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온 옥수수
- 감독
- 이채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유이든
충무로는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장르적 지형도의 변화를 겪는다. 크진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는 기록할 만하다. 먼저 여전한 장르는 멜로드라마와 액션이었다. <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소영 , 1968) 류의 신파 멜로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합작(혹은 위장 합작)을 통한 무협 액션 영화도 왕성했다. 합작과는 무관하면서도 ‘중국식 제목’을 단 한국영화들, 그러니까 < 무림오걸 >( 김시현 , 1979) < 애권 >( 이형표 , 1980) < 소림사 주방장 >( 김정용 , 1981) 같은 영화들의 러시가 이뤄졌고, < 협객 시라소니 >( 이혁수 , 1980) 같은 전통적인 ‘따찌마리’ 액션도 이어졌다. 사라진 장르도 있었다. 호러가 대표적이다. 메이저 장르는 아니었지만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한국 공포 영화는 1980년대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부활을 목격하기 위해선 1998년 < 여고괴담 >( 박기형 )까지 1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새로 생긴 장르도 있었다. 아동용 SF 액션이다. 지금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특수효과로 점철된, ‘우뢰매’ 시리즈(1986~93)나 ‘별똥왕자’ 시리즈(1987~88)는 198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변형된 장르가 있다. 일종의 진화라고 해도 좋을 거다. 1970년대 ‘얄개 영화’는 1980년대에 연령대를 조금 높여서 < 대학얄개 >( 김응천 , 1982)로 다시 태어났고, < 오성군 한음군 >( 박호태 , 1988)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1989년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이후엔 사회적 이슈와 결합되어 1990년대 초를 장식했다. 1. 토속 영화의 조짐이 보였던 < 심봤다 > 2. 1985년에 나온 < 뽕 >은 토속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으로, 이후 컬트로서 추앙받는다. 3-4. 정윤희 가 주연을 맡았던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왼쪽)와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오른쪽). 자연 속에서 파라다이스를 즐기던 순수한 남녀는 외부자에 의해 그곳을 침범 당하고, 결국 여자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한다. 1980년대에 또 하나의 ‘변종’이 있다면 흔히 ‘토속물’ 혹은 ‘향토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제목으로 지칭되던 그 영화들이다. 이 글에선 ‘토속 영화’라는 명칭으로 통일할 이 영화들은, 거칠게 정의 내리면 이른바 ‘문예영화’가 에로티시즘을 만난 결과다. 1970년대까지 검열의 수위 안에서 원작 소설을 표현했다면, 1980년대엔 과감해졌다. 과거 이미 만들어졌던 정비석 의 『성황당』, 이효석 의 『분녀』, 나도향의 『물레방아』 등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정진우 , 1981) < 산딸기 >( 김수형 , 1982) < 물레방아 >( 조명화 , 1986) 등으로 좀 더 에로틱하게 재등장했고, 김유정 의 『땡볕』 『떡』 등도 소환되었다. 그러면서 문예영화의 범주를 벗어난, 다소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소설을 각색하거나 창작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토속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은 (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로티시즘 사극과 구분되어야 한다. 토속 영화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토속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는 사극이 지니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며, 시대 배경은 식민지 시기 농촌이나 어촌이다. 공통점도 있다. 1980년대 토속 영화와 사극은 한국영화에서 여성에게 가장 가혹했던 장르였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며 죽음에 이르는 여성들의 영화. 그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모순을 떠안아야 하는 것처럼 보였고, 당시 외국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이 열리면 서구 관객들은 “한국영화는 왜 그렇게 여자를 때리느냐”고 항의성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1. < 산딸기 >의 한 장면. 물레방앗간은 토속 영화에서 반복되는 핵심적 공간이다. 주로 비밀스러운 정사가 이뤄지는 그곳에선 종종 여성의 운명이 결정된다. 2. < 산딸기 >의 엔딩. 명준과 분녀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명준은 말한다. “그래 저 학들처럼 천년만년 살자.” 토속 영화는 ‘새’의 상징을 자주 사용한다. 정진우 감독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를 만들었고(<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3)까지 묶어 ‘새 3부작’), < 여자의 성 >에서 별녀는 어릴 적 숲에서 죽어가는 새를 데리고 와 살리는데, 그 가련한 새는 이후 별녀의 삶을 상징한다. 그리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산딸기 2 > <여자의 성>은 모두 새 소리를 섹스의 신호로 사용한다. 3. < 숲속의 바보 >는 토속 장르에 ‘백치 여인’ 캐릭터를 끌어왔다. 4. 문예 영화는 1980년대에 토속 영화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지속된다. 사진은 김동인 원작의 < 감자 > 그 시작을 살펴보면 1970년대 말에 조짐이 있었다. 선두 주자는 정진우 감독이었다. 이은성 작가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 심봤다 >(1979)는, 문예 영화의 톤이 짙긴 했지만 이후 등장할 토속 영화 트렌드를 예견케 했고,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가 이어졌다. 결정타는 김수형 감독의 1982년 작 < 산딸기 >였다. 안소영 - 선우일란 - 강혜지 - 소비아 로 주연 여배우의 변화를 겪으며 1994년 6편까지 이어진 이 토종 프랜차이즈는 토속 영화의 얼개를 만들었다. < 산딸기 > 1편을 보자. 화전민 마을에 분녀( 안소영 )가 산다. 한가위 마을 잔치 때 취바리 탈을 쓴 누군가에게 겁탈당한 분녀는, 그 주인공이 마을 청년 명준( 임동진 )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다지를 찾아 만주로 떠난 명준을 분녀는 기다린다(안소영과 임동진은 같은 해 < 애마부인 >( 정인엽 , 1982)에서도 공연했고, 여기서도 안소영은 (감옥에 간 남편) 임동진을 기다렸다). 마을 남자들은 호시탐탐 분녀를 노리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싸우다 두 명이 죽는다. 이에 ‘남자 잡아먹는 X’라며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분녀는 가마 주인(남궁원)을 따라 읍내로 가 술집 작부가 된다. < 산딸기 >는 토속 영화의 핵심 구조를 제시한다. 바로 이분법이다. ‘시골 vs. 도시’라는 구도 속에서 토속 영화는 여러 대립항들을 만들어낸다. 아직 물물교환이 익숙한 ‘촌’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장터’라는 공간으로 상징되는 ‘돈’의 세계가 있다. 마치 서부극의 ‘자연 vs. 문명’ 구도처럼 토속 영화는 두 세계의 충돌 속에서 전자의 붕괴를 보여준다. 산속이나 섬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거나 약초를 캐며 살아간다면, 양복을 입은 외부인들(여기엔 종종 일본 순사가 가세한다)은 그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여기서 위협의 대상은, 그 마을에서 가장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음험한 욕정의 대상이 되고, 결국 도시로 끌려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을 한 채 술과 몸을 팔게 된다. 이 구도는 < 여자의 성 >( 문여송 , 1985) < 산딸기 3 >( 김수형 , 1987) < 옹기골 뽕녀 >(김수형, 1987) 등에서도 정확히 반복되는, 토속 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같은 해에 나온 또 한 편의 영화를 주목해야 한다. 장미희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 숲속의 바보 >( 박용준 , 1982) 다. 이 영화는 토속 영화의 여성 캐릭터를 완성한다. 바로 ‘백치 여성’의 등장이다. 복희( 장미희 )는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영화 제목 그대로 ‘숲속의 바보’인데, 이후 수많은 토속 영화들은 핸디캡을 지닌 여성 캐릭터를 통해 이 장르가 지닌 ‘원시성’ ‘본능성’ ‘순수성’ 등을 드러낸다(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진 않지만, 그런 점에서 말 못 하는 수련( 정윤희 )이 등장하는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정진우 , 1981)도 토속 영화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캐릭터의 계보는 < 불새의 늪 >( 고응호 , 1984)의 봉은( 원미경 ), < 여자의 성 >의 별녀( 최선아 ), < 소금장수 >( 김대진 , 1988)의 냉이(천은경) 등으로 이어지며, 그들은 섹스에 대한 ‘원초적 본능’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불새의 늪 >에서 화가 종훈( 마흥식 )은 봉은에게 ‘수성’(獸性), 즉 ‘짐승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며, <여자의 성>의 뭍에서 온 침입자 억수( 독고영재 )는 “잠자리가 뛰어난 여자거든!”이라며 별녀에게 집착한다). 1-2. < 산딸기 2 >(왼쪽)와 < 물레방아 >(오른쪽)의 선우일란 과 마흥식 . 두 배우는 토속 영화의 간판스타였다. 3. 문여송 감독의 히로인이었던 < 여자의 성 >의 최선아 . 4. < 산딸기 >의 김애경. 무당 캐릭터는 토속 영화의 핵심적 조연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테마는 바로 ‘근친적 설정’이다. 문명 이전의 상태에 대한 메타포일까? 심의 때문에 진짜 혈연적 근친 관계를 내세우진 못하고 유사 근친 관계를 설정하긴 하지만, 많은 토속 영화들이 근친적 관계를 내세운다. < 숲속의 바보 >의 복희는 남매처럼 함께 사는 머슴 만복( 김동현 )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다.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에서 최 영감( 황해 )은 고아인 수련과 문영( 최윤석 )을 키우는데, 혈연은 아니지만 남매처럼 자란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 여자의 성 >의 별녀는 데릴사위로 온 거무( 이구순 )와 남매처럼 지내다가 결혼한다. < 소금장수 >의 덕만( 김추련 )도 엉겁결에 맡아 딸처럼 데리고 다니는 냉이와 부부적 관계를 맺게 된다. < 화녀촌 >( 김기 , 1985)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종섭( 이영하 )은 상처한 후 산에서 어머니( 김지영 ), 처제 정분( 최현미 ) 그리고 딸과 살아간다. 그는 형제나 마찬가지인 옆집 친구 덕만( 나기수 )의 아내( 이상숙 )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는데, 덕만 내외가 갓난아이를 남긴 채 마을을 떠나자 처제를 아내처럼 받아들여 그 아이를 키우며 산다. 근친적 관계 이외에도 토속 영화는, 도시와 문명이 반대편에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본능적인 모습들을 클리셰로 드러낸다. 대표적인 것만 간추려 보겠다. 1. 수시로 목욕을 한다 모든 토속 영화엔 꼭 이 장면이 있다. 여성 캐릭터들은 숲속의 계곡이든 강가든 폭포 아래든 수시로 목욕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엿보는 남성의 시선이 있다. 많은 사건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 언제 어디서든 정사를 한다 낮이든 밤이든, 집이든 물레방앗간이든 들판이든 숲이든 개울가든 옥수수밭이든, 그들은 정사를 한다. 그리고 이 광경 역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들킨다. 3. 껄떡대는 건 죄가 아니다 욕정의 도덕률이 무너진 상태에서, 마을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가운데 놓고 많은 남정네들이 치근대는 건 토속 영화에서 전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겁탈을 해서라도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유부남/유부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것은 < 뽕 >( 이두용 , 1986)과 <떡>( 김수형 , 1988)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4. 무당을 조심하라 무당이든 박수든, 토속 영화에서 ‘무속인’은 빠지지 않는다(< 불새의 늪 >에서 봉은은 아예 무당의 딸로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 급살 맞아 죽는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이며, 권위를 내세워 음모를 꾸민다. 5. 여성은 거래된다 사극이 여성을 대 잇기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정절을 강조하며 억압했다면, 토속 영화는 상품처럼 거래한다. 그 배경엔 남성의 어리석은 물욕이 도사리고 있는데, 서너 명 만 모이면 반드시 투전판을 벌이는 그들은 노름빚을 갚기 위해 딸을 팔아 먹고(< 산딸기 3 >), 여자는 몰래 몸을 판다(< 물레방아 >). 여기서 자연 속에서 사는 여성 캐릭터들은 장터를 통해 문명을 접하고, 동동 구리무와 박하 분과 손거울의 유혹 앞에 종종 마음을 연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에서 김 주사( 최봉 )도 그렇게 순이( 정윤희 )에게 접근했다. 그렇게 유혹에 넘어간 여자들은 결국 유린당한다. 1 . < 화녀촌 >의 근친적 결말. 2. 토속 에로에선 그 어떤 곳에서도 정사가 벌어진다. 사진은 < 소금장수 >의 옥수수밭 3. 남자들이 셋 이상 모이면 투전판이 벌어진다. 사진은 < 산딸기 2 > 4. 여성은 결국 술집 작부가 되며, 그곳에서 번 돈은 남자의 노름 밑천이 된다. 사진은 < 산딸기 2 > 토속 영화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서서히 변주되고 확장된다. 하명중 감독의 리얼리즘적 접근이 두드러지는 < 땡볕 >(1985)과 < 태 >(1986)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며, 변장호 감독의 < 감자 >(1988)나 임권택 감독의 < 아다다 >(1988)는 문예 영화에 좀 더 가까운 케이스일 것이다. 여기서 이두용 감독의 < 뽕 >(1986)은 토속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원작이 나도향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문예 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면서, <뽕>은 기존 토속 영화가 지녔던 신파적이며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멜로드라마의 톤을 걷어낸다. 베테랑 이두용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영화를 조절하며 끌고 가는데,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톤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때도, 절박하거나 경직되지 않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유머로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 뽕 >의 꽤 논쟁 지점이 있는 영화다. 안협네( 이미숙 )는 마을의 매춘부이며, 그녀에 대한 동네 남정네들의 음험한 시선을 영화는 자연스레 합리화한다. 여기서 안협네라는 캐릭터가 다른 건 육체관계에서 일종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토속 영화들이 ‘겁탈당하는 여성’을 보여준다면, <뽕>의 안협네는 철저히 거래하는 여성이며 원치 않는 남자는 거절한다. 같은 해에 나온 < 변강쇠 >( 엄종선 , 1986)의 ‘옹녀’( 원미경 )가 강한 성적 능력으로 위협적 존재가 된다면, 안협네는 유혹적이면서도 주체적이며 현실적이다. < 뽕 > 이후 토속 영화는 약간 변화를 겪는다. < 옹기골 뽕녀 > 같은 유사 제목 영화가 나왔고, 나도향을 비롯해 김유정 , 계용묵, 김동인 등 토속 영화의 재료로 삼기 좋은 작가들의 소설이 대거 각색되었다. 흥미로운 건 김수형 감독의 < 떡 >이다. 김유정 의 원작을 옮긴 이 영화는 <뽕> 이후 토속 영화(와 사극)의 트렌드가 변했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면 <떡>은 ‘<뽕>+< 변강쇠 >’이다. 마을 남자들은 (그녀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점례( 선우일란 )를 넘본다. <뽕>의 안협네 같은 존재인 셈. 그런데 점례와 관계를 맺는 남자들은 에너지를 완전히 빨려 버린다. ‘옹녀’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결말인데, <뽕>에서 안협네의 남편 삼보(이무정)를 통해 암시만 되었던 독립운동가 콘셉트가 <떡>에선 명확하게 제시된다. < 산딸기 >나 < 뽕 >은 이후 프랜차이즈를 이루며 1990년대까지 이어졌지만(<뽕>은 최근 < 뽕 2014 >( 공자관 )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토속 에로는 대체적으로 1980년대 말에 수명을 다하고 만다. 이것은 에로 영화가 1988년 올림픽 이후 수그러들었던 것과 궤를 같이하며, 이 시기 한국의 에로틱한 영상 콘텐츠는 극장에서 비디오 시장으로 급속하게 중심 이동을 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토속 에로의 흐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와 기획영화가 등장했던 1990년대에 살아남기엔, 그 정서의 우울함과 여성관의 한계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뽕>이 최근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는 건, 어쩌면 그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 쇼생크 탈출 > < 미져리 > < 미스트 > < 캐리 > < 돌로레스 클레이븐 > < 하트 인 아틀란티스 > < 그린 마일 > <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Apt Pupil > < 샤이닝 > < 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 보편적으로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거나 상업적 성공, 혹은 비평적 성과를 얻어낸 작품을 대략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봤다. 10편이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어느 소설가가 10편 이상의 ‘성공적 영화화’라는 결실을 얻어 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킹에게는 ‘망한 영화가 많은 원작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물론 그렇다. 비교적 근래에는 < 셀: 인류 최후의 날 >과 사이파이 채널의 드라마 <헤이븐>이 있었고 <공포의 별장>이라는 제목 등으로 세 번이나 만들어진 「세일럼스 롯 Salem’s Lot」들도 신통치 않았다. 더 옛날로 가 보면 수많은 똥망작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 옥수수밭의 아이들 > 시리즈 중 1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며 < 괴물 Graveyard Shift > 등 온갖 희한 야릇한 영화들로 필모그래피가 더럽혀져 있다. 이건 다작을 하는 작가의 숙명이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거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들 중에서도 스티븐 킹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적지 않다. < 초능력 소녀의 분노 Firestarter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초능력 소녀의 분노>라는, 시놉시스를 제목화 해버린 번역제의 1984년 영화 < Firestarter >가 있다. < 캐리 >를 감명 깊게 본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는 ‘유년판 과학 소설 풍 캐리’라는 측면에서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특히 번역제에 나와 있는 바로 그 ‘분노’ 시퀀스가 지니고 있는 후련함과 은근한 공포는 나에게 30년 이상 뚜렷하게 각인 돼 있다. 사실 스티븐 킹 원작 영화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대부분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B급 상상력으로 도배돼 있는 바람에 B무비로 직행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지금은 거장이 돼 버린 크로넨버그의 < 초인지대 Dead Zone >가 그랬고 메리 램버트의 < 공포의 묘지 Pet Sematary >라던가 호러의 제왕 존 카펜터의 < 크리스틴 > 역시 1980년대 B무비를 사랑한 이들이라면 꼭 거쳐 간 작품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 자신 역시 B무비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죽음의 무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킹은 꾸준히 B무비와 어울리는 스토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물의 반란’이다.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들 중 대중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소재들이 예의 ‘무생물의 반란’이다. 그중에서도 기계들이 인간을 해친다는 내용의 영화들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 써스펙트 >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시됐던 1995년 작 <맹글러 The Mangler>에서는 세탁 공장의 대형 프레스 다리미를 비롯한 기계가 인간을 학살한다. 2016년작 < 셀: 인류 최후의 날 >은 핸드폰의 전자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설정이었고, < 크리스틴 >은 저주받은 자동차의 이야기다. 이렇게 하드웨어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소재는 그야말로 B급 영화를 위해 최적화돼 있다. 진짜 사물을 배치하고 약간의 장치만 하면 되니까 아트 디렉션에서도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단편 「트럭」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두 번이나 영화화됐는데 그중 먼저 만들어진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는 킹이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전문가 평가와 박스오피스 성적 모두 실패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 웨스트월드 >나 < 코마 > 등에서 감독으로서의 재능 역시 증명한 것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언제나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의 안정적 간택을 받을만한 정서로 무장했던 마이클 크라이튼에 비해 스티븐 킹은 스스로 B급 정서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는 한마디로 러스 마이어의 그라인드하우스 영화들, 로저 코먼이나 조지 A 로메로의 저예산 호러들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그 유명한 콜라 자판기의 공격 신이라던가 신체 절단 장면들은 스티븐 킹이 이 영화를 어떤 태도로 만들었는지 증명하는 부분이다. 충격적인 장면을 무표정하게, 때로 잔혹 유머로 버무리는 애티튜드는 킹이 소설을 집필하는 자세와도 동기를 이룬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의 가장 후련한 부분은 바로 음악이다. 작가들만으로 이뤄진 밴드 ‘Rock Bottom Remainders’의 멤버이기도 한 스티븐 킹은 AC/DC의 노래들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채웠다. 특히 주제곡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Who Made Who’의 호방함은 이 영화가 지닌 자세와 격을 함께 한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평범한 감독이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은 대단했지만 안타깝게도 배우를 보는 눈과 다루는 방법에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바람에 이 작품은 나 같은 변태들만 좋아하는 컬트영화가 돼 버렸다. 스티븐 킹의 영화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의 원작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좋아하지는 않는 영화도 만들 수 있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영화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도 놀랍거나 안타깝지 않다. 그 무한한 의외성. 그래서 언제나 스티븐 킹의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 타바코 로드 >(1941)는 당대에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했으며 오늘에도 존 포드의 영화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영화에 속할 것이다. 앤드루 새리스의 표현을 옮기면 이 영화는 “1940년과 1941년에 거둔 존 포드의 엄청난 성공행렬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사람들은 최고의 위치에 오른 포드가 왜 이런 프로젝트에 손댔는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포드의 열렬한 찬미자인 태그 갤러거의 두꺼운 저서도 이 영화에는 단 세 문장만 할애한다. “시나리오를 쓴 누널리 존슨은 < 타바코 로드 >가 엉성하고 서투른 구식 코미디에 의존함으로써 대실패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몇몇 마술적 순간들이 등장하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하층민을 바라보는 포드의 단순명료한 시선이 여기선 들뜬 포퓰리즘의 과장된 제스처로 대체되었다.” < 타바코 로드 >의 원작은 브로드웨이에서 1933년부터 1941년까지 최장기 공연기록을 세우며 대성공을 거둔 연극이다. 어스킨 콜드웰Erskine Caldwell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잭 커크랜드Jack Kirkland가 희곡을 썼다. 앤드루 새리스는 이 영화의 실패 이유가 당시 할리우드 제작준칙(hollywood production code)이 콜드웰의 재기 넘치는 음란함과 커크랜드의 화장실 유머를 용인하지 않는 바람에 존 포드와 누널리 존슨이 원작의 많은 부분을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판단도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이 영화의 제작 경위에 대해선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어 당시 포드의 의중을 알긴 힘들지만, 적어도 포드가 그의 영화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음란함과 화장실 유머 때문에 원작에 이끌리진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1937년 오마하, 연극 <타바코 로드>가 공연되는 극장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이 영화의 지지자는 두 사람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2014년 서울과 부산에서 존 포드 회고전이 열릴 무렵 간행된 「씨네21」에 보내온 자신의 존 포드 10베스트 명단에 < 타바코 로드 >를 포함시켰다. 이 명단에는 포드 전문가들도 잘 거론하지 않는 무성영화 <버킹 브로드웨이>(1917) <켄터키 프라이드>(1925)도 들어있다. 그리고 하스미다운 코멘트가 덧붙여져 있다. “< 철마 >(1924) 혹은 < 3인의 악인 >(1926)에서 시작해 < 수색자 >(1956)으로 끝나는, 그리고 < 밀고자 >(1936) < 역마차 >(1939) < 젊은 날의 링컨 >(1939) 등이 포함되는 포드의 10베스트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도쿄의 유난히 더운 날씨 때문에 내 마음은 포드의 덜 알려진 영화들로 향한다. 물론 추운 날에는 이 명단이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포드 열광자인 린지 앤더슨이다. 그는 “관점의 일관성을 고수하면서도 무드와 악센트를 교차시키는 포드의 재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 타바코 로드 >를 제시한다. 앤더슨은 이 영화를 “회한에 찬 애상과 격렬한 슬랩스틱, 냉혹한 풍자와 부드러운 감상성을 오가며 무드를 끝없이 변주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특출한 솜씨”를 보여주는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내로라하는 포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만큼 극단적으로 견해가 갈리는 영화는 <타바코 로드> 외엔 찾기 힘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노부부인 지터 레스터와 에이다 레스터는 목화농업으로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황폐화한 타바코 로드에 살고 있다. 17명 정도의 자식을 두었지만(그들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이젠 모자라고 착한 딸 엘리 메이와 역시 모자라지만 거의 미친 아들 듀드, 그리고 유령처럼 주위를 서성이다 불현듯 사라지는 노모가 가족의 전부이며, 끼니를 잇기 힘들만큼 가난하다.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의 땅이 은행에 차압당하고, 며칠 안에 농지 임대료를 내지 않으면 3대째 살아온 타바코 로드를 떠나야 할 처지다. 위기의 지터 노인은 엉성한 작전을 벌인다. 사적인 소감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2005년쯤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정상이 아니어서 마음이 가는 인물은 하나도 없는 데다, 특히 소란스럽고 경박한 아들 듀드는 때리고 싶을 만큼 짜증 나고 거슬렸다.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는 사실상 없으며,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인물들이 벌이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헛소동과 실소가 새 나오는 촌스런 유머와 슬랩스틱이 영화의 거의 전부였다. 난센스 코미디를 넘어선, 요즘의 은어로 ‘병맛’ 코미디였다. ‘이건 위대한 존 포드의 영화일 수가 없다.’ 황당무계한 영화 리스트라는 게 있다면 당장 최상위에 올리고 싶었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엔 즉각 해명하기 힘든 과격하고 대담한 몸짓이 관류하고 있다는 느낌,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사적이고 무모한 그 몸짓이 모종의 해방감을 빚어낸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이 영화보다 1년 전에 만들어져 모두에게 절찬 받은 < 분노의 포도 >를 다시 본 뒤에 더욱 강해졌다. 만일 누군가 <분노의 포도>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면 < 타바코 로드 >를 당분간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에서 뭔가 답답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와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사적인 느낌의 몇 자락을 말해보려 한다. < 분노의 포도 >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례없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메시지의 노골적 언명이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여기서 하층민인 톰 조드 일가는 나쁜 세상에 의해 상처 입고 수탈당해 떠도는 순결하고 가련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우리는 이 시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같은 의미에서 이 시선이 규범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의 견해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라면 특별히 칭송할 것도 문제 삼을 것도 없는 이 규범적 시선이 존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가 봐온 바와 같다. 존 포드의 영화는 대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스테핀 페칫이 연기하는 흑인은 충직하지만 멍청하며, 인디언은 강직한 전사와 잔혹한 살육자를 수시로 오간다. 여성들은 <일곱 여인> 등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수동적이며, 하층민들은 대체로 선량하지만 소란스럽고 잘 속는다. 포드의 탈규범적인 성향은, 그의 정치적 보수성을 비판하는 진보적 비평가들에 의해 종종 경시되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특별한 활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포드는 지금 세대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전력투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거침없다는 포드의 각인이 새겨졌다”고 말할 때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 분노의 포도 >는 공백과 비약의 수사학(<분노의 포도> 편 참조)에도 불구하고 < 러틀리지 상사 > < 샤이엔의 가을 > 등과 함께 포드의 드문 규범적인 영화에 속한다. < 굽이도는 증기선 >(1936)이 하층민의 악덕과 무지 그리고 미덕과 용기가 난장을 벌이는 축제의 영화라면, <분노의 포도>는 무고한 하층민의 고난과 시련이 점화한 분노의 영화이며 정의의 영화다. 두 영화 사이에 놓인 1939년의 ‘젊은 링컨’은 난장의 도취에서 정의의 소명으로 망설이며 느리게 이행한다. < 타바코 로드 >의 놀라운 점은 중년의 포드를 성공으로 인도한 이 궤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스스로 탈선한 열차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가난한 주요인물 모두가 동정할 여지도 없는 금치산자에 가까우며, 서사는 비루한 소동들의 연쇄일 뿐이다. 얼핏 보기에 포드는 < 분노의 포도 >에서와는 정반대로 이 가련한 하층민들을 조롱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터 노인은 가족과 합세해 아내(지터의 막내딸)가 도망갔다며 징징거리는 사위 러브(놀랍게도 워드 본드가 연기한다)를 구타해 그가 갖고 있는 무를 빼앗아 먹으며, 도망간 막내딸 대신 언니를 그에게 반강제로 보낸다. 지터는 어렵사리 구해온 옥수수를 먹느라 아이들 몰래 삶아 먹느라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집을 떠났다가 얼떨결에 돌아온 지터가 “어제부터 할머니(그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듯)가 안 보이네. 저기 숲으로 가서 죽었나 보군”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기가 막힌다. 물론 등장인물의 슬픔에 카메라가 깊이 동조하는 ‘마술적 순간’들이 간혹 등장하지만, 이 장면들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왜소해 아무리 봐도 애상과 풍자, 슬랩스틱과 감상이 균형을 맞추었다는 린지 앤더슨의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런 표현은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젊은 날의 링컨 >에나 어울릴 것이다. 무엇보다 포드는 이 영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시키길 거부하려는 것처럼 결말조차 터무니없어 보이도록 만들었다. 모든 소동이 엉겁결에 정리되었을 때, 그가 얻은 건 10달러밖에 없다. 7년 동안 멈춘 목화 농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했을 두 아이는 그사이에 떠났다. 그는 이미 농사지을 힘이 남아있지 않아 보일 만큼 늙어버렸다. 그런데도 이 추레하고 왜소한 노인은 어이없게도 “올해가 내 인생 최고의 해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 모든 면에서 < 타바코 로드 >는 < 분노의 포도 >를 뒤집어버린다. 마치 <분노의 포도>가 자기 영화가 아님을 강변하려는 듯, 같은 사회적 처지의 주인공을 내세워 놓고 인물도 사건도 모두 저열화하며, 진지한 감정과 의미 있는 행동의 가능성을 봉쇄한다. 간혹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되 균형과 조화를 파기한다. 자기 반동 혹은 자기 파괴의 시도처럼 보이는 포드의 이런 선택의 동기를 짐작하기는 힘들다. 다만 <타바코 로드>를 보고 나면 포드를 불균형의 충동, 불협화음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는 작가로 다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뿐이라면 < 타바코 로드 >는 ‘흥미로운 실패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난감함 속에서도 내가 매혹된 건 이 영화의 어떤 몸짓과 운동의 형상들이다. 난센스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방향의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부서짐의 운동이고 유일하게 일관된 행위가 있다면 사물을 부수는 행위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1 #2 #3 타바코 로드로 불리는 이 공간은 이미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다. 이웃의 저택도 지터의 초라한 오두막집도 모두 폐허의 형상이다. #4 #5 폭발음을 내며 위태위태하게 마을 길을 달려오는 지터의 작은 지프는 담을 부수며 진입하고 스스로도 바퀴가 하나씩 내려앉는다. 비가 쏟아지면 지터의 헛간도 현관도 내려앉는다. 이런 붕괴의 형상이 도입부에 제시되었다면 통상적 서사는 붕괴의 반대방향 즉 재건과 재생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 타바코 로드 >의 서사도 표면적으로 그런 방향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을 출신 중에서 제일 멀쩡한 청년 팀이 지터를 도우러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거의 핑계다. <타바코 로드>의 진정한 관심사는 이 붕괴 직전의 공간에 고급승용차가 소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다. 경위를 간단히 밝혀두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온 이웃 여인 베시는 이 마을의 엉터리 목회자이자 얼치기 예언자다. 그녀는 지터의 정신 나간 아들 듀드(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게 유일한 취미인 저능아다)에게 반해 그와 결혼한 뒤 자신의 재산 전부인 보험금 800달러를 고급승용차(Ford Super De Luxe Convertible)를 사는 데 써버린다. 지터는 1년 치 농지 임대료 100달러가 없으면 쫓겨나게 되므로 이 승용차가 향후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놓일 것으로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사태는 황당무계하게 전개된다. #6 #7 #8 #9 모자란 듀드는 차를 사자마자 나무를 들이받고 덮개를 미친 듯 뜯어내며 차를 부수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손봐주겠다며 전조등을 만지던 지터는 차를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결과 하루 만에 고급승용차는 초라한 고물이 되어버린다. 차를 몰래 팔아 100달러를 마련하려는 지터의 시도 외엔, 이 고급승용차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다. #10 그리고 이 영화의 백미가 등장한다. 운전을 방해했다고 듀드가 러브에게 시비를 걸자, 칭얼거리던 러브는 이제야 워드 본드답게 말없이 듀드를 때려눕힌 뒤 길가에 처박힌 차를 뒤집어 박살 내버린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헛소동의 심장이다. 붕괴 직전의 이 공간에 고급승용차가 소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 타바코 로드 >의 진정한 관심사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그것도 함께 부서져야 한다. 이 이질적 사물이 빨리 타바코 로드 자신의 형상처럼 무너져 내려야 한다. < 타바코 로드 >는 표면의 서사와는 무관하게 부서짐의 운동이며 붕괴의 유희다. 지터의 마지막 대사는 붕괴운동의 완료를 위장하며 동시에 암시하는 말이다. 사태가 호전될, 다시 말해 붕괴가 멈추고 재건이 개시될 어떤 전망도 없을 때, 가장 좋은 일은 죽음이다. 지터도 할머니처럼 사라져 죽어갈 것이며 이것이 타바코 로드의 형상이 이를 종착지일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다만, 서사의 표면적 흐름과는 정반대의 운동과 형상이 전개되는 기괴한 영화를 달리 본 적이 없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