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화 장희빈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남정임, 신성일, 태현실, 강문, 도금봉, 한은진, 정애란, 허장강, 김성옥, 방수일, 김칠성, 이령, 안인숙, 오경아, 김신재, 석금성, 백봉희, 장훈, 최창호, 강계식, 이예성, 김웅, 성소민, 임예심, 정호연, 김옥주, 임생출, 추봉, 박병기, 지계순, 태무진, 안일문, 장현호, 홍동은, 이혁, 김황룡, 김정훈
“나는 그렇게 일찍 ‘입봉’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게 내가 먹고사는 유일한 방법인데 조감독을 하면 그냥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잖아요. 그때만 해도 내가 충무로에서는 꽤 똘똘한 조감독이어서 사람들이 권택이, 권택이 그러면서 나를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감독 한번 해서 망하면 그걸 누가 다시 연출부로 데려다 쓰냐구요. 그때도 영화 한 편 찍고 사라진 사람들을 많이 봤으니까요. 나는 정창화 감독만 모시고 했잖아요. 여기저기 다니는 게 나한테 맞지도 않고. 그런데 < 장희빈 >을 찍을 때였어요. 그걸 창경궁에서 찍고 있는데 일정이 촉박해서 심지어 연출부들이 그때 막 궁궐 안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영화를 찍었어요. 장면을 찍는데 참, 이건 내가 잘못한 건데, 거기서 나와야 할 일정이 다 되어서 이제 떠나야 할 판국인데, 창경궁 바깥으로 일단 나가면 세트를 세울 수도 없고 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날 분량을 다 못 찍고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정창화 감독이 막 찍기 시작하는 거야. 동선도 안 맞고, 시선도 틀리고, 그래서 내가 이건 잘못된 겁니다, 라고 말을 했는데, 거기 배우들도 있고, 스태프들도 있고, 사실 정창화 감독도 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데, 그래서 속에 불이 나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 알고 있을 법한 조감독이란 놈이 그러니까 다 있는 앞에서 나한테 갑자기 화를 내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맞는 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그만두겠다, 이러고 나온 거지, 그런데 내가 다른 감독 밑에서 해본 적도 없고 머리가 컸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감독들도 나를 안 부르는 거야, 그때 조감독 하던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제작자가 그러지 말고 그냥 ‘입봉’을 해라, 해서 감독이 된 거예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장희빈>(정창화), <요화 장희빈>(임권택) 정창화 의 < 장희빈 >은 1961년에 제작되었고 김지미가 사극 드라마 사상 첫 번째 장희빈으로 등극한 영화이다. 숙종으로는 김진규가 출연하였다. 이듬해 임권택 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입봉’하였다. 그런 다음 스무 편의 영화를 더 찍었다. 1968년 임권택은 자신의 첫 번째 칼라영화 < 요화 장희빈 >을 찍었다. 물론 그해에 이 영화만 찍은 것은 아니다. ‘입체영화’ < 몽녀 >를 찍었고, (< 7인의 사무라이 >를 리메이크한) < 황야의 7인 >를 리메이크한 < 바람 같은 사나이 >를 찍었고, 첫 번째 다찌마와리 액션활극 < 돌아온 왼손잡이 >를 찍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야지’(그때는 자신이 모시던 감독을 그렇게 불렀다)가 찍었던 영화, 그 현장에서 떠나야했던 영화, 그 영화와 같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자신이 찍게 되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약간 민망하지만 어떤 승리감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대결‘하는’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오야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싶다. ‘親父’라는 말. 자기 아버지라는 뜻. 영화 현장에서 연출부들은 자기가 모시는 감독을 다른 자리에서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 하여 ‘오야지’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대결하는 장면. 약간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임권택은 <요화 장희빈>을 ‘연출하면서’ 정창화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그런 다음 의도치 않게 한국영화 산업 안에서 스스로 망가지면서 자기 영화를 찾아가는 과정에 나서게 되었다. 헐벗은 연출. 가진 것 없이 버려지게 된 다음 다시 시작하는 계기.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 혹은 이 스물 한 번째 영화는 임권택에게 하나의 사건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영화는 임권택의 내부에서 미처 종결되지 않았던 하나의 중단이 마침내 자기 손에 의해서 완성된 다음 끝난 것이다. 물론 과도하게 <요화 장희빈>에 대해서 (프로이드를 경유한) 아버지와의 대결이라는 드라마를 끌어들이는 것은 사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두 번째. 한국영화에서 첫 번째 칼라영화는 1949년에 만든 홍성기의 16mm 필름인 <여성일기>였지만 긴 시간 동안 한국영화에서 칼라영화의 시대는 미루어졌다. 그 시대를 시작한 것은 1961년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홍성기 의 < 춘향전 >과 신상옥 의 < 성춘향 >이었다. 임권택 이 ‘입봉’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칼라영화의 시대. 그러나 임권택은 자신의 칼라영화를 한참 뒤로 미루었다. 물론 그건 그의 예술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필름 값은 영화 제작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쌌(을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비용이 부담스러울 만큼 제작 조건이 열악한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임권택은 기다려야 했다. < 요화 장희빈 >은 임권택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한 가지 더. 신기하게도 1968년에 찍은 임권택의 영화는 ‘갑자기’ 모두 칼라영화이다.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흑백영화를 찍지 않았다. 같은 말이지만 되돌아가지 않았다. 혹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를테면 홍상수 는 가끔 흑백으로 영화를 찍었다. . 혹은 칼라로 작업한 다음 마지막에 흑백으로 전환한 < 북촌방향 >. (그래서 이 영화의 예고편은 칼라이다) 봉준호 는 칼라로 개봉한 다음 감독판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색 보정 작업에 참여해서) 흑백으로 전환한 다음 < 마더 >를 (다소 제한적인 방식으로) 다시 상영하였다. 일부 극장에서 102번째 영화 < 화장 >을 흑백으로 변환하여 상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보지 못했다. 임권택 자신은 이 영화의 최종판은 칼라이며 흑백 버전의 <화장>에 대해서 “상업적인 이유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럴 수도 있는” 판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무심함. <요화 장희빈> 한복의 색채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공간에 물드는 의상 그걸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 요화 장희빈 >은 누구라도 보자마자 그 색채감각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여기서 세트 미술의 도움 없이 오로지 한복의 색채만을 활용하여 영화 전체를 마치 붓으로 채색하는 것처럼 그려낸다. 이 말을 단지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의상이 회화와 다른 점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동선을 따라 화면 안을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색채의 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때 의상은 미장센의 일부이면서 종종 그로부터 독립된 어떤 존재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어떤 존재감? 그렇다. 이를테면 롤랑 바르트가 섬세하게 파리를 거니는 마담 혹은 마드모아젤을 바라보면서 의상이라는 모드에 대한 기나긴 기호학적 분석을 그려낸 예. 혹은 삐에르 부르디외가 냉정하게 펼쳐 보인 계급적 취향의 차이라는 서로 나누어진 세계. 물론 맨 위에는 프로이드가 있다. 꿈속에서 나타난 의상보다 더 분명한 흔적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형상화라는 과정. 영화가 꿈은 아니지만 욕망이 진행되는 과정, 좀 더 프로이드적인 언어로 투사되는 과정에 이르면 둘 사이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이때 의상은 2차 가공 과정의 어떤 역할을 할(수 있을)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감독들은 의상의 비밀을 처음 건드린 세대이다. 나는 지금 피터 그리너웨이의 바로크적인 의상(-미장센)을 떠올리고 있다.<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에서 요리사의 아내가 화장실에서 복도를 지나 자기 방을 지나친 다음 실외에 이르기까지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동일한 디자인의 옷이 마치 공간의 색에 물들기라도 하듯 형형색색으로 바뀌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홍상수 는 등장인물의 옷을 그 역할을 하는 배우의 집에 가서 고른 다음 그 배우의 일상생활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서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옷에 묻어있는 삶이라는 흔적. 취향이 보여주는 내면.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 박찬욱 은 의상을 등장인물 내면의 기하학적 조형이라고 생각한다. < 친절한 금자씨 >의 땡땡이 무늬가 있는 원피스. 마치 총에 맞아 뚫린 것 같은 구멍들. 임권택은 의상의 체계 안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위계질서가 있고 차려야 할 격식이 있으며 종종 의상이 인물을 규정한다. 그것은 신분의 기호이며 금지와 배제로 이루어진 기호들의 집합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명령의 신호이기도 하다. 종종 임권택은 그런 다음 서로 다른 의상의 세계 사이의 충돌이 빚어내는 긴장을 즐긴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의 예. 일제강점하 가문의 성씨를 지키던 설씨 노인이 자살을 하자 그 장례식에 찾아간 일본인 다니는 예의를 표하기 위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찾아간다. 하지만 마당에 있는 모든 한국인은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다. 흰색의 무리 속의 단 한 점의 검은 색. (< 족보 >) 승복을 입은 두 승려가 찾아가는 사창가 여인들의 과장된 노출의 의상들. (< 만다라 >) 씨받이로 들어간 소녀는 끝내 양반들의 의상을 입어보지 못한 채 아이를 임신한 다음 비밀리에 출산하고 쫓겨난다. (< 씨받이 >) <요화 장희빈>은 17세기 조선 시대 숙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27년에 걸쳐 궁궐 안에서 넘쳐나는 여인들의 정념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로 의상을 활용하고 있다. 종종 그녀들이 입은 옷은 마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창문이 된 것처럼 투명해지기조차 한다. 임권택은 그녀들이 입은 옷을 때로 그녀들의 정념에 대한 환유처럼 입히기도 하고 혹은 그녀들의 태도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교차하는 정념의 수사들.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에서 그녀들이 입은 옷은 신분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질투와 분노, 사랑과 박해, 의심과 욕심 사이에서 생겨나는 욕망과 불안을 오가면서 몸과 마음을 봉합해내는 정념의 순환 회로이기도 한다. <요화 장희빈>과 <현기증>의 녹색 여기서 장희빈은 서로 다른 수많은 여인들, 그녀를 내친 인경왕후와 그녀를 다시 받아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와 (연잉군을 나은) 숙빈 최씨, 그녀들을 둘러싼 왕가의 친인척 여인들, 그녀들을 받드는 서로 다른 계층의 여인들, 그 주변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녹색의 한복을 입고 자기의 자리를 점유한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색채의 심리학에 의지할 생각은 없다. 대신 영화사에서 유명한 녹색을 환기시키고 싶다.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스카티 눈앞에 주디가 종탑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마들랜과 똑같은 머리 모양과 옷을 입고 마치 환생한 것처럼 나타났을 때 방을 가득 채운 녹색. 아니 차라리 넘쳐나는 것만 같은 녹색. 이 불안한 색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옮겨가면서 죽은 자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낼 때 히치콕은 영화에서 녹색이 갖는 새로운 의미를 거의 창조해내다시피 하고 있다. 물론 임권택 이 히치콕의 영향 아래 놓여있거나 혹은 <현기증>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마도) 아니다.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을 보고 있으면 그저 귀여웠던 한 소녀가 어느 자리에서부터 사악하고 요염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할 때 마치 그것이 그녀가 입은 기분 나쁜 초록색의 한복에서 나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복장도착과도 같은 변신. 초록색 자체가 나쁜 기운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 알다시피 녹색은 평화의 상징이며 또한 생명을 지키고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그린’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에서 미신을 부추기고 불길한 신령들을 불러내는 무당들에게 자주 초록색 한복을 입히는 것은 이 색채에 대해서 한국 문화 안의 고유한 코드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나는 의도적으로 마치 떠오르는 듯이 장희빈의 녹색 한복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임권택은 장희빈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한복의 색채를 체계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건 이후에도 그렇다. 임권택은 먼저 도식을 세우지만 영화 안에서 어떤 도식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종종 부분적으로 자신의 도식을 위반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오래된 예술가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임권택은 마치 그 도식이 등장인물의 생명을 위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어느 순간 예외를 마련하거나 때로는 돌발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도식을 부수기도 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도식을 찾아냈을 때 혹시 이것이 그 안에서 예외의 규칙이 아닌지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임권택의 예술에 관한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경험이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그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에게 되돌아가서 그 안에서의 원리를 추론하는 이 경험의 표지들 사이에 생명이 감도는 순간을 임권택은 도식 안의 예외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거기서 장희빈이 그 요염하고도 불길한 초록색 한복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삶 안에서 그 순간들이 이루는 예외의 도식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예외의 도식? 유혹의 전술이 전개되는 순간이라는 도식. 누구를 대상으로? 숙종을 대상으로. 무엇을 목표로? 오직 상감마마와의 침실에서의 여흥의 시간을 위하여. 그래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원자 아기씨. 좀 더 간단하게 임신. 그 임신이 안겨주게 될 자리. 우리는 조선시대가 유교의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문을 잇는 선이 끊어지는 것은 제사에서 죽은 조상과 대면할 때 예외 없는 불효의 세계였다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해야 한다. 이 연쇄적인 계산의 논리적인 도식.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 녹음현장 (출처: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은 시각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청각적인 해설의 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마 그건 <요화 장희빈>이 고스란히 정창화 의 < 장희빈 >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장희빈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숙종의 재위 기간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1961년 1월 23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서 3월 4일에 36회로 종방(終放)한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을 영화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1960년대가 라디오의 시대였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좀 더 실감나는 설명. 1970년대 거의 마지막까지 시내버스를 타면 기사들은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고 예외 없이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다. 그때 승객들은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고 마치 요즘 텔레비전 방송 드라마의 우여곡절에 전 국민이 매달리듯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장희빈>의 대본을 쓴 이서구 작가는 일제 강점하인 1920년 동아일보 창사와 함께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고 그런 다음 연극 모임인 ‘토요회’를 거쳐 라디오 방송에 입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서구 작가는 1957년부터 라디오 드라마에 전념했고 <장희빈>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장안의 길거리가 텅 비었고 특히 목욕탕 여탕은 말할 것도 없이 마찬가지로 텅텅 비었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성우들은 지금의 탤런트들에 비교할만한 인기를 모았다. <장희빈>은 미처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사가 판권을 샀고 정창화가 그 대본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었다. 또 다른 이서구 작가의 사극 라디오 드라마 <강화도령>은 1963년에 동명의 제목으로 신상옥 이 영화로 찍었다. <장희빈>은 단지 드라마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주제가도 1960년대 가요의 고전으로 남았다. 이서구 작가가 작사를 하고 전오승이 작곡한 <장희빈>은 그 당시 ‘꾀꼬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황금심이 불러서 “이 노래를 듣기 위하여 드라마 시간을 기다리는 애청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잠시 멈춘 다음 당신께서 YOU를 검색하셔서 음미하듯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먼저 읽어주시기 바란다. <요화 장희빈>에는 이 노래가 거의 갑자기 기습하듯이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흐른다. 조선 시대 사극에 덮어씌운 그 시절 엔카(演歌) 풍의 대중가요.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도 잃은 그 날 밤이 치마 그리워 치마폭에 목메는가, 대전마마 뫼시던 날에 칠보단장 화사하던 장희빈아, 칠보단장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아마 임권택 도 이 방송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라디오 드라마가 영화화된 영화의 조감독을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되던 1961년의 언저리가 아니라 그로부터 7년 후인 1968년에 다시 만들면서 왜 라디오 드라마를 참조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런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칼라영화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과정에서 성공한 흑백영화를 다시 칼라영화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상업적 모델이 되었다. 그때 대중들은 리메이크를 새로운 영화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성공한 영화의 반복을 자신의 선택에 대한 만족의 보증이라고 여겼다. 물론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영화가 자신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바보 같은 공식은 지금도 작동되고 있는 대중적 신화이기는 하다. 이 모델은 거의 무차별적으로 대입되었다. 심지어 김기영 조차 흑백영화 < 하녀 >를 칼라영화 < 화녀 >로 다시 찍었다. 임권택은 단지 장희빈을 소재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 요화 장희빈 >이 라디오 드라마이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시켜 나간다. 여기서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장희빈이나 숙종이 아니라 영화 바깥의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이다. 물론 그때 한국영화에서 보이스 오버의 방식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종종 나태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방법이 다르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후일 임권택이 영화의 시청각 기호 위에 문자를 더하면서 자막을 입히는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는 초기 이전(primitive)의 모델을 떠오르게 만든다. 여기서 그 목소리는 마치 변사처럼 영화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설명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 목소리는 (다소 따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야기 구석구석을 내려다보는 대타자의 음성이다. 말하자면 극영화에서 집행되는 다큐멘터리에서의 (빌 니콜스의 구분에 따르면) 신의 목소리로서의 방법. 하지만 내 귀를 붙잡은 순간은 그 목소리가 종종 영화의 감정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 목소리는 영화를 설명하다 말고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음모에 떨어질 때 영화를 보는 나를 앞질러, 혹은 대신하여, 탄식하기도 하고 숙종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분노를 하며 줄거리의 윤곽을 설명해야 할 순간에 스스로 감정을 대리하는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적 존재가 된다. 이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목소리가 단지 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화 자신이 몸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의 몸들을 대신하는 영화라는 몸. 영화의 기호들에 부여하는 뼈와 살, 무엇보다도 감흥을 불러내는 자율적인 장치. 그 안에서 영화가 스스로 느껴보기 시작한다. <요화 장희빈>의 신기한 변화는 거기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치 그 목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영화의 시청각 기호들이 불응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중하게 불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 개념적 표현을 노엘 버치에게서 빌려왔다. 버치는 영화에서 어느 순간 왜 단순한 화면에서 등장인물에게 쇼트의 방법론이 매개변수가 되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리듬을 가지려 할 때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버치는 그 대답을 오즈에게서 가져온다. 영화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그사이에 영화를 바라보는 것과 영화가 바라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영화를 바라보는 과정을 관성에 내맡긴 채 영화가 바라보는 과정에 감흥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 말의 망설임.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 요화 장희빈 >은 제목과 달리 장희빈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래서 이 영화가 몹시 산만하게 느껴진다. 사료에도 장희빈의 출생 신분이 불명료하지만(그녀가 노비 출신인지, 아니면 몰락한 양반집 규수인지, 혹은 다른 자료에 따르면 중상인의 자제라고도 되어있든가 하지만) <요화 장희빈>은 조선왕조실록을 옮긴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희빈이 궁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장희빈의 모친 폐비 윤씨의 집으로 이야기가 찾아갈 때 그녀가 자란 환경을 어렴풋하게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근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조선 시대라는 생활조건의 외양 안에 감추어진 삶의 과정을 가늠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의 근거를 뒤로하고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접근해도 장희빈의 배경을 지운 것은 그녀가 궁궐 안에서 경쟁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하는 그녀의 욕망의 힘을 끌어낸 증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임권택 은 마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점적인 왕후의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장희빈의 유일한 임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과정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는다. 이 사태를 단순하게 공격하기 어려운 것은 종종 임권택이 장희빈을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이 제쳐놓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건 처음부터 그렇다. 이야기는 숙종이 아직 세자였던 시절에서 시작하면서 마치 그를 따라 진행할 것처럼 이어진다. 장희빈은 이야기에 삽입되는 방식으로 갑자기 등장하고 난 다음 이야기의 중심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그녀가 항상 이야기의 중심을 점거하는 것도 아니다. 장희빈은 궁궐 바깥으로 두 번 쫓겨나는데 심지어 그녀가 첫 번째 쫓겨났을 때는 마치 영화가 잠시 동안 그녀를 잊은 것처럼 진행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다시 궁궐에 돌아왔을 때 그녀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어진 인현왕후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자 주변의 우려를 모두 물리치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때 임권택은 다시 장희빈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사실을 숨기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부디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한다. 영문을 모르는 숙종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한다. 물론 우리들은 인현왕후가 몹시 위험하게도 장희빈을 다시 궁궐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눈치챈다. 여기서 임권택은 마치 장희빈이 처음 등장하는 것처럼 진행한다. 인현왕후는 숙종을 모시고 내실로 인도하고 거기서 장희빈과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든다. 인현왕후는 영화가 거의 절반에 이르렀을 때 처음 등장했고 그녀가 한 첫 번째 역할은 숙종과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하는 시나리오 안의 기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숙종과 장희빈이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들고 인현왕후가 다시 바깥으로 나갈 때 카메라는 그녀와 함께 문 바깥으로 나간다. 두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 첫째, 그렇게 되면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둘째, 순간적으로 여기서 임권택은 주인공을 바꿔치고 있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가 <요화 장희빈>이 아니라 <인현왕후>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동선을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짠 다음 거기에 감정선을 더한다. 그런 다음 숙종과 장희빈이 포옹을 할 때 인현왕후는 여기까지 행한 그녀의 선의와 상관없이 창문 바깥에서 그걸 흘낏 바라본 다음 차마 더 이상 마주 보지 못한 채 외면을 하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벽에 기대어 슬픔에 가득 차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핵심은 이 장면의 심리적인 설명이 아니다. 이 장면이 어떤 전환점으로 작용하면서 이제부터 영화는 인현왕후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 자리를 둘러싸고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분주하게 나타나고 퇴장한 다음 다시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혹은 새로 나타났을 때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에 옮겨간 다음 제 할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구라도 당황하게 될 만한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숙종에게는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경종 이외에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연잉군이라는 아들이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숙빈 최씨의 잉태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임권택 이 숙빈 최씨를 인물들 사이의 원근법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은 단순하게 수평으로 옮겨가는 대신 마치 층위를 오르내리며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면서 틈새 사이를 돌아다닌다. 이때 숙빈 최씨의 행위소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숙빈 최씨의 행위는 항상 수동적 상황 안에서 능동적으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숙빈 최씨에 관해서만 화면 바깥의 그 목소리를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장희빈이 숙빈 최씨를 야단치는 장면 앙갚음을 하듯 숙빈 최씨가 장희빈 뺨을 때리는 장면 여기에 좀 더 디테일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좀 전에 말한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장면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숙빈 최씨는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지만 단지 눈에 띄는 무수리 중의 한 명, 아니 오히려 무수리 전부를 대신하는 환유적 기능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별달리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 은 무수리들을 집합으로 만든 다음 이동시키거나 아니면 배경에 보이는 미장센의 일부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의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등장인물 곁에 다가온 다음 다시 멀어지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고 숙빈 최씨는 처음에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말하자면 시나리오 작법에서 말하는 중심을 이루는 혹성들을 배치한 다음 그 주변을 떠돌거나 오가는 위성들의 운동감. 첫 번째 등장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장희빈이 숙종과 합궁을 한 다음 지위가 올라가자 궁궐에서 과장되게 자신을 과시하면서 걸어갈 때 숙빈 최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다. 장희빈은 그녀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면서 지나친 숙빈 최씨를 다시 불러 세워놓고 야단을 친다. 이 장면은 방점이 숙빈 최씨에 있지 않고 장희빈에 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힘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는 사례의 장면처럼 보인다. 이 신을 주변으로 그녀는 심지어 숙종 앞에서마저 안하무인격인 무례한 태도를 내보이고 함부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숙빈 최씨는 여기서 희생의 사례처럼 지나쳐간다. 하지만 장희빈이 그 방자함으로 인경왕후에게 쫓겨날 때 숙빈 최씨는 궁궐 대문 앞까지 따라와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몇 차례이고 모질게 장희빈의 뺨을 때린다. 단지 여기서는 부채를 갚는다거나 균형을 맞춘다는 구성상의 계산 이상으로 누구라도 약간 멈칫할 만큼 폭력적이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게 과잉 하는 힘 앞에서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이 순간에 황금심의 주제가까지 흘러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가 장희빈을 대하는 갑작스러운 동정심에 대해서조차 무언가 잘 조절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숙종과 인현황후의 생일상을 마련한 숙빈 최씨 임권택 의 계산은 거기에 있지 않다. 장희빈이 다시 궁궐로 돌아왔을 때 숙빈 최씨는 마치 그녀의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그녀가 다시 되돌아오는 순간은 숙종이 장희빈의 계략에 넘어가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친 다음 신하들의 이에 관한 간절한 읍소를 물리치고 다시 더 세월이 지나 백성들의 뜻을 알고자 미복을 하고 잠행을 나갔다가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후회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종종 숙종은 야심한 밤에 궁궐 안을 산책하는데 대비마마 거처에서 우연히 만난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한밤중 창경궁의 연못 앞에서이다. 그러므로 숙종의 한밤중 산책은 이상하지 않다. 그날 밤도 숙종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궁궐을 떠도는데 우연히 숙빈 최씨의 방 앞에서 멈춘다. 숙빈 최씨가 한밤중에 조촐한 생일상을 마련하고 절을 올리고 있어 연유를 묻자 오늘이 인현왕후의 생일이라 궁 안에 계시지는 않지만 모시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고 아뢴다. 숙종은 참으로 갸륵한 마음씨로구나, 라며 어디 네 이야기를 들어보자, 라고 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숙빈 최씨는 이미 앞질러 상감마마를 뫼실 곳이 아니오니 자신이 마당에 나가 인사를 드리겠다고 몇 번이고 말하지만 숙종은 매번 그 청을 거절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중의 거절. 주고받는 거절. 두 거절 사이에 놓인 불균형한 힘의 관계. 이 신에 이를 때까지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가 여기서 이렇게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아니, 차라리 방안에 들어설 때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신은 영화의 경제학에서 완전히 낭비된다. 임권택은 영화에서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감독이다. 나는 이미 이 신이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순간, 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둘 사이의 음란한 충돌이 있다. 하나는 영화 바깥에서 온 것이다. 봉건 군주제에서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의 방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에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말의 안에는 해서는 안 된다, 의 경계가 법이 아니라 도덕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 안에서 온 것이다. 숙종은 이미 인경왕후라는 공식적인 왕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장희빈을 또 다른 애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공식이 통속적인 궁중 연애풍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다. 문제는 그것이 놓여있는 자리에 있다. 지금 숙종은 애정의 대상이었던 장희빈과의 관계가 역전되어 자기 자신이 애정의 대상이 된 다음 그녀의 요구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을 받는 중이다. 우리는 계산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숙종의 고통은 착한 인현왕후를 내쫓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의 자리에 있던 숙종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그 자리로 인하여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한 다음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임권택은 고통받는 숙종을 등 떠밀어 숙빈 최씨의 방 앞까지 보낸다. 방에 들어선 숙종은 문득 생각난 듯 숙빈 최씨를 바라본다. 숙빈 최씨는 그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본다. 물론 우리들도 거의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쇼트의 위치와 배우의 연기, 그리고 프레임의 크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일부러 둘 사이의 간격을 벌려 놓았다. ‘알아본다’, 와 ‘모를 수가 없다’, 의 차이. 이때 도덕적 주체였던 숙종은 갑자기 욕망의 주체에로 옮겨간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넘어갈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떠오른다. 물론 한 명은 궁궐 바깥에서 장희빈으로부터 핍박을 넘어서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인현왕후이다. 숙종은 지금 둘 사이에서 고통받으면서 이제 이 관계를 셋으로 다시 하나를 추가하는 중이다. 인현왕후는 정말 견딜 수 있을까? 다시 하나가 더해지면 그녀는 돌아올 수 있을까? 둘 더하기 하나. 이때 무언가 인현왕후의 자리가 단지 좁아진다기보다는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점이 숨어있다. 인현왕후는 단 한 번도 숙종에게 욕망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다. 나는 역사적인 사료를 뒤로하고 오로지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른 한 사람은 장희빈이다. 숙빈 최씨와의 새로운 관계는 정확하게 장희빈과의 관계의 반복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궁궐 바깥으로 쫓겨나갈 때 숙빈 최씨가 쫓아 나와 그녀의 뺨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몇 번이고 때리는 장면을 보았다. 숙빈 최씨가 다시 추가로 셈에 더해질 때 문득 장희빈이 둘이 되는 상황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숙종은 그걸 계산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왕의 자리는 그 계산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숙종이 숙빈 최씨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 때 상황이 해결되기는커녕 완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다음 그녀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내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임권택 은 그런 선택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것일까. 상투적인 대답. 숙빈 최씨는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장희빈은 그녀를 문초하던 중 갑자기 방문한 숙종의 면전 앞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게 되고 결국 인현왕후를 다시 궁궐로 부르고 장희빈을 궐 바깥으로 쫓아내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즉각적인 반문. 숙종의 결정이 ‘못된’ 장희빈을 목격하고 ‘착한’ 인현왕후가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그 어떤 순간도 이 장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숙종이 본 것은 자신이 새롭게 총애한 숙빈 최씨의 웃저고리가 벗겨진 채 매질을 당하고 있는 광경뿐이다. 그건 인현왕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장면이다. 임권택의 계산. 여기서 숙종은 비로소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신과 도덕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일치시킨다. 그것이 마치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명령을 내리고 모든 사태를 원상복귀 시키려 든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숙종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여기서 임권택은 단지 숙종을 도덕적 주체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덕? 어떤 도덕?) 욕망의 주체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장면 전체를 음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음란하게? 그렇다. 장희빈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노와 질투의 감정은 오로지 그 두 사람이 숙종의 애정을,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숙종의 성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몸을 사이에 둔 이 무서운 경쟁. 이때 숙종은 여기서 도덕적 주체가 되기 위해 타자의 편에 서서(타자? 도대체 누구?) 타자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나는 여기서 짓궂은 가정을 하고 싶어진다. 만일 장희빈이 인현왕후만 돌아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정치적 계산을 한 다음 숙종에게 자신과 숙빈 최씨가 숙종의 몸을 공유하기를 허락한 다음 그저 둘 사이에서만 오가기를 제안한다면 숙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 인현왕후의 자리는 어디인가? 물론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때 임권택의 계산은 왕의 사랑이란 얼마나 역겨운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숙종은 욕망의 주체로서 자기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리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다소 음산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되찾은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임권택 이 주인공 없는 이야기, 아니 차라리 중심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분명히 정의가 회복되고 모든 일은 사필귀정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이 정의의 몫을 숙종에게 안겨줄 생각이 없다. 거의 이야기의 오점처럼 작동하는 숙빈 최씨의 임신. 임권택은 역사의 사료를 끌어들이는 척하면서 숙종이 권력을 통하여 자신의 주체를 되찾는 과정을 마치 오작동처럼 취급하고 있다. <요화 장희빈>은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권력의 사필귀정에 대한 부정이 있다. 임권택은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제 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만들면서 이야기의 주체를 텅 빈 상태로 내버려 둔다. 아니, 정확하게 그 자리에는 몸이 없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몸이 없기 때문에 영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그저 바깥에서 떠돌 뿐이다. 대타자라는 그 무기력한 시선. 임권택에게 그 자리는 언제나 수수방관할 따름이다. 어쩌면 그 목소리의 주인보다 더 이 영화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이는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말의 반복. 없는 것과 마찬가지. 역사에서 알고 있는 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권택에게 역사의 주인이란 없다. 아마도 그것이 <요화 장희빈>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진행시킨 진정한 이유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 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는 영화가 없다. 하지만... (계속) 1968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주식회사 각본 장천호 촬영 안윤혁 조명 정덕규 편집 김희수 음악 김용환 남정임 신성일 태현실
한밤중에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와 사람들을 모아놓은 다음 식량을 내놓으라고 위협한다. 아마도 한국전쟁 중일 것이다. 가난한 이 마을에서는 보릿고개라 자신들이 먹을 식량조차 변변치 않은 지경이다. 그러자 마을 사람 중의 한 명을 사살한 다음 다시 돌아올 때까지 쌀 다섯 가마를 구하라고 말하고 떠난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국군 토벌대 장교가 있었지만 이 마을까지 부대가 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알려준다. 실망한 마을 사람들에게 목사님이 나서서 읍내에 나가 우리를 보호해 줄 사람을 구해오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읍내에 가서 여섯 명의 건달을 이끌고 있는 길용이라는 사내를 만난다. 잠깐, 이 이야기는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가 아닌가요? 당신의 추측이 맞다.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이 도적들에게 약탈당하는 마을을 구하기 위해 적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함께 뭉쳐서 싸우는 시대활극 < 7인의 사무라이 >가 < 바람 같은 사나이 >의 원판이다. 하지만 임권택 이 참조한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니라 존 스타제스의 < 황야의 7인 >이다. 율 브린너,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찰스 브론슨, 홀스트 부크홀츠, 브래드 덱스터, 로버트 본이 일곱 명의 카우보이로 나온 그 영화. 역시 악당에는 일라이 워락. 임권택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의 하나는 그가 몇 차례이고 할리우드영화들을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이다. 좀 더 가혹하게 말하면 표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한국은 아직 국제 저작권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고, 한국영화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노래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때 임권택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만희 는 < 석양의 무법자 >를 본 다음 < 쇠사슬을 끊어라 >를 찍었다. (그리고 다시 이 영화를 원본으로 하여 김지운 이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을 만들었다) 내가 환기하고 싶은 사실은 임권택이 할리우드 영화와 가졌던 친화성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 사이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거나 혹은 그 둘 사이의 간극의 심연 사이에서 인정투쟁을 위한 필사의 도약 따위는 없다. 오히려 그때의 한국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는 하나의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머무는 것에 대한 도착적 친화성에의 자발적 항복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1945년 해방, 친일 문학가들이 그렇게 빨리 해방이 될 줄 몰랐다고 탄식을 했을 만큼 절대적인 일본 제국주의의 머리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리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나라. 1950년 전쟁 속에서 ‘소비에트와 중공’ 사회주의 군대와 싸운 다음 나라를 절반으로 만든 나라. 상상할 수 없는 풍요로움의 왕국.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품과 문화들. 거기서 싹튼 대학가 포크 송과 이태원 로큰롤. 우리는 이 영향 관계 아래 21세기에도 그렇게 머물고 있다. 그런데 그때는 휴전을 하고 고작 10년이 조금 더 지난 다음이었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과 그들이 보는 할리우드영화 사이의 괴리감. “영화를 처음 만들 때는 누구나 목표를 갖게 되잖아요. 그때는 볼만한 영화라는 게 할리우드 영화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다들 그때 본 영화들이 자기의 목표가 된 거예요. 그러다가 점점 그게 얼마나 허망한 목표인 줄 깨달아가면서 자기의 영화를 찾기 시작한 거지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나는 사태를 단순하게 식민지 문화라고 규정짓고 싶지 않다. 반대로 여기에는 근대라는 모던한 꿈이 역사라는 악몽과 서로 간섭하면서 그 한계를 초월하기는커녕 그 안에 주저앉아 격렬하게 자신의 실존을 증명해가는 과정이 있다. 이 말의 방점. 그 안에 주저앉기. 말하자면 끊임없는 연습. 그 안에서 영화는 주어진 경험세계로부터 자신의 이념 세계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삶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싶다. <7인의 사무라이>(1954) <황야의 7인>(1960) <바람 같은 사나이>(1968) 임권택 의 세 번째 영화 < 남자는 안 팔려 >는 빌리 와일더의 < 뜨거운 것이 좋아 >이고, 여기서 구봉서 와 이대엽 이 토니 커티스와 잭 레몬이 했던 여장을 하고 나온(다고 한)다. < 30년 만의 대결 >은 존 포드의 <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 >을 다시 만들었다. 모린 오하라에는 김지미 가 마돈나로 나오고 최무룡 이 존 웨인으로 박노식 이 빅터 맥라글랜으로 나와 긴 주먹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 바람 같은 사나이 >가 < 황야의 7인 >을 리메이크한 사실은 잘 안 알려졌다. 심지어 개봉 당시에도 그런 소개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임권택이 1968년 < 바람 같은 사나이 >를 만들었을 때는 아직 < 7인의 사무라이 >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일본영화가 수입금지 되었으며 극장상영이(나 텔레비전 방영이) 아니면 달리 영화를 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았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오늘날 볼 수 있는 200분 판본의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니라 다시 160분으로 편집된 극장 개봉 판이었을 것이다. 도날드 리치에 의하면(「The Films of Kurosawa Akira」) <7인의 사무라이>는 개봉했던 1954년 4월 26일 일본에서도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만 잠시 상영하고 사라졌다. 그런 다음 두 번 세 번에 걸쳐 재편집되었고 미국에서는 이 160분 판본을 수입한 RKO 사에서 다시 편집했다고 한다. 이런 미국식 편집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도 < 설국열차 >를 미국에 개봉하면서 하비 와인스타인이 편집한 사례를 알고 있다. <7인의 사무라이>는 1991년에야 190분 버전으로 복원되었고 2002년에 개봉 버전에 가까운 203분으로 복원되었다. 아마도 <7인의 사무라이>를 서부극으로 각색한 존 스타제스는 RKO 편집본을 보았을 것이다. <황야의 7인>은 일본에 개봉해서 일본 영화평론의 웨스턴 ‘狂人’이라는 마스부치 겐(增淵健)으로부터 “충분히 납득할만한 구로사와 원작의 환골탈태”라고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는 <황야의 7인>을 본 다음 “완전히 실망스럽다”고 그냥 간단하게 대답했다. 1960년에 만들어진 이 서부극은 재빨리 수입되어 서울에서 1962년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으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그해 임권택은 그해 구정에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데뷔하였고 7월에 두 번째 영화 < 전쟁과 노인 >을 만들었다. 아마 그런 다음 <황야의 7인>을 극장에서 보았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서부극 영화들에 대해서 모든 장르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셈에 포함시켜 주기 바란다. 하지만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사무라이 활극도 아니고 서부극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이자 다찌마와리 액션활극이고 반공영화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1968년의 영화이다. 길용은 오래전 동백마을에서 쫓겨난 사내였다. 그런 다음 그는 떠돌이 약장사와 바람잡이 이인조, 공기총 명사수, 소매치기 이인조를 이끌고 장터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짜 약을 팔고 내기 판돈을 따고 길거리에서 주머니를 터는 패거리를 이끄는 두목이다. 말하자면 칠 인의 건달들. 그들은 갈 곳 없는 자신들에게 길용이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길용은 가난 끝에 사랑하던 영희가 이웃 마을 돈 많은 집에 시집을 가자 분을 참지 못하고 혼례식장에서 소동을 부리고 아버지로부터 다시는 고향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듣고 쫓겨난 처지였다. 길용을 찾아온 고향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게다가 공비들에게 아버지가 총살을 당하고 지금은 어린 여동생 옥이 혼자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 아직도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희가 있는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떠나기 전에 모은 돈을 패거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눠주지만 그들은 형님이 고향이라면서 함께 마을을 지키기로 뜻을 모은다. 나는 무리하게 <바람 같은 사나이>의 서사를 < 7인의 사무라이 >로부터 가까이서 연상하거나 < 황야의 7인 >과 비교하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세 편은 서로 정교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기보다는 마치 그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남아있는 감흥을 가지고서 자기의 편에서 시나리오를 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세 편의 영화는 비교하기에 너무 예술적 차이가 벌어진다. <7인의 사무라이>는 단지 걸작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할 정도로 위대한 영화이다. 도날드 리치는 일본영화란 <7인의 사무라이>라고 말했다. 완전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견해를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 <황야의 7인>이 걸작은 아니지만 웨스턴 장르 안에서 컬트의 지위를 차지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람 같은 사나이>는 한국영화사 안에서조차 거의 기억되지 않을 만큼 실패했다. 단지 발견되지 못했다기보다는 대부분 엉성하게 구성되었으며 이 시기 한국영화의 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같은 해에 임권택 이 만든 세 편의 영화 중에는 < 요화 장희빈 >이 훨씬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임권택은 어떤 감흥을 찍고 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게 대부분 단조롭게 나타나고 있고 종종 아직은 두텁게 장면을 뒤덮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 태백산맥 >을 본 다음 다시 <바람 같은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서 겹쳐져 있는 동일한 두 개의 장면들 사이에서 오히려 이쪽이 더 선명한 기억의 흔적들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임권택은 그 스스로 돌아보기도 싫은 기억이라고 고향에서의 빨치산과 국군 사이의 상호상잔(相互相殘)의 밤과 낮을 언급하면서도 처음부터 이 시간에로 마치 하나의 원장면처럼 되돌아오고 다시 돌아왔다. 이건 임권택의 영화를 차례대로 보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렇게, 여기서 저기서, 이번에도 또 이번에도, 그 시간을 그게 견딜만해 질 때까지 건드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걸 임권택의 원장면에 대한 탐구라는 하나의 (트라우마라기보다는 멜랑콜리에 가까운) 개념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이다. 기억 속의 기호의 난독증. 그걸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산산조각 난 광경. 상상 속에서조차 겁먹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그러진 이미지. 하지만 그걸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그 장면의 공포와 다시 마주쳐야만 한다. 나는 지금 따분하게 한 사람의 전기를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영화와 삶이 분리될 수 없는 텍스트의 서명을 써 놓는, 놓을 수밖에 없는, 그렇게 반복할 수밖에 없는 방법의 실존에 대해서 질문하려는 것이다. 밤에 내려오는 사람들 영화의 첫 장면. 공비들이 한밤중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집합시킨다. 이때 임권택 은 이 장면을 마치 귀신들이 무리 지어 찾아오는 공포영화처럼 찍었다. 밤에 찾아오는 사람들. 왜 그들은 낮에 찾아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 하지만 영토의 안에 있는 사람들. 어쩌면 거기 아버지 어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그걸 고백할 때가 아니다. 너무 많은 고향 사람들이 죽었고 유족들이 고향에 살아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인정하면 안 된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첫 장면을 밤에 시작하는 영화들이 많다는 것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임권택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밤에 시작한다. 게다가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밤 장면이 오래도록 계속되는 영화이다. 같은 길을 걸어 마을에 들어오는 두 남자 누군가 밤을 낮으로 만들어야 한다. 혹은 밤을 끝내야 한다. 여기 두 개의 선택이 있다. 두 명의 남자가 똑같은 길을 따라 마을을 찾아오는 장면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하지만 두 남자는 동시에 도착하지 않고 서로 시차를 두고 마을을 찾아온다. 먼저 찾아온 남자는 국방군 장교지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국방군이 이 마을까지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한다. 국가의 보호로부터 버림받은 지역. 일종의 무법지대. 차라리 두 개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전선. 그런 다음 이 장교는 마을에 머문다. 하지만 그가 마을에서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마을 사람 중의 누군가와 교분을 맺지도 않는다. 그는 언젠가 도착할 국방군을 위한 신호이다. 국가의 가느다란 끈의 마지막 끝. 여기서 첫 번째 남자에 의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 가정을 해보자. 국방군 장교가 절대적으로 수는 부족하지만 여섯 명의 소대원을 끌고 마을에 찾아온 다음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공비들과 싸우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임권택 은 이 남자를 선택하지 않았다. 두 번째 찾아오는 남자는 원래 이 마을에서 자라났지만 고향에서 쫓겨난 다음 다시 돌아온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쌀 다섯 가마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을 함께 지킬 여섯 명의 건달들과 함께 온다. 반대로 이야기는 장르 안에서 흥미롭게 작동하지만 그런 희생적인 전투가 한국전쟁 중에 정말 있었을 것이라고는 거의 믿기 어렵다. 임권택은 왜 역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을 버려두고 있을 수 없는 것을 가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두 남자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첫 번째 남자에게 동백마을은 자신이 지켜야 할 국토 전체 중의 하나의 작은, 아주 작은 지역에 불과하지만 두 번째 남자에게 이 마을은 자신의 고향이자 유일하게 돌아오기를 갈망한 곳이라는 지정학적 서열이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 여기는 전체 중의 작은 일부이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전부이다. 그래서 한쪽은 언제든지 전술상의 이유로 이 지역을 양보할 수 있지만 다른 한 쪽은 여기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은 신기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어떤 갈등도 빚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동일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올바른 교정이 될 것이다. 그 둘은 둘이 합쳐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따금 이 영화는 어떤 불투명성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수많은 예 중의 하나. 두 번째 남자와 고향 사이에서 매개하는 역할을 목사가 나서서 떠안을 때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동백마을은 아주 작은 마을이고 마을 주민들은 단 한 명도 결정적인 순간에 찬송가를 부르지 않으며 이 영화에는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단 한 쇼트도 없다. 게다가 길용은 고향에 돌아와서 교회를 찾아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혹은 길용은 하느님을 믿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길용의 애인이 그런 것도 아니다. 또는 목사가 이야기에서 어떤 결정적인 해결의 역할을 하는 순간도 없다. 구태여 교회가 필요하다면 여섯 명의 건달 중 막내가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에 응답할 때뿐이다. 하지만 가장 난처한 순간은 목사가 읍내에 가서 길용을 설득하여 고향으로 데려올 때이다. 나는 여기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이 장면에서 지금 <바람 같은 사나이>는 사운드 네가가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보고 나면 다시 보고 싶게 만든다. 다시 본다는 것은 그 순간에 다시 가고 싶다는 뜻이다. 거기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모든 실패조차 지나쳐가면서 어느 순간 과잉 하는 힘으로 지나간 시간을 무한정 반복하게 싶게 만드는 이것임. 설명할 수 없는 이것임. 여기서 순환은 일시적으로 중단될 것이다. 반대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질서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엔 종합에의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실패가 우리를 이것에로 최대한 접근 시킨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장면은 괴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실패의 질서가 있다. 당연하게도, 이미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그리고 존 스타제스의 웨스턴에서 본 것처럼, 물론 마지막 장면은 이 일곱 명의 사내들(과 국방군 장교와 엉겁결에 끼어든 리어카꾼)과 빨치산의 전투 시퀀스이다. 무엇보다도 이 전투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지 마치 눈앞에서 금방 벌어질 전쟁처럼 하나씩 물어보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갔고, 그러므로 이 마을에는 초가집들 말고는 달리 지킬 것이 없다. 곡물도 없고 재산이랄 것도 없는 가난한 시골 마을이다. 게다가 빨치산에서 탈출한 여인은 이제 곧 북한으로 귀대하게 될 연대가 이 부대와 합류할 것이라는 정보를 준 다음 죽는다. 그 정보를 듣고도 철수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마치 이들은 마지막 시퀀스를 위해서, 오로지 영화를 위해서, 여기 남아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들은 남겨진 숫자뿐만 아니라 무기도 열세이다. 누가 보아도 차라리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읍내로 철수하고 그런 다음 군부대와 합류하여 이들과 싸우기 위해 돌아오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은 당연한 결정이다. 그런데도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냥 남아서 마을을 습격하기 위해 찾아올 빨치산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 같은 자멸적인 태도. 당신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그건 빨치산 쪽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전쟁은 패색이 짙고 (아마도) 남부군이 북한으로 이동하면서 도착하기를 기다려 합류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인 결정일 것이다. 여기서 전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으며 설혹 승리한다 할지라도 이득이 없다. 오히려 후퇴할 시간만을 뺏길 것이며 게다가 이 전투는 그들의 흔적을 남길 뿐만 아니라 탄약조차 낭비하게 되어 이후 벌어질 수도 있는 국방군과의 전투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놓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에게 쌀 다섯 가마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동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면서 빨치산 부대 전원을 이끌고 마을로 향한다. 마치 이들의 결정은 자신들이 후퇴하기 전에 국방군이 도착하여 자신들을 섬멸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전술이다. 나는 약간 냉소적으로 열거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서로 맞선 두 개의 그룹 모두에게 공통된 정서가 있다는 사실조차 지나치면 안 된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 완전히 전멸하기를 기대하는 중이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아이러니. 이 무시무시한 공포의 전율을 쥐어짜는 것만 같은 감흥. 누구라도 조롱하듯이 지켜보게 될 이 상황에서 크게 웃으면서 가장 잔인하게 쳐다볼 사람은 임권택 이다. 이것이 이 장면을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부정의 논리이다. 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양쪽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제로에 근접한다. 일곱 명의 사내가 이 마을을 지킨다고 하지만 차라리 전원이 무사히 철수한 다음 마을 사람들과 되돌아와서 함께 재건하는 편이 훨씬 건설적일 것이다. 빨치산은 이 마을을 포기하고 빨리 본대에 합류하여 철수하는 편이 훨씬 전술적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마을은 양쪽 모두에게 생명을 내걸고 전선을 만들 만한 가치가 거의 없다. 여기에는 실제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보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동백마을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치 이 동백마을이 그들 모두에게 어떤 물신숭배처럼 보일 정도이다. 어떤 물신? 고향이라는 물신. 한국에서 고향은 매우 까다로운 문화 담론의 계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걸 충분히 지적할만한 자리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다소 일반론적인 방식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약간 따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고향은 그들 모두에게 큰 타자 안에 머물기 위한 수수께끼처럼 다가온다. 그 안에서 머물기. 하지만 그들이 거기 머물려고 노력할수록 그들은 자신이 그 안의 결여된 원인이자 대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좀 더 무자비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어느 쪽이건 고향의 실수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소될 때에만 고향은 다시 말끔해질 것이다. < 바람 같은 사나이 >의 이야기는 말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당신은 도식적이라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당신에게 < 바람 같은 사나이 >가 이야기 위에 두텁게 덧칠해서 지워버린 결정적인 정보가 역사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다. 고향을 사이에 두고 <바람 같은 사나이>는 의도적으로 불균형하게 배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둘 사이를 조정하기 위해 거기 있어야 할 것이 강제적으로 지워진 것을 보충할 필요를 느낀다. 길용이 고향을 떠난 이야기는 그가 돌아온 다음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후회를 하며 짧게 회상하는 장면으로 불려 나온다. (flash_back) 그러나 빨치산들은 그냥 처음부터 저 산속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다른 마을이 아니라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한국전쟁은 장르가 아니다. 그들은 아무 곳에나 머물지 않았다. 그걸 임권택 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해방 이후 고향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어제까지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런 다음 고향을 관리하듯이 밤만 되면 내려왔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으로 비열하게 그려진 이 마을 빨치산의 지도자도 이 마을에서,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인근 마을에서, 그렇게 전쟁이 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양쪽 편을 가르고 난 다음 산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마을을 놓고 거기 머물기 위해 다투는 중이다. 1968년은 이데올로기를 거세하였고 영화에서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희생에 가까운 전멸의 전술이다. 한쪽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숫자의 상대와 전투를 치르기로 결심하고, 다른 한쪽은 여기서 지체하는 만큼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국방군이 가까이 다가올 것을 알면서도 작전을 개시한다. 여기에는 미학적 긴장감도 없고 그렇다고 극적인 흥미가 우리의 감정을 고조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죽음에 대한 거의 외설적 묘사라고나 할까. 전투의 첫 접촉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빨치산 대장은 텅 비어있는 마을을 향해서 기관총을 쏘아댄다. 그때마다 약장사는 총알을 피해서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며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소매치기도 하모니카를 불면서 총구를 유인한다. 말하자면 전투의 첫 접촉. 여기서 임권택 이 일곱 명의 건달들의 각자의 전문적인 기술을 전투의 드라마 안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바이올린 연주나 소매치기 기술은 정작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명사수가 ‘귀신도 놀랄만한’ 솜씨를 보여주는 장면도 없다. 이 영화는 하워드 혹스적인 영화가 아니다.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 리오 브라보 >가 아니다. 기관총을 쏘아대던 빨치산 대장이 돌격, 을 외치자 부대원들은 일제히 산을 타고 마을을 향하기 시작한다. 이때 정말 괴이하게도 그들이 논두렁을 밟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이제 막 봄날이 시작되어 파릇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논밭의 풍경이 이상할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처음에 내가 무얼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서 탄식하게 되는 것은 텅 빈 농촌 마을 그저 전쟁만 아니라면 한가로운 이 봄날의 장면이 찍고 싶어서 전투장면을 한정 없이 길게 늘여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 공기의 느낌이다. 이 시퀀스는 정말 길다. 종종 누가 누구를 쏘는지도 잊을 정도로 한없이 이어진다. 한 명씩 한 명씩 죽어가지만 이 시퀀스에는 애도의 감상이 없다. 마치 그들은 장르의 법칙에 따라 소멸하듯이 그렇게 차례로 자기의 역할이 끝나자 죽어간다. 반공영화가 마치 다찌마와리 장르가 끝나가듯이 그렇게 종말을 맞이하는 중이다. 이때 임권택은 어느 쪽의 승리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빨치산 공비들은 총알에 자신을 내맡기듯 그렇게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은 채 어떤 엄폐물도 없는 논두렁을 가로질러 끝도 없이 달려온다. 일곱 명의 건달은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긴다. 절망적인 사격. 왜냐하면 총은 겨우 아홉 자루이고 한없이 밀려오는 공비들은 곧 마을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병전을 벌여야 할 것이고 이 수많은 공비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영화가 무심코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텅 빈 마을. 그 마을의 잉여. 이 전투는 동백마을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낭비일 뿐이다.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 잉여를 말소하기 위해서 지금 그걸 하는 중이다. 그걸 알지 못하는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삭제되는 중이다. 나는 이미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마음을 안고 임권택의 첫 영화에서부터 시작된 다음 몇 번이고 다시 반복될 전멸의 테마를 이야기했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그걸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시퀀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장면은 국방군이 나타날 때이다. 그들은 일곱 명의 건달이 대부분 죽어갔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그런 다음 빨치산 공비들을 향해서 어떤 항복의 권유도 없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한다. 어떤 포로도 필요 없다는 듯한 이 무정함은 마치 청소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마지막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청소. 국가에서 청소를 하는 것. 빨치산. 그리고 일곱 명의 건달. 하지만 임권택 은 여기서 알리바이를 내세우는 것처럼 서둘러 장황한 에필로그를 준비한다. 일곱 명의 건달 중의 막내는 공비였지만 몇 달 전에 자수를 해서 이 패거리를 따라다니고 있었고, 그는 마침 동백마을의 빨치산 공비들과 함께 산에 오른 사회주의자 인텔리 애인의 죽음을 목도한 다음 이 전투에 참여한다. 하지만 총을 맞았는데도 목사가 건네준 성경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나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고 이제 길용의 애인이 마지막 질문을 한다. “대답을 듣고 싶어요” 그녀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마을 사람들과 함께 피난을 가면서 길용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대답해주세요,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때 길용은 모호하게 대답을 회피했다. “그만 가줘, 다음에 만나면 그때 대답을 하기로 하지”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덧붙였다. “노력해주세요. 불행한 일이 없도록.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요” 이번에는 화면 안으로 교회 종소리가 들려온다. (off_sound_in_frame) 길용은 간단하게 대답한다. “영, 교회로 가지 않겠소. 하느님과 목사님이 계신 곳에서 부탁할 일이 있소” 그녀도 흔쾌히 대답한다. “좋아요” 그리고 끝. 이때 여기에는 죽은 여섯 명의 건달들과 동백마을까지 쌀 다섯 가마를 리어카에 싣고 왔다가 뜬금없이 전투에 참여하여 죽은 사내를 위한 어떤 애도의 시간도 없다.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있어야 할 자리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영화에서 말끔하게 사라진다. “우리는 또 다시 진 걸세.”, <7인의 사무라이>(위), <황야의 7인>(아래) 나는 이 엔딩에 대해서 약간 더 논쟁을 하고 싶다. < 7인의 사무라이 >는 몹시 긴 시간 동안 도적 떼들에 맞서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과 농민들이 싸우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마지막에 모든 싸움이 끝난 다음 떠나가면서 사무라이들의 첫째인 감베이가 또 다른 사무라이에게 하는 그 유명한 대사, “우리는 또 다시 진 걸세. 우리는 졌어. 이긴 것은 농부들이야” 라는 그 말 때문에 찍은 영화이다. 사무라이들은 농부가 아니다. 그들이 다룰 줄 아는 것은 칼이지 농기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마을을 떠나야 한다. 사실 그 승리는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제부터 사라져 가는 계급이자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졌고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천황의 항복 이후 9년 후에 만들어진 영화. 임권택 은 < 바람 같은 사나이 >를 휴전 이후 16년 뒤에 만들었다. 물론 이 영화는 처음부터 <7인의 사무라이>처럼 야심적인 기획이 아니었다. 나는 두 영화를 마주 보게 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고 이미 말했다. 내가 질문하려는 것은 길용이 왜 처음부터 여기 남아야만 하나의 이야기로 <바람 같은 사나이>가 성립 되냐는 것이다. < 황야의 7인 >도 일곱 명의 카우보이들은 멕시코 국경의 이 마을에 와서 도적 떼를 물리친 다음 마찬가지로 떠난다. 마을은 그들의 것이지 이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도적 떼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기 위한 것처럼, 마치 제 자리에 복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자기의 권리를 되찾듯이 길용이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약간의 가정. 여기서 한국전쟁을 괄호치고 이야기의 형식을 조금만 비틀면 단지 그의 동생 여섯 명과 리어카꾼의 죽음만이 아니라 공비들의 시체가 논두렁에 즐비하게 널리는 전투마저 길용이 돌아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할 수 없이 치러야 한다, 고 예언하는 운명적인 귀환이 마침내 완성되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오이디푸스가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를 죽여야 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귀환을 위해서 그때 그 순간에 그곳을 지나면서 아들에게 죽어야만 한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시작하면 공비들이 산에서 마을에 내려와 양민을 학살하고 쌀 다섯 가마를 요구한 다음에 물러가지만 이 장면은 동시에 길용이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인 아버지가 공비들에게 처형을 당하고 아들 길용이 돌아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홀로 남은 딸이자 길용의 어린 여동생 옥이를 길용과 결혼하지 못한 영희가 돌본다. 나는 다소 냉담하게 물어보고 싶다. 영희는 길용의 어린 여동생 옥이를 돌봐야 할 어떤 의무도 없다. 그런데 왜 그녀는 엄마 없는 옥이를 엄마처럼 돌보는 것일까. 질문을 정식화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이 모든 장치들이 정교하게 짜여진 (하지만 따분한)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변주곡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읽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읽기 바란다. 핵심은 이 모든 귀결이 목적론에 따라 작동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가던 우리를 멈칫 세우는 것이다. 무엇이 이 영화 안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가. 이 이야기가 괴상한 것은 우연이 다른 우연 없이 서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우연(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 갑자기 이 모든 것을 잡아먹는 것은 고향이라는 집합 안의 블랙홀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관점이 있다. 길용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고, 이 영화는 이 주인공을 따라가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것을 잃었고 그런 다음 되찾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거기에 있는 고향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잃은 것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되찾을 것도 없다. 그 마을에 사는 농부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쌀을 내놓으라고 해도 내줄 쌀이 없다. 텅 빈 마을. 거기에 쌀 다섯 가마를 갖고 길용이 돌아온다.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은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향에 찾아온다. 간단한 도식. 마치 그 둘은 형식과 내용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이때 서로는 서로에게 수행적인 임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두 개의 임무 사이에서 갑자기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한 오이디푸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이르면 약간 과격하게 반격하고 싶어진다. 이건 히스테리인 줄 알았는데 정신분열에 빠진 오이디푸스 판본이 아닌가요. 그리고 여기에 무서운 국가가 있다. 차례로 등장하는 검열의 심급들. <바람 같은 사나이>는 정확하게 그 자리에서 자포자기한 영화이다. 그런 다음 재빨리 가족 안으로 후퇴하였다. 떠나는 사람들, <7인의 사무라이>(위), <황야의 7인>(아래) 남는 사람, <바람 같은 사나이> 아직 할 말이 남았다.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매정한 영화이다. 감정선은 대부분 끊어졌으며 인물들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네트워크는 거의 가녀리게 여겨질 정도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 전쟁과 여교사 >를 떠올려보면 그게 기이하게 보일 정도이다. 심지어 거기서는 감정이 과잉한 나머지 그 선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 엉키기까지 한다. 두 영화의 동일한 배경. 하지만 서로는 서로에게서 완전히 벗어난다. 역사라는 사건은 영화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존재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살아가야 한다, 살아나야 한다. 이때 임권택 은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하나의 실험처럼 다룬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임권택은 실험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만드는 매번의 작업은 각각의 실험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실험의 흔적이다. 나는 어디서부터 그 선이 끊어진, 자취가 어디선가 사라진,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관점의 뿌리 자체가 어디론가 뽑혀버린, 그래서 마치 포기해버린 것만 같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흔적들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아도 길용과 여섯 명의 건달들 사이에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정도로 나누는 우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설명 없이 이 영화의 서사는 성립될 수 있는가. 그들은 그저 장르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고 그런 다음 자기에게 내어준 운명을 따른다. 그런 다음 오직 길용만이 희생의 열매를 맛본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왜 다른 이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들은 길용이 여기에 머물면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가 하느님의 왕국으로 향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고향 이외의 모든 장소가 마치 비-장소(non_place)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공비들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출몰해도 마을 사람들 중에 이곳을 떠날 결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금만 이 영화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면 마치 길용이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안간힘이 거의 필사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하나의 주체로 성립될 수 있다는 최종적인 명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때 핵심은 떠나간 자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원상복귀의 갈망이다. 여기서 떠나갔을 때의 시간과 돌아올 때의 조건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가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이 영화 안에서 우리를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나는 이미 <바람 같은 사나이>가 몇 차례이고 밤의 영화라고 말했다. 임권택에게 이 영화는 두 개의 입구를 보여주는 중이다. 하나는 다찌마와리 액션활극으로 가는 길이다. 임권택은 그런 다음 몇 년간 충실하게 이 장르를 찍었다. 그런 다음 여러 가지 이유로 반공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이 두 개의 입구는 사실은 하나의 길로 향하는 도정의 시작이다. 그 길의 끝에는 고향이 있다. 하지만 그때 임권택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있을 것이다, 라고만 어렴풋하게 말한다. 위장하고 있는 화해. 은밀한 야심. 고전적인 작가주의 이론은 거기에서 시작했고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라고 서명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를 여백을 이용하여 보충하고 싶다. 물론이다. 그러기 위해서 임권택은 장애물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갈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말소시켜 나갈 것이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말끔하게 청소할 것이다.반복해서 말하겠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매정한 영화이다. (계속) 추신_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현재 영화 시작하고 11분 52초 동안 사운드 네가가 유실되었다. 이후의 장면들로 충분히 내용을 유추할 수 있긴 하지만 몇 장면들은 대사가 몹시 궁금하다. 특히 (이미 언급한) 목사가 길용을 설득하는 장면.
여기서는 장황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먼저 < 아내들의 행진 >의 포스터를 잠시 보아주기 바란다. 한 여성이 보기에도 힘겨운 돌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번쩍 들어 마치 자신의 아이를 안기라도 하듯 그런 자세로 서 있다. 그녀의 옷매무새가 벌어져 그 사이로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가까스로 가리고 있고 치마를 걷어 올려 무릎 위 허벅지가 드러나 보이지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 그림의 디테일 어디에서도 성적인 자극을 주는 유혹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고 약간 거만하게까지 느껴진다. 건강함. 하지만 과장된 건강함. 약간 두텁게 칠해진 위에 다시 덧칠한 것이 분명한 터치도 그런 인상을 더 한다. 게다가 전체를 검붉은 색으로 물들인 색채가 약간 위압감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온통 불타오르는 듯한 힘, 그 사이를 뚫고 비치는 서광. 붉은 어둠, 혹은 암흑 사이로 내비치는 어떤 계시. 종종 종교적인 그림들에서 마주한 맹목적인 희망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차라리 두렵다고 할까. 그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 주변을 에워싼 인물들에 비해서 필요 이상으로 큰 비례로 그려진 모습이 위압감을 주면서 단지 주인공이 아니라 아마도 그녀 주변 인물들을 이끄는 지도자라는 표지를 전달한다. 마치 괴물처럼 큰 주인공.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이다. 다소 기괴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이 거대한 모습. 그녀는 주변의 얼굴조차 눈 말고는 윤곽이 거의 뭉개져 버린 듯한 한 무리의 사람들에 비하면 또렷한 얼굴의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지만 내 시선을 끄는 것은 구태여 선명하게 그린 팔꿈치와 무릎 사이로 마치 빠져나올 듯이 버티어선 뼈마디이다. 그녀는 지금 노동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하여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나는 두 개의 지시어를 하나로 합쳐보고 싶다. 노동 지도자. 바로 오른쪽에는 영화를 설명한다기보다는 왠지 그녀를 설명하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는 카피가 그녀와 똑같은 자세로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내려써서, ‘證言에 이어 내놓은 汎國民映畵!’ 라고 달려있다. 이때 포스터를 보는 우리가 불려가는 카피 안의 자리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에워싼 얼굴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주변의 여자들이다. 汎國民 映畵, 라는 이상한 말. 여기에는 동원의 명령이 담겨있다. 국민이라는 당신, 그런 다음 국민으로 (재)통합하기. 汎, 이라는 강력한 명령. 마치 그 명령을 가시화하기라도 한 것 같은 견고딕의 서체. 그 아래 굵은 먹글씨 풍으로 쓴 제목 <아내들의 行進>. 행진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서사의 시각적 알레고리.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이 포스터 위에 놓여있는 제목의 서체에는 조각난 상형문자의 비의적 순간들이 이어지는 어떤 연속이 놓여있다. 어떤 영웅적 서사의 오작동. 이 표현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다. 어떤 영웅. 나는 영화에서 이런 형식의 포스터를 사회주의 체제아래에서 만들어진 국영 제작소의 영화들을 위한 다른 수많은 예를 알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아내들의 행진>은 잘 알려진 것처럼 새마을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문화공보부 산하기관 중의 하나인) 영화진흥공사에서 만든 국책영화이다. 자본주의 근대화를 위해서 시작한 새마을운동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들을 계몽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이 시기의 수많은 프로파간다 대중선동 문화 중의 하나였던 영화중의 한 편. 그저 영화 한 편. 그런데 이 포스터는 이상할 정도로 이 체제가 불온시하고 콤플렉스에라도 걸린 것처럼 창백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증오하고 적으로 삼아 내부에서 고발하고 외부에서 대치 중이었던 이데올로기의 문화적 양식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포스터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화 취향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자도 아니며 제3공화국의 연구자도 아닐뿐더러 이 세대에 속하지도 않는) 내가 여기서 제한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영화에 관한 자신의 견해나 취향에 대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으며 영화에 관한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아마도 국가 지도자 중에서 영화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저서로 남긴 유일한 예는 김정일 북한 전 국방위원장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북한영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참고문헌을 통해서 저서의 존재를 알고만 있을 뿐이지 그 내용을 알지는 못한다) 이건 사회주의에서도 드문 일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톨스토이에 관한 문건을 남겼으며 고리키와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인민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영화에 대해서는 별다른 글을 남기지 않았다. 에이젠슈테인의 < 이반 대제 일편 >을 보고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스탈린은 1950년 언어학과 마르크시즘에 관한 짧은 테제를 썼지만 (이 글은 미셀 페쉐를 경유하여 알튀세 학파에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영화에 대해서 문건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건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이다. 감옥에서 영화를 볼 여유가 없었던 그람시는 대중들의 동의를 끌어내야 하는 헤게모니의 진지전에서 거의 영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람시가 영화를 언급한 건 1916년 8월 26일에 발표한 “연극과 영화”가 전부이다. (그리고 그 글에서 어떤 영화제목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람시는 영화보다는 대중들의 전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소설,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을 연구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다음 그람시는 감옥에 갔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영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영화에 관한 글을 쓰진 않았(던 것 같)다. 지도자와 영화, 국민영화. 나는 단순하게 파시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차적 간극에 대한 약간의 설명. 내가 < 아내들의 행진 >을 처음 본 것은 새마을운동이 막 시작되었던 이 영화의 개봉 시기인 1974년 5월 16일 주변이 아니라 그로부터 한참을 더 지나 새마을운동이 민관유착에 의한 부패의 온상이 되고 난 다음 비판에 직면한 새마을 중앙본부가 새마을 중앙협의회로 변신을 꾀하던 1987년 무렵이었다. 나는 오로지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를 위해서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다. 처음 개봉했을 때 국제극장 앞을 지나면서 간판을 본 기억도 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새마을운동은 그때 음산한 희망의 (거짓된) 약속이라는 걸 모두들 알면서도 애써 침묵을 지켰다. 몇 가지 구호를 외우면 언제든지 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도덕 과목 같은 것이었고 그렇게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시험에서 문제를 풀어낸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어긋남의 지루한 동요 속에서 모두들 새마을운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새마을 국책영화 <아내들의 행진>을 그 자리에 위치 지은 다음 곧바로 잊어버렸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 족보 >를 통해서 임권택을 발견한 다음에도 그 이름과 <아내들의 행진>을 금방 연결시키지 못했다. 내가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순서대로 작품 연보를 정리할 때였다. 그런 다음 <아내들의 행진>을 (비디오로) 처음 보게 되었다. 먼저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지순은 성공적인 새마을운동을 이룬 마을에서 지도자인 오빠와 함께 자란 다음 아직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지 않은 가난한 마을 한밭골로 시집을 온다. 이 마을에서 우여곡절 끝에 지순은 마을 아낙들을 중심으로 가난의 원흉이었던 장마철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한 방죽을 세우면서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고 그녀들의 노력에 감복한 남편들도 함께 힘을 모아 버려진 농지를 개간하여 부자 마을이 된다. 자, 여기까지는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나를 당황시킨 것은 마지막 시퀀스 전체였다. 갑자기 기습이라도 하듯이 방향을 틀어서 이 마을에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만수댁의 남편이 무장공비가 되어 돌아온다. 영화는 새마을 영화에서 반공영화로 어리둥절하게 바뀐 다음 잔인무도한 공비들의 만행과 국군장병들의 용감한 대처 끝에 일망타진하는 장면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끝나버린다. 나는 처음에 비디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에 다시 되돌아가서 문제의 장면부터 반복해서 보았다. 영세한 산업이었던 비디오업체들은 종종 필름 릴을 뒤죽박죽으로 섞거나(< 삼포 가는 길 >의 ‘악명 높은’ 비디오) 때로 90분 테이프의 길이에 맞추어서 제멋대로 영화를 자르거나, 그래서 갑자기 끝나거나, 때로 서로 다른 영화 릴이 엉키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한편의 제목 아래 이어 붙였다. 하지만 <아내들의 행진>은 외형적으로 (화질이 너무 나쁘다는 문제를 제외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너무 이상해서,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내들의 행진>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결국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 임권택 감독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때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돌려받았다. “그거는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넣으라고 해서 들어간 거요, 미치는 거예요, 거기를 박정희 대통령이 넣자고 그런다고, 절대로 넣어야 된다고 그러잖아. 나는 계속, 계속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해도 소용이 없어”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책에는 질문의 반복이라 누락되어 있지만 그때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반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영화를 본 건가요?” “그러니까 다 찍은 영화에다가 그런 이야기를 덧붙이라고 말을 한 거겠죠. 원래 시나리오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니까” 잠시만 멈춰보자. 나는 단순하게 여기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월권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폭력적이며 잘못된 처사이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벌어졌고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그저 비난을 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거기에 더 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은 < 아내들의 행진 >을 보았고 (아마도) 몹시 마음이 들었다. 그를 감동시켰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무언가 여기에 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몹시 위험한 가설을 세워보고 싶다. 참 훌륭합니다. 하지만 여기엔 무언가 빠진 게 있어요. 이 영화가 단지 새마을운동을 계몽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말고 더 밀고 나아가 반공 이데올로기까지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해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왜 그 둘은 하나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된 둘이 아니라 둘 각자의 결핍을 채운 하나가 되는 것일까. 영화감독은 그 둘을 서로 다른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지도자는 그 둘이 하나를 둘로 나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이념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 판본 역할. 하지만 아직 덧셈이 필요하다. 상황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 4월 22일 한해(寒害)대책을 세우는 자리에서 ‘새마을운동’이라는 정책을 꺼내 들었다. 그는 지금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김대중은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한 힘겨운 상대였으며 그가 내세운 ‘청년기수론’은 해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마음을 움직였다. 게다가 공화당은 눈에 보이게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다. 그해 5월 6일 새마을 사업추진방안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국가 단위의 근대화 개혁을 시작하라, 는 이 정책적 명령은 정치적으로 근대적이라기보다는 봉건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백성들을 계몽하라. 그들을 깨어나게 해서 더 큰 잠에 빠져들게 하라. (지젝이 아도르노를 빌려 설명했던) 억압적 승화. 이듬해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가까스로 김대중을 이겼다. (이 선거에 대한 후일의 역사적 평가에 따르면 부정선거의 개입에 의해서, 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그걸 판단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바깥의 일이다) 모든 일이 평화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선되자 내린 결단은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과 국가계엄은 거의 평행해서 진행되었다. 이것은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새마을운동은 그것의 취지에 머물지 않고 그것의 과정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 반대를 한다면 그는 새마을운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는 ‘빨갱이’가 될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고작 20년에 불과하며 여전히 분단 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며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간첩들이 일상생활에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무장공비들이 휴전선을 넘어오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에서 가져온 모델이라고 생각했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이 운동이 소련의 강제이주 집단수용소에 가까운 콜호즈와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1972년 3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마을을 직접 시찰하기 시작했다. 모범적인 사례들. 그해 4월 2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직접 ‘새마을 노래’ 가사를 작사하고 작곡했다. 다소 지루하겠지만 당신에게 ‘새마을 노래’ 가사를 불러주겠다. (일절)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후렴)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후렴) (삼절)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후렴) (사절)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후렴) 적어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 가사는 새마을운동에 관한 가장 짧은 형태의 아포리즘처럼 이루어진 강령이자 정감의 언어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이 설명을 읽고 당신은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이 노래는 국민 누구나 외어야 하는 가사였으며 일상생활의 행동 지침이자 반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복음이었다. 무조건적인 추종만을 요구하는 노래. < 아내들의 행진 >을 보고 나면 다소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단지 새마을 정책의 이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가사를 고스란히 서사 안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새 아침이 반복적으로 밝아오고 마을의 새 삶은 농한기에 집에서 게으른 아침을 보내던 마을 사람들이 미처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데서 전환을 맞는다. 옛 마을의 지표는 초가집이고 새 마을의 지표는 형형색색의 슬레이트 지붕이다. 한밭골은 길이 좁아서 리어카를 새로 장만해도 그걸 사람들이 둘러메고 동네에 들어서야 한다. 그런 마을을 새 마을로 만드는 시작은 먼저 이 마을 여인네들의 부녀회를 조직한 다음 그녀들에게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강령을 전파하는 것이다. 잘 살 수 있다. 부자가 될 수 있다. <아내들의 행진>에서 이 말은 일종의 마법의 언어이다. 이 말 앞에서 어떤 다른 반대도 힘을 잃고 만다. 여러분, 새 조국의 미래를 향한 행진 앞에서 다른 한가로운 주장을 할 시간이 없답니다. 민주주의라니요. 이 영화에서 모든 결정은 선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단 한 번도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지도자의 명령처럼 내려진 가사를 전달하는 영화.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이 영화에는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비디오 판본)무장공비와 함께 돌아온 남편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 아내들의 행진 >의 어떤 장면에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 다양한 차원에서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몹시 은밀하고 종종 사소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걸 짐작하는 것은 바보 같은 추론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오로지 결핍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생각이다. <아내들의 행진>의 마지막 시퀀스에는 먼저 판본의 문제가 있다. 내가 본 비디오 판본은 새마을운동이 성공하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던 날 한밭골 새마을운동 부녀회의 회장직을 맡았던 과부 만수댁 집에 한국전쟁에서 납북된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남편이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이 기괴한 시퀀스가 시작한다. 약간의 부언 설명이 필요하다. 새마을운동을 전파하려는 새댁 지순은 부녀회를 조직하면서 자신이 아직 어리고 한밭골 주민들도 잘 알지 못한다면서 만수댁을 추천한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시나리오에서 만들어진 인물의 배치이다. 한밭골은 아내들이 여전히 구습에 매여 있고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마을이다. 만일 누군가 나서서 부녀회 회장을 맡는다면 (이 영화의 장면에 따르면) “북어와 아내는 사흘 걸러 매질을 해야 한다”고 남편들끼리 모여 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 어른들은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가르치는 마을에서 줄거리에 매우 번잡하게 그녀가 남편을 설득하는 과정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없는 아내가 필요해졌고 만수댁이라는 과부가 만들어졌다. 그런 다음 만수댁이 왜 과부가 되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생기자 남편이 납북된 인물이라는 설정이 동원되었다. 이 영화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촬영되었고 이야기에 구체적인 지명을 기입하지는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두 호남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호남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한 최대 빨치산 조직인 남부군이 활동하였으며, 망실공비로 인한 결손가족은 호남 전역에서 드문 사례가 아니라는 계산이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수댁은 납북된 날을 남편의 기일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아직도 그의 실성한 노모가 살아서 아들이 언제 오느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이 제사 장면이 남편이 돌아오는 설정 이후에 보충 촬영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임권택 감독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처음부터 일관하고 있고, 현재 남은 시나리오는 심의대본이기 때문이다) 돌아온 남편은 다른 무장공비들과 함께 만수댁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한 다음 곧 한밭골을 떠날 생각이다. 하지만 이미 집은 국군에게 포위된 다음이며 만수댁은 그 위급한 상황에서 남편에게 자수를 권유한다. 지순의 남편은 위험을 무릎 쓰고 양손을 들고 집으로 다가오면서 “여기가 아제의 고향이요, 어디를 또 가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라고 자수를 설득한다. 지순 남편이 다가오자 위기를 느낀 무장공비들이 지순 남편에게 총을 쏘고 그 틈을 타서 만수댁 남편은 그들을 일거에 쓰러트린 다음 재빨리 아내와 문 바깥으로 탈출하여 국군들이 포위한 논두렁까지 달려가다가 그만 총을 맞는다. 다음 장면은 만수댁 부부의 장례식 장면이다. 여기까지가 비디오 판본이다. (또다른 판본)혼자 돌아온 남편 그런데 이번에 영상자료원에서 제공받은 스크리너는 이 시퀀스 전체가 전혀 다른 판본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새마을운동이 성공하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던 날 한밭골 새마을운동 부녀회의 회장직을 맡았던 과부 만수댁 집에 한국전쟁에서 납북된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남편이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이 기괴한 시퀀스가 시작한다. 이때 내가 본 비디오 판본과 달리 여기서는 남편이 혼자 집을 방문한다. 그는 사흘을 굶었다고 말한 다음 저녁상을 먹고 나서 바로 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방에 누워있는 노모를 본 다음 마음을 바꾸고 자수를 결심한다. 그래서 한밤중에 만수댁 손에 이끌려 경찰서에 자수를 하기 위해 달려간다. 그런데 길목에서 기다리던 무장공비 무리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남편의 의도를 눈치채고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만수댁마저 잔혹하게 죽인다. 그 둘은 어둠 속에서 죽어가면서 두 손을 꼭 쥔다. 무장공비 무리들의 행방을 더는 알 수 없고 장례식 장면으로 이어진다. 갑자기 장례를 하다말고 지순은 두 손을 움켜쥔 다음 우리들은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라고 외친 다음 아내들을 이끌고 새마을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행진한다. 두 번째 판본은 여기서 끝난다. (좀 더 난처한 것은 현재 소장본은 영화가 모두 끝난 다음 내가 이미 말한 비디오 판본이 다시 그 뒤에 붙어있다) 나는 새로운 판본 앞에서 좀 어리둥절해졌다. 그 둘은 내용은 다르지만 결국 하려는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둘을 두 가지 판본으로 찍어야 할 필요가 왜 생긴 것일까.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훨씬 훌륭한 것도 아니다. 둘 중 어느 쪽이 극장 개봉 당시에 사용된 프린트일까. 어떻게 두 가지 판본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일까. 둘 다 임권택 이 연출한 것일까, 아니면 둘 중 하나를 (어쩌면) 제작 프로듀서를 한 정진우 가 찍은 것일까. 우리는 정진우가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는 이미 < 증언 >을 제작하면서 영진위의 요구에 따라 임권택이 다음 영화를 찍고 있는 동안 수정 제작본을 위해서 일부 장면을 별도로 연출하고 편집하였다. < 아내들의 행진 >은 <증언>에 이어서 영진위가 제작하고 정진우가 제작 프로듀서를 한두 번째 영화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택한 판본일까. < 아내들의 행진 >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성공적인 새마을운동을 해냈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당신이 힘들여 일구어낸 마을을 언제 ‘빨갱이’들이 침투하여 망쳐놓을지 알 수 없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를 덧셈으로 생각하는 대신 뺄셈으로 놓고 원래의 판본으로 되돌아가 이 기괴한 마지막 시퀀스를 삭제하고 다시 보면 즉각적으로 이상한 질문과 부딪치게 된다. 임권택 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것만으로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영화감독과 지도자의 차이가 시작되는 것일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단지 반공 드라마가 더해진 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시퀀스가 당신을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것은 명랑한 승리만으로 가득 찬 계몽극을 갑자기 비극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만일 <아내들의 행진>을 진정으로 심미적인 관점으로 다가간 사람은 임권택이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영화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물론 임권택이겠지만 이 이야기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어쩌면) 박정희 전 대통령일 지도 모른다. 만일 이 표현이 불편하다면, 이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진심을 다해서 온전하게 껴안은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일 지도 모른다, 고 수정해도 괜찮다. 자신의 이념을 실현한 영화. 말하자면 그에게 <아내들의 행진>은 스탈린에게 < 이반 대제 일편 >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퀀스를 삭제하면 이 영화는 새마을운동의 인정 미담과 승리에서 멈출 것이다. 그다음은 그래서, 라는 다음 단계에 대한 질문과 과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밀고 나아가 무장공비들이 한밭골에 침투하여 만수댁을 죽음으로 이끌 때 갑자기 이 모든 과정은 다른 차원에로 도약하듯이 이끌린다. 이제까지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지순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공적인 마을을 이룬 부녀회 회장 만수댁에게 요구되는 지도자의 마지막 단계는 예기치 않은 비극적 사건을 통해 죽어서 이 승리를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이지만 조연)인 만수댁이 이제 진정한 지도자(이자 주인공)의 자리를 어떤 권력다툼 없이 지순에게 운명적으로 양보하는지에 관한 슬프지만 아이러니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만수댁이 차지했던 위치를 부언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지순이 한밭골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호의를 베푼 사람이며, 지순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려 들자 모두가 적대감을 보일 때도 가장 먼저 그녀에게 협조를 시작한 인물이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결국 성공하긴 했겠지만) 훨씬 가혹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만수댁은 지순과 한밭골 새마을운동 사이의 매개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사실상 그녀가 차지할 자리는 공백이 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이 애도의 장면에 감정만이 넘쳐날 뿐이지 어떤 성찰도 없는 것은 삭제의 항목에 관한 질서를 재조정하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죽 쌓기 이 질문을 완전히 다른 자리에서 질문해보고 싶다. 모든 새마을운동 이야기는 긍정되어야만 하며 새마을운동에 관한 모든 영화는 성공적인 결론을 맺어야만 한다. < 아내들의 행진 >은 계엄 하에 놓인 국가에서 만들어진 국책영화이며 모든 부정적인 언사는 금지된 영화이다. 그러므로 새마을운동의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가 비극으로 귀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 바깥의 지도자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제안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을 체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영화감독이 영화 안에서 하지 못한 것을 지도자가 현명하게 해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읽고 있다면 당신은 내 말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아내들의 행진>은 새마을운동의 페티시즘에 가까운 계몽영화이다. 모든 등장인물은 목적론의 결론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그 과정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제한된 공간. 시간적인 차단. 여기서 하나의 모델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명령. 이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이때 이 모델에는 텅 빈 시간이 음산하게 감돌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지금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공허한 자리에, 말 그대로, 어떤 비유도 없이, 마치 강제부역을 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불려 온 것이다. 새마을이라는 낯선 마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 그러니까 8년 후에 임권택이 찾아간 낯선 마을을 다룬 < 안개마을 >을 떠올려보면 둘 사이의 간극은 더 멀리 느껴질 것이다. 핵심은 <아내들의 행진>에서 영화감독이 가졌던 영화와 모델 사이의 거리를 지도자는 그 자신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가진 거리의 상실이다. 이때 지도자는 이야기 안에 비극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다. 내게 시련이 필요합니다. 혹은 비극 없이 이야기는 여전히 부족한 결핍상태에 놓여있다고 믿습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당신들은 남한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시련은 거기가 아니라 다른 데 있습니다. <아내들의 행진>은 장마만 시작하면 강물로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죽을 쌓아올렸을 때 이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무슨 할 이야기가 더 남았나요. 지순이 시집오고 다음 1시간 39분의 지점,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방향을 틀었을 때 지순은 마치 친정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이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만수댁 남편의 귀환은 무언가 이야기가 더해졌다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여기에 덧붙여진 것처럼 보인다. 흔히 진부한 영화들에서 마주치는 것처럼 이미 한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두 편의 영화. 그러나 이것은 미학적 선택이 아니다.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만수댁 남편의 시퀀스를 보고 있으면 몹시 불길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지순이 내내 시련을 겪기는 하지만 <아내들의 행진>은 단 한 순간도 그녀의 운명 때문에 보는 우리를 긴장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승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불해야 할 노력을 기울이면 어떤 오차도 없이 거기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아니, 기대보다도 훨씬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외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새마을운동의 법칙이 작동하는 어떤 변수도 없는 말끔한 세계이다. 이때 만수댁 남편이 갑자기 이 안전한 법칙의 세계를 일순간에 뒤흔드는 얼룩의 삽입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끝내 이 과잉하는 장면이 반대로 결핍하는 모델의 약점을 비로소 완성하여 입체적인 이념의 공간에로 도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지도자의 뜻을 (비판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시퀀스는 이야기 전체의 균형을 완전히 망쳐놓을 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이루어놓은 승리의 감흥조차 깨트려버린다. 핵심은 거기에 있다. 지도자는 망쳐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깨트려야 한다고 믿는다.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이 시퀀스가 요점에서 빗나가기는커녕 거의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던 이 모델의 세계에 언제든지 오류가 작동할 수 있는 현실감각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당신은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현실감각이라니요. 이건 그저 모델 옆에 다른 모델을 덧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답니다. 도식적인 설명. 새마을운동은 수없이 많은 승리를 재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 승리란 얼마나 약한 것이며 또한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승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국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에로 재통합한 다음 그 하위개념에로 재위치 시키는 확대재생산의 수순. 얼마든지 반론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나아가보고 싶다. 나는 영화감독과 지도자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먼저 말하고 싶다. 그래요, 이 모델은 이미 충만해있어요. 그런데 왜 지도자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시나요. 지도자는 그렇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싶어 한다. 그건 말이죠, 너무나 성공적인 이 모델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로부터? 우리들의 성공을 질투하는 북한으로부터. <아내들의 행진>의 마지막 시퀀스는 승리에 대한 염려이다. 이것이 이 이상한 시퀀스의 불길함이다. 이제 막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오직 모델 안에서의 승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도둑질당할까 염려하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환상 안에서만 맺어진 (거의 도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착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염려는 이루어내고, 도둑질 당하고, 되찾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바라보고 싶은 지도자가 새마을운동의 승리를 즐기는 방식이다. 그러니 이 염려는 미처 이루지도 못한 승리를 앞서는 결과에 대한 도둑질의 걱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자크-알랭 밀레는 좀 더 멋지게 표현했다. 향유의 도둑질. 지순이 도착한 마을의 황폐한 풍경 (비디오 판본)새마을운동 후의 마을 물론 여기서 임권택 이 운동의 동력에 질질 끌려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 아내들의 행진 >을 보면서 임권택이 새마을운동에 반대하기는커녕, 혹은 조롱하기는커녕, 그저 마지못해 진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종종 진심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과 수없이 마주쳤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 요화 장희빈 >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장르적인 발견과는 상관없이) 그 자신에게는 거의 추락하듯이 다찌마와리 액션활극과 무국적 만주웨스턴, 쇼브라더즈 무협영화를 카피한 무국적 무술영화들로 이어지던 목록에서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면서 나타난 단절의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이에 존재하지만 사라진 도서실의 빈칸인 < 잡초 >를 염두에 두고 있다. 아마도 <아내들의 행진>은 <잡초>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자리에 놓여있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임권택은 <아내들의 행진>을 찍은 다음 (< 장군의 아들 >을 예외로 하면) 두 번 다시 다찌마와리 영화에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한 만주웨스턴이나 무국적 무협영화를 찍지도 않았다. 이 장르영화들은 물론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결단. <아내들의 행진>은 임권택에게 어떤 결사적인 방어선 같은 영화이다. 그는 여기 머물지 못한다면 영화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이 견뎌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내들의 행진>에는 이따금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몹시 아름다운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매달린 비평들은 그 아름다움을 미처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보았다 할지라도 몹시 불편했을지 모른다. 거기 어른거리는 파시즘의 자동인형들의 그림자. 하지만 <아내들의 행진>은 임권택을 전혀 다른 의미의 맥락 안으로 이끈다. 나는 한국영화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예외 없이 호남 방언을 사용하는 영화를 그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당신은 임권택이 호남영화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기 영화 세계 속에서 넓혀온 것을 생각해야 한다. 고향으로 가는 먼 길, < 짝코 >. 자기를 부르는 고향의 소리, < 서편제 >. 혹은 고향의 역사, < 태백산맥 >. 그리고 사모곡, < 축제 >. 아마도 호남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판본이라고 할 < 춘향뎐 >. 그런 다음에도 거기 남은 것을 다시 찾으려는 < 달빛 길어올리기 >. 하지만 아직은 이상할 정도로 표준어로만 이루어진 영화들. 한국영화에서 한 편의 대중영화가 방언으로만 이루어진 < 친구 >가 2001년에야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물론 등장인물 중의 누군가 호남이나 영남 방언을 사용하는 수많은 예가 있다. 그때마다 주인공은 표준어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방언은 마치 봉건적인 세계, 혹은 미처 근대화되지 못한 지역(에서 온 사람)에 대한 청각 기호처럼 사용되었다. 때로는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 혹은 공산괴뢰군을 지역적으로 분리시키거나 단순하게 편을 가르기 위해서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를 별 구별 없이 평양 방언으로 통일하여) 대사로 차별화시켰다. <아내들의 행진>은 호남방언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여기서 이상하게도 지순(과 그녀의 오빠)만이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고향은 어디인 것일까. 문득 편지를 쓰면서 떠올리는 지순의 고향에 대한 기억(flash_back)에 따르면 그녀도 다른 농촌에서 자라서 이 마을로 시집을 온 것인데 그녀(와 그녀 오빠)의 말에는 어떤 방언도 묻어있지 않다. 마치 지순이 받은 교육이 그녀의 방언을 탈색한 것만 같은 말을 들려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순과 한밭골 사람들 사이를 개화(開化)와 몽매(蒙昧)로 분리하는 도식을 세우지만 그 둘 사이가 예민하게 긴장을 불러일으키거나 어떤 대립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순의 표준어가 여기서는 그녀를 고립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무엇보다도 임권택은 지순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별로 우리를 설득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한밭골로 전통혼례의 가마를 타고 시집오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가마 안의 지순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다음 그녀를 따라온 오빠가 다음 날 안개 낀 새벽에 동생의 시댁과 인사도 없이 떠나면서 남기는 말은 미안하다, 는 표현이다. 시집간 여동생에게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일까. 이 말은 마치 이제부터 시작될 여동생 지순의 고난과 시련에 대한 불길한 예고처럼 들린다. 그런데 왜 지순은 이 마을로 시집을 온 것일까. 오빠와 지순의 남편이 절친한 친구 사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시댁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다. 여기엔 이상하게도 어떤 설명도 없다. 게다가 이 한밭골은 지순에게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고장이다. 영화 중간에 지순이 남편에게 고향 오빠를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다녀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임권택은 이 마을로 시집온 지순과 남편 사이의 첫날밤을 찍지 않았다. 그런 다음 영화 전체에서 그 둘 사이의 내밀하게 사적인 다정한 순간을 단 한 장면도 찍지 않았다. 마치 지순은 한밭골에 새마을운동의 임무를 가지고 온 사람처럼, 정말 첫 장면만 삭제한다면 시집을 왔다기보다는 파견된 것처럼, 그래서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개인적인 그 어떤 기쁨도 버린 사람처럼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에만 매달린다. 이야기가 지순의 활동을 따라가긴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아내들의 행진>의 동선은 산만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인물들이 아니라 풍경이다. 황폐한 풍경. 하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이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서진 산하.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긴 일제강점 하의 무분별한 벌목과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빨치산을 소탕한다고 무자비하게 잘라낸 나무들. 오랜 시간을 타향에서 보낸 다음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기대하는 추억 속에 자리 잡은 풍경의 형상들이 부서지고 사라져버린 것을 확인할 때 품는 분노가 <아내들의 행진>의 전반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텅 비어버린 추억. 임권택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걸 지키지 못한 고향의 남겨진 이웃에 대한 분노. 그 지경이 된 내가 살아온 땅의 역사. 하나의 세계가 사라져 버렸뇩?상실에 대한 탄식. 그때 거기 그것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그저 고향에 머물며 살아가는 현재의 이들에 대한 깊은 미움을 숨기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흉악하고 이득을 눈앞에 두고 교활하며 종종 비겁하고 폭력적이며 대부분 완고하고 그들의 무지가 때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데도 임권택은 그들에게 어떤 연민을 품지 않는다. 하나의 예. 이웃의 어린아이가 급성 폐렴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순이 알려주지만 (그런데 의사도 아니며 진료도 하지 않고 그저 한 눈으로 쳐다본 다음 그녀는 병명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돈이 없어 병원에 가보지 못한 채 마을 어른 김 첨지의 민간요법에 의존해서 일시적인 경기로 판단하고 방치하는 바람에 가엾게도 생명을 잃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말을 할 뿐 거의 무관심하게 다루고 있다. 아이가 아픈 장면과 그 아이가 시신이 된 장면은 서로 떨어져 있으며 그 둘 사이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마치 그 아이의 생명을 잊은 것처럼 보이다가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죽은 다음이다. 한밭골에서 부서진 것은 풍경이지만 망가진 것은 이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종종 마을이 아름답긴 하지만 대부분 정감 없이 찍혔으며 마을 사람들은 단지 무지할 뿐만 아니라 계몽되기 전의 그들은 종종 폭력에 자주 의지하거나 너무 쉽게 노출된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그저 이야기에 걸쳐 서 있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별로 우리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내가 단절이라고 부른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여기서 장소와 인물들을 연결시키는 대신 집합의 형식으로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네마스코프는 반복해서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다. 아직 카메라가 멈춰 서서 (< 만다라 >에서처럼) 바라보고 있지는 않지만(long_take) 이미 인물들의 배치는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 반원형을 만들면서 앉아있는 인물들. 그때 2.35 사이즈를 위해서 수평으로 늘어선 배치를 보고 있으면 (물론 아직 임권택 은 보지 못했지만 끈질기게 그를 아시아 영화의 전통 안으로 다시 위치 지으려는) 서방세계 비평가들이 그를 미조구치 겐지의 그림자 아래 있다고 설명할 때마다 우리들은 오히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거기 있다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고작 5년의 차이를 두고 만들어진 동시대의 영화 < 오하루의 일생 >과 < 거미둥지의 성 >에서 동일한 일본 가옥 구조 안에 앉혀놓은 무사들의 배치의 차이를 떠올려보라. < 아내들의 행진 >은 단지 장르 안에서 쇼트의 체계를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돌이키려는 시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화 시스템을 좌표상의 영도(degre_zero)에로 되돌려 놓으려고 스스로에게 부과한 어떤 제한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제한? 그렇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일단 이렇게 앉혀 놓으면 편집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걸 나누기 시작하면 앞의 장면들 전체가 무효가 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배치하면 누가 누구를 보는지 시선의 방향이 그 자체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임권택이 누구보다 잘알고 있고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진행해온 세계. 그런데 그걸 중단하기 위한 구도를 여기서 자기 손으로 스스로 만들어낸다. <아내들의 행진>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형식적으로 무언가를 잡아 뜯어내듯이 버리면서 새로운 관계를 짝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 영화 이전 임권택의 영화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무대가 농촌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핵심이다. 임권택은 스타일을 발명하는 대신 스타일이란 그 영화가 머무는 세계 안의 형식과 조응하는 매개라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스타일을 통해서 의미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임권택에게 <아내들의 행진>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농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 잡초 >를 제외하면) 장르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 영화를 찍은 건 53번째 영화인 <아내들의 행진>이 처음이다. 그가 배우들과 스태프를 이끌고 농촌으로 간 것은 언제나 조선 가옥이 서 있고 주변에 별다른 근대건물이 없어야만 하는 사극이거나 수많은 엑스트라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때로 건물들을 폭파시켜야 하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었다. 조건과 상황 안에서의 농촌. 그러므로 거기에는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이제까지 임권택은 농촌을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도시 사람인 것처럼 청춘영화를 찍었고, 갑작스러운 전후 서울의 근대화 과정 그늘에서 자라난 폭력과 희생을 다루었고, 이따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애환처럼 연출했다.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추억. 그렇다면 어떻게 되찾아야 할까.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한국전쟁이 놓여있다.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폭력적인 시간의 흔적들. 존재했던 것들의 소멸. 고향 사람들의 삶이 변해버렸고 풍경은 부서져 버렸다. 거기서 더 이상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 임권택은 무엇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여기서 영화감독과 지도자는 서로 갈라진다. 되찾아야 할 시간과 도래해야 할 시간.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설명해야 할 것이다. < 아내들의 행진 >은 이제까지 임권택 이 만들어본 적이 없는 형식의 영화이다. 그건 이 영화가 교육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내들의 행진>이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책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떠올리면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반론을 위해서 푸코를 따라 칸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대신 맞은편에 브레히트의 교훈극에 관한 배움에 따라 고다르가 만든 교육의 영화들을 가져다 놓을 생각이다. 세르주 다네의 그 유명한 명제. “스크린이라는 칠판” 임권택의 교육의 영화는 세 번째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임권택은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 배움을 청해가는 방식을 취했다. 단지 그것은 주제에서 배움을 가져오거나 소재를 알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임권택이 그것을 영화로 담기 시작할 때 그것의 모든 지식들이 영화 안의 기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임권택은 거기서 다시 시작하였다. 나는 아는 것이 없으며 배운 것이 없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서술은 그의 전진이 되었다. 낯선 지식들. 이것은 저것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일까. 이것과 저것은 왜 대립하는가. 질문이라는 형식. 그 형식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의 리듬. 그는 스님의 만행길을 따라가면서 소승불교를 배우고(< 만다라 >) 그리고 번갈아 대승불교를 배웠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 그런 다음 자신에게 내린 무병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찾아 나선 중년남자를 따라가며 무속신앙을 배웠다. (< 불의 딸 >) 임권택은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일백년 전 조선말 막 근대가 시작되었을 때 도망치고 또 도망치면서도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상을 전했던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활동을 따라가면서 인본사상을 배웠다. (< 개벽 >) 임권택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는 이제 남도 소리를 따라 다시 유랑을 떠났다. 당신을 부르는 소리. 고향의 소리. (< 서편제 >) 그리고 또 떠났다. (< 천년학 >) 그런 다음 조선화의 마지막 대가 오원 장승업을 따라가면서 배움을 청했다. (< 취화선 >)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종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 달빛 길어 올리기 >) 임권택의 영화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향한 교육의 영화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내들의 행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마치 벤야민이 <아내들의 행진>을 만들 때의 임권택을 위해서 쓴 것만 같은 테제로 마지막 문장을 대신 하겠다. ‘역사철학 테제’ 18개 테제에 관한 부기 B. “시간으로부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했던 점술가들은 확실히 시간을 동질적 시간으로도 체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기억을 통하여 체험되어졌던가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중략)” (계속) 1974년 111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영화진흥공사 각색 신봉승 , 윤삼육 촬영 변인집 조명 최원근 편집 김창순 음악 한상기 김희라 윤미라 윤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