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싱 2
- 감독
- 이상언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감독을 처음 만난건 1950년대 명동에서였다. 피차 20대 초반의 나이로 영화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뛰어들고 나서였다. 당시 명동 한복판(옛날 명동 공원) 바로 옆에 5층 건물 있었고 3층에 고 이병일 (李炳逸) 감독님 사무실이 있었다. 다섯평 정도의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이상언 을 처음 만났다. 나는 수도(首都)영화사( 홍찬 사장 경영)에 공채로 합격하여 영화계에 화려하게 입문했으나 얼마 못있다가 영장이 나와 군에 가야만 했다. 군제대 후 영화계에 돌아 와 보니 수도영화사는 최초의 칼라 영화 ' 생명 '( 이강천 감독) 영화 하나만 만들고 어쩐지 비실거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반실업자가 되어 방황하게 되었다. 어떻게 알음알음으로 이병일 감독님 사무실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이 김지헌 시나리오 작가, 이성구 감독, 촬영기사 홍동혁 그리고 이상언이었다. 이상언은 당시 홍동혁 촬영기사의 촬영부 제2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병일 감독님의 작품을 촬영중이어서 그런지 활발한 모습으로 요즘 말로하면 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난 연출부 지망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 이상언과 부딛칠 기회는 없었다. 충무로 바닥이 워낙 좁은 곳이라 길거리에서 이상언과는 눈인사 정도는 하였으나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따로 놀았다. 그러다가 내가 이성구 감독 밑에 조감독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 연출부에 상언이 들어 왔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상언 은 일찌기 대구에서 연극을 하였다니까 아마 배우 쪽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나 보았다. 몇편의 영화 출연도 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그가 촬영부에서 카메라를 익히다가 다시 연출부로 뛴걸 보면 상당한 계산을 두고 차곡차곡 계단을 밟지 않았나싶었다. 일테면 상언이는 말을 똑똑하게 잘했고 좀 설친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적극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치가 못했다. 촬영 현장에서 이성구감독은 이상언 을 주로 상대하면서 작업을 진행시켰다. 나는 현장에서는 상언이에게 밀리는 신세였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언이가 나를 경계한다고 할까. 어쨋던 그럭저럭 상언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상언이는 술을 못해서 술을 좀 하는 나와는 어울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상언이 나한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그의 집이 중구청 뒤쪽 적산집 이층이었는데 모친님과 동생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무튼 상언이는 자주 그의 집에 나를 끌고 갔다. 그 이유는 그가 구상한 시나리오를 나한테 씌우려고 한 것 같다. 그 시나리오 쓰는 일 때문에 나는 그의 집에서 먹구자고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자연히 상언의 생활 반경이 나한테 노출되었다. 그때 상언의 교제하는 애인이 그 유명한 부인 김숙자 여사였다.(상언은 김숙자 여사를 잘도 물었지) 김숙자 여사는 영화계에서 다 알다싶이 이름 난 헤어드레서로서 김지미 여사와 동거동락 하는 사이였다. 그 때문에 나는 상언이와 김숙자씨 연애하는 사이에 끼어서 맛있는걸 얻어 먹곤했다. 이감독은 1965년도에 합동영화사에서 ' 후회하지 않겠다 ' 란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무난한 데뷔였다. 그는 총 33편의 작품을 감독했는데 이 정도면 영화 감독으로서는 상당한 작품을 감독한 셈이다. 특히 ' 형 ' 이란 작품은 두 번씩이나 리바리벌 활 정도로 힛트를 했다. 형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갖은 고생하여 공부시킨 아우가 나중에 번듯하게 출세를 했음에도 그 신세진 형을 되게 괄세한다는 내용이다. 일테면 (孝)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많은 관객을 울렸다. 그리고 ' 2박 3일 ' 영화. 이 작품은 연방영화사(사장 주동진 )에서 제작했는데 애당초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하기로 됐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으나 난 겹치기 연출로 스케쥴이 맞지 않자 이상언 감독이 레디고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배우는 하명중 윤연경 김희갑 등 호화 캐스팅은 결코 아니었다. 일종의 쿼타용 맞춤 영화였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선전도 별로 하지를 않았고 충무로에서는 아무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 '2박 3일'' 영화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김위원장과 기자들 사이에 한국영화가 화제에 올랐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갑자기 김위원장이 '2박 3일'' 영화를 아느냐고 기자들에게 물었다.(홍콩을 통해 프린트가 북으로 넘어 간 모양) 그러나 기자들 중에 아무도 그 영화를 본 사람이 없어 잠잠하자, 김위원장이 '2박 3일' 의 영화 내용을 침을 퉁기며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그 얘기가 또 국내 일간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연출을 담당했던 이상언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 되어, 그 대신 '2박 3일' 시나리오 쓴 나를 기자들이 찾아와 묻기에 인터뷰에 응하고 한 기억이 새롭다. 상언은 참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얘기도 그의 입을 일단 거치면 개똥 철학이든 아니든간에 뭔가 그럴듯한 인생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때문에 상언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은 그냥 듣기만 하면 밑천을 건지고도 남는다. 이상언 이 사망하기 전까지 영화사 사장직을 맡아서 일 한때가 있었다. 김숙자 여사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추억한다. 남편이 영화 감독이 되고 난 후로 제때 또박 또박 월급 봉투를 안겨 준게 생전 처음이라는 것이다. 상언이 친구들 밥 먹이고 술 사는데 쓰는걸 다 알면서도 김여사는 그런 남편이 뿌듯했다고 얘기한다. 나는 이상언의 단골 쯤 되어 그의 술 파티(상언은 그냥 폼으로 술 마시는 형)에 빠지지 않게 끼이게 된걸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저녁 때 쯤이면 상언이한테서 전화가 온다. 나는 나 혼자만 불러서 갔는가 혀여 자리를 잡고 앉으면 잠시 후 줄줄이 사탕으로 배고픈(?) 손님들이 하나 둘씩 꾸역꾸역 기어들어 온다. 별로 중요한 일 때문에 만나는게 아니고 그냥 친구들 밥먹여서 보내고 잡담하며 지내는걸 즐기는 상언이인지라 아무 부담이 없다. 거기에는 반듯이 김숙자 여사가 그림자처럼 동석하게 마련이다. 상언이 친구들을 좌우에 좍 거느리고 그 유명한 담론을 쏟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한눈을 팔래야 팔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상언은 얘기의 달인이다. 그의 화제가 값이 있는 건 흔이 술자리에서 있게 마련인 남에 대한 험담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인격이 돋보이고 듣는 사람들은 편안해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게 있는데 그의 일본말 구사 능력이다. 별로 학구적으로 배운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일본말 구사는 기름을 친 듯 거침이 없다. 어디서 언제 배웠는지 간단한 생활 일본어임이 분명한데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 더러 일본인이 합석하여 상언의 일본어 구사를 듣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요절 복통을 하는걸 옆에서 지켜 보면사 감탄 한 일이 한두번 아니다. 원어민을 앞에 앉혀놓고 일어로 웃긴다는건 보통 수준이 넘는다. 난 일본어 원서를 읽지만 회화는 아작도 더듬거리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상언이 일본갔다가 무슨 집회 같은데서 백여명 넘는 일본인들 앞에서 연설한 하는데 그 자리에서도 되게 일본인들을 웃겼다니 참 대단한 친구다. 상언의 기지(機智)라면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잘 했대서 웃는게 아니라 일부러 어수룩하게, 또는 유치하게 단어를 골라서 함으로서 일본어로 웃기는 그런 재주는 보통이 아니다. 상언이는 한번 일본인을 사귀면 상언이를 계속 쫒아 다니게끔 만드는 모양이다. 특별한 공무가 아니고도 일부러 일본에서 건너 와서 상언이를 만나고 가는 그런 일본친구들을 나도 몇 명인가 인사를 받았다. 그는 무슨 영화인 단체회의 모임에, 주최측은 이미 짜고 진행되는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꼭 나서서 독불 장군식으로 한마디 하고나서야 넘어간다. 이상언 은 그런데 단골멤버이다. 이상언이 그냥 말없이 넘어가면 심심 할 지경이다. 그러나 맹탕 헛소리 하는 경우는 드믈다. 외톨이 동끼호테 기질인지 모르겠다. 그에게서 딱 한가지 배울게 있다. 이상언 이 같은 말도 기왕이면 듣게좋게 돌려서, 양념을 처서 하는 솜씨는 일단 평가 해줘야 마땅하다. 그런 그가, 참 잘 나가기 시작하던 그가 뜻밖에도 1993년 6월 14일, 그러니까 지금부터 딱 10년전에 우리 곁을 부랴 부랴 떠났다. 당시 이상언 이 사장으로 있던 SKC 영화사 작품 '남자위의 여자'를 고용남 감독한테 맡겨 한강변에서 촬영 진행중이었다. 특별히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었다. 원래 찰영부에서 솜씨를 닦았고 나중에 연출까지 익힌 이상언 감독이 고영남을 대신하여 헬리콥터에 오른건 숙명이 아니었나싶다. 헬리콥터에서 부감으로 낮게 날게끔 이상언이 독려한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단지 헬리콥터 조종사가 미숙했을 뿐이다. 이상언은 일찌기 촬영부에 있을때 익힌 카메라에 자신만 있지 않았드라도, 또는 감독 출신만 아니었드리도 그런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헬리콥터 부감에서 고도를 점차 낮추면서 가장 멋진 캇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카메라가 돌아가는 신바람나는 그 순간만큼은 이상언에게 있어 어떤 행복감에 도취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는 현장에서 일하다가 고귀하게 순직하고 그 이름을 남겼다. 이상언 의 장례직장에는 영화계에 유례없는 조객이 모여들어 고인을 추도했다. 일본에서도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다. 고인에게는 안됐지만 영화감독이 촬영을 하다가 현장에서 타계한건 더 없는 명예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조문진 (영화감독) / 2003년 <프로필> 1937년 2월 1일 경북 김천 출생 1965년 < 후회하지 않겠다 > 데뷔 1993년 6월 14일 타계 <작품 연보> 1965 후회하지 않겠다 / 잃어버린 세월 / 현금은 내것이다 1966 집없는 천사 / 소금장수 1967 동심초 1968 갈망 1969 형 1970 당신을 알고 나서 / 범띠 가시내 / 잊을 수가 있을까 / 저 하늘에도 슬픔이(속) / 누가 그 여인을 모르시나요 / 타인의 집 1971 흐느끼는 두 여인 / 검은 장갑을 껴라 / 오빠 1972 불장난 / 항구의 등불 1973 똘똘이 해상특공대 / 흑조 1974 시집갈래요 / 2박3일 1975 조약돌 1976 별하나 나하나 1978 오빠하고 누나하고 1979 터질 듯한 이 가슴을 1981 0번 아가씨 1982 화순이 1984 형 1985 오싱 / 여자정신대 1987 뜨겁고 깊은 겨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