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키
- 감독
- 요람 그로스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로빈 무어, 키스 스코트
전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라면 이 행성에 빵점을 주겠어요. - renata litvinova 나와 금정연, 임재철 평론가는 2021년 어느 겨울 낮, 은평구 갈현동의 만포면옥에서 물냉면과 설렁탕, 눈꽃 만두를 먹고 있었다. 우리가 왜 만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처럼 금정연이 연락을 해 그분이 보자고 합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그분이 금정연을 만나고 싶은데 둘이 보기 뻘쭘하니까 나도 같이 보자고 한 건지, 아니면 금정연이 둘이 만나기 싫어서 그분 몰래 나를 끼워넣은 건지 의심스러웠고 갈현동까지 가는 길을 생각하면 눈물이 차올랐지만, 영자원 연재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원고를 위한 작은 소스라도 얻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모든 연재가 그렇듯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도 매 원고가 위기였다. 시나리오 작법서로 베스트셀러가 된 시드 필드에 따르면 시나리오는 시작, 대립, 해소의 3막으로 구성된다. 반면 우리 에세이(필름)의 원고(대본)는 시작, 시작,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1년을 연재했는데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네요. 금정연이 말했다. 지난 원고도 2주나 넘겨 마감한 정연씨는 안본 사이에 더 늙은 모습이었다. 더희미해지고 하얘졌달까. 그러나 동안인 건 여전했다. 금정연을 본 사람이라면 별다른 설명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박솔뫼는 정연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늙은 아기. 상업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도 보통 2~3년은 걸린데요. 너무 걱정마세요. 나는 정연씨를 위로했지만 사실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나름 호기롭게 시작한 연재였고 쓰는 동안 괜찮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한 인터넷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제목: 한국영화 커뮤니티가 격변하는 시점 두 가지. 하나는 엠파이어가 moma로부터 가져온 16mm 필름으로 상영되는 날이고 다른 하나는 정지돈 금정연이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을 완성하는 날 금정연이 게시물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이 올까요? 반면 임재철 평론가(이하 LJ)는 우리의 걱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야, 지난 번 원고도 쓰기 싫은 티가 너무 나더만. 으하하하. 금정연과 나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지만 우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LJ에겐 어떤 대응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LJ는 무적의 비평가였다. 저널리스트의 객관성과 독학자의 주관성을 두루 갖춘 비평계의 전무후무한 존재. 놀라운 건 이 사실을 LJ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실이다. “나, LJ, 무적의 비평가.”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을 오만함이나 과대망상, 자기 현시 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LJ는 특정한 시공의 열림 속에서 어느 순간 가장 정확한 비평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언제 어느 때 그러한 시공이 열리는지, 그 조건을 포착하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금정연 역시 때때로 무적이 된다. LJ와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금정연은 스스로를 무적의 비평가로 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비평가/평론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 정연씨는 뭐예요? 언젠가 나는 정연씨에 물었고 정연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평가죠. 서평을 쓰지 않는… 그게 뭐야. 글쎄요. 전 뭘까요, 지돈씨? 자꾸 쓸데없는 말만 하지말고 영화나 만들어. LJ가 말했다. 두 세대 어린 영알못들의 감상주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투였다. 그의 앞에 놓인 설렁탕은 이미 싹 비워져 있었다. 만포면옥은 백년식당으로 선정된 냉면 맛집이었고(소설가 김훈은 “인생관을 바꾸는 맛”이라고 극찬했다) 나와 금정연은 물냉을 주문했지만 LJ는 설렁탕을 시켰다. 동시대에 기자로 활동했던 김훈에 대한 질투였을까? 내가 묻자 LJ는 김훈 정도는 기자로 쳐주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걔는 기사도 소설처럼 썼어(물론 칭찬이 아니다). LJ의 말은 늘 과격했지만 가끔 우리를 뜨끔하게 했다. 이를테면 “원고 쓰기 싫은 티” 같은 말 말이다. 익명의 블로거는 금정연의 <아무튼 택시>를 읽고 이렇게 글 쓰기 싫어하는 저자는 처음 봤다며 책값이 아깝다고 화를 냈다. 반면 또다른 블로거는 책 전반에서 느껴지는 쓰기 싫음, 일하기 싫음 때문에 저자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만약 글 쓰는 걸 진심으로 싫어했다면 이렇게 상반된 감상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애초에 책을 내지 않거나 에밀 시오랑 마냥 아포리즘을 끄적대며 거만을 떨거나). 우리의 태도는 냉소나 시니컬함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너스레나 솔직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일까? 양쪽 다인 걸까 둘 모두 아닌 걸까. 정연씨의 글 대부분은 진심으로 무언가를 믿고 실천하는 것의 어려움,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부유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원고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기.” 어쩌면 이것은 우리 세대의 “시대적 정신질환” 아닐까. 진심으로 문학을 믿고, 영화를 믿고 작업을 체계적으로 완성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무기력해지고 거부감이 솟구쳐 한글자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건 새로운 세기의 집필자장애writer’s block 일지도 모른다. 미국정신의학협회의 <진단과 통계요람(DSM)> 6판에 해리성장애의 하위 병 중 하나로 포함될 것이다. 이른바 K-wirter’s disorder. 과학철학자인 이언 해킹은 19세기 말 유행한 특이한 정신질환에 대한 책 <미치광이 여행자>에서 시대적 정신질환을 특정한 시대, 특정한 장소, 특정 사회계급이나 젠더에서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라고 말한다. 시대적 정실질환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언 해킹은 그런 식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실재성 역시 “인간의 삶과 언어의 변화에 따라 그 개념을 재조정하는 끝없는 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신질환을 번성하게 하는 환경인 생태학적 틈새다. 이 틈새를 만들어낸 벡터의 방향이 달라지면 틈새는 흩어진다. 다시 말해 이 틈새 속에서 정신질환은 잠시동안 실재가 된다. 잠깐 옆길로 샜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시작만 하고 아이디어만 낼 뿐 믿음, 역량, 진심 또는 그 무언가의 부재로 실천하지 못하고 매듭짓지 못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어떤 벡터들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한 벡터가 우리를 한국영화에서 길 잃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에세이필름이 벡터들의 교차로 만들어진 생태학적 틈새를 가시화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런 실천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완성이나 구성과 다르며 개봉이나 배급, 출판의 과정도 조금 다를 것이다. 어떻게 다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금정연과 나의 핸드폰이 동시에 우웅- 하고 울린 것은. 확인해보니 영자원의 연재 담당자가 우리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다음 원고 마감일을 고지하는 내용 아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혹시 작가님들이 여력이 되신다면 연재를 내년 12월까지 연장하면 어떨까요? 연재 연장? 1년 더? …… 금정연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투숏? 숏, 리버스 숏? 영화학자 미하일 얌폴스키에 따르면, 현대 영화언어 구조의 가장 본질적 형상은 리버스 앵글이다. “현대 영화는 볼거리의 두 가지 (재현적) 체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로서 기능한다. 관객은 끊임없이 어떤 때는 목격자가, 어떤 떄는 주인공이 된다. 여기서 세계는 언제나 다중시점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정신의학적 은유를 빌리면 영화는 처음부터 해리성장애를 수행하는 매체였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내 눈물인지 금정연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던 건 그래서일까. 이것은 기쁨의 눈물일까 고통의 눈물일까. 우리에게 1년의 시간이 더 주어진 것일까, 1년의 시간을 더 빼앗긴 것일까. 우리를 보던 LJ가 담담히 말했다. 고다르와 나도 통하는 게 있었지. 뭔데요? 우리 둘 다… 군대를 가기 싫어했어. 그래서 고다르는 브라질로 갔고 나는 아르헨티나로 가려고 했지….. 2022년 연재 예고 We Are Truly Fucked: Everyone Is Making AI-Generated Fake Porn Now 김희천의 VR <사랑과 영혼>에 대한 비평과 앙드레 바쟁의 완전영화의 신화, 미하일 얌폴스키의카이로스의 시간과 딥페이크와 리얼리즘의 시대의 MBTI로 보는 한국영화 유형학과 완전 자동 (한국)영화, 마동석, 마블유니스버스, 마크 피셔로 연결되는 자본주의 익스텐디드 리얼리즘에 관한 비평적 연대기…(어쩌면) Coming soon….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오스트리아의 외딴 마을, 거기서도 다른 이웃들과 뚝 떨어져 홀로 서 있는 고급 주택. 아홉 살짜리 쌍둥이 형제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성형수술을 받으러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집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빈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학교도 다니지 않고 타인과의 일체의 교류 없이 오로지 둘만의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왔다. 반갑게 이층으로 뛰어오르며 엄마를 부르던 소년들은 우뚝 멈춰 선다.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은 채 돌아온 엄마는 아주 낯설다. 손님도 받지 말고 외출도 하지 말고 집안에서는 절대 정숙하라며 온갖 새로운 규칙들을 열거하는 엄마는, 병원에서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주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이 사람은 싸늘하고 신경질적이며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 같다.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조금씩, 이 사람이 엄마인 척하는 타인일 것이라는 의심을 시작한다. 베로니카 프란츠와 스베린 피알라가 공동으로 연출한 2014년 영화 <굿나잇 마미>의 첫 장면은 볼프강 리벤라이너의 1956년 작 <트랩 가족(Die Trapp-Familie)>의 클립이다. 1965년 할리우드에서 다시 만들어진 <사운드 오브 뮤직>의 원안이 되는 이 영화에서, 오스트리아 민속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과 일곱 명의 아이들이 브람스의 <자장가>를 합창하고 있다. 일곱 아이들의 새엄마가 된 견습 수녀 출신 마리아와 아이들 간의 따스한 교감과 호흡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엄마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프란츠와 피알라는 왜 하필 이 영화의 이 장면을 선택했을까? 연구자 리에스 란크만이 지적한 대로, <트랩 가족>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대는 의미심장하다. 마리아가 이 가족에 합류한 것은 1927년이었고, 폰트랩 가족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무렵 미국으로 떠났다. 그 시기 오스트리아 여성들은 네 명 이상의 아이를 낳은 순수한 혈통의 어머니들에게 부여되는 ‘다산모 십자훈장’을 받는 ‘영광’을 얻도록 노력해야 했다. 본인도 소녀티를 갓 벗었으면서 기꺼이 외로운 일곱 아이의 새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마리아는 사실 ‘다산모 십자훈장’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받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1) 그러므로 <트랩 가족> 속 (그리고 현실 속) 마리아 폰트랩이 <굿나잇 마미>의 오프닝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영화 속 모성성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위한 카운터파트로서다. 가족이 갑자기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오는 이야기의 다수는, 요정이 요람 속 인간 아기를 훔쳐가고 대신 요정 아기를 남겨두는 ‘체인즐링’ 설화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굿나잇 마미>에서는 그 설정이 역으로 제시된다. 무엇 때문인지 불분명한 이유로 성형수술을 받은 엄마가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달라진 외양이 달라진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붕대를 감은 엄마는 예전 엄마처럼 다정하고 따뜻하지 않다. 동생 루카스에게 식사도 차려주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이며 형 엘리아스에게는 손찌검까지 가한다. 가족 앨범에서 아빠의 사진이 사라진 것처럼(‘우리의 결혼식’이라고 태그가 달린 페이지는 텅 비었다), 별거 이후 아빠의 존재가 ‘우리 가족’으로부터 빠르게 삭제당하고 부정당한 것처럼, 엄마도 혹시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건 아닐까? 어떤 ‘신체강탈자’가 엄마의 영혼을 바꿔치기한 건 아닐까? 아이들은 가족 앨범에서 발견한 낯선 여자의 사진을 주목한다. 엄마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 여자는 누굴까? 혹시 엄마에게 숨겨진 쌍둥이 형제가 있었던가? 엄마라면, 자신의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를 리 없다. 엄마라면,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엄마라면, 냉동 피자로 냉장고를 가득 채우면 안 된다. 엄마라면, 아이의 눈물 어린 호소에 24시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트랩 가족>(더 쉽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처럼, 상처받은 아이들의 행위 이면에 발화되지 않은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마음으로 앞질러 선험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과 화음을 맞춰 함께 노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 낯선 여자는 너무나 자주 신경질을 부리거나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아이들을 돌보는 대신 화상캠으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방송 진행자로서의 커리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수술 전의 엄마(혹은 수술 전에 그랬다고 아이들이 믿는 엄마)를 돌려놓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마을과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 있고 내부에 각종 모퉁이와 모서리가 많은 이 집은 그 자체로 미로처럼 작동한다. 마치 엄마처럼, 이 집도 불현듯 아이들에게 불친절하고 적대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가족 혹은 집은 모두 공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아이들은 집안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없고 지저분하게 물건을 늘어놓을 수 없으며 햇빛을 차단해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를 만나려면 단단히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정중하게 노크를 해야만 한다. 지하실 구석에는 그들이 몰래 키우던 고양이의 시체가 박혀 있다. 아이들이 엄마를 피해 집안 어딘가로 달아났을 때 엄마는 그들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집안에서의 숨바꼭질, 쫓고 쫓기는 추격전, ‘진짜’ 엄마를 찾는 모험, 그리고 결국엔 텅 빈 앨범 페이지의 거대한 공포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행위. <굿나잇 마미>에서는 아주 유명한 호러 스릴러 영화(제목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차마 적을 수 없다)의 또다시 이걸 쓸 수 있을까 싶었던 전제가 영리하게 변주된다. 이를테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다시 쓰기한 작품을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 그런 케이스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소설에서만 가능한 ‘생략’을 이용한 서술 트릭을 사용했던 것처럼, <굿나잇 마미>는 원제 ‘Ich seh, Ich she’처럼 ‘본다’라는 행위의 맹점을 활용한 트릭으로 관객을 속여넘긴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이 영화를 부디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항. 이 영화의 프로듀서는 울리히 사이들이다. <개 같은 나날><지하실에서><파라다이스 러브> 등을 통해 ‘뉴 오스트리아 필름’의 대표주자로 불리던 그 감독은, <굿나잇 마미>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베로니카 프란츠의 남편이기도 하다. *** 1)Lies Lanckman, 「‘I see, I see . . .’ Goodnight Mommy (2014) as Austrian Gothic」, 『Gothic Heroines on Screen : Representation, Interpretation, and Feminist Enquiry』, Edited by Tamar Jeffers McDonald & Frances A. Kamm, Routledge, 2019. (https://uhra.herts.ac.uk/bitstream/handle/2299/22115/Goodnight_Mommy_Lanckman_1.pdf?sequence=1&isAllowed=y)
문득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낯설어져서 무서워질 수도 있고, 식상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색다르게 재배열 되는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2020년 상반기 한국영화 중에 < 침입자 >(2019)를 마주한다는 건 단순히 텍스트를 분석하거나 장르적인 성취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스릴러에 기반을 둔 장르의 연장선에서 볼 때 <침입자>는 명백히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설정도 흥미롭고,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클리셰들이 꽤 많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후반부의 전개과정에서 개연성이 부족해 중반까지는 나름 긴장감을 유지해 가던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러 급격히 무너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일정부분 동의 한다. <침입자>는 혼란스럽다. 마땅히 설명되어야 할 것들을 미뤄둔 채 모호하게 남겨져 방치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전반에 차곡차곡 쌓아나갔던 긴장감은 후반부 작위와 우연의 남발로 씻은 듯이 사라지고 끝내 엉뚱한 길로 접어든다는 인상을 남긴다. 장르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러 방향에서 이야기 될 요소가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침입자>를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과잉과 오해의 서사 때문이다. 우선 과잉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잔가지가 지나치게 많다.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긴장감, 가족의 의미와 익숙한 것들이 주는 공포,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공간의 관계등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해내지 못했다.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는 건 오해에 관한 부분이다. <침입자>의 콘셉트는 한 줄로 정리된다. ‘내 가족 안으로 낯선 존재가 침입해 들어와 나를 밀어낸다.’ 영화의 전반부는 홈 인베이젼 장르의 길을 충실하게 따른다. 안전해야 할 공간, 집과 가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긴장과 공포가 피어난다. 철저히 서진( 김무열 )의 시점에서 쌓아나가는 서스펜스는 제법 효과적이다. 하지만 ‘유진이 친동생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던 영화는 어떤 상황을 기점으로 ‘유진이 왜 이 집으로 들어왔나’로 질문 자체를 선회 한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오컬트의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이 터닝포인트가 상당히 급작스럽고 논리적인 공백들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손원평 감독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거나 설득시키는데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침입자>가 확실히 성취해내는 건 모호한 불안감의 확산이다. 한국사회의 현재를 녹여낸 결과물로서 이 영화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불안을 투영한다. 기억과 공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믿음에 관한 상식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침입자>는 익숙한 레퍼런스로 지은 집이다. < 오펀: 천사의 비밀 > < 요람을 흔드는 손 > 등 할리우드 홈 인베이젼 장르부터 < 유전 >, < 미드 소마 > 등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 <어스>나 < 겟 아웃 >을 연상시키는 전환과 설정, 심지어 < 하녀 >나 < 화차 >와 같은 사회계급 속 여성의 위치를 그린 영화까지 찾고자 하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합의 결과물은 사뭇 낯설다. 보는 관점에 따라선 레퍼런스를 제대로 녹여내지도, 정리하지도 못한 연출력의 부재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낯설고 어색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한 전후반의 전환이, 과장해서 말하자면 관객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철저히 무너지는 내러티브가 곧 <침입자>가 전하고 싶었던 감각 또는 목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들을 차용하고 뒤섞어 잘 이끌고 가다가 별안간 쌓아올리던 구성을, 비유하자면 레퍼런스라는 집을 송두리째 부숴버리는 것이다. 인물들이, 이야기가, 그리고 장르라는 패턴이 믿었던 것들을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감독은 믿음과 진실이 사라진 시대 자체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전체 이야기 구조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침입자>는 진실을, 혹은 진실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정보들을 설명하고 나선, 정작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사실로 믿을 수 있게 증명하지 않는다. 진실과 사실의 경계마저 희미해져가는 혼란 혹은 불안.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 여기에 있고,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도 여기에 있다. 때로 어떤 영화들은 어떻게 파헤치고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스스로도 몰랐던 비밀을 들려주기도 한다. <침입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반응 혹은 부조화가 흥미로운, 문제적 영화다. 우리는 이 영화를 좀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