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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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K: Mongolian Chop Squad> 중 (사진: " BECK: MONGOLIAN CHOP SQUAD ", MUBI)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H2』, 『러프』 등을 그린 청춘 스포츠 만화의 거장, 아다치 미츠루의 『미유키』엔 위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한 소녀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편집자적 논평으로 일체화해 드러낸 귀여운 사례다. 이 발화는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다치 미츠루가 소녀를 그린 만화의 컷은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커다랗다. 다만, 이 진담 섞인 농담처럼 만화의 컷은 진정 마음의 크기로 고스란히 치환될 수 있을까. 만화는 지면의 물리적인 크기 조정을 통해 독자적 의미 작용을 생성하는 매체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만화(일본식 만화인 ‘漫画’에 한정)의 컷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원리를 따르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사이의 차이, 그리고 ‘실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감각이 무엇을 낳았고 낳을 수 없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장난스러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치자면 우선 말의 역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화 속 감정의 크기가 컷의 크기에 따라서만 조율되진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 숏을 떠올리게 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공백 컷이 대표적인 만화적 감정의 형성 방식이다. 서사의 고조가 일어나야 할 플롯의 이음매에 잠자리나 하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집어넣어 감정과 정취 사이의 낙차를 일으키는 그것.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포수의 글러브 혹은 타자의 배트에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을 유예하려 들어선 무관한 이미지의 연속과 충돌들. 이처럼 아다치 미츠루는 칸의 크기뿐 아니라 청춘 스포츠 만화의 장르적 내러티브에서 탈락한 오브제의 개입과 몽타주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작가다. 아다치의 몽타주는 곧바로 영화의 용어로도 (거슬러 올라가) 통역된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에 따라 모더니즘 시대의 일본 만화가들은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의 몽타주 등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과 렌즈 기반의 카메라 문법을 흡수하여 만화의 컷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컷과 구분하기 위해 만화의 컷을 ‘칸’이라 씀)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이로부터 영화 기호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더불어 말년의 데즈카 오사무 등은 ‘필름 만화’를 통해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고찰했다. 필름 만화란 필름의 한 프레임에 담긴 움직임 하나하나를 만화의 칸 하나하나에 그대로 대입하여 그린 방식이다. 영화의 1초 24프레임 상영 이전 단계에서부터 컷과 칸의 의미를 사유하고, 이로써 필름 운동의 근원적 사진 이미지를 고찰하며,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한다. 근래의 만화가들도 이 유산을 지키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체인소 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물의 움직임을 앵글이나 칸 사이즈의 변화 없이 다수의 컷으로 나누어 그리는 필름 만화의 작법을 즐겨 쓰는 이다. 그러니 칸의 연속과 충돌이든, 몽타주이든, 기호적 이미지의 작용이든 만화와 영화의 칸-컷은 대개 분리 불가한 의미론 속에서 순환하는 편이다. 만화와 영화의 경계는 이래저래 더욱 희박해진다. 『H2』 중 (사진: “ Mitsuru Adachi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Original artist Mitsuru Adachi ‘천상의 목소리’란 <BECK>의 제약 만화와 영화의 친족관계를 하나씩 밝히다 보니 만화가 영화처럼 보이고, 영화가 만화처럼 읽힐 지경이라 어지럽다. 그럼에도 두 매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 차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선 또 다른 만화가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다. 재즈 만화 『블루 자이언트』의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가 처음 편집자에게 『블루 자이언트』의 기획을 전했을 때다. 편집자는 “자네, 종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거 알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에 작가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 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답한다. 요컨대 만화와 영화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역시 소리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사운드가 기재될 수 없는 만화, 그 대척에 있는 영상 매체의 틈이 사운드의 유무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발상이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속성이 있다면 그것 역시 투수의 150km/h 짜리 직구가 날아가는 소리, 필로 숏 속 잠자리의 울음소리에 있을 것이란 뜻이다. 만화 『BECK』 시리즈(한국어판) 표지 (사진: “ BECK 10 ”, “ BECK 30 ”, 교보문고) 이러한 논지에서 만화와 영화의 관계 일변을 가장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예시는 해롤드 사쿠이시 작가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연재한 소년 밴드 만화 『BECK』이다. 『BECK』이 걸작의 자리에 오른 큰 이유는 만화가 밴드 공연을 그린다는 본원적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라이브의 순간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만화 매체의 커다란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BECK』이 택한 전략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주인공이자 밴드 BECK의 멤버인 유키오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타를 잡은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유키오가 단숨에 밴드 신의 스타가 되는 근거로 (아마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를 모티프로 한) 그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즉 만화 『BECK』은 음악 없는 음악 만화라는 제약에 ‘목소리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중의 제약을 가한다. 마치 『헌터x헌터』에 등장하는 제약과 서약의 원리(무언가를 제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단 설정)와도 같다. 유키오의 목소리를 만화로 그리지 못할 바엔 그것을 더욱 추상적인 경지로 이끌어, 독자에게 최대한 커다란 상상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BECK』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로 인기 만화의 상업적 운명으로 인해 작품의 영화화가 이뤄진 것이다. 보통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실사화할지란 큰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 BECK >(츠츠미 유키히코, 2010)은 아주 파격적인 작법을 택한다.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실사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아예 유키오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작중에서 소거해 버린 것이다. 유키오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보컬의 마이크를 끈 듯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한다. 2010년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객과 평자들은 이 선택을 비난했다. 음악 없는 음악 만화야 매체의 본질적 제약이라 친다 해도, 음악 있는 음악 영화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렇다면 영화 <BECK>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이브 무대에 실사의 ‘소리’를 덧대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외려 영화 <BECK>이 택한 소리의 공백은 원작 만화의 설정을 이어가며, 소리의 효과를 이미지의 기호로 펼치는 영화적 역량을 보여준 사례다. 영화 <BECK>의 방식은 근원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영화 기호론과 같은 일본 만화 고유의 작법을 세심히 이식한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유키오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화면은 일련의 몽타주를 늘어놓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슬로 모션으로 만화적 놀람의 표정을 기호로 발산하는 관객의 표정 등이 교차한다. ‘천상의 목소리에 놀란다’라는 사실을 가시적 문법이 아닌 기호의 원리에 빌려 구현하고, 소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가 강속구의 시간을 잠자리 등의 자연물과 인물들의 표정에 가뒀다면,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구름 등의 자연물과 청중들의 표정에 구속했다. 시간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만화의 영화적 작법이 한 바퀴 돌아 영화에 쓰인 것과도 같다. 돌고 돌아 만화와 영화는 또 비슷해지는 것일까. <BECK> 중 여기-있을 것의 애니메이션 여기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여 사고를 확장한 『BECK』의 산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바야시 오사무 감독이 2004년에 만든 『BECK』의 애니메이션 <BECK: Mongolian Chop Squad>다. <BECK: Mongolian Chop Squad>는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란 문제를 정공법으로 받아 쳤다. “HUSKING BEE”라는 실존 밴드의 보컬리스트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를 유키오의 가창 성우로 기용한 것이다. 유키오의 보컬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TVA 12화의 <Moon on the water> 라이브부터 BECK이 일본 최고의 화제 밴드로 일약 올라서는 그레이트풀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서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아닌 실제의 소리(가창)로 드러낸다.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가 ‘정말 천상의 목소리냐?’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여기서 재론하려는 바는 결국 매체 간의 차이다. 만화와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도 작동할 수 있었지만, 왜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목소리를 택해야 했던 것일까. 단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영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두지 않는 일에서부터 발견될 것이다. 앞서 반복했듯이 만화와 영화의 유사성을 짚고, 그 바깥에서 애니메이션만이 독자적으로 지니는 돌출성을 찾음이 마땅하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는 공백의 범주에 있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이고 마술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 영화와 만화 <BECK>이 유키오의 목소리를 현실화하지 않고 소리의 불능이란 제약에 묶어뒀던 것을 이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만화의 원류가 영화적 뿌리에 깃들어 있다면 만화는 시간의 일상적 흐름을 거부하는 사진의 역량, 이와 동시에 칸과 컷의 공백(혹은 몽타주)을 활용해 감정의 찰나를 유예하는 영화의 힘을 함께 작동시킨다. 영화 <BECK>은 그러한 만화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거꾸로 옮겨와 실현한 경우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지대에 존재하는 매체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1995)과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츠루마키 카즈야, 1997)의 현대성에 대한 글에서 애니메이션을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라고 설명한 적 있다. [1] 영화적 이미지는 현실-스크린-관객 사이에서 도래하는 결과물이고, 만화는 그러한 영화적 망상에서 기반한 칸의 펼침이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망상은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도’의 집합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곤 사토시의 말처럼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은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창작자(들)의 순수한 망상이다. 현실에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유키오의 ‘천상의 목소리’란 현실에 기반한 영화와 만화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이데아적 사건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이 무한의 상상을 ‘의도적으로’ 실현해야만 자신의 미학을 지킬 수 있는 매체다. 요컨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분화한 <BECK>의 선택, 구체적으로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표현한 방식들은 각각의 매체성을 즐거이 논할 수 있는 사례다. 밴드물의 정전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합일될 정도로 각 매체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문제작이자 걸작이다. 아, 그러면 이쯤에서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라는 아다치 미츠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되새길 수 있겠다. 아마 의도의 측면에선 참이나 결과적으론 거짓일 듯하다. 영화적 논리에 기댄 칸의 크기는 결국 이미지와 시간의 공백으로서 독자(관객)의 능동성에 복무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의 만화는 결국 태초의 영화적 속성과 떼놓을 수 없이 다수의 실사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만의 ‘의도적 세계’는 만화-영화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이란 추상을 자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BECK: Mongolian Chop Squad> 유키오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고, 이 속의 유키오는 <Moon on the water>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BECK> (사진: “ BECK 22 ”, 교보문고 / “ Beck: Mongolian Chop Squad ”, IMDb) *** [1] “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 《씨네21》 1440호, 2024. 1. 18. 이우빈(영화기자) l 《 씨네21 》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본 1997년생.
‘IT 기술’의 플랫폼과 ‘교양’의 문제 최근(2017년 12월) 필자의 관심사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기술(IT)적인 ‘플랫폼’(≒미디어, 매체)이 세계화(글로벌화)되어 발생되는 고전적인 ‘교양’의 ‘해체’라고 불러야 할 상황에 대해 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요즘 몇 번 출판계에 기고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침 이 플랫폼(전자서적이나 웹툰, 웹 소설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2017년 12월 5일 453호 및 곧 출간 예정인 단행본 『한국의 논점 2018』 등.) 인터넷을 통한 각종 ‘플랫폼’은 주로 ‘IT 계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마련이고 (주요 플랫폼 기업이라고 한다면 아마존, 애플, 구글, 우버, 에어비앤비, 텐센트, 국내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를 들 수 있을 텐데 보다시피 대부분 IT 기업으로 출발했다), 그에 따라 종래의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했던 대중(mass)의 ‘매체(media)’의 대표 격인 ‘출판’이 가지고 있던 인문학적 속성과는 조금, 문화랄까 습성이랄까 배경에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다.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할 때 주로 ‘구(舊) 교양’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말 그대로 출판 시절의 매체는 ‘과거의 교양’을 바탕에 둔 것이었으나 현대 인터넷 기반의 IT 플랫폼은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이다.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한테 아베 정권이 당당하게 내보였던 일본문화가 트럼프 손녀딸이 좋아한다는 피코타로였고, 하지만 정작 그 손녀딸은 삼자경과 당시(唐詩)를 암송하는 동영상을 시진핑한테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작년에 카와카미 노부오가 현대 일본의 교양은 이미 『소년 점프』가 되었다는 구태의연한 지적을 했던 것을 다시금 통감했다. 카와카미는(중략) ‘지적(知的)인 웃음’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인용되는 것이 더 이상 고전이 아니라 『소년 점프』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러한 서브컬처는 트럼프에게조차도 교양으로 치부되지 못한다. 트럼프조차도, 교양이란 곧 고전이란 사실을, 어리석긴 해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소년 점프』나 피코타로가 ‘오타쿠 문화’라고 할 수 있는지 ‘서브컬처’라고 해야 할지, 그런 세세한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까지도 포함해서 그것들을 한 묶음으로 하는, 지극히 경솔한 무엇인가를 체현시킨 것이 현 시점의 이 나라에선 문화이자 교양이라고 하는 사실이, 아베 정권에 접어든 이후 계속해서 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이제 슬슬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아소 타로의 교양이 ‘만화’였다는 것을 이젠 더 이상 아무도 화제로 삼지 않게 되었고, 이시바 시게루, 마에하라 세이지 등과 같은 차세대 국방족 의원들의 ‘교양’은 프라모델 만들기나 철도 오타쿠라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 안전 보장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라고 아무도 느끼지 않고 있다. 선거전 종반에 여당 당수가 연설 대상으로 했던 유권자는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었지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 아니었다. 논단에서도 젊은 학자나 논객의 ‘취미’가 아이돌에 관한 논의가 되어 있는 정도로는 ‘서브컬처’든지 ‘오타쿠 문화’이든지의 ‘교양화’는 확실하게 진전되었다. ‘오타쿠 문화’ 그 자체는 이제 와선 무한하게 세분화되었지만, ‘쇼와의 끝 무렵’ 시절에는 대략적으로 히라가나 표기의 ‘오타쿠(おたく)’란 단어 주변에 있던 것들(미야자키 쓰토무의 방에 있던 만화는 ‘모에’ 만화가 아니라 극화지와 『젊은 아내의 속옷』이었고, 수천 편의 비디오 컬렉션은 롤리타 포르노가 아니라 CF와 아이돌, 프로레슬링과 애니메이션에 야구 방송 녹화 등, 헤이세이 시대 이후로는 세분화되어버린 ‘오타쿠의 각 소비 영역’을 얕고 넓게 대강 대충 커버하고 있던, 도저히 ‘컬렉션’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이 나라의 중심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교양만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나 미디어에서도 분명히 그 일각을 점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아베의 교양과 어디에도 없는 장소의 ‘오타쿠 문화’」, 『최전선』 편집부 블로그, 2017년 12월 7일) 참고로 약간의 해설. 이 글에서 나온 피코타로는 ‘PPAP’란 곡으로 유튜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의 가수이고, 카와카미 노부오는 일본의 동영상 플랫폼 ‘니코니코동화’를 만들었고, 지금은 대형 출판사인 카도카와쇼텐과 합병하여 만들어진 KADOKAWA(카도카와)란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카와카미는 스튜디오 지브리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지브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보좌해온 베테랑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의 ‘제자’로서 미야자키 감독 작품인 < 바람이 분다 >와 타카하타 감독 작품인 < 가구야 공주 이야기 >에 ‘프로듀서 견습생’으로 크레디트되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 대해서도 오쓰카 에이지는 매번 날카로운 지적을 해왔다. (실제로는 오쓰카 에이지는 카와카미와 친분이 있고, 니코니코동화가 주최하는 이벤트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고 있다.) 그리고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슈퍼 마리오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했던 것을 가리키는, 일본 매스컴의 유행어(?)이다. 아소 타로는 일본의 전직 총리이자 현재에는 재무대신,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아베 정권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는 자민당 간사장을 맡으며 아베파의 일각이었으나 현재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당내의 라이벌처럼 된 정치인이고, 마에하라 세이지는 야당인 민주당 당수였다가 그 뒤를 이은 민진당의 대표를 맡았다가 야당을 깨버리고 상당히 우익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일본 야권의 유력 정치인이다.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란 표현은 젊은 오타쿠층(2010년대 일본의 젊은 층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수·우익적이다), 즉 ‘프리터’(프리랜서나 아르바이트 정도를 하고 있는, 사실상 무직인 층)라든지 니트(NEET), ‘넷우익’과 친화성이 강한 층을 지칭하는 것이고,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라 함은 한국에서 말하자면 ‘여의도나 명동의 회사원들’이란 식으로, 좀 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회사원층을 뜻한다. (이 회사원들이 보수파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보수나 진보와 무관하게 그냥 말 그대로의 ‘일반인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쇼와 시대는 1989년에 끝났으므로 ‘쇼와의 끝 무렵’이라 함은 1980년대 중후반을 가리킬 것이고, 미야자키 쓰토무는 1989년에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된 인물이다. 그가 당시에 ‘오타쿠’를 대표하는 것처럼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바람에, 그 당시에 코믹마켓 등에 동인지를 내거나 애니메이션을 대량으로 시청하는 소위 ‘오타쿠’ 계층에 대한 일본 사회의 ‘왕따’와도 같은 분위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미야자키 쓰토무를 ‘오타쿠’라고 보도했던 주된 원인은 그의 방에 수천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고 만화잡지를 포함한 책들도 꽤 있었다는 이유였는데, 실제 그 비디오테이프 중에는 불법적인 포르노도 없었고(일본에선 정상적으로 발매되었던 성인용 비디오는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유아 대상의 롤리타 계열도 아니었고 전부 ‘합법적인’ 성인물이었음) 대부분은 CF나 아이돌이 출연한 TV 프로그램과 TV 드라마, 프로레슬링 및 야구 시합의 녹화 비디오였다는 사실이 21세기에 들어 새롭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중에 포함되어 있던 애니메이션도 당시 ‘오타쿠’들이 즐기던 작품이라기보다는 < 우주전함 야마토 > <게게게의 키타로> < 요술공주 샐리 > 등 상당히 ‘일반인 취향’의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드라마 역시도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역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는 오타쿠에 가까웠던’ 그가 1980년대 당시 ‘세분화된 특정 장르’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폭넓게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를 섭렵하고 있었다는 점을, 오쓰카 에이지는 현재의 ‘세분화된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오타쿠 계층에서는 미야자키 사건이 있었던 당시 일본 TV에서 대형 동인지 판매전인 코믹마켓을 배경으로 “여기에 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가 있습니다!”라고 옐로 저널리즘스럽게 보도했다는 것이 마치 정설처럼 오랫동안 이야기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보도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올해 밝혀지기도 했다. 참조:「‘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는 있었는가?」, 야후재팬 뉴스 개인(dragoner/블로거), 2017.09.29) 아무튼, 서브컬처가 ‘교양’이 되어버린 시대에 플랫폼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오쓰카 에이지를 인용해보겠다. ‘오타쿠 문화’, ‘서브컬처’는 카도카와 쓰구히코 등과 같은 인물이 말하는 소위 ‘에코 시스템’(이 사회 속에서 말하는 ‘에코’란 ‘에콜로지’(환경)라기보다 ‘이코노미’(경제) 아니겠는가?), 즉 플랫폼 기업은 사람들이 투고나 2차 창작을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만들고 있는데, 동시에 그것을 각자 본인의 의지나 자기표현이라고 만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다. (중략) 하지만 이제 와서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착취당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어봤자 마르크스주의 등장 이전의 노동자들한테 당신들은 소외당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고, 하물며 아무래도 ‘혁명’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니 더 이상 설명해줄 기분도 들지 않는다. 2차대전 이후 출생 세대인 구 ‘오타쿠’들은 ‘내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차세대인 카와카미 노부오나 히로유키로 대표되는 정보공학계 오타쿠들은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오타쿠 문화가 경제나 문화의 중추로 편입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의미와, 그 결과 초래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두는 편이 좋다는 것만큼은 경고해두고자 한다. (중략) 어쨌거나 ‘오타쿠’는 이젠 플랫폼 안에 기관의 일부로서 편입되어, 플랫폼 그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고 회의(懷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나라 ‘보수’의 기조(基調)라고 할 만한 것이라면, 요즘엔 그런 것들 안에서나 찾아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위와 동일) 다만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식의 구세대 ‘오타쿠 교양’의 붕괴에 대해 “한탄도 찬미도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 몇몇 오타쿠 평론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오타쿠 세대론’(세대 차이론)을 주장하는 듯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오쓰카의 다른 최근 책에서도 여러 번, 분명한 사례를 들면서 강조되고 있으니 실제로 진심일 것이다.) 즉 과거의 오타쿠들은 내용(contents)을 만들어내었으니 훌륭하고 요즘 IT 계열 오타쿠들은 플랫폼밖에 만들지 못했으니 뒤떨어진다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에서 오쓰카가 언급한 ‘내용’이란 단어는 영어 단어로 보자면 ‘콘텐츠(contents)’에 해당하는데, 이는 서적에서 ‘차례’를 보통 ‘contents’라고 표기하는 것처럼 바로 ‘서적의 본문 내용’을 가리킨다. 또 플랫폼이라는 것은 종이책에서라면 바로 그 ‘종이’, 제본되어 한 권 한 권 묶여진 책의 본체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콘텐츠)과 종이(플랫폼) 사이에 어떤 ‘우열’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플랫폼이 없이는 우리가 콘텐츠를 접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오쓰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는 ‘콘텐츠’를 만들어냈던 오타쿠들이 (세대는 바뀌었을지언정 결국 똑같은 ‘오타쿠’이니까) 지금은 플랫폼 안에 그 구조물의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를 불편하게 느끼거나 회의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며 안심하고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타쿠들은 인터넷 시대 이후 PC통신의 채팅실에서, MSN메신저와 네이트온과 카카오톡 같은 인터넷 메신저에서, 블로그에서, 그리고 지금은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PC통신 시절에는 모두가 글을 쓸 수 있는 ‘게시판’으로 시작했다가 ‘가입’한 회원만이 글을 볼 수 있는 ‘동호회’란 것이 만들어졌고 그 뒤에는 동호회로부터 ‘소모임’이란 것이 생기는 등 갈수록 ‘좁은 문’을 선택했다. 또한 채팅실에서는 ‘강퇴’(강제퇴장)를 시켰으며, 블로그에선 ‘서로이웃만 보기 기능’을, SNS에선 ‘페친’과 ‘블락’과 ‘뮤트’를 통해서 점점 더 ‘자기가 보기 편한 환경’을 계속해서 추구해왔다. 이것이 바로 ‘플랫폼 안에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에 오히려 편안함과 안심감을 느끼는 상태’라는 말이다. 이는 ‘어떤 장르든지, 창작이든 패러디든지, 만화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굿즈든’ 어떤 것에든지 개방된 상태에서, 또한 모두가 다 같은 ‘참가자’일 뿐 누구도 ‘주인’이거나 ‘손님’이지 않은 ‘열린 환경’을 추구해왔던 코믹마켓의 이념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당초에는 인터넷의 이념도 바로 그러한 ‘개방성’에 있었을 텐데, 실제로 그 인터넷상에서 추구되는 것은 ‘끼리끼리 모일 때의 편안함’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당초에는 발언의 자유를 위해서 시작되었던 인터넷의 익명성조차도, 실제로는 수많은 ‘딥 웹’ 방식의 ‘초보자나 타인의 참여를 기피하는 익명성 커뮤니티’를 보게 되면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한다. 실제로 한국의 익명성 커뮤니티에서는 소위 ‘닥눈삼’, 즉 ‘닥치고 눈팅 삼 년’이라 하여 해당 장소의 분위기 파악을 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장기간 동안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라는 분위기가 유행했고, 일본에서도 익명 기반의 게시판 2ch(2채널)에서는 ‘ROM’(리드 온리 메모리의 약칭)이라 하여 한국과 똑같이 우선은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고 있으라는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을 보면, 그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 인터넷에서 말하는 소위 ‘공기를 읽어라’(분위기 파악을 하라)는 말은 곧 ‘플랫폼에 적응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플랫폼 안에서 ‘유저’들이 ‘손님’으로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서 만들어진 분위기인 것이다. 미국에서 ‘망 중립성’을 폐지한다고 하던 뉴스 역시도, 바로 이런 ‘인터넷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제한’의 상징적인 조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면, 사회의 방향성이 ‘콘텐츠’에서 ‘플랫폼’으로 변경된 것에서 그다음 단계로, ‘플랫폼’으로부터 더더욱 기술적인 ‘네트워크’로 가버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이다.) 플랫폼과 유저 마인드의 문제 오타쿠층의 ‘현재’가 과거의 ‘교양’ 시대, 즉 콘텐츠를 창출해내고자 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시대로 움직인 것 아닌가 하는 오쓰카의 이 지적은 흥미롭다. 실제로 과거의 오타쿠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시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일본에서의 ‘1세대 오타쿠’와 한국에서의 ‘1세대 오타쿠’의 시기가 달랐던 것처럼) 초기에는 미야자키 쓰토무와 같이 ‘얕고 넓게’ 다방면의 ‘오타쿠 장르’를 섭렵하던 모습이었는데, 점점 갈수록 자기 자신만의 취향에 기울어져 세분화되어 왔다. 이 ‘세분화’를 나는 ‘파편화’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과거엔 오타쿠라면 TV에서 일본애니메이션도 보고 극장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보고 LD나 비디오로 일본의 OVA도 보았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관심을 가졌고 주브나일과 판타지 소설에서 유래한 ‘라이트노벨’이란 것이 인기를 끌게 되면 소설도 읽었다. 또 남자라도 TV에서 『들장미소녀 캔디』를 보았고 동호회에서 화제가 되는 작품이라면 (여성 취향의) CLAMP 만화나 『나의 지구를 지켜줘』나 『그 남자! 그 여자!』(카레카노)도 읽었다. 여자들도 『슬램 덩크』를 열심히 읽었으며(여성향 동인지 신(scene)에서 항상 최대의 장르였던 것은 『슬램 덩크』나 『테니프리』 『강철연』 『쿠로바스』 등과 같은 소년만화였다), 차세대 게임기가 나오거나 온라인게임의 유행에도 적극적이었다. 남자가 구체관절인형을 사고 여자가 건프라를 사는 모습이 드물지 않았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완구 판매의 어떤 한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은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콘텐츠에서 플랫폼 쪽으로 ‘메인스트림’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더 이상 ‘얕고 넓은’ 것은 오타쿠층의 ‘기본 소양’이 아니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을 지적했던 것이 ‘얕고 넓은’ 오타쿠 세대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오타킹’ 오카다 토시오(가이낙스 전 대표)가 2006년부터 말해왔던 ‘오타쿠의 죽음(「오타쿠 이즈 데드」)’의 내용인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2008년에 『오타쿠는 이미 죽었다』란 제목으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다만 오카다 토시오는 이에 관해 블로그에서 ‘첫 번째 저작 『우리들의 세뇌사회』 때부터 일관적으로 내 입장은 〈닥쳐오는 시대를 거부하지 않는다〉였다. 나는 지난번 이벤트 때에 한 마디도 “요즘 오타쿠는 안 되겠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옛날 같은 오타쿠가 줄어든 것은 당치도 않다”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이해의 한계〉인 것이지, 그에 대해서 반발하든 찬동하든 나로선 곤란할 뿐이다’고 답변한 바 있다. [오카다 토시오 블로그 2006.05.27]) 따라서 오쓰카 에이지든 오카다 토시오든, ‘그 좋았던 옛날(벨 에포크 Belle Époque)’에 대한 향수로서 구세대의 오타쿠를 긍정하고 현세대의 오타쿠를 비판하기 위해 이런 말(옛날 오타쿠들은 넓은 분야를 즐겼는데 요즘은 파편화되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오타쿠의 세대론과 무관하게,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필요가 없는)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 플랫폼의 ‘유저(손님)’로서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게 되었다는 점을 오쓰카는 지적했던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오랫동안 한국 오타쿠층의, 나아가서는 한국 대중의 ‘손님 마인드’에 관해 지적했던 것과도 연결되는 문제의식이다. 내가 손님 마인드라고 부르는 것은, 말하자면 본인을 항상 ‘손님’의 위치에 두고 타인이 자신한테 ‘서비스’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뜻한다. 소위 ‘감정 노동’의 문제도 결국은 이 손님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실제의 업체-고객의 관계에서도 ‘손님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손님 마인드를 모든 방면에 적용시키면서, 스스로를 약자, 피해자 입장에 놓고 타인을 공격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직접적으로 지불하는 금액은 없고 기껏해야 ‘트래픽을 통한 광고’를 보아줄 뿐이면서도 스스로를 ‘손님으로 대접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고서 연예인이나 웹툰 작가 등한테 심한 악플을 달거나 고자세를 취하는 것이 심각한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물론 돈을 냈더라도 ‘감정 노동’을 하게 되는 종업원 등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안 좋은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문제일 테니, 단순히 돈을 내고 안 내고에 달린 문제라고만은 할 수가 없겠지만 그나마 돈을 직접 지불하지도 않은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과거의 오타쿠들은 ‘모두가 똑같은 참가자일 뿐,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업주-고객 관계는 없다’라는 코믹마켓의 정신을 필두로 하여,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 작품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만들겠다’라는 식의, 말하자면 일종의 ‘참여 의식’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를 손님으로 대해달라, 나를 ‘유저(user)’로 대해달라고 하는 마인드가 지금보다는 적었다는 ‘설명’을, 오쓰카를 필두로 한 몇몇 1세대 오타쿠 출신 평론가·연구자들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저가 유저 입장에서 ‘유저 마인드’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과거와 달리 오타쿠라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분석 자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전 세계가 글로벌화되고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 국내에서도 오타쿠층, 혹은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의 세대 분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에서는 되도록 < 너의 이름은. >의 스포일을 하지 않고자 신경 썼으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주의하기 바란다. 첫 단락 “‘세카이계’라는 용어”에는 <너의 이름은.> 관련 내용이 전혀 없고, 그다음 단락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 너의 이름은. > 한국판 메인 포스터 / <너의 이름은.> 한국판 티저 포스터 ■ ‘세카이계’라는 용어 일본에는 ‘세카이계(セカイ系)’라는 용어가 있다. ‘세카이(セカイ)’는 ‘세계(世界)’를 뜻하는 단어를 일본어의 가타카나로 표기한 것이다. 일본에서 2000년대(00년대, 소위 ‘제로년대’라고 불린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오타쿠 문화에 관한 빈번한 논의의 와중에 자주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한국에도 번역판이 출간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포스트 에바의 오타쿠 역사」(마에지마 사토시 저/2010년 첫 출간, 2014년 문고판 출간, 2016년 한국 번역판 출간/주재명·김현아 번역)에서는, 이 용어의 정의가 불명확하지만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를 띤 작품을 느슨하게 가리킨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세계의 운명과 직결한다. - 소녀만 싸우고 소년은 전장에서 배제된다. - 사회에 대한 묘사가 없다.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그리고 그 대표작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 별의 목소리 >, 타카하시 신의 만화 < 최종병기 그녀 >, 아키야마 미즈히토의 라이트노벨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을 들었다. < 별의 목소리 > < 최종병기 그녀 >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하지만 매우 곤란하게도 이 ‘세카이계 대표작’ 세 작품은 세카이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 별의 목소리 >에서는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세계의 운명과 직결되지 않고, < 최종병기 그녀 >에서는 주인공 소년도 전쟁에 휘말리며,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생활을 에워싸고 있는 군대라는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묘사가 상세히 나온다. 애초에 이 세 작품은 ‘세카이계’라는 말로 한데 묶어버리기에는 각기 너무나 다른 특징이 있다.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그래서 세카이계는, 일종의 유행어일 뿐 실체가 없는 용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1995년 TV 방영 이후 1990년대 일본 오타쿠 문화를 규정짓는 작품이 되어버린 애니메이션 < 신세기 에반게리온 > ‘이후’(포스트; post)에 등장한, 어떤 하나의 흐름에 속한다고 일컬어져 온 작품들을 폭넓게 지칭하는 단어로 편리하게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략적인 경향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는데, 그것은 앞선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한 세 가지 요소이기도 하고, 혹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가 주도하여 기획한 비평 무크지 「미소녀게임의 임계점」에 정의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기도 하다. 주인공(나)과 히로인(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관계성(너와 나)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항을 사이에 두지 않고 ‘세계의 위기’, ‘이 세상의 마지막’ 등과 같은 추상적인 거대한 문제와 직결하는 작품군.― 「미소녀게임의 임계점」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말하자면 배후에 어떤 명확한 (혹은 ‘명확해 보이는’) 세계관이나 설정이 처음부터 존재하거나, 적어도 제작 도중에 도입되었던 작품들, 즉 <기동전사 건담> 같은 애니메이션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 고전적인 작품들과는 달리 세카이계 작품은 ‘자의식’을 그려내는 부분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중간 24화까지는 ‘마치 어떤 숨겨진 설정이 있는 것처럼’ 고전적으로 스토리를 그려내는 듯 보였으나, TV판 마지막에 느닷없이 수수께끼를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등장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것만으로 완결된 것과도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에지마 사토시는 이렇게 비유했는데 정말 수긍이 가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므로 인용해보겠다. 추리소설로 비유하면, 탐정이 갑자기 수수께끼 풀기를 내팽개치고 피해자의 멘탈 케어를 시작하더니 “밀실 트릭은 풀 수 없지만, 피해자가 건강해졌으니 됐죠?” 이렇게 말한 것과 같은 꼴이니, 폭풍같은 비난이 일어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에서 인용) 말하자면 스토리 그 자체나 작품에 담긴 ‘설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주로 10대 소년)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에는 ‘세카이계의 시조’로서 <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이 아니라 PC용 어덜트 게임인 ‘시즈쿠’, 라이트노벨인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시리즈도 손꼽고 있다. 물론 < 별의 목소리 > < 최종병기 그녀 >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도 10대 소년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오직 인물의 내면이나 자의식을 그려내기 위한 내용인 것만도 아니고, 또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이런 ‘세카이계’ 작품들이 전부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제각기 전부 다른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로 묶어버리기가 곤란한 측면이 있다. 바로 그래서 ‘세카이계란 용어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지 않은가’, ‘세카이계란 말에서 당초 의도하던 바와는 달리 변질되어 버렸다’는 식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예를 들어 ‘오타쿠’라든지 ‘사이버펑크’ 같은 용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한 용어는 그 역사가 짧으면 짧을수록 ‘아직 논의되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그 정의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세카이계’는 그중에서도 지극히 짧은 역사(기껏해야 만들어진지 15년,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따지면 겨우 10년 정도) 밖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논의 중인 단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비평적으로 이 단어 및 이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고 있는 서적도 일본에 겨우 몇 권 정도 나와 있을 뿐이니 당연한 상황이기도 하다. 90년대의 아이콘 < 신세기 에반게리온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확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어쨌거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설명할 때에, ‘70년대 야마토, 80년대 건담, 90년대 에반게리온’이라고 각 시대별 대표작을 나열한 다음에 보통 이야기되는 것이 ‘그런데 2000년대 이후로는 대표작이 없다’인데, 거기에서 ‘2000년대는 어떤 하나의 대표작이 아니라 세카이계가 대표적 장르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세카이계가 유행했던 제로(00)년대 이후의 시대, 즉 2010년대에는 어떤 경향성이 존재하는가에 관해 마에지마 사토시는, 2010년대에는 심지어 장르조차도 아니고 니코니코동화(일본의 동영상 투고 사이트)에서 유래한 캐릭터 ‘하츠네 미쿠’를 비롯한 소위 ‘2차 창작’이나, 혹은 온라인게임이라든지 라인 메신저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가 유행한 것 아니겠는가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을 ‘70년대 야마토, 80년대 건담, 90년대 에반게리온’이라고 예시하고, 2000년대에는 “특정 작품을 대표작으로 손꼽기보다는 ‘라이트노벨 원작’이라거나 ‘세카이계’라는 식으로 ‘장르’ 자체가 대표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나마도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작품은 물론이고 어떤 장르 자체가 붐이라기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행위, 혹은 양식 자체가 붐이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지적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 엉뚱한 주장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펴보자면, 미술에 있어서의 ‘아르누보’라든지 영화에 있어서 ‘누벨바그’도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경향성을 통틀어서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지금 진행 중인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전’을 공동 주최한 체코 알폰스 무하 재단의 사토 토모코 큐레이터도 그런 말을 한 바 있다. 말하자면 ‘아르누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주의 주장이나 이론적 바탕을 가진 ‘예술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그 당대에 유행처럼 번졌던 하나의 스타일, 몇몇 작가들의 작풍을 가리키는 용어일 뿐이지 지금도 어떤 확정된 정의가 학계에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고 언급했다. 그것은 ‘아르누보’의 의미가 인상파라든지 사실주의 같은 용어와는 달리 그냥 ‘새로운 예술’이라는 의미라는 점, ‘누벨바그’ 역시도 영어로는 ‘New Wave’, 즉 그 당시 영화계에 있어서 새로운 물결을 형성했던 영화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다. 마치 ‘오타쿠’나 ‘세카이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일본 서브컬처계에서의 상황과도 유사한데, 물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아르누보든 누벨바그든 오타쿠든 세카이계든, 이 용어가 탄생한 지 기껏해야 수십 년,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다른 ‘클래식’한 학문적 용어만큼 학계에서의 논의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런 용어들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만들어졌던 당초에는 주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라든지 “이러이러한 비평가들이 그 단어에 관해서 이러이러하게 말했다”, 혹은 “맨 처음 그 단어를 만들어내었던/유행시켰던 사람은 실은 이런 의미로 사용하였다”식의 논의만이 가능할 뿐이지, 학문적인 어떤 정립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또 세상 모든 언어에 있어서 공통적인, 매우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어떤 단어에 대해 항상 그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의도한 바대로 단어가 유포되는 것은 아니므로, ‘맨 처음 만들었던 사람의 의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의의는 있을지언정 거기에서 그 단어를 모두가 ‘바로 그 의미’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비교적 근래에 유행한 용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단계일 뿐이고 어떤 확정적, 이론적인 공통 의견이 구축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카이계란 단어 자체도,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2002년 말에 인터넷의 어떤 이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던 용어이고, 필자가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를 만났던 2003년 초까지만 해도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일본의 비평계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4년에 접어든 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2016년 지금 돌이켜볼 때 겨우 10년 조금 더 지난 용어라는 말이다. 2016년 10월에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을 때 “세카이계 유행은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 인제 와서 출간되다니 너무 늦었다”는 식의 말도 나왔는데, 애시당초 이 용어 자체가 ‘겨우 10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그에 대한 비평서의 외국어판 출간이 이제 되었다는 것을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물론 ‘당대 비평’이라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본래 비평은 그런 ‘유행’이 지나간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행’으로서의 ‘세카이계’는 이미 흘러가 버렸다고 해야겠으나, 세카이계가 2000년대 일본의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 ‘서브컬처계’에 있어서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이후의 작품들(즉 현재 시점의 작품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90년대 이전 작품들로부터 어떤 유전자를 이어받았는지 등 ‘세카이계 비평’은 2010년대에 시작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2016년인 현재 시점에도 일본에 있어 ‘외국’인 한국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일본 국내에서도 의미를 갖는 연구 주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카이계란 무엇인가」란 책이 일본에서 2010년에 첫 출간된 이후, 2014년에 문고판으로 다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2010년대에는 무의미한 연구 테마’였다면 2010년도의 첫 출간은 몰라도 2014년도의 문고판은 출간되지 않았을 테니까.) 즉 ‘세카이계’는 ‘1990년대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문화로서, 2000년대 일본 서브컬처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유행’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문화 스타일이고, 지금 시점에서 2010년대를 ‘총괄’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비평 분야에서는 「세카이계란 무엇인가」가 그 하나의 시도인 것이고(일본에서도 ‘세카이계’에 관한 연구나 비평에 있어서 주된 참고자료가 바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이다. 아즈마 히로키를 제외하면 세카이계를 비평한 평론가가 일본에도 그다지 많지 않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서로서 이 책만큼 넓고 깊게 소개한 평론이 드물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으로서는 바로 이 < 너의 이름은. >에 대해서 ‘세카이계의 총괄’이라는 감상이 일본에서는 개봉 초기부터 이어졌다. < 별의 목소리 > ■ < 너의 이름은. >과 세카이계 < 너의 이름은. >은 분명히 ‘세카이계의 총괄’, ‘세카이계의 종점’, ‘세카이계로부터의 졸업’이란 평가를 받을 만한 내용이다. 작품이 국내에 막 개봉된 시점이니 자세한 내용 설명은 하지 않겠으나, 직접 관람을 하고 나면 이 작품의 줄거리에서 전형적인 ‘세카이계’와의 관련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야말로 초기부터 ‘세카이계의 기수’라는 식으로 설명되곤 했다. ‘세카이계’라는 단어 자체를 설명할 때에, 항상 따라붙는 것이 < 별의 목소리 >의 첫 구절이다. “세계(세카이), 란 말이 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세계란 것은 휴대전화의 전파가 닿는 곳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내 휴대전화는 아무한테도 닿지 않는다.” (< 별의 목소리 > 대사에서 인용·번역) 세카이계를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로 바로 직결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 별의 목소리 >는 (앞서 언급했듯이 약간의 차이점은 존재할지언정) 분명히 ‘세카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 너의 이름은. >의 경우, 종전과 같은 세카이계 작품인가 하는 질문에 관해서 대부분의 관객은 확답을 주저하는 것처럼 보인다. 굳이 말하자면 ‘세카이계를 바탕에 두고 있지만 새롭게 다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일본의 영화사 연구자 와타나베 다이스케(「이미지의 진행형: 소셜 시대의 영화와 영상문화」 저자)가 일본의 인터넷 미디어 「리얼 사운드」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카이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논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키워드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세카이계’, 또 한 가지는 ‘미소녀게임’입니다. 나중에 기술하겠지만 이 두 가지는 상호 연관되어 있고, 소위 ‘제로년대(2000년대)’의 오타쿠 계열 컬처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즉 신카이 마코토라는 애니메이션 작가의 독창성, 신선함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로 중요한 점은 그가 제로년대라는 고유의 시대, 그리고 애니메이션 이외의 오타쿠 계열 콘텐츠라는 고유의 영역이 서로 교차되는 지점에서 출현한 ‘이레귤러(변칙)’적인 재능의 소유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지브리(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로부터 오시이 마모루, 안노 히데아키를 거쳐 호소다 마모루에 이르는 ‘2차대전 후 일본 애니메이션사(史)의 정통적 문맥이나 유산’을 사실은 거의 공유하지 않는, 말하자면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돌연변이’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그렇기에 이번 < 너의 이름은. >의 ‘역사적’ 대히트는 한편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사(史)에 있어 커다란 ‘절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하략) (와타나베 다이스케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는 어째서 ‘사건’인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의 문맥에 의거한 독해」(2016.09.08)에서 인용·번역) 이처럼 신카이 마코토를 호소다 마모루 등과 한 묶음으로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지브리의 후계자’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비평계에서 몇 번 나온 이야기인데, 이번 < 너의 이름은. >을 통해 그것은 더더욱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시이 마모루, 그리고 최근의 호소다 마모루에 이르기까지의 애니메이션 크리에이터들은 기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전원 종래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속에서 이력을 쌓아왔고 애니메이터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다. (호소다 마모루의 경우에도, 대학 졸업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 입사 시험을 치기도 했고 첫 직장으로 입사한 것도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최고 정통 애니메이션 업체라고 할 수 있는 토에이애니메이션이었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는 게임 업계 출신이고(첫 직장이 ‘Ys(이스)’ 시리즈, ‘영웅전설’ 시리즈로 유명한 니혼팔콤이었다), 독립한 이후에도 초기부터 미소녀게임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런 의미에서 와타나베 다이스케는 <너의 이름은.>을 보고 난 감상으로서 “이것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 등 본인의 작가적 출신지에 자각적으로 회귀’한 것임과 동시에 ‘그 이후의 시대의 변화에도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 작품”(앞선 글에서 인용·번역)이라고 말한 것이다. < 너의 이름은. >에서 몸이 바뀌는 소년 소녀 즉, < 너의 이름은. >의 스토리 구조와 영상 그 자체는 지극히 기존의 신카이 마코토스러움, 즉 세카이계나 미소녀게임적인 일면을 유지하고 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몸이 바뀐다거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타임 트래블’적 내용, 혹은 기억상실이란 모티프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소위 ‘주브나일’(청소년 대상의 소설, 주로 SF나 판타지 등의 장르문학이 많다. 원래 서구권에서 시작된 청소년 문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고, 최근 미국에서 유행한 ‘영어덜트픽션’ 장르와도 비교해볼 수 있는 장르이다.) 장르의 전형적인 내용이다. 물론 세카이계 작품이나 미소녀게임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던 설정이다. 당연히 이 각각은, 세카이계에 속하지 않는 장르에서도 흔한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소년 소녀의 몸이 바뀌면서 동시에 타임 트래블도 하면서 기억상실도 하게 되는’ 내용은 의외로 세카이계 작품이나, 혹은 게임이 아니고서는 아주 일반적으로 흔하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 반대로 일본 만화나 게임을 쭉 접해온 계층에게는 이것들이 거의 ‘클리셰’인 셈이고, 자세한 설명이나 소개 없이도 즉각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존에는 신카이 팬들의 대다수가 ‘10대~30대의 남성 오타쿠’(와타나베 다이스케의 앞선 글)였고 그것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에 원점을 둔 신카이 감독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는데, 이번 < 너의 이름은. >은 특히 10대 여성 관객(세카이계나 미소녀게임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전혀 모르는)을 중심으로 대히트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어째서일까. 보통 이 정도의 메이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도 ‘패밀리 관객층’을 향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법이고, 호소다 마모루가 < 늑대 아이 > 등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포스트 지브리’로 주목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더라도 <너의 이름은.>의 이런 독특한 지향성은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에 관한 와타나베 다이스케의 지적은 매우 시사적이다. 약간 길지만 인용해보겠다. 분명히 < 너의 이름은. >은, 몇 번이고 지적했듯이 스토리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지브리나 호소다 애니메이션처럼 ‘국민적 애니메이션’, ‘패밀리 대상’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과거 우리들 젊은 남성 관객이 지지했던 세카이계적 세계관이나 설정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너의 이름은.>을 보고 나서 나는 결정적인 위화감도 느꼈습니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세카이계적이면서도, 하지만 어딘가 세카이계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타키가 ‘세카이계적 나약한 소년’(중략)과는 달리, 그야말로 ‘포스트 제로년대적’으로 주체성을 갖고 행동하며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현실(리얼)에 충실한’ 캐릭터상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는 근래의 오타쿠 계열 콘텐츠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략) 구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이카리 신지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2009년) 신지의 ‘캐릭터 체인지’도 완벽하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너의 이름은.>은 틀림없는 세카이계적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어딘가 과거에 봤던 작품들과는 다른, ‘세카이계라고 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무튼간에 신카이는 이러한 ‘마이너 체인지’(*역주:크지 않은, 소소한 수준에서의 세부 수정)를 세세하게 쌓아올림으로써 이번에, ‘패밀리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국민적’인 규모의 대히트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너의 이름은.>이 갖는 획기성이 있는 것입니다. <너의 이름은.>은 과거 미야자키의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처럼, 혹은 안노의 < 신세기 에반게리온 >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사(史)의 무언가를 확실하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의 계승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결정적인 ‘단절’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돌연변이’ 신카이가 만든 신작은, 글자 그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완전한 ‘돌연변이적’ 걸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돌연변이’=예외가 ‘오리진(origin)’=기원이 되어, 새로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앞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와타나베 다이스케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는 어째서 ‘사건’인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의 문맥에 의거한 독해」(2016.09.08)에서 인용·번역) 바로 이런 식의 평론이 2016년 8월 26일 < 너의 이름은. > 개봉 이후 이어졌던 것이다. (위 평론도 개봉일로부터 보름도 채 안 되어 게재되었다. 아무리 인터넷 매체라고 하더라도, 필자가 집필한 것은 개봉일 거의 직후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존 신카이 감독 작품의 주인공들(특히 남자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오타쿠’적인 성격(외톨이이고 자기완결되어 있는 인격체)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들은 기본적으로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인 개체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주인공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기존 작품에서는 ‘전형적인 일본 만화적 캐릭터’였던 것과 비교해볼 때 차이가 크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작품에선 심지어 ‘정치’(정치적이란 의미에서의 ‘정치’가 아니라, 말뜻 그대로의 ‘정치=사회나 조직에서 상호 간의 이해 조정’)까지도 그려져 있는 것이다. 즉 외계인이라든지 ‘닫혀진 세계’ 속에서의 ‘오타쿠적 세카이(세계)’에서 벗어난, 그야말로 ‘포스트 에반게리온’으로서 ‘제로년대의 시작을 알렸던 세카이계의 기수가 세카이계에 종지부를 찍은’ 작품으로서 <너의 이름은.>은 초기부터 (대중적인 히트와는 별개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그 부분을 한국에서도 확실하게 알리고 싶어서 필자는 이 글을 쓰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와 < 너의 이름은. > 또 한 가지, 필자가 < 너의 이름은. >에 관해서 이 글을 쓰고자 생각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 작법론에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의 극장용 팸플릿 제2탄(2016년 12월 9일/토호 영상사업부 발행)에 수록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직접 풀어낸, 영화 <너의 이름은.>」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신카이 감독이 11월 5일 나가노 현의 도서관에서 개최한 강연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 ~현대 이야기의 역할~」을 글로 옮긴 것인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토리텔링 작법에 관해 스스로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야기를 만들 때에는 스토리의 콘셉트를 몇 줄 정도로 표현하는 ‘로그라인’이란 것을 맨 처음 생각하는 법입니다만, < 너의 이름은. >의 로그라인은 ‘꿈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가, 나중에 결국 현실에서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년과 소녀가 만남을 가지고, 한때 헤어지기도 하지만 또다시 만나게 된다는. 그런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구조로서, 강력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로맨틱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너의 이름은.> 극장용 팸플릿 vol.2 Collection of interview」에서 인용·번역) 여기에서 신카이 감독이 말한 ‘로그라인(log-line)’이나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일본의 평론가이자 만화 스토리작가인 오쓰카 에이지가 쓴 스토리텔링 작법서 「스토리 메이커」와 「캐릭터 메이커」 그리고 「이야기 체조」 「이야기의 명제」(한국어판 2013~2015년/북바이북 발행) 등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선 오쓰카 에이지는 로그라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처럼 플롯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을 프레미스 혹은 로그라인이라고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부르는데, 좋은 시나리오는 명확한 로그라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보통 일컫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로그라인은 시나리오의 근본을 규정하기 때문인데, 그 정리 방식에 따라 플롯이 펼쳐져 갈 방향이나 작품의 테마가 크게 바뀌는 것입니다. (「스토리 메이커」에서 인용) 그렇다고는 하나 이 워크숍이, “우정을 테마로 삼아 스토리를 만들어봐라”는 식으로 단순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만화잡지 「소년 점프」 에서는 독자 앙케이트를 통해 선정된 ‘우정’, ‘노력’, ‘승리’라는 3가지 키워드를 테마로 삼아 작품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주인공이 목적을 향해 ‘노력’하고, ‘우정’의 도움을 얻어 ‘승리’한다”는 스토리를 지탱하는 원리 원칙일 뿐이다. 블라디미르 프로프식으로 말하자면 ‘캐릭터의 행위의 3연속’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화시킨 이야기의 구조임과 동시에, 구체적인 캐릭터 조형이나 스토리라인 만들기의 지침이기도 하다. 「소년 점프」의 이 3가지 키워드를 통해 유도되는 문장은, 영화 업계에서 ‘프레미스’라고 부르는 용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유의어로 ‘로그라인’, ‘콘셉트’, 그리고 ‘테마’가 있는데, 시나리오 입문서에서도 실제 현장에서도 혼동되어 사용된다는 인상이다. 이런 식의 ‘정의’가 있기는 있는 듯하다. 프레미스, 테마, 콘셉트, 로그라인 등과 같은 용어는 보통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보통은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착상)이나 토픽(사건), 2~3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토리라인의 뼈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혼동하기 쉽지만 ‘프레미스’와 ‘테마’는 스토리 속 깊은 곳에 있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란 의미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콘셉트’는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나 토픽을 의미하고, ‘로그라인’은 하나 혹은 두 문장으로 ‘콘셉트’의 요점을 표현한 것이라고 정하겠다. ‘프레미스’와 ‘테마’는 스토리의 내부 깊숙히 담겨진 메시지를 의미한다. (「이야기의 명제」에서 인용) 그다음,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의 구조에 대해서는 신카이 마코토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중략) 여기에는 사실 커다란 의미가 있는데, 경계를 넘어서 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이야기의 기본입니다. 예를 들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도, 소녀가 이계(異界;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이죠.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온 다음, 무언가가 약간 변화되어 있다는 것. 거기에서 제가 연상하는 것은 어린 시절 경험했던 담력 시험입니다. 담력 시험을 끝낸 다음에, 스스로가 무언가를 뛰어넘어서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있습니다.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사람은 변화하는 법이죠. < 너의 이름은. >은 그 모티프를 반복해서 집어넣음으로써 타키와 미츠하가 조금씩 성장해 갑니다. (중략) 사람이 태어난 다음에 처음 겪게 되는 놀이 ‘이나이 이나이 바아(엄마 없다 놀이)’도 말 그대로 갔다가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사라짐으로써 다른 세계에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다음 순간에 어머니 얼굴이 다시 나타나면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때 이미 그 놀이를 한 아기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변화되어 있죠. 그것이 성장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존재의 구조 그 자체이기도 한데, 관객들은 어떤 꿈을 보기 위해서, 특별한 꿈의 계시를 얻기 위해 영화관에 가고, 변화되어서 돌아옵니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생활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너의 이름은.> 극장용 팸플릿 vol.2 Collection of interview」에서 인용·번역) ‘이나이 이나이 바아’란 것은 일본에서 ‘엄마 없다’ 놀이를 지칭하는 명칭인데, 아이 앞에서 본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추고 ‘없다 없다(이나이 이나이)’라고 말한 다음 ‘바아’라는 말과 함께 얼굴을 드러내어 아이한테 보여주는 행위이다. 영어권에서 말하는 ‘Peek-a-boo’이고, 한국에서는 ‘얼레리 까꿍’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이 ‘엄마 없다’ 놀이를 통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점(「스토리 메이커」 참조),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예를 들고 있는 것도 오쓰카 에이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너의 이름은.> 일본판 팸플릿 1편 / <너의 이름은.> 일본판 팸플릿 2편 제 1장 이야기의 기본 중 기본은 ‘갔다가 돌아오기’다 이야기의 문법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해주십시오. 하나는 ‘결락된 것이 회복된다’는 패턴. 또 하나는 ‘갔다가 돌아온다’는 패턴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이 장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의 문법’인 ‘갔다가 돌아온다’에 관해 이해해두고자 합니다. ‘갔다가 돌아온다’는 구성이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패턴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 원작으로 유명한 J.R.R. 톨킨 저 「반지의 제왕」의 번역자로 알려져 있는 아동문학자 고 세타 데이지입니다. 세타는 갔다가 돌아오는 구성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고도 불렀습니다만,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톨킨 작품 「호빗」의 본래 타이틀 「The Hobbit or There and Back Again」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중략) 톨킨의 대학 동료였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주인공 소년과 소녀는 옷장 안에 있는 나니아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내용이 기본 줄거리입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갔다가 돌아온다’는 패턴에 있어서, 주인공은 반드시 원래 있던 장소에 그저 돌아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있던 장소와는 다른 장소로 돌아가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는 문법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중략) 세타는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우선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발달 과정에 있는 그 두뇌와 감정에 따르는,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라고 지적하고서, (중략)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경계선을 넘어 저쪽 편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계선은 작중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경계선일 때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는 앞으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작품세계 안에 하나의 경계선이 있고, 그 선을 넘어 주인공이 ‘저쪽 편’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에 ‘이야기’의 가장 기본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순한 이야기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스토리 메이커」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갔다가 돌아온다고 하는 문법을 교묘하게 사용한 작품이 많은 것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에서는 터널 저쪽 편, 그리고 다리를 건넌 다음에 있는(물론 터널과 다리가 경계선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저쪽 편 세계의 여관에 치히로가 가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또한 저쪽 편 세계에 간 후에도 하쿠를 구하기 위해 가오나시와 물 위를 달리는 열차를 타고 제니바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스토리 메이커」에서 인용) 「스토리 메이커」(오쓰카 에이지/북바이북) / 「이야기의 명제」(오쓰카 에이지/북바이북) 사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법론이 오쓰카 에이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필자의 상상만은 아니다. 실제로 필자는 과거, 오쓰카 에이지 본인에게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스토리 메이커」 등을 읽고서 작법론을 배웠다고 말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카이 마코토가 처음으로 오쓰카 에이지의 스토리텔링 이론을 도입했던 작품은, 실은 < 너의 이름은. >이 아니라 2011년도 작품 <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 >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나 일본에서나 검색만 조금 해보더라도 비판적인 관객 평가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이전까지 어느 쪽인가 하면 SF와 ‘세카이계’에 기반을 둔 작품이 많았던 신카이 마코토가, 갑자기 미야자키 하야오 + 스튜디오 지브리 풍의 ‘판타지’를 그렸다는 점, 게다가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물이나 스토리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자각적으로’ 지브리 풍을 연상케 되는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고, 또 오쓰카 에이지에게도 자신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작법론을 공부하고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직접 전달했으니만큼, ‘일부러’ 그런 내용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때 작법론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일까? 우선, 신카이 감독 자신이 나름대로 그 시점에 작품적인 고민이 많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02년 < 별의 목소리 >(25분), 2004년 <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91분), 2007년 < 초속 5센티미터 >(63분)까지, 장편을 만들기 시작한 후로도 적은 수의 스태프만으로 만든 것 치고는 나름대로 빠른 속도로 작품을 제작하던 신카이 마코토가 4번째 장편인 < 별을 쫓는 아이 >(116분)는 2011년, 전작으로부터 4년 후에 발표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다. 작품 제작에만도 2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이 다시 4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의 2013년 < 언어의 정원 >, 그리고 2016년도에 다시금 107분의 장편인 < 너의 이름은. >에 이르렀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본인도 여러 번 말하고 있듯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창작론을 배경으로 갖고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초기에 만들었던 <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를 비롯한 단편 작품에서 화제를 모았고, 처음 만들었던 극장용 애니메이션 < 별의 목소리 >가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게 되면서,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갑작스럽게’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그런 ‘밑바탕’이 없다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추한다. 그런데 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상당히 초기부터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호평했던 평론가였고, 그런 평론가가 작법 이론서를 여러 권 출판했으니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스토리 메이커」를 비롯한 스토리텔링 이론서를 읽으면서 그 작법론에 수긍을 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 속에 이론적 바탕을 도입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 별을 쫓는 아이 >의 내용은, 일본신화의 이자나기·이자나미 신화나 그리스로마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아내 에우리디케 이야기 등, 그야말로 오쓰카 에이지가 「스토리 메이커」 등 작법서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던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와 세계의 민담·신화를 거의 그대로 도입한 내용이었다. 판타지적인 스토리 역시도 앞서 「스토리 메이커」에서 예시되어 있는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 「나니아 연대기」와의 연계성도 엿보이지 않는가. 말하자면 이 시점에 신카이 마코토는, ‘본인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이론적 바탕을 공부하고자 노력’했고, 그에 따라 전 세계의 민담과 신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 있는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기초 이론과 할리우드 영화 등에서 보편적인 ‘로그라인을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 작법’에 맞춰서 작품을 만들고자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첫 번째 시도였다 보니, 아직 제대로 본인의 스타일로 제대로 ‘체화(體化)’시키지 못한 결과로서 그처럼 관객들의 비판을 받았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앞선 < 너의 이름은. > 팸플릿의 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이론에 확신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그 작법론을 금방 포기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이번 <너의 이름은.>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너의 이름은.>은, 본인도 직접 언급하고 있듯이 작품 전체의 스토리 구조가 기본적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적인 구성이다. 거기에 < 별의 목소리 >로부터 이어져 온 세카이계로서의 콘셉트 역시도 (앞에서 기술했듯 그 내용에 있어서는 중요한 변화를 거치면서도) 계승하고 있다. 말하자면 본인의 지금까지의 작품 활동 전체가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그냥 그대로 표출한 것이 아니라, < 별을 쫓는 아이 >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로, 기존의 세카이계에 종지부를 찍는 듯한 또 다른 작품 세계로, 새롭게 완성해낸 것이 바로 <너의 이름은.>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 너의 이름은. > 한국판 런칭포스터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1인제작 애니메이션’이라는 신화 마지막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여전히 소위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이란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소개되고 있는 국내의 현실에 대해 몇 가지만 첨언하고 싶다. 필자는 지금까지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두 번 인터뷰를 했는데, 그 첫 번째는 「콘텐츠 코리아」 2001년 9월호에 기고하기 위해 행했던 것이었다. 이 시점은 그가 < 별의 목소리 >(2002년 2월 2일 개봉)를 완성하기도 전이었는데, 이후 오쓰카 에이지나 아즈마 히로키 등의 평론가와, 일본의 각종 애니메이션 잡지와 매스컴이 신카이 마코토를 주목하면서 국내에도 ‘1인 애니메이션’이라는 형태에 대해 초기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무엇보다도 필자부터가 당시 2001년 9월호에서 신카이 마코토에 대해 가장 먼저 설명한 문장이 ‘배경 음악과 여주인공 성우를 제외한 나머지를 완전히 혼자서 만들어낸 4분 46초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의 제작자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실사 영화 < 부산행 >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크리에이터가 된 연상호 감독이, 당시 < 지옥 >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면서 신카이 마코토의 제작 방식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당시 「CG랜드」 등의 잡지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등을 통해 연상호 감독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가 1인 제작으로 4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를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25분짜리 < 별의 목소리 >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계약’을 해서 ‘소속 회사’(지금도 소속되어 있는 주식회사 코믹스웨이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요즘 식으로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아이돌 지망생이 프로덕션과 계약해서 연습생으로 활동하며 데뷔를 목표’로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신카이 감독의 경우 이미 회사원으로서의 경력이 있었고, 소속사에서 그의 단편 작품을 보고 계약했던 것이니만큼 소속사가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금(생활비나 교육비 등)을 주었다기보다는 그에게 작업 의뢰를 받아주면서 일이 끊기지 않도록 했던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보면 그 당시 신카이 감독의 경우 소속사를 굳이 둘 필요 없이 프리랜서로 일했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데, 신카이 감독은 CG 관련 수주를 받아 프리랜서 직업인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만의 오리지널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굳이 소속사에 소속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당시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 계열과는 조금 사정이 달랐고, 직접적인 참고가 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예를 들어 신카이 감독과 같은 길을 걸으려면, 우선 소위 작가주의적인 지향성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니까. 물론 이 말은 작가주의적 지향성을 버려야만 신카이 감독처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카이 감독은 장편을 만들면서 쭉 본인의 작가적 지향성을 놓지 않아 왔고,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미소녀게임 오프닝 애니메이션이라든지 기업의 CF애니메이션도 수주받았고, 소속사와 계약하는 등 (그것은 즉, 작가 본인의 수입을 소속사와 분할해서 나눠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소속사와 계약하고 매니저를 두는 연예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식 상황에서 보자면 지극히 상업주의적이라고 여겨지게 될 시스템에 속하는 것을 신카이 감독은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그런 상황을 쭉 지켜보아 온 입장에서, 신카이 감독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서 신카이 감독과 같은 길을 걷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실감이 드는 일도 많았기에, 그 당시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 쪽 상황에서 ‘한국의 신카이 감독’의 등장을 바라기는 쉽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한국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길을 찾는 크리에이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연상호 감독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 양쪽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가며 그런 길을 찾아낸 것 같아,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더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지적해왔던 바이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업계의 상황을, 갖가지 소식과 뉴스를 통해 바로바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기본적인 시스템도 거쳐 온 역사도 업계의 온갖 상황도 전부 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가 없이 표면적인 뉴스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심지어는 직접 일본 업체로부터 수주를 받아 일러스트 작업을 하거나 만화 작품을 연재하는 경험을 갖고서도, 일본 업계에 대해 잘못된 정보나 편향된 경험담을 말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정작 일본 업계에서 더 오래, 더 폭넓게 활동해왔을 ‘일본의 작가들’과 상반되는 이야기를 ‘일본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 작가’가 말하는 케이스가 있다는 뜻이다.) 개인적 경험담을 단순히 말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일본 업계는 이렇다”는 식으로 업계 전체를 논하는 정보로서는 주의가 필요한 경우도 많을 텐데, 개인적 경험담을 일반론으로 너무 쉽게 치환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 국내에서 유행했던 ‘신카이 마코토의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이란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급했듯 실제로는 신카이 감독이 꼭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또 1인 제작을 했던 때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국내와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신카이 마코토를 1인 제작 애니메이션이란 측면에 포커스를 맞춰 국내에 소개했던 적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꼭 확실하게 언급해두려고 쭉 생각해왔다.) 아무튼 이런저런 논점들이 많았는데, 어쨌거나 이번에 < 너의 이름은. >을 보고 ‘일견 대중적이지 못하고 마니아 취향이기 쉬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이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고, 또 그 도달점이 이처럼 전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2017년 개봉 이후 관객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으나, 한국 관객들 역시도 오랫동안 신카이 감독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왔으니만큼 좋은 반응이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