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다
- 감독
- 이규웅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김지미, 남궁원, 윤정희, 이빈화, 안은숙, 도금봉, 이예춘, 남석훈, 이수련, 유계선, 최삼, 김정옥, 성소민, 안성혜, 지계순, 이예성, 이향, 염혜숙, 임해림, 나정자
처음으로 좋아한 격투기는 프로레슬링이었다.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를 보며 가슴 졸이고 환호했다. 홍수환, 유제두, 박종팔 등의 복싱도 열심히 봤다. 그리고 프라이드와 UFC 등을 접하며 종합격투기에 빠져들었다. 격투기는 원초적인 스포츠다. 프로레슬링은 번외로 하자. 프로레슬링은 육체의 기술을 갈고닦아 캐릭터와 스토리를 더해 만들어진 쇼다. 육체의 화려함과 열정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엔터테인먼트. 프로레슬링은 쇼이지만, 복싱과 종합격투기는 일상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후두부와 성기 등 급소를 때리지 않는 정도의 규칙만 있을 뿐이다. 맹수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물을 사냥하고, 인간끼리의 다툼에서 필요한 생존의 기술은 격투기로 발전했다. 내가 격투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했다. 싸우는 그들에게 끌렸다. 격투기의 결과는 승패로 갈린다. 하나는 이기고, 다른 하나는 진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상대를 때리고, 걷어차고, 꺾는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하지만 격투기를 보면서 승자에게만 열광하지는 않았다. ’졌잘싸‘라는 말이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의 줄임말이다. 비록 승부에서는 패배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를 보면 가슴에 무엇인가 일렁인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서, 치사한 전략으로 일관하는 놈을 보면 짜증이 일어난다. 단지 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녀석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격투기의 감흥을 떠올리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격투기, 복싱의 희열이 무엇인지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복싱을 택한 청각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복싱은 케이코에게 중요하지만, 생활을 압도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케이토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싱을 택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세상을 때리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진 것이니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본 최초의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오가사와라의 모든 이야기를 영화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모든 시간과 사건을 그리지 않는다. 미야케 쇼는 말한다. ‘복싱을 다룬 것만이 아닌, 하루하루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싸워나가는 한 여성을 그린 영화다.‘ 오가사와라 케이코가 소속된 체육관의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재능은 없어요. 키가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케이코는 반항적인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는 분을 못 이겨 선생을 때릴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분이 많고, 쌓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반항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케이코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하고, 복싱을 시작한다. 케이코는 말한다. ‘때리면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또 말한다.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케이코를 비롯한, 싸우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고받으며 싸우는, 마지막까지 전장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면 어딘가 연대감이 느껴진다. 처참하게 패배할지라도, 함께 끝까지 싸워보고픈 마음이 든다. <내일의 죠>의 명대사처럼, 마지막까지 ‘하얗게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실베스터 스탤론의 < 록키 >처럼,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링 위에 꿋꿋하게 서 있고 싶어진다, 할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젊을 때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미야케 쇼는 인터뷰에서 ‘나는 솔직히 말해 10대부터 20대까지 꾸준히 성실하게 살자, 라고 하는 구호에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대에 접어드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숏 한컷 한컷이 쌓여 완성되는 영화처럼 인생의 의미란 것이 결국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문 제목을 떠올려 보니 ‘Small, Slow But Steady’다. 작고, 느린 것이 소중함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의 위대한 승리나 처절한 노력을 말하지 않는다. 케이코는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한다.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합에서 지는 일은 벌어진다. 그렇다고 상대가 엄청난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복서다. 천재도, 셀럽도 아닌 그들의 성취는 작고 느리게 이루어진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의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케이코는 들을 수 없지만, 세상에 가득 찬 소리들.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과 강변 그리고 골목길 등을 채우는 햇살과 공기 그리고 먼지들. 우리들의 일상은, 문득 멈추어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작고 느린 것들로 가득하다. 16밀리 필름으로 촬영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다정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사려깊다. 소리도, 공기도,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한다. 작고 느린 것들은 꾸준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아니 존재한다. 케이코는 아픈 것이 싫다. 복싱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세상도 그렇다. 때리고 싶고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 도망치고 싶고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 그런 케이코를 붙들어주는 존재는 타인이다. 오랜 시간 권투를 했고, 지금은 후배를 키우는 체육관 관장. 나이가 들어 육체는 쇠하며 병이 들었고, 재개발로 인하여 체육관을 닫아야 한다. 세상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케이코를 가르친다. 청각 장애인인 케이코가 싸워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 일상의 싸움을 무수하게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관장만이 아니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인물들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하는 케이코의 남동생은 말한다. 누나는 강하다고. 자신은 누나처럼 강하지 않다고. 흑인 혼혈인 남동생의 애인 하나는 케이코에게 선뜻 다가가 인사를 하며 친해진다. 하나는 케이코에게 춤을 알려준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최고가 아닐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된다.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작고 느리게,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윗세대인 케이코의 엄마와 체육관 관장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미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파에 움추러든 아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따뜻한 영화다. 케이코는 결코 외롭지 않다. 언제나 그들이 있고, 풍경이 있다. 케이코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풍경 속에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소리와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케이코도 우리도, 언제나 함께,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
거의 흠 잡을 데 없이 잘 만들었는데도 대중과 잘 만나지 못하고 비평적으로도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배창호 감독의 < 꿈 >(1990)이 그런 경우였다. 화면의 격이라고 할까, 등장인물과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미묘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형식의 품격이 뛰어난데, 그만큼 주인공들과 격정적인 동일시를 느낄 관객의 처지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어서, 관객은 영화가 잘난 체한다고 느끼거나 심심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비평적 평가라도 올곧은 지지를 보내는 쪽이 있어서 그 영화가 외롭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 좋았을 텐데 대체로 저널리즘의 반응은 잘 만들었으나 흥행성이 약하다는 정도의 입장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배창호 감독은 < 깊고 푸른 밤 >의 역대급 흥행 이후 자기 예술세계에 대한 자의식이 깊어지면서 박력 있는 호흡의 대중영화 대신 롱테이크의 미감과 여백을 최대한 살린 < 황진이 >(1986)로 연출 색깔을 완전히 바꾸는 모험을 걸었다. 그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당시의 충격과 흥분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영화의 예술적 가치에 비해 반응은 매우 박한 편이었다. 흥행사로 정점에 오른 감독이 보인 예술적 만용의 결과로 비판받은 <황진이>의 상영 이후 배창호는 긴 호흡의 영상미는 살리되 낭만적 사랑의 관념을 서민적 삶의 일상에 녹인 < 기쁜 우리 젊은 날 >을 연출했고 기성 영화에선 잘 다루지 않았던 부성의 책임감을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이웃 관계에 대한 향수를 섞어 따뜻하게 묘사함으로써 다시 한 번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했다. < 안녕하세요 하나님 >은 < 고래사냥 >과 비슷한 소재를 새로운 형식에 담으려는 시도였고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는데 그다음 작품 < 꿈 >은 설화적 구성을 현대적인 형식으로 담아내려는 배창호의 예술적 야심이 거의 완벽하게 구현된 영화였다. 이광수의 원작이 바탕인 < 꿈 >은 신상옥 감독도 만들었지만 배창호 의 이 영화는 신상옥의 것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당시 충무로에서 가장 탄탄한 영화사였던 태흥영화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만들어진 흔적이 화면 곳곳에 드러나는 이 영화는 그때까지 충무로가 아직 헤어나지 못했던 기술적 낙후성을 훌쩍 뛰어넘었으며 상당수 장면의 이미지들은 아날로그적 장인정신으로 충만하다. 승려 조신( 안성기 )이 자신이 수도하는 절에 온 달례( 황신혜 )의 미모에 반해 파계를 감수하고 달례를 좇아 속세로 내려오면서 펼쳐지는 이 영화의 내용은 두 사람이 평생 달례의 정혼자에게 쫓기면서 자신들의 가정을 꾸려 제대로 살려 했으나 운명의 도움을 받지 못해 비극으로 귀결되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것이 제목 그대로 한갓 꿈이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야기의 내용이 꿈이라는 걸 전제하고 시작하는 소설과 달리 이 영화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놓고 주인공 조신의 깨달음을 꿈속에서 깨어난 결과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깜짝 놀랄 만한 장면들이 많은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후반부에 아들을 산에 묻고 조신과 달례가 황폐한 골짜기를 걸어 돌아오는 장면이다. 자신들의 욕망을 좇았으나 그 과보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한 상황 앞에서 마냥 순하기만 했던 조신은 거의 실성하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그가 달례를 향해 미친 사람처럼 돌변한 채 다가가자 달례는 “이러지 마. 나도 힘들어”라고 말한다. 대체로 과묵했던 달례와 조신의 관계에서 가장 격정적이고 솔직하며 직설적인 이 대사가 주는 낯선 어감이 이물감을 주는데 화면에는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귀기 어린 아름다움과 서늘함으로 가득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은 영화 초반 조신의 동료가 ‘두견새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감탄했던 서라벌 최고의 미모를 지닌 달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절의 큰 스님이 철쭉꽃을 따서 자신에게 인사하는 달례에게 줄 때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조신에게 화면이 커트되고 카메라가 그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면 두견새에 비유된 여인에게 안기는 한 송이 철쭉이고 싶은 조신의 심정과 꽃을 딴다는 행위에 조응하는 파계에의 유혹 등의 감정이 연상되면서 절묘한 영화적 호흡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만든다. 욕망의 과실을 따기 전의 설레는 감정과 그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 받는 잔인한 과보가 대비되는 과정을 아름다운 촬영, 조명, 연기, 편집으로 섬세하게 뒷받침한 이 영화는 그 섬세함의 독자성을 굳이 헤아릴 이유가 없는 극장관람의 무심한 관성 앞에서 덧없이 무너졌다. 그런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불멸성은 길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