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한국영화 현장 기록 사업] 오오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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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장손>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곰곰이 뜯어보면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오묘하다. 비평(critic)이 위기(crisis)를 전제로 한다는 통설에 근거하자면, 비평이란 그 성질상 한사코 안녕(安寧)할 수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안녕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비평가는 위기를 발견하고, 때로는 그것을 인식의 표면에 올리고자 위기를 조장해야 한다. 통념과 상식의 범주에 포착되지 않는 요소를 끝내 사유의 영역으로 회수해내는 일—그곳에 비평가의 덕목과 기쁨이 있다. 물론 이러한 덕목을 실천하고 기쁨을 누리는 비평가도 안녕하기는 어렵다. 상식과의 불화를 견지하면서 평안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녕한 비평’은 존재할 수 없고(안녕하면 비평이 아니다) ‘안녕한 비평가’는 소속감을 불안으로 받아들이고, 불화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의 희귀한 기질을 갖춰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주1 ) 비평가는 탄탄대로를 지척에 두고도 굳이 외줄을 탄다. 탄탄대로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마땅히 안녕할 수 없는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이렇게 읽힌다. ‘비평, 설마 안녕히……하고 계신 건 아니죠?’ 내게 비평가란(등단 등의 제도를 통해 부여되는 자격이 결코 아니고) 비평의 기능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사람의 총칭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조금만 비평가다. 그렇지만 질문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다. 그러니 질문을 핑계 삼아 외줄에 올라보자. 다시 한 번, 김현은 이렇게 쓴 적 있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 없이는 느낄 수 없다.” *주2 비평가는 투사와 예술인의 세계를 오가고, 부지런히 샛길을 만든다. 잠깐, 자부심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나는 부끄럽기에 아주 멀리 우회하고 감추고 파편화할 것이다. 2. 이두용 의 < 장남 >(1984)은 고향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노부모가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상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장남( 신성일 )을 중심으로 담은 극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 동경 이야기 >(1953)처럼 처음 장남의 집에 모셔진 노부모는 도시화된 생활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집터로 사둔 변두리에 잠시 머물고 결국 노인에게 불편한 아파트로 옮겨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제주도로 장남이 출장을 간 사이 노모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틀니를 전달하지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장남이 도착한 건 엘리베이터에 실을 수도 없어 관이 ‘짐짝’처럼 곤돌라로 내려지고 있는 때였다. (상) 아파트로 이주한 노부모와 노모의 관이 내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장남 (하) 공중전화에 두고 간 수첩을 전달받는 장남 이렇게 글줄로 옮기니 장남이 적극적으로 불효를 저지른 것 같지만, 장남은 결코 지탄받을 정도의 불효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잘 잊는 사람’일 뿐이다. <장남> 그리고 이두용의 탁월함은, 이 성격을 구축하는 표현법에 있다. 5분, 장남이 공중전화에서 막내에게 전화를 하고/다음 이용객이 장남이 수첩을 두고 갔다고 불러/수첩을 전해주는 장면이 있다. 슬래쉬(/)를 기준으로 세 컷으로 이뤄진 이 장면은, 장남이 ‘잘 잊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intention)를 드러낼 정도로 강조되어 있지만, 몰입을 저해할 만큼 웅변조는 아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시작된 ‘잘 잊는 사람’이란 성향이 연속되며 결말이 엄습해온다. 장남의 유실물이 점점 중대해진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을 잊고, 어머니의 틀니를 해주는 것을 잊고,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말을 했음에도) 결국에는 어머니의 다가오는 죽음을 잊는다. 그 제목만으로 <장남>과 ‘ 각각의 영화사 ’를 상상하게 하는 < 장손 >(오정민, 2023)은 여러모로 다른 영화다. 노부모가 장남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상경한 손자가 가족이 사는 대구의 고향 집으로 내려온다. 장남과 달리 장손 김성진( 강승호 )은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 임권택 은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 에게 “남자가 말이오,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안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남성성과 운전). 그리고 무엇보다 장남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한다. 그렇지만 장손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장손은 조부모의 영정사진을 찍는 일을 회피하고, 할머니의 장례식장으로도 곧잘 들어오지 않으며, 병실 바로 앞에서도 고모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창밖의 햇볕에서도 눈을 돌리듯, 가족의 문제를 외면(外面)한다. 고모부를 보지 못하고 병실 앞에 앉은 성진 물론 <장남>의 잦은 망각도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에 검열된 결과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다만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라는 검열과 부딪칠 때마다 쌓였던 에너지는 노모의 죽음과 함께 슬픔으로 폭발하고 관객에게 전이된다. 그리하여 이두용 영화에 내재한 미묘한 냉엄함과 별개로, <장남>은 가족주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주3 이와 달리 가족의 무게를 결단코 외면하지만 (지극히 특권적이고 결단코 반항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러므로 단언컨대 성진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핵심적 구동원리인 ‘장자우선주의’의 수혜자인 덕에 가족주의의 전(全) 과정을 익히 알 수 있는 성진의 특권적 시야로 인해 <장손>은 건조한 케이스 스터디로 귀결된다. <장남>과 <장손>의 이 차이는 흥미롭다. 그렇지만 지금 남겨둘 질문은 하나다. 어쩌다 장손은 외면을 하게 되었는가? 3. 유산(heritage)은 벽이다.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수록, 그 벽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모두를 병들게 한다. 이 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은 단 하나다. 그것을 정확히 대면하는 것. 나는 여기에 관한 최량의 우화를 하나 알고 있다. 남재일 : 당신의 영화는 매우 공격적이고 신랄하게 발언한다. 지금 ‘아버지’라고 표현한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격하고 싶은 건가? 임상수 : 나는 모든 권위 혹은 권위주의를 철저하게 경멸한다. < 그때 그사람들 >(2005)을 본 사람들은 임상수가 이렇게까지 존경심이 없다는 데 당혹해한다. 좌파와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그런 걸 보면 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경멸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경멸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조롱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조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뿌리 깊은 속성부터 아무런 존경심이 없다. 그 근원은 내 부친이다. 그는 존경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출세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질투가 있었지만, 나는 한 세대를 겪고 나오면서, 그 질투를 정확하게 걸러냈다. 그의 경멸만을 물려받았다. 경멸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만큼도 존경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허투루 존경받고 있다는 치명적인 사실 말이다. (강조-인용자) ‘남한’을 구축했다고 할 만한 최대의 유산인 박정희를 경멸하기 위해 임상수 는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임상수는 박정희를 거의 촌부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 해직기자이자 영화평론가였던 아버지 임영(林英)의 덕이며, 심지어는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가 이 영화의 공동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층위는 다소 다르지만) 유산의 성격이다. (박정희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대면하면 그것을 경멸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임영이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주4 한국의 영화에도 많은 유산이 있다. 나는 이 유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유산은 일종의 물과 어항이다. 나는 그 안에 살기에(물) 제한된다(어항). 제한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지만, 의심이 시작되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을 외면(外面)하는 것이 ‘안녕’한 선택이다. 그리고 ‘안녕’을 위한 외면도 반복된다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다시 한 번, 비평은 어항의 ‘바깥’을 향한 몸짓이다. 그 몸짓의 방법과 정도는 가지각색일 수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지느러미로 어항을 가늠하고 빈틈을 탐색할 수도 있고, 눈알이 빠지도록 대가리를 어항에 처박을 수도 있다. 한국의 영화사를 돌아보면 많은 비평은 어항을 새로이 만드는 일에 참여해왔다. 초기의 비평은 세계영화에 비해 기반과 역사가 빈천한 ‘한국영화’의 위신(prestige)을 위해 투쟁했고, 1990~2000년대 ‘뜻밖의 연합(Unexpected Alliances)’ *주5 이 이뤄진 시기의 비평은 ‘스크린쿼터 운동’을 문화제국주의에 대립하는 첨예한 전선으로 잡고 독립과 인디(indie)의 기반이 되는 제도와 기금의 조성에 헌신했다. 이들의 투쟁과 헌신이 얼마나 상례적이었고 유효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제도는 분명 중요한 비평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비평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가 오늘날 영화에서의 유산이다. 나는 2010년대 중반부터 영화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기억컨대, 2010년대의 영화계는 제도 비평의 활기가 가득했다. 혹자는 이들의 제도 비평을 두고 지면(紙面)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라고 저열한 힐난을 했지만, 내가 아는 한 제도 비평에 열을 올렸던 비평가 중 영화계에서 안정된 지면을 얻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도 비평은 실질적으로 유효한 행정의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제기한 논점을 두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는 회담이 열린 적도 없다. 솔직한 토론이 이루어질 경우 자신들의 지적 기반과 역사적 모순이 노정될 게 두려웠던 것일까?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말하자면, 영화계는 제도 비평을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비판을 지면의 요구로 해석하는 사람이나, 비판의 실질이 아니라 태도를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사람들은 영화를 문화가 아니라 산업으로 보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된 게 아닐까? 그들은 종종 이렇게 무의식적인 고백을 한다. “이런 비판에는 동업자 정신이 결여되어있어……” 재원의 전부가 국가지원금인 경우에도……) 어쨌거나 그때의 비평가들은 대개 미술이나 문예 계열의 지면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2020년 COVID-19로 인한 팬데믹(Pandemic)이 도래했다. 2010년대가 핵심적으로 겨냥한 유산이 ‘뜻밖의 연합’이 창안한 제도였다면, 이러한 역사적 우연은 지극히 공교롭게 느껴진다. 초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의 위신을 추구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단관극장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뜻밖의 연합’ 시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와 독립영화의 ‘다양성’을 ‘보장받길’ 원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멀티플렉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상영관에서 한국의 영화를 확실히 몇 자리 확보하고자 하는. 그리고 팬데믹은 정확히 멀티플렉스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 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리하여 2010년대의 제도 비평을 지금 보면 어딘가 예언적인 게 있다. 그때 지적된 다양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적해 있고 심화되었다. 그렇지만 학습의 효과일까. 오늘날 영화 비평은 더는 제도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내 대가리만 깨지고 말 텐데?)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마이크로시네마’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씨네21》이 서로 너무도 이질적인 집단을 묶고 이들을 ‘마이크로시네마’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제시했지만, 그 요체인 소규모-(비)공식-영화보기 모임은 당연한 말이지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최근의 ‘마이크로시네마’가 새로운 현상인 것은 이 기획에 비평가가 다수 참여하고 있고, 과거와 달리 (위법성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홍보로 호객을 한다는 점일 테다) 그 실질은 제도 비평과 아무 관계 없다고 실소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구조적으로도 팬데믹 시기에 강화된 OTT라는 미디어 환경이 영화를 초과공급하고 있기에 강력한 큐레이팅 기능을 요구하는 수요를 포착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의 시야에서 2010년대의 제도 비평과 2020년대의 마이크로시네마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혹은 착각일지라도, 이 착각이 적잖이 생산적일 거라고 자신한다. 이러한 착각을 지속하자면(사실 비평가는 착각의 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포스트 2010년대’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영화 제도가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유통과 인정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 혹은 제도화 없는 비판이 내파(implosion)와 외파(explosion)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토대로 시작한 참호공사. 어항과 금붕어의 비유를 계속 들자면, 전자는 작지만 작은 어항을 새로이 만들자는 것이고, 후자는 어항을 부술 수 있을 때까지 머리를 단단하게 만들자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다보니, 제안받은 원고의 매수와 주제를 모두 훌쩍 초과했기에, 이쯤에서 서둘러 마무리해보자. 나는 비평이란 그 성질상 위태롭고 불쾌하고 불건전할 때 적절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다시 어항에 대가리를 처박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2010년대에 예견되었듯, 멀티플렉스는 머지않아 시장에 의해 자동조절 될 것이고 줄어드는 관객에 따라 영화에 부착된 사회적 기능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적 실천이 아니라, 제도 비평의 계절이 다시금 오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제, 감히 대명사를 바꿔 보자) 우리의 ‘제도 비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나의 근심이자 고민이다. 나는 성진-장손이 택시를 돌려 다시 집으로 가길 바란다. 그것이 그의 몸과 정신을 찢어놓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2010년대 재방문’이 너무 늦지 않기를. “장자의 무용지용에 대한 퉁명스러운 반론: ‘그래 그렇게 오래 살아 뭐하자는 게요, 제기랄.’” *주6 *** 주1.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3, 128쪽. 주2. 위의 책, 168쪽. 주3.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건대, 영화의 결말이 가족주의인 것이 영화의 질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4. 고백하자면 나는 초기의 (영화적, 문화적) 세계관을 남재일 선생님의 말과 글에서 전수받았다. 유산은 강력하다…… 주5. 포스트 권위주의 사회에서 영화산업과 국가, 그리고 독립영화가 어떻게 예기치 않게 연합을 이뤘는지를 설명하는 동명의 저서(박영아, 2014)의 제목. 주6. 위의 책, 156쪽. 금동현(영화평론가) l 「상상되는 것인 동시에 그 잉여」(2024), 『하녀: 하녀 따위에 흥미를 가져요?』(2024) 등을 집필했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의 매거진 《삼삼오오》를 기획하고 있다.
1. “'나의 한국고전영화'(가제)라는 주제로 (…) 한국고전영화 대해 애정을 쏟는 부분이나 관심을 갖게 된 지점 등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의 이야기를 KMDb 에 싣고자 합니다. (…) 조금 더 개인적인 에세이 형식의 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원고 청탁은 덜컥 받았지만―KMDb에 글을 써보는 게 소망이었다.―빈 문서에 주제 적어두니 정말 불안하고 의아해졌다. ‘나의’는 불안하게 만들었고, ‘한국고전영화’는 의아하게 만들었다. 먼저 의아함은 ‘한국고전영화’라는 단어의 모호함과 관련된다. 비슷한 이름의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가 특정 역사적 시기나 미학 체계를 지칭하는 것과 달리, 1) ‘한국고전영화’는 용어로 정립되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영상자료원 운영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는 많은 영화가 업로드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 〉(이규설, 1920년대 추정), 〈 귀로 〉(이만희, 1967), 〈 미지왕 〉(김용태, 1996)도 있다. 이 세 편 영화를 하나로 묶는 역사적 시기와 미학 체계를 찾는 건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조선영화, 남한영화, K영화… 이런 식이라도 따로 지칭하는 게 더 실재에 가까울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튼 ‘한국고전영화’를 모호하게 사용하는 예는 논문, 기사 어디에서도 비근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고전영화’는 그냥 이렇게 사용되는 것 같다.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던 영화,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봤던 영화, 한마디로 옛날영화(김홍준, 2008)” 2) 당연하지만 ‘한국고전영화’를 “한마디로 옛날 영화”라고 해서 의아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의아해진다. 올해 태어난 내 친구의 아들에게는 〈 범죄도시 3 〉이 한국고전영화가 되는 걸까? ‘한국고전영화’를 ‘한국옛날영화’로 넘어간다 해도, ‘나의’라는 수식어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나의 한국옛날영화’ 이 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한마디로 옛날영화”라는 말을 하필 김홍준으로부터 찾았다는 것은 더욱 더. 시간을 조금 돌려보자. 2021년 나는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오래된 미래’에 김홍준의 〈나의 한국영화〉 연작을 초청했다. (아마도 〈나의 한국영화〉에서 따왔지 않을까 하는) ‘나의 한국고전영화’라는 주제를 받자마자, 나는 그 영화와 그때 보낸 추천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고 있었고, 시네마테크 같은 근사한 이름들은 멀게 느꼈던, ‘굿다운로더’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과거. (합법 영역이 욕망을 좌절시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웹하드를 통해 한국고전영화-사실 거의 모든 영화-를 다운로드 하고, 봤다. 다른 영화 파일과 달리, 한국고전영화는 구성이 유달리 이상했는데 꼭 어떤 사람의 해설이 영화 앞에 붙어있었고, 때때로 출연진과의 짧은 대담이 이어지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다만 그 파일은 ‘한국영화걸작선’을 녹화한 것이었고, 해설자는 김홍준이라는 사람이었다. / 〈나의 한국영화〉는 김홍준이 한국영화걸작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비디오를 획득할 수 있었던 위치를 활용해 만든, (모든 에피소드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오디오비쥬얼에세이’ 작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한국영화>를 시네필 1세대-문화원 세대-가 바라본 ‘한국영화’, 또 오디오비쥬얼에세이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가능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라 소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고 천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의 한국영화〉가 저작권을 클리어하지 않고 제작되었다는 점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한국영화’라는 간단한 이름처럼, 그저 대면하고픈 작은 욕구에서 관점의 순수성이, 그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형식이 가능했던 거라 믿는다. / 〈나의 한국영화: 에피소드 4 키노99〉는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다. 저작권 문제로 마지막 배경음악은 제거 되어있는데, 제거 된 노래의 이름은 ‘Je te veux’ 한국어로는 ‘당신을 원해요’다. 〈나의 한국영화〉의 첫 편 〈나의 한국영화1: My 충무로〉에서 김홍준은 〈 개벽 〉(임권택, 1992)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기억, 〈 서편제 〉의 마지막 장면에 자신의 딸이 출연했던 것, 〈어느 여배우의 고백〉과 충무로 활동 경력을 내레이션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는 화자가 그 피수식어와 맺고 있는 삶의 관계를 함축하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 한국옛날영화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주제로는 아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한국고전영화 = 불안+의아함 = 포기… 임재철: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대해 냉담하다. 미국을 제외하면 거의 그렇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자국영화가 자국어를 사용해서 그렇다. 그걸 나는 ‘영화는 외국어다’라는 명제를 써서 설명하는데, 그게 문자 그대로 영화가 외국어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는 외국어처럼 쉽게 포착이 안 되는 게 본질이라는 거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 보는 경우엔 우리 현실에 안 맞다 거나 연기가 서툰 것을 굉장히 빨리 포착한다. 영화라는 건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곳, 우리가 막연히 몽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건데 3) 정성일: 영화는 보지 말라고 하니까 더 매혹적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찾는 사람이 없는데, 왜 영화를 벌써 박물관으로 보내려 하느냐, 그런 얘기였다. 지금 영화는 공식문화가 돼버려,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 김홍준: 매혹과 열정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옛날 한국영화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봐라. 모르는 거니까, 흥분할 수 있다. 둘째. 제도교육으로 배우려 하지 말아라. 4) 그렇게 원고를 회피하다가 영화평론가 임재철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리고 정성일·김홍준의 좌담을 떠올리고 포개어보았다. 임재철에게 ‘영화는 외국어’라서, 분명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분명한 점이 있어서 매혹적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냉담하다 5) 정성일·김홍준의 문제의식도 유사하게 읽을 수 있다. 그들은 공식문화가 된 이후에 영화는 매력을 잃었다고 말한다. 물론 임재철, 정성일·김홍준이 겨냥하는 지점에 차이는 있다. 임재철은 스크린 내 요소들의 익숙함이 매력을 저감시키는 점을, 정성일·김홍준은 스크린을 접하기 이전 정보의 과다함이 순수한 체험을 방해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표면적인 연상으로 두 인터뷰를 포개어보자. 영화는 외국어라서 흥미롭다(임재철) 그런데 공식 교육에서 외국어를 너무 가르치곤 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흥미로운 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옛 우리말이다(김홍준)? 실로 옛 우리말은 지금의 우리말보다 불분명하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구절을 안다면 들리는 것과 써진 것을 함께 떠올릴 수 있지만, 그냥 음성만 듣고 있으면 꼭 외국어 같다. 그러다가도 ‘사람마다’라거나 ‘사람이니라’ 같은 부분에서는 또 익숙하여, 불분명하던 앞뒤의 말을 이어맞춰보곤 한다. 그리고 더 궁금증이 생긴다면 ‘우리말’이므로, 여러 방면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편하다. 개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나의 한국옛날영화’라며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측면이다. ‘한국옛날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시네필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어서 희귀한 ‘순수한 감상자’의 자리를 허용한다. 친절한 공급자도 적고, 알고리즘의 되먹임(KMDb가 알고리즘 기반 vod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기를…)도 없다. 그런데 영화 혹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에 궁금하거나 의아한 점이 생긴다면 그 영화·사람의 주변/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001년 정성일·김홍준이 ‘한국옛날영화’를 모르는 것으로 거명했을 때보다 한국영화사 연구는 훨씬 많이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정전(canon) 이외의 작품은 소위, ‘작가’의 작품인 경우에도 아직 충분히 감상 되지 않았으며 해명되지 않았다. 한국옛날영화는 우리 영화팬에게 감상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명을 충분히 시도해 봄직한 미개척의 공간이다. 박진희가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에서 거명한 “역사가로서의 강력한 감상자”는, ‘옛 우리말’이라는 부분적인 분명함의 조건에서 비단 영화사 연구자/영상자료원 직원에게 한정되지 않는 모델이 될 수 있다. 6) 2.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하나의 한국옛날영화감독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소개해보고 싶다. 이만희는 연구사의 첫머리부터 ‘숙명적 운명론자’로 논해지곤 했다. 사람들의 삶에는 조건과 한계가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만희의 주제는 반복되는 노동 혹은 일상의 갑갑함이었다. 이만희 또한 자신의 주제를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다. 그는 1973년 08월 「혼자이기 때문에」라는 짧은 글을 썼다. 이 글은 지금껏 인용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이만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 우리 인간이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 중에서 맨 처음의 감정이나 또는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며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마지막의 감정은 바로 소외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읍내의 극장에서 화려한 상류(上流) 생활을 그린 영화를 보고 어두운 논뚝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시골처녀, 사방 1미터도 채 안되는 공간 속에 하루종일 앉아서 담배를 피는 아주머니,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 잠깐 한눈 팔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개구장이들을 마치 간수처럼 하루종일 지켜야 하는 어머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기묘하게 폭발하고 말듯이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 사이에 끼어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턱을 고이고 앉아 있는 여대생, 장성한 자식들과 출세한 남편은 제 볼일로 각기 바빠 값비싼 장신구와 함께 버려져 있는 중년부인… 등등, 여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지식 수준이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어디선가 남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며 쭉쭉 뻗어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이 아무 변화 없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날로 퇴보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 나로서 가장 관심이 깊은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이 소외감이다. 영화를 통해서 나는 인간들이 그 소외감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처리해 가는가를 그리려고 애써 왔다. 그러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소외감 그 자체는 명백한 인간의 조건일 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서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자기의 소외감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해소시키려 할 때 무리가 생기고 악이 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그래야만 우리는 훼진 운동화를 신고도 남루한 옷을 입고도 아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며 번화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이다. 7) 이 글에서 이만희는 인간 보편의 문제에 가까운 소외를 주목한다. 이만희는 이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일을 제시하지만, 마지막 문단의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이라는 반복은 소외의 극복이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강조―기실 이만희는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과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처럼 반복되는 일에서 소외를 찾고 있다―한다. “훼진 운동화”, “남루한 옷”이 풍기는 쓸쓸한 정서는 극복 불가능한 소외를 강화하는 전략 같이 느껴진다. 이런 글과 그의 영화에서 나는 우거지상 혹은 무표정한 사람으로 이만희를 떠올렸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이 2015년 04월 29일에 facebook에 올린 포스트를 보게 되었다. (https://www.facebook.com/koreanfilmarchive/photos/%EC%B5%9C%EA%B7%BC%EC%97%90-%EC%98%81%ED%99%94%EB%B0%B0%EC%9A%B0-%EB%AC%B8%EC%88%99%EB%8B%98%EC%9D%B4-%EC%83%88%EC%82%BC-%EC%A3%BC%EB%AA%A9%EF%BF%BD/797165160399351/) 이 포스트에는 멋진 사진이 있었다. (사진에는 1974년 여름 〈 삼포 가는 길 〉 촬영장이라 적혀 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문숙과 이만희가 처음으로 작업을 함께 한 〈 태양 닮은 소녀 〉의 촬영장이 분명하다.) 급하게 촬영한 것처럼 초점은 흔들려 있고, 초점이 맞지는 않지만 사진 속의 이만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웃음이 낯설었고, 좋았다.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고 궁금했다. 혹시 이만희는 일상의 갑갑함이나 소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랑을 찾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정말 그랬던 것 같았다. 비록 앞서 길게 인용한 「혼자이기 때문에」처럼 이만희가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이만희의 경력에서 사랑은 하나의 주제를 이뤘다. 먼저 14년의 짧은 경력 동안 이만희는 무려 5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을 실천하듯 이만희의 영화 제작 소식은 그의 활동 기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만희는 사랑을 했다. 감독 데뷔 시점부터 사실혼 상태였던 이만희는 1966년 〈 만추 〉의 배우 문정숙과 연애를 했고, 1974년의 시점에서는 배우 문숙과 연애를 했다. 1975년 4월 13일 이만희의 사망 이후에도 신문·잡지에는 이만희의 연인들의 말이 널리 보도되었다. 영화배우인 이혜영이 그의 아버지 이만희를 추억하는 글에 붙인 제목처럼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인용자-이만희),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8) 그런데 이만희의 이 편력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여성 편력이 (특히 당사자 여성에게) 통념상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희와 시간을 함께 보낸 여성들은 그와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만희의 두 번째 아내 9) 인 오흥순은 이만희와 결별 후에도 “그이와의 7년간의 결혼생활이 내게는 너무 아름다운 추억”이었기에 오랜 기간 재혼을 하지 않았다. 10) 문정숙 또한 이만희가 죽은 후에도 “「만추」(이만희와 함께 촬영한 영화의 제목-인용자)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매해 가을 “낙엽속에서 그의 숨소리와 뜨거운 「영상의 혼」을 발견”하곤 했다. 11) 그의 마지막 연인인 문숙 또한 2007년 한 권의 책 마지막 한해를 통해 이만희와의 사랑을 추억했다. 12) 이만희는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랑을 참 열심히 그리고 잘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학부 때였나?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사랑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사랑에 목을 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대학생이 조심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그 교수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목맬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복된 일이다. 사랑이 끝난다고 해서 그 복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준다. 소외를 말한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 옆에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사료/정보로부터 우리는 이만희 영화에서 무엇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영달과 정은 백화를 떠나 삼포로 향한다. 이만희는 떠나는 영달과 정의 얼굴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일상적 삶의 프로젝트에서 상상되지 않는 백화라는 존재를 담을 수 없는 그들을 이만희는 화면에서 추방시켜 버린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 개발의 증표로 ‘삼포’라는 가짜-외부가 영화에 삽입된 것이 나는 참 슬프다.) 이미 정해진 원고 매수는 넘었고, 나는 무엇보다 당신이 이러한 정보들을 참조하며 (아마 그의 가장 언급되지 않은 영화 중 한 편인) 〈태양 닮은 소녀〉(이만희, 1974)를 보길 바란다. 이 영화에는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일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어떤 의미로 배치된 걸까? 나는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을 만나 활짝 웃는 걸 떠올린다. 그리고 찰칵!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이 남은 것에 대해서도. *** 1) 임재철,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세계영화사 강의: 초기영화에서 아시아 뉴웨이브까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123-151쪽 참조. 2) 김홍준, 「한국의 고전영화 읽기―사실적 재현, 장르, 스타일, 공간의 구축」, (영화감독 10인의) 연출 수업 1,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 2012, 98-99쪽. 3) 임재철, 한승희, 「영원한 구경꾼: 임재철」, 필름 2.0, 290호, 2006.07. 74쪽. 4) 김홍준, 정성일, 박은영 정리,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5] - 영화광·에필로그」, 씨네 21, 2001.02.22. http://m.cine21.com/news/view/?mag_id=573(2023.06.18. 확인) 5) 미국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편, 브라질의 영화평론가 Filipe Furtado는 이렇게 트윗한 적 있다. “누구나 자국 영화에 애증 관계를 갖습니다. 다만 미국인들은 자국 영화를 기본값으로 보는 데 너무 익숙해서 애초에 그것을 ‘자국 영화’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https://twitter.com/filipefurtado/status/1172522298093506560) 6) 박진희,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 마테리알 7호 https://ma-te-ri-al.online/archive/641 7) 이만희, 「혼자이기 때문에」, 샘터 4권 8호, 샘터사, 1973.08. 30-31쪽. 8) 이혜영,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여성동아 185호, 1983.02. 9) 이혜영에 의하면 이만희는 55년에 한 번 결혼을 한 후 바로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난 것이 오흥순이다. 이혜영은 오흥순이 “극예술협회라는 극단에 들어가셨어요.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구요.”라고 구술한 바 있다. (이혜영, 「이만희를 말하다」, 영화천재 이만희, 한국영상자료원, 2006, 258쪽) 이와 달리 오흥순은 이만희와 그가 처음 만난 것이 ‘서울문화학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오흥순과 이만희는 각각 ‘서울문화학원’에 배우와 연출이 되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오흥순, 「사랑이 머물다 간 세월」, 아리랑 21권 8호, 아리랑사, 1975.08. 172쪽.) 서울문화학원의 한국연극학회가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공연한 것은 1955년 11월이다. (「全國大學演劇 콩클 作品은 「푸른聖人」」, 경향신문, 1955.11.06.」)이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극예술협의회(劇藝術協議會)’ 주최로 1956년 06월이다. 오흥순이 출연한 기록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劇藝術協議會 創立 公演」(경향신문, 1956.06.0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천재 이만희 15쪽에 실린 ‘57년 공연장에서’라는 사진 또한 1956년 공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이 공연에는 이만희가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김승호도 출연했다. 10) 오흥순, 위의 글, 174쪽. 11) 문정숙, 「그 만추의 못잊을 사랑」, 여성동아 185호, 동아일보사, 1983.02. 236쪽. 12) 문숙, 마지막 한해, 창비, 2007.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2015년 최초의 지역 독립영화전용관이 개관하다 2015년 2월 11일 개관한 대구 오오극장은 대구 지역 최초, 그리고 유일의 독립영화 전용관이다. 2012년 12월, 대구민예총이 주최한 ‘자급자족 자립예술 세미나: 대구의 결핍’ 모임을 기점으로 독립영화 전용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2013년 11월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설립추진모임을 1차로 실시했으나 예산 확보 등의 어려움으로 실패, 2014년 10월 2차 설립추진모임을 통해 본격적인 개관 준비에 들어갔다. 주체는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대구민예총, 미디어핀다 3개 조직이다. 추진단체가 예산을 일부 분담하고, 개인 차입, 일반 시민 모금, 좌석 판매 등을 통해 설립 예산을 마련했다. 2015년 7월,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으로 조직을 전환하는 첫 설립 총회를 갖고(발기인 5명, 조합원 13명), 8월에 설립 신고를 마쳤다. 개관 6개월 차인 2015년 8월 첫 관객 프로그래머 모집을 실시해 ‘커뮤니티시네마’, ‘모두의 영화관’을 가치로 하는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만의 고유한 프로그래밍이 시작되었다. 영리추구보다는 문화적 다양성과 그 저변을 확대하는 공공 영화관의 성격을 지향하는 오오극장은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원들이 직접 운영하는 극장이라는 점에서 극장의 연혁을 조합의 활동과 나란히 살펴보아야 하는 곳이다. 2016년부터 < 수성못 >(유지영), < 나만 없는 집 >(김현정), < 혜영 >(김용삼), < 맥북이면 다 되지요 >(장병기) 등 대구독립영화를 만든 젊은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짐에 따라, 지역영화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단체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조합원들은 최초 설립 목적에 걸맞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서의 조직 전환 필요성을 느끼고 2017년 2월 28일 서성희 이사장 취임 이후 협동조합 변경 신고를 마쳤다. (2018년 11월 14일, 문화체육관광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영화 상영 및 배급, 영상미디어센터 운영 및 미디어교육의 실시, 관련 커뮤니티 공간 및 갤러리 운영 등을 목적으로 하는 조합 방침에 따라 오오극장의 공간은 대구영화학교, 관객 프로그래머들이 주도하는 커뮤니티 시네마 등을 위한 장소로도 운영되고 있다. 소박하고 정겨운 커뮤니티 시네마 통유리로 된 극장 입구 대구 중앙로역을 지나 국채보상로 길에 접어들면 노란색의 큼지막한 숫자 ‘55’가 쓰인 건물이 보인다. 오오극장에 들어서면 “33다방은 11시에 커피로 열어요. 55극장은 23시에 영화로 닫아요”라는 문구가 관객을 반긴다. 1개층, 1개관으로 꾸려진 오오극장은 소박하고 정겨운 분위기로 지역 극장의 묘미를 전한다. 외관이 통유리로 돼 있어 카페 공간, 로비 등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입구 왼편에는 삼삼다방, 입구 정면에서 가장 안쪽에는 상영관이 위치해 있다. 상영관 좌석 수는 총 55석으로, 좌석수에 맞춰 극장 이름을 딴 경우다. 작은 좌석 수에도 불구, 앞줄 4개 좌석은 휠체어 좌석으로 마련했다. 휠체어 이동의 편의를 위해 극장 입구부터 상영관까지 문턱을 최대한 낮췄으며 화장실의 문 역시 미닫이로 설치했다. 코로나19 팬데믹 휴관 직전까지 상영관 입구 왼편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DVD 시청각실을 운영(2석), 오오극장 멤버십에 가입한 회원에 한해 극장 로비 서가의 DVD를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로비 공간의 DVD는 시민 기증, 대구영상미디어센터의 자료들을 합한 것으로 역시 오오극장 회원이라면 2주 간 대여가 가능하다. 매년 진행하는 <대구 독립영화 연말 정산>과 <오오극장 관객 프로그래머 영화제>가 오오극장이 지속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2월 20일 휴관에 돌입해 4월 30일에 영업을 재개한 오오극장은 2022년 5월 현재, 운영난 타개와 시설 보수 등을 위해 상영관 리모델링 또는 이전 여부를 검토 중이다. 상영관 입구 로비 전경(좌측이 매표대 겸 카페 매대, 우측이 DVD 전시대 대구 문화의 중심지에 위치한 극장 오오극장이 자리한 곳은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2동 경상감영 일원으로 중구의 중심부인 반월당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인 대구역, 도시철도로는 1호선 대구역, 2호선 반월당역, 3호선 달성공원역을 통해 접근이 용이하며 대구광역시 중심부의 주요 도로인 중앙대로, 서성로, 국채보상로, 북성로에 둘러싸인 형태이다. 국채보상로 길을 걷다 보면 노란색의 큼지막한 숫자 ‘55’가 쓰인 건물이 보인다. 대로변에서 오오극장을 등지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내 2동에 자리한 110년 역사의 종로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담벼락을 따라 북성 문화마을길이 조성되어 있다. 대구 읍성의 옛 모습과 근대역사의 흔적을 살린 이 곳에는 대구에서 활동한 화가 이인성, 지휘자 박태준,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 최제우를 소개하는 팻말들을 줄지어 서 있다. 종로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에 오오극장, 무궁화백화점, 북성로 공구골목 등이 위치한 모양새다. 오오극장 바로 뒤편에 자리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대구 근대역사관 등도 중구의 주요 문화시설이며, 무궁화백화점과 중앙상가를 비롯한 대구 주요 상권과도 닿아있다. 오오극장과 약 100m 거리에 위치한 롯데시네마 프리미엄 만경관은 1922년 개관해 2018년 폐관한 대구 향토 극장 만경관이 롯데시네마와 제휴를 맺고 최신 영화관으로 탈바꿈한 시설이다. 과거 만경관, 한일극장 등과 함께 형성된 영화관 거리에 위치한 오오극장의 입지는 대구 문화가 발전한 중심지에 자리해 역사적 가치가 높다. 오오극장 주변 북성 문화마을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41919)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537, 1층 2. 설립일: 2015년 2월 11일 3. 대표자: 서성희 4. 규모: 230.00m² / 상영관 크기(가로 7.60m, 세로 9.00m, 높이 3.75m) / 스크린 크기(가로 5.50m, 세로 2.30m) 5. 극장 구성: 1관, 55석 (51석+휠체어석 4석) 6. 운영시간: 10:00 ~ 22:00 (시간표에 따라 유동적) 7. 입장료: 일반 8,000원 경로, 청소년, 장애인, 멤버십 7,000원 8. 조직 구성: 사무국 (사무국장, 사무국원), 프로그래머, 홍보팀장, 재무팀장(5인) 9. 공간 구성 - 상영관 1개관 - 삼삼다방: 커피 및 음료 판매, 20석 - 갤러리 삼삼다방: 전시공간, 카페 벽면을 갤러리로 활용 지역 예술인의 작품 상시 전시 - 장애인 시설 구비: 휠체어석 4석, 휠체어 진입로 및 통로, 장애인 화장실 인터뷰: 한종해 사무국장 한종해 사무국장 김소미 _오오극장은 대구 최초, 그리고 유일의 독립영화 전용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영화관을 열기까지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한종해 _대구 지역에 기반한 독립영화인과 시민들이 뜻을 모아 개관한 것이 2015년 2월 11일이에요. 대구의 예술인, 영화 운동 단체들이 모여 포럼을 가졌는데 독립영화 전용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죠. 대구의 여러 가지 영화적인 흐름을 이끌고 성장시켜갈 수 있는 거점이 되기를 바라며 2년 반 정도 준비 끝에 2015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인디스페이스를 청사진으로 생각하며 준비했어요. 어떻게 보면 인디스페이스와 같이 독립영화전용관들이 정부 지원사업을 통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운영에 성공하는 사례를 믿고 시작한 것인데, 박근혜 정부 들어 독립영화전용관 운영 지원 사업이 원활하게 이러우지지 않아 개관 직후 굉장히 힘든 시기를 3년 정도 보냈습니다. 김소미 _55석 좌석의 이름을 따서 오오극장이란 작명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좌석수를 55석으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한종해 _시민 모금을 받긴 했지만 자금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상영관 안 좌석도 서울의 다른 극장을 통해 지원받은 것이고요. 그렇다 보니 원하는 수량만큼 좌석을 확보하기는 어려웠어요. 상영관을 만들만한 층고 높은 건물을 찾다가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았는데, 최대한 많은 좌석을 넣는다고 했을 때 딱 55석이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랜 회의를 거쳐 극장 이름을 55개 좌석 수에 맞춰 '오오극장'이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가장 환영받았습니다. 오오극장 상영관 내부 김소미 _사무국장님은 대구 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의 사무국장이기도 하신데요. 오오극장의 조직 체계는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지요. 한종해 _크게는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의 조직 체계 내에서 오오극장이 하나의 사업장 역할을 하고 있지요. 조합의 사무국장인 제가 오오극장의 사무국장도 맡고 있고요. 그 외에 사무국원, 프로그래머와 홍보팀장, 그리고 재무팀장 각 1인으로 이루어진 조직입니다. 현재 총 5명이에요. 원래는 저와 김창완 프로그래머, 노혜진 홍보팀장, 이아름 재무팀장까지 4명이서 운영했는데 최근 여러 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해 사무국원을 충원했습니다. 김소미 _대로변 1층에 극장이 자리 잡고 있어 로비에 있는 삼삼카페를 따로 찾는 손님들도 있을 것 같네요. 극장 개관 당시부터 카페 운영을 계획하셨나요? 한종해 _워낙 작은 극장이라 극장만으로는 수입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극장 설립 추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 카페 운영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름도 오오극장과 운을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았지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삼삼오오 같이 찾는 극장으로 의미를 부여해보면 좋겠더라고요. 김소미 _1개층, 1개관으로 아담하고 소박한 공간입니다. 공간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다고 보시나요? 한종해 _멀티플렉스와는 다르게 로비 공간이 좀 더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지요. 팬데믹 이전에는 감독님들, 그리고 지역 영화인들이 회의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친밀도가 우리 오오극장의 장점인데 코로나19를 겪으며 관객의 발길이 줄어들어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김소미 _극장의 세부 요소를 소개해주신다면요. 한종해 _작지만 내실이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장애인 시설은 필요하다는 목표가 애초부터 확고했습니다. 지원 사업을 통해 화장실, 진입로 등에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도록 공사를 했어요. 어쩌면 당연한 거지만, 그럼에도 없는 극장들이 많아서 오오극장 개관 초기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꼈지요. 또 오오극장을 찾는 시민, 각종 단체들로부터 중고 DVD와 책 등을 기증받아 로비 서가에 진열해두었는데요. 비치된 DVD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세요. 지금은 팬데믹 이후 폐쇄한 상태지만, 원래 상영관 옆에 따로 작은 간이 시청각실을 운영하기도 했죠. 중형 텔레비전 하나와 좌석 두 개가 있는 방인데, 미리 신청해 서가의 DVD를 볼 수 있도록 운영했습니다. 로비 입구 DVD 전시 코너 김소미 _극장 운영 외에도 로컬시네마의 증진을 위해 오오극장 운영진들이 힘 쏟는 사업이 있을까요. 한종해 _대구시로부터 대구영상미디어센터의 운영을 위탁받았습니다. 오오극장 설립 초창기부터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산업적 측면에서 대구 로컬시네마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었어요. 우선 일거리가 주어져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계속 발굴이 되어야 하고, 대구에서 찍은 영화로 성과를 거둬 전국적인 감독이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지요. 그러려면 후배 양성이 필요합니다. 대구는 대학 영화학과가 단 한 곳도 없어요. 공식적인 영화 교육 채널이 없는 도시여서 바로 그 부분을 메울 수 있는 교육 기관과 미디어센터의 존재에 현재 많은 영화인들이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대구영화학교를 비롯한 관련 사업을 준비 중인 이유입니다. 또 독립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대구 지역 영화를 체계적으로 배급할 배급 기관과 체계의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고 있더라고요. 조합 차원에서 배급팀을 운영할 수 있을지, 우리의 역할도 새로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김소미 _중앙로역을 지나 극장까지 걸어오면서 동네가 주는 고즈넉한 인상에 반했습니다. 오오극장의 위치에 있어 지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한종해 _중구는 그야말로 대구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동네를 돌아보면 조선시대 말부터 구한말 일제강점기, 그리고 산업화 시대의 유산들이 모두 모여있고, 그건 극장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오오극장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반경 1km 내에 대구 영화의 역사가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쉬운 것은 개발 과정에서 과거 영화관의 흔적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에요. 이런 부분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터라, 대구시 관계자, 문화예술 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대구 영화의 거리를 조성하고 싶다는 생각을 알리고 있어요. 보존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낍니다. 김소미 _코로나19 펜데믹으로 휴관 이후 경영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오오극장을 지키고 계십니까. 한종해 _영리추구를 위한 극장이 아닌 만큼 독립영화 전용관의 중요성을 굳건히 믿으며 버팁니다. 누구나 제일 처음 영화를 찍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만들게 되는 것이 독립영화일 수밖에 없잖습니까. 독립영화들이 지원을 통해서 풍성한 양분을 얻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영화도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오극장은 물론, 독립영화 전용관이 전국 각지에 더 세분화되어 존재하길 바라고, 극장이 지역 영화 운동의 구심점이 되길 바랍니다. 인터뷰: 김창완 프로그래머 김창완 프로그래머 김소미 _오오극장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창완 _대구 지역 최초로 만들어진 독립영화 전용관이고, 올해 7년 차를 맞이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국 독립영화 개봉작을 주로 상영하고, 대구 지역의 로컬시네마 상영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습니다. 김소미 _극장 이름, 카페명에 이어 이제는 극장 마스코트로 자리잡은 길고양이의 이름도 범상치 않네요. 어떻게 '오우삼'과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김창완 _창문 밖에서 울던 고양이였어요. 직원들이 음식을 주면 들어와서 먹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여기 머물며 계속 살게 되었죠. 처음엔 오오극장, 삼삼카페의 이름을 따서 오삼이라고 하다가 오우삼 감독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김소미 _오오극장 주변은 동성로 번화가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가 유구한 곳입니다. 김창완 _동성로 일대에 형성된 대구 최대의 중심가와 가까우면서도 살짝 비껴나 있다고 볼 수 있죠. 근대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골목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의 롯데시네마가 들어선 자리는 원래 만경관이라는 오래된 극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지어졌죠. 현재 CGV대구한일점이 된 한일극장도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김소미 _대구 지역 유일의 독립영화 전용관으로서 프로그래머님의 고민과 책임감도 상당할 듯 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프로그래밍을 하시나요. 김창완 _막상 시기별로 한국 독립영화 개봉작이 그리 많지 않아서 제 취향을 발휘할 여력은 적었던 듯 해요. 절대적 편수 자체를 적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상영할 만한 영화의 숫자는 대체로 정해져 있는 식이었거든요. 기획전을 꾸릴 땐 시기적으로 중요한 영화들이 무엇일지 고민하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여성 영화들이 강세를 띠면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고집을 부릴 때가 있었다면 ‘어떤 영화를 틀겠다’ 보다는 ‘이런 영화는 절대 안 틀겠다’ 쪽에 적용되지 않았나 싶네요. 오오극장 영사실과 작업중인 김창완 프로그래머 김소미 _오오극장 개관 기념 특별전, '대구독립영화 연말정산' 기획전을 매년 열고 관객들도 호응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있을까요. 김창완 _관객 프로그램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매달 1번 상영하고, 1년에 한번씩은 꼭 관객 프로그래머들이 선정한 영화들로 영화제를 엽니다. 다른 극장과는 다른 오오극장의 차별점이라고 생각해요. 관객 기자단은 있지만, 저희처럼 관객 프로그래머가 직접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영화제를 만들게끔 유도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희는 이것이야말로 커뮤니티시네마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관객 프로그래머 영화제 중 <내 배우 영업전>은 제게도 의미있는 기억이에요.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배우들일지라도 주목할 만한 커리어를 가졌다면 초청해서 관객과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김소미 _극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있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김창완 _저희가 '오오극장의 5대 사건'이라 부르는 일들이 있어요.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 나쁜 나라 >(김진열, 2015)가 개봉했을 때 어떤 관객이 55석 전체 티켓을 구매해서 관객들에게 나눔하는 이벤트를 연 적이 있습니다. 오오극장이 전국 최초였고, 이 일을 기점으로 여러 극장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나쁜 나라> 이벤트가 일어났지요. 오오극장은 김태리 배우가 신인 시절 출연했던 독립영화 < 문영 >(김소연, 2017)의 확장판을 가장 먼저 상영한 곳이기도 해요. 새벽부터 줄을 선 김태리 배우의 팬분들로 인해 4회차 상영이 모두 매진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문제적 호러 < 무서운 집 >(양병간, 2015)도 지역 극장 중 최초로 상영했어요. 컬트 영화가 나온다면 앞으로도 적극 상영하려 해요. 컬트 영화는 특히 관객들의 반응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남달리 좋습니다. 1층 로비 유리창에 적힌 관객들의 메모들 김소미 _지난 7년간 직접 경험한 오오극장만의 공간적, 문화적 미덕은 무엇이었나요. 김창완 _솔직히 말해 오오극장은 이른바 '스펙'이 좋지는 않은 극장이에요. 가능한 더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프로그래머로서 미안함도 큽니다. 그럼에도 오오극장만의 장점이 있다면, 만만하고 귀여운, 문턱이 낮은 극장이라는 점이 아닐까요? 일반 극장과 마이크로시네마 사이에 위치한 극장이라고 생각해요. 관객과의 대화로 극장을 찾은 감독, 영화인들이 종종 'GV 행사 중 가장 마음이 편했던 곳이 오오극장'이라고 말씀해주기도 하세요. 무대에 선 영화인과 관객 사이의 밀착성이 남다르기 때문에 다른 극장에선 잘 못했던 이야기도 여기 와선 하게 된다는 거지요. 언제든 문이 열려 있고,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직접 틀거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극장이라는 것도 오오극장만의 색깔 중 하나이고요. 김소미 _오오극장의 미래에 관해 어떤 고민을 갖고 계신가요. 김창완 _개관 후 7년이 지나 재정비할 시점이 왔다고 봐요. 장비들도 교체가 필요한 시점이고요. 리모델링을 할 것이냐, 이사를 갈 것이냐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아요. 그러니 재원 마련이 더욱 절실한 시점입니다. 필자: 김소미(씨네21) 사진촬영: 백종헌 인터뷰 일자: 2022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