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보우 인서던트
- 감독
- 월리암 웰만
- 제작년도
- 1943
- 출연
- 헨리 폰다, 다나 앤드류스, 메리 배스 휴지스, 안소니 퀸, 윌리암 에이스, 해리 모건, 제인 다웰
572돌 한글날이 며칠 지나긴 했지만 이번 호에서는 한글 관련 영상을 소개하려 한다. 한국인 감독 김인태 (1931~)가 1967년 캐나다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NFB)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Korean Alphabet(한글) >이다. 파스텔 보드를 이용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표현한 이 작품은 NFB를 대표하는 작가 노먼 맥라렌(Norman McLaren, 1914~1987)이 음향을 맡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인공 사운드(synthetic sound)를 삽입해 완성도를 높였다. 노먼 맥라렌은 1952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을 수상한 < Neighbours >를 비롯해 다수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통해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실험영화 감독으로 알려진 인물로, NFB가 애니메이션과 실험영화의 뛰어난 작품과 작가들을 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작가 노먼 맥라렌의 참여로 더욱 주목을 받은 <한글>은 1968년 제3회 테헤란 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았다. <한글>의 오프닝 크레디트 <한글>은 오랜 시간 알려지지 않다가 2002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주관한 ‘캐나다 애니메이션 특별전’에서 상영되며 발굴된 작품이다. 김인태 감독은 NFB 최초의 한국인 소속작가로 활약한 것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고, 이듬해인 2004년 제8회 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은 어떤 배경으로 NFB에서 <한글>을 만들게 된 것일까? 이 글에서는 <한글>이 탄생하기까지 여정을 대한(對韓) 원조 사업과 연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글>의 장면들 <한글> 제작 당시 김인태는 한국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소속 감독으로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 연수 중에 있었다. 김인태 감독이 소속되어 있던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법령에 의해 독립되기 전까지 통칭 ‘영화제작소’라 불렸는데, 이는 1958년 UN과 미국에 대한 원조로 설치된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와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제작 스튜디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950~60년대 한국의 공보 선전은 미국에 대한 원조 정책과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진행되었는데 이 영화제작소 역시 카메라, 인화기, 애니메이션 촬영기인 옥스베리(Oxberry) 등의 기계 설비를 구축하는 것부터 인력의 양성까지 다방면에 걸쳐 원조를 받았다. 그리고 NFB를 역할모델로 하여 한국의 교육영화 제작 시스템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 원조 사업에 따라 미국의 전문 인력들이 ‘시러큐스 계약(Syracuse Contract)’이라는 ‘팀’을 이뤄 영화제작소에서 연출, 촬영, 녹음, 미술 등 분야별로 3~5년에 걸쳐 영화 인력을 양성했다. 김인태 감독은 바로 이 교육 인력 양성 사업을 위해 1958년 선발된 영화제작소의 제1기 공채 인력이었다.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에 등장하는 영화제작소의 전경과 스튜디오 촬영 모습 (좌) 시러큐스 계약 인력과 영화제작소 행정관들의 회의 모습 (우)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이성철 소장자료) 영화제작소는 1958년, 최신식 기재 설치와 시러큐스 계약 인력이 파견되는 것에 맞춰 연출, 촬영, 편집, 미술 등 각 분야의 공채 직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중 미술부의 인력들은 실사영화에 필요한 제목, 자막 등의 기본적인 미술 작업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법을 교육받았고, 이에 따라 1958년부터 문화영화에 부분적으로 애니메이션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이러한 대한 원조로 진행된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 사업에 맞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애니메이션 광고를 제외한 소위 ‘최초의 순수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되고 있는 작품이 바로 국립영화제작소가 1962년에 제작한 흑백 단편 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 박영일 연출, 정도빈 작화) 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후에도 국립영화제작소는 미술부의 박영일과 정도빈 그리고 한성학 등을 중심으로 여러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개미와 베짱이> 홍익대학교 미대 출신의 김인태 감독은 아쉽게도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교육영화 전문 인력 수련 후 <전화가설>(1959), <전화도수제>(1961), <자동전화는 이렇게>(1962), <전화를 쓸 때는>(1962) 등의 체신 교육영화와 <치아와 건강>(1961), <기생충을 없애자>(1963) 등의 보건위생 교육영화를 비롯해 다수의 문화영화를 감독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NFB에서 <한글>의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미 작품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은 노먼 맥라렌과의 만남은 이 작품의 완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인태 감독의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영화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의 노먼 맥라렌 작품 관람과 NFB 연수는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 배경에는 1961년 12월 NFB와 국립영화제작소 간에 맺어진 문화영화 교환협정이 있었다. 양측은 이 협정에 따라 서로의 영화를 교류했는데 일례로 국립영화제작소는 NFB에 <새로운 고향>(양종해, 1961)을 배급하고, NFB의 <협동조합>과 <의자공과 소년들>을 들여와 우리말로 내레이션을 녹음해 상영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교류 배경에는 원조 사업 초기 영화제작소가 모델로 상정한 NFB의 제작 시스템이 큰 영향을 끼쳤다. NFB는 분야별 소재에 따른 분업화와 1인 제작 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역할모델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감독들은 NFB의 영화들을 시사하고 제작에 참조했으며, 최봉암, 김인태 등의 감독들이 1960년대 중후반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에서 연수를 받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자공과 소년들>의 오프닝 크레디트: 문화영화 교환협정을 사전 공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로서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Welcome to Motion Picture>) 목적하에 설립된 영화제작소는 교육영화 분야에서 애니메이션 인력을 비롯한 다재다능한 인력을 양성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지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국립영화제작소로 확대 개편되며 원조사업 진행 당시 집중되었던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이라는 목표를 넘어 정부 선전을 위한 영화제작에 치중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 이 글은 공영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 관계」,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와 공영민, 「<의자공과 소년들> 해제」, 허은 엮음, 『영상, 역사를 비추다: 한국현대사 영상자료해제집 7-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해제집 1』, 선인, 2017에서 일부 발췌하여 엮었음을 밝힌다. 출처 <Korean Alphabet> - NFB 누리집 https://www.nfb.ca/film/korean_alphabet /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 개미와 베짱이 > < 전화를 쓸 때는 > < 치아와 건강 > < 의자공과 소년들 > -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Welcome to Motion Picture >(1959) - 한국영상자료원 테드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 콜렉션 소장자료 이순진, 「김인태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2년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문화영화 1: 김인태‧이지완‧이정섭』, 한국영상자료원, 2012.
영화의 여명기, 당시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에디슨 사(社)는 자신들이 제작한 단편 필름 작품의 저작권 등록을 위해 프레임 전체를 종이에 프린트해 미의회도서관에 납본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초기 무성영화의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은 실물 프린트를 통해 저작권을 등록하고 돌려받는 식으로 정책이 바뀐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즉 1912년 이전까지 미국에서 영화는 사진의 형태를 취함으로써만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번잡하기 짝이 없는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 덕분에 당대의 영화 상당수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화재에 취약한 질산염 필름(nitrate film)으로 제작되었던 초기 영화의 상영본과 오리지널 네거티브 대부분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동안, 미의회도서관에 보존되었던 이 ‘종이 프린트’(paper print)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형상들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다시 투사할 그날을 망각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디슨 사에서 제작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용 단편 <재채기>(1894)의 종이 프린트. 총 45프레임. 저작권 등록(1894년 1월 9일)된 최초의 영화. 1942년, 당시 미의회도서관 저작권관리국 직원이었던 하워드 월스(Howard Walls)는 저작권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던 중 그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1894년부터 1912년 사이에 제작된 3,000여 편의 영화의 종이 프린트 더미들을 발견한다. 월스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의 지원을 얻어 종이 프린트들을 다시 셀룰로이드 필름에 옮기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지만, 종이에서 필름으로의 매체 전환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결실을 보게 된 것은 켐프 니버(Kemp Niver)를 통해서였다. 1950년대 초부터 니버를 통해 프로젝트가 다시 활성화된 이후 1965년 즈음에는 종이 프린트 대부분이 16mm 필름 프린트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월스와 니버, 그리고 종이 프린트에 얽힌 이 흥미로운 역사는 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빌 모리슨의 아름다운 단편 <그녀의 영화 The Film of Her>(1996)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종이 두루마리에서 되찾은 미국 역사>(1953, 19분) 종이 프린트를 16mm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전환하는 공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당시 복원된 초기 영화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켐프 니버가 대본을 쓰고 연출했다. 미의회도서관 소장 종이 프린트의 복원 소식에 관심을 가진 이들 가운데는 미국 아방가드르 영화감독 켄 제이콥스도 끼어 있었다. 세인트존스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몇 편의 복원 프린트를 대여했다. 이 가운데 한 편의 영화가 특별히 그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05년에 빌리 비처(Billy Bitzer)가 촬영하고 연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릴짜리 작품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그것이다. 스콧 맥도널드(Scott Macdonald)와의 인터뷰에서 켄 제이콥스와 그의 부인 플로 제이콥스는 이 작품을 소재로 작업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플로 제이콥스 : 하지만 이 영화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전에 필름들이 저희 집에 배송되어 왔고 그래서 그가 그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래저래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요즘에 신경시스템(Nervous System: 켄 제이콥스가 고안한, 잔상효과를 이용한 환각적 영사 방식)을 가지고 하는 식은 아니었고요, 그보다는 “와! 이거 봐, 내가 이 남자를 뒤로 움직여볼게!” 하는 식이었죠. 켄 제이콥스 : 점점 더, 저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듯 이 필름들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친구들을 불러 그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해 보였죠. 한 번은 퍼포먼스가 끝났는데, 제 친구인 화가 존 쿠스(John Koos)가 다가왔어요. 전 그때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영사기 옆에 서서 어질어질한 가운데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려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가 말하길 “켄, 이거 끝내주는데! 이건 꼭 촬영해둬야 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려고 생각했어.”라고 대답했죠.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고요. 그가 제 어깨를 꽉 붙들면서 말했죠. “꼭 그렇게 해!”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방가르드 영화사(社)의 기념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톰, 톰, 피리꾼의 아들(Tom, Tom, the Piper's Son)>(1969~1971)이다. 종종 이 작품은 1905년의 무성영화 필름을 소재로 작업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작품으로 기술되곤 하는데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기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원본 영화의 필름 복제본이나 디지털 영상클립을 가지고 작업하는 통상적인 파운드 푸티지 작품들과는 달리,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반투명 스크린에 1905년 작 원본 영화를 구식 칼라르트-빅터(Kalart-Victor) 16mm 영사기로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뒤로 그리고 다시 앞으로, 때로는 깜빡이게, 때로는 멈추는 식으로 영사한 것을 16mm 카메라로 스크린 반대편에서 재촬영한 기록물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에이빈 뢰사크(Eivind Røssaak)가 지적한 대로, “아카이브적인 것과 퍼포먼스적인 것 사이의 인터페이스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위)와 빌리 비처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첫 번째 장면(아래)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물성(materiality)에 집중하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한 경향에 매혹을 느끼는 이라면, 때론 더 이상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필름의 세부를 확대해 입자(grain)를 감촉하게 하면서 미적 경험을 끌어내는 부분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혹은 매체를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표현의 역사에 관심을 지닌 이라면,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rgath)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 Southwark Fair>(1733)에 묘사된 광경이 빌리 비처를 통해 운동감을 얻고, (종이 프린트 형태로 미의회도서관에 보관되었다가) 제이콥스의 손을 통해 다시 떠들썩한 영화적 환영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경험의 힘은 굉장하다. 원본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형상들을 멈추고, 확대하고, 깜빡이게 하는 영화적 안무의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관람자는 일시적으로나마 다른 우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제이콥스의 영화가 도취의 경험에만 탐닉하면서 원본 영화를 무정형적인 시각적 덩어리로 재가공하고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몇몇 평자들이 지적한 대로 제이콥스의 작품은 일종의 “세미나 같은”(뢰사크) 분석적 구조 — 원본 영화 전체를 보여주고, 이어 제이콥스 자신에 의해 꼼꼼히 탐사되고 변주된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원본 영화를 보여준 후에 짧은 에필로그로 마치는 방식 — 를 취하고 있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전체적 구조에 실제로 자신이 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방식이 반영되어 있음은 제이콥스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와 같은 평론가는 언어에 기반을 둔 종래의 이론적 연구를 확장시키는 ‘시각적 연구’(visual study)의 탁월한 사례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을 꼽기도 한다. 브레네즈에 따르면 제이콥스는 “기술적 선도라는 면에 있어서나 텍스트적이고 영화적인 표명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론의 창조자”이다. 하지만 결국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 대해 가장 근사한 설명을 내놓은 것은 제이콥스 자신이다. “예술은 타격을 가해 당신을 수백만 조각으로 토막을 내고는 다음 타격을 위해 결합시킨다. 작품에는 질서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질서는 정신없는 경험을 자극하기 위한 방안(recipe)일 뿐이다.” 한편으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여기서 제이콥스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필름을 조작하면서 내뱉은 “와!”, 혹은 그의 16mm 퍼포먼스를 본 친구 존 쿠스가 내뱉은 “끝내주는데!” 같은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시공간의 특이성 자체를 영화화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여기서 제이콥스는 퍼포먼스라고 하는, 일시성과 현장성(actuality)에 속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 자체의 경험을 영화적 장치로 포착하고 재구성한다는 대담한 모험에 뛰어든 것이다. 3D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재구조화하기 이전에 시도된, 전통적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를 통한 ‘경험의 복제’라는 실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영화사(史)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유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제이콥스의 야심은 카메라 앞에 놓인 사물, 인물, 혹은 사건과 같은 현실을 복제하고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영화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익숙한 영화관(觀)을 이미 훌쩍 넘어서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퍼포먼스는 그것을 단순히 카메라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경험의 질감과 양감을 상실한 건조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예컨대 무대극을 현장에서 기록한 영상물들은 어쩐지 생기 없는 인형놀이와 같은 느낌을 준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제이콥스가 1905년 작 원본 영화로 16mm 퍼포먼스를 행하고 있는 광경이나 그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반투명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삼각대를 장착한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다양한 크기로 촬영되었고 이후 이 촬영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하게 편집되었다. (반면 오늘날 신경시스템을 이용한 제이콥스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에 비친 시각적 형상들을 고정된 카메라로 장시간 촬영해 편집 없이 상영용 디지털 버전으로 제공되곤 한다.) 이따금 제이콥스는 어둠 속 한가운데 조그맣게 빛나는 스크린을 보여주거나,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을 보여주거나, 영사 중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는 광경을 삽입함으로써,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원본 영화 자체가 아니라 스크린에 비추어 재촬영한 영화의 표면임을 꽤 직접적으로 환기시키기도 한다. (아래 그림 참조) 1905년 원본 영화의 프레임 일부가 확대되어 보이다가(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스크린 전체가 보인다(우)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 스크린 왼쪽에 영사 도중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보인다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경험의 복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에 걸맞은 상영 환경을 영화적 장치로서 요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영화관 환경보다는 (제이콥스가 1905년 원본 영화를 가지고 그의 16mm 퍼포먼스를 행한 환경과 유사하게) 영사기가 영사실이 아닌 객석 가운데 자리한 상태에서 주기적으로 모터 소리를 공간에 퍼뜨려가며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사할 때 비로소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를 현재적 경험으로 되살려 놓는 것처럼 보인다. 국내에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필름으로 처음 상영된 것은 2016년 10월 16일 문래예술공장에서였는데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주관하는 무빙이미지 포럼이 마련한 『영화에 관한 3개의 강연과 노트』 행사의 일환으로 —이때 상영환경 또한 바로 그러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상영될 때,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어느 순간 그것의 영사를 감싸고 있는 공간을 기묘하게 유령적인 활력으로 물들인다.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가 지극히 감각적으로 현전하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곧 부서질 것 같은 환영적인 느낌으로만 그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강의를 들을 때 으레 그러하듯) 때론 졸음을 부르기도 하는 나른한 긴장 속에 임하면서, 유령화된 공간 저편에서 빛나는 스크린으로부터 문득 생생한 유령들이 튀어나와 춤추는 것을 목도할 때, 그 춤이 절대적으로 지금/이곳(now/here)에서 펼쳐지는 어디에도 없는(nowhere) 춤이라는 것을 감히 부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본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선집 『Optic Antics: The Cinema of Ken Jacobs』(2011)를 참고하면 좋다. 본문에서 인용한 에이빈 뢰사크의 글 「Acts of Delay: The Play Between Stillness and Motion in Tom, Tom, The Piper's Son」과 니콜 브레네즈의 글 「Recycling, Visual Study, Expanded Theory: Ken Jacobs, Theorist, or the Long Song of the Sons」 또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인용한 인터뷰는 캘리포니아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스콧 맥도널드의 『A Critical Cinema 3: Interviews with Independent Filmmakers』(1998)에 수록되어 있다. 제이콥스의 영화세계 전반과 신경시스템 혹은 신경환등기(Nervous Magic Lantern)의 원리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를 얻고 싶다면 『씨네 21』에 실린 중앙대학교 김지훈 교수의 글 「 무한과 역설의 영화 」를 참고하길 바란다. 신경시스템의 원리를 활용한 제이콥스의 장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는 <로렐과 하디가 등장하는 시각적 익살광대극: 안녕, 몰리 Optic Antics Starring Laurel and Hardy: Bye, Molly>(2005)인데 이 또한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아들인 에이저젤 제이콥스(Azazel Jacobs)는 촉망받는 독립영화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그의 <마마스 맨 Momma's Man>(2008)에는 켄과 플로 제이콥스 부부가 주인공의 부모 역으로 출연해 거의 그들 자신을 연기하다시피 한다. 1965년 이후 이들이 거주해 왔던 뉴욕 맨해튼 아파트(꼭대기 층)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조용한 기사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는 매우 점잖고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매력적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런 의구심이 들더군요. 그가 과연 이 스태프들을 지휘할 수 있을까?“ 배우 가브리엘 번이 켄 로치를 처음 만난 건 1987년에 상연될 예정이었던 연극 <퍼디션>의 리허설 현장이었다. 주로 올리버 스톤처럼 패기와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들과 함께했던 그에게 켄 로치는 감독의 역량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상이 ‘경이로움’으로 바뀌게 된 건 연극 <퍼디션>이 논란에 휩싸이면서부터였다. 켄 로치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던 사회주의 극작가 짐 알렌의 대본을 바탕으로 연출된 이 작품은 유대인 시오니스트 지도부가 나치의 아이히만과 협력 관계였음을 폭로하고 논쟁하는 재판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도 전부터 언론과 예술계 일각에서는 켄 로치와 짐 알렌을 반유대주의자로 몰아세우기 시작했고 작품의 정치성을 문제 삼았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작자와 극장 측은 첫 공연을 불과 30여 시간 앞둔 상황에서 제작 철회를 선언해 버린다. 가브리엘 번이 켄 로치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 것은 엄청난 비난과 여론 압박, 제작자와의 격론에 대응하는 그를 지켜보는 과정에서였다. 연극을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비겁한 겁쟁이가 되거나 배신자가 되었다. 결국 연극이 제작자들에 의해 철회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켄 로치는 침착하고 조용하되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한 기사와도 같았다. Versus “위대한 투사 vs 혐오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 “리얼리즘의 대가 vs 미친 맑시스트” “천재 vs 비열한 자” 영국 사회에서 켄 로치는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60년대 BBC에 입사해 방송용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던 시기에서부터 그는 혁신가였다. 부르주아 드라마와 관습적인 세트 촬영이 관행이었던 당시 그는 BBC 내에서 유일하게 영화적인 기법(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정신과 방법 그리고 브레히트적인 스타일의 거리 두기와 관찰)을 방송 드라마에 적용한 감독이었다. 무엇보다도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고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았던 노동계급의 삶과 사랑, 노동과 현실을 카메라에 포착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 여성의 출산과 육아, 홈리스 문제를 다큐멘터리 적인 방식으로 극화한 <캐시 컴 홈 Cathy Come Home>(1966)은 방영과 함께 논란을 일으켰다. 영국 노동계급이 직면한 사회적인 이슈를 BBC에서 직접 화법으로 다뤘다는 사실 그 자체와 그로 인한 놀라운 시청률 및 여론은 결국 한 편의 드라마가 영국 사회의 제도와 정책에 개입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켄 로치의 초창기 작품들을 도맡아 제작한 제작자 토니 가넷이 그를 만난 것도 이 시기 즈음이었다. 토니 가넷도 처음엔 켄 로치의 작품에 출현하는 배우였다. 가브리엘 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토니 가넷에게도 켄 로치의 첫인상은 지루했다. “마치 은행원 같았다.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몹시 수줍고 조용하며 겸손한 이 사람은 매번 논쟁과 파란을 일으켰고, 영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켄 로치의 아버지는 명민하고 공부 잘하는 아들이 옥스퍼드 법학과를 졸업했으니 엘리트 법조인이 되길 바랐으나 그는 이미 청소년기부터 연극과 연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직접 무대에 올라 연기를 했고, 졸업 후에는 방송국 연출자로 시작해 BBC의 부르주아적 관행과 제도 그리고 영국 사회의 검열 및 보수주의와 맞서 싸워야 했다. 1979년 신자유주의의 화신, 대처가 장기 집권을 시작하면서 그는 더욱 궁지로 몰렸다. 토니 가넷 및 짐 알렌과 함께 했던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이 검열 및 정치적 편향성 논쟁에 휘말리면서 방영 금지에 처하곤 하였다. 특히 <리더십의 문제 A Question of Leadership>(1981)에서 노동자 계급을 배신한 노조 간부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좌파 진영 내에서도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대처가 검열을 강화하면서 BBC는 더욱 보수화되었고 그는 대처가 물러난 90년까지 제작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더구나 87년에 준비했던 연극 <퍼디션>이 제작 중단되면서 그는 암묵적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아무도 그와 작업하려 하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가족을 위해 맥도날드 햄버거를 비롯한 몇 편의 상업 광고를 찍게 된다. 켄 로치는 이 시기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소회를 밝힌다. 그가 극영화로 복귀한 것은 대처가 물러난 90년이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오랜 지배 종속의 문제, 정치적 계략의 문제를 인권 변호사 주인공을 통해 풀어낸 < 숨겨진 계략 Hidden Agenda >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게 되지만 정작 영국 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금 아일랜드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으로 200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그리고 은퇴작인 < 지미스 홀 >이 또다시 아일랜드 문제를 지배자의 관점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저항과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풀어냈을 때 영국 언론은 그를 자기 조국을 증오하는 미친 맑시스트로 폄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6년, 영국 복지제도의 허점을 다룬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 칸 영화제에서 또다시 황금종려상을 받자 영국 보수당은 의회에서 그를 영국 사회에 먹칠하는 반역자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영화와 정치 그리고 켄 로치 “누군가의 삶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의 핵심은 정치학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드라마와 갈등의 핵심에는 언제나 정치가 존재합니다.”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 켄 로치의 삶과 영화 >(2016)는 그의 개인사와 영화 역사를 교차편집하는 방식으로 인간 켄 로치를 조명한다. 영화계 일각에서 그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추앙받지만 영국 사회 내에서, 심지어 좌파 진영 내에서조차 그는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조국의 문제(영국인으로서 아일랜드 문제를 다루는 방식), 계급의 문제, 신자유주의와 복지제도의 문제.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논란과 논쟁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50년이 넘는 영화 인생을 버텨왔다. 영국 미디어 연구자 존 힐은 그의 모든 작품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영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켄 로치의 작품활동과 영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은 않는다. 이 영화는 그의 지난한 영화적 삶 속에 공존하는 인간 켄 로치의 모습을 포착한다. 노동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그 명민함으로 인해 상류층의 주된 교육기관인 옥스퍼드 법대에 진학하기까지, 젠틀하고 조용하지만 그가 어떻게 굴복하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고결한 사회주의 액티비스트 감독으로 존재해 왔는지, 무엇보다도 자식을 잃어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슬픈 아버지였는지, 이 영화는 그의 오랜 동료와 가족들의 입을 빌려 들려준다. 이 작품은 켄 로치가 영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를 연출하던 그 무렵에 촬영되기 시작하였다. 2014년작 < 지미스 홀 >로 은퇴선언을 한지 2년 만이었다. 영화 현장에 들어설 때마다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하는 압박감을 느낀다는 그가, 다시금 은퇴를 번복하고 추운 현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제작자 토니 가넷은 그가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영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긴축 재정과 복지제도 축소가 영국 노동계급의 삶을 나락으로 몰아넣는 상황 속에서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잘못된 제도와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 그것이 그를 현장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와 최근 20년 동안 함께 작업해온 시나리오 작가 폴 라버티는 그를 이렇게 비유한다. “지난 50년의 영화 인생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정치의 문제였다. 피상적인 문제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이슈로서 그러하다. 그의 작고 마른 몸 안에서 불타오르는 열정과 에너지가 그것을 이끌었다. 그는 그 열정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그에게 던져진 마지막 질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투쟁하는 삶의 한 가운데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마치 무수하게 커다란 목소리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것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질문한다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작가주의’ 타이틀을 거부하며, 영화는 집단 노동의 결실이라 말하는 그는 자신의 영화가 어떠한 성취를 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응답한다. 그러나 토니 가넷과 폴 라버티,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기나긴 그의 필모그라피가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타협하거나 멈춰서지 않으며, 굴복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영화들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특히 그의 은퇴작으로 소개됐던 < 지미스 홀 >의 주인공 지미 그랄튼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난한 노동자들을 연민하고 연대할 줄 아는 예술가이자 액티비스트인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