홍대 얘기를 좀 들을게요, 홍대. 문 : 마포나루 있을 때. 공 : 대학 시절 이야기. 문 : 뭐 대학 시절에 공부했나요. 그때 비락우유 , 깡통에 팔았는데. 그 아가씨 한테 (웃음) 내가 비락우유 많이 먹었는데. 따끈한 물에 타 먹으면 좋고. 그때 뭐 먹고 돌아서면 배고플 때니까, 그 아가씨한테 많은 신세 졌죠. 부잣집 딸이에요. (37쪽) (3) 문 : 거기는 참, 여름이면 좋았어요. 두부집이 있는데 두부를 잘하더구만요. {두부요? 두부 (웃음)} 그래 순두부 를 많이 먹어요. 지금껏 순두부 즐겨 먹죠. 그래 그분 이 주로 세종로의 두부를, 음식점에 리어카로 가져 가다가 나중에는 자동차로 5가까지 배달하더구만요. 그래 그 다음부터 자하문 밖에 떠나오니까 자연지 멀어지고요. (39쪽) (4) 문 : 한국 사람 귀빈 이나, 외국 사람 귀빈들 이 오면 거기서 브리핑하고 논산 소개를 해요. 거기가 계백장군이 활동했던 황산벌판 이에요. 전주비빔밥 이 유명한데 웬만하면 전주고. (모두 웃음) 진주에 가면 이제 진주비빔밥 은 육회 예요. 소 생고기를 넣어 주더군. 그래 논산서 비교적 편안하게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제대했어요. (41쪽) 첫 번째 인용문에서 중국에서 살던 구술자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경로와 그때마다 만난 사람들 그리고 먹은 음식을 함께 떠올린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도 홍익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자신이 살던 ‘마포나루’를 먼저 떠올리고 당시에 만났던 학우를 떠올린 뒤 그녀가 주었던 따뜻한 비락우유를 이야기한다. 그 이후의 인용문들도 모두 특정한 시기 자신이 지냈던 공간을 떠올리고, 그 공간에서 만났던 사람에 대해 떠올린 후, 거기서 즐겨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며, 그곳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이러한 그의 공간-음식-당시 만난 사람이 연결되는 기억법을 이해하면, 다른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커피 ’에 대한 그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1) 공 : 아, 유태인 사장… 그래서 선생님께서 그때 커피 도 드시게 됐다고요? 그 얘기해주세요. 문 : 예. (웃음) 아침에 출근하면 으레, 처음에 가니까 씁쓸한 걸 맨날 줘요. 공 : (웃음) 근데 나중에 좋아하게 되셨어요, 지금처럼? 문 : 그럼요 (웃음) 이제는 완전히 중독자가 됐죠. (58쪽) (2) 공 : 그러니까 유솜(USOM) 관계자들 이 럭키화학에 와서 같이 일도 하고 그랬다는 거죠, 선생님? 문 : 예, 그렇죠. 공 : 그럼 반대로 선생님께서 유솜에 가신 적도 있어요, 유솜 사무실에? 문 : 그럼요! 자주 갔지요. 공 : 자주 가셨어요? 문 : 거기 가서 커피 많이 먹었죠. (모두 웃음) (111~112쪽) (3) 공 : 그때 말씀하시기를 방송국에 계실 때, 외국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셨다고 그러셨잖아요. 문 : 그렇죠. 공 : 외국인들이 가져온 애니메이션이었던 거죠? 문 : 그게 아마 의례인, 어린이 시간에는 외국 만화를 많이 했어요. 공 : 고정된 시간에 외국 만화를 많이 내보냈어요? 문 : 네. 저는 RCA 방송국 에 와서 처음에 커피 를 먹어 보니 ‘씁씁한 거 이걸 왜 먹나’ 했어요. (모두 웃음) 공 : 근데 좋아하시게 되셨잖아요. 문 : 그럼요. 이제 완전히 중독이 됐죠. 공 : 그때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그 외국 사람들 이랑 같이 회의도 하신 거죠? 문 : 그렇죠. (117쪽) (4) 공 : 다 같이 다니시면서 사진을 찍으셨다는 거죠? 문 : 그렇죠. 예. 서광수 씨하고. 공장 사진은 거의 그분이 찍어 줬고. 또 상업 사진은 김한용 스튜디오가 잘 돼서 제품 사진은 거의 그 집에서 찍었어요. 공 : 그리고 유솜의 사무실에도 자주 왔다갔다 하시고요. 문 : 그렇죠. 거기 가서 커피 먹기 시작해서 중독이 돼서 아침저녁으로, 낮에도 전부 커피예요. (135쪽) 그가 커피를 언급하는 부분은 여기에는 인용하지 않은 종로에서 커피를 마시던 이야기(전람회 감상 후 커피를 마시고 집에 갔던 경험, 명동에 있는 커피숍에서 지인들을 만났던 경험 등)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을 만났던 기억과 연결된다. 맥락을 끊고 인용을 한 것이라 구술자가 처음 커피를 맛본 장소를 헷갈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확실하게 처음 커피를 맛본 곳은 ‘RCA 방송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RCA 방송국을 다니면서 외국인 동료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고 그때 아침마다 커피와 도넛 같은,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음식들을 처음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력을 따라 구술이 진행되면서 유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다시 커피 이야기를 꺼낸다. 유솜(USOM)은 주한미국경제협조처(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Republic of Korea)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1952년 체결된 ‘한미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무상의 경제적 원조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RCA 방송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직원 외에도 많은 미국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구술자는 기업 광고 제작 당시 협력을 구하기 위해 유솜 사무실을 방문하면 한국인 직원뿐만 아니라 외국인들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문달부에게 이러한 외국인들과의 만남, 미국식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느낌은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보다, 당시 그가 마셨던 낯설고 씁쓸한 커피 의 향과 엮여 나온다. 1956년 개국한 RCA 방송국(HLKZ TV)의 전경 (사진: 《세계일보》, 2011. 11. 15.) 문달부의 구술은 유난히,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에 대한 정서적 표현들이 매우 절제되어 있다. 물론 이는 많은 시간이 흐르며 당시의 감정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화법이나 기억법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동안, 그가 직접 언어적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감정들이 기억 안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구술은 여러 번 읽으며 곱씹었을 때 더 그 맛이 살아난다. 파편화된 언어, 흩어진 기억을 조립하기 하나의 사례를 짧게 더 살펴보고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1999~2000년 사이,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목표로 설립된 씨네디비넷에서는 총 109인의 영화인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투자를 받지 못해 사업이 중단되며 이 자료들은 영원히 묻히는 듯했는데, 감사하게도 씨네디비넷의 대표였던 이하영 (현 하하필름스 대표)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에 모두 기증해주셨다. 당시 진행된 많은 영화인의 인터뷰 중에서도 여기서 소개할 것은 원로배우 김일해 (金一海, 1906~2004)의 인터뷰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직접 진행한 구술은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구술채록문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파편화된 언어들 가운데 찾아낸 구술자의 기억이 갖는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인터뷰집은 8월 중 공개예정이다!). 인터뷰 당시 김일해는 95세의 고령으로 일반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워, 자녀분들이 동석하여 인터뷰어를 도와주었다. 이 인터뷰는 얼핏 보면 마치 인터뷰어의 질문을 무시한 채 구술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술자의 말들 속에 존재하는 일관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매우 재미있는 면이 많은 인터뷰이지만, 여기에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놓을 수는 없으니,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조금 살펴보겠다. 김 : 그때 조선영화주식회사 라는 게 처음 됐어요. 그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배우로 들어간 사람은 말이야, 그놈들이 뽑아간 건 누군고 하니 그때 벌써 조선이 자꾸 망해들어갈 적이야. 근데 그때 들어와서 그 조선영화주식회사 맹글어 놓은 놈이 꼽춘데, 그게 일화의 제작부장으로, 주인공으로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일화에서 조선영화주식회사란 걸 ‘너 나가서 여기서 이 영화를 잡아라.’ 이렇게 됐지. … 한국에서 유명한 것들을 알지, 다. 그래 나와줘야 하는데, 제작을 해야 하는데 ‘너도 같이 좀 협력 바란다’ 근데 역할을 정했는데 우선 전부 일본놈들만 꽃을 주고 나까정 졸병이야, 모두. 근데 이제 ‘ 한국에 사람들을 유혹시켜서 전부 군대로 나가게 해야 한다. ’ 내가 생각하면 아주 엄청난 얘기거든. 그래서 ‘ 허허, 이거 큰일 났구나. ’ 그러니 내가 이제 제작부장 찾아가서 껍치지. “나 일 그만두겠소.”, “왜 그러냐?” 내 편이 지금 한국에 많다 그거야. 그런데 우리를 꽃을 주고서 해라. 그래도 자꾸 뭐 ‘군대로 나가라’, ‘*노해라’, ‘만세를 불러라’. 그리고 남산으로 끌고 가서 그 친일파들, 여기 나와 가시는 분들, 남산으로 끌고가서 찬물로 목욕시키고 이럴 판이야. … 왜 한국 사람을 큰 이런 이렇게 만들어놓고, 일본 유명한 사람들은 밑으로 들어가는 역할을 줘야 손님이 그래도 마땅치 않은데, 전부 저놈들이 꽃을 들고 나가고 한국 사람은 전부 **를 가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시시한 걸 주면, … 내가 무슨 사상이 말이여, 한국 사람이니까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이 이러니 내가 그 팬들한테 미안하다 그거야. … 아, 팬들이 그냥, 한국 전체가 팬들이 **한테 있는데 그거 시시한 역할 주면 누가 그 월급 받아 먹어. … 그렇다고 민족주의자라고 그랬다고 어떻게 보면. 자기 사상에 대한 문제, 예술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나중엔 인제, 내가 “무슨 사상에 대한 문제는 그 부분은 떠난 거 아니냐” 이러고. … 사상 문제는 여기 또 난거다. 그러니까 너희 알아서 해라. … 네가 생각대로 하진 않는데 만일 안 한다면 이제 사상범으로 생각하기 쉽다. 오해받지 않도록 해라. 이렇게 됐지. 그래 가만히 보니까 그놈들도 좀 기분 나쁘거든. 그만두자니 이거 이제 사상으로 취급해 가지고, 그래서 전부 출연했**. 여기서 김일해가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가 1937년에 설립된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말하는 것인지, 또는 1942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위에 인용한 이야기가 실제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맞는지도 알 수 없다. *주1 여러 가지 사실 관계를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김일해가 1939년 무렵부터 조선과 일본이 합작한 선전영화에 출연한 것은 그의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위의 구술은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해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선전영화의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일본 배우들에게만 좋은 역할을 주었고(그는 이를 ‘꽃을 주다’라고 표현한다) 한국인 배우들은 모두 졸병 역할을 맡기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자신을 좋아하는 조선의 영화팬들에게 그런 시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그는 영화제작자를 찾아가 거절 의사를 표했고, 이를 들은 영화제작자는 ‘당신이 출연 제의를 거절하면 자칫 일본 정부 측에는 사상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오해받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를 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충고로 끝나지 않았다. 결국은 배우들의 출연 거부를 ‘사상으로 취급’했고, ‘남산으로 끌고가서 찬물로 목욕시키는’ 상황이 두려웠던 모든 배우가 출연에 응하게 되었다. 김일해가 출연한 <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 >(이익⋅야마나카 유타카, 1939)의 스틸 이 부분이 전체적인 인터뷰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이 구술 바로 앞서 나오는 ‘ 나운규 ’에 대한 그와 아들의 대화 때문이었다. 나운규는 < 오몽녀 >(나운규, 1937) 촬영 도중 사상범으로 경찰에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때 일제 순사들을 설득해 그를 경찰서에서 빼내온 것이 김일해였다. 아들 : 아니 그리고 아버지, 나운규 씨가 민족주의자인데, 김 : 그럼, 민족주의지. 그런데 아편을 하기 때문에… 아들 : 근데 나운규 씨가 <오몽녀>를 만들다가 구속이 됐어요, 그렇죠? {응} 근데 구속이 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나운규 씨를 뺐단 말이야. 아버지가 가서 얘기해 가지고 촬영 마무리하게. 김 : 그렇지, 그렇지. 경찰서에 가서. 아들 : 이 얘기가 지금 먼저번에 방송이 됐어요, 이게.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볼 때는, 내가 자식이지만 아버지는 친일파야. 나운규는 민족주의자고. 김 : 아니, 나를 친일파로 인정한다는 사람은 가짜로 친일파로 맹글어놨지만, 난 *** 있지, 지금. 김일해는 이 대화에서 나운규를 민족주의자라고 말하고,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민족주의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6.25전쟁 당시 월북한 영화인들과, 한강변에서 무언가를(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모조리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섞어가던 중, 이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갑자기 시작한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이 모든 이야기를 이어서 다시 읽어보면 그에게 ‘민족주의’ 내지는 ‘사상’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가 어떤 것인지, 그는 왜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칭할 수 없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영화제작자를 찾아가 선전영화 출연을 거부한 이유로 시시한 역할과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을 영화팬들, 월급 등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 사람들을 유혹시켜서 전부 군대로 나가게 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일 났다’라는 생각에 제작부장을 찾아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출연을 결정했기에 그는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칭할 수 없다. 거기에 6.25전쟁 이후의 냉전 상황은 그에게 ‘사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다소 느닷없이 흐름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지만, 오히려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기’야말로 그가 역사의 평가 속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 - 고령의 구술자들을 만나 면담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경이감이 들 때가 있다. 2022년 주제사 ‘ 1980년대 이후 극장 지형의 변화 ’를 진행하며 만났던 구술자 양재형 (1925~)이나 김기봉 (1931~)은 두 분 다 이미 90세가 넘은 연세로, 우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면담자의 이름을 기억해주지는 못했지만, 이미 6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이야기나 군대에서 경험한 전쟁, 1960년대에 영화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자신이 일했던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구술이 진행되는 2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그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되새기고, 재구성하고(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술자의 이야기가 언제나 다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을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구성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쁘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게 기억 창고 안에 차곡차곡 넣어두셨던 걸까를 생각하면 그가 그 기억과 보내온 시간들이 그저 놀랍고, 그래서 타인에게 이렇게 소중히 간직한 기억들을 공유해준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확실히 요즘은 옛날에 비해 스스로 기억해야 할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자주 연락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외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휴대폰이 다 기억해준다. 몇 번 갔던 곳은 머릿속에 잘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방문할 때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스스로 길을 찾아가곤 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싶으면 바로 휴대폰으로 지도 검색을 해본다. 우스갯소리로 뇌를 휴대폰에 의탁하고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다는 말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으로 남겨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물이나 인물, 상황들에 직면했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보고, 어떻게 이를 재구성하고, 그로 인해 수반되는 감정들은 어떻게 처리하여 기억의 영역으로 넘기는가를 혼자 생각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만의 구술을 남겨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주1. 인터뷰 중반쯤에 한 번 더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언급하며 의정부 촬영소에서 발성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1937년 박기채 ⋅ 이필우 등을 주축으로 설립된 영화제작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위 인용된 부분에 등장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전후 맥락을 살펴봐도 구체적 작품이나 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 즉, 그가 여기서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1942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회사일 수도 있고, 또는 그가 출연한 조선⋅일본 합작영화의 제작사인 조선문화영화협회를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춘사 나운규 의 28주기 추모작품 신상옥 감독의 < 벙어리 삼룡 (1964)>은 “춘사 나운규의 28주기 추모작품”이라고 홍보되었다. < 오몽녀 >를 유작으로 남기고 1937년에 영면한 나운규는 1929년에 < 벙어리 삼룡 >을 감독하고 또 그 자신 삼룡 역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리뷰에서는 한결같이 마지막의 화재 장면에 1,000여명의 비(非)전문배우(엑스트라)가 동원되어 공들여 촬영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출세작 < 아리랑 (나운규, 1926)>에서부터 광인, 부랑아, 떠돌이 등 방외인 연기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구축한 배우 나운규에게는 계급적 원한에 사로잡힌 벙어리 캐릭터가 꼭 맞는 옷처럼 어울렸을 것이고, 역시 <아리랑>에서부터 수백, 수천명 농민이 등장하는 몹씬 촬영을 시도했던 감독 나운규에게는 원작에 나오는 화재 장면이 탐나는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 프린트가 유실되어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이 얼마나 그에 대한 오마쥬를 표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단 위의 화재 장면에서 신상옥이 공을 들인 것은 수많은 엑스트라 촬영이 아니라 순덕아씨에 대한 삼룡의 ‘헌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나도향의 원작소설(1925)에는 불타는 집에 뛰어든 삼룡이 제일 먼저 오생원을 구해내고 다음으로는 자기 몸이 불에 상하는 것도 잊은 채 순덕아씨를 구하면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씨를 구해냈다는 사실에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죽어가는 삼룡의 사랑과 헌신이 클라이막스가 되는 셈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 원작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의 손에 구출된 순덕아씨가 삼룡에게 ‘서방님(광식)’도 구해달라고 청하자 삼룡이 마지못해 다시 불속에 뛰어들어 광식을 구해내다가 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 과연 삼룡이 “평화롭고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피터팬 콤플렉스 왜 원작이나 나운규의 버전과 달리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이 광식과 같이 불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설정되었을까. 영화에서 내내 순덕아씨와 삼룡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마지막에 삼룡에게 남편도 구해달라며 간청하던 순덕아씨는 결국 화마(火魔)에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셈이 된다. 원작에서 삼룡은 살려달라는 광식을 불구덩이에 남겨두고 순덕아씨만을 구한 후 숨을 거두기 때문에 삼룡과 광식 둘 다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신상옥 버전에서는 순덕아씨의 청 ‘때문에’ 삼룡이 광식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순덕아씨는 아들을 남편이 있는 사지로 몰아넣은 여자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루나무 강가를 거닐며 삼룡이 어리광부리던 모습을 회고하는 순덕아씨의 모습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던 남성 가족들을 다 ‘처리’하고 홀가분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봉건주의자 남편과 성장을 멈춘(삼룡의 장애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피터팬 콤플렉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들 없이 이제 홀로 서게 된 몰락양반 가문의 딸. 당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정병욱은 이 영화에서 삼룡과 순덕아씨를 학대하는 광식의 행태가 “지나치게 지루하고 참혹”하다며 이를 “악의 과장된 표현”이라 비판한 바 있다. 박노식 이 연기한 광식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삼룡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은 물론, 양반의 예법을 운운하는 순덕아씨를 고까와하며 결혼 첫날부터 폭행한다. 정병욱은 “삼룡을 뭇매질을 하고 쇠스랑으로 마구 찍어대고 새댁을 걷어차고 할 적마다 곁 좌석에서 혀를 차고 비명을 올리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며 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전통에 어긋나는 표현이나 수법”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1) 삼룡의 지고지순함과 대비시키기 위해 광식의 악함을 부각시키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장인인 신상옥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광식의 폭력성은 삼룡처럼 피터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성장을 거부하는 아들이 지니는 철없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에는 없던 식모 범실( 도금봉 분)의 “품에서 사내가 됐”던 광식이 그녀와 맺는 육체적 관계는 삼룡이 순덕아씨와 맺는 지순한 관계와는 얼핏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커플의 투샷이 모두 모자(母子)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향토색짙은 문예작품 2) 물론 이런 현재적 해석과 무관하게, 당시 언론과 평단의 관심은 <벙어리 삼룡>이 1964년의 “최우수 영화,” “예술성을 살린 작품”으로서 아시아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본선에 진출하거나 수상을 했다는 점, 국적불명의 “청춘영화”가 판치는 국내 극장계에서 관객 21만명을 모아 흥행에도 성공했다는 점에 쏠려 있었다. 비록 “테마와 감각에서는 낡았”지만 “스타일면에서는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3) , 무엇보다 벙어리 삼룡 역을 평소 반듯한 지식인 캐릭터에 어울리던 김진규 가 맡았다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1) 정병욱, “영화수상: 학대 속에 피어난 인간미,” <동아일보> 1964.12.17. 2) 진(振)의 <벙어리 삼룡> 리뷰(경향신문 1964.11.16.) 제목. 3) R, “베니스 영화제에서 장려상을 탄 <벙어리 삼룡>,” <영화예술> 1966.4. >> 벙어리 삼룡 고화질 VOD 보러가기 <<
경성극장은 일제강점기 본정 3정목 94번지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일본인 극장으로 1921년 8월 개관하여 해방 직후까지 존속한 극장이다. 경성극장은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 과거 수좌(壽座)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그 곳은 1907년 이전 설립된 판본좌(坂本座)가 있었던 곳으로 서울의 일본인 극장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성극장의 전신이자 판본좌의 후신인 수좌는 1908년 건립되었고 1921년 그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었다. 경성극장의 설립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주식회사의 형태의 대형 극장이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되던 상황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경성의 일본인 자본가들은 본정 2정목에 위치한 수좌(壽座)를 신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주식회사 경성극장을 설립한다. 1919년 10월 기존의 수좌는 헐려 원산으로 이전되었고, 1921년 8월 가부키나 연극, 무용과 같은 무대공연을 할 수 있는 경성극장이 만들어졌다. 경성극장의 주주와 경영진은 경성의 주요 실업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경성극장 제4기 대차대조표에 표기된 중역의 이름을 살펴보면, 취체역 회장 고조우 간도(古城菅堂), 전무취체역 무라카미 코지로(村上幸次郞), 취체역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 카지와라 수에타로(梶原末太郞),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 사노 히코조(佐野彦藏), 고가와 카츠헤이(小川勝平) 감사역에는 이케다 쵸베이(池田長兵衛), 미타 마사지로(三田政治郞), 시이키 우노스케(椎木宇之助),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 야마자키 시카조(山崎鹿藏)이었다. 이중 회장 고조우 간도는 일본인 의사이자 실업가로 조선상업은행의 대주주 중 한명이었으며 전무 무라카미 코지로는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이라는 이름을 쓰던 무라카미 사진관의 주인이었다. 취체역 중 한명인 구기모토 도지로는 조선의 철물왕으로 불리던 인물이었고 야자와 지로는 동양생명보험회사의 경성지점장이었다. 이처럼 경성극장의 주요 인물들은 경성의 대표적인 일본인 실업가들이 망라되었다. 경성극장에서 일본의 텐카츠(天勝)나 텐와(天華)와 같은 유명한 연예단이나 연극단, 가부키단이 경성에 와서 공연을 했다. 특히 시즈마 고지로(靜間小次郞)는 이기세(李基世)가 그 문하에 있었을 정도로 일본 연극계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 연극계의 유명 인물이 이끄는 단체들이 경성에서 공연 할 때에는 경성극장이 중요한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경성의 대표적 흥행 장소였던 경성극장은 1929년 2월 13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일 화재는 오전 5시 40분경 경성극장에서 발화되었고 6시 30분경 진화되었는데 당시 바람이 심하여 극장 내 집기들을 꺼내지 못한 채 극장이 전소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경성극장은 극장가격 12만5천원, 집기 2만 여원 도합 15만 여원의 피해를 입었다. 화재 발생 직후 경성부에서는 불탄 그 자리에 극장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주의 일부가 주식회사의 해산을 주장했다. 이때 일본국수회 경성지부장이자 야쿠자 두목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주주총회를 요구하며 1.극장신축, 2.다른 극장(중앙관)과의 합병, 3.해산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결론을 내자고 주장했다. 1930년 2월 27일 열린 경성극장 주주총회에서 주주 18인이 불탄 옛 자리에 10만 2천 여원 예산으로 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극장의 설립이 추진된다. 1931년 9월, 과거 경성극장이 있던 자리에 신축된 극장의 이름을 경성연예관으로 정하고 와케지마 슈지로의 분도흥행부에서 극장운영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케지마는 흥행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분도흥행부(分島興行部)를 대일본흥업회사(大日本興業會社)로 확대한다. 특히 와케지마는 영화제작을 추진하기 위해 원산프로덕션의 도야마 미츠루(遠山滿)를 끌어들였는데 당시 도야마는 경성운동장 근처에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를 설립하고 영화촬영을 시작했다. 원산프로덕션에는 조선의 유명 영화인인 나운규가 합류하여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 [자료]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 개소식(《조선신문》, 1930.12.14.) 설립 초기 대일본흥업회사는 사장 와케지마 슈지로, 전무취체역 나루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취체역에는 도야마 미츠루, 사토 카츠타(佐藤勝太)가 맡았다. 대일본흥업회사 원산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가 출연한 <금강한>(1931)을 비롯해 <남편은 경비대로>(1931), <경성 온 퍼레이드>(1931)와 같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대일본흥업회사의 영화제작 활동은 평탄치 않았다. 도야마 미츠루가 회사를 탈퇴하자 영화제작은 한동안 소강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쇼치쿠에서 활약하던 야마자키 유키히코(山崎行彦)가 합류하고 무용가 배구자(裵龜子)의 극장 설립을 돕고 있던 이필우가 합류하면서 대일본흥업회사는 경성극장 뒤편에 경성촬영소를 짓고 영화촬영을 재개하게 된다. 이로써 와케지마의 경성촬영소는 제2기를 시작한다.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 경성촬영소에서는 3편의 무성영화와 6편의 토키영화가 제작되었다. 이중에는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인 <춘향전>(1935)과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1937)가 포함되어 있다. 경성의 대표적인 연극장으로 운영되던 경성연예관은 1935년 9월 3일 개축되었다. 종래의 기석(寄席) 형태의 극장에서 좌석을 확대하여 정원을 늘리고 끽연실, 휴게실, 화장실 등을 정비하는 등 극장 안팎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이름도 종래의 경성극장으로 되돌아갔다. 경성극장의 운영주 와케지마 슈지로는 1937년 명동 중국영사관 부지를 인수하여 극장을 세울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한다. 와케지마는 경성촬영소를 고려영화협회에 매각하고 1939년 봄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을 인수하여 근거지를 철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1939년 3월 1일부터 경성극장의 운영권은 와케지마에서 도쿄 후지흥행부의 마쓰오 구니조(松尾國三)에게 넘어가게 된다. [자료] 상설영화관으로 바뀐 경성극장( 『キネマ旬報』(제57호), 1942.08.21) 새로운 운영자들은 경성극장을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39년 9월 개축공사가 완료되고 상설영화관으로 인가를 얻게 되자 경성극장은 10월부터 신코키네마의 조선봉절관으로 운영된다. 신코키네마 봉절관이던 경성극장은 영화법 제정과 함께 영화산업의 통폐합으로 1942년 신코키네마가 해산되어 다이에(大映)로 통합되자 다이에 직영관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영화순보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1943년 현재 경성극장은 흥행주는 다이에, 지배인은 가와무라 타다시(川村正)였으며 총 7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극장은 해방 후 이름을 서울극장으로 바꾸었으며 적산관리인은 강상률이었다. 하지만 국제극장이 시공관으로 바뀌게 되자 1947년 12월 전 국제극장 관리인이던 김양성이 강상률을 대신하여 서울극장의 적산관리인이 된다. 김양성이 운영하던 서울극장은 6.25전쟁 중 파괴되어 재건되지 못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1921년 설립된 경성극장 [자료] 매일신보 1929.02.14. 십삼일 조(朝) 본정(本町)에 대화(大火), 폭풍에 불길 날려, 경성극장 소실! 화재원인은 실화인모양, 전부 사호(四戶) 사동(四棟) 전소(全燒) 작13일 5시35분에 본정3정목 경성극장 2층에서 실화(목하 조사 중)로 불이 일어나 때마침 불어오는 맹렬한 폭풍에 불길은 기세를 얻어 동극장 360평 3층 1동을 전소하고 이웃집 4동 4호를 회신한 후 동6시40분경에 진화하였다. 손해 십여만, 사상( 死傷) 도 있다, 소방조원의 결사적 활동, 마치 활동사진 같이 이번 불은 금년 이래 제일 큰 화재로 그 피해금액은 십여만원의 거액에 달하며 더욱이 福田소방조원이 참사한 희생까지 있었고 이 외에도 동극장의 하인 崔順吉의 일개월 가량의 화상과 소방조원들의 부상도 다수하였다. 화재의 당소는 상점, 회사, 요리점 등의 宏大한 건물이 즐비하야 남부 일대의 시민의 소동은 그 극에 달하였고 소방조원의 연소를 방어하는 활동 등 실로 전란의 한 당면을 방불케 하였다. 보험은 7만원 금번 재난을 당한 경성극장은 주식제로 古城사장, 村上전무의 손으로 경영하여 오든 터인데, 동극장은 일직 7만원의 화재보험이 있었고 동일 10시경부터 본정 3정목에서 중역회의를 개최하고 선후책을 토의하는 중이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7.05.09. 경극(京劇)에 불경사건(不敬事件), 천황폐하 어진으로 흥행타 임장한 경관에게 발각되어, 배우 6명 본서에 인치(引致) 동경에서도 이름 있는 현대극단 원산만(遠山滿) 일행 47명이 재작 칠일 밤부터 시내 수정(壽町) 경성극장(京城劇場)에서 연행을 하게 되었던바 동 아홉시 경에 둘째로 상연한 현대극 피묻은 군도(血染軍刀) 제3장에 이르러서 황실 존엄에 대한 불경한 거조가 있다고 하야 돌연히 임장하였든 소관 본정서 횡산(橫山) 경부보가 중지를 명령하는 동시에 극단장 원산만이라는 본명 소원록(小原綠)(35) 등 배우 영정복(永井福)(34) 무대감독 파가철조(破家哲助)와 및 동 극장 막짓는 사람 길미말태랑(吉尾末太郞)(49)과 원산극단측 막짓는 사람 인여정칠(人與淸七)(51)과 옥정자삼(玉井滋三)(34) 등 여섯명을 본정서로 데려다가 검속한 후 동극단의 경성흥행을 중지케 한 사실이 있어서 일시는 대 혼잡을 이루었다는데 그 내용은 전기 각본은 니항(泥港)에서 전사한 성야소좌(星野 少佐)에 대한 연극인대 제3장은 “성야가의 안방”이라고 한 장면인바 성야 소좌가 전사한지 일 년 제일을 당하야 그 미망인 추자(未亡人 秋子)가 성야 소좌의 사진을 불단에 놓고 제를 지내고자 할 즈음에 그와 비밀한 관계가 있는 등전광(藤田光)이라는 남자가 들어와서 그 사진을 깨처버리고자 하며 불의의 짓을 하는 마당인데 그 불단에 올려놓은 사진을 성야 소좌의 사진 대신 모 일문신문 3월 5일부 부록인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진을 모시어 놓고 그와 같이 연극을 행한 것이라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9.09.29. 신흥 봉절관(封切館)으로 / 경성극장 개관 개축공사가 완성된 경성극장은 그간 신청 중이던 상설영화관으로서 인가도 되겠음으로 1일부터 4일까지 동보단원(東寶劇團) 일행 100여명의 출연으로 개관. 5일부터 신흥키네마 조선 제일 봉절관으로 본격적 흥행에 들어설 모양이다. 이에 앞선 30일은 피로초대관극회(披露招待觀劇會)를 개최한다는 바 이로써 경성에도 송죽의 명치좌, 동보의 약초극장, 일활의 황금좌와 함께 신흥의 경성극장이 서로 꽃다운 홍업전을 연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