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스틸러스
- 감독
- 최석원
- 제작년도
- 2000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심도시 경성은 인구가 대폭 증가하면서 4대문 밖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1910년 경성부에 편입된 용산 지역 외에도, 서쪽으로는 서대문 넘어 신촌과 마포 방향으로, 동쪽으로는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와 왕십리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1930년대 새롭게 도시로 편입된 지역에는 영화관이 설립되었다. 도화관(桃花館), 도화극장(桃花劇場) 도화관(桃花館)은 서울 마포 도화동에 위치한 극장이다. 1930년 11월 1일부터 이곳에서 <여류명창대회> 공연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0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여류명창대회“, 《동아일보》, 1930.11.1) 일설에 의하면 도화관이 1929년 정기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1 극장의 규모가 협소한 탓에 건물의 신축을 꾀해 1933년 10월 7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재개하게 된다 .(“도화관 낙성식”, 《조선신문》, 1933.10.8) 당시 건물주는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였다. 그는 1877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태어나 포목상으로 일하던 사람으로, 1905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용산 원정(元町) 3정목에서 토미이상점(富井商店)을 열었으며 용산상영회(龍山商榮會)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도화관 신축을 추진할 당시 이를 반대하는 도화동 주민들의 진정이 있었다. 도화동 주민 150여명은 연명 날인하여 도화관이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면 풍속의 아름다움을 해치게 하여 아직까지 보존하여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기도 보안과에 반대 진정을 냈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신축은 이루어졌다. 1933년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도화관에서 도화극장으로 바뀌었다. 일제말기까지 도화극장은 토미이가 운영하고 있었다. 《영화순보》에 실려 있는 도화관에 관한 정보를 확인해 보면 흥행주는 토미이, 지배인은 스가와라(管原)였으며, 총 좌석 수는 782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된 도화극장은 1950년대 경보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부좌(新富座) 신부좌는 동대문 밖 신당정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1936년 10월 10일 낙성식을 개최하고 12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도화극장의 운영자인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이다. (“新富座成る”, 《京城日報》, 1936.10.11.) 신부좌의 개관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 “4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12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의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매일신보》, 1936.10.14.) 1943년 당시 신부좌의 흥행주는 토미이(富井實太郞), 지배인은 古都勇作으로 총 좌석수는 758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으며 이름을 한성극장으로 개칭했다 .(“신부좌, 한성극장으로 개칭”, 《동아일보》, 1946.1.20.) 광무극장(光武劇場) 1930년 5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광무대는 상왕십리 쪽에 가설극장을 짓고 영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33년 봄 상설극장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면서 이름도 광무극장으로 바꾸었다 .(“광무극장 상설”, 《조선중앙일보》, 1933.5.18.) 영화와 연극을 고루 상연하던 광무극장에서는 1934년 5월 카프에서 세운 극단 신건설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누가 제일 바보냐>, <신임 이사장> 등을 공연 한 바 있다. (“신건설 순회공연 시외 광무극장서”, 《동아일보》, 1934.5.2.) 1943년 당시 광무극장의 흥행주는 소노다(園田實生)였다. 총 4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다. 영등포연예관(永登浦演藝館), 영보극장(永寶劇場) 영등포연예관은 1930년대에 들면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등포 지역에 들어선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개관했다. 설립자는 써커스단을 운영하며 다년간의 흥행 경험을 가지고 있던 오오타(太田光)란 일본인인데 그는 충남 예산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오오타 칸(太田寬)의 동생으로 1939년 《국민신보》 창간 기념 광고에도 관주로 기록된 인물이다 .(“광고”, 《國民新報》, 1939.8.20.) 영등포연예관은 213평의 부지에 총공비 5만여 원을 들여 연와의 2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개관 첫 공연은 연극호(演劇號)의 연극이었다. (”영등포연예관 연극호 대인기“, 《매일신보》, 1935.10.13.) 영등포 지역의 유일한 영화관으로 존재하던 영등포연예관은 1942년 9월 1일자로 흥행주가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의 무라이(村伊德治)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름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경영자가 운영하게 된 영보극장은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등 시설과 외관을 정비하여 영화관으로의 새롭게 변신하였다 .(“영보극장 래 일일 개관”, 《매일신보》, 1942.8.26.) 1943년 당시 영보극장은 흥행주 무라이(村伊德治), 지배인 기하라(木原督夫)로 총 좌석수는 400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1. 이에 관한 이용남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포 도화정의 도화극장은 1929년 정기준이 세운 목조 1층 건물의 극장으로, 무대는 허술하였으며 수용인원도 300명 정도의 초라한 극장이었다. 개관 후 1년이 못되어 일본인 富井實太郞이 사들여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새 건물은 무대도 넓었으며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도화극장은 영화 상영을 주로 하였으며 가끔 연예나 연극 등도 공연하였다. 후일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용남, 「해방 전 조선 영화극장사 고찰」, 청주대석사논문, 2001, 116쪽. * [사진](상단) 신부좌 작성 당시 기사에 게재된 사진 [자료] 《매일신보》, 1936.10.14.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십이일부터 개관 대경성(大京城)의 실현에 ᄯᅡ라 경성 근교의 인구증가률은 기하급수(幾何級數)적인 숫자를 보이고 잇슴에 반하야 근교(近郊) 부민들의 오락기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업서 곤난중이더니 이것을 유감으로 역이든 유지의 손으로 이번에 신당정(新堂町)에다 신부좌(新富座)라는 사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을 세웟다는데 수용인원이 일천이백명이나 되는 큰 건물로 십이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을 맞이하야 개관하얏다고 함니다.(사진은 신부좌) [자료] 《매일신보》, 1942.08.26. 영보극장 래(來) 일일 개관 영등포 유일의 영화상설관 연예관(演藝館)이 금번 새로운 경영주를 마지하는 동시 이름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곳친 후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한편 내용과 외관도 일신해가지고 오는 구월 일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 무라이(村伊德治)씨가 신경영주로 제반경영을 담당하게 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37.08.12. ●팔월 십이일부터 특별대공연 개관 일주년 기념대흥행 ○ 납량특별 『선물』 진정! = 요금특별 봉사제공 = 대인석 십오전 균일 조선극계의 정화! 극단 혜성좌(彗星座) 대공연 ▲ 혜성좌 名극본 대진용! =예제 매야 교환 상연= ○ 만주애화(哀話) 만주의 십년몽 이막 ○ 정의극 마음의 꽃다발 이막 ○ 사회비극 나는 왜 범죄를 하였나 삼막 ○ 희비극 온천장 행진곡 이막 ○ 시대물 임거정전(林巨正傳) 삼막 ○ 모성비극 모성애의 금자탑 삼막 막간 = 넌센스, 합창, 민요, 스켓취, 독창 무용 =혜성 올째스뺀드= 요금 싸고 『선물』 가저가시게 만원되기 전 일즉 일즉 오십시요 왕십리정 광무극장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05.18. 광무극장 상설 부외 상왕십리(上往十里)에 잇는 가설극장 광무대(光武臺)를 금번에 상설극장(常設劇場)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극장 일흠도 광무극장(光武劇場)으로 고치고 활동사진과 기타 연극 등을 흥행하리라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10.21. 시외 도화동에 도화극장 신축 【경서(京西)】 시외 도화동(市外 桃花洞)에 잇는 영화상설관 도화극장(映畵常設館 桃花劇場)은 지난 십일일 동극장 내에서 신축 낙성식을 대성황리에 거행하엿다는대 동 극계에 경험이 잇는 부정실태랑(富井實太郞)씨와 동 지배인 김년(同 支配人 金年)씨가 가티 삼만 오천원이란 거금을 드리여가며 조선극예술을 위하여 만흔 노력을 한다하며 또 부정씨는 마포에 양영학교란 보교를 건설하고 조선무산아동을 모아서 가르킨다는데 근처 일반은 부정씨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자료] 《동아일보》, 1932.07.22. 상설극장 반대 도화동민 진정 시외 도화동(桃花洞) 주민 일백오십여명은 련명 날인으로 부정(富井)씨의 경영하는 도화관(桃花館) 신축을 반대키 위하여 금 이십일일 오전 십일시경 경기도 보안과를 방문하고 진정한 바 잇섯다고 한다. 동 도화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서 풍속의 아름다움을 손하게 하여 아직ᄭᅡ지 보존하야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 반대 진정의 주요 원인이라 한다.
1937년 8월 1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노인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학교 행사 일을 도맡다시피 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중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1953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서 도선장치기업사라는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이봉선의 집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이봉선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백화점 미술부에서 이벤트 행사를 담당하고 해방 직후에는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소속으로 작품 발표전에 참가하는 등 산업미술가로 활동하던 인물로, 1947년 계몽문화협회가 제작한 두 편의 영화 <윤봉길 의사>(윤봉춘)와 <삼일혁명기>(이구영)로 영화 미술에 뛰어들었다. 또한 그는 전쟁기에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국극과 악극의 무대 미술을 하기도 했으며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미도파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의 인테리어 복구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후 노인택은 이봉선을 도와 예그린합창단 발표회, 이승만 대통령 생일축하연 같은 행사에서 무대 미술 작업을 하는 동시에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을 시작으로 <막나니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 <처녀별>(윤봉춘, 1956) 등의 영화 미술 작업을 병행했고, 1956년부터 2년 간 일본 유학파 무대 미술가 김정환이 강의하던 동숭동 소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청강하면서 응용미술을 배우기도 했다. [사진 1] 영화 <막난이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의 한 장면 [사진 2] 영화 <처녀별>(윤봉춘, 1956)의 한 장면 노인택에 따르면, 1950~70년대 미술부의 주 업무는 세트 제작이었으며 로케이션이나 오픈 촬영의 경우엔 작품의 시대상이나 분위기에 맞게 세팅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세트 제작이 끝나고 본 촬영에 들어가면 현장엔 미술부원 한 명만이 상주하며 다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했다. 미술감독은 대개 감독이 직접 선택했고, 한형모나 유현목 정도를 제외한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 특히 김화랑 같은 연극을 하다 영화계로 들어온 감독들은 영화 미술에 대해선 거의 미술감독에게 일임했다. 1950년대 후반 영화 미술을 하던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연극이나 악극 같은 무대 작업을 하던 이들이 주로 했던 탓에 세트의 입체감 같은 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스승인 이봉선의 경우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분이라 영화 미술에 잘 맞았고 나름 일가견도 있어, 당시 영화 미술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형모 감독과 영화 미술 이봉선의 조수 시절 노인택은 김성민, 윤봉춘, 신경균, 김화랑 등 여러 감독들의 작품에 참여했지만, 특히 한형모 감독과 관련된 작품을 주로 작업했다고 한다. <운명의 손>, <자유부인>(1956), <나 혼자만이>(1958), <여사장>(1959) 등 한형모가 감독한 작품은 물론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같은 한형모가 촬영을 맡은 작품에도 참여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의 한 장면 [사진 4] 영화 <단종애사>(전창근, 1956)의 한 장면 이는 이봉선과 한형모의 오랜 친분 때문이었는데,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만주 신경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였고 1947년 이봉선을 처음 영화계로 불러들인 사람도 바로 한형모였다. 이봉선은 이를 계기로 1956년 한형모가 관여하고 있던 삼성영화사의 미술부장을 맡게 되었고, 1957년 삼성 스튜디오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인택이 이봉선의 미술 조수로 처음 참여한 <운명의 손>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세트 촬영을 감행한 작품이다. 창고를 개조한 간이 스튜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시공관 앞 은행 건물 옥상에 미군 부대에서 파는 헌 건축자재를 구입해 광목천을 덧씌워 세트를 제작했는데, 극 중 마가렛(윤인자 분)의 서양식 아파트와 바(bar)는 한형모가 구해온 미국, 일본의 잡지에서 본 사진을 참조해 만들어낸 공간이며, 마지막 격투 신이 벌어지는 동굴 내부 역시 세트였다고 한다. 한형모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영화 미술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썼는데, 세트 디자인을 일일이 직접 스케치했으며 아파트 내부의 추상적인 문양의 커튼이나 형광등 스탠드, 부엉이 시계 같은 소품들 역시 한형모가 직접 일본에서 구입해온 것들이었다. [사진 5~8]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1954) 속 장면들 한형모 감독과 노인택 미술감독이 미국과 일본의 잡지들을 참고해서 만들어낸 세트 디자인과 소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부인>에서 유명한 댄스홀, 요정 별장 같은 모든 세트는 당시 불에 타 지붕도 없던 150평의 용산 RTO(미군장병안내소) 건물을 임대해 지붕에 군용천막을 덮어씌워 만든 소위 ‘창고 스튜디오’에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트 촬영보다 양품점을 비롯해 장 교수(박암 분)의 연구실과 미스 박(양미희 분)의 사무실 등 오픈에서의 촬영이 많은데, 노인택은 그 이유가 바로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양품점의 경우는 리얼리티 상으로 꼭 필요했던 거리의 엑스트라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공간들의 경우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한 건물을 통째로 빌려 연구실로, 사무실로, 경찰서로 활용하면서 제작비를 줄였다는 것이다. [사진 9~12] 영화 <자유부인>(한형모, 1956) 속 장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 언덕 장면이나 장 교수의 집 마당, 대문 밖 같은 공간의 낮 장면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서도 굳이 밤 장면은 어색해 보이는 세트에서 촬영한 것은 당시 전기도 부족하고 발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밤거리를 밝힐 정도의 조명 동원이 힘들었고 단기간에 사계절을 모두 촬영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진 13~16] <자유부인>에서 같은 장소의 낮 장면(로케이션 촬영)과 밤 장면(세트 촬영) 삼성 스튜디오와 <그대와 영원히> 1957년 미국의 아세아문화재단에서 원조받은 기재를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 스튜디오를 필두로, <자유부인>의 제작사인 삼성영화사의 삼성 스튜디오, 그리고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3개의 스튜디오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한국 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본격적인 촬영 스튜디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중 삼성 스튜디오는 한형모의 아이디어와 이봉선의 설계로 만들어졌는데, 이봉선은 이후 이곳에서 촬영된 <항구의 일야>(김화랑, 1957), <오해마세요>(권영순, 1957),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 <3인의 신부>(김수용, 1959) 등에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 17] 영화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이들 작품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그대와 영원히>는 당시 삼성 스튜디오의 위용과 유현목 감독의 정교한 미장센(mise-en-scène)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노인택은 유현목이 당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세트를 제작할 때 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세트 도면을 보고 철두철미하게 콘티를 짜 세트 활용을 굉장히 잘했던 감독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교도소 세트라든가 댄스홀, 병원 특실, 지하실 세트 등에서의 세트 활용은 매우 돋보인다. [사진 18~21] 영화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에서 재현된 '2층 구조' 세트들 특히 이 영화의 세트들이 대부분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물론 전체적인 미술 컨셉을 잡을 때부터 미리 계획된 것이었지만, <자유부인> 이후 크레인 같은 장비가 좋아지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좋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세트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나 ‘크라운 맥주’ 같은 상표는 당시 이봉선이 이들 회사의 로고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댄스홀 장면 등에서 노출 시킬 수 있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위스키와 맥주 등을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협찬받았다고 한다. [사진 22, 23] <그대와 영원히>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 상표(상)와 '크라운 맥주'의 상표(하) 미술감독 노인택과 김기덕 감독 노인택은 1961년 이봉선이 제작에 관여하기도 한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로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미 4~5년 전부터 이봉선이 담당한 영화의 미술 작업을 도맡아왔던 그에게 사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때부터 노인택은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작품을 수주받고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노인택은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소속으로 ‘미술 노인택’은 물론 ‘미술 이봉선’의 작품들까지 모두 자신이 진행했다고 한다. [사진 24, 25] 영화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1961)의 세트 촬영 현장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후 노인택은 <원효대사>(장일호, 1962), <언니는 좋겠네>(이형표, 1963), <밤안개>(정창화, 1964), <십년세도>(임권택, 1964), <협박자>(이만희, 1964) 등 이봉선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수 시절 한 번도 같이 작업해보지 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그리고 <악인은 없다>(김기덕, 1962)부터 한형모의 조감독 출신인 김기덕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함께했다. 당시 극동흥업에서 전무이사 겸 전속 감독으로 활동 중이던 김기덕은 연간 5~6편의 작품을 연출했던 당대 ‘흥행 랭킹 넘버 원’ 감독이었으며, 멜로드라마, 사극영화, 전쟁영화, 스릴러 영화, 코미디 영화, 스포츠 영화, 심지어 SF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 영화를 만든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 그래서 김기덕과의 작업은 노인택에게 다양한 장르 영화의 미술을 섭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신성일-엄앵란 콤비의 <가정교사>(1963), <맨발의 청춘>(1964) 등을 통해 196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였던 청춘영화의 미술을 선도할 수 있었다. 김기덕에 따르면, <맨발의 청춘>에서 구현된 레슬링 경기장, 당구장, 댄스홀, 음악다방 같은 장소는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었으며, “가보고 싶지만 못 가본 그런 장소,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창조”한 것이었다고 한다. 요안나(엄앵란 분)의 서양식 침대 방이라든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빌트인(built-in) 방식의 두수(신성일 분)의 방 세트 역시 노인택과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김기덕: 두수 방에서 침대 나오는 거. 내가 다 하여간 그런 것들을, ‘아, 이런 게 있으면 재밌겠다’ 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거를 반영했는데. 그때 마침 그 미술 담당이 노인택 씨라고. 노인택 씨 조수 때부터 나도 조감독 할 때부터 같이 호흡을 맞췄거든. 그래서 굉장히 내 의도를 잘 알고 아주 나하고 호흡이 잘 맞았어요. 1 [사진 26~29]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속 장면들 노인택은 또한 한국 최초의 SF 영화인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에도 참여해 일본에서 온 특수미술감독 미카미 무츠오(三上陸男)로부터 미니어처 제작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 여자의 일생>(김한일, 1957) 등에서 미니어처 촬영이 시도된 바 있지만 조잡하고 어설픈 수준이었는데, 미카미 무츠오가 알려준 축적법 등으로 정교한 미니어처 설계와 제작 기술을 터득했고 이후 <증언>(임권택, 1973) 등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진 30~3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다작의 시대, 다작 감독과 다작 미술감독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는 다작의 시대였다. 1966년 공보부가 국산영화의 무분별한 제작을 막고 초과 공급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제작 쿼터제를 시행하고 1967년에는 등록기준을 강화해 25개의 영화사를 12개사로 정리하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1968년부터 한 해에 무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 노인택은 1968년 32편, 1969년 49편, 1970년 47편의 작품에 미술감독 크레딧을 올렸다. 해당 시기 한국영화 총 제작 편수가 1968년에 212편, 1969년 229편, 1970년 209편임을 생각해봤을 때, 노인택이 참여한 작품수는 당해 제작된 작품 중 거의 1/5에 해당하는 편수이다. 여기에 크레딧에는 이봉선의 이름으로 올라갔으나, 노인택이 참여했던 작품들의 수(1968년 12편, 1969년 7편, 1970년 7편)까지 더하면 1/4에 이른다. 물론 당시 스타 배우들과 감독, 촬영기사, 조명기사 등 메인 스태프들도 하루에 서너 작품씩 겹치기 촬영을 하던 시절이었다지만, 한 해 제작된 작품의 1/4을 혼자 감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믿기 힘들다. 사실 당시 노인택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삼성 스튜디오를 비롯해 정릉 스튜디오, 미아리 한국영화촬영소,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 뚝섬 극동영화촬영소 등 여러 개의 촬영 스튜디오를 관리하며 40~50명의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로테이션으로 작업했고, 자신은 미술감독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감리만 맡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옷 갈아입으러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어가서 잘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또한 이 시기 노인택이 다작 미술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우선 늘 함께해오던 김기덕이 다작 감독이었던 데다 1967년부터 또 다른 다작 감독들이었던 고영남, 최인현 등의 작품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영남과 최인현은 연간 8~10편씩 양산해내던 유명한 다작 감독들이었는데, 노인택은 매년 이들의 작품들 중 한두 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미술을 담당했다. 특히 ‘사극의 대인(大人)’, ‘생각하는 황소’ 등으로 불렸던 최인현 감독과의 작업은 그를 다시금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부터 사극영화의 미술도 꾸준히 작업해오긴 했지만, <풍운삼국지>(1967), <총각원님>(1967), <천도화>(1967), <칠부열녀>(1967), <나그네 임금>(1967), <자주댕기>(1968), <방랑대군>(1968), <만고강산>(1969) 등 일련의 최인현과의 사극영화 작업은 그에게 고증과 관련된 더 깊고 폭넓은 공부를 하게 했고 사극 미술에 대한 실력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사진 33] 영화 <풍운삼국지>(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4] 영화 <총각원님>(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5] 영화 <천도화>(최인현, 1967)의 포스터 또한 노인택은 1968년 최인현의 <이상의 날개>, <로맨스마마>, <백야>, <5월생> 같은 현대물의 미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중 이상의 삶을 소재로 한 <이상의 날개>는 일반적인 전기영화처럼 이상의 생애를 따라가기보다 그의 실존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이상의 내면을 연극 무대나 설치미술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세트로 구현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노인택: 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니까 이거 모르겠다, 세트를 어떻게 지어야 될는지 그랬더니, 마음 내키는 대로, 이해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세트를 구상해라 이거야.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맞추겠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의자면 발이 네 개 있어야 되잖아. 발 세 개 가지고 의자를 만들라 이거야. 사람이 다리 하나 없다고 못 서 있는 거 아니다 이거야. 걷지를 못할 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라는 거야. 2 [사진 36] 영화 <이상의 날개>(최인현, 1968)의 포스터 영화진흥공사 미술참사와 촬영 스튜디오 대표 1973년 노인택은 제4차 개정 영화법에 의해 설립된 영화진흥공사에 미술참사로 입사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는 ‘국산영화의 표본이자 바람직한 제작방향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증언>,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태백산맥>(권영순, 1975) 같은 대작 국책영화를 직접 제작했는데, 노인택은 이들 작품에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팀을 투입시켜 영화 미술을 총괄 관장했다. [사진 37] 영화 <증언>(임권택, 1973)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사진 38] 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의 한 장면 [사진 39]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의 한 장면 이후 노인택은 1975년부터 그동안 이봉선이 대표로 있던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의 대표직을 이어받는다. 1979년에는 세경흥업촬영소의 대표직도 갖게 되지만, 이때부터 노인택의 필모그래피는 우성사의 <왕십리>(임권택, 1976)를 제외하고 <춘자의 사랑이야기>(이유섭,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산불>(김수용, 1977),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1978), <밤의 찬가>(김호선, 1979), <애권>(이형표, 1980) 등 모두 태창흥업의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더욱이 1975년 5편, 1976년 4편, 1977년 9편, 1978년 12편, 1979년 5편, 1980년 7편 등 참여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데, 당시 한국영화계는 장기 불황에 빠져있었고 제작 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반 방송과 영화가 컬러로 바뀌면서 진행된 한국 표준색상 선정 작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노인택은 1985년부터 남아진흥촬영소 대표로 재직하며 영화보다는 광고영상(CF) 미술을 주로 작업했다. 이 시기 영화 미술 작업은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 단 한 편뿐이다. 1992년 남양주의 한국종합촬영소 건립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93년 남아미술센터(개명) 대표이사, 고문 등을 역임하며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미술감독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사진 40] 영화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의 한 장면 [사진 41] 영화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한 장면 1) 공영민⋅김기덕,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변화 1권-김기덕⋅김수동⋅김종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13쪽. 2) 박진호⋅노인택, 『2004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노인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04, 82쪽.
1978년은 모든 것이 나쁜 상태였다. 이미 3년 전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통과된 다음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무언가 위협적인 사건이 계속 벌어졌다. 그 해가 시작되었을 때 영화배우 최은희 가 북한에 납치되었다, 고 발표했다. 3월 1일에 윤보선 전(前)대통령을 비롯하여 민주인사들이 ‘3.1 민주선언’을 했지만 그 해 가을 10월에 정부는 휴전선에서 세 번째 남침 땅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선거에서 박정희는 삼선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오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그때 한국 ‘상업’영화 장르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하이틴 청춘영화뿐이었다. 그리고 새마을영화, 반공영화, 문예영화라는 이름의 정책영화들이 외국영화 스크린 쿼터를 얻기 위해 그저 의무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검열은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유현목 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해야 할) < 장마 >를 완성했지만 거의 아무도 보지 않았다. 김기영 은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를 찍은 다음 일 년 동안 개봉을 시키지 못했다. 이 영화를 시네필들이 발견하기까지는 박찬욱 의 열렬한 지지를 기다려야만 했다. 김수용 은 마치 실험영화를 만들기라도 하듯 대사가 없는 영화 < 웃음소리 >를 찍었다. 하지만 비평은 미처 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침묵을 지켰다. 영화인들을 향해 “피고(被告)”라고 말하길 즐기던 하길종 은 완전히 항복하듯이 물러나서 < 병태와 영자, 속 바보들의 행진 >을 거의 자포자기하듯이 찍은 다음 그 이듬 해 2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권택 은 그 안에서 묵묵히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해에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임권택을 임권택으로 만든 < 족보 >를 만든 해였다. 그런데 그 해에 임권택의 영화 전체에서 가장 기이한 영화 두 편을 더 찍었다. <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와 < 가깝고도 먼 길 >.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두 편의 영화가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두 편 모두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전에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었던 전쟁영화 < 울지 않으리 >가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어른들. 희생당한 아이들, 여기서 반격하기라도 하듯 환상의 서사가 활동을 시작한다. 아이들이 총을 들고 어른들을 대신해서 전쟁을 한다. 상징적인 비유들. 아이러니의 전복.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두 편은 완전히 다른 특별한 순간을 담고 있다. 임권택 은 주제에 대한 어떤 탐구나 소재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이 여기서 오로지 영화가 이런 경우에도 견딜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만 같다. 이런 경우. 영화는 너무 쉽게 관습에 복종해왔다. 이 예술의 문법은 할리우드 고전영화들의 표본에서 끌어내고 거기서 체계를 만들었다. 문법이 만들어내는 경우. 그것을 따라가면서 만들어진 영화들. 임권택은 그것을 ( 정창화 를 경유하여) 경험으로 배운 다음 그것이 그의 영화 안에서 관습이 되었을 때 그 영화들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미 < 왕십리 >에서부터 눈에 보이게 임권택의 영화는 느려지고 있었다. 거기서 멈춰야하는데 그냥 지켜보았고, 주고 받아야하는데 두 사람을 하나의 화면에 놓아두었으며, 이따금 이야기 바깥으로 빠져나와서 아무 상관도 없는 풍경 안에 놓인 그 사람을 멀리서 쳐다보았다. 영화가 무언가를 느껴보는 시간. 임권택은 제제나 소재가 아니라 영화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마, 아마 틀림없이 그랬던 것 같다. 영화라는 문제. 영화 안에서의 질문. 종종 이 질문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거기서 어떤 대답도 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에서 그 대답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각자의 결론이 있을 뿐이다. 그때 결론은 힘의 방법을 지시하게 될 것이다. 영화의 힘은 거기에 있어요. 아무도 영화에서의 힘을 정의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그 힘은 이제까지의 관습을 부숴버릴 것이다. 예술에서 형식의 문제는 그 예술의 존재의 문제이다. 여기서 그 예술의 위계질서의 자리를 놓고 다투기 시작할 것이다. 예술의 능력이 형식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 임권택은 판단의 순간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때 판단은 반성이라고 살짝 말을 바꾸어도 괜찮을 것이다. 무엇을 더 음미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전형적인 세계. 자유로운 활동. 이때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영화 자체가 부서질 수도 있다. 임권택은 자신이 위태로운 자리에 왔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질문한다. 한 번 더 반복하듯이 말하겠다. 이런 경우에도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를 각자는 자기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영화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자본과 정치, 예술.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영화제작자와 검열관과 영화감독. 동아수출공사는 이 영화를 (처음에는 ‘위기 영화(Crisis film)이라고 정의 내려진 다음 하위 자르로 재(再)명명된) 재난영화(Disaster Movie)로 기획했(던 것 같)다. 할리우드는 1973년 < 포세이돈 어드벤처 >의 성공으로 일련의 재난영화들이 만들어졌고 < 타워링 >에서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스필버그의 < 죠스 >도 일련의 재난영화 장르로 기획된 영화이다. 예기치 않은 지진으로 발생한 해양해일이 제야의 파티를 벌이는 거대한 관광유람선을 덮친다. 상하가 뒤집힌 배에서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승객들은 시시각각 차오르는 바닷물을 피해 미로 같은 구조물 속에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동아수출공사는 이 영화를 수입한 회사이다. 물론 그때 한국영화는 할리우드 재난영화 규모의 영화를 제작할 수 없었다.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는 아동 재난영화로 기획되었다. 이 영화를 본 검열관은 먼저 ‘아동’ 주인공 영화라는 사실에 안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씬에서 중공(그때는 중국을 ‘中共’이라고 불렀다. 물론 ‘中華人民共和國’의 약자이지만 사람들은 ‘中國共産黨’의 약자처럼 읽었다) 화물선에 구출된 주인공 김한 어린이에게 ‘중공’ 선원들이 북한으로 보내줄까, 라는 질문에 완강하게 저항하며 대한민국, 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검열관들에게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이 장면은 1968년 12월 1일 강원도에 침투했던 무장공비들이 마주친 삼척 시골마을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그 일가 전체를 살해한 사건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승복 일가 참상은 박정희 정권 내내 반공(反共)교육과 홍보의 이미지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검열관에게는 아동 교육홍보 반공영화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다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완전히 다른 질문이 된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거대한 배가 뒤집히는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아니며 엄청난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피노키오>가 아니다. 혹은 하이 테크한 스펙터클 < 라이프 오브 파이 >가 아니다. 영화라는 시스템이 허락하는 조건과 상황. 영화에서 이미지의 생명은 화폐, 라고 고다르가 말했을 때 그 말은 고통스러운 전언이다. 영화에서 어떤 풍경이 있을 때, 거기에 어떤 사물이 나타날 때, 그 사물이 사건이 될 때, 그 사건 안으로 주인공이 들어가야 할 때, 이 모든 관계는 화폐의 연쇄고리이다. 종종 우리들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영화에서 하위 체계에 놓아둔다. 시나리오의 많은 장면들은 쓰기도 전에 삭제된다. 찍을 수 없는 장면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문학과 영화의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스템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풍경은 화폐의 권리이며 결정에 따라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설명은 둘 사이의 등가성을 인정하고 교환 가치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임권택이 찍어야하는 풍경. 진행해야 하는 사건. 그냥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돛단배에 열두 살 소년 김한 어린이가 표류하는 이야기가 그 전부이다. 달리 가족과 연락할 도구도 없으며, 구조를 요청할만한 방법도 없다. 가지고 있던 트랜지스터라디오는 김한 어린이가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다음 (한국방송은 더 이상 잡히지 않고 주파수에는 중국 방송만이 잡힌다) 배터리가 방전된다. 이 소년이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구조를 기다리며 버티는 것 말고는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게다가 무언가를 하기에는 배가 너무 좁다. 주변의 풍경은 바다가 전부이다. 텅 빈 미장센.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는 <캐스트 어웨이>가 아니다. 게다가 소년을 구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구조대는 허락할 수 있는 제작비를 훨씬 넘어설 것이다. 1978년은 컴퓨터 그래픽이 영화에 도착하기 전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별다른 사건이 있을 수 없다. 임권택은 그걸 끌어안고 바다로 나아갔다. 물론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에서 서사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돛단배 한 척에 별다른 엔진도 없이 바다로 떠밀려 내려간 다음 라디오 방송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전 국민적인 구조 대상이 되었는데도 레이더망과 헬리콥터 수색을 피해서 조류의 흐름을 따라 저 멀리 공해상으로까지 떠밀려갔다는 진행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 게다가 동해 벌섬 근처에서 실종되었다면 동해상에서 떠돌았을 텐데 그 배를 왜 ‘중공’ 화물선이 구했는지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왜 이 영화의 설정을 서해로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때 한국은 대만과 수교를 맺고 ‘중공’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은 것은 1992년이다. 그런데 아무런 외교적 분쟁 없이 김한 어린이는 (아마도) 인도적 차원에서 돌아온다.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 족보 >과 같은 해에 찍은 영화이다. 그 이듬 해 임권택은 < 깃발 없는 기수 >와 < 짝코 >를 연달아 연출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임권택의 관심은 서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영화에서 서사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거의 무의미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의 이야기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의도적으로 영화의 순서를 무시하고 서사의 순서대로 이야기하겠다. 평화롭게 야구를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 그때 공이 멀리 날아가고 김한은 그 공을 주우려다가 나무 위의 새장을 발견한다. 김한은 나무에 올라가 새장에서 새알을 꺼내려다가 새장을 나무에서 떨어트린다. 그때 동네 할아버지가 와서 야단치며 그 새장을 다시 나무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그만 나무에서 떨어진다. 가난한 할아버지는 응급치료만 받고 병원을 떠나자 걱정이 된 아이들은 치료비를 모으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시작이다. (하지만 중간 과정은 김한 어린이가 배에서 표류할 때 플래시백으로 다시 진행된다) 궁리하던 김한은 용돈을 받기 위해 해안가 마을에서 큰 배의 선주인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거기서 알고 지내던 칠성이형이 돛단배로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오는 걸 보고 김한은 호기심에 몰래 그 배를 훔쳐 타고 바다로 간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고 지루해진 김한은 잠깐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서 배가 바다 한 복판으로 흘러왔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영화가 시작하고 20분이다. 그런 다음 1시간 10분이 더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달리 설명할 내용이 없다. 설명할 드라마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갑자기 배가 나타난다. 누군가 구조 요청을 보낸 것도 아니고 또 무언가 단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우연히 바다 한 복판에서 배를 만난다. 표류하던 김한은 ‘중공’ 화물선에 구조되고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반 친구들을 만난다. 영화가 더 이상 진행해야 할 사건이 없는데도 거기 영화가 있을 때 비로소 영화적, 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체자레 자바티니의 정식화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각자는 각자의 방법으로 이 정식을 밀고 나아갔다. 임권택은 1953년에 자바티니가 주장한 ‘영화에 관한 몇 가지 사유’를 읽지 못했다. (이 글은 지금도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임권택이 영화에서 이론이 정식화시켜놓은 자리를 우회해서 자기 자신의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 같은 자리에 도착하는 것을 반복해서 보았다. 결국에는 동일한 결론. 예기치 않게 여기서 임권택은 영화에서 잉여의 시간들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되었다. 임권택은 이전에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이 영화가 섬세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섬세한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에서 시련은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사건이 아니라 잉여의 시간들을 견디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 이 영화를 무시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없었다면 < 만다라 >는 없었을 것이다. 잉여의 시간들로 이어지는 만행 길.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왕십리>에서부터,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아마도 절반으로 나눈 후반부에서, 임권택의 영화 내부는 이상할 정도로 드라마 사이를 연결하는 장치들 사이의 관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순간적이긴 하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나는 그걸 <둘째 어머니>에서도 보았다. <만다라>(1981) 다소 장황하게 이 문제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임권택의 영화 전체 안에서 이제까지 잘 설명되지 않은 상태의 형식이 있다. 처음 볼 때는 통상적인 설명에 따라 이 상태를 나태한 형식으로만 받아들였다. 내 생각을 바꾼 건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와 < 가깝고도 먼 길 >이었다. 하지만 두 영화는 동일한 문제의식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둘을 분리해서 설명할 것이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임권택은 드라마가 전부라고 결론을 내린 다음 영화는 거기에 복종해야한다는 믿음으로 장치들을 동원하고 그 안에서 시스템을 만들면서 시작했다. < 망부석 >은 이미 그가 이 시스템의 장인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모더니즘 영화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배우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질문을 배웠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은 문학과 다른 경로를 밟아 나아갔다. 귀도 아리스토타르코와 앙드레 바쟁의 논쟁. 사회 안에서의 영화의 리얼리즘이라는 정치적 규정과 영화 안에서 세계의 존재의 형식에 대한 반론. 환상 없는 세상 앞에서 영화는 쇼트가 세계라는 시간 속에 놓여야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영화는 무엇을 느껴보는가. 대답이 기괴하게도 빈곤의 실체가 아니라 시간의 형식이었다. < 오발탄 >이 리얼리즘 영화이자 이미 모더니즘의 방법론을 따라가고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거리에서 무작정 배회하는 실직자들. 그저 거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쇼트들. <오발탄>은 < 자전거 도둑 >이 아니라 < 흔들리는 대지 >이다. 그런 다음 < 만추 >와 만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펜스. 단지 그것뿐인 쇼트들, 아마도, 아마도 안토니오니의 풍경. 거기서 1974년 세대, 이장호 와 하길종 , 김호선 은 각자의 방법을 배웠다. < 별들의 고향 >, < 바보들의 행진 >, < 영자의 전성시대 >. 물론 거기서만 배운 것은 아니다. 좀 더 복잡하게 잡종 교배된 역사가 있다. 그때는 아무런 설명도 알지 못했다. 1974년 세대는 자신들이 왜 그렇게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친숙한 지 스스로 설명하지 않았다. (혹은 못했다) 단지 변방의 영화 문화에 속하던 그들이 동시대 ‘우드스탁 제너레이션’이 된다는 흥분만이 거기에 있었다. 네오리얼리즘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누벨바그를 경유하여 아메리칸 뉴 시네마로 다가온 할리우드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이미 그들 세대가 몰락한 다음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임권택은 그들 곁에서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영화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성립이라는 문제. 저렇게 진행해도 괜찮은가. 새로운 시청각 기호들의 배치. 저렇게 촬영해도 괜찮은가. 그것들이 창조해내는 영화적 상황, 저렇게 편집해도 괜찮은가. 그 상황이 만들어내는 감각. 이때 임권택은 그 상황에 적응해야 할 필요는 느꼈(을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어떤 단절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임권택의 영화에서 종종 나태하다고 비난한 장면들, 사실은 그 순간에 임권택은 그 장면이 사건 안에서 네 것이거나 내 것인지 결정할 수 없는 어떤 개입이 가능한 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실험, 이라는 말을 피했다. 임권택은 영화에서 실험이라는 말을 혐오한다. 시험과 실험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커다란 차이를 갖는다. 실험이 그 예술의 존재론에 질문을 던진다면 시험은 그 예술의 능력에 대한 반성적 판단을 요구할 것이다. 임권택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무모한 드라마를 끌어안지 못했을 것이다. 무모한 드라마? 무엇보다도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자꾸만 균형이 깨져버리고 방향을 상실한다는 인상을 안겨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 표류. 여기서 임권택은 사실상 드라마를 어떻게 해서든지 느슨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해야만 개입의 여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엇이? 하나의 위기. 드라마의 위기.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영화의 어디쯤 온 것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전에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기승전결은 하나의 리듬이었으며, 그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아름답게 다루는데 거의 모든 영화적 순간들이 바쳐졌다. 여기서는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의 리듬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거의 아무 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감정의 어느 지점에 온 것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가장 이상한 것은 한 쪽은 표류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탐색을 하고 있는데 끝내 둘 사이에서 어떤 끈도 발견하지 못한 채 김한 어린이는 완전히 바깥으로 빠져나간 버린 다음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둘 사이에는 아무 드라마도 없다. 물론 임권택은 돛단배를 탄 김한 어린이를 하나의 시퀀스로 놓은 다음 육지에서 걱정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 군부대. 돛단배의 주인인 칠성이와 그의 아버지, 분주히 그들 사이를 오가는 월간 신여성 기자 혜미를 또 다른 시퀀스로 놓고 그 둘 사이를 교차편집 한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사라진 효과. 그 둘은 각자 활동할 뿐이다. 이때 임권택은 이 둘을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자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얻으려면 영화 바깥으로 나와서 무능력하게 그저 이쪽과 저쪽을 쳐다보는 도리밖에 없다. 불균질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두 개의 시퀀스. 그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둘 사이에서 의도적인 어떤 결과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하나는 바다 위에서 진행되고 다른 하나는 육지에 머물러 있는 것뿐이다. 적어도 이 차이를 임권택은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다. 김한 어린이를 제외하고 누구도 바다 위로 나가지 못한다. 아버지가 김한 어린이를 직접 탐색하기 위해 배를 빌리기까지 하지만 그런 다음 아버지는 배와 함께 영화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한 어린이가 귀환할 때 공항에서 다시 나타난다) 오직 유일한 예외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 지친 김한 어린이가 환상을 볼 때 저 멀리서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구조선을 타고 나타나는 장면뿐이다. 그런데 마치 누구도 바다 위에 올 수 없다는 걸 환기시키기라도 하듯 그들은 저 멀리서 나타난 다음 갑자기 김한 어린이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마치 그들끼리 바다에 관광을 나오기라도 한 듯,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김한 어린이에게서 고개를 돌린 다음 다른 곳을 보면서 그들끼리 즐겁게 웃는다. 이 장면은 처음부터 환상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 씬은 김한 어린이가 바다 저쪽을 바라보자 화면은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out_of_focus)로 시작한다. 어쩌면 원래의 목표는 김한 어린이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헛것이 보일만큼 지쳤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인 설명 씬처럼 시작한다. 그런데 이 주관적인 환상 속에서 김한 어린이가 구조를 받는 대신 버림을 받을 때 이상할 정도로 보는 쪽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문득 여기서 이 영화가 비극으로 끝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깝고도 먼 길>에서 벌어지고 만다) 이 공포에 질린 환상은 영화 전체에서 마치 오점처럼 작동한다. 오점? 그렇다. 자칫하면 영화에서 오점은 의미의 네트워크 전체에서 오작동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임권택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설명할 때마다 거의 반복하듯이 같은 말을 했다. “지엽적인 재미를 따라가다가는 영화 전체를 망치는 거예요” 이 씬이 영화에서 무슨 특별한 장치도 아니고 이야기의 전환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김한 어린이에게 최소의 위기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위협적으로 거기에 있다. 임권택은 여기서 드라마가 수순을 밟아나가는 방법을 중단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 장면 앞에서 예정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 이제 임권택의 영화에서 진부한 것으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순간과 마주하고 있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거의 집중력이 없어 보이는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상투적인 실패작의 전형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권택은 이 영화를 반대편의 극단에 가져다놓고 있는 중이다. 나는 좀 더 이 장면에 머무르고 싶다. 임권택은 아주 가끔 이상한 환상, 혹은 꿈을 갑자기 사사 안에 밀어 넣을 때가 있다. 그게 문제를 일으키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 게다가 서사에서 오점일 뿐만 아니라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이 전 해에 연출한 < 옥례기 >에는 임권택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꿈 장면이 나온다. 옥례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중매 시집을 간다. 그리고 첫 날 밤 이 남자가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인데다가 정신박약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여기서 이 표현이 ‘멸시’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의 언어로 서술하는 중이다) 옥례는 꿈에서 이 동네를 도망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잡으러 몰려온다. 그런데 이 영화의 서사는 사실상 정반대이다. 옥례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내조한다. 어떤 의심도 없이 내내 옥례는 희생을 받아들인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이때 이 환상 혹은 꿈은 단지 그것이 현실인가 아닌가, 혹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라는 단순한 진위 판단의 여부를 슬그머니 넘어선다. 여기서 장황한 정신분석의 개념을 전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서사에 끼어든 꿈, 혹은 환상은 단순하게 서사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종종 전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한 어린이는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고 안도한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부모님과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제까지 말썽을 부리면서 개구쟁이로 생활한 자기를 이 기회를 빌려 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실은 이 꿈이 말하는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금 웃는 것은 자기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외면하면서 기쁨에 차서 웃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가정은 단지 짓궂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한 어린이는 구조된 다음 표류하던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공통점은 여전히 표류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꿈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라는 질문이 아니라 동일한 상태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의 요구이다. 못 찾는 것인가, 버림받은 것인가. 사실로부터 해석에로 옮겨갈 때 영화는 드라마를 고정점으로부터 풀어헤쳐 놓게 된다. 서사 안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교환과 교정, 그 사이에 놓인 선택의 불확정성. <옥례기>(1977) 그렇다면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왜 임권택에게 드라마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단지 그걸 진부함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의 위대한 고전영화들은 드라마 안에서도 결코 진부한 공식 안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리고 임권택은 그걸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다. 그게 너무나도 놀라워서 연출부 시절에는 그의 동료들과 프린트를 카피한 다음 프레임 단위로 그걸 경이롭게 지켜보았던 경험이 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그 대답의 일부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여기까지 우리는 그 한 척의 작은 배만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바다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를 진행하면서 임권택은 영화 앞에서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는 세계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건 모든 영화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걸 피하고 싶으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 앞에서 스튜디오는 얼마나 조잡한가. 종종 세계는 시나리오를 때려 부셨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멈추지 않는 비. 정반대로 아무리 기다려도 내리지 않는 비. 무한정 기다릴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은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시스템의 영화라면 그냥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속수무책인 바다로 영화를 가져다 놓았다. 평면의 공간. 미장센 제로의 장소. 단 한 명의 등장인물, 열 두 살의 어린 아이. 아주 작은 배. 영화는 여기서 다가가는 것과 멀리 물러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 거기서는 레일을 깔아놓고 카메라를 수직으로 이동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크레인을 세워서 상하로 움직일 수도 없다. 단조로운 망원렌즈.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힘겨운 자세로 바라보는 클로즈업의 단편들. 나는 어떤 장면의 구도에서 이석기가 무거운 35미리 카메라를 들고 그 작은 배 위에서 위태롭게 찍을 수밖에 없었을 자세를 떠올리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보다 삼년 전인 1975년,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스필버그는 <죠스>를 찍은 다음 두 번 다시 바다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상어와의 바다에서의 쫓고 쫓기는 추적극을 보러가는 것이다. 스필버그는 할 수 있는 한 바다에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계속해서 해변에서만 머물다가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11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바다로 나간다. 임권택은 어촌에 도착하자마자 바다로 먼저 나간다. 아니, 나가버린다, 라고 말하고 싶다. 바다에는 김한 어린이가 대결해야 할 대상이 없다. 구태여 그것이 있다면 바다 위에서의 시간이다. 임권택이 바다로 간 것은 거기서 바다를 음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서 마주하는 것은 바다가 주는 공포이다. 이때 그것은 드라마로서 주어진 공포라는 장치가 아니라 영화 앞에 마주하고 있는 바다가 주는 공포이다. 그걸 영화가 견뎌볼 수 있을까. 세 개의 질문, 첫 번째 질문. 그걸 견뎌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대부분 이 영화에 대해서 실망한 사람들은 이 대답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망스럽다. 임권택은 아직은 드라마의 장치 안에 머물면서 교차편집을 하면서 여전히 망설인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 그걸 견뎌야 한다면 영화는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임권택은 바다가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영화가 감당해야하는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 해에 임권택은 <족보>를 찍으면서 설진영 노인이 일렬로 늘어선 커다란 포플러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 사이를 걸어오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위대한 장면에 대해서 나는 이미 설명했다) 여기는 도호 스튜디오가 아니다. 이 바람은 <요진보>의 거대한 선풍기 바람이 아니다. 그저 그 시간에 부는 바람. 영화가 그때 거기에 있다는 문제. 지금 바다는 화면 앞에서 명백하게 과잉하고 있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만일 영화가 드라마를 포기하고 그 과잉에 몰두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세 번째 질문이 나왔을 것이다. 그걸 견뎌야 한다면 영화는 무엇을 찍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임권택은 여기서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몇 가지 사실이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 바다는 어떤 은유도 상징도 아니다. 그런데 그 공포가 종종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말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바다, 라고 써야 할 자리에 공포, 라고 말했다. 방치될 수밖에 없는 환경. 바다는 그저 거기에 있다. 마치 재난과도 같은 그것. 이제까지는 그냥 놓아두면 영화의 장치들을 닥치는 대로 망가트려버릴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것. 그런데 거기에 장치들을 대신하는 세계의 체험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을 임권택은 몇몇 순간에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그냥 내버려둔다. 영화에서 상실이란 없다. 하나가 자리를 비우면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물러날 이유가 없어졌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영화에서 충분히 실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독도에서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를 찍으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임권택의 표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 장면들이 증명하는 기이한 선물, 바다라는 영도(零度)를 깨달았을 때 그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