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혈야화]<오스카&썬>오후 -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
- 제작년도
- 2011
사진: "Lichtspiel Opus 1.",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를 뒤져나가면서 슬픈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순간? 영화가 가졌던 하나의 가능성이 역사의 폭력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중단되었을 때. 이번에는 세계영화사의 슬픈 순간 중의 하나와 만날 차례이다. 아마 수없이 이런 순간과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 1887~1941)은 18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스위스 취리히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그때 취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중립국으로 모인 다다이스트들의 도피처였다. 여기에 한스 리히터, 트리스탕 차라, 에미 헤닝스, 한스 아르프, 하여튼 셀 수 없는 다다이스트들이 있었다. 한때 제임스 조이스도 여기 머물렀고, 이웃 도시에 러시아의 동지들에게 문건을 보내던 블라디미르 레닌도 잠시 체류했었다. 아마 여기서 발터 루트만은 다다이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1909년에 독일로 돌아왔고, 뮌헨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파울 클레, 라이오넬 파이닝어와 교분을 맺었다. 잠시 파울 클레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파울 클레는 닥치는 대로 화가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도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발터 루트만은 그들의 작품을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그의 영화들 속의 이미지를 가져왔겠는가. (좌1) 발터 루트만 (사진: "Walter Ruttmann", IMDb ) (우2) 발터 루트만 연출 <빛의 유희, 작품 2번>(1922), <빛의 유희, 작품 3번>(1924) (사진: "LICHTSPIEL: OPUS II", MUBI / "Opus III", IMDb ) 발터 루트만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벨기에 아르 누보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헨리 반 데 벨데가 바이마르 미술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를 통합하여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웠다. (하지만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는 바우하우스를 곧 탈퇴하였고, 독일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초대 교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미술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쳐 가기로 한다.) 이 학교는 예술의 창조와 20세기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교육 목표이자 학교의 정체성이며 바우하우스의 프로젝트라고 선언(하다시피)했다. 이 학교에 네덜란드에서 《데 스타일(De Stijl)》을 창간한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방문했고,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가 엘 리시츠키도 찾았다. 바우하우스의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헝가리 미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였다. 바우하우스는 산업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좌) 바우하우스 (사진: "Chronology", Bauhaus Dessau ) (우) 1920년대 바우하우스 마스터 하우스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사진: "Biography", MOHOLY-NAGY FOUNDATION ) 발터 루트만은 화가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추상주의 양식에 끌렸다. 그런 다음 영화를 끌어들였다. 이때 발터 루트만은 영화를 ‘새로운 예술’이라기보다는 미술을 위한 새로운 테크놀로지, 새로운 매체, 새로운 사이트(site)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예술에서의 보편언어’를 추구하는 테크놀로지와 추상의 형식을 서로 결합하는 미래를 선언하는 《데 스타일》의 ‘기계 미학’에 관한 논의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발터 루트만이 선택한 길이 아방가르드 영화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트만 자신은 미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고 믿었다. 좀 더 간단하게 스크린을 새로운 캔버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캔버스는 ‘시간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매체’였으며 여기에 “우리 시대의 속도”를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빛의 유희, 작품 1번(Lichtspiel; Opus 1)>(1921)이다. 영화 제목이라기보다는 회화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 상영 시간 11분 44초. 음악 막스 부팅. 검은 바탕 화면에 푸른색과 초록색 원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형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린 이 작업은 명백히 칸딘스키의 영향 아래 놓인 것으로 보였다. <빛의 유희, 작품 1번>은 1921년 4월 27일 베를린 마르모르하우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 극장에서 한 해 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19)을 공개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비평가 베른하르트 디폴트는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루트만은 자신의 스피드를 미래주의자 캔버스의 영화적 돌진으로부터 가져왔다”라고 썼다. 영화와 미술은 표현주의 영화들과 다른 차원에서 다시 한번 친교를 맺었다. <빛의 유희, 작품 1번> 중 하지만 <빛의 유희, 작품 1번>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상품 광고 아이디어를 찾던 쪽이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아방가르드와 비즈니스가 서로 결합했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다시 한번 돈이 되었다. 그들은 이 작품을 산업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였다. 발터 루트만뿐이 아니라 많은 실험 영화 작가들이 새로운 제안을 받았고, 그들은 작업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곳은 바우하우스였다. 산업 디자인의 관점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활용한 ‘예술과 테크놀로지 사이의 새로운 통합’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영화라는 표현 대신 매체로서 ‘빛의 구성과 조립으로 이루어진 이 종합’에 관해 1922년 《데 스타일》에 ‘생산, 재생산’이라는 글을 썼다. 발터 루트만은 자신의 작업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왁스-커팅기에 관한 허가권을 얻은 다음 1926년에 로테 라이니거의 영화 <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1926) 오프닝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중 일시적으로 영화(와 미술 사이)의 또 다른 가능성에 다리를 놓았던 순간은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하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발터 루트만은 추상적인 이미지의 ‘빛의 캔버스’를 버리고 산업 디자인 영화에 관심을 돌렸다. 1935년, 발터 루트만은 군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캔버스’를 실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치당은 그가 1928년에 모스크바 여행을 다녀온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감독직에서 해고하고 그 자리에 레니 리펜슈탈을 지명했다. 그 영화가 < 의지의 승리 >(1934)이다. 발터 루트만의 경력은 여기서 끝났다. 오스카 피싱거는 나치 독일을 피해서 1936년에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월트 디즈니의 < 환타지아 >(제임스 알가 외, 1940) 작업에 참여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1937년에 시카고에 머물렀고, 미국에 개교한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한스 리히터는 작업을 중단하고 1940년 뉴욕에서 영화를 가르쳤다. ‘빛의 캔버스’는 그렇게 섬광처럼 빛을 발한 다음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하나의 순간이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금녀의 벽이 여태껏 깨진 적이 없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 상임지휘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우상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천부적인 재능과 악마 같은 권력욕을 과시하며, 클래식 스타로 세계 각국에서 쏟아지는 러브콜들에, 일거수일투족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그녀는 ‘교향곡 5번’만 연주하면 꿈에 그리던 말러의 교향곡 전곡 지휘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절정의 순간, 클래식계에서 제명당한 한 젊은 여성의 자살과 성추문 미투(Me Too) 그리고 새로 뽑은 단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리며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흡사 실제 음악업계 인물의 추락을 담아낸 듯 생생한 디테일과 불편한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토드 필드 감독의 16년 만의 연출 복귀작 < 타르 >는 굴곡진 서사와 드라마틱한 비극 대신 섬세한 인물 직조와 그 배경을 리얼하고 꼼꼼하게 스케치하며 권위적이고 욕망이 꿈틀대는 예술의 뒷면을 고스란히 까발린다. 가상의 음악가를 다루는 만큼 이를 진짜처럼 연기해 낼 주연배우와 진짜 음악을 구현해 낼 음악감독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토드 필드는 영화 제작을 진행하며 캐스팅 1순위로 주연 배우인 케이트 블란쳇을, 그 다음으로 음악가 힐두르 구드나도티르를 섭외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1982년 아이슬란드에서 출생한 힐두르는 영화 초반 실명으로도 잠깐 언급되는데, 클래식과 영화음악, 아방가르드 사운드를 넘나들며 현재 가장 주목받는 여성 음악가 중 한 명이다. 대중문화에 큰 영향력을 지닌다는 영미권의 4대 트로피 EGOT(에미, 그래미, 오스카, 토니) 중 EGO를 달성한 채 토니상만 남겨두고 있는 그녀는 음악가 집안(아버지는 작곡가이자 클라리넷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 남동생은 밴드 음악을 하며, 남편은 음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첼로에 빠져들었다. 아이슬란드 예술원과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작곡 및 뉴 미디어를 전공한 힐두르는 연극과 무용, 공연을 위한 곡들을 썼고, 최근 오스카를 수상하기도 한 하우슈카나 <다크>의 벤 프로스트, < 파친코 >의 니코 뮬리 등 여러 아티스트들과 밴드에서 연주 및 녹음을 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아울러 첼리스트로 활동하는 틈틈이 네오 클래식과 힐링 뮤직, 아방가르드한 현대음악 사이에 위치한 독특한 자신의 솔로 앨범 5장을 발표하며 좋은 평가도 얻었다. 2011년부터는 영화음악으로 저변을 넓혀 핀란드와 브라질, 슬로바키아, 터키 등 여러 국적의 작품들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게 된 건 같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영화음악가 요한 요한슨이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일련의 작품들에 참여하면서부터다. 힐두르 구드나도티르 힐두르는 이미 2006년 요한 요한손이 작업한 곡들이나 앨범 그리고 힐두르 자신의 솔로 앨범에 참여하며 여러 차례 교류한 바 있는데, 공감각적인 엠비언트가 몽환적으로 발휘되는 드론 사운드에 중후하면서도 매혹적인 어쿠스틱 음색의 스트링(첼로)을 조화시켜 음악적 방향성과 색채를 공유했다. 요한 요한손이 안타깝게 약물 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그가 진행하려 했던 시카리오의 속편 <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와 TV시리즈 < 체르노빌 >을 이어받아 호평을 받았고, 공동으로 작업하던 <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까지 마무리 지으며 명실상부 그의 사운드를 계승한 새로운 음악가의 출발을 알렸다. 여기에 스판덱스 쫄쫄이 유니폼이나 입고 돌아다니는 유치한 슈퍼히어로라는 장르의 편견과 한계를 부셔버리고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 조커 >의 음악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 되는 찰리 채플린의 아이러니와 마틴 스콜세이지의 비정하고 시니컬한 기운을 잔뜩 물려받은 이 고전적인 영화는 힐두르의 슬픔을 잔뜩 머금은 스산한 사운드로 광기어린 애수의 초상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조커>로만 힐두르는 20개가 넘는 음악상을 휩쓸었으며 골든 글로브 최초로 음악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여성 작곡가이자, 오스카 음악상이 단일부문으로 합쳐진 이후 최초 여성 수상자고, 역대 오스카에서 3번째로 음악상을 수상한 여성 작곡가가 됐다. 토드 필드는 음악을 리허설 하는 것은 무엇인지, 음악을 작곡하는 건 어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왜 좌절하게 만드는지, 그 심리적이고 정서적 측면을 샅샅이 담아내고 싶었기에 <조커>로 날개를 단 힐두르 구드나도티르가 모든 제작 과정 전반에 관여하길 바랐고, 그 열의와 진심에 반해 그녀는 자신이 맡을 예정이었던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암스테르담>에서 하차하면서까지 <타르>에만 1년이 넘는 시간을 집중해 매달렸다. 힐두르는 <타르>에서 보통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3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하나는 이른바 ‘템포 매핑’이라 부른 - 영화와 캐릭터 간의 사운드 동기화를 이루는 - 비공개적인 음악 과정을 거쳤고, 다른 하나는 리디아 타르가 극 중에서 작곡하던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은 영화를 위한 진짜 스코어 작업이었다. 본 영화 내에서나 앨범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템포 매핑’ 작업은 상당량의 곡들이 상황이나 캐릭터에 맞는 BPM과 템포로 만들어져 리허설과 세트장에서 배우들이 착용한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고, 캐릭터 내면의 리듬을 음악적으로 안내하고, 이를 통해 배우들이 몸짓 언어로 구현할 수 있게 도움을 줬다. 이는 음악을 전공했고,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기도 했던 토드 필드 감독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자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사운드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는 힐두르였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극중에서 리디아 타르는 딸에게 바치는 곡을 작곡하느라 안 풀리는 멜로디를 잡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메인 테마로 등장하는 “For Petra”다. 힐두르는 대본에서 이 장면을 읽자마자 상승 기조의 멜로디 단서를 바로 떠올렸는데, 작곡가이자 음악가가 외부 세계의 소리나 요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시켜서 음악으로 완성하는지, 또 그 집착이나 탐구의 과정 속에서 음악이 되기 전의 소리들과 마주할 수 있단 점에서 인상적인 결과물로 다가온다. 물론 영화상 리디아 타르는 결코 완성하지 못하지만, 후술할 컨셉 앨범에선 첫 단서였던 1분 언저리의 보컬곡과 함께 로버트 에임스가 지휘하고 런던 컨템포러리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8분에 이르는 대곡으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유령처럼 들리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40여분에 이르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가는 스코어가 있다. 거의 후반에 몰려있는데 관객은 거의 알아차리기도 힘든 정도로 희미하고 잠재의식 수준에서 작동하는 공감각적인 사운드디자인으로, 매우 건조하고 느리지만 불안하고 섬뜩하며 흥미진진한 영화에 현재적이고, 정서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는 영화에서 다루는 권력형 갑질과 성추문 등 불편하고 민감한 요소들을 관객의 입장에서 자극적으로 소비하거나 부각시키지 않고, 온전히 리디아 타르가 직접 마주하는 체험적 측면에 주력한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를 비롯한 여러 시상식 기준에 적합하지 않아 음악상 후보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런 연유로 <타르>의 사운드트랙은 정확히 말해 사운드트랙이 아니다. 리디아 타르가 노란 딱지로 유명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만약 앨범을 냈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컨셉 앨범인 동시에(그래서 이 앨범에 앞서 얘기한 “For Petra”의 완성곡이 담긴 이유다!), 리디아 타르의 실시간 플레이리스트며, 토드 필드와 힐두르가 원했던 “클래식 음악을 준비하는 작업들의 모든 지저분함”을 담고 있는 체험형 실황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케이트 블란쳇이 직접 지휘하는 말러 교향곡 5번의 완벽한 연주가 아닌 리허설들만 일부 수록됐고, 줄리어드에서 인상적인 수업을 하며 직접 시범을 보인 바흐의 “평균율 1번 프렐류드”나 임시 단원으로 뽑힌 첼리스트(소피 카우어)가 어린 시절 연주했던 곡이라며 보내 준 영상 속의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 그리고 영화의 시작을 여는 페루의 주술사이자 치료술사 노래나 오래된 뮤지컬 넘버에, 리디아 타르가 만들었다는 가정 하의 힐두르 구드나도티르가 작업한 결과물과 그 단서들로 다시 재구성된 3악장짜리 현대음악 소품까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영화의 세계가 현실 속으로 확장돼 발휘된 비장의 OST인 셈이다. 이 앨범만으로 온전하게 <타르>의 음악을 모두 즐길 순 없지만, 적어도 리디아 타르가 어떤 음악 세계에 살아왔고, 또 추구해가고 있는가 가상의 방향성을 생생하게 제시하고 전달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힐두르 구드나토티르는 2024년 자신에게 놀랄만한 명성을 안겨다 준 조커의 속편 <조커: 폴리 아 되>로 다시금 영광을 재현할 준비를 하고 있다. Track List 1. For Petra (Vocal Version) - Hildur Guðnadóttir 2. Mortar - Hildur Guðnadóttir 3. Introductory Words 4. For Petra (Recording Session) - Hildur Guðnadóttir 5. Hildur's Impressions 6. Tár: I. Largo - Hildur Guðnadóttir 7. Tár: II. Allegro - Hildur Guðnadóttir 8. Tár: III. Moderato - Hildur Guðnadóttir 9. Symphony No.5 in C-sharp minor / Pt.1: I. Trauermarsch & II. Stürmisch bewegt (Rehearsals) - Gustav Mahler 10. Symphony No.5 in C-sharp minor / Pt.3: IV. Adagietto (Rehearsals) - Gustav Mahler 11. Introductory Words (Recording Session) 12.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IV. Allegro (Recording Session/First Take/Excerpt) - Edward Elgar 13. Control Room Talk (Recording Session) 14.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IV. Allegro (Recording Session) - Edward Elgar 15. Applause (Recording Session) 16.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I. Adagio – Moderato (Recording Session/Excerpt) - Edward Elgar 17. Here's That Rainy Day - Jimmy Van Heusen / Johnny Burke 18. Prelude in C major, BWV 846 from The Well-Tempered Clavier (Lesson/Excerpt) - Johann Sebastian Bach 19. Lydia Tár Field Recording 20. Cura mente - Fernandez
태양계 궤도를 도는 에베레스트 크기만한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케이트(제니퍼 로렌스). 다른 동료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는 가운데 지도교수인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궤도 계산을 하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6개월 안에 지구와 충돌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딪치는 순간 종말이 펼쳐질 게 명백한 상황이기에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NASA에 보고하는데 이때 정부 관계자들이 극비리에 개입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익숙한 SF 재난 블록버스터를 떠올릴 법하지만, < 돈 룩 업 >은 그 쉽고 흔한 길을 걷지 않는다. 이 영화는 혜성 충돌의 고전적인 마스터피스 <세계가 충돌할 때>나 < 지구의 대참사 >도, 할리우드 스케일의 위력을 담은 < 아마겟돈 >이나 < 딥 임팩트 >도, 운명적인 < 너의 이름은 >이나 로맨틱 코미디의 < 세상 끝까지 21일 >도, 그리고 암울한 아트하우스의 < 멜랑콜리아 >도 보여주지 않았던 세태 풍자에 집중한다. 무능한 정부는 정치 스캔들에서 벗어나 중간 선거에 이기기 위해 혈안이 돼있고, 언론은 심각한 분위기를 피해 가십으로만 소비하려 한다. 여기에 이익에만 눈이 먼 기업과 전문가들의 경고를 외면하고 기만하는 대중들이 가세하며 환장의 대(大)콜라보를 이룬다. SNL 작가 출신으로 윌 페럴과 함께 많은 코미디를 작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기후 환경 문제와 막장의 끝을 달린 트럼프 정부 그리고 제작과정 중 실시간으로 터진 코로나 상황을 혜성에 빗대 마치 실제 인류의 대위기 앞에서 벌어질 법해 정말로 무서워(!)지는 블랙 코미디를 완성해냈다. 제니퍼 로렌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메릴 스트립, 조나 힐, 마크 라일런스, 케이트 블란쳇, 타일러 페리, 티모시 살라메, 론 펄만, 아리아나 그란데, 키드 쿠디, 히메시 파텔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며, <돈 룩 업>은 넷플릭스에서 성공의 지표로 뽑는 “공개된 지 28일 동안 가장 많이 본 영화” 중 < 레드 노티스 >에 이어 역대 2위를 차지했다. 비판의 대상이 다소 편향적이라는 지적과 반복적이고 단선적인 플롯과 고압적인 자세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는 등 호불호가 갈렸지만, 2021년 오스카를 비롯해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후보에 오르며 완성도에서 호평을 얻었으며, 현재 미국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극찬도 받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심한 작태를 풍자하는데 주력한 작품이지만, 이 극도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과 재미, 감동을 이끌어내는 건 바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는 니콜라스 브리텔의 명민한 음악 덕분이다. 니콜라스 브리텔 배리 젠킨스의 < 문라이트 >와 <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주목을 받은 니콜라스 브리텔은 1980년대생 할리우드 영화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력을 쌓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뉴욕의 유대 가정에서 자란 브리텔은 피아노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며 고교 시절 줄리어드 음대의 프리 칼리지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나, 왜 인간이 음악에 매료될까에 궁금증을 느껴 하버드 심리학과에 지원할 정도로 괴짜이자 수재였다. 학부 시절 내내 힙합 연주그룹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심취했고, 자신의 하버드 심리학과 동기였던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처음 연출한 단편 <EVE>에서 그의 소품 “Forgotten Waltz No.2”가 쓰이며 영화음악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포트만이 참여한 < 뉴욕 아이 러브 유 >의 한 꼭지를 비롯해, 각종 다큐멘터리에 참여하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리텔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고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해지펀드 매니저이자 외환 딜러로 활동했는데, 그가 결국 다시 음악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된 건 < 노예 12년 >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부탁으로 한스 짐머가 <노예 12년>의 스코어를 맡았지만 영화 전반에 삽입될 소스 음악들에 대해선 다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라 새로 외부 음악가를 수혈했는데, 그게 바로 니콜라스 브리텔이었다. 그는 전혀 녹음된 바 없고, 제대로 전승되지도 못한, 잃어버린 노예들의 음악을 위해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실제 유행하던 스타일에 맞춰 철저한 고증 끝에 새롭게 만들어 빌보드 매거진으로부터 “<노예 12년> 음악의 비밀병기”란 극찬을 받았다. 금융권 출신답게 브리텔은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제작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단편 영화에 제작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그게 바로 데이미언 셔젤의 < 위플래쉬 >였다!), 후에 이 영화가 장편화되며 음악에서 일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확고히 영화음악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건 앞서 언급한 배리 젠킨스와 아담 맥케이와 함께 한 일련의 작품들이 성공한 덕분이 크다. < 빅쇼트 > 때 브리텔의 대본에 적힌 전문적인 금융(음악이 아니라!)업계 용어 메모에 놀라 아담 맥케이가 반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실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대단히 놀랍다. 이미 <빅쇼트>와 < 바이스 >를 통해 복잡하고 민감한 경제와 정치 생태계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음악적으로 정리한 바 있는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번 <돈 룩 업>에서도 멸망을 앞둔 경박한 사회적 혼란과 진실이 잘못된 정보 앞에 덮이는 아이러니, 무능한 정부를 비꼬는 다양하고 세련된 스코어들을 들려준다. 신랄한 풍자와 날 선 묘사들로 불쾌해질 수 있는 영화의 공격성을 최대한 무마하고, 널뛰는 코미디와 진지한 드라마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여러 고민 끝에 혼란이 절정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 유행한 업 템포의 빅밴드 사운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메인 테마의 색채로 잡는다. 광기와 혼돈을 묘사하면서 멸망이라는 실존적인 문제 앞의 우울함과 슬픔을 내재해야 하고, 동시에 코미디 음악으로서 희극적인 면모도 갖춰야 하기에 복잡하고 미묘한 톤을 유지해야 하는데, 브리텔은 절규하듯 울부짖는 브라스섹션에서 절묘한 부조리의 묘미를 찾았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필사적으로 혜성 충돌을 경고할 때마다 빅밴드 사운드는 더 처절하게 조증 기조를 발하고, 격렬하고 활력 넘치는 사운드는 이들이 무기력하게 실패할 때마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와 스티브 잡스의 ‘애플’,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영화 속 대기업 BASH의 다양한 징글(방송이나 광고, 벨소리에서 쓰이는 짧은 곡)을 배치해 공허한 낙관론과 가짜 희망주의를 조롱하며 음악적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를 위해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핸드폰 벨소리와 기업 프레젠테이션 속 영상, 방송 시그널과 CF 음악들을 일일이 작업했다. 여기에 영웅적인 블록버스터 사운드(물론 이마저도 비웃기 위해 사용되었다!)나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통적인 할리우드 스코어까지 활용하며 음악적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장르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악기에서도 베이스, 드럼, 트럼펫 그리고 색소폰 트리오 등의 빅밴드나 전통적인 오케스트라는 물론, 밴조와 만돌린, 토이 피아노, 첼레스타, 파르피사 오르간, 차임벨, 힙합 비트를 포함한 각종 일렉트릭 효과까지 특이하고 독특한 종류를 혼합해 유희적이고 절충된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쳐 보인다. 일견 스코어만 듣고 있으면 짧은 큐들에, 워낙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두서없이 펼쳐져 응집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영화 내에서 각각 장면마다 강력하게 작용하며 존재감을 발휘한다. 또한 영화 내에선 니콜라스 브리텔이 공동으로 참여한 두 곡의 노래도 흘러나오는데, 극중 커플로 나오는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가 영화 중반 소행성과 충돌을 경고하기 위해 콘서트장에서 부르는 “Just Look Up”과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게 된 지구인들의 쿠키를 담은 엔드크레딧에 흐르는 “Second Nature”다.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의 듀엣송으로 전통적인 사랑 노래처럼 시작하는 “Just Look Up”은 후반 2절에 이르러서 무지한 대중들의 계몽을 일깨우는 과격한 가사로 영화의 조롱 강도를 더한다. 아름다운 파워 발라드에 이질적인 가사가 던지는 격차야말로 이 노래의 백미로, 2021년 강력한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였지만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Second Nature”는 브리텔과 인디 밴드 본 이베어의 리더인 저스틴 버논이 함께 만든 곡으로, 혜성 충돌 후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먹먹해진 감성과 풍자로 쓰린 속을 다스리기에 좋은 몽환적인 포크송이다. 권력과 재력으로 새로운 세상에 이주한 이들을 위한 노래가 아닌, 현시점에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과 희망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응원가이자 송가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시기 비장의 OST 중 하나였던 <돈 룩 업>으로 자신의 세 번째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지명된 니콜라스 브리텔은 아담 맥케이와 함께 HBO에서 4시즌까지 방영된 드라마 <섹세션>과 디즈니 플러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 < 안도르 >를 통해 안방 데뷔에도 성공했으며, 24년 배리 젠킨스와 새롭게 도전하는 라이온 킹의 실사화 속편이자 프리퀄인 <무파사: 더 라이언 킹>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Track List 1. "Just Look Up" by Ariana Grande & Kid Cudi 2. Discovery 3. Ephemeris 4. On Hold 5. The Call 6. C-5 Galaxy 7. Don't Look Up (Main Title Theme) 8. BASH Corporate Ident ("Liif") 9. Hyperobject Approaches 10. My Boyfriend Broke Up With Me 11. The Arrest 12. It's A Strange Glorious World 13. The Launch 14. The BASH Presentation 15. Kate Goes Home 16. FEMA-BASH Commercial 17. Arrival At The Hangar 18. There Is A Comet 19. The Comet Appears 20. The Prayer For Stuff 21. The BASH Launch 22. Twenty-Four Drones Is Enough 23. It All Comes Down To This 24. Thanksgiving (Overture To Logic And Knowledge) 25. The End? 26. Memento Mori 27. Don't Look Up (End Credits Suite) 28. Logic Waltz In B Major (Bonus Track) 29. Don't Look Up (Main Title Suite; Bonus Track) 30. Ode To Science (Bonus Track) 31. "Second Nature" by Bon I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