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수도시
- 감독
- 카와지리 요시아키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후지타 토시코, 나가이 이치로, 아오노 타케시, 요코오 마리, 야라 유사쿠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아니 반사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비슷한 원형을 떠올리고, 옛것이 훨씬 더 훌륭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는 증거일 테다. 지금 애니메이션 칼럼을 쓰고 있지만 민망하게도, 현대 애니메이션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탓에 늘 먼지 쌓인 추억의 라이브러리만 뒤지는 자괴감의 변명이다. 내게 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아니메’는 언제나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나왔던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모든 개념과 인식의 근간이다. 그 시절의 작품들을 접했던 때의 내가 이형(異形)의 이국(異國) 문화에 심취했던 10대였기 때문이겠지만,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선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꼈던 이유가 있다. 그 시절 아니메는 뭐랄까, 약간 미친 것 같았다. 작품이 다루는 소재와 전하는 테마 이전에 움직이는 그림 자체가 호화찬란했다. 대부분 작품들이 저마다 넋 나갈 수준의 퀄리티였다고 기억한다. < 천공의 성 라퓨타 > <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 > 한 번 대충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1984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린 민메이가 부르는 노래로 이 리스트는 시작한다. 85년 린 타로의 <카무이의 검>이, 86년에 지브리가 설립되어 < 천공의 성 라퓨타 >가, 87년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 요수도시 > OVA와 가이낙스의 첫 작품 <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 >가 나왔고(데자키 오사무의 < 보물섬 > 극장판도 1987년이었다. 물론 이쪽은 1978년에 나온 TV 애니를 극장판으로 재편집한 것이었지만), 이어서 88년에 오토모 가츠히로의 < 아키라 > 극장판이 어떤 정점을 찍고 89년에 <파이브 스타 스토리>와 < 마녀 배달부 키키 >가 나온 다음 90년대로 진입한다. < 수병위인풍첩 > < 신세기 에반게리온 > 1990년에 <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 91년 <사일런트 뫼비우스>, 92년 < 자이언트 로보 >, 93년 < 수병위인풍첩 >과 <기 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 >, 94년 다카하타 이사오의 <헤이세이 폼포코 너구리 전쟁>… 이렇게 가다가 95년에 < 메모리즈 >와 오시이 마모루의 < 공각기동대 >로 또 한 번 아니메 퀄리티의 정점을 찍은 다음, 1996년 안노 히데아키의 <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그렇게 끝나면서 내가 알던 일본 아니메의 세계는 멸망, 자폭, 리셋, 포맷되었기에 이후의 사정은 어떻게 되건 말 건 아무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내 뇌에서 자동으로 전개 가능한 아니메 연대기다. (이 리스트에서 ‘건담’ 시리즈를 뺀 건 건담은 아니메의 영역과는 따로 구별하여 논의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이념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 아니메의 퀄리티가 굉장했던 이유를 일본이 버블 경제의 호황기를 누릴 때여서 업계에 들어오는 자본이 넘쳤고, 시장의 수요가 폭발했으며, 온갖 다양한 기회를 잡느라 애니메이터들의 재능 역시 부글부글 끓어 넘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중에 실상을 알고 보니 아니었다. 그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정착되기 시작한 ‘제작위원회’ 방식은 실은 애니메이터들의 육체와 영혼을 뜯어먹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인력과 노동을 엄청나게 요구하니 애초에 제작비가 높다. 점점 상승하는 제작비 부담과 흥행 실패의 손실 부담을 덜기 위해, 여러 출자사의 공동 투자를 받고 이익은 투자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이 바로 제작위원회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컨소시엄을 이룬 이 임의 단체는 수익 정산이 끝나면 해산한다. 모여서 파이를 만들고, 뜯어 먹고, 헤어진다. 내가 업계의 스승으로부터 들은 말 중에 가장 무겁게, 또 무섭게 받아들인 문장은 “돈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돈은 언제나, 반드시 언젠가 그걸 받아 쓴 이에게 말을 하는 법이다. 이 세계에서 눈먼 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돈은 말을 한다. 지분을 쥔 스폰서들이 권리를 갖고 말을 하면, 제작진은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제작위원회 안에서 얼마나 그 말들이, 즉 창작에 대한 개입이 많았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배에 사공이 많으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다 안다. 이런 구조는 작품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고 사실 떨어져야 정상이다. 손실을 각오하고 투자하는 것과 달리 손실 자체를 미리 나눠놓은 것이 제작위원회다. 흥행에 성공해서 수익이 나더라도 실무 제작사 입장에선 인건비와 작업비를 충당하러 이미 돈을 받아 쓴 거라, 남는 건 없고 다만 망하지 않았으니 다음 일을 또 할 수 있다. 남는 건 작품뿐이다. 노동을 이어가기 위한 창작이라고 할까. 넋 나갈 수준의 퀄리티로 만들어진 그 시절 일본 아니메의 이면에는 이번 일을 끝내 작품 한 편을 만들었으니 또 다음 일로 넘어가는 애니메이터들의 고통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 아니메의 퀄리티란 그림과 내용의 질이 그다지 균형적이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작화가 압도적인 데 반하여 이야기는 별 감흥 없이 그저 그런 경우가 많았다. 위에서 내가 제시한 리스트를 결코 일본 애니메이션 최고 걸작 리스트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창작 행위의 그럴듯함, 예술가의 근사함은 여기 없다. 간혹 어딘가 뜻 모른 채 도달하는 기적이 일어날 뿐, 이미 영혼이 탈곡된 채로 엄청난 공력의 그림을 집요하게 그려대는 노동자들만이 존재했다. < 비너스 전기 >(1989)를 다시 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환상적으로 움직이는 그림 뒤의 현실노동 말이다. 퍼스트 건담의 캐릭터 디자인에서부터 당시 업계 최고의 실력이었으며 가장 잘 나가는 애니메이터였던 야스히코 요시카즈 선생은 본인의 원작 만화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이 작품 이후 애니메이터 은퇴를 선언하고 애니메이션 일에 손을 뗐다. (수십 년 후에 <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 >으로 복귀하긴 하지만) 그는 살아 움직이는 만화영화를 뒤로하고 정지한 연속 그림의 세계, 만화로 돌아갔다. 그 이유로 남의 작품들을 보고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말한 건 아무래도 위장 같다. 흥행 실패도 원인이 아니었을 거다. 선생의 평소 객관과 드높은 성품으로 보아 애초에 그딴 건 관심도 없었을 것 같다. 나는 그가 애니메이션을 관둔 이유를 이른바, ‘학을 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하긴 하지만 계속할 이유가 그다지 없는 노동에서 불과 40대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림이야 집에서도 그릴 수 있지 않은가? 자본에 착취당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그 노동을 온전히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만화로 옮겼다. 선생은 만화 작업에 어시스턴트를 따로 두지 않았다. < 모빌 슈트 건담 디 오리진 >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아들을 보조로 썼을 뿐이다. < 비너스 전기 >는 지구의 식민지로 테라포밍된 미래 금성에서 ‘아프로디아’와 ‘이슈탈’ 두 세력이 충돌한 전란의 한가운데, 바이크 레이싱 게임 선수였던 ‘시로’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선생이 전쟁을 다루는 방식은 <왕도의 개>나 <무지갯빛 트로츠키>같이 현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만화 쪽이 훨씬 흥미롭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면, 시로 말고 반대 세력의 주인공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원작 만화의 내용만 궁금해진다. 감히 말하건대 이 애니메이션에서 볼 건 오직 그림밖에 없다. 그러나 그림이 환상적이다. <아키라>의 작화와 모션이야 굉장하지만 오토모 가쓰히로 특유의 그림체가 어딘가 싫었다면, 짐작해보라. <비너스 전기>는 야스히코 요시카즈 선생이 그린 아름다운 캐릭터들이 < 아키라 > 이상으로 움직여대니까. 시로와 일당들은 전쟁이야 어찌 되건 자신들의 경기장을 점령한 거대전차 ‘타코’가 싫다. 탱크를 경기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그들은 각자 한 손에 대전차 무기를 들고서 원 휠 바이크를 몰고 간다. 일본 아니메를 통틀어 베스트 시퀀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액션이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어른들의 “힘과 거짓을 보면 부아가 치미는”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대의가 죽일 뿐”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살아있으면 언젠간 좋은 일도 있단 말이다!”라며 구하러 달려가는 어른도 있다. < 비너스 전기 >가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은 딱 이 정도가 전부다. 관객의 감정을 어딘가 도달시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위대한 장인이 한때의 업을 ‘때려치울’ 명분을 제공한 작품으로써 < 비너스 전기 >는 충분히 넘치는 가치가 있다. 아직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보지 못한 나는, 최고의 대가가 때려치운 어느 노동 앞에서 부러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재능조차 없는 나는 사실 이쪽 일을 진작 때려치워야 했지만, 아직 내세울 명분을 만들지 못했기에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또 그 시간이 지리멸렬했던 이유는, 실은 진짜 고통스런 노동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쿵딱 똑뚜르르 똑뚝딱... 쿵딱 똑뚜르르 똑뚝딱...” 뜨개질 바늘 부딪히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루핑 되면서 끝없이 뜨개질을 이어가는 단편애니메이션 <마지막 뜨개질 The Last Knit>(로라 네우본넨, 2005)은 최근 생기고 있는 지역중독센터의 주요 정신치료대상이 되기 시작한 ‘인터넷, 모바일 게임 중독’이나 ‘웹툰 중독’처럼 반복되는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기 힘든 말초적 감각의 즐거움으로 채워진 중독과 같이, 갇힌 시야로 인해 한 가지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궁(迷宮)과 같은 병적인 ‘집착’에 관해 다루고 있다. 필자는 이번 추천 애니메이션에 ‘집착으로 쌓인 내공’이라는 주제로 화두를 풀어가려고 한다. 2006년 일본 도쿄아니메페어 출장으로 신주쿠역을 출발해 도쿄역에서 환승, 역사를 막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당연히 우리나라와는 기후, 환경, 그리고 지하철에서 풍기는 독특한 냄새 등 생활문화가 여러 가지로 다를 것이라고 짐작을 한 여행이었지만, 서울역을 중심으로 여러 전철역의 선로 옆 도심과의 경계를 위해 위협적으로 세워진 철조망, 콘크리트 방음벽, 오랜 세월 달리는 철마의 분진으로 바닥과 벽들이 온통 빨간색으로 물든 철도변의 모습과는 달리 동경 전철역과 선로주변은 경계석을 제외하고는 철조망이나 방음벽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수없이 지나가는 전철의 소음 속에도 고양, 일산 신도시의 고급 주택가처럼 깔끔하고 멋 부린 주택들이 올망졸망 늘어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난밤 일본어 회화책에서 얄팍하게 배운 감탄사를 조용히 내뱉는다. “스고이...!” 전철은 이제 서서히 속도를 더하는데 “아뿔사!” 한 수 더한 ‘깔끔한’ 상황에 열린 입을 다물기가 쉽지 않았다. 아담한 2층집 계단의 난간 손잡이가 스텐레스 봉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라 집주인이 바깥 청소를 시작한 모양이다. 주인장은 스텐레스 손잡이에 광택제를 뿌리고 헝겊으로 빡빡 문지르기 시작한다. 3월 하순의 아침햇살과 동경 시내 풍경이 집주인이 닦아낸 거울 같은 손잡이에 영롱하게 교차되면서 반사 굴절된다. 필자에게는 넋 나가는 충격이었지만 일본 전철선로 옆집 아저씨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였다. 이는 일본 전철역 주변 사람들만의 ‘청결’에 대한 집착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습도 높은 섬나라 민족의 위생강박관념에 의해 오랫동안 진화된 변종 염색체의 고착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일본 사람들의 청결과 위생의 집착에 관한 또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2005년 히로시마페스티벌로 가져간 PISAF(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 홍보물 박스를 버리려고 휴지통을 찾았지만 행사장이나 시내 어디에서도 찾지 못해 결국 한국으로 되가져온 방증만으로도 그 순위를 마땅히 세계 1위에 올릴 수 있다. 이러한 데는 일본의 지역적 기후, 풍토 등 환경적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분야에서는 이렇게 깔끔한 민족성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16세기 우키요에(浮世繪) 이후 명작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이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나름대로의 연유가 되는가보다. 문화와 예술작품에 관해서도 이러한 집착과 내공의 함수는 비례한다. 그래서 잔인하게도,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에 대해 우리 민족의 고유 창작품으로서 평가하고 찬사를 보내기에는 찰흙이 아닌 거친 화강암을 수없이 두들겨야만 형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물리적 속성의 모순을 풀지 않고는 그 찬사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여 부득불 공염불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엿판처럼 질긴 화강석에 망치질을 해보지 않은 여러 미학자들과 평론가들은 우리나라의 천재 석공이 단번에 두들긴 정질에 유아독존 석굴암이 탄생했다고들 감히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추천 애니메이션을 이야기 해보자. 1987년 도쿄 판타스틱 영화제에 특별 초대되었던 이색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 미궁물어 迷宮物語 >는 평단으로부터 아낌없는 극찬을 받았고 일련의 비디오물들 보다는 월등하게 탁월한 작품의 완성도 때문에 2년 뒤인 1989년 극장에서 다시 개봉하였다. 또한 이 작품은 현재 거장이 된 린타로, 가와지리 요시아키, 오토모 가츠히로 3명의 감독들이 미궁(迷宮)이란 이름에 걸맞게 마유무라 타쿠(眉村卓) 동명 원작소설의 난해한 이야기를 감독별로 작가적 감성과 색채를 진하게 녹여서 풀어내고 있어 감독들의 발자취와 축적되어가는 작업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오프닝작 <라비린스 라비린토스 ラビリンス ラビリントス>의 린타로(りんたろう) 감독은 < 우주해적 캡틴 하록 >(1978) < 은하철도 999 >(1979) < 안녕 은하철도 999 >(1981) < 환마대전 >(1983) < 카무이의 검 >(1985) <불새-봉황편>(1986) < 메트로폴리스 >(2001)를 통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린타로 감독의 이전의 스타일과는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라비린스 라비린토스=미궁, 미로’라는 작품제목과 같이 몽환적인 상상력으로 옴니버스 전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줄거리는 데이브 맥킨의 몽환적 작품 < 미러 마스크 >(2005)의 설정처럼 서커스 극장의 환상으로 시작하는데, 여자아이 사치와 고양이 치치로네가 이상한 피에로를 쫓아 환상의 미로를 지나 이제 막을 올린 서커스 극장 속으로 들어간다. 작품 후반부의 미궁 같은 골목길에서 3D CG처럼 재현된 모호한 공간지각에 대한 상상력은 가히 대단하다. 두 번째 작품은 < 요수도시 >(1987) < 마계도시 신주쿠 >(1988) < 수병위인풍첩 獸兵衛忍風帖; 무사쥬베이 >(1993)으로 유명한 카와지리 요시아키(川尻義昭)의 <달리는 남자 走の男>다. 이 작품은 감독의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는 그림체와 연출 등이 이후의 명작들을 낳게 한 초기 작품으로 충분히 가늠된다. 1등에 대한 집착이 강한 카레이서 ‘잭 휴’가 생명을 담보로 레이싱을 펼쳐 경쟁 카레이서들을 물리치고 1등을 하지만 자동차와 함께 그도 결국 산화해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린타로나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에 비해 3D 공간감과 구조적인 상상력이 다소 아쉬웠다. 하드고어한 하이프리얼 해부학적 묘사와 유려한 동작, 스토리에 몰입감을 점증해가는 매끄러운 전환을 특징으로 하는 카와지리 요시아키 감독의 ‘옥의 티’로 슬쩍 넘기고 싶다. 세 번째 작품은 한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 아키라 >(1988)와, <노인Z>(1991)의 감독 겸 만화원작자로서, 혹은 < 메모리즈 >(1995)에서 히치콕의 오마주로 22분 18초 동안의 롱 테이크로 연출된 <대포의 거리>와 < 스팀보이 >(2005)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오토모 가츠히로(おおともかつひろ)의 데뷔작 <공사중지 명령 工事中止命令>이다. 필립 글래스의 ‘자푸라 강 Japura River’처럼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단조로운 반복음이 좌우, 앞뒤에서 소리의 정위감(Sound localization)으로 울리면서 정글이 있는 아로아나 공화국의 444프로젝트 공사장 이정표에서 3인칭 시점을 슬로우 아웃으로 멈추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줄거리는 444프로젝트를 중지하기 위해 주인공을 파견하지만 오직 로봇으로만 작업되고 있는 거대한 공사현장의 책임자 로봇은 오히려 파견된 주인공을 감금하고 공사를 계속해서 진행시키려 한다는 내용으로 자연파괴와 기계적인 현실에 갇힌 현대 사회의 인간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세밀한 자연생태와 인공구조물, 그리고 설계도까지 가미되어야만 정확한 움직임이 구현될 수 있는 다양한 기계류에 대한 복잡한 상상력과 세세한 묘사력은 ‘감독’이라는 호칭에 앞서 실로 ‘기계와 구조 컨셉의 달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 미궁물어 >가 개봉된 후 오랜 경험과 수련으로 쌓인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업계의 내공이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음은 더할 나위가 없지만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95년에 개봉한 3편의 중편(그녀의 추억;彼女の想いで, 모리모토 코지 감독 / 최취병기;最臭兵器, 오카무라 텐사이 감독 / 대포도시:大砲の街,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으로 구성된 114분의 또 다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 메모리즈 メモリ?ズ >는 완성도와 밀도에서 <미궁물어>의 신선, 난해함을 실사영화보다 더 사실적인 치밀함과 회화적인 묘사에 블랙유머의 여유까지 더해서 업데이트한 일본 중편애니메이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영화관객 수로 법석을 피운 알폰소 쿠아론의 < 그래비티 >(2013)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 인터스텔라 >(2014)는 <메모리즈>의 ‘그녀의 추억’과 ‘최취병기’의 오마주가 아닐까, 라고 치부하고 싶다. 박수근 화백의 ‘낙엽 떨어진 나무’를 팩션과 언어의 향연으로 풀어낸 ‘나목’이 박완서 작가의 공력을 쌓아올린 등단작이 되었듯이 섬세한 감성과 오랜 기간의 수련에서 체득한 내공이 작품에 배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시대를 창작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난해하면서도 복잡한 상상력으로 어우러진, 풀기 어려운 방정식 같은 작품 < 미궁물어 >를 감히 추천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내친김에 < 메모리즈 >까지 보시고... 바흐의 ‘평균율 1권 1번 프렐류드’에서 반복되는 피아노 음이나 필립 그래스의 ‘라비린토스, ‘해변의 아인슈타인 Einstein on the Beach’과 와크티(Uakti)가 연주한 ‘자푸라 강’, ‘아마존 강 Amazon River’의 난해하지만 형이상학적 감성의 신비로움과 환상을 자아내는 단조로운 반복음이 창조해낸 음율의 감미로움을 최면술로 즐기는 사람들은, 오늘처럼 겨울을 더해가는 진눈깨비가 내릴 때, 브람스 4번 교향곡과 스파클링 와인 모스까토 큰 한잔으로 이 계절을 즐겨야 하는 예술가의 사명감을 당연히 수행하듯 소위 엘리트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릴 수밖에 없다. 뵈프 브로기뇽을 배불리 먹지 말고,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