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눈
- 감독
- 총 킷 옹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만방, 채보주, 렉슨 쳉, 피터 위, 폴린 탄
< 오월의 눈 >(Snow in Midsummer)은 말레이시아 총 킷 옹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섹션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던 단편이자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5.13 사건을 다뤘던 <장중한 무덤>(Cemetery of Courtesy)을 장편 프로젝트로 확장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올해는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성취한 아시아 영화들이 많았던 해로 평가할 수 있는데, 특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 호랑이 소녀 >(Tiger Stripes)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신인감독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오월의 눈>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중화권 지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만금마장 영화제 두 편의 개막작 중 한 편으로 선정되었으며, 총 9개 부문 후보지명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오월의 눈>은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으로 협업해 완성한 영화다. 말레이시아 출신이 대만으로 이주해 창작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차이밍량 감독과 호 위 딩 감독이 대표적이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수의 말레이시아 젊은 창작자나 감독지망생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는 여러 배경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식 문화와 언어, 생활을 유지해온 화교 문화권이라는 공통기반이 있어서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대만으로 이주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가는 라우 켁 후앗 감독은 1950년대 말레이시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다룬 <무단 외출>(Absent without Leave)과 <오월의 눈>의 주요 소재인 말레이시아 5.13 사건을 다룬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The Tree Remembers), 그리고 대만인과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충돌하자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유혈진압을 자행해 3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대만 2. 28 사건을 다룬 <야생 토마토의 맛>(Taste of Wild Tomato) 등을 통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성하고 영화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한 <오월의 눈>은 최근 몇년간 도드라진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동남아시아국가들의 공동협업이라는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베트남 출신의 팜 티엔 안 감독의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Inside the Yellow Cocoon Shell)은 베트남, 싱가포르, 프랑스, 스페인 등이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는데, 감독의 전작이자 단편인 < 정신차려 >(Stay Awake, Be Ready)가 201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단편경쟁에서 주목 받으면서, 싱가포르 젊은 프로듀서와 의기투합해 장편 프로젝트로 개발했고, 이후 유럽에서 주요 펀딩을 받으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밟았다. 비슷한 예시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지만 자국인 말레이시아에서 개봉 당시 일부 장면이 삭제되며 검열논란을 일으켰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호랑이 소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독일 등 무려 8개 국가가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프로젝트 마켓을 통해 주목을 모았던 장편 프로젝트들이 대체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공동제작의 형태로 개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몇 년간 이러한 경향이 더욱 도드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공동제작 프로젝트에 대만 영화기관과 펀딩이 주요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파트너십과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독립예술영화계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오월의 눈>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와 중국계 이주민(주로 중국남부에서 이동해온 호키엔족)이 충돌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5. 13.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계 이주민들로 연결되는 복잡다단한 말레이 반도의 역사를 단박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화교의 숫자가 많았던 싱가포르를 억지로 독립시켰고,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던 중국인과 인도계에 대한 차별과 분리가 이어지던 1960년대의 말레이시아는 민족주의의 발흥과 인종 차별,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폭발 직전의 인종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는 1969년 말레이시아 세번째 총선거 이후 3일째가 되던 5월 13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인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거리에 나서면서 이에 자극 받은 말레이계와 충돌하면서부터다. <오월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중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고전 희곡인 관한경의 『두아원(竇娥寃)』에서 왔다. 『두아원』은 하늘에 사무치는 두아의 원한, 이라는 뜻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이 베어지는 참형을 당한 두아(영어로는 Dou E)가 처형 직전, 내가 죄가 없다면 초여름에 눈이 내리고 가뭄이 들 거라고 외치고 처형을 당했는데, 실제 그녀의 예언대로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 재조사에 나서 그녀를 음해한 사람들을 처형한다는 스토리를 지닌 일종의 잡극.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소개되며 모든 연령대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13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당시 지배계층의 착취와 혼란스런 정치로 인해 고통 받던 민중들의 현실과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극이었으며,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경우를 당하는 민중에 대한 메타포로 종종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어제목으로는 『The Injustice to You E』 또는 『Snow in June』로 번역되었는데, <유월의 눈>을 차용해 <오월의 눈>으로 제목을 지은 것은 감독의 명확한 의도가 읽혀지는 지점이다. <오월의 눈>은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챕터는 1969년 5월 13일, 당시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중국오페라 거리극 <유월의 눈> 공연을 준비하는 극단 사람들과 두 아이를 가진 중국인 부부의 하루를 따라가며 그날, 중국인 거주지역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두 번째 챕터는 2018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14번째 총선거 이후 4일째가 되는 날 시작하는데, 이 총선거를 통해 말레이시아에서는 61년 만에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1969년 5월 13일 당시, 살아남은 아 엥은 신문기사를 통해 5.13 사건 희생자들의 집단매장지로 추정되는 공동묘지터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50년만에 아빠와 동생이 묻혀있을 수도 있는 매장지를 찾는다. 영화는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지지만, 두 개의 챕터를 연결하는 역할은 거리극 <유월의 눈>의 주인공인 “두이 Dou E”가 맡는다. 중국인 거주지역에서 거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의 주연배우인 두이는 첫 번째 챕터에서는 마제스틱 극장 지붕에서 유혈현장을 바라보며 위무의 노래를 부르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집단매장지에서 죽은 자들과 무명묘를 위해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첫번째 챕터는 역사서에 기록된 문장에서 시작한다. “말레이 연대기 The Malay Annals”에는 “왕의 한센병은 감히 말라카 술탄에게 탄원서를 보낸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선 술탄의 발을 씻은 물을 마셔야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주요한 영화적 상상으로 재연된다.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딸을 데리러 온 엄마는 버스를 타고 아빠 아쿠와 아들이 있는 신사로 향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을 위해 Datuk Gong (말레이와 중국의 신이 혼재된 형태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부부. 아빠는 인근 마제스틱 극장 티켓 2장을 구했다며 아들과 극장으로 향하고, 엄마는 딸과 함께 거리극 <유월의 눈>을 관람한다. 당시 마제스틱 극장에는 대만영화 <부심적인 負心的人>(The Jilted)이 상영중이었는데, 상영 전 광고로 보여지는 차기 개봉작은 말레이시아 영화 <송곳니를 가진 왕>(Raja Bersiong, The King with Fangs)인데,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민담을 영화화한 것으로, 우연하게 음식에 들어간 피맛을 본 왕이 그 맛에 취해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되면서 민중들을 학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방화와 살인이 시작되고, 엄마와 딸은 극단원을 따라 무대 뒤 공간으로 숨어들지만, 외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피하지 못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살육당하고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영화의 두번째 챕터. 2018년 5월 13일. 당시 엄마와 함께 살아남은 아엥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남편의 구박에도 무기력하고 지쳐보인다. 오랫동안 아빠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다녔지만, 그동안 엄마는 죽었고, 아무 기록도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아 엥은 무력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 5. 13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집단 매장지가 재개발된다는 기사를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쿠알라룸푸르로 향한다. 당시 중국인 집단거주지역이었던 푸두 Pudu는 이제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심으로 변했지만 마제스틱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어려서 다녔던 초등학교 옆 가게에서 차를 마시는 아엥은 옆 자리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공연에 늦었다며 재촉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 뒤로 남아 있는 낡은 신사에는 버려진 두리안 껍질들과 쓰러진 작은 불상들이 있다. 택시를 타고 숭가이 불로에 있는 지역 집단 매장지로 향하는 아엥에게 택시기사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도착한 아엥은 그곳에서 아까 가게에서 만났던 무리들이 무덤 주변에 공연을 위한 무대를 설치하려 하지만, 공무원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말리자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두이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시대를 구분하여 두 개로 나눠진 영화의 구조는 완전히 다른 양식과 형식미를 보여준다. 학살의 순간, 극장 공간 안과밖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던 한 가족의 비극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우아한 움직임과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키는 낮은 앵글, 그리고 형식미를 강조한 미장센은 일본과 대만의 고전영화로부터 받은 영화적 유산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여러 지점에서 허샤오시엔 감독의 < 비정성시 >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거리극의 공연장면을 삽입하고 거리극과 현실 사건의 스토리를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방식과, 코끼리를 탄 말라카 술탄이 등장하는 장면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마술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이를 다루는 신인 답지 않은 영화적 야심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2018년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챕터는 동남아시아 예술영화의 전통과 특징들이 묻어나는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아엥의 무료한 일상과 지근거리에 있는 신사의 존재, 그리고 산 사람인지 영혼들인지 불문명한 사람들이 등장해 도시를 지나 집단매장지에 이르는 동안, 카메라는 유령을 쫓듯 계속 흔들리고 유동하듯 움직인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실체. 남은 기록이라곤 증언과 기억밖에 없는 그날의 진실을 매년 5월 13일이 되면 집단매장지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빼어난 사운드로 그날의 현장을 영화적으로 복원해낸 감독의 뚝심과 용기에 찬사를.
부산에는 1900년 이전부터 극장이 존재했다. 1900년대~1910년대에는 행좌, 송정좌, 변천좌, 부산좌, 동양좌(이후 대흑좌[大黑座]),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량좌, 행관, 상생관 등 여러 곳에 극장이 난립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활동사진관을 중심으로 극장이 정리, 재편되었다. 해방 전까지 존속하고 있던 극장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극장과 영화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① 행좌(幸座), 행관(幸館), 소화관(昭和館) 행좌(幸座)는 부산 남빈정에 있던 극장이다. 1903년 발행된 「부산항시가 및 부근 지도」에 송정좌(松井座)와 더불어 그 위치가 표기되어 부산 지역의 가장 오랜 극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04년, 부산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한 이 극장은 1910년대 들어 활동사진이 큰 인기를 끌면서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신축되는데 그 이름을 행관(幸館)이라 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부산의 일본인 실력자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였다. 1915년 12월 개관한 행관은 비슷한 시기 활동사진전용관으로 전환한 보래관이나 상생관에 밀려 고전했다. 하지만 1917년 하야가와연예부가 직영하고 이어 1919년부터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萬活)에서 직영하면서 부산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만카츠 특파원으로 부산으로 건너왔다가 이후 행관을 운영하게 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행관을 중심으로 일본의 중소프로덕션의 영화를 배급하면서 조선흥행계에 큰 주목받았다. 하지만 행관은 개관 15년 만인 1930년 11월 10일, 영화 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큰 피해를 입은 사쿠라바 후지오는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영화관인 소화관(昭和館)을 지어 사업을 확장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이며 1,0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 이름을 조선극장으로 바꾸었다. ② 부산좌(釜山座) 1907년 7월 15일 부평정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부산의 대표적 실력자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일본인 유지들이 만든 부산연극합명회사에서 설립했다. 개관 당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극장으로, 회전무대를 갖춘 최신의 설비를 갖추었으며 다양한 공연은 물론 활동사진도 상영되었다. 1923년 3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③ 보래관(寶來館) 1914년 무렵 부산부 행정에 개관한 극장이다. 개관 초기에는 라쿠고(落語)와 같은 연희를 공연하는 요세(寄席)로 활용되었으며 흥행일수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월 운영자가 고노(小野)에서 호소미(細見)로 바뀌면서 연중무휴의 흥행을 천명했고, 그해 3월 경성의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텐카츠회사의 필름을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이용되었다. 1916년 12월 27일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었고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스기모토(杉木)상회가 직영하게 된다. 1924년 무렵에는 오카모토(岡本松造)가 운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1930년 10월 8일에는 영화상영 도중 필름에 불이 붙어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37년 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고 1938년 10월 다시 신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 지배인은 이와사키 모모타로(岩崎桃二郞)이다. 객석수는 총 952석이었다. 해방 후 국제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④ 변천좌(辨天座), 상생관(相生舘) 변천좌는 1912년 무렵 부산부 본정에 들어선 요세(寄席)이다. 1914년 무렵 좌주는 교야마(京山花丸)였다. 활동사진의 인기가 비등하면서 변천좌는 활동사진관으로 개축을 꾀한다. 1916년 11월 1일 활동사진관 개업을 하면서 이름을 상생관으로 바꾸었다. 개관 초기 닛카츠영화를 상영하던 상생관은 1922년부터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 쇼치쿠와 공동경영을 시작하며 쇼치쿠 만선(滿鮮) 봉절장이 되었다. 이에 맞춰 당시 관주인 아라이(新井幸吉)는 극장 개축을 추진하여 2개월의 공사 끝에 1925년 11월 15일 새롭게 개관하게 된다. 1933년 11월 무렵 상생관의 관주는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이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 역시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 지배인은 미쯔오 타다오(滿生忠雄)이었다. 좌석수는 총 80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사진] 변천좌에서 이름을 바꾼 상생관 ⑤ 국제관(國際館) 부산부 안본정(岸本町)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1920년 8월 22일 자본금 20만원, 불입금 13만원의 주식회사 국제관에서 설립했다. 대표는 기노시타 모도지로(木下元次郞)이다. 설립 당시 부산지역의 가장 호화로운 극장이었기에 영화상영 외에도 연극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부산에서 조선영화가 주로 상영되던 곳이다. 1929년 2월 27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⑥ 유락관(遊樂館) 부산부 좌천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7,500원 규모로, 부산흥산주식회사가 1921년 12월 11일 세웠다. 대표는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였다. 1932년 1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태평관(太平館) 부산부 행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으로 1922년 설립되었다. 1923년 부산좌가 소실된 이후 부산의 대표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37년 11월 20일 개축되었으나 1943년 11월 19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사진] 부산 태평관 사진 ⑧ 수좌(壽座) 부산부 목도(牧之島, 지금의 영도)에 있던 극장이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3월 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1926년 행관을 경영하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임대하여 제2행관(第二幸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1932년 다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복귀 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미가(富賀四郞)이며 객석은 총 341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중앙극장(中央劇場), 대생좌(大生座) 부산부 초량정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1929년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가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가 출원하여 1만 4천3백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2층 규모로 만들었다. 같은 해 7월 22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중앙극장은 당대 유명 사기꾼인 호리가와(堀川辰吉郎)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1934년 경매에 붙여졌으며 상생관 흥행주 미쯔오(滿生峯次郞)가 낙찰 받아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원 중앙극장 소유주 가나모리가 소유권 이전 말소 소송에서 승소하며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대생좌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일본인 극장이던 이곳에서는 1939년 5월 극연좌가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시타(杉下末次郞)이며 총 498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⑩ 부산극장(釜山劇場) 부산부 서정(西町) 1정목에 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5일 개관했다. 가부키를 공연할 수 있는 대극장으로 건축되었다. 연극전용극장이었지만 가끔씩 영화도 상영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영화관으로 활용되었다. [사진] 부산부 서정 1정목에 위치했던 부산극장 ⑪ 대화극장(大和劇場) 부산부 수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42년 건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조(西條貞利), 지배인은 고야마(小山秀一)이며 객석은 총 5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환서좌(丸西座), 앵관(櫻館) 1910년대 이전부터 마산에 있던 극장으로 각종 연예물과 활동사진이 상연되었다. 1925년 당시 지배인이던 무라카미(村上竹次郞)가 천여원의 비용을 들여 내부와 외부를 수리했다. 1932년 자본금 2만원, 불입금 2만원의 마산연예주식회사가 영화관 신축을 위해 매수하여 1933년 5월 마산 경정 3정목에 앵관이라는 극장을 짓게 된다. 영업은 오오츠카(大塚寅吉)가 맡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미타(住田春三)이며 객석 수는 79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도좌(都座), 마산좌(馬山座), 마산극장(馬山劇場) 마산부 도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0년대 설립된 극장으로 보인다. 1918년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수되었다. 1922년 무렵까지 영화 상영내역이 확인된다. 이후 마산좌(馬山座)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좌는 1932년 개축하면서 그 이름을 마산극장으로 바꾸었다. 혼다(本田槌五郞)가 건립하였다. 1941년 극장 일부를 수리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⑭ 수좌(壽座), 공락관(共樂館) 수좌는 구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1915년 구마산 지역민들이 극장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16년 3천원 예산으로 극장을 세우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여 조선인 70여명, 일본인 43명으로 주주를 구성하였고 1917년 10월 구마산 지역의 수정에 극장을 설립하고 이름을 수좌라 지었다. 1917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사용하던 극장이었다. 하지만 1932년 9월 마산경찰서에서는 장내의 협착, 설비의 부패 등을 이유로 휴관을 명령하고 새로운 극장의 신축 출원을 받았다. 그 결과 마산극장 주인인 혼다(本田槌五郞)가 출원한 극장 설립안이 인가 받아 1935년 구마산 석정 64번지에 공락관이라는 영화관이 만들어진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4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봉래좌(蓬萊座) 통영읍 대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4년 쓰야마(陶山美賀藏)를 중심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설립했다. 1931년에는 하시모토(橋本米吉)가 운영하며 영화관으로 활용했다. 1938년 이후 낙후한 상태로 폐쇄되었던 봉래좌는 1939년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하시모토(橋本公博)이며 50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통영좌(統營座) 통영읍 길야정에 있었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27년 다케타(竹田應吉)가 조합장을 맡고 있었으며 1936년 주주간의 분규로 문을 닫았다. 1937년 봉래좌의 운영자 하시모토가 운영을 맡으며 정상화 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무라카미(村上善藏)이며 48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영좌(榮座) 경남 진주의 매립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14년 6월 24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고야나기(小柳藤介) 등 진주의 유지들이었다. 개관 1년 후 경남지역의 유력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의 땅에 타구치(谷口秀楠)가 부산 행좌를 이전하여 극장을 새로 짓게 되자 활동을 멈췄다. 1917년 해체되었다. ⑱ 진주좌(晋州座), 진주극장(晋州劇場), 동보영화극장(晋州東寶映畵劇場) 1922년 진주부 영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좌조합에서 설립했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진주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6년 2월 서종숙(徐宗淑)이 인수하여 낙후한 극장을 최신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1940년 동보영화사의 직영으로 바뀌어 이름도 진주동보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41년 10월 동보측이 손을 떼면서 서종숙 단독으로 극장을 경영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종숙(창씨명 平山宗淑)이며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삼포관(三浦館) 진주부 금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의 실업가 미우라(三浦仁八)가 1936년 7월 4일 건립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요시(三吉範夫)이며 객석수는 515석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동명극장(東明劇場)으로 바꾸었다. ⑳ 진해좌(鎭海座), 묘락좌(妙樂座) 진해좌는 진해읍 국천정(菊川町)에 있던 극장으로 1915년 이전에 설립되었다. 1930년 3월 진해 창고에서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소학생 백여명이 소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낙후한 시설의 진해좌는 영업 중지 상태가 되었다. 진해좌의 소유주 데즈카(手塚松一)는 극장을 신축하기로 하고 1만원의 경비로 활동사진관을 건설하게 된다. 새롭게 건설된 활동사진관의 이름은 묘락좌(妙樂座)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데즈카이며 4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까지 존속했다. 21. 밀양극장(密陽劇場) 밀양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11월 16일 가나모리(金森新吉)가 밀양역 앞에 설립했다. 1929년 밀양 성내에 조일극장(朝日劇場)이 설립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22. 조일극장(朝日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극장이다. 밀양성내동지회에서 세웠으며 1929년 2월 4일 개관했다. 1939년 3월 밀양의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있었다. 1939년 12월 당시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조일극장 옆에 밀양영화극장을 설립하면서 문을 닫은 듯 보인다. 23. 밀양영화극장(密陽映畫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영화관이다. 1939년 12월 밀양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카미(水上至海)이며 2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4. 삼천포극장(三千浦劇場) 삼천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사천군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1939년 이전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가와(白川晃)이며, 27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5. 구포극장(龜浦劇場) 구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필름손실방지와 사고방지를 위해 전국의 영사기를 조사했을 당시 한 대의 영사기로 영사하여 배급정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흥행주는 하라구치(原口淸見)였다. 293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6. 김해극장(金海劇場) 김해읍 대화정에 있던 극장이다. 1929년 김무일(金武日)과 배봉을(裵鳳乙)이 약 8천원의 공사비로 제작하였다. 건평 51평 2층 규모로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케시(武伺吉恒)이며 4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옛 창고를 연상하는 낙후된 시설이었다. 27. 거창좌(居昌座) 거창읍에 있었으며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전상길(全相吉, 창씨명 酒井相吉)이다. 그는 양조장 등을 거느린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실업인이었다. 지배인은 타마야마(玉山榮秀)이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8. 울산극장(蔚山劇場) 울산읍 성남동에 있던 극장이다. 1920년대 만들어진 낡은 극장이 울산 역전에 있었는데, 당지 유지들인 김재문 외 5인의 발기로 1936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이 추진되었다. 군에서는 1만 5천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극장을 공회당의 성격으로 활용하려 했다. 1937년 9월 1일 낙성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이(白井叶), 지배인은 니시가와(西川康南)였다. 객석은 7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29. 사천극장(泗川劇塲), 국민좌(國民座) 경상남도 사천읍 내에 있는 극장으로 고바야시(小林齊吉)가 1만원의 예산으로 지었다. 1938년 9월 12일 개관했으며 외관은 2층 양옥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1939년 방공영화상영회 등이 열렸다. 1940년대 이름을 국민좌(國民座)로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달오(창씨명 金村達五)이며 객석은 300석이었다. * [사진](상단) 부산부 행정에 위치했던 보래관 [자료] 《매일신보》, 1930.03.01. 중앙극장 신축낙성(洛城), 근일 개관할 터 【부산】 작년 오월 일일 고(故) 대지충조(大池忠助)씨와 밀양 금삼신길(金森新吉)씨가 출원한 부산 초량정 중앙극장은 동년 십일월 이십일일 경비 일만 사천삼백삼십사원으로 공사에 착수하여 신축 중이든 바 일전에 준공되었음으로 당국의 검사가 맛치는데로 근간 개관하리라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7.10. 신축 울산극장, 삼십일경 준공 【울산】 신축 중의 울산극장은 삼십일경 준공케 되야 당일 성대한 낙성식이 잇스리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1.03.23. 방어진(方魚津)극장 전소(全燒) 【부산지사전화】 이십이일 오전 일시경 경남 방어진읍(方魚津邑) 방어진극장으로부터 불이 일어나 목조 극장 한 채를 전소하고 동 이시 반에 진화되었다. 손해는 5만원이고 원인은 전날 밤 객석에서 사용한 화롯불 건사를 잘못하야 화로로부터 이러난 것으로 판명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3.22. 김해에 극장, 불원간(不遠間) 준공(竣工) 경남 김해군에는 아즉 극장설비가 무(無)하야 매양 차종(此種)의 집회가 유(有)한 시(時)는 곤란을 만히 당하야 옴으로 이에 향의(向意)한 당지 청부업자 배봉을(裵鳳乙)군은 읍내 서문통에다 극장 신축을 벌서 수월 전부터 착수하야 공사에 착착 진행하얏슴으로 금후 일주간이면 준공하야 도당국의 검사(檢査)를 경(經)한 후 일반 사용에 제공하겟다하며 건평은 오십일평임으로 이층 합하면 약 구백명의 수용을 행(行)할지며 총공비(總工費)는 팔천원을 요(要)하얏다더라. 【김해】 [자료] 《동아일보》, 1935.08.19. 구(舊)마산에 극장 【마산】 문제 중에 잇든 구마산의 극장 신축의 건에 대하야 오래전부터 부민의 관심을 끌어오든 바 요지음 와서 부내 도정(都町) 팔번지 본전퇴오랑(本田槌五郞)씨에게 극장 신축 인가가 낫다고 한다. 장소는 석정(石町) 육십사번지 전(前) 마산구락부(俱樂部) 폐터라는 바 건평 백이십평에 방화식 대용(防火式 代用) 콩크리트 이층 총공비 지료 합하여 일만 오천원이라 하며 내부는 역시 일본식으로 다다미를 깔고 이층에는 긱연실(喫煙室)까지 설치하리라는데 공사는 오는 이십일에 착수하여 십일월 하순경에 준공하리라고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7.09.07. 울산극장 준공 【울산】 약진하는 울산으로 우금 극장 한 개가 없엇음을 한탄한 당지 유지로 극장조합을 조직하야 금춘 이래 구역전(舊驛前)에다 총공비 이만여원으로 공사에 착수 진행중에 잇던 바 드디어 금번 준공되어 지난 1일 신극장 내에서 관민 다수를 초대하야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는 바 신설된 극장은 내외관 설비가 완전하야 『토-키』 발성기게 등도 대도시 일류 극장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하며 외관에 잇어서도 명랑한 맛이 잇는 모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은 울산극장) [자료] 《동아일보》, 1937.06.30. 의령(宜寧) 공회당 착공 【의령】 경남 의녕에서는 일정한 공중의 집회장소와 또는 극장 등속이 없음을 일반이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오든 중 작년 가을부터 임(林) 의녕군수의 주선 하에 유지 이명후, 이태희, 이종덕(李明厚, 李泰羲, 李鍾德) 삼씨의 의연금이 모집되어 공사비 오천원으로 의녕 신시장통에 의령공회당을 건축케 되어 멀지 안흔 시일에 준공이 되리라는데 해 공회당이 준공되면 의녕 발전에 한층 더 이채를 증가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0.02.05. 밀양성내(城內) 소화(小火) 【밀양】 밀양군 성내 조일극장(密陽郡 城內 朝日劇場) 압 밀양은행 소유 가옥에 잇는 박경모(朴景某)씨의 소실 장씨(張氏)의 부억에서 지난 초이일 오후 열시경에 불이 나서 집 처마위로 타올라가는 것을 그 이웃에서 풍물을 치고 놀든 사십여명이 달려들어 즉시 진화시키엇다는데 그 원인을 듯건대 어린 아이를 시키어 군불을 ᄯᅢ다가 그와 가티 실화된 것이라 한다.
① 표관(飄館) 1915년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인천부 신정(新町) 18번지에 있었다. 영화관을 세운 이는 인천여관을 운영하던 시미즈 슈조(淸水周藏)이다. 개관 당시 황금관을 경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영화관 운영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정관을 소유하던 닛다연예부가 운영권을 인수했으며 뒷날 대정관 소유주 닛다 고이치(新田耕市)가 소유권마저 인수하여 동생인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에게 경영을 맡겼다. 표관은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1937년 한해 관람객이 18만 2640명, 입장료 수입이 48,132원에 달했다. 1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닛다 마타헤이, 지배인은 오오타(太田時雄)였으며 672석의 영화관이었다. 2 해방 후에는 문화관으로 개칭되어 시영으로 운영되다가 한국전쟁 시 소실되었다. ② 애관(愛館) 인천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이다. 1921년 초, 인천부 경정 238번지에 김성근(金成根)이 세웠다. 3 축항사(築港社)의 흥행권을 인수하여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용하가 운영하던 1923년 1월부터는 알렌상회와 계약을 맺고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4 조선인 경영의 영화관으로 조선의 연극과 악극 등도 공연했다. 1926년 애관을 인수한 김윤복(金允福)은 1927년 신축을 결정하고 약 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외관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5 1928년 10월 1일부터 외화 수입사인 기신양행(紀新洋行)이 경영권을 인수하여 직접 운영하였다. 1936년 1년간 약 12만명의 관람자와 28,284원의 입장수익을 얻었으며, 6 1937년에는 1년간 관람자 총 14만 5천명, 43,480원의 입장료 수입을 얻었다. 7 기신양행이 운영하던 애관은 그 흥행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인천키네마를 세운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락우관(樂友館), 인천동보영화극장(仁川東寶映畫劇場),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 1937년 인천부 신정 19번지에 지어진 2층 콘크리트로 형태의 영화관으로 처음 이름은 락우관(樂友館)이었다. 극장을 세운 사람은 당시 애관을 경영하고 있던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였다. 「한국극장사」를 쓴 박노홍에 의하면 표관과 마주한 자리에 애관을 경영하는 미쯔이가 극장을 짓자 표관의 주인 닛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8 1938년 11월 31일부터 도호(東寶)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인천동보영화극장(仁川東寶映畫劇場)으로 바꾸었다. 이후 인천동보영화극장은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로 개칭되었는데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 지배인은 와카야마(若山幸吉)였다. 정원은 370석으로 그리 크지 않은 영화관이었다. 해방 후 적산 처리되었으며 이름을 동방극장으로 바꾸었다. ④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畫劇場) 1942년 7월 5일 개관한 인천의 문화영화 전용관으로 2층 벽돌 건물이었다. 위치는 인천부 용강정 22번지, 지금의 동인천역 앞에 위치했다. 설립자는 인천지역에서 활약하던 일본인 실업가 아오시마(靑島鋪作)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 역시 아오시마, 지배인은 후루카와(古川文道)였다. 해방 후 적산 처리되었으며 보통 인영(仁映)극장이라 불렀다. ⑤ 개성좌(開城座) 개성좌는 1912년 10월 개성부 소로동(小路洞)에 이기세(李基世)와 일본인 토미타((富田重治)가 함께 세운 극장이다. 초기에는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이나 이화단(以和團)과 같은 신파극단의 무대로 활용되었으며 이기세가 세운 유일단(惟一團)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930년 10월 개축된 개성좌에서는, 9 1932년 이동식소형극장의 공연이 계획되기도 했다. 10 1932년부터 최익모, 박철희, 김찬우 등이 맡아 경영하던 개성좌는 1935년 5월 박봉진, 공진태, 김재삼, 백순성, 이우균 등 5인이 3천원씩 내서 총 1만 5천원으로 극장을 인수한 후 발성영화장치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영화 상영에 나섰다. 11 하지만 낡은 시설과 설비는 개성 관객들의 원성을 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시라이(白石誠一)이며 지배인은 고바야시(小林榮)였다. 이들은 창씨를 한 조선인이었다. 해방 당시 개성좌는 560석의 객석을 보유한 개성 유일의 영화관이었다. [자료] 개성좌 개축 피로연예회(《조선신문》, 1930.10.29) ⑥ 풍창관(豊昌館), 수원극장(水原劇場) 수원의 최초의 극장은 1913년 11월 개관한 풍창관(豊昌館)이다. 수원 성내 유지들이 세웠다. 1918년 2월 수원군 기생조합의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기사가 남아 있다. 풍창관이 사라진 후 수원지역에 들어선 극장이 수원극장이다. 수원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 극장은 192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공연과 영화를 상영하던 수원극장은 1933년 10월, 양규룡(梁奎龍)을 대표로 하는 주식회사로 조직을 변경하고 극장을 신축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다(苧田甫), 지배인은 미야모토(宮本日出夫)이며 객석 수는 494석이었다. 해방 이후 까지 존속했다. ⑦ 애원극장(愛園劇場) 경기도 안성읍 석성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6년 안성 유지 박형병(朴衡秉)이 작고한 동생 박항병(朴恒秉)의 별호인 애원(愛園)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지었다. 건축비는 2만원이며 2층 벽돌 건물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형병(창씨명 朴原衡東), 지배인은 나카이(中井一成)였으며 객석 수는 556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다음은 황해도의 극장이다. ⑧ 해주좌(海州座), 해주극장(海州劇場) 해주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해주좌(海州座)로 1913년 무렵 설립되어 10년 정도 운영되었다. 낡고 오래된 해주좌를 대신하여 1925년 10월 31일 해주극장이 만들어졌다. 해주 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4년 10월 24일 신축에 버금갈 정도의 개축을 단행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구치(樋口泰貫), 지배인은 아오야마(靑山)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겸이포좌(兼二浦座), 겸이포극장(兼二浦座) 겸이포읍 본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0년대 초반부터 신문지상에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시야(伏屋三治), 지배인은 기타지마(北島七郞)이며 객석 수는 62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욱좌(旭座), 공락관(共樂館) 사리원 지역에는 1920년대 초반 무렵 욱좌(旭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욱좌가 사라지고 난 이후 사리원에 들어선 극장이 공락관(共樂館)이다. 1932년 5월 개관한 공락관은 야스다(安田靜雄)가 설립했는데, 부지 300평에 건평 140평, 2층 양관 모양으로 영화관 겸 극장으로 건설되었다. 공사비 2만 5천원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 관리인은 이시가와(石川晩得)이었다. 객석 수는 560석이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⑪ 연안극장(延安劇場)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횡정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7년 무렵 연안극장 조합에서 설립했다. 1943년 운영자와 조합간의 갈등으로 조합직영으로 바뀌었다. 조합에서 선정한 대표는 쿠니모토(國本丸農)였다. 객석 수는 560석이었으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수좌(壽座) 황해도 신천읍 교화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신천 유지 박성률(朴聖律)이 1만여원의 비용을 들여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카시마(高島勇), 지배인은 시라가와(白川不二雄)이다. 객석 수는 550석이었다. ⑬ 태평극장(太平劇場) 황해도 안악읍 훈련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3년 안악 유지 박봉서(朴奉瑞)가 7천원의 예산으로 건축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봉서(창씨명 山本奉瑞)이며 객석 수는 456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1. "이제야 채산(採算)맛는 인천의 흥행업계", 《동아일보》, 1938.02.02. 2.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3. " 인천독자위안", 《조선일보》, 1921.04.01. 4. "인천에 상설 애관", 《조선일보》, 1923.03.21. 5. "인천 애관극장 십일에 낙성(落成)", 《매일신보》, 1927.10.14. 6. "영화관출입인원 삽(卅)여만명 돌파", 《동아일보》, 1936.01.11. 7. "이제야 채산맛는 인천의 흥행업계", 《동아일보》, 1938.02.02. 8. 김의경·유인경 편, 『박노홍의 대중연예사 1』, 연극과인간, 2008, 271쪽. 9. "開城座改築披露演藝會", 《朝鮮新聞》, 1930.10.29. 10. "이동식 소형극장 개성서 첫 공연, 오는 이십칠일에", 《중앙일보》, 1932.02.25. 11. "유일한 오락기관 개성좌를 매수", 《중앙일보》, 1935.05.08. [자료] 《매일신보》, 1942.07.02. 인천영극개관(仁川映劇) 개관 인천부 상인천역전(前)에 건축 중이든 인천영화극장(정원 600)은 이번에 준공되어 7월 9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었다. 뉴-스, 문화영화 등 전문관으로 전선에서 제 7번째의 신관이다. [자료] 《매일신보》, 1927.10.14. 인천 애관(愛舘)극장 십일에 낙성(落成) 【인천】 지난 십일에 낙성된 인천극장 『애관(愛館)』은 넉넉히 800명을 수용할만한 우미(優美)한 『루네상스』 식으로 인천 조선인 시가에 일(一) 이채(異彩)를 방(放)하게 되엇스며 내용의 설비도 완비무결(完備無缺)하야 조선 전도(全道) 어느 곳의 그것에 비하여 손색이 무(無)한바 관주 김윤복(金允福) 씨는 공익에 관한 『모됨』에는 무료로 제공할 터이라고 언명하얏다하며 사용료가 태고(太高)한 가무기좌(歌舞伎座)를 사용하다가 실패만 당하든 인천 극계(劇界)로는 동관의 신축으로 새로운 서광을 엇게 되엇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5.05. 인천에 신극장, 금추(今秋)까지 낙성(落成) 【인천】 십여만 인구가 살어잇는 대(大) 인천에 오락기관으로는 조선인으로는 애관(愛館), 내지인으로는 표관(瓢館)의 이개소 ᄲᅮᆫ인데 금번 인천부 신정(新町) 19번지에다가 송전좌시(松田佐市) 씨 경영으로 거(去) 28일 극장 건축 착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얏는데 늦어도 금추에는 준공을 보게 되리라고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4.11.30. 신천(信川) 수좌(壽座) 낙성(落成) 【신천】 신천(信川) 상설극장 수좌(壽座) 공사 준공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간 전반 시설이 완성되엿슴으로 지난 이십육일 락성식을 거행하엿다. [자료] 《매일신보》, 1932.05.29. 사리원 안전(安田)씨가 공락원(共樂館)을 신축, 입일일(卄一日)부터 개업 【사리원】 사리원 대중적 오락기관으로 당지(當地) 안전정웅(安田靜雄)씨는 희생적 봉공(奉公)사업으로 구(舊) 식산은행지점 적(跡)에 영화관 겸 극장 상설 공락관을 신축하야 지난 이십일일 오후 삼시부터 관민 백여명을 초대하여 신축피로연을 거행한 후 동일 오후 육시부터는 가무기(歌舞伎) 중촌리엽(中村鯉葉) 일행 30여명을 초청하여 시즙흥행(柿葺興行)이 잇섯으며 동이십삼일, 이십사일에는 경성에 있는 조선연극사(社) 일류 배우를 청하여 일반에게 개연하얏다. 본 공락관은 안전씨(安田氏)가 전연 영리사업으로 건축한 것이 안이고 지우(知友)의 간망(懇望)으로써 봉사적 신념하에 거대한 공비(工費)를 투자하야 신축하얏다. 차(此) 건물 급(及) 설비의 개요는 여좌(如左) 一, 위치 사리원 본정통(本町通) 二, 공사 소화 육년 십일월 기공, 칠년 오월 준공 三, 구조 ᄲᅡ라벗-도 식 관 이 계(階), 건(建) 일백사십평 四, 공비 이만오천원 五, 설비 영화상설 겸 극장으로 최신식 고급영사기 이대, 시사기 일대, 전기무대 회무대 도구 일식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5.08. 유일한 오락기관 개성좌를 매수, 유지(有志) 오씨(五氏)가 합자(合資)회사를 조직,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성】 부제 실시 후 상수도(上水道), 하수도(下水道) 부설과 시구개정(市區改正) 등의 급속도적 개성부의 토목사업으로 개성의 도시미관(都市美觀)을 향상하고 잇는 신흥도시 개성의 인구(人口)는 5만 이상을 포용하고 전서에서 멧재 안가는 대도시이나 그날그날 각자의 근로한 피로의 위안을 바들만한 곳 즉 오락기관(娛樂機關)이라고는 옥돌장(玉突場) 일개소, 마작(麻雀)구락부 2개소와 개성좌(開城座)라는 극장(劇場) 일개소 밧게는 없어서 항상 부민 일반이 개성좌를 더욱 내용을 충실히 하야가지고 활동사진상설관을 맨든다면 그들의 피로된 정신을 하로 몃시간에 자연의 위안을 밧고 질길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늣겨오든 중 이에 대하여 크게 동감을 일으킨 박봉진(朴鳳鎭), 공진태(孔鎭泰), 김재삼(金在三), 백순성(白順成), 리우균(李雨均) 오(五)씨는 3천원씩 출자하여 1만 5천원의 합자회사(合資會社)로 조직하야가지고 지난 사월 십일 동 극장을 매수하야 전부 수리를 거듭하고 일즉이 개성좌에 설치하지 못하던 (로라) 발성영화활동사진긔(發聲映畵活動寫眞機)를 사천 오백원에 매수하야 오월 일일에 장치하고 시사(試寫)를 행한바 성적이 대단 량호하야 삼일부터 일반 펜에게 공개하고 잇는데 이 긔계는 전선에서도 별로 보지 못하든 최신(로라)긔라 하며 앞으로는 명편의 영화만 특약하야서 공개한다고 하는 바 이로부터 신흥 개성도시도 한 개소의 오락기관일 망정 모든 시설이 완비되여서 5만 부민의 유일한 위안 할 곳이 될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