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창
- 감독
- 심혜정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조병희, 정기현, 정승원, 김용래, 박준식, 신민임, 김해련, 이영자, 이은정, 김홍빈, 임승미, 김정호, 차경희, 김용준, 홍지석, 이소연, 김종구, 강애심, 전국향, 김도영, 김재록, 권미아, 이재인, 김주아, 유용우, 강말금, 김정현, 이상현, 이기열
‘욕창’은 문자 그대로 이 영화의 주요 제재이자 은유이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어떤 주저함과 마음의 덜컥거림이 생겨났다. 의학사전에서 한 번은 보았던, 눈을 회피하게 만드는 이미지, 그리고 노년의 중증환자와의 친연성이 생성해내는 근심과 견뎌냄의 의미 덩어리가 영화적 체험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저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년과 질병은 그 피할 수 없음으로 인해 더 피하고, 미루어 두고 싶은 문제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노년이나 질병이 혹은 노년의 질병 문제가 영화 속에서 진지하게 잘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욕창 >( 심혜정 , 2019)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한 여인의 엉덩이 위에 생겨난 질환 ‘욕창’을 둘러싼 한 가족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욕창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러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이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 증상이 촉발한 ‘가족 시네마’에 소극(笑劇)적 성격이 배어든다. 감독은 “겉에서 봐서는 모르고, 얼마나 깊은지가 문제”인 욕창이라는 증상을 둘러싼 가족 세계의 표피를 사실주의적으로 구축해가면서, 동시에 피부 심층 피하조직의 궤양의 깊이를, 대상으로부터의 거리의 확보를 통해, 가족 관계에 대한 은유적 의미로 바꾸어낸다. 시작과 함께 영화는 누가 이 실내극의 이방인인지를 질문한다. 장년과 초로의 이음새 즈음에 있는 듯한 창식과 재중동포 어투를 가진 수옥 사이의 적당히 화기애애한 두 사람만의 공기는 휠체어를 탄 중증환자 길순의 등장으로 깨진다. 정지된 듯 움직임 없는 그녀의 외피는 화표면에 이질성을 도입하며 공간의 기운을 바꿔놓는다. 길순은 이방인이다. 이 ‘집’의 이방인은 간병인이지만, 시각적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이방인은 아내인 것이다. 감독은 이처럼 공간 안을 순환하는 미묘한 기운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딸 지수가 어머니의 욕창 발생 소식을 듣고 창식의 집에 들러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의 묘사다. 카메라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걸레질을 하느라 엉덩이가 불쑥 솟아 난 수옥의 뒤태를 지수의 시점 쇼트로 잡는다. 그 엉덩이의 활력은 길순의 욕창 아래 엉덩이와 대비되며, 또한 창식이 욕망하는 어떤 것을 현시하면서, 그 삶의 활력이 그 것의 상실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몰고 올, 앞으로 이 실내에서 펼쳐질 갈등의 드라마의 기미를 스크린 표면 위에 낯설게 도입한다. 그것이 창식의 시점 쇼트였다면 진부하고 느끼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각각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는 거울상과 같은 다른 대상과의 마주침, 대비, 변주 등을 통해 의미의 폭을 넓혀간다. 예컨대, 지수가 처해있는 이중의 딜레마는 친정과 자신의 집의 거실 풍경의 대조를 통해 깊어지고, 영화 속 이질적 요소인 빨간 파카를 입은 중증 장애인 남자와 가족 구성들과의 우연한 마주침들의 변주는, 길순과는 다른 층위에서, 누구나 언젠가는 마주할지 모르는, 피할 수 없는 나이듦과 중증질환의 문제를 객관화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아버지의 물건들과 어머니의 손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가부장의 상징적 권위를 안쓰럽게 주장하고 있는 아버지의 의자, 삶의 에너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물질화하는 스텝퍼와 만보기. 그와 같은 물건들을 통해서 창식이 묘사된다면, 이미 물건 소유의 의미를 놓쳐버린 길순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손이다. 우리는 한 사람 분의 노동력을 가리켜 ‘손’이라 한다. 누군가 다른 이에게 무엇을 차려주고 돌보는 데에는 손이 필요하다. 타인의 손에 의지하고 있는 길순에게 그녀의 손은 대부분 침대에 묶여 있는 거의 유일하고 미약한 의사소통의 도구다. 불만을 똥칠로, 살아 있음을 남편의 팔목을 잡는 것으로, 안쓰러움과 사랑스러움을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표현하는 길순의 손이 그것이다. 심혜정 감독은 실험 비디오 작업과 퍼포먼스로 경력을 시작하여 단편 다큐와 극영화 작업을 병행해 왔다. 대개의 미술 학제의 배경을 가진 연출가들의 작업이 서사보다는 이미지 자체의 물질적 성격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편견과 달리, <욕창>에서 이미지는 한 치도 서사에서 돌출하여 자신의 독자적 도드라짐을 퍼포먼스하지 않는다. 정공법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미지는 서사가 요구하는 만큼만의, 서사와의 조응 속에서 그 움직임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심혜정은 장편 데뷔작을 통해 비 내러티브 작업뿐만 아니라 내러티브 작업에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에 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 결핍이 필요하다 - 쇼펜하우어 SF의 변곡점 SF(Science Fiction) 영화가 ‘공상 과학 영화’로 번역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에스에프’라고 불리는 것 같다. 공상(空想)과 과학은 다른가? ‘공상 과학’의 어감은 과학이 첨예한 정치경제학의 산물임을 은폐하는 듯하다. 마치 ‘괴짜의 상상력’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다. 상상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자의 위치를 이동시킬 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주는 자원. 이것이 상상력이다. ‘공상 과학’은 사회적 위치성(포지션)을 공상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한다. 수많은 SF 영화가 있지만 나는 우주(외계인)와 지구를 대립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불편하다(솔직히 말해, ‘분개한다’). 대개의 SF에서 주인공은 미국인이다. 미국인은 외계인과 친하든, 그들을 연구하든, 전쟁을 수행하든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대표한다. 실제로 미국은 지구를 ‘지킨다(지배한다)’. 그들은 세계의 경찰임을 자칭하면서 대외적 군사 개입을 “경찰 활동(police action)”이라며, ‘국내 치안’으로 생각한다. 한국전쟁 참전도 공식적으로 “경찰 활동”(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전 세계가 미국의 땅이라는 발상이다. 자기만 ‘지구의 1등 시민’, ‘제1의 성’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9․11 이전까지 국방부가 없었다. 미국 국방부(DOD, Department of Defense)는 우리나라처럼 자국 방위를 위한 부처가 아니라 전 지구를 대상으로 업무를 보는 곳이다. 9․11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기 땅이 침략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진짜 국방부’에 해당하는 국토방위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를 신설했다. 디스트릭트 9(District 9) 외계인과 싸우는 지구의 대표가 ‘파키스탄인’이거나 ‘에콰도르인’인 영화가 있었던가. 닐 블롬캠프 감독의 < 디스트릭트 9(District 9 )>(2009년) 가 걸작인 이유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섹스나 감염 문제를 다룰 때 실험 대상은 백인 남성이 아니라 유색 인종이거나 여성임을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나오지 않는, 실종된 미국 우주인을 그린 < 그래비티(Gravity) >는 <디스트릭트 9>과 함께 SF의 역사의 한 챕터에 등장할 만하다. 더불어, <그래비티>는 우주 쓰레기 문제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이스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비록 중국이지만’)아시아 국가가 나온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우울증과 중력 내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첫 영화는 < 이 투 마마(Y Tu Mama Tambien, And Your Mother Too) >(2001)였다. 황홀했다. 나는 한동안 디에고 루나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나 친구들과 신나게 영화 감상을 나누지는 못했다(‘미남’ 배우에 대한 자기 검열이 있었다). 이후 두 배우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는 말할 것도 없다. 제작자로 참여한 < 비우티풀(Biutiful) >이나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an's labyrinth) > 모두 굉장한 세계였고 <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 <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Harry Potter and the prisoner of Azkaban) >에 대한 내 의견은 사족이리라.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2014년 제86회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탔다. 나는 아직 <로마>(2018년)를 보지 못했고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지만, <그래비티>(2013년)는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내게는 ‘내 인생의 영화’다. 하지만 두 번 볼 용기는 없다. 치유 과정의 고통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직면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영화를 ‘호러’로 분류하면, 미친 짓인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비티>는 물리학과 실존주의를 융합하고 그 두 세계를 모두 넘어서, 제3의 지식을 만들었다. 우울증에 관한 설명이 그것이다. 모든 질병이 그렇지만, 우울증은 묘사하기 매우 어려운 병이다.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보니,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을 마구 파괴하다 보니, 이제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물론 우울증은 고대부터 있었다). 대개의 질병은 ‘원인’은 다양하고, 증상은 비슷하다. 그래서 증상을 통해 병명을 진단할 수 있다. 우울증은 반대다. 원인은 ‘하나’인데, 증상은 다양하거나 극단적으로 반대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의사도, 환자도 진단이 어렵다. 불면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내내 자는 사람도 있다. 폭식증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병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기에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살아 있을 때 몸은 의지로 움직인다. 죽음이란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간 이후를 말한다. ‘몸’만 남는 것이다(영어의 ‘body’는 본래 시체라는 뜻이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의지-의식-의욕, 이 세 가지 상실이 혼재된 상태인 듯하다. 한마디로 무기력의 연속이다. 그래서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몇 년간 계속되어 욕창으로 사망하는 이도 있고, 우울한 상태에서 극한의 자신과의 투쟁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이도 있으며, 심지어 우울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이나 공부, 글쓰기에 몰두하여 생산력이 높은 ‘고기능 우울증 환자’도 있다(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마지막의 경우 오래가지는 못한다. 대개 육십 세를 전후하여 자살한다. 더는 그럴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모든 곳에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萬有引力, 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 중력(重力)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리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따르는 원심력이 더해져, 우리는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중력의 법칙에서 배제된 이들이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다. 우울증의 고통에 비하면, ‘우울(憂鬱)’이라는 표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다니며, 먹고 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은 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지표면에서 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우울증은 살기 싫은 병이기 때문에, 몸과 땅이 붙지 않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기겠는가. 중력이 버린 몸. 자살은 이 증상으로 인한 질병사일 뿐이다. 마흔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삶을 지속하고 있는 내 친구는 말한다. “난 그때 죽었는데, 왜 살아 있는 거야? 그때 죽었는데, 내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 알아? 매일 내 장례식에 다녀온 기분 알아?” 우울증 환자가 24시간 아픈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감정 상태에 ‘몰빵’되어 다른 인생을 상상하기 힘들다. 우울증에 걸린 그 순간 이후의 삶은 잉여,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시간, 비참하고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약으로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다). 인생이라는 배가 돌아다니기(움직임) 위해서는, 일단 정박(碇泊)할 곳이 있어야 한다. 정박할 곳이 없으면 이동하지도 못한다. 정박하지 않은 배는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모든 것으로부터 상처받는다. 배는 서서히 부서지고 부식된다. 살려는 의지와 죽음의 욕망(‘충동’이 아니다, 죽을 만큼 아픈 것이다) 사이에서의 투병 생활은 매 순간 ‘선택’의 압력에 시달리는 상태다. 이때, 선택은 자유 의지로 하는 선택이 아니다. 기분이 날뛰며(업앤 다운이 반복) 기진맥진해지는 기분 장애(mood disorder)의 상황이다. 내가 아는 우울증 환자는 이 병으로 인해 그녀가 평생 노력해서 얻은 ‘좋은 직장’을 잃었다. ‘성취’가 끝나자마자 질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행복한 기억이 없다. 가장 괴로운 시간은 아침이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날지, 한국을 떠날지, 지구를 떠날지. 지구를 떠난다면 갈 곳은, 단 한 곳 우주이다. 그녀는 매번 ‘선택’에 대해 조언을 구하지만, “조언해 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한없이 응대할 사람은 없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중력이 없어서 생존 가능한 공간, 우주 우주는 무중력 상태이므로 지구와 달리 우울증 환자가 살 수 있는 공간이다. 우주가 배경인 <그래비티>에서 우울증 환자는 지구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중력이지만, 첨단 장비가 끊어진 중력과 자신을 연결해주니 발버둥 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하다. 지구에서 이 연결은 사람과 사랑이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끈이다. 우주의 무중력은 지구의 중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은 같지 않다.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하는데, 나누지 않아서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슬프고 기쁘고 우울하고 들떠 있다. 다양한 기분 상대를 산다. 그리고 누구나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약간 우울한 사회, 고뇌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反사회적 인간의 조증(躁症)이 판치는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대로, 안정된 삶은 어느 정도의 ‘마음의 짐’을 진 채 사는 것이다. 우울, 걱정, 슬픔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이다. 이런 우울한 상태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이와 크게 다르다. 정신 질환(mental disease)과 신체적 질병(physical disease)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사회는 유독 ‘정신병자’와 ‘암’ 환자를 다르게 생각한다. 둘 다, 고통받는 몸(body in pain)인데도 말이다. 정신 질환은 가볍게 취급되거나(“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반대로 통제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정신병자가 탈출했다!”)이라는 식의 극단적 인식을 오간다. <그래비티>에서 산드라 블록은 아이를 잃은 전문직 여성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누가 우울하지 않겠는가. 비통하지 않겠는가.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애도의 시간은 지극히 정상이다. 반면,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의학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으로 진전될 수 있다. (일견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이 영화에서 그녀가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구에서는 땅을 디딜 수 없었던 그녀가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우주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여행(journey)하는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우리가 우울할 때 혹은 우울증을 앓는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두 경우 모두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집에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일이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이동과 운동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견해가 다른데,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우주, 가장 먼 이동이다. ‘우울과 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만한 통찰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시리아나(Syriana) 이 영화에서 어떻게 조지 클루니를 빼놓을 수 있을까. < 시리아나(Syriana) >, < 마이클 클레이튼(Michael Clayton) >, < 인 디 에어(Up in the air) >를 보길 권한다. 특히 <시리아나>를 강력히 추천한다. 이 영화들에서 그는 반미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이며, 인생의 바닥을 수십 번 치고도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매력적인 루저이며, 패배를 반복하고도 변화할 줄 아는 인간을 연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