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의 낙인 찍힌 처녀
- 감독
- 마틴 리트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실바나 만가노, 잔 모로, 베라 마일즈, 반 헤프린, 리차드 베이스하트
사진: Cambridge Community Foundation , Photo by Wolfgang Wesener 프레더릭 와이즈먼 영화의 러닝타임은 길었고, 와이즈먼의 생애 역시 러닝타임만큼이나 길었다. 하지만 1967년 < 티티컷 풍자극 >으로 시작하여 2023년 <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 >까지 이어진 와이즈먼의 이력은 한 작가의 세계가 어떻게 성립되고, 완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이즈먼의 영화는 주요 영화제에서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고 따라서 덜 탐구되었지만,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역사적인 공헌을 인정받기도 했다. ‘평생공로’라는 상투적인 수사에 와이즈먼만큼 어울리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가 남긴 개성적인 작품들은 교육적 가치를 지니며, 수도사적인 열정으로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은 인간의 복잡성과 인류의 풍습. 제도를 끈기 있게 기록함으로써 영화와 삶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풍요롭게 했다. 촬영과 편집의 반복된 루틴을 벗어난 예외적인 작품이자 와이즈먼의 최고 작업 중 하나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이어진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들은 폭넓게 배급된 적이 거의 없지만 이 역사적인 복원 작업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이즈먼의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티티컷 풍자극>부터 <주 의회>(2006)에 이르는 33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복원의 대상이었다. 와이즈먼의 영화를 관리하는 지포라 필름(Zipporah Films)이 주도하고, 미 의회도서관과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 그리고 유수의 후반 작업 스튜디오인 듀아트(DuArt), 골드크레스트 포스트(Goldcrest Post)가 참여하여 2024년 완결된 복원 프로젝트는 단순히 한 감독의 작품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유산을 온존시키기 위한 뜻깊은 프로젝트였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기록보관소에 파묻힐 뻔했던 거장의 주옥편들이 원본 16mm 필름의 질감을 간직한 상태로, 4K 디지털 버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필름의 결을 매만지고, 그 표면에 조화로운 질감을 부여하며, 과거를 다시 쓰는 생명의 재탄생 과정에 비견할만한 이들 복원 작품이야말로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필름 아카이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 중 하나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와이즈먼의 영화는 특정 순간의 기록을 넘어 역사적 ‘문서’가 될 것이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우리가 알던 기관의 본질도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공권력 집행 방식, 고등학교 교육의 모습, 복지 기관의 일 처리 방식, 의사들이 질병을 다스리는 접근, 인간의 식생활은 필연적으로 변한다. 옷차림, 언어 습관, 헤어스타일, 회의 방식, 심지어 신체 특성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사람들이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며,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될 것은 자명하다. (상) < 고등학교 >, <임사> 중 /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Film at Lincoln Center , © Zipporah Films (하) <발레>, <몬로비아, 인디애나> 중 /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좌 , 우 ), © Zipporah Films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유산이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것은 그의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특이점 때문이다. 소박한 제목의 작품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와이즈먼은 기관과 공동체의 모습을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인상적인 스타일로 기록하였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관습에 따라 원시적인 베리테(vérité) 스타일을 고수한 작가처럼 보이지만, 그는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인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독창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와이즈먼은 결코 단순한 베리테 추종자가 아니다. 문학 작품에서 활용되는 서술자 시점을 영화의 서술에 이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던 와이즈먼은 철저히 주관적 관점에서 조망된 기관의 속살을 묘사하였다. 도시 건축의 기하학적 지표성, 수많은 복도와 거리 장면, 자동차의 이동을 주기적으로 삽입하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처럼, 오직 와이즈먼에게서만 발견되는 일관된 스타일 장치이다. 그의 영화는 서로 맞물린 도시 교향곡 서사시의 개별적인 부분들처럼 기능한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리처드 리콕(Richard Leacock)은 관찰 다큐멘터리에서 영화감독은 ‘연출자’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와이즈먼에 관한 한 리콕의 말은 틀렸다. 와이즈먼은 관찰 양식을 채택했으나 그의 모든 영화는 온전히 그의 것이고,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대로 만들어졌다. 스타일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제목이다. 작명(作名)은 와이즈먼의 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영감을 제공한다. 와이즈먼 영화의 제목은 문자 그대로의 기관을 나타내는 언어이자 제도이고, 제도와 연관된 인간 행위의 속성을 암시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기관의 이름이나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직업에서 추출한 제목은 일상의 힘과 제도적 차원의 사소한 결정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포착한다. 대표작 중 하나인 < 복지 >(1975)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의 서사는 뉴욕시의 복지 기관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것이므로 장소를 제목으로 취한 와이즈먼의 다른 영화들처럼 <복지 사무소> 또는 <뉴욕 복지 사무소>라는 직설의 제목을 붙일 수 있다. <복지>와 <복지 사무소>라는 표제의 초점은 판이하다. 이 영화는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장소성을 탐구하는 좁은 의미를 초월하여 미국의 복지 제도와 시스템, 또는 더욱 추상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신체와 생활,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인간 활동을 주제화한다. 그곳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관계, 욕망, 희망, 좌절을 묘사하는 대목도 여럿이다. 따라서 복지 사무소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역사의 특정 시점에 존재했던 장소와 사람들을 기록한 것이지만 제도와 인간의 영속하는 본질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 중 / 사진: Harvard Film Archive , © Zipporah Films 이것만으로도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와이즈먼의 영화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작품 전체를 흐름을 살펴보면,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문법을 완전히 다시 쓰는 독창성과 정밀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이는 와이즈먼이 고안한 규칙과 조건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스타일 체계에 의해 가능했다. 그의 성취는, 진정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은 이러해야 한다는 세간의 통념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굳게 닫힌 기관의 문들을 열고,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카메라에 담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스토리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진행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수십 분에 달하는 회의, 토론 장면도 생략 없이 편집했다. 촬영 현장은 비(非) 개입주의에 따라 진행하지만 편집 단계에선 전적으로 주관에 의지하고, 편집의 자유로운 힘을 활용하여 틀에 박힌 의미가 아니라 해석적인 개인의 비전을 불어넣는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혁명적인 것을 조용하고, 겸손하게 한 예술가였다. 영화 역사를 지탱해 온, 기록과 구성의 이분법, 몽타주와 롱테이크의 대치,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을 초월하는 영화를 와이즈먼은 만들었다. 영화에서 ‘드라마’는 대개 격정적인 갈등이나 극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하지만 와이즈먼에게 드라마란 표면 아래에 숨겨진 추상적인 가치와 계급의 초상이다. 콜로라도주 아스펜을 소재로 한 <애스펀>(1991)에는 부유층 여피들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예리한 시퀀스가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버림받은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소설 「단순한 마음」(A Simple Heart)에 관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소설 속 비극과 그들의 호화로운 삶 사이의 기묘한 반향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플로베르의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것이 아니라 토론회에 참석한 부유한 여인들의 헛헛한 내면과 가치관에 대한 폭로로 기능한다. <애스펀> 중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 Zipporah Films 또 다른 예로 <법과 질서>(1969)에는 길 잃은 소녀를 다정하게 보살피는 경찰과, 매춘 혐의를 받는 흑인 여성을 무도하게 제압하는 경찰의 폭력이 동시에 담겨 있다. 와이즈먼의 렌즈 안에서 인간은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 양극적 행동 양태 사이 어딘가에 분포해 있다. <복지>에는 반복적인 민원인의 요청에 앵무새 같은 말로 응대하는 복지 사무소 직원과 손수 민원인을 데리고 층을 옮겨가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직원이 나란히 놓인다. 이런 대비는 영화와 영화 사이를 건너뛰어 발생하기도 한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다룬 <복지>나 <공공 주택>(1997)의 반대편에 상류층의 삶의 방식을 묘사하는 <백화점>(1983)과 <애스펀>이 놓인다. 달라스의 고급 백화점 니만 마커스(Neiman-Marcus)를 통해 부유층의 삶을 관찰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을 비추는 것만큼이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냉소적이라거나 따뜻하다고 단정 짓기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인정이 넘친다고 단정하기에, 우리가 마주하는 삶은 입체적이다. <공공 주택>, <백화점> 중 / 사진: MUBI , SIFF , © Zipporah Films 인간 행동에 대해 사회학적인 일반화에 저항하는 와이즈먼의 세계관은 언제나 ‘너머의 진실’을 보려 했다. 진정한 영화란 스크린 위의 영상과 관객의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탄생하며, 누군가는 희망을 읽고 누군가는 비관을 느낀다. 우리들이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는 이유, 한 사람의 시선이 머문 기록물을 후대인들이 반복적으로 꺼내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나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감상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후반 즈음해서 비평에 보다 진지하게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평을 쓰는 일이 내 정체성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2010년대까지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란 내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반추해보건대, 내가 20대를 통과하며 겪어온 삶의 주요한 분기점들이 내가 영화와 비평을 대하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의 변화와 불가분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뿐만 아니라 다수에게도 그렇겠지만, 내게 있어 비평이란 언제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밀접한 활동이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본인의 작업과 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걸 민망해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 꺼리곤 하지만, 나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걸 즐기곤 한다. 글의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것들이 문자로 새겨졌던 순간의 어룽거리던 공기를 떠올리며, 나는 글을 썼을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와 만나거나 멀어져 가며 걸어왔는지 하나 둘 반추해보곤 했다. 때때로 흔적으로나마 내 안에 남아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거나, 아니면 사라져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느끼는 시절의 잔재를 감촉하며, 그 시절의 감각이 어떤 식으로든 내가 써온 글 안에 박물학적으로 새겨져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나의 글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 그가 써온 글에 투영된 시대의 감각에 관해 생각해보곤 했다. 한국영화 몇 편에 대한 생각과 함께, 국내 비평계에 대한 소견을 밝혀야 하는 이 지면에서 이런 이야기로 말을 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 뉴노멀을 기점으로 영화 이후의 미디어가 급격하게 확산해가는 국면에 서 있는 지금의 영화계와 비평계를 떠올려볼 때, 그 공동체가 맞이한 급격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가,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거나 쓰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때때로 우리 시대의 영화 속 대화가 변화하는 양상과도 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글에 대한 청탁을 받은 직후, 나는 즉각적으로 내가 몇 년 전 경험했던 그러한 대화의 유형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최근의 비평계는 물론 일부 문화예술계가 처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에피소드일지 모른다고 느끼며 곱씹었던 그 대화는 몇 년 전, 내가 한 영화제에서 짧게 일했을 당시에 발생했다. 영화제가 진행되던 어느 날, 스태프 한 분이 갑자기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겨 긴급한 공지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기이한 점은 그분이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도 자꾸 미적거리며 본론으로 단도직입하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음… 어…” 와 같은 말이10초간 이어진 이후에 결과적으로 내가 들은 말은 이랬다. “아, 그…… 여러분 이게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리기는 좀 뭐한데…… 혹시 얼마 전에 약간 논란이 된 적 있는 그거 아시죠?” ……? 나는 이게 당최 무슨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정도가 맥락을 전부 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네네~! 그럼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태프분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아…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구나! 그럼… 최근에 어떤 분이 그 일이랑 관련해서 약간 문제제기를 하셨었는데 혹시 그건 아시는 분도 있으신 거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이게 대체 무슨 화법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몇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별 건 아니지만, ‘그거’만 좀 신경 써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걸 더 이상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려고 하셨다. 이에 나를 포함한 몇 분이 당황해서 방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부연 설명을 요청해서 겨우 내막을 듣게 됐다.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장소와 관련해서 최근에 SNS에 문제를 제기한 포스트가 올라왔으니 영화제 차원에서 공식적인 대처를 하기 전에는 가급적 관객들 앞에서 ‘그거’에 관해 입을 담지 않도록 신중해달라는 말이었다. 당시에 SNS를 하지 않던 나, 그리고 평소에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지 않던 여타의 스태프들이 대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체 그분은 그런 얘기를 왜 그냥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셨던 걸까? 이미 내가 말한 이야기에 그 답이 암시돼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 같은 걸 늘어놓지 않아도 알아들을 사람은 대강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대강 맥락을 파악할 정도로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실제로’ 다수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시도하거나 요청할 필요성 자체가 사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오가는 소식이라는 게 알만한 사정을 공유하는 내부자들에게(만) 다 알려져 있어 별도의 대화나 인식론적 합의를 거칠 필요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전제가 다수에게 묵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접하는 알고리즘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외주화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왔던 시대를 지나, 이제 애초에 그런 인식에 합의하지 않은 이가 본인의 내집단에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 시대. 그래서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가 동반사멸”( 이광호 )한 시대. 온라인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그…… 어…… 음… ‘거기’(비평계)에서 이런 경향이 더 만연해졌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체감상 이런 경향성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기점이 2018년에서 2020년 사이라고 느낀다. 그 시기는 내 친구와 지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SNS 계정을 옮겨가던 시기였으며, 무엇보다도 현재까지도 예후적인 여파를 남기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하며 스마트폰이 일상적 시민의 사회적 관계를 보다 미시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편하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 시기 즈음해서 내가 경험한 영화제 일화를 언급한 이유는, 그 스태프 분께서 구사하시던 화법이 어느 순간부터 전혀 예외가 아니게 됐다는 점을 블로그나 각종 SNS의 공론장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영화비평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2010년대 초중반 무렵의 블로그·페이스북 문화와 이 시기 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유저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비교하면 그런 폐쇄적 경향성에 입각한 아주 확연한 차이가 발견되곤 한다. 가령 코로나 전후 블로거는 물론 공식적인 지면에 글을 쓰는 평자들조차 본인의 내집단에서만 통용되는 맥락이 남에게도 당연하게 수용될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물론, 그 내집단 밖에 위치한 이들과 애초에 소통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상정하는 폐쇄적인 화술을 구사하기 때문에 객관화된 언어로 토론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단 대체 무슨 상황이나 맥락을 지칭하는 건지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자주 마주하곤 했다. 가령 “이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해진 얘기들”이라고 말하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맥락과 그 맥락에 관해 본인과 내집단이 느끼는 감정이 다른 독자에게도 선험적으로 합의돼 있다고 상정하면서도 도통 본인이 말하는 그 얘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 공론장에 피로감을 유발하는 서브트위팅과 수동공격적 표현들, 혹은 “이렇게 말하면 분명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텐데", “보나마나 어떤 식으로 반응할 특정한 부류들”과 같은 표현을 통해 본인의 입장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조차 사전에 다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례들이 여기 해당한다. 이후에 부연하겠지만 나는 이런 식의 개별적 발언들을 일일이 비판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니며(보다 현명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발화의 태도만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배태한 실질적인 원인을 지목해야 한다고 느낀다. 또 개인적으로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차원에서만 글을 끝내고 싶지 않고, 우리가 적어도 영화와 픽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금 직면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을 비롯한 여러 한계로 인해 단지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시기 동안 비평계와 영화계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고립되고 있다는 인상만을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그와 관련해서 다시 말을 잇자면, 최근 몇 년 전부터 나는 예술 비평과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덜 읽고 비평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접하는 분야의 텍스트나 1차 사료를 직접 파고들거나, 아니면 직접 예술과 무관한 공동체를 경험하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러한 실천은 물론 개인적 필요에 따라 수행했던 사항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각종 SNS 등지에서 전술한 것처럼 직간접적인 공격성을 함유한 언행을 발설하는 유저 혹은 평자들이 너무 증가한 상황으로부터 유발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런 분위기와 아울러 점차 폐쇄적으로 표준화되는 비평 글들의 관성에 저항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이 또한 새삼스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엇비슷한 온라인 서점의 추천 알고리즘, 엇비슷한 SNS 계정으로부터 유사한 정보망을 공유하는 시네필 커뮤니티의 일원들이 한정된 반경과 관점의(가령 실증주의적 사료와 경제적 현실감각에 기반한 정치학적 통찰이 결여된 채 현대 프랑스 철학적 형식논리를 다루는 텍스트만 근친상간적으로 편식하기 때문에 현실과 복잡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이 아연할 정도로 단순해져버리는 경향성으로 대표되는) 글을 제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때로는 적잖은 평자들이 어디서 무슨 글을 읽고 특정한 문장을 인용했는지조차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그걸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은 이전의 나 또한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집단적인 지각의 반경이 수축되고 있다는 점을 체감하곤 했다. 실제로 가령 허문영과 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와 질베르토 페레스의 글을 탐독한 후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관한 아나크로니즘적 애착도를 형성하거나, 유운성 평론가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는 소식을 공유하는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서로 SNS를 팔로우하고 있으며, 팔로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인터넷 포스트에 입력된 좋아요 버튼이나 댓글을 통해 서로의 흔적을 암암리에 인지하며 은밀한 친밀감과 경쟁심을 공유하는 내집단의 구성원으로 포집된다(이건 함부로 추측한 바가 아니라 내 주변의 여러 젊은 시네필과 비평가들에게 물어봤을 때 거의 다 동의한다는 답변을 들은 사항이다). 이런 생태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생성하는 문화적 요소로 기능하곤 하지만, 동시에 그 친밀감에 기반한 비평계 내부의 공론장이 점점 불가측한 변수를 수용하거나 건전한 합의를 도출하는 역량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개인은 온전히 정치적이거나 객관적인 자아의 일면만을 간직한 존재가 아니다. 그가 정치적 존재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객관성의 영역에 노출되지 않는 사적 영역의 안식처가 불가결하게 요청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사 영역 간의 시공간적 구별을 어느정도 유효하게 전제할 수 있었던 전통적 공동체와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 2인칭적 친밀감의 정동은 네트워크 전반에 보다 탈중심적으로 산포되어 안식만이 아닌 통제의 효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바로 온라인 공론장에 소속된 내부자들의 친밀감을 거스르는 객관화된 논의가 발설되는 것을 강력하게 방지하는 검열의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영화계나 인문예술계 네트워크에 속한 평론가들은 본인 이웃들이나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논평은 ‘굳이’ 쓰려고 하질 않는다는 얘기다. 비평이란 대개의 경우 상대적 객관성을 염두에 두며 세계를 더 자세하게 해석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반면 아렌트가 “보호받은 존재의 어둠”이라 이른 내밀한 공간은 그런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와 무관하게 완전한 의존성에 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안식처로 기능한다(물론 성숙한 사람이라면 친밀한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니 공적 담론장으로 기능하면서도 동시에 전적인 의존성에 관한 요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SNS 공론장의 유저들은 점점 이웃이나 팔로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쓰지 않는다. 써봤자 어차피 토론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그냥 어느샌가 줄어든 팔로워 숫자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렌트가 말했듯 개인이 소외를 유발하는 공적인 페르소나를 장착하기 이전에 전적인 의존성을 보장받아야만 한다면, 친밀감과 배치되는 담론과 정서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네티즌들의 심경도 납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가족이나 회사, 또래집단처럼 오프라인에서 안정적인 보살핌의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실패한 상황에서, 온라인에서 친밀감을 찾으려는 유저들에게 “온라인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로 토론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후기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굴복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중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이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좀 그랬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 현상은 애초에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양면성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유저들이 친밀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온라인 공론장에서 객관적 논의를 창출하는 비평의 역량이 기능 부전에 처한다는 점 또한 솔직하게 시인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에서인지 2010년대 중후반을 건너오면서 블로그의 댓글창 같은 곳에서 토론이 벌어지는 일을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유저들은 점점 좋아요만 누르거나 비밀 댓글만 달곤 한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의 영화비평 블로그들의 댓글창과 지금의 댓글창을 비교하면 그런 확연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평자들도 애당초 건전한 토론이 발생하기 어려운 내집단의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인지, 종종 논쟁적 사안이 발생해도 서로 상반되는 기조의 포스트를 올리는 식으로 수동공격적인 기싸움만 할뿐 본인이 당최 누구의 무슨 글을 염두에 두고 쓰는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 상황을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어차피 이 공론장이란 대충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청자만을 선험적으로 상정한 채 발화되는 공간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현상은 상기했던 것처럼, 합리적 의미를 공유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정동적 소통에 입각한 폐쇄적 화술이 비평계 공동체 내부에 만연해지는 원인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의 층위를 하회하는 신경학적 회로가 이미 통합돼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서로 다 알아듣는 상황에서 뭐하러 굳이 의미론적 담화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주로 비밀 댓글이 게시되곤 하는 영화비평 블로그 댓글창 아마도 최근의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소수의 평자들의 글이 과잉된 영향력을 행사하며 폐쇄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제도 비판이 이뤄졌던 상황 또한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계가 폐쇄화하거나 고립된 현상이, 예술계 바깥에서 미디어와 산업적 환경의 변화가 불가항력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며 생산과 소비의 흐름을 급격하게 수축하거나 표준화한 후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예술계 내부에 잔존하는 몇몇 권력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복잡계에 대한 시각을 결락한 표면적 진단이 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예술계 내부에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 못지않게, 그 폐쇄성의 원인을 예술계 내부 제도, 혹은 상대적으로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몇몇 평자들의 책임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주장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계 내부 담론만 소비하는 이들에 특징적인 폐쇄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가령, 영화비평이 이전보다 훨씬 위기에 처했거나 고립된 상황의 원인이 정성일 평론가의 배타적인 태도나 《씨네21》 평론가들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익숙한 견해들을 참고해보도록 하자. 정성일 평론가가 가끔 왜 저러시나 싶을 정도로 유아론적이고 배타적인 면모를 내보인다거나(가령 최근에 < 희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이 개봉했을 때 그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숏바이숏과 같은 분석을 불허하는 신비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정교한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다 틀렸다고 말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숏바이숏이 명백하게 가능한 유형의 작품이다) 《씨네21》에서 생성되는 비평이 종종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그 자체로는 타당한 지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비평계가 수축한 직접적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건 기초적인 경제적, 산업적 현실감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재하다는 점을 시인하는 처사다. 이 세계가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처럼 인문예술계에서나 유행하는 담론이 설명하는 권력관계로 축소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문약하기 그지없는 젊은 인문예술학도들의 머릿속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복잡계가 작동하는 현실의 이치와는 제대로 조응하지 않는다. 중산층이나 인문예술계 바깥에 지인이 몇명만 있어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정성일 평론가와 《씨네21》이라는 잡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다. 그들을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비평을 덜 읽게 된 이유는 이 나라 정부와 동시대 산업이 직장생활하고 퇴근해서 유튜브 보는 게 편한 생체리듬을 구조화한 영향력이 훨씬 크지, 그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골치 아픈 영화를 보거나 비평을 읽기로 결심한 다음, 한달에 원고료를 20만원 남짓 받을까 말까한 《씨네21》의 평론가들이 광고에 밀려 잡지 맨 뒷쪽에 있는 A4용지 2페이지짜리 분량의 비평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 다 잘라내고 짤막하게 써낸 글이 설득력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라는 매체만 다루거나 인문예술계 담론에만 익숙해서 바깥 분야에 문외한인 이들은 이 업계가 고사 직전인 이유가 자체의 잘못에서만 유래했다고 오인하곤 하지만, 사실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책이나 글 같은 건 본질적으로 무기력한 매체다. 그렇기에 유명무실하게 남아있는 잡지나 제도들은 비평의 위기를 촉발한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이미 외부의 산업적, 경제적 불가항력이 가해진 상황에서 겨우 생존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계든 어디든 예술계 내부자들의 폐쇄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게 비판하는 이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조차 마찬가지로 폐쇄적 시각에 빠져드는 나선에 갇히게 된다.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실질적인 원인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그 원인에 관해 책임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인식을 외면한 채 상황의 책임을 안쪽으로만 돌리며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사실 그 윤리적 책임 자체가 환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이런 얘기조차 그렇게까지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적당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는 평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공격적인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서 방 안의 코끼리를 못 본 척하듯 침묵하고 있을 뿐. 비슷한 맥락에서 버나드 조지건은 인문학계가 기술권력이 지배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파급력을 행사하거나 유의미한 해석을 제출하기 어렵게 되면서부터, 산업적으로 파생된 여러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간과한 채 세계를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등 인문학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담론 간의 사상적 대립으로 축소시키는 현실 인식을 확산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이 글에서는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으로 환원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그러한 경향성의 근저에 놓여있는 이면의 맥락을 간단하게만 말하고자 한다. 그 후 그 현상이 동시대의 영화에서도 상호연관된 증상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을 짚고자 한다. 물론 KMDb 영화글이라는 알만한 사람만 알고 있는 페이지에 게재될 이 글 또한 한정된 유형의 군상에게만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지금 나는 결론을 전제하는 그런 식의 경향을 문제시하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이 문장 이후에는 더 이상 무슨 무슨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은 불가피한 설명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제할 계획이다. 오프라인에 앞서는 온라인의 우위와 선취매개라는 경향성 위에서 내가 언급한 사항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내가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 소속되곤 했던 공동체와 작금의 변화한 공동체를 비교해보며 한 가지 대표적 차이를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사람들이 영화나 텍스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전복되고 있다는 상황이다. 박은하 기자는 언젠가 80년대생과 90년대생이 각각 경험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차이를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과 선배들이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하라고 했어요. 반면에 지금 세대들은 대학에 가면 “너 오유하니, 아니면 일베하니?”라고 묻겠지요. 즉 과거에는 오프라인을 경유해 온라인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많았다면,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식이지요.” 그가 2010년대 전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며 지적한 소통 과정의 역전을 나 또한 지난 10년 동안 체감하곤 했다. 내가 2014년에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오프라인에서 학과 친구나 선배들이 그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 그녀 >(스파이크 존즈, 2013),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델라티브 케시시, 2012),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과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같이 보러 가자고 제안해줬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야 나는 각종 영화제 수상작과 걸작 목록을 검색하며 온라인으로 관심사를 확장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관한 정보를 다양한 지인에게 소개해주는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나는 내 주변에 약 열다섯 명의 영화평론가나 영화기자의 MBTI를 알고 있는데, 그중에 외향형은 나밖에 없다), 원래 영화나 비평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 다크 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2008)처럼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의 취향을, 내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 엉클 분미 >(2010)나 알랭 기로디의 < 호수의 이방인 >(2013)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바꿔놓은 경험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물론 그때의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던 과정에서도 온라인의 선험성이 끼치는 영향력을 온전히 삭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내가 예술과 관련된 학과에 다니고 있었다는 특수성을 배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와 예술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흐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벡터를 띠고 있었다. 현실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오늘날 이 벡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시네필 취향이라고 선험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지인이 아닌 이와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공간에 동행하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오프라인 공동체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일이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자의식의 계기로 작용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한지라 누군가가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사전에 섭렵하지 않으면 국적이 똑같더라도 외국인과 다름 없을 정도로 대화가 교통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 인랜드 엠파이어 >(2007)에서 어느 미국인과 폴란드인이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떠들어대며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저 괴상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오늘날 나의 현실감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느끼곤 했다. 부분적으로 이 상황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동체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자아와 친밀감조차 고도로 정보화된 사물 인터넷 경제의 선험성에 의존하게 된 현상과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범세계적 물류 경제와 디지털에 기반한 고부가 가치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나타내는 변화 중 하나는, 이전에는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일상과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에도 보다 많은 지식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는 경제학 서적의 제목이 의아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 미국 연준의 반응을 참조하지 않으면 부장님의 기분을 이해할 수조차 없는 세계. 그래서 우리의 취향과 일상적 감각조차 대역적 질서와 불가분한 맹약을 맺은 세계. 대학 동아리 같은 현실의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무매개적이었던 우정을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시네필 공동체가 2010년대를 지나오며 점점 사전에 영화와 커뮤니티의 정보망을 공유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기 어려워지는 현상 또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동시대 영화의 상황으로 우회를 하자면, 이 변화는 개별적인 영화들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징후를 발현하곤 한다. 가령 이제 가령 세르주 다네가 말한 것처럼, 영화 안에서 역사와 사건에 방점을 두는 “지리학의 영화”와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의 시청각적 물성에 주목하는 “지질학의 영화"라는 이분법적 계열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자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자체가 전지구적으로 편재한 비즈니스 모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증거하는 예시로, 최근으로 올수록 비판적 성찰의 도구로 기능하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학습하지 않는다면 동시대적인 물질성을 재현하는 예술적 과제조차 점점 어려워지는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 가령 내게 2010년대 이후의 지경학적 환경에 관해 가장 놀라운 감각을 제공해줬던 두 걸작, 노엘 버치와 앨런 세쿨라의 < 잊혀진 공간 >(2010)과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 당나귀 EO >(2022)가 모두 나이가 든 남성 지식인 거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두 영화는 모두 초국적 자본주의의 연결망에 지배된 이 세계의 물질성을 경이로울 정도로 감각적으로 도려낸 보고서다. 하지만 여러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주유하는 카메라의 동선은 세계의 지형학을 고도로 객관화한 지성의 산물이므로, 더 이상 역사적, 지리학적 통찰과 분리할 수 있는 지질학적 감수성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잊혀진 공간>, <당나귀 EO>, <파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 The Forgotten Space ”, IMDb) 올해에도 비슷한 경향은 의미심장하게 나타나서 장재현의 < 파묘 >(2024)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3)처럼 땅을 주제로 삼는 개봉작에서 토착적 지질과 무관한 고도로 지식인적이고 전문가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작위적 위화감을 선사하곤 했다(물론 우리가 이미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세계에 실제로 서식하게 된 상황에서 그런 황당한 작위를 전략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을 기성의 비평적 관점에 따라 비판하는 작업이 과연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반면 그런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에의 접근성과 서사적 감각의 숙련을 결여한 채 유튜브 숏츠를 마구자비로 넘기는 듯한 디지털 기기의 마취적 혼돈에 노출된 젊은 창작자들은 점점 자신이 위치한 장소의 물질성조차 오롯이 담아내길 버거워하는 경향이 발견되곤 한다. 여러 장소와 형식을 부단히 오가지만, 그중 어디에도 융화하지 못하는 청년 몽상가의 일상을 다룬 양근영 감독의 < 모르는 이야기 >(2023)는 그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일 것이다. 물론 그 무력감을 촉발한 원인 자체가 기성세대가 빚은 세계의 질서에서 유래했으므로 그 성취도가 미비하다는 점만을 근거로 젊은 창작자들을 비판하는 것만이 온당한 논의는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오프라인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정보를 재확인하는 하위적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논점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일상적 순간의 대화에서조차 유튜브 콘텐츠나 <흑백요리사> 같은 온라인 콘텐츠를 보지 않으면 오프라인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종종 직면하곤 한다. 비평계에서도 온라인 공간의 선험성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점점 오프라인 지면의 영향력을 초월하고 있기에, 잘 알려진 잡지의 고정된 지면에서 글을 쓰는 한 평론가 또한 SNS 계정을 만들지 않으면 영향력을 확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압력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부터는 이런 종류의 온라인의 선험성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 논의를 떠올려보도록 하자. 리처드 그루신은 언젠가 9.11 테러 이후 미디어에 보편화된 경향을 “선취매개premediation”라는 용어로 명명한 바 있다. 9.11 테러는 글로벌 세계의 지정학적 불화가 선진국 시민의 일상적 생활공간 안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래의 모든 일상적 위협마저 사전에 제어하려는 욕망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심화됐다. 잠재적 범죄자를 사전에 제압하려는 경찰력에 관한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 마이너리티 리포트 >(2002)의 흥행, 그리고 각종 방위 산업과 보험 산업, 제약 업계의 성장은 그러한 제어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사건들이다. 그루신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적 요소로, 핸드폰이나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의 출현을 거론한다. 영화가 대중에게 이미지를 보급하던 20세기의 과거에 이미지란 롤랑 바르트와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재현하는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는 일기예보를 하듯 미래의 주식시장, 미래의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끼칠 영향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고지해준다. 그리고 그런 정보의 송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미래의 위협을 사전에 고지받는 것을 허가한 스마트폰과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들이다. 대중적인 예술작품에도 이 같은 선취매개적 욕망에서 비롯된 시대정신은 은밀하게 투영된다. 그래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와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진도준( 송중기 ), 그리고 이 분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박마: 거짓말 사냥꾼 바쿠>의 마다라메 바쿠처럼 미래에 발생할 변수를 사전에 전부 다 예측하는 비현실적인 수싸움에 능란한 캐릭터들이 동시대 시민의 문화적 자아 이상형으로 출몰하곤 했다. 선취매개의 욕망이 투영된 작품과 인물들_<마이너리티 리포트>, <다크 나이트>의 조커 (사진: " Minority Report ", " Dark Knight ", IMDb) 선취매개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공간의 물질성과 사회적 관계를 경험할 때도 사전에 온라인에 집적된 정보를 거쳐가는 현상을 해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그러한 취사선택에 기반한 온라인 공동체들이 점점 고립되는 상황 또한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2020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 진단이라는 점을 증거하는 대표적 사례는 바로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MBTI 검사가 폭발적으로 유행한 상황이다. 코로나19와 MBTI는 서로 우연의 일치로 같은 시기에 확산된 사건이 아니다. 코로나 뉴노멀은 미래에 발생할 감염의 확률값을 사전에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반화된 세계관이었고, 이는 오프라인에서 조우할 인격체의 행동반경을 예측 가능한 범주로 파악하려는 온라인 MBTI 검사의 일상적 용법과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그리고 미래의 불가측한 변수를 제압하고자 하는 두 욕망을 부채질한 요소는 때마침 방역을 목적으로 스마트폰의 활용을 확대한 정책적 차원의 조치였다. 이는 정확히 9.11 테러 이후 핸드폰의 존재가 선취매개라는 미디어적 경향을 보편화했다는 그루신의 논점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그루신이 글을 썼던 시기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암울해지고 확정적으로 변함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비관적인 미래의 확률값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보다 현실적인 순간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를 투영한 콘텐츠들이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시민들이 더 이상 기후위기나 정치 뉴스와 관련한 추상적 현안과 거국적 이상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워크맨>의 오해원이나 <솔로지옥2>의 덱스처럼 일상적 순간의 욕망과 책임에 현실적인 방식으로 충실한 캐릭터들의 소박한 정감에 열광하는 현상 또한 그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불가측한 위협을 제어하려는 선취매개라는 경향 또한 결국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둘러싼 위협이 적어도 현실적으로 제어 가능한 수준으로 여겨지는 시기에만 한정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의 오래된 풍요가 마침내 종식을 고하는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선취매개라는 경향이 점점 약화되는 국면을 목도할지 모른다. 사전에 예측하거나 제어할 여력도 없이 밀어닥치는 온갖 위기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매몰돼 있는 것만큼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서도 지면의 한계상 선취매개의 영향력이 끼친 파장에 관해서만 취사선택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그것이 적어도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지난 10년 동안의 온라인 환경에서는 상대적 보편성을 지니고 지속됐던 현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전도된 영화 창작의 과정에 대하여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온라인에서 선취매개적 경향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해온 우리 세대의 특징이, 오늘날의 영화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기했던 것처럼 한때 우리가 오프라인을 중심축으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을 확장하던 시기가 과거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20세기의 영화사적 진보 또한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말할 수 있다. 누벨바그와 네오리얼리즘의 작가들이 스튜디오 시스템을 거부한 채 거리로 뛰쳐나가 보다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를 포착했듯, 그리고 오토 플레밍거의 < 돌아오지 않는 강 >(1954)에서 뗏목을 타고 계곡을 누비는 장면이 베르너 헤어조크가 아마존에서 직접 찍은 < 아귀레 신의 분노 >(1972)에 이르러 훨씬 야만적인 생동감을 띠게 됐듯, 영화사에서 진보적 실천이란 곧 오프라인 현실로 나아가 보다 확장적인 물질성을 수집하는 방향으로 특징지어지곤 했다. 디지털이 보편화한 이후,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을 온라인의 선험적 기준에 종속시켜 온 최근의 세대는 이 방향성을 반대로 역전시킨다. 말하자면 현실의 물질성을 접하기에 앞서 온라인에서 ’현실이라고 상정되는 어떠한 상(像)’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선취매개적으로 구성한 뒤, 그 상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작업의 방향성이 “오, 어제 어디를 갔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런 구체적인 경험을 했어. 그럼 그 고유한 감각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볼까?”가 아니라, “오, 어제 어떤 영화나 인터넷 게시물을 봤는데 내가 저 정보들이 비추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란 아마 ‘대체로’ 저것과 비슷할 것으로 ‘예상’해. 그러므로 나도 내가 본 그 대체적인 상을 영화라는 결과물로 출력해볼까?”라는 식으로 창작의 과정이 역전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미 20세기 후반의 서브컬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이 현실을 참조하지 않은 채 작품 속 시뮬라크르적 기호를 재생산하는 경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례가 바로 츤데레와 같은 캐릭터의 ‘모에’ 요소다. 신죠 카즈마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녀석은 분명 그러한 일을 할 거야’라는 확률분포를 여러 겹 겹쳐놓은 것”으로 정의한 모에 요소란 21세기의 시초에 이미 선취매개적 국면이 창작자의 작업 과정으로 스며든다는 점을 알리는 사례였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가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추상적 캐릭터들에 한정해 분석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과 실사라는 기준 또한 사실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경계를 획정하는 절대적 준거가 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지도 어플에서 검색한 후 맛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오프라인에서 직면할 경험을 온라인을 통해 시뮬레이션적으로 정위하는 절차가 일반화된 세계를 살고 있다. 이에 따라 현실 자체도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런저런 예상가능한 확률값을 근사치에 가깝게 추상한 존재로 축소되는 경향이 생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미 20년도 전에 페드로 코스타는 새로운 세대가 점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 영화 이외의 것을 참고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경향을 문제적으로 지목한 바 있다(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그보다 더 전에 다른 이들도 주장했지만). 어째서일까? 아무리 예술적 창조에서 상호참조나 오마주가 낯설지 않아졌으며 그것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좋은 예술작품이란 다른 작품을 보고 ‘뭔가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세계를 보는 태도와 방법을 배워 나만의 시각으로, 내가 관심 있는 세계를 바라본 주관으로부터 비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시네필들이 열광하기 좋은 의미 불명한 수사학일 뿐이며, 예술작품이란 결국 고유한 주관과 세계가 맺는 긴장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부수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근래의 전도된 영화 창작 과정에서 사진적 이미지란 경험적 현실(혹은 구체적 사료)로부터 도려낸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 창작자의 머릿속에 내재된 ‘현실이란 어떠할 것이다’라는 추정치를 근삿값에 가깝게 출력해낸 정보로 나타난다. 그때 사진적 이미지의 물질성이란 지표적 단독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기보다 이미지의 확률론적 추상성을 은닉하는 날조된 하드웨어로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포착된 현실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사진적 이미지의 제작 과정이란 이제 미래에 경험할지 모르는 현실에 대한 확률론적 관념을 사전에 투영한 결과물로 전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2020년대 전후의 영화적 이미지를 ‘사진적 이미지’라기보다 ‘확률론적 이미지’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표방하는 사진적 이미지조차 확률론적 이미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면모를 노출하곤 한다. 가령, 필름 시대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환기하기 위해 시공간적 경계를 무화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속성을 의뭉쩍게 누락한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가 이런 사례다. 박동수 평론가는 <패스트 라이브즈>에 관한 예리한 비평에서 극중 노라(그레타 리)가 향수하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해성( 유태오 )이 실재하는 인격체라기보다 한국계 미국인인 셀린 송의 머릿속에서 한국에 관한 향수어린 관념을 추상적으로 육화한 존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추상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배우가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셀린 송에 의해 쓰인 어색하기 그지없는 번역투 대사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더해서 박동수는 해성의 직업과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정체성이 탈각됐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실제 한국을 살아가는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 셀린 송-노라라는 작가적 자의식이 배태한 인위적 피조물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기준만으로 한 편의 영화에 내재한 가치를 온전히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의 여러 영화 속 캐릭터들이 구체적인 인격적 속성을 결여한 채 작가가 상상한 어떤 관념의 복화술 인형으로만 제시되는 현상은, 그들이 현실에서 작가들이 직접 경험하고 취재한 존재하기보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보를 확률론적으로 추상한 결과물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작년에 개봉한 < 너와 나 >(조현철, 2022)에서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물감을 발한 박정민 배우의 배역 또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극중에서 하은을 스토킹하다가 적발된 후 하은의 동급생들과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 나 잘생김~ 어 너 못생김~ 어 너 남자친구 없음~”이라는 푼수 같은 대사를 내뱉는 그는 시종 하나의 고유한 역사를 간직한 인격체가 아니라, 적당한 타이밍에 찌질한 스토커를 플롯에 외삽하고 싶다는 감독의 욕구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현된 추상적 존재로 나타난다. 물론 모든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욕구에 따라 구현된 존재이므로 진정한 문제는 그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핵심은 오늘날의 미디어적 조건이 창작자가 현실을 접하는 생활감각을 변형시킴으로써, 캐릭터에 고유하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량을 점점 쇠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냥 각본을 대충 써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를 확률론적 이미지의 패러다임에서 조감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가능하다. 영화적 현실을 구현해 기댓값을 넘어서는 고유한 인식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제작과정이, 영화적 이미지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관념적으로 종속시키는 양상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겨울 이야기> 전술했듯이 이 경향이 배태한 대표적 증상은 작가 자신의 생활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사회적 인격체를 그릴 때 위화감이 들 정도로 생활감과 디테일이 부족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점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를 쓰는 능력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안에서 대화라면 의미로 충만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진정으로 탁월한 작가적 자질은 아무런 의미론적 쓸모가 없는 대사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있다. 가령 마틴 스콜세지의 < 좋은 친구들 >(1990)에서 토미(조 페시)가 “funny how?”라는 의미 불명한 말을 연발하며 헨리(레이 리오타)를 윽박지르는 장면, 그리고 에릭 로메르의 < 겨울 이야기 >(1992)에서 펠리시(샤를로트 베리)와 막상스(미셸 볼레티)가 느베르의 길가를 산책하며, 아무런 의중도 없이 마주치는 간판과 사물의 명칭을 무심코 중얼거리는 순간들. 이 대화들은 어떤 서사적 효용과 주제의식도 부재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이 지금, 이곳에서 어떤 확률론적 추상성으로 흩어질 수 없는 단단한 시공간적 구체성으로 빛난다는 감미로운 잔향을 새기고 간다. 마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론적 환원을 거절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단독성의 확신을 남기는 절대적 순간처럼 말이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위에서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를 이분법적으로 획정한 뒤 전자에는 물질적 속성이 탈각되어 있다는 단순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거릿 모스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에 고유한 물질성과 친밀감이 깃들어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디지털 기기에 단독적인 소통의 물질성이 종종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메신저를 통해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지인들과 대화하거나 이모티콘이나 말장난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분명 의미론적 제약을 초과하는 반언어적 활력과 친밀감이 발생한다고 느낀다. 또, 이 글만 보면 내가 선취매개적 경향 때문에 MBTI 검사를 뭐 대단히 나쁘게 생각한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는데, 일상에서 나는 애인이나 친구나 지인들과 MBTI 얘기를 안 하는 날이 없을 지경으로 과몰입하고 있다. 핵심적인 것은 단순히 우리 시대에 고유한 문화적 산물이 그 자체로 쓸모없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에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단독성과 물질성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익숙하게 받아들인 세대가, 대체로 시공간을 3인칭적으로 조감하는 영화적 현실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려고 할 때 일종의 작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이행하며 나타나는 변화는 이런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상황에 대한 비관적이고 익숙한 진단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 벌써 주어진 지면을 상당히 초월해버렸다. 확률론적 이미지, 그리고 그것의 현존과 공명하는 공론장에서의 ‘확률론적 대화’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은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기술한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국면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미학적 실천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지금은 이미 웹페이지로 읽기 불편할 정도로 내게 주어진 분량을 너무 많이 초과해버렸으므로,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김신(영화평론가) l 시각예술, 비평과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다. 진지한 얘기를 가볍게 하고 싶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을 비롯한 곳에 종종 영화비평을 기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