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
- 감독
- 이재규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조진웅, 유해진, 이서진, 염정아, 김지수, 송하윤, 윤경호, 지우, 이순재, 이도경, 라미란, 조정석, 조달환, 김민교, 최유화, 정석용, 진선규, 장대웅, 황재원, 정지훈, 정찬빈, 조용진, 최선자, 정민규, 윤석호, 신주아, 정상환, 윤이남, 이기남
한국사회에는 유난히 중년 남자들의 기를 살리자는 식의, 이들을 달래는 분위기가 있다. 캠페인 같은 이 구호는 가장 사적인 집단, 집안에서 시작된다. 결혼 전, 친정엄마는 ‘너가 박 서방한테 잘해야 한다, 남자는 인정과 칭찬을 먹고 산다’고 조언했다. 심심치 않게는 ‘아들 하나 키우는 기분’으로 살아야 가정이 평화롭다며 훈수를 두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들을 보면서 할머니들-현실은 황혼육아로 가장 고생하고 있음에도–은 ‘요즘 남자들 참 딱 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요즘 남자’라는 말은 다시 말해, 연장자 남성이 존중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창근( 김인문 )은 625전쟁 당시 어머니와 누이를 북에 남겨두고 아버지와 단둘이 남쪽으로 피난 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김일성 장군가를 부르며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해 극도로 집착하지만, 함께 내려온 아버지와는 그의 부고도 몰랐을 만큼 관계가 온전치 않다. 피를 쏟아내며 괴로워할 때도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 호정(문소리)뿐, 아내나 아들은 외면하며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한다. 창근의 가족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 모형은 대물림 되었다. 아들 영작( 황정민 )은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과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 있지만, 깊은 관계의 애인 연( 백정림 )이 있다. 그는 정부도 마다하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며 돈보다 정의를 위해 핏대를 세우지만, 집에서는 호정과 한 침대에 누워있어도 공허한 몸으로 등을 돌릴 뿐이다. 영작이 “짐승 같은 시간은 관두고 제발 사람답게 자존심 좀 지켜 가면서 살자”고 유가족들에게 연설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붕괴된 가족 안에 무너진 가장이 있다. 영화<바람난 가족>에 등장하는 남자들을 보면 가장의 역할은 물론, 어른으로서도 성숙하지 못하다. 창근을 요양원에서 모셔와 약주를 따르는 것도 호정이고, 창근이 피를 토하자 영작은 ‘호정아’를 외치며 자리를 피하기 바쁘다. 아이를 잃고 난 뒤에도 영작은 애인에게 쏟아내서 위로받으려 하지만, 호정은 산을 오르며 홀로 슬픔을 쏟아낸다. 우편집배원은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은 무능력한 가장으로 그려지고, 소통이 안 되는 지운( 봉태규 )의 부자지간은 남보다도 못하다. 이들은 나름대로 가장의 역할을 해내려고 애를 썼겠지만, 현실은 권위 있는 존경받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다. 연이는 대놓고 “남자들은 다 미성숙해. 그냥 다 애’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상습적으로 절도를 일삼는 가정주부를 변호하던 영작에게 판사는 묻는다. “가정은 어떤가요?” 영작은 “남편은 회계사인데요.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중산층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답한다. 그러나 절도범 주부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 대조 속에서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정은 완벽하게 ‘정상적’일 것이라는 우리들의 편견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가족을 만든 것을 엿볼 수 있다. 영화 내내 ‘니들이 광국이를 알아? 주니어 웰터급 5위 광국이가 내 처남이야’라는 우편집배원의 외침은 처절하고도 처량하게 들린다. 챔피언도 아닌, 5위지만. 그리고 내가 아닌 처남이지만. 인정받지 못한 가부장은 그렇게 처남이라도 붙들고 체면을 세워야 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족의 권력자가 된 역사는 복잡하지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 부계 중심의 가족은 조금씩 사라지고 가족의 형태나 개념 역시 이전보다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 전통적 가족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한 뿌리, 핏줄에 집착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속도를 낼 때가 있다. 그 속도에 밀려 가족 간의 애정은 바싹 메마르고 빈껍데기만 남아 단 한 번의 자극에도 바스락 부서진다. “엄마 난 입양된 거 몰랐을 때가 더 좋았던 거 같애. 왜 얘기해 줬어?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놀릴 때마다 난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수인(장준영)이는 영작과 호정이가 입양한 아들로 혈연으로 맺어진 전형적인 의미의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수인은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데 여기서 엄마는 호정을 말하는 건지, 수인을 낳은 엄마를 말하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수인은 가슴으로 낳은 엄마를 따라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자리를 잡는데, 무엇이 진짜 가족인지 헤매고 있는 다른 남자들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겨우 욱여넣은 가장의 자리와 관계를 중심으로 맺어진 가족 사이에서 휘청거리던 영작과 호정은 결국 수인의 죽음으로 무너지고 만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된 건가. 처음에는 모든 잘못을 다 네 아버지한테 뒤집어씌웠지. 나는 요즘에야 진짜 내가 어른이 된 기분이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 그렇지 않으면 그게 사는 게 아니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거같이 살아야지. 나는 이런 내가 좋아.” 영화 내내 가족들은 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시선은 서로 엇갈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데, 창근의 장례식 이후 한 이불에 누워 얼굴을 마주한다. 이 한 컷으로 이들이 한때는 좋았던 가족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병한( 윤여정 )은 15년 만에 섹스를 하고 처음으로 오르가즘도 느끼며 산다고 고백하며 40년간 남보다도 못했던 가족을 벗어나 이제 진짜 삶을 살겠다 선언한다. 그리고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솔직하게 살자고 다독인다. 2003년 작 < 바람난 가족 >( 임상수 , 2003)은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 모두 바람이 난다는 다소 자극적인 내용을 담으며, < 처녀들의 저녁식사 >(1998), < 눈물 >(2000)을 잇는 임상수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미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여자들의 솔직한 성 담론으로 한 차례 센세이셔널을 일으켰던 만큼 <바람난 가족> 역시 또 한 번 여자들의 ‘발칙한’ 영화라 홍보되었다. 막상 영화가 개봉되자 가볍게 배우들의 몸 감상에 나섰던 관객들이 어쩐지 찝찝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고, 예상대로 호불호가 분명히 나뉘었다. 영화 속 가족들의 모습이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을 담고 있었고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가족 콤플렉스를 미화 없이 직설적으로 늘어 논 까닭일 것이다. 가장들이 기가 죽어서 <바람난 가족>처럼 불량 가족이 되는 건 아닐 터. 결국은 서로가 완벽한 타인임을 인정하고 병한의 말처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아야 가족이 된다. 그리고 의미가 없는 낭만일지라도 결국은 사랑이 기본이고 답이다. 뒷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쭈뼛대던 영작을 아웃시켰던 호정은 아마도 지금쯤 15살 아이를 키우며 기가 센 가장이 되어 즐거운 나의 집을 만들고 있을 것 같다.
이상한 영화다. 이완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 누에치던 방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 수상)말이다. 영화를 처음 보고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과거와 현재가 병치돼 있는데다 현재의 시간대에 꿈이었을 장면이 불쑥 들어오기도 하고 또 갑작스럽게 ‘이벤트’에 가까운 장면의 난입도 있다. 영화는 이 당혹스러운 많은 것들을 제 안에 넣어두고는 관객에게 요리조리 퍼즐을 맞춰보라고 하는 듯했지만 정작 관객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싶어 하는 지점들에선 일절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부정확한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길 영화는 정말로 바라는 것 같았다. 아직도 <누에치던 방>에 대해선 많은 것들이 의문인 채로 남아있다. 서사는 덜컹댔고 매끄럽지 않게 나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두 번째로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나는 그 덜컹대는 이야기의 마디마디에서 서로를 껴안아 주는 여자들이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아픈 그녀들의 마음을 지켜보는 일로 이 덜컹댐을 견뎌보게 됐다. 영화의 과거와 현재는 이상한 방식으로 만난다. 그 기이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두 여자가 있다. 현실 속 미희( 이상희 )와 현실 속 소녀( 김새벽 )다. 소녀는 지하철 승객들에게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한마디를 부탁한다며 종이와 펜을 건넨다. 미희는 소녀를 보자마자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회피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는 듯 받아든 종이와 펜을 서둘러 자신의 가방에 넣고는 눈을 질끈 감는다. 왜 그랬을까. 잠실나루역에서 내리는 소녀를 따라 가보던 미희는 누군가의 집 앞에 홀리듯 이른다. 성숙(홍승이)의 집이다. “미안해. 그런데 우리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잖아.”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여자 미희의 이 말에 성숙은 의아해하지만 피하지 않는다. 미희가 진짜 친구인 양 편히 대해준다. 하지만 다음 신에서 성숙은 자신의 동거인이자 미희가 말한 단짝 친구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익주(임형국)에게 말한다. “어떤 모르는 여자가 집에 찾아왔어.” 성숙은 어째서 완벽한 타인인 미희를 내치지 않고 집에 들였을까. 이어서 성숙은 익주에게 이름 하나를 말한다. 유영(김새벽)이었다. 고교 시절, 유영과 성숙( 이주영 )은 단짝이었다. 유영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고, “억압돼 있는 걸 표현” 하고 싶어서 글을 쓰며, 세상을 향해 투사처럼 달려들고도 싶다. 자신 앞을 가로막고 선 것들이 죄다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을 지나오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니 유영은 오직 과거의 시간에만 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성숙 앞에 나타난 미희는 유영일 수가 없는 일이다. 미희도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인 척) 사칭한 적 없다”고. 그렇다면 미희는 어쩌려고 처음 보는 성숙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미희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한때는 시집을 읽고 연극도 보러 다니던 미희였지만 지난 10여 년간 세상과 단절된 채 낙담할 일들만 겪어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교 시절의 미희에게서는 이미 신경질적이며 강박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미희 역시도 단짝 친구 근경(정원)과 단절을 경험했다. 아픈 미희가 성숙을 보자마자, 혹은 지하철에서 소녀를 보자마자 과거의 근경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또는 미희의 즉흥적인 속내를 내치치 않고 받아들인 성숙의 태도에 관해 말해 볼 수도 있겠다. 생판 모르는 미희가 불쑥 자신의 과거(더 정확히는 유사 과거)를 끄집어 들고 왔을 때 그 예상치 못한 침입/방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성숙의 기질과 성정에 기댄 일일 수 있다. 그 짧은 순간, 성숙은 미희를 내치지 않고 품어버린다. 홍승이라는 배우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이어서 모든 걸 다 말하는 것과 모든 걸 다 말하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가를 두고 미희와 성숙이 나누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안 주려면.” 성숙의 이 말은 그대로 미희를 다독이는 말이 되었다가 미희를 향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미희의 방에서 나란히 누워 성숙이 미희를 안아주고 미희가 아픈 성숙의 보호자로서 달려가고 있다. 연고 없던 두 사람 사이에는 신기하게도 미더운 연이 생겨나 있다. 시제의 오고감 속에서 관객을 당황스럽게 하는 또 하나는 유영과 소녀의 동일한 얼굴이다. 김새벽 배우가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과 관객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따라붙던 유영이라는 과거의 인물이 현재 실존하는 인물로 출현할 때마다 보는 이는 긴장이 된다. 서로 다른 인물을 어떻게든 연결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 같아 애가 탄다. 성숙과 익주의 과거 속에 존재하는 유영보다도 현실 속 소녀의 존재가 더 미스터리하다.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유영을 대신해 현재에 진짜 살아있는 유영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귀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일이다. 이 소녀는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 영화의 후반, 소녀의 마지막 한마디 앞에서 느끼는 또 한 번의 당혹이란. 관객은 이 소녀를 어떤 존재로 봐야 할까. < 누에치던 방 >은 다 지나 가버린 과거를 끈덕지게 붙들고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의 과거는 과거가 됐기에 낡고 쇠락했으며 쓸모 하나 없는 것으로서 고루하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게 다 낡아 버리고 빛이 바랬다 해도 중요한 건 중요한 것 그대로라고 말한다. 세련될 수 없는 일이다. 그 촌스러움이 아프다. 그런 아픔을 민감하게 감지하며 사는 이들을 용감하게 안아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불현듯 꿈에서 미희가 소녀에게 건넸던 메모지의 말이 생각난다. ‘용기를 가지고 살자.’ 텅 빈 메모지를 돌려받았던 소녀에게 미희의 이 말은 전달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메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희에게 수신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2018년 1월 개봉 예정이다.
데뷔작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에 이어 < 가족의 탄생 >, < 만추 >로 이어지는 김태용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늘 예상을 벗어나곤 했다. 그러나 일관된 주제의식도 손에 잡히는 형식도 없지만 김태용의 작품에는 늘 어떤 ‘무드’가 발견된다. 이제 필름이 유실되어 누구도 그 실체를 확인 할 수 없는 신성일 주연,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년)를 시작으로 사이토 고이치 감독의 일본영화 <약속>(1972), 김기영 감독의 < 육체의 약속 >(1975년), 김수용 감독의 < 만추 >(1981년)로 이어지며 리메이크 되었던 익숙한 이야기를 김태용 감독이 다시 리메이크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분명 다른 영화가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것은 <만추>라는 원형 위에 더해질, 새로운 ‘무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2010년 김태용 감독을 만나며 < 만추 >의 무대는 미국 시애틀로 옮겨간다. 남편을 죽인 죄로 7년 째 복역 중이던 애나(탕웨이)에게 어느 날 어머니의 죽음이 전해진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72시간의 특별휴가를 받은 애나는 시애틀 행 야간버스에 오르고,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듯 뛰어든 남자 훈( 현빈 )을 만난다. 마음과 몸이 굳게 닫쳐버린 애나와는 달리 이 남자, 훈은 몸도 마음도 활짝 열려있다. 늦겨울과 한여름의 기운을 가진 남과 여. 가슴팍에 두 손을 꽂은 채 걷던 남자와 땅을 향해 두 팔을 늘어트린 여자는 어느 늦가을, 안개 낀 도시의 모퉁이에서 잠시 서로의 손을 마주잡는다. 사랑의 끝은 무엇일까, 결혼일까 아니면 이별일까. 만약 그렇다면 애나는 이미 그 종점의 풍경을 모두 봐 버린 여자다. 결혼서약을 깨고서라도 복원하고 싶었던 운명적인 사랑은 그저 ‘남의 포크를 탐하던’ 남자의 이기심으로 종결된다. 애인은 떠났고 남편은 죽었고, 사랑 따윈 필요 없다. 그런 그녀 앞에 바람처럼 훈이 나타난다. 그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남자를 원하면 좋은 남자가, 나쁜 남자를 원하면 나쁜 남자가 되어준다고. 그리고 이 완벽한 타인들은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밥을 먹고, 놀이동산에 가고, 시장을 구경하고, 잠깐 서로의 육체를 원하기도 하고, 마침내 입술을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 만추 >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냥 누구랑 같이 있는 거... 좋잖아요?” 사랑의 과정과 결과, 혹은 시간에의 강박을 버리고 72시간이라는 스톱워치를 켠 채 시작되는 < 만추 >는 오히려 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실험을 시작한다. 애나와 훈은 각각 정반대편에서 출발해 서로 잠시 스쳤다가 결국 또 다시 반대편에 당도한다. 깃털보다 가볍게 살던 남자는 조금 무거워지고, 바윗덩이 같은 추를 안고 살던 여자는 그 무게를 조금 내려놓는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남녀가 짧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지만 < 비포 선라이즈 >같은 순진한 설렘도 < 비포 선셋 >같은 막연한 희망도 남기지도 않는다. <만추>는 사건의 축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드라마틱한 일들은 모두 이 교차점 이전 혹은 이후에 일어난다. 대신 그래프가 교차하는 그 3일간의 여정을 고요하게 응시하며 훈과 애나 사이를 떠도는 미세한 무드의 변화에 집중한다. 쓸쓸함에서 따뜻함으로,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 파주 >에 이어 안개의 도시에 출몰한 유령들의 풍경을 탁월하게 잡아낸다. 훈과 애나는 한국어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한다. 하지만 서로 온전하지 않은 타국의 언어는 훈이 “하오(좋네요)”와 “화이(나쁘네요)”만을 반복하며 애나의 지난 아픔을 경청해주는 장면처럼 언어적 이해를 뛰어넘는 기적을 연출한다. 그렇게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과 물리적 시간에 대한 사랑의 신화를 깨며 그들은 마침내 ‘늦은 가을(晩秋)’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득 찬 가을(滿秋)’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긴 여운을 남기며 애나가 기다리고 있는 건 훈도, 다가올 봄도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어떤 사랑은, 가을 날의 짧은 며칠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