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소녀-가글게임
- 제작년도
- 2009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연재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고 완성은 커녕 시작도 제대로 못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쏜살 같은 건 우리 자신이며 한국영화고 시네마 그 자체다. 사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리는 시간을 볼 방법이 없다. 움직이는 초침을 보거나 스마트폰의 숫자를 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첫 연재 분에서 금정연과 나는 서교동의 콜마인이라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연재를 위한 기획회의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카페 콜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카페 직원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폐업했으며 그 자리엔 오버트라는 이름의 다른 카페가 들어섰다. 그 사이 니콜라스 케이지가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영화 < 미친 능력 >이 개봉했고(졸작) 최동훈의 야심작 < 외계+인 1부 >가 개봉했고(ㅠㅠ) 장 뤽 고다르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죽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서울 아파트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루나코인의 권도형은 도망자가 됐으며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샀고 윤석열이 해외 순방을 다니고 문재인이 추천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친구에 의하면 문재인과 윤석열은 오바마와 트럼프의 거울쌍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닌다. 완전히 다르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가 픽션처럼,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예견하고 습격한다. 2022년이 끝나가는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한국 영화는 < 압꾸정 >, < 데시벨 >, < 올빼미 >, < 인생은 아름다워 >, < 동감 >, < 우수 > 등이다. 내 주변에 이 영화들을 본 사람은 없고 보러갈 사람도 없다. 한국 영화는 괴멸한 것처럼 보이지만(내 주변에서)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청룡영화상에서 박찬욱의 < 헤어질 결심 >이 상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해보라. 1960년대 TV의 습격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영화는 십년 후 블록버스터 군단으로 세계 문화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OTT도 게임도 두려워할 것 없다. 전 세대의 거장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할 것도 없다. 그보다 더한 거인들도 일찍이 명을 다했지만 영화는 끄덕하지 않았다. 영화는 영웅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는… 영화는……. 지그프린트 지린스키는 과거의 영화를 임대업으로 간주했다. 영화의 본질은 돈을 받고 2시간 동안 특정 공간의 좌석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TV는 사람들이 기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데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TV는 가구이며 인테리어 업종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문학적인 텍스트에만 해당했던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영화 그 자체가 소유되고 이용되기 시작했다. 시청각의 서적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상 파괴의 도구로 미디어 이론만큼 유용한 게 없다. 이러한 관점은 경주마처럼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과도한 감정 이입을 막아준다. 극장이 중심인 영화가 임대업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OTT가 기승을 부려도 시네마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신체의 부동성을 강제하는 임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나윤이 아버지인 금정연씨와 정원이 아버지인 오한기씨가 극장에 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TV용 영화가 큰 의미없이 사라진 이유도 여기 있고 OTT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OTT는 개별 콘텐츠가 아닌 리스트의 문제다. 개별 작품은 빨리 감기나 건너 뛰기로 감상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영원히 보지 않더라도 무엇을 볼 가능성이 있느냐다. 선택되지 않은 잠재성, 가능세계가 OTT의 우주를 이룬다. 우리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소유한다. 반면 극장은 지금 당장 행동하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용산 아이맥스는 매진되고 영화는 내려갈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시간성에서 중요한 건 러닝타임이 아니라 상영 기간이다. 영화는 점점 더 이벤트화 되고 이 이벤트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OTT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닌자처럼 통장에서 구독료를 가져가게 허락만 해준다면 가능세계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워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 < 수리남 >을 볼 것이다. 언제 볼진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종말은 없다. 시네마에는 새로운 시작 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했던 방향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금정연은 말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가 한국 사람을 만든다고. 영화 이전의 나는 목적도 의미도 불분명한 떠돌이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 이후에야 비로소 K정연이 될 수 있었다고, 그게 바로 존 포드가 말한 픽쳐의 의미라고 말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2005년, 정성일은 씨네21에 신설된 코너 《전영객잔》에 들어갈 글을 청탁받으면서 당시 편집장인 남동철에게 “꼭 영화에 관한 평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첨언을 들었다. 남동철은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전영객잔의 소개에 덧붙인다. 정성일은 2005년에 쓴 이 글을 2010년에 책으로 묶으면서 5년 동안 상황이 어떻게 후퇴했는지 돌아본다고 쓴다. 아마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그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첫 꼭지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영화비평에 대한 근심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재밌는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분야에나 반복되는 후렴구이기 떄문이다. 이제 문학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전시를 진지하게... 이제 브릿팝을 진지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이 후렴구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문학비평의 경우에는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에 대한 담론, 영화 글이 진지하게 소비되고 이야기된 시기는 언제일까? 그런 시대가 있었나.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남동철이 한탄한 바로 그 시절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아무도 안 읽어!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아직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을 읽고 분노하고 절망할 때라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5년에 글을 쓴 정성일은 왜 영화비평에 관한 해묵은 수사에 동의한 걸까. 그는 이렇게 쓴다. “위대한 영화를 쓸 때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해야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영화를 쓸 때 우리는 하찮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위대함과 하찮음을 점점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하찮은 영화 앞에서 자기만 위대한 척한다. 눈이 멀어 갈 때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화비평을 읽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평이나 리뷰를 쓰긴 쓰고 읽긴 읽는데 거기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사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준과 권위가 사라지고 하찮음이 위대함으로 둔갑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내가 종종 농담 삼아 어둠의 정성일이라고 칭하는 임재철 역시(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를) 금정연과 내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영화도 아닌 걸 영화라고 한다고 말이다(인용은 정확하지 않음). 그러면서 그가 우리에게 건네준 책은 V. F. 퍼킨스의 「영화로서의 영화」(1972)였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빅터 퍼킨스의 유일한 단행본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준(표준)criteria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성일, 임재철 두 선생님의 훌륭함과 무관하게 나와 정연씨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처음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그랬고 영자원 연재를 시작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그랬다. 우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단지 교란, 전복, 위반, 철폐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 권위, 규범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의 특수성들이 특수성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공통의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취향, 상호존중 따위로 퉁 쳐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영화경험. 쑨거에 따르면 1950년대 말 미국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독특한 상태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모든 지역이 공유하는 지리적 특징을 수집해야하는지 여부였다.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왔다. “특수성의 상태로 재현된 대상이 일반적 규칙으로 다듬어지거나 추상화되지 않은 채 여러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때 리처드 하트숀은 유사성에 대해 인습과 다른 정의를 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정의하는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지엽적인 부분을 쳐낸 후 남은 주요 차이”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성질”인데, 유사성이 바로 차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떻게 특수성들 속의 차이가 우리를 연결하는 보편적 고리가 될 수 있을까. 좋고 나쁨,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는 기준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얼마전에 만난 강보원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심심해서 Dbpia에서 금정연과 정지돈이 과거에 쓴 글을 보는데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더라구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러는 거죠. 아니, 자꾸 그러지마, 그걸 왜 열어, 이사람들아.” 글쎄, 그걸 왜 열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을 하는 강보원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감독의 < 퍼스트 카우 >(2019)는 오프닝 타이틀 후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영화를 시작한다.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자연스럽지만, ‘man’은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 함의를 옮기기 위해 고심하게 하는 단어이다. man이 인간이라면 남성으로서(만) 인간이며, man이 남성이라면 인간 대표로서 남성(만)이다. <퍼스트 카우>는 블레이크에게,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20년대 서부 개척지라는 시공간에게 아무런 모순 없이 당연했을 인간-남성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고 해체하는 시도를 한다. 규범적 남성성 외부의, 즉 ‘인간’ 밖의 남성의 우정이 전면화 되고, 그 우정은 (개, 도마뱀, 올빼미, 고양이, 소와 같은) 동물과 여성, 즉 비남성-비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 <퍼스트 카우>는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진술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의심한다. 쿠키의 첫 등장은 단순하지만 다정하고 경쾌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버섯을 채집하는 섬세한 손으로 제시된다. 노란 버섯들 사이로 몸이 뒤집혀 노란색 배를 드러낸 작은 도마뱀을 조심스럽고 친절한 손길로 도와준다. 이 다정하고 충만한 분위기는 곧 외부의 사운드에 의해 깨진다. 쿠키는 떠돌이 모피 사냥꾼들의 무리에 고용된 요리사다. 사냥꾼들은 쿠키가 정성스레 채집한 버섯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들을 잡아서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위협하듯 말하거나 툭하면 주먹 다짐을 한다. 쿠키가 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환영 받지 못 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쿠키 자신도 비규범적 남성으로서 자신을 비애적으로 대하거나 이 세계에 안달복달하며 적응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대충 따돌리고 자신만의 텐트로 숨어들거나 도망가버린다.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 부츠를 장만해 신고 남자-인간들의 미개척지를 걷는다. 한편, 쿠키와 우정을 나누는 킹 루는 상승을 향한 도전에 불타는 기업가 기질로 충만해 있다. 개척지의 남성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성정을 갖추고 있지만, 인종적으로 남성-인간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 한다. 킹 루는 올빼미가 쿠키 일행의 텐트를 내려다 보는 날 밤 벌거벗은 채 나타나고, 쿠키로부터 온기와 먹을 것, 쉴 곳을 제공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연히 쿠키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작은 집으로 초대한다. 한참 숲길을 걸어 도착한 오두막에서 둘은 술을 나눠 마시고 킹 루는 장작을 패러 나간다. 오두막에 남겨진 쿠키는 잠시 어색해하다가 곧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쓴다. 이불을 털고 꽃을 구해와 오두막을 장식한다. 이후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 둘의 이러한 작은 일상들이다. 같이 먹을 것을 채집하고 집을 돌본다. 한 명이 빨래를 하면, 한 명은 낡은 옷을 기운다. 서부 개척 시대 백인-남성-인간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남성성 구현의 실패나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전에도 많다. 그러나 그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은 종종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매혹이나 열렬한 열망, 그리고 실현될 수 없음에 대한 비애, 자기연민을 동시에 노출한다. <퍼스트 카우>는 결론적으로 실패든 비애든 그러한 이상적 인간-남성 규범을 통한 남성성 탐구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이 두 남자의 이러한 필요에 의한 일상 노동으로 채운 시간을 보여주고, 애정 어린 다정함이 기반이 된 관계에 집중한다. 이 다정함의 관계는 인간- 남성의 규범적 관계를 전복하거나 감화시키기 보다, 즉 휴머니즘의 가치를 대체하기 보다 그 주변의 비인간적인 것들을 향한다. 쿠키는 ‘첫 번 째 소’(영화의 타이틀 롤!)의 우유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매일 밤 짜러 가지만, 소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닌 의존하는 공존의 자세로 소를 대하고 둘 사이에 애착이 형성된다. 영화에서 관객이 제일 먼저 보는 생명체는 개이다. 그리고 그 개 옆에는 여자가 있다. 개가 가장 먼저, 그리고 다음으로 여자가 이 둘의 오래 된 과거의 물질적 증거를 발굴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년들이었던 것이 (감독의 전작 <웬디와 루시>(2007)를 떠오르게 하는) 개와 여자로 바뀌었다. 영화는 종종 개와 소, 고양이, 올빼미와 같은 동물들이 무엇을 바라보는 눈이나 얼굴, 그리고 그들 시선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진행과 전혀 상관은 없지만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의 원주민 여성들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얼굴도 종종 포착한다. 즉,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에는 동물들과 원주민 (여성들)의 시점이 포함되어 있다. 쿠키와 루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지만, 영화에는 원주민 말을 하는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원주민 촌장의 아내와 영국에서 온 지역 권력자이자 ‘퍼스트 카우’의 소유자인 팩터의 아내이다. 두 여성은 서로 긴장 관계인 남편들 사이에서 말을 전달하는 도구거나 이국적 장식품처럼 기능하다가, 남자들이 방에서 사라지자 마자 자리를 옮겨 가까이 앉고 긴장이 전혀 없는 친밀하고 즐거운 얼굴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의 공기는 짐짓 대접하는 척하지만 허세와 과시, 긴장으로 가득 찬 남자들 사이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퍼스트 카우>는 이러한 다정함 관계와 비인간-남성적 시선들을 결코 이상화하지 않는다. 서부 개척 시대의 시간을 정복이 아니라 다정한 공존의 관계 비인간-남성적 시선들로 채우지만, 이것은 곧 부서지며, 영화의 시작부터 예정되어 있다. 1820년대로 가기 전, 영화는 현대를 경유한다. 관객은 두 주인공의 시체를 미리 보고서야 1820년대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개가 시체를 발견하기 앞서, 제시되는 것은 넓은 강에 굉음을 내는 거대한 증기선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기차나 마차가 지나가던 풍경을 포착하는 오프닝은 감독의 전작들과 겹쳐지며, 또한 영화의 끝에 감독이 경의를 표했던 피터 허튼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해 침범된, 조직된 자연이다. 그리고 ‘퍼스트 카우’가 배를 타고 지주 팩터의 소유지에 도착하는 모습은 이 증기선이 움직이는 모습과 겹친다. 쿠키가 공존과 애착의 관계를 소와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이 소는 등장할 때부터 개인의 사유재산, 가’축’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소유권으로 통제된다. 킹 루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쿠키의 관점과는 달랐다. 비버를, 소의 우유를 가공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채로 있는 미개척 서부는 킹 루에게 아직 역사가 시작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팩터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약탈권과 소유권은 보호되지만, 인종적 약자인 킹 루의 초기 자본축적을 위한 약탈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영토와 자원에 대한 독점 소유권과 강탈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초기 미국 개척 신화, 그리고 서부극과 다른 자리에서 서서 다른 시선들을 보여주지만, 역사의 진행에 대한 비관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종착점은 개와 함께 떠도는, 최종적으로는 그마저 함께 할 수 없는 <웬디와 루시>의 삶이다. 초기축적에 있어 불평등한 관계로 출발했던 자본주의는 소유권과 그 침탈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규칙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웬디와 루시>에서 웬디의 좀도둑질에 대한 마트 직원의 대사)며 웬디의 삶을 인간의 룰에서의 안착보다는 비인간 개와의 관계에서 애착으로 향하게 한다.
원신연 감독, 공유 주연 < 용의자 >는 왕년의 ‘레전드’ 스턴트맨들이 총집결하여 반가웠다. 최태환 무술감독과 원신연 감독의 동생인 배우 원풍연 , 그리고 성룡이 이끄는 무술팀 ‘성가반’에서 이충지, 박현진 등과 함께 맹활약한 한국인 이인섭 도 눈에 띄었다. 최태환 감독이 소속된 무술팀 ‘트리플A’(All About Action)는 이인섭이 < 러시아워3 >(2007)를 끝내고 돌아와 오세영 무술감독과 함께 < 왕의 남자 >(2005)에 참여하기 직전 공동대표로 꾸린 팀이다. 가장 반가웠던 인물은 바로 원진 이었다. 영화 속 청량리역에서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얼핏 왜소해 보이는 남자가 지동철(공유)과 싸우며 그야말로 날렵하고 화려한 발차기를 자랑했다. 가끔이라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스턴트맨들 중 정두홍 무술감독의 몇 안 되는 선배이자, 그가 머리 숙여 실력을 인정한 진짜 레전드가 바로 원진이다. 그들 대부분은 ‘밥풀데기’ 개그맨 김정식이 몸담기도 했던 ‘오뚜기 무술단’ 동료들이었다. 최태환 , 원풍연 , 이인섭 물론 그는 < 조폭마누라 >(2001), < 청풍명월 >(2003), < 낭만자객 >(2003), < 청춘만화 >(2006) 등의 무술감독이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실력자라 종종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무명 시절에도 왜소한 체격 탓인지 주연 여배우 대역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폭마누라>에서 신은경 대역을 한 것도 역시 그다. 다소 중국스러운 이름 때문에 중국 액션배우로 아는 사람도 많았고, 실제로 홍콩 골든하베스트사의 초청으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바로 < 가자왕 >(1992)에서 길게 머리를 늘어트리고, 다리를 뒤편 위로 치켜 올려 전갈 권법을 구사하는 모습이다. 그 자세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한 ‘공중 돌려 가위차기’는 홍콩 스턴트맨들도 한없이 부러워했다. 원진 을 포함해 역시 오뚜기 무술단 스턴트맨 출신의 원신연 감독이 옛 동료들을 불러 모아 완성한 < 용의자 >는 그야말로 훈훈한 ‘우정의 무대’라고나 할까. 여기서 떠오르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비록 전체적인 완성도는 미흡하지만 당대 ‘무술인’들의 ‘십시일반’ 정신으로 완성한 김춘식 감독의 < 고수 >(1997)다. 역시 스턴트맨 출신의 김춘식과 당시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원진 이 동료들을 규합해 ‘진짜 우리들만의 제대로 된 액션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품앗이하듯 의기투합한 것. 비록 스타급 배우는 없고 제작비는 넉넉하지 못 했지만 스턴트맨들끼리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거기에는 ‘액션을 영화의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주재료로 써보자’, ‘우리도 남들 대역만 하지 말고 진짜 배우가 되어 보자’는 생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배경은 1930년대 일제치하, 친일파인 기봉( 장정국 )은 딸 승희( 김지은 )를 일본의 실력자 노무라( 최성 )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이에 승희는 연인 형철( 우승봉 )과 함께 돈을 훔쳐 달아난다. 전국을 떠돌던 그들은 우연히 차례로 변소동( 오동영 ), 조달구(김춘식)를 만나 도움을 얻게 된다. 기봉이 보낸 조직 ‘야수파’ 등에 맞서 승희와 형철을 도와주는 그들은 물론 돈 때문이다. 한편, 한 손에 갈고리를 하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고수(원진)는 조달구를 쫓는다. < 고수 > 출연자들 아쉬운 점은 역시 어설픈 유머가 난무하는, 물론 보다 보면 귀엽기도 한 이야기의 완성도다. 승희와 형철을 추적하는 조직의 이름이 야수파인 이유는 그들의 별명이 하나같이 멍멍이, 풍뎅이, 메뚜기, 반달곰, 올빼미 등 ‘야수’ 혹은 ‘동물’들이기 때문이다. 개의 귀 모양을 한 모자를 쓴 멍멍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이인섭 이며, 승희와 형철을 쫓는 또 다른 3인조 중 핑크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바로 오세영 무술감독이다. 또한 ‘홀쭉이와 뚱뚱이’처럼 반목하는 변소동과 조달구는 서로의 이름으로 장난을 친다. 자신을 ‘조달구’라고 소개하자 변소동이 “좆 안 달고 태어나는 남자도 있당가?”라고 놀리고, 이에 질세라 조달구는 ‘변소똥’이라 부르며 달려든다. 이들이 등장해서 완성한 추격의 로드무비가 B스러운 것은, 바로 등장인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동료들을 규합해 영화를 찍고자 합의는 하였으나, 이 사람도 눈에 밟히고 저 친구도 눈에 밟히니 그저 엇비슷한 분량으로 몽땅 출연시킨 느낌이다. 그래서 친일파 기봉은 딸을 잡아들이기 위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야수파도 보내고, 혼성 3인조도 보내고, 다시 남성 2인조까지 보낸다. 게다가 서로 각자의 실력을 자랑해야 하니 의욕에 넘쳐 그야말로 영화 내내 묘기 대행진이다. 별것 아닌 동작도 굳이 날아오르거나 몇 번 굴러서 ‘짠’ 하고 잡아내는 식이다. 당연히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한 덤블링 하는’ 스턴트맨들이다. 단지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킬러를 보낸 인해전술의 추격극이 과연 있었던가. 원진 그래도 역시 실질적인 주인공은 가장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원진 이다. < 가자왕 >을 연상시키는 돌려차기에다 쉴 새 없이 ‘날고 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분명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지만 적어도 액션에 있어서만큼은 대역도 속임수도 없는 진짜 퀄리티 높은 액션영화인 것. 원진의 또 다른 추천할만한 한국 액션영화로는 < 용호취 >(1988)와 <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 >(1989)가 있다. 코흘리개 신인 정두홍이 참여한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는 그가 실력을 인정하는 두 선배 류창국 과 원진의 대결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랬던 그들이 이른바 ‘아동용 영화’의 긴 암흑기를 지나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된 건 무척 뿌듯한 일이다. 한동안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김춘식 감독은 작년 조주현 , 전세홍 주연의 ‘리얼 액션영화’를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진짜 완성됐는지 어땠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 아는 여자 >의 패러디인지 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건 제목은 < 패는 여자 >였다. 오동영 김지은 감독: 김춘식 각본: 이무섭 개봉극장: 바다, 파고다4관(서울) 관람인원: 1,300(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