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풍(暖風)
- 감독
- 최훈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오영일, 윤정희, 태현실, 조미령, 유계선, 김신재, 방인자, 한은진, 박기택, 박기범, 정민
임권택 감독의 67번째 영화 < 족보 >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기점으로 이야기되는 영화다. 임권택 영화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때 흔히 ‘작가로서의 경향’이 드러나는 후기 영화의 흐름에서 <족보>(< 잡초 >나 < 왕십리 >와 함께)가 그 첫머리에 놓이곤 한다. 감독 자신도 이 영화에 이르러 비로소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임권택 영화에 꾸준히 천착해온 정성일 평론가는 고백―자신에게 첫 번째 임권택 영화는 <족보>였다―의 형식을 통해 이 영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족보>에 대해서는 민족적 리얼리즘의 계보 차원에서부터 화면분석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상세한 논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한국영화의 걸작’으로서 <족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준 인물형이 한국영화사, 나아가 한국문화사에서 선구적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한 사람은 일본인 다니 로쿠로( 하명중 )이고 다른 이는 설씨 가문의 종손 설진영( 주선태 )이다. 다니는 조선총독부 경기도청 총력 제1과에 근무하는 일본인 공무원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종용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군국주의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의 직업일 뿐이고 그의 정체성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가 미(美)를 알고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는 화가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러한 대표적인 일본 지식인이었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이 설진영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에서 길게 인용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다니’라는 일본인의 성격은 이 영화의 의미구조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그는 한국영화에서 드문 일본인 유형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사에서 일본인, 그중에서도 식민지 시기의 일본인은 보통 악인 내지 가해자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와 같은 일본인 인물이 < 족보 >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한일수교에 대한 기대심리가 높았던 1960년대 초반에 제작된 < 현해탄은 알고 있다 >( 김기영 , 1961)를 비롯한 일련의 영화들에서 한국을 이해하는 ‘교양 있는 일본’이 등장했었다. 또한 <족보>의 원작자인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또 다른 소설을 영화화한 < 이조잔영 >( 신상옥 , 1967)에서는 다니와 거의 유사한 인물(노구치- 오영일 분)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한 일본인들의 등장은 지금 봐도 특이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눈과 입을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찬미하는 것은 한국 대중의 잠재의식에 자리 잡은 과거사에 대한 보상심리를 충족하는 것으로 민족주의의 발로로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런데 다니보다 문제적인 것은 설진영이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우물에 돌을 안고 빠져 자결한 실존인물 순창 설씨 선비를 모델로 하고 있다. 또한 영화의 서두에서 권위적인 서술을 통해 식민지 시기 말기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 영화 전체 서사에 강고한 전제로 작용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일견 설진영을 민족주의자로 판단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정작 영화에 그려지는 설진영은 민족주의적 지사가 아니다. 그는 가진 것을 지키려는 기득권층이자 그러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순응주의자이다. 그는 일본 군대에 헌금하고 공출에 협조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친일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창씨개명만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 이유는 칠백 년 이상 내려온 족보의 전통을 자기 대에 와서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총독부의 온갖 협박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버틴다. 심지어 사위가 고문을 받아 폐인이 되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러던 그가 결국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손자들의 하소연 앞에서 집안의 창씨개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종손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대목에서, “일본인조차 감탄해 마지않는 그 아름답고 굳은 유교적 전통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런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이 영화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름다운 것은 그가 지킨 유교적 전통[족보]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살아남기 위한 타협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더 문제적일 수 있다. 미래는 자신의 것이 아닌 다음 세대의 것이므로 손자들의 ‘현실’을 위해, 그는 창씨개명을 결정한다. 그런데 자신은 족보를 위해 죽는다. 매우 이기적인 동시에 보수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오히려 역사에 대한 이중적인 죄과(罪過)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오롯이 번득이는 것은 그가 금도(禁度)를 지켰다는 점이다. 설진영이라는 인물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선(線)이 있으며, 그는 그것을 넘지 않기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집안을 지키기 위해 친일을 서슴지 않았지만, 집안의 성씨조차 지킬 수 없는 순간이 닥친다. 족보는 후세에는 의미 없을 수 있는 것이고, 설진영 스스로 족보를 일본인에게 맡김으로써 그렇게 판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종손으로서 족보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에게 그 책임을 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친일/반일’, ‘지조/변절’ 등의 관습적 이분법에 준거하여 해석될 수 없다. 한국문화사에서 이와 같이 ‘친일/반일’(이외에도 ‘순수/통속’, ‘반공/용공’, ‘보수/진보’ 등)의 이분법에 긴박되지 않은 채 ‘밑바닥’을 지켜내는 인물이 ‘진지하게’ 그려진 예는 일찍이 없었다. 고상한 죽음의 경우들, 예컨대 < 독짓는 늙은이 >에서 송영감의 자살이나 『금시조』에서 고죽의 죽음은 ‘순수예술’이라는 관념과 맺어져있는 ‘승화’였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높은 데서 세속을 내려다보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설진영과 같이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협해가는 가운데 금도(禁度)와 대면하여 이루어진 결단이 아니었다. 따라서 1978년에 이러한 인물이 형상화될 수 있었던 것은 임권택 영화가 이룩한 성취였다. 그리고 그것은 < 길소뜸 >(1985)에서 과거와 혈육에 대한 화영( 김지미 )의 엄혹한 부정과 맞물리는, 인간과 현실의 치열한 대면의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물은 장르영화의 유희성 속에서 운신의 폭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설진영’이라는 인물의 의미는 현재 우리에게 더욱 심장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밑바닥’이 없는 천박한 이분법이 판치는 현실을 떠올리면 그의 행동은 차마 뭉클하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