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용문객잔
- 감독
- 차이밍량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이강생, 천샹치, 묘천, 천 시, 미타무라 키요노부
홍콩 시티대학교와 한국영상자료원 공동 주최해 2025년 5월 16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국제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의 기조연설과 2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 을 요약합니다. 컨퍼런스 개최 개요와 1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은 이전 글( 링크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조연설> 아시아 지역에서의 초국가적인 영화 협업 활동의 사례를 발견하고 그 맥락을 짚는다는 컨퍼런스의 목표에 맞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크리스 베리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의 김홍준 원장이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20세기 중후반의 역사적 사건들이 당대 아시아 영화의 제작과 배급, 수용에 미친 영향을 거시적인 차원의 담론과 미시적인 차원의 자전적 경험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어권의 영화 연결 역사 속 우연성과 불가해성: 최국인, 신장, 그리고 <용의 해> (킹스 칼리지 런던 영화학과 교수 크리스 베리) 크리스 베리(Chris Berry) 교수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주 활동 무대였던 영화인 최국인과 그가 공동 연출한 <용의 해>(아사날리 아시모프, 최국인, 1981)를 중심으로,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어권의 연결이 얼마나 우연적이면서도 불가해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두 문화권의 영화적 교류가 이외 지역의 개입을 통해 더욱 확장된 프레임으로 논의될 가능성을 보였다. 아시아 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활동한 “마이너 디아스포라”로 규정되기도 하는 최국인은, 1926년 조선에서 태어나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하고, 6.25 전쟁 이후 북한에 체류하다가 1950년대 초반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브기끄(VGIK)에 다니며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을 정립했다.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카자흐필름스튜디오(Kazah Film Studio)를 마지막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다. 다큐멘터리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김소영, 2017)을 통해 최국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크리스 베리는, 최국인을 ‘냉전’ 개념의 복합성을 깨닫게 해준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지도자로 신격화했던 스탈린의 행태를 비판하며 스탈린 체제로부터 이탈해야 함을 주장한 흐루쇼프의 연설이 있은 후, 당시 소련에서 브지끄의 학생이었던 최국인과 그의 동창들은 이를 모방해 북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졸업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신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해 소련에 잔류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은 이를 허가한다. 흔히 미·소 간 대립을 중심으로만 이해되는 냉전의 이분법적 의미는 대개 서구 사회에 의해 구성되었고, 이외 문화권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서구적 의미 바깥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집단 내부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굴절이 발생하는지 를 알게 해준 일화였다. 게다가 동아시아가 ‘현대’ 사회로 돌입하며 받아들이게 된 이념은 상당 부분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동아시아 각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는데, 크리스 베리는 이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영화를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 이 최국인과 같은 영화인에게서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패권국이 시시각각 대립하며 파장을 낳는 동시대 사회 속 불안정한 일상과 일면 유사하기도 하다.) 관련 활동은 연설의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아시아 곳곳의 영화인들에 의해 ‘우연적’으로 발생했다. <용의 해(Year of the Dragon)> 포스터 / 사진: IMDb 그가 1981년 중 연출에 참여한 <용의 해>는 신장 지구와 위구르족에 대한 청나라의 폭력적인 정복을 다룬다. 작품의 제작과 개봉에 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의 영화 제작을 허가했고, 왜 최국인을 공동 연출자로 임명했을까? 작품 자체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맥락을 먼저 살펴보자면, 작품은 20세기 중·후반 지속됐던 중·소 분열(Sino-Soviet Split)을 배경으로 기획됐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흐루쇼프를 필두로 탈스타린 기조에 접어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1964년에는 두 국가 간 국경이 과거 불평등 조약에 의해 확정됐다며 중국 측에서 소련을 대상으로 국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중국 서부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신장 지구가 포함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신장 지구 내 위구르족의 투쟁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전개됐다는 입장으로 위구르족을 지지하며, 과거 청나라와 당시의 중국이 견지한 무리한 영토 확장 욕구를 비판하곤 했다. 더불어, 민족성(ethnicity)에 대한 두 국가의 인식 차이도 작품에 드러난다.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연방에 속한 개별 국가들의 자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은 각기 다른 민족이 통합되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함을 주장해왔는데, 크리스 베리는 극중 청나라의 장군과 위구르족의 일원이 위구르족의 중국 융화 필요성, 그리고 민족의 자기 결정권 존속을 두고 논쟁하는 장면이 이러한 인식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짚었다. 과거에 위구르족을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작품이 제작됐던 당시에도 중국은 소련에 대해 ‘하나의 중국’ 기조를 강요한다는 소련의 비판적 입장 이 내포됐다는 분석이다. 연설 중 재생된 <용의 해> 본편 영상 일부 한편, 최국인 개인의 이념이 작품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재할 뿐더러, 그가 활동하던 시기 소련 영화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연결고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당시 소련의 영화 제작은 보통 개별 감독에게 국가가 작품을 배당함으로써 진행됐기에 배당을 받지 못한 감독들의 수입은 비교적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국인이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동 연출 제의를 수락했는지, 그 이면에 개인의 이념적 지지 등이 존재했는지는 연설 제목처럼 여전히 불가해(unknowable)하다. 크리스 베리가 작품과 관련해 지적한 우연적이고 불가해한 또 다른 부분은 작품이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제작됐고 1982년 제15회 소련 탈린영화제 수상까지 경험했음에도 오늘날 본편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화질의 유튜브 영상에는 작품 배급이 갑작스레 중단된 데 대해 여러 이용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원인으로 추정해볼만한 상황을 역사학자 피터 롤버그(Peter Rollberg)의 설명을 참고해 제안했다. 본 작품이 소련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알레고리 로, 즉 중국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인식될 여지가 있어 소련 차원에서 배급 중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영화학적 개념으로 그는 이스턴 장르를 언급한다. 서구 문화권에서 비롯된 웨스턴 장르는 미국 서부 지역을 정복한 유럽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를 모델로 발전한 이스턴 장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소련의 정복을 다룬다. 원주민과 카우보이의 구도가 바스마치(소련에 저항한 중앙아시아 세력)와 볼셰비키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막이나 스텝 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석양을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인물들, 그들의 총격전 등을 보면 자연스레 웨스턴 장르가 연상된다. 극중 몇몇 장면을 컨퍼런스 현장에서 직접 재생한 그는, 중·소 분리와 소련·중앙아시아 간 대립을 동시에 은유할 가능성을 통해 냉전 국면에서 아시아의 영화사적 기록을 되짚을 때 감지되는 우연성과 불가해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황홀한 기억: 홍콩영화와의 조우, 196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 김홍준 원장은 삶의 궤적을 따라 홍콩영화와 맺어온 관계와 그로부터 받았던 인상, 영감, 깨달음을 개인적 일화들을 바탕으로 공유했다. 그가 영화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재임하기까지 되새길 만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홍콩영화는, 동시대 아카이브가 지닌 고유의 임무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67년, 11살이 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때 그는 홍콩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유신정권에 돌입하기 전, 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다. 동시에 반공주의적 의식이 사회 전반에 공유됐는데, 흥미롭게도 007 시리즈가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리즈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주인공들은 '위험 세력'으로 그려진 이들을 소탕했기 때문이다. 이때 국내 군사 정부는 과거 식민 통치를 자행한 일본의 문화를 배격하던 와중이었기에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일본영화가 점했던 영역을, 한국에서만큼은 홍콩의 액션 및 시대극 영화들이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등장으로 < 황야의 무법자 >(세르지오 레오네, 1964) 등의 명작이 소개된 직후, <대취협>(호금전, 1966) 을 접했다. 중국어권에서 집필된 무협소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시절, 김홍준 원장 역시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대만의 유명 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 쓴 『군협지』를 먼저 접한 상태였으며, 그의 표현처럼 어린 시절 그에게 “무협의 피”는 이미 흐르고 있었다. <대취협>은 홍콩에서 1966년에, 한국에서는 이듬해인 1967년에 개봉했다. 당시 17살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본 무협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가 대만 출신 배우 정패패와 영화 속 쿵푸의 세계를 최초로 알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중국어권의 여러 무협영화 들이 국내에도 선을 보이면서 10대 관객들은 이들의 무협적 요소에 매료됨과 동시에 장르에 내재된 정서에 힘입어, 사춘기의 반항심이 거세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정패패, 데이비드 치앙, 적룡과 같은 배우나 당대 걸출한 연출자로 꼽혔던 장철이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종류의 무협영화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액션이 아닌 맨주먹을 이용한 싸움을 소재로 하기 시작했기에, 무협 장르의 본령을 져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이전만큼 홍콩영화에 애정을 갖지 못했다. 이소룡과 성룡이 등장한 이후 20년간 홍콩영화를 그렇게 잠시 잊고 지내다가, 그가 2001년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이끌게 되면서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국내 최초로 호금전 회고전을 기획해 < 협녀 >(1969), < 용문객잔 >(1967), < 산중전기 >(1979) 등의 작품을 상영한 것인데, 놀랍게도 30~50대 관객이 크게 몰렸다. 영화제 관객의 주 연령대인 2030 세대가 아니라 중년 관객층이 호응한 이례적인 사례였다. 2003년에는 복원 또는 재개봉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쇼브라더스 특별전을 개최했고, 영화제를 방문해 자신의 영화 인생 안내자로서의 호금전에 대해 설명하던 정패패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대취협> 중 정패패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대학 재학 중이던 1976년으로 돌아가보면, 김홍준 원장은 슈퍼 8mm 필름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제작했고, 이중 < 서울 7000 >의 수상을 계기로 영화 제작 활동을 보다 진지한 취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학내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 합류해 영화와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하며 관련 활동을 지속했지만, 본래 인류학을 전공했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영상·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남는 시간에는 캠퍼스나 시네마테크 등을 찾아 계속 영화를 감상했으며, 교내 도서관의 간행물 섹션에서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 )》나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 American Cinematographer )》,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와 같은 영화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때 토니 레인즈가 작성한 한 기사에서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세대가 “ 홍콩 뉴웨이브 ”를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가며 영화도 자주 감상하던 어느 날, 미국의 한 극장에서 < 도마단 > (서극, 1986) 을 상영하는 더블 피쳐 프로그램이 열렸고, 영화잡지 외에는 관련 정보를 살펴볼 기회가 드물었기에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관람했지만 홍콩 출신 여자 배우 3인의 우정이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지는 순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물들이 곧 일어날 ‘혁명’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돋보였다. 1980년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외침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기에, 해당 장면 속 대사와 분위기가 암시하는 ‘혁명’은 그로 하여금 단어에 내포된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도록 했다. 작품을 연출한 홍콩 출신의 영화인 서극은 감독이자 제작자, 배우로서 여러 역작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그가 연출 또는 제작한 < 영웅본색 2 >(오우삼, 1987), < 황비홍 >(1991), < 신용문객잔 >(1992) 이 흥행했다. 공교롭게도 김홍준 원장의 연설이 있기 3주 정도 전에, 서극은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좌 ) <도마단> 중 주인공 3인 / ( 우 ) 혁명 후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인물들 / 사진: IMDb 그리고 몇 년 후, 김홍준 원장은 국내 영화잡지 《로드쇼》에서, 한 작품의 특정 장면을 영화 이론이나 영화사적 개념으로 해설하는 “도시에” 섹션 연재를 맡는다. 섹션 내 첫 원고의 주제로는 대중적 관심도에 비해 주류 평론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홍콩영화를 선택했다. 원고 작성 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고충은 있었지만,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1990년대 홍콩영화를 진지하게 비평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서 의미를 찾았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본 잡지에 그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이 원고들은 이후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그가 홍콩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워가도록 한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왕가위 감독의 < 열혈남아 >(왕가위, 1989)다. 국내에 수입된 당시 배포됐던 포스터와 한국어 제목이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 것과는 정반대로. 작품은 완성도 높은 예술영화에 가까웠다. 결투 중심의 홍콩영화로부터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적 동요와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혀 홍콩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는 눈에 띄는 강렬한 몇 장면을 연설 중 공유했으며, 그중 하나는 포장마차에서의 액션 신이다. 얼핏 보면 인공 혈흔과 같은 특수효과가 매우 어색해보이지만, 액션을 비롯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기술이 무척 유려하게 적용됐다는 점이 놀랍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만들어낸 명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홍준 원장이 본래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홍콩영화 관련 영상자료들도 다수이지만, 그는 원내수집 담당 부서에서 국내 기증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수집을 진행한 덕에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 1,000여 점에 달하는 홍콩영화 DVD 또는 블루레이가 소장돼 있다고 전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기억의 과정으로서, 작품을 재발견하고 수집한 후 디지털 복원해, 대중에게 그 가치를 전파하면서 작품 자체가 다시 상상(re-imagine)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기도 했다. 연설을 마무리하며 그가 재생한 <열혈남아> 속 두 배우의 얼굴처럼, 과거의 한 순간에 멈춰 있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해 계속해서 재발견될 영화 속의 무언가를, 필름 아카이브로서 꾸준히 찾아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패널 3> 장르, 리메이크, 그리고 조우 특정 장르 속에서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계가 각자의 스타일과 인력을 교환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이면의 지정학적·산업적 영향을 분석했으며, 홍콩대학교 김소혜 교수가 발표자들을 소개했다. 중국 멜로 TV 드라마 속 한국 남성 스타와 한류 남성성의 현지화 (영국 카디프대학교 현대언어학부(중국학) 조교수 일레인 정) (당시 해외 체류 중이었음에 따라 비대면 발표 진행) 일레인 정(Elaine Chung)은 중국 멜로영화나 TV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국 남성 배우들의 배역을 통해, 중국어권이 ‘한국의 남성성(Korean masculinity)’을 현지화하게 된 배경과 사례를 소개했다. 특히 상당수의 한류스타가 중국어권 콘텐츠 산업에 진출한 시기, 즉 그들의 인기가 중국어권에서 부상한 2000년부터 사드무기체계(THAAD) 배치로 인해 양국 교역이 대폭 축소된 2016년까지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특성으로부터 중국어권 사회가 도출한 ‘한국의 남성성’과 이에 대한 인식이 내러티브에 어떻게 반영되어있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로맨스와 남성성은 한국 드라마는 물론 아시아에서 흥행한 한류 콘텐츠 전반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다. 정선의 한류 연구(“Pan-East Asian Soft Masculity”, 2001)에서는 두 요소의 결합을 통한 남성 한류스타들의 강력한 팬덤과 한국 멜로 TV 시리즈 흥행이 2000년대 초반 동아시아 한류 열풍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한다. 일레인 역시 한류 콘텐츠 속 한국인 남성 주인공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 부드러운 남성성(Soft masculinity) ’을 언급했다.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 차분한 말투,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종종 재벌로 등장하며,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상대역 여성과 함께 신데렐라 내러티브를 완성시킨다(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멜로 TV 드라마의 전형이다). 그러나 일레인은, 한류 콘텐츠를 통해 이상화된 부드러운 남성성이 중국 TV 시리즈 속 한국인 남성 배우를 거치면서, 중국어권 대중에게는 다르게 인식될 여지가 있다며 TV 시리즈 세 편을 예로 들었다.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 한국인 남성 주인공의 성격이 또 다른 중국인 남성 배우와 비교 또는 대조되며 내심 부정적으로 평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령공우(White Collar Apartment)>(2002)의 안재욱, <100번째 신부(The 100th Bride>(2004)의 지진희, <다이아몬드 러버(Diamond Lover)>(2015)의 정지훈 모두 여성 주인공과 연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관계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다. 반면 그들과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 중국인 남성 배우는, 실용적이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마침내 여성 주인공과 연인이 된다. 혹은 한국인 남성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자수성가했으며 여성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어른을 표방하면서 더욱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남성성’을 구현한다. <다이아몬드 러버> 주요 인물 / 사진: TV Time 예시가 된 세 작품의 자세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시리즈 흥행을 위해 남성 한류스타를 캐스팅하고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면서도 결말은 중국인 남성에게 우호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어권 콘텐츠 제작자의 관점에서 강력한 팬덤을 동원한 한류스타의 이미지를 문화적 자본으로 활용 해 상업적 성공을 꾀하면서도, 인물 구도와 내러티브를 중국어권 문화의 맥락에서 지역화한 결과 라고 일레인은 분석한다. 경제 발전 이후 중국사회에서 단정하고 신사적인 외양으로 대표되는 소위 “화이트 칼라 남성성(White-collar masculinity)”이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레인에 따르면, 중국어권에 아직 널리 공유되어있는 통념상 가장 바람직한 남성 이미지는 ‘부단히 노력한 후 사회적 성공을 거둬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에 가깝다. 따라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부유한 집안에서 편안히 자랐지만 가정을 이끄는 독립적 주체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한) 한국인 남성 배우의 역할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로 지각되어 내러티브에서 소외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레인은 추측했다. 중국어권 콘텐츠 흥행 수단으로 한류의 대중적 인기를 활용함과 동시에, 인기의 핵심이 되는 남성 이미지는 지역화해서 내러티브에 반영함으로써 한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한·중 영화 협력의 산업적·정책적 측면: <제3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본 교토대학 강사 김수현(현 영국 퀸즈대학교 벨파스트 조교수) 김수현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과 중국어권 간 콘텐츠 합작이 시도된 역사를 산업과 정치의 맥락에서 분석했다. 특히 한·중 합작 영화에서 작가로서의 권리와 투자자로서의 권리가 각 스태프에 의해 복합적으로 행사되는 현상 을, 동아시아의 정치와 산업에 관한 담론에 기반해 설명했다. 연구 방법론 중 하나로 참여관찰법을 도입해 합작 영화 < 제3의 사랑 >(이재한, 2014) 제작 현장에서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활동한 경험을 녹여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20세기는 방송(Broadcasting)의 시대”라며 방송이라는 동시다발적 송신의 매체가 대중문화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미셀 힐름스(Michele Hilmes)의 주장을 ‘영화’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발표가 시작됐다. 영화도 기술을 바탕으로 초국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스타나 대중문화에 관한 담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화된 문화적 양식으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2000년대부터 영화를 매개로 초국가적인 협업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은 같은 시기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정부 당국이 한층 완화된 문화 정책을 펼치면서 ‘합작’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은 합작 파트너로서 중국어권 제작나와 배우와 협업해 < 비천무 >(김영준, 2000), < 무사 >(김성수, 2000), < 아나키스트 >(유영식, 2000)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김수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초국가적 합작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한 여러 주체들 간의 협상 결과에 따라, 작품의 ‘작가(author)’로서 창작의 방향을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가 주어진다. 한·중 합작 영화의 경우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정부 당국의 검열이 만연한 중국 영화산업의 특성까지 더해져, 작가로서의 권리가 제작 주체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배분되기가 쉽지 않다 . 그는 <제3의 사랑>의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서 각색과 제작, 배급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경험을 빌려, 이 과정에서 견제나 갈등, 때로 불공정한 상황까지 야기될 수 있음을 보였다. <제3의 사랑> 포스터, 스틸 / 사진: IMDb( 1 , 2 ) <제3의 사랑>은 동명의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인 이재한 감독(John. H. Lee)이 연출하고 중국 제작사 HS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다. 원작을 각색한 각본은 본래 이재한 감독이 집필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각본은 중국 측 프로듀서의 작업 결과물이었다. 특히 영화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하는 국영 기업 차이나 필름 그룹(China Film Group Corporation)의 당시 부대표는, 일부 장면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대면하려는 동기를 약화한다는 이유로 원작 소설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는 이메일을 감독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차이나 필름 그룹이 중국영화에 관한 대규모 투자 및 배급을 주도하는 국영 기업이라는 점에서, 각색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 인력은 합작 영화의 창작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개편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 제작사 측의 불공정한 대우는 직업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수현 교수가 인터뷰한 한국 출신 조감독의 경우, 현장 참여를 위해 중국에 체류하던 중 비자가 만료되었음에도 중국 제작사는 이를 연장하는 데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해당 조감독은 촬영 도중 출국해야 했으며, 중국 측 제작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중국 재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제작사는 촬영 종료일까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름을 작품 크레딧에서 제외하고 만다. 이렇게 중국에서 일시적으로 근무한 한국 출신 스태프들은 체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비자를 발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작 현장에 기여한 바와 관계없이 스태프로서의 지위까지 위협받는 불안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배급 지역마저도 중국 측 배급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흥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으로부터 발생할 잠재적 수요는 무시된 채 작품은 중국 내에서 배급되는 데 그쳤다. 또 다른 한중 합작 영화 < 평안도 >(장윤현, 2014)는 출연한 배우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띤다는 등의 이유로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됐고, 중국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외 상영까지도 무산되며 2016년까지 개봉을 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몇몇 사례를 종합했을 때, 한·중 합작은 중국이 상대 국가와 맺고 있는 여러 종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그에 따라 합작 결과물의 중국 시장 진출 향방이 정해지는 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합작’이라는 외형을 지녔지만 제작과 배급 전반이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되는 한계 가 드러나기도 했고, 상대국 제작진이 체감하는 지정학적 불안정성 이 그들의 제작 참여 경험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수현 교수는 이렇게 영화산업의 논리와 제작 방식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상황에서, 국제 합작이라는 작업에는 통상 모종의 긴장 관계가 형성됨을 언급했다. 그리고 ‘시장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본래 특성상 합작 영화 제작 시 감독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여지가 있으며, 위에 언급한 국가 간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역학 관계에 따라 창작과 배급을 주도할 권리가 주어지는 현상도 소개했다. 국제 합작은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간 타협과 조율, 그리고 힘겨루기의 장이 되며, 합작을 둘러싼 권리는 예술적 아이디어나 행위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가운데 주장 된다. 다만 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합작 경향은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합작에서는 각본이나 캐스팅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며 작품의 ‘창작’을 함께 하려는 기조가 강했다(단, 일본의 경우 < 박하사탕 >에서처럼 제작 투자 위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시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동아시아 관객 모두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주제(< 적벽대전 >과 < 묵공 >에서와 같이 대개 역사적 사건)를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주로 제작됐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한중 합작이 주로 이뤄졌고, 중국을 찾는 한국인 제작진들의 규모도 증가했으며, 후반 작업 단계까지도 합작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근 2020년대에는 분위기가 달라져, 앞서 언급한 캐스팅, 각본 집필 등의 창작 과정을 함께 하지 않고, 장소 섭외와 같은 프로덕션 서비스만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합작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김수현 원구원은 한·중 합작 사례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는 부정적 현실을 전했다. 2016년, 사드무기체게(THAAD) 배치 문제로 한·중 간 지정학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면서 대부분의 합작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해당 분야에 투자되던 예산 역시 삭감되면서 2020년대까지도 한중 합작은 거의 성사되지 않고 있고, 최근 동아시아 내 합작은 주로 일본과 중국, 대만 간 진행된다. 액션! 대만 갱스터 영화의 부활과 한국 영화인·문화와의 연결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 조교수 팅 우 초) 팅 우 초(Ting Wu Cho) 교수는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해왔던 ‘대만 펄프 영화(pulp film)’라는 주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만 갱스터 영화가 한국영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2000년대 이후 부흥한 현상을 다뤘다. 이를 위해 1950~60년대 대만 고전영화를 비롯해 대만 내 영화산업의 발전, 지역문화, 그리고 지정학적 관계의 변화에 따른 영향까지 폭넓게 고려했다.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개념으로는 냥유연(Long-liu-lian) 을 제안했는데, 중국어 방언의 한 종류인 복건어로 표현된 ‘낭유연’은 목적 없이 방랑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행태를 말한다. 그는 제작 자본의 투자와 시장 구조, 장르적 요소의 측면에서 불안정하고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대만 갱스터 영화 의 특성이 이 개념과 유사하다고 봤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대만 갱스터 영화 중 다수가, 타국의 영화산업과의 합작을 통해 액션연기를 수입하고 자국 관객의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면서, 작품의 장르와 자본 모두 초국가적이고 혼종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팅 우 초는 대만 갱스터 영화를 시간 순으로 세 종류로 구분했다. ‘방랑자’의 전형을 타고난 인물에 대한 구원 서사 가 중심이 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첫 순서다. 대만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범죄 및 갱스터 영화의 관습이 이들에게서부터 처음으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냥유연을 체화한 방랑자로서의 인물과 지역의 청년문화, 그리고 유행가 삽입을 통한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연출이 눈에 띈다. 장르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홍콩의 액션 영화가 모두 엿보인다. 그리고 제작 자본은 불안정하게 투입된 데다 당시 검열의 강도는 높았기에, 이 시기에 발표된 대만 갱스터 영화들 대다수는 상업적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이 해제된 1990년대에는 대만 뉴웨이브 의 영향으로, < 비정성시 >(허우샤오셴, 1989),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 < 남국재견 >(허우샤오셴, 1996) 등 작가주의적 경향이 짙고 독특한 내러티브를 지닌 작품들이 갱스터 주제의 대만 펄프 영화 중 대다수를 이뤘다. 반면 세 번째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대 이후에는, 상업적 장르영화의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통해 갱스터 장르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 맹갑 >(유승택, 2010)과 같은 “ 대만 뉴 갱스터 필름 ”, 즉 1970~80년대 대만 펄프 영화의 특징에 청년들 간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상업성을 띠게 된 2000년대 이후 장르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전역에 세계화 트렌드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대만의 최신 가요와 인기 배우 등에 대한 국제적 인지도가 향상됐고, 타국 영화산업 인력과의 영화 공동 각색 및 합작 역시 활성화될 수 있었다. 대만 갱스터 영화의 지역적 전통과 세계적인 영화 트렌드가 맞물린 지점이다. <맹갑> 포스터 / 사진: IMDb < 하이자오 7번지 >(위덕성, 2008)라는 멜로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대만의 지역적 특성이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지녔음이 재발견되고, 대만 영화산업의 십년 간의 침체가 극복되는 기회가 마련됐다. 이윽고 2010년에 개봉한 <맹갑>은 실제 야외 거리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갱스터들을 묘사하는 등 초기(1970~80년대) 대만 갱스터 영화의 특징을 여럿 지니고 있다. 하지만 초국가적 협업 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초기의 형태와 차별화된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액션 연출 등의 주요 보직에 외국인 스태프를 많이 기용했다. 그리고 액션 자체도 정교하게 짜인 홍콩 스타일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 움직임이 돋보이도록 연출됐는데,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의 액션에서 영감을 받아 양길영 무술감독을 섭외한 후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전수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양길영 감독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품에는 1분 28초에 달하는 싱글 테이크 액션신이 삽입될 수 있었고, 이 장면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신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대 대만 액션 연출의 우수 사례로서 현재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맹갑>에서 양길영 감독이 참여한 사례를 기점으로 대만의 갱스터 영화의 액션 연출은 물론 각색, 투자 등 종합적 측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의 기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대만의 상업영화 제작 기반이 다시금 다져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례로, 한국영화 < 남자가 사랑할 때 >(한동욱, 2013)를 대만의 문화와 관객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해 흥행한 < 맨 인 러브 >(은진호, 2021)를 들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대만 출신 감독 은진호는 이전에 대만 밴드 “EggplantEgg”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역시 청년 갱스터 문화를 반영하는 서사가 전개되며 음악과 잘 어우러져 “방랑자(Wanderer)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대만의 관점에서 제작된 갱스터 영화로 리메이크하기 위해, 대만의 문화적 혼종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거나 일본문화도 일부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만의 인기 가요까지 삽입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성공적인 지역화 사례라는 평가를 받으며 본 작품으로 당해 대만 개봉작 중 최고 흥행 성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좌) 국내 원작 <남자가 사랑할 때> / (우) 대만 리메이크작 <맨 인 러브> (사진: ㈜사나이픽처스, IMDb ) 한편, <맹갑> 흥행 이후 해당 작품의 제작자는 대만의 소위 ‘지하세계’ 경험을 모티브로 또 다른 갱스터 영화 <가타오>를 제작했다. 이 작품 역시 인기를 얻자 제작자 장웨이인이 후속편을 제작하면서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다. 후속편 <가타오 2: 제왕의 부상>(2018)은 대만 뉴웨이브 작품에 자주 등장한 배우 겸 감독이자 과거 조폭집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던 옌정궈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다. 가오제나 콜린 쩌우와 같은 유명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홍의정 무술감독과도 협업했다. IP 활용 범위도 넓어져, 작품 관련 OTT 스트리밍과 주제가 발표,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하며 ‘가타오 유니버스’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 편인 <가타오: 최후의 방랑자>(2021)에서는 한국 투자사와 타이베이 영화 기금 모두로부터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다. <가타오 2: 제왕의 부상> 포스터 / 사진: IMDb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인들의 전문성과 산업 구조 도입에 힘입어 형성된 대만의 뉴 갱스터 장르 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정립하고 이를 대만이라는 지역에 특화 하면서 대만 영화산업에 내재됐던 야심을 실현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은 또 다른 종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The Pigs, the Snake and the Pigeon (2023)이라는 작품이 대만영화로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흥행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국가 간 협업을 통한 갱스터 장르의 색다른 변모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위 작품의 무술감독은 대만의 스턴트맨 출신이지만 <가타오> 시리즈에서 한국인 무술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후 무술감독으로 성장했다. 또한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비쇼시네마(Vieshow Cinema)의 대주주인 와닌국제비주얼엔터프라이즈(Wanin International Visual Enterprise)는 중국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알리바바픽처스(Alibaba Pictures)와 계약을 맺어, 작품의 IP를 범중국어권에 수출하려는 의도를 내비쳤고, 추후 일본과 한국, 말레이시아와의 합작 가능성도 열어 뒀으며,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맡을 한국 지사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아시아 국가 간의 영화 합작이 대만 영화계에도 생기를 불어넣을지, 혹은 대만의 갱스터 장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질지를 주의 깊고도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팅 우 초는 설명했다. 포스트 정동 혹은 새로운 사후세계: <마약전쟁>과 <독전>을 통해 본 홍콩 누아르의 공명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박은지) 박은지 연구원은 특정 시기에 한국을 찾아온 ‘ 홍콩영화 신드롬 ’의 특징을 바탕으로 < 마약전쟁 >(두기봉, 2012)과 이의 한국판 리메이크작 < 독전 >(이해영, 2018)을 비교하며, 한국영화 속 (포스트) 홍콩 누아르의 흔적 을 발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관객이 홍콩영화에 열렬히 반응한 일련의 현상을 일컫는 홍콩영화 신드롬은 특유의 감성과 에너지를 국내 영화계에 각인시켰으며, ‘문화적 기억’으로 회자될 만큼 영화문화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국내 영화인들의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여러 차례의 각색과 리메이크, 오마주가 나타나기도 했다. <독전>은 그러한 사례들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평단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놀랍게도 <마약전쟁>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이 작품 본연의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홍콩 반환 이후 제작된 영화들의 국내 수입량과 인지도가 크게 감소한 데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국내 수입된 홍콩영화 편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연간 50~80편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1997년부터 41편으로 급감했고, 2000년대에는 이내 한 자릿수까지 곤두박질치며 반환 이후 급속 냉각되고 있는 홍콩영화 시장의 현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드롬이 한창이던 시기, 한국영화는 홍콩영화 특유의 어둡고 강렬한 미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홍콩 누아르’의 등장에 열광했다.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에 이어, < 첩혈쌍웅 >(오우삼, 1989)과 < 천장지구 >(진목승, 1990), < 지존무상 >(왕정, 향화승, 1989) 등 범죄 및 갱스터 장르의 홍콩영화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홍콩 누아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홍콩 누아르’라는 용어는 1991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김홍준 원장이 처음 사용하며 이후 비평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콩 누아르에 대한 국내 팬들의 열정이 거세졌고, 이전까지 이상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졌던 할리우드와 유럽영화로부터 벗어난 영역으로서, 한국 영화문화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되기에 이르렀다. <첩혈쌍웅>, <지존무상> 중 (사진: MUBI , IMDb ) 박은지 연구원은 홍콩의 누아르와 액션을 한국영화만의 방식으로 수용 했다는 데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환이 일어난 1997년 즈음 홍콩에 스며든 우울함을, 민주화를 열망하던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 했다는 분석이다. 홍콩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서울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경험하는 한편,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불완전한 정착에서 비롯된 감각 역시 이상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충심과 형제애 등의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분위기로서의 “ 정동적 아노미(affective anomie) ”는 홍콩 누아르의 핵심적인 감수성으로 국내 관객에게 지각됐고, 파멸적이고 어두운, 울분의 폭발과 같은 키워드가 이 장르를 추동하는 감정으로 거론됐다. 박은지 연구원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영향으로 내면에 모종의 불안이 자리하게 된 국내 관객이, 선과 영웅주의 위주의 표면적 서사 이면에 있는 이러한 누아르적 감수성에 열광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잡지 《키노(KINO)》는 오우삼과 왕가위 등을 정전화하며 해당 장르를 작가주의적 관념과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 감독들은 홍콩 누아르의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본 장르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홍콩 원작들에 대한 눈에 띄는 리메이크 시도들 역시 있었지만, 아쉽게도 많은 작품이 무산되거나 흥행에 실패했다. 반환 이후 홍콩에서 직접 제작된 누아르 영화들 자체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는데, 홍콩 누아르의 중심 인물인 두기봉 감독이 2000년대 연출한 역작 Breaking News , Election , PTU 등마저도 국내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 홍콩 원작 <마약전쟁> / 사진: IMDb (© 2013 - Variance Films) (우) 국내 리메이크작 <독전> 중 / 사진: ㈜용필름 와중에 <독전>이 흥행에 성공하며 원작 <마약전쟁>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킨 점이 흥미롭다. 두 작품은 줄거리는 같지만 스타일과 톤,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를 통해 <마약전쟁>은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작품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 영화는 두기봉 감독이 연출한 첫 홍콩-중국 본토 합작 영화로, 홍콩 마약 카르텔의 브로커 티미(Timmy)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마약 경찰 장(Zhang)과 공조한다는 설정으로 언더커버 범죄 스릴러의 흔한 관습을 따르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티미의 배신이 가져온 범죄 조직의 붕괴로 초점을 옮겨가고, 경찰 조직이 참혹하게 파괴되며 마무리된다. 치밀하게 탈출을 계획하는 티미와 마약 카르텔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장은 각자의 목표를 향한 굳은 결심을 지닌 채 극명하게 대립한다. 반면, <독전>은 경찰 원호( 조진웅 )와 락( 류준열 ) 사이의 정서적 긴장을 강조하고, 두 인물 간 경쟁 관계를 점차 심화시킨다. 그리고 자기 존립과 배신을 원동력으로 움직여 윤리적 측면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던 <마약전쟁>의 티미와 달리, 락은 마약 조직 내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로서 경찰의 수사를 도우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인물로 상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인물 설정은 홍콩 누아르의 특징을 공유하는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 속죄를 통해 회복된 영웅적 행동 ’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원작 <마약전쟁>은 국가 간 합작으로 탄생한 동시대 홍콩 누아르에 그치지만, 리메이크작 <독전>에서는 남성 인물들이 차츰 동료애를 형성함과 더불어 서로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카르텔의 착취 구조를 배경으로 그에 대한 사회적 응징의 아이디어도 제시한다. 원호와 락은 마약 카르텔의 폭력에 어머니를 잃은 락의 사연, 그리고 그 카르텔에 대한 수사에 공조하려는 의지를 매개로 잠시나마 연대하고, 이로써 경찰과 범죄 조직원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후 경찰 원호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의 실행을 중심으로 ‘정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락은 무자비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익을 창출해온 브라이언의 신체를 훼손해 흔적을 남기며 사적 응징을 완수한다. 두 인물은 이윽고 서로를 총으로 겨눈 채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는데, 한때 감정적으로 결속했지만 극중 사건 이후 멀어진 둘 사이에 모호한 연대와 상호 환멸의 분위기가 감돈다. 박은지 연구원은 <독전>의 이와 같은 차별화된 서사와 감정들이, 홍콩영화 신드롬이 정착시킨 ‘농도 짙은 감정’의 범죄물을 한국 조폭영화의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 라고 설명한다. 창작자의 시네필적 면모와 장르의 혼종이 작용하면서, 홍콩 누아르와 한국형 범죄영화의 특징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전복하기도 하는 독창적인 리메이크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 토론 *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도로시 와이 심 라우(Dorothy Wai Sim Lau)가 패널 3 발표자 4인의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 아래와 같이 질문했으며, 발표자들이 답했다. Q. 김수현 교수에게 (질문1) 시대별로 한국과 중국이 처해있는 외교적 상황에 따라 합작 양상이 달라진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제3의 사랑> 제작 당시 한·중 간 정치·사회적 관계 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답변) <제3의 사랑>이 제직됐던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 정부는 영화산업에서의 합작에 호의적이었고 관련 절차가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본 작품의 감독과 촬영감독, 음악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 역시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발표 중 이야기했듯이 중국 제작진의 개입과 지정학적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충분한 창작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질문2)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에게서 나타난 작가주의적 특색과 달리, 블록버스터 < 유랑지구(The Wandering Earth) >와 같은 작품은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national authorship)과 국가적 브랜딩이 눈에 띈다고 발표 중에 말씀하셨다. 후자의 ‘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 ’이 무엇일지 보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답변) 물론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감독과 같은 이들은 한국의 봉준호 와 박찬욱 감독처럼,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오랜 기간 인정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이 속한 제5세대 이후에 등장한 주선율영화(1990년대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뤄진 후 사회주의와 애국주의 등의 중국사회 주류 이념을 교육 및 선전할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의 종류)와 같은 장르에서는 작가주의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비전이 관객 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주입돼 있다. 따라서 감독이나 스태프 개인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작가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국가 권력과 이념을 기반으로 ‘중국영화’라고 이름 짓는 행위 자체만이 의미를 갖게 된다 는 점에서 제5세대 감독들의 활동과는 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Q. 팅 우 초 교수에게 (질문) 중국과 홍콩에서 비롯된 액션 스타일과, <맹갑>에 도입된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차이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답변) 홍콩의 액션은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아, 각기 다른 그룹이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연출돼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이와 같은 홍콩식 액션을 받아들이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응용 했는데, 카메라 앵글에 맞춘 인위적 동작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가미 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Q. 박은지 연구원에게 (질문) 발표에서도 언급해주신 홍콩 누아르의 ‘정동’적 측면이 동아시아 국가의 리메이크작을 통해 표현 될 때 주로 어떤 특징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답변) 이번 발표를 위해 진행한 <독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저 정동적 모티프로부터 영향에 따라 범죄자와 경찰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설정 이 있다. 이는 남성들 간의 연대에 기반한, 매우 불안정하고 양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다른 하나는 ‘ 상호반영적 페르소나(mirroring persona) ’의 발견이다. 한국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두 남성 인물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패널 4> 한·홍 합작의 재해석 특정 영화인이나 작품의 사례를 인용해 한국과 홍콩 간 영화 합작이 일어난 역사를 돌아보고, 눈 여겨 볼 만한 몇 가지 대목을 자세히 살펴봤다.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새로운 시대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한 두 국가의 협력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으며, 패널 발표 전반은 홍콩 침례대 케니 응 교수가 이끌었다. 호금전의 한국 산악영화에 대한 재평가 (영화사가 · 독립 연구자 스테판 테오) 1970년대 한국영화는 홍콩과 대만과의 합작을 여러 번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Destination South Korea”와 같은 현상으로 일컬을 만큼 합작 영화의 주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스테판 테오(Stephen Teo)는 그중에서도 < 사문의 승객 >(1979)과 < 산중전기 >(1979)에 집중해, 한·홍 합작의 로케이션으로 한국의 산세가 선택된 맥락과 함께 각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그는 한국의 산속에 자리한 전통적 양식의 건축물과 사찰, 주변의 절경이 두 작품의 핵심적인 미적 요소로 기능했고, 배경이 되는 전근대 중국(historical china)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줬다고 말했다. 모든 장면이 인위적인 세트나 스튜디오를 이용하지 않고 실존하는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촬영된 점도 특별하다. 스테판 테오는 ‘문화적 냉전(cultural cold war)’이 이어지던 1970년대 중·후반 중국어권과 한국의 영화 합작이 선호되는 환경이 마련됐고, 두 편의 작품 역시 그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로부터 벗어난 직후였기에 정치와 사회 전반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무협을 비롯해 귀신, 종교, 미신 등(신이나 요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중국영화의 한 장르로 ‘신괴’로도 일컬어진다)이 개입한 장르나 서사의 유통도 금지돼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영화 촬영지로서, 감독 호금전이 의도한 장르를 시도할 ‘자유’를 선사 했다고 봤다. 한국과 홍콩, 대만이 영화 제작 측면에서 ‘ 자유에 기반한 네트워크(freedom nexus) ’를 구축하며,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수용되기 어려운 작품들이 제작되는 환경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지정학적 상황도 변화했기에 위와 같은 맥락은 작품의 가치를 뒷받침하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그는 한국이 ‘문화적 중국’으로 재현됐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합작의 의의와 효과를 설명했다. 유교학자 뚜웨이밍(Tu Wei-ming)이 제안한 개념인 ‘문화적 중국’은 중국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구성된 국제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을 포함해 전 세계의 중국어권 디아스포라 지역도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홍콩은 ‘문화적 중국’의 기조로 기획된 영화를 한국과 합작했고, 호금전의 위 두 작품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문화적 중국’을 재현하는 데 효과적임이 입증됐다고 그는 평가했다. 호금전이 한 인터뷰에서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몇몇 자연 경관으로부터 중국과의 문화적 유사성을 발견한 경험을 계기로 두 작품을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두 국가는 유교와 불교와 연관된 의식이나 생활 양식을 오랜 시간 공유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홍콩의 영화 제작진들 역시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 문화적 냉전 시기, ‘문화적 중국’을 재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한국을 택해 합작을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산중전기> 중 / 사진: IMDb( 1 , 2 ) 한편, 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되어온 동양 철학의 개념이 작품 속 주제의식의 동력이 된 점도 눈에 띈다. 도가적 사상에서 비롯된 장자의 ‘소요유’는 『장자』 제1편에 등장하는 용어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사물과 세상에 구속 받지 않고 광막한 공간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자유이자 참된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호금전의 작품의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사문의 승객>과 <산중전기>에서도 인물들은 계속 걷는다. 단순히 땅 위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쫓아 뛰고, 몇몇 액션신은 공중에서 펼쳐지며 ‘하늘에서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스테판 테오는 소요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감각을 포착한 호금전이, 이를 인물의 다양한 움직임들(걷기, 뛰기, 공중에서 활동하기)로 작품 속에서 실현 하고 있다면서, 배경이 된 한국의 자연경관 역시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소요유’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두 작품은 그 개념의 특성에 따라 존재와 시간의 ‘실존’을 지지하게 된다. 한편 호금전은 일종의 방랑자로서, 당시 중국사회의 제한적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이라는 대안적 공간에서 예술적 자유를 발휘해 창작한 작품으로 소요유 개념을 시각화했다고 덧붙였다. 무사, 스파이, 그리고 쿵푸 마스터: 정창화 감독과 초국가적 영화 제작자의 탄생 (홍콩 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학부 조교수 이상준) 이상준 교수는 그간 학술적으로 분석된 적이 드문 정창화 감독에 대한 예비적 수준의 연구로서 1960~70년대 한국과 홍콩에서 그가 지나온 연출 여정을 들여다봤다. 감독으로 데뷔한 1953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홍콩에서도 합작영화 제작의 주역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회고전을 계기로 그의 연출작이 지닌 영화사적 가치가 국내에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당시 회고전에서는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와 작업한 한·홍 합작영화 9편이 상영됐다. 여러 국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아시아 영화인들은 ‘내셔널 시네마’라는 프레임에 부합하지않는다는 이유로 과거 연구의 대상으로 쉽사리 선정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런 편협한 경향성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창화 감독이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지녔거나 초국가적 작업에 참여하는 감독과 촬영감독, 배우 등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창화 감독은 활동 초기부터 여러 장르에 걸쳐 왕성화게 활동했다. 1965년부터 3년간 멜로드라마, 청춘, 무협 등의 장르영화 15편(< 황혼의 검객 > 등)을 한국에서 연출했고, 1968년에 쇼브라더스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6.25 전쟁 이후로 중국어 문화권의 제작사 두 곳(쇼브라더스, 골든하베스트)과 공식적으로 협업하며 높은 흥행 수익을 올린 최초의 한국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물론 그가 쇼브라더스와 초반에 합작한 다섯 편은 제목과 감독의 이름을 사실과는 다르게 명시한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배우와 촬영감독, 무술감독과 같은 제작 인력이 그의 활동을 계기로 홍콩으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합작에 합류하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제작 파트너가 골든하베스트로 바뀐 뒤에는, 그는 제작사 산하에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별도의 전속 스튜디오를 설립해 한국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제작사들과도 활발히 합작하기도 했다. 다만 그가 홍콩에서 제작했지만 한국에서 공개한, 앞서 언급된 ‘위장 합작’ 작품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터라, 홍콩에서의 그의 활동이 학술적으로 면밀히 분석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낳고 말았다. 국내의 많은 영화사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탈국적(denationalized)’ 활동의 결과물 또는 한국영화사의 ‘비공식적 일화’ 정도로만 평가했다. 이는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 >(1972)이 ‘컬트적 고전(classic)’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역시 그를 ‘작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상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2008년에 홍콩의 영화 연구자 웡 아인 린(Won Ain-ling)과 대화하며 접한 설명을 인용했다. 웡 아인린에 따르면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영화’의 정체성 구성이 간절해진 상황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무협 장르의 영화에 한국과 일본 출신의 영화인들이 관계되어있다는 사실이 홍콩의 영화인들을 약간은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주자(Emigré)와 망명자(Exiled)와 같은 디아스포라 영화인들은 초국가적 영화사 형성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시네마’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활동이 망각돼서는 안된다고 이상준 교수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람, 문화적 움직임, 협업, 공간 등이 여러 국가에 걸쳐 조직될 수 있다는 ‘초국가적 관점’ 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창화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의 영화적 교류를 중개한 이로 상정된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고 정부 개입도 심각했던 당대 한국영화계에 쿵푸영화의 매력을 제시했고, 새로운 합작 파트너로서 동남아시아권의 인력을 소개하는 참신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상준 교수는 관련해 정창화 감독이 한국에서 홍콩으로 제작의 근거지를 옮기고 초반에 발생한, 쇼브라더스와의 합작 사례를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 망향 >(1958)을 통해 홍콩과의 합작을 처음으로 시도한 이후 < 조용한 이별 >(1967)과 < 비련 >(1967)을 제작했지만 홍콩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첩보 스릴러로 손꼽히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흥행 성적은 비교적 준수했다. 설립자 런런쇼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해 1968년, 쇼브라더스와 5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기준) 동시대적 설정을 바탕으로 ‘현대 액션 영화’를 구현할 줄 알았기에 자신이 섭외됐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이때까지 홍콩은 사극 기반의 무협 장르가 액션 영화의 중심이 되어 현대적 액션 연출 경험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쇼브라더스에서는 일본 출신 감독, 촬영감독, 작곡가, 안무가 등이 상당수 활동 중이었으며, 정창화 감독이 입성한 이후 성훈, 임지은, 남석훈 등의 한국 배우들의 합류도 앞두고 있었다. 당대 여느 제작사보다 국제적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던 업체라고 할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국제 교류 역량에 힘입어 정창화 감독이 해당 제작사 안에서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은 < 천면마녀 >(1969)로, 홍콩에서 007 시리즈가 유행하던 중 그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된 여성 주연의 액션 영화다. 두 명의 조감독과 배우 한 명(성훈)은 한국인으로, 세 명의 핵심 스태프는 일본인으로 기용하며 동아시아 출신의 인력들이 어우러졌다.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적정 수준의 상업적 이익을 달성하며 유럽 영화계에 진출한 최초의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그 사이 호금전의 <대취협>(1966)이 홍콩 박스 오피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아시아 전반에 무협 장르 붐을 일으키면서 쇼브라더스의 제작 기조도 무협 장르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정창화 감독 역시 시장의 수요를 의식해 한국에서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 등 ‘국내 무협영화’를 연출한 데 이어 쇼브라더스에서도 중국어권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사극 무협 기반의 작품들을 연출했다. 그는 쇼브라더스의 무협 액션 스타일에 반일 감수성을 결합하고, 미국의 웨스턴 장르도 일부 차용했으며, < 강호여협 >(1970)과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아랑곡의 혈투>가 긴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연출된 전투 장면들로 볼 때 1960년대 만주리안 웨스턴 장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천면마녀>, <아랑곡의 혈투>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다만 이상준 교수에 따르면, 정창화 감독은 무협 장르의 붐에 다소 늦게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쇼브라더스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무협 장르 연출을 시도했던 1970년대 초반은 쇼브라더스의 무협 제작 열기가 식고 홍콩영화가 ‘쿵푸’라는 물결을 마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노동 계급의 이야기, 그리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손 쿵푸 액션은 홍콩영화의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자리매김했고,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라는 제작사의 설립 및 운영의 주된 목표가 됐다. 정창화 감독은 이 트렌드를 재빠르게 수용해 1972년에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을 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쿵푸영화였지만 한국에서 제작했던 전작들과 유사하게 반일 감정을 모티프로 한 서사가 중심이 됐다. 다만 작품 개봉 직후에는 홍콩 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듯 보였고, 쇼브라더스의 새로운 인력과의 의견 불일치 등의 문제도 겹쳐 정창화 감독은 같은 해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직한다. 하지만 1973년 작품은 미국 박스 오피스 흥행 1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970년대 초반 홍콩영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골든하베스트는 할리우드와 같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구조를 추구하며 유연한 제작 체계역시 갖춘 기업이었다. 정창화 감독은 이곳에서 < 흑야괴객 >(1973), < 흑무사 >(1974), < 황비 >(1974), < 심판자 >(1976)를 연출했고, 다양한 장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 골든하베스트의 방침에 따라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작품 < 충열도(파계) >(1977)가 개봉하자, 그는 갑작스럽게 홍콩을 떠났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하신 만큼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기여해줬으면 한다”라는 부탁을 문화공보부로부터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즈음 국내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전두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어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 귀국 후 정창화 감독은 스스로 제작사 화풍흥업을 설립해 1980년대 중에는 국내에서 제작자로 활동했고, 이를 계기로 영화 연출에서 은퇴한 그는 199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상준 교수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창화 감독 회고전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조영정을 인용하며, “액션영화의 선구자로서 이 장르를 한국에 소개하고 발전시킨 그가 다채로운 이력에도 불구하고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는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발표 당시 컨퍼런스에 함께 하며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 크리스 베리(Chriss Berry)의 말처럼,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 간의 연결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민족성(ethnicity)과 유사한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에 기반하지 않고, 개별적인 초국가적 프로젝트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된 학술적 논의가 이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하나의 냉전에서 또 다른 냉전으로: 한·홍 합작의 과거로 미래를 살펴보기 (홍콩필름아카이브 소속 영화평론가 샘 호) 샘 호(Sam Ho)는 이틀 간의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는 순서에 걸맞게, 한·홍 합작의 과거를 지나 그로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한 결과로서의 현재를 개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 간 영화 협업의 미래를 조망했다. 그는 동시대 사회가 유례 없는 새로운 질서 를 마주함과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냉전 상황 역시 목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컨퍼런스의 목표가 더욱 뜻깊은데, 두 국가로부터 비롯된 영화적 움직임들이 갈라지면서도 합쳐지는 대목들을 다루고 있어, 모순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오늘날의 역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0년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시아는 외부의 오랜 침략과 억압으로 인해 깊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으로부터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 현재와 미래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샘 호는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지정학적 권력의 중심으로 피할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그 권력의 중심지를 조정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려면 마주하게 되는 사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야 하는데, 개인이 모든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러 연구자가 관점을 공유하는 이번 컨퍼런스와 같은 자리가 자주 마련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가 한·홍 합작 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추천한 바는 이렇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을 기점으로 합작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그는 홍콩영화의 제1 황금기라고 보는데, 좌익(left-wing)과 우익(right-wing) 진영의 제작사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의 두 진영은 당시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샘 호에 따르면 오히려 긴밀히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냉전 체제에도 불구하고 다극적인(multi-polar) 영화산업을 구축해나갔다. 여러 작품에 걸쳐 홍콩과 합작한 한국인 정창화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홍콩국제영화제에서 2000년대 초반의 독창적인 한국영화들을 관람하고 완전히 매료된 그는 해당 작품들 이전의 한국영화사가 궁금했고,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지원으로 한국에 방문해 한국고전영화를 연구하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정창화 감독을 비롯해 홍콩과 합작한 여러 한국영화인들의 활동 역시 이러한 연구의 의지를 다지도록 해줬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동아시아의 문화와 가치를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양국이 공유하게 된 경험 이고, 결과적으로 두 국가의 영화적 전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가 창작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여정을 홍콩영화사와 연결 지어 돌아봤다. 홍콩은 자국 내 영화산업도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영화 미학의 측면에서도 기여한 바가 큰 반면, 타국에 비해 필름아카이브를 상당히 늦게 설립했다(1990년대). 그래서 소장자료의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데, 그럼에도 아카이브로서 사업을 개척하고 학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샘 호는 그 비결이 영화 연구에 미치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수용하면서도 아카이브 고유의 임무에 충실한 연구를 병행 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 연구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서구 문화권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연구 주제는 여전히 “저명한 지면”, 즉 서구의 주도 아래 발행되는 지면을 통해 공개되기 어렵다. 샘 호는 이를 비판하기보다,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 불가피한 현실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필름아카이브의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영화학계의 여론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권의 가치관에 근접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필름아카이브만이 파고들고 매진할 수 있는 주제로 연구하는 이들을 지원 하기도 한다. 아시아 영화인 1인의 필모그래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주류 학계의 틈새를 메우는 이들의 유의미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샘 호는, 자신을 포함해 과거와 현재를 면밀하고 꾸준하게 연구하려는 의지를 지닌 아카이브의 일원들이 있기에, 홍콩영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 토론 * 패널 3과 4의 발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청중이 질문을 던지거나, 발표자들이 서로의 주제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을 문의하고 답변했다. Q. (청중) 이상준 교수에게 (질문) 정창화 감독은 홍콩에서 영화를 제작할 당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에 더욱 영향을 받았는지 , 혹은 홍콩 영화산업과 연출 방식에 동화된 상태였을지가 알고 싶다. (답변) 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이 작품을 통해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 쇼브라더스를 통해 홍콩에 진출했을 당시,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에 의해 섭외된 여러 외국인 감독 중 하나였다. 따라서 각본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작품 자체를 통제할 권한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출 방식(액션 동작과 인물 설정, 반일 감정에 관한 요소 등)만큼은 당대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골든하베스트 에서의 필모그래피는 달랐다. 이곳에서는 그가 창작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더욱 확대 됐고, 한국 출신 인력을 도입할 여건도 형성되어 쇼브라더스에 비해 훨씬 많은 ‘합작’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작업할 당시 연출한 작품들을 선호한다. 물론 작품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은 전혀 아니며,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말씀드렸다는 점 참고 부탁드린다. Q. 샘 호 평론가 (질문) 일레인 정이 발표한 ‘부드러운 남성성’은,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유래된 유교 사상에 입각해, 중국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로서의 태도 가 남성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유교적 남성상은 점차 변화를 겪어 ‘신체적 강인함’을 수련하려는 태도도 강조 된 바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학문 수양을 중심으로 한 전자의 ‘부드러운 남성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답변: 김수현 교수) 대부분의 각본을 남성이 집필하는 한국‘영화’ 의 경우,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한국‘드라마’ 작품들은(특히 멜로드라마 장르가) 여성 작가에 의해 주로 집필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그린 남성 인물의 이미지는 작가의 주관이 반영된, 이상적이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집합함으로써 탄생하기에, 한국드라마가 설정한 남성 이미지는 현실 사회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영상 콘텐츠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영화와 드라마에 각기 다른 양태로 형성되어있는 젠더 및 섹슈얼리티 구분 현상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무소주>(2024)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차이밍량은 2012년부터 <행자(行者)>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장소만 달려졌을 뿐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리캉성이 붉은색 가사를 입고 약간 고개를 숙인 다음 한 손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불가의 공(空)을 표시하고 다른 한 손은 내린 채 펼친 다음, 혹은 마찬가지로 원을 만들어서, 천천히 걷는다. 맥락과 배경,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설을 달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는 건 그게 전부이다. 차이밍량은 2013년 < 떠돌이 개 >를 찍은 다음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언젠가부터 점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극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희박해져 갔다. 그는 < 안녕, 용문객잔 >(2003)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모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자> 연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 300석 규모의 무대에서의 공연을 제안받았다.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불러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올릴 계획이었다. 세 명은 양구이메이, 루이징, 그리고 리캉성이었다. 리캉성에게는 일인삼역을 부탁했는데, 리캉성 본인과, 차이밍량의 아버지, 그리고 현장(玄奘)법사였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그때 중국에는 불교 경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길을 떠났다. 627년의 일이다. 둔황을 거쳐 천축국에서 불경을 얻은 다음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 여정을 명나라 시대에 신괴소설(神怪小說)로 쓴 오승은 작가의 『서유기』이다.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온갖 요괴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극. 하지만 무대에서 리캉성은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형으로 된 무대 끝 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이밍량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한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걸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옮기겠다. <행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모래>(2018)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하지만 무대에서 이미 한 것을 카메라 앞에서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밍량은 리캉성에게 붉은 가사(袈裟)를 입히고 길거리로 데려 나갔다. <무색>(2012)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행자>는 2012년 타이베이의 야시장(夜市場)에서 걸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해에 세 편의 <행자>를 더 찍었다. 처음에는 상영시간이 짧았지만,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행자> 연작인 <모래>(2018)에서 처음으로 1시간 상영시간을 넘어섰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대사도 없다. 리캉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붉은 가사를 입고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을 내린 채 맨발로 몹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멈춘 것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나가자 구체적인 문제와 만나야만 했다. 기후의 가혹한 조건. 환경이 요구하는 한계. 한여름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지다시피 한 말레이시아 쿠칭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었고(다섯 번째 <행자>인 <물 위 걷기>) 추운 한겨울 밤에도 도쿄의 길거리도 맨발로 걸었다(여섯 번째 <행자>인 <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 >). 그래서 차이밍량은 모든 테이크를 단 한 번만 찍었고, 리캉성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 걷지 않았다. <행자>는 정신적인 여정이지만 육체적인 기록이다. < 곳 >(2022), < 무소주 >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열 번째 <행자>인 < 무소주(無所住, Abiding Nowhere) >(2024)에서 리캉성은 미국 워싱턴 DC를 걷는다. 아홉 번째 <행자>인 <곳(何處, Where)>(2022)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농 홍앙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각자 한다. 부사(副詞)로서의 각자(各自). 서로 따로따로. 어떤 일? 리캉성은 쉬지 않고 걷고, 아농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면을 끓인 다음 먹는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전주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 <행자> 전작 회고전을 했고, 차이밍량은 전주에 방문했다. 이때 긴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언지무(言之無)―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이를 추구한다”, 《필로》 38호, 2024 May_June.) “<행자> 연작 일부분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은 개념들을 몰래 넣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관객들에게 내 생각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건 <행자> 연작을 찍을 때는 어떤 방법을 통해 표현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찍은 <곳> 속의 아농은 거미 요괴를 닮았습니다. 그가 리캉성, 그러니까 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요괴를 닮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거기까지만 비밀을 알려주었다. <무소주>에서 아농이 요괴인지 그렇다면 어떤 요괴인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무소주>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무소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이 저물어가는 물가를 리캉성이 걷는다. 그때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 위로 반사광이 피어오른다. 구태여 비유를 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건너서 극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때 노래가 흐른다. ‘了悟心性究竟之上師祈請文’. 문자 그대로 옮기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기도’이다. 이 노래가 들릴 때 리캉성은 마치 긴 여정을 마치는 것만 같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 열 번째 <행자>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추신 _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에게 열한 번째 <행자>를 제안했고, 차이밍량은 다음 <행자>를 전주에서 찍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행자> 연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지, 아니면 열한 번째 <행자>일지, 그도 아니면 번외편이 될지, 또는 에필로그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 (네 번째 이야기)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그걸 지젝은 외설적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 순간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등장인물 중의 누군가가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순간과 마주하는 장면은 영화사 속에 수 없이 등장한다. 아마 누군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를 떠 올릴지 모르겠다. 정반대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 나는 그냥 별다른 검색을 하지 않고도 이 자리에서 백편 이상의 제목을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영화 안의 영화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먼저 여기서 내가 다루려는 영화 안의 영화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안의 영화는 두 가지 영화가 있다. 하나는 버스터 키튼이나 지가 베르토프처럼 영화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화 안의 영화를 (말 그대로) 만들어내야 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영화 속의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이 영화를 보러가는 바람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이다. 이때 이 영화는 여기서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영화의 필요에 의해 그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금방 떠오르는 예. 우디 앨런의 < 카이로의 진홍빛 장미 >.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는 첫 번째 설명의 예가 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그저 무턱대고 다른 영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영화 안에 끼어드는 경우이다. 물론 오로지 다른 누군가의 영화를 보러 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차이밍량의 < 안녕, 용문객잔 >은 내내 호금전의 < 용문객잔 >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배회하면서 그 영화를 보다말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런 다음 이 사이에 수많은 변주가 있다. 영화가 영화 안으로 들어갈 때 즉각적으로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영화 안의 영화는 그 영화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한편으로 서로에게 의지하지만 동시에 모든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 안의 영화는 자기를 표명하는 대신 자기의 존재 방식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어떤 영화는 대화를 나누지만 어떤 영화는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 가장 이상한 경우는 독백을 하기 시작할 때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둘은 고스란히 겹쳐지지 않는다. 같은 말이지만 (반대의 방향에서 즉각적으로 저항하자면) 그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영화 각자의 고유한 존재의 권리 행사. 이때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오는 순간이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만큼 항상 아방가르드한 것은 아니며 대중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 영화에서 저 영화에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영화 안에 영화를 감금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반대로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올 때 영화의 환대란 순환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어떤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영화 안의 영화는 그 영화가 꾸는 꿈이 아니다. 차라리 영화 안의 영화는 영화의 안에 들어온 바깥이다. 영화 안의 영화는 가까스로 하나로 모아놓은 영화의 서로 다른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면서 영화 안의 모든 기호들을 분산시키려들 것이다. 그런 다음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경험에 대한 한계를 일깨우고 갑자기 그 바깥으로 나가려 들 것이다. 영화 안의 영화는 단지 +1이 아니다. 블랑쇼의 말처럼 바깥이란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든다. 이때 영화 안에서 영화를 잡아당길 때, 끌어들일 때, 감싸 안을 때, 잠시 한눈을 팔 때, 원컨 원치 않건 그 안으로 단지 다른 영화가 들어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역사가 끼어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단지 구조 안에서의 대화에 머물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로, 그런 다음 다시 저기서 여기로 이행할 때 그 과정 중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리듬이 공존한다는 것은 서로의 다른 존재가 역사 안에서 견뎌가는 자기의 근거를 내세우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근거의 지평. 근거의 각자의 전술. < 외아들 一人息子 > (오즈 야스지로, 1936) 나는 곧장 임권택 의 두 편의 < 장군의 아들 > 안에 머무는 두 편의 영화 안의 영화로 달려가기 전에 두 편의 경험을 먼저 말하고 싶다. (좀 수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다 말고 영화 안의 영화를 보게 된 적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 외아들 >을 보다 말고 갑자기 빌리 포르스트의 <미완성 교향악>을 보게 되었을 때 어떤 쇼크를 느꼈다. 이 영화는 오즈의 첫 번째 토키이다. 언제나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진행하던 영화가 35분 19초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와 아들은 제국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두 세 개의 텅 빈 방안 장면을 보여준 다음 보는 쪽은 아무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게도) 느닷없이 <미완성 교향악>의 한 장면이 마치 다음 쇼트처럼 이어진다. 물론 오즈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극장까지 가는 장면을 찍지 않았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들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빌리 포르스트가 1934년에 연출한 첫 번째 영화 <미완성 교향악>의 쇼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이어질 때 누구라도 멈칫 거기 서버릴 것이다. 마치 영화가 중단된 듯한 기분. 프란츠 슈벨트와 소프라노 가수 카롤린의 사랑을 담은 이 영화의 원제는 연가곡 ‘백조의 노래’ 중의 한곡인 ‘세레나네’의 첫 구절 “Leise flehen meine Lieder (나의 노래를 나지막이 노래하네)”이지만 일본에서 <미완성교향악>으로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크게 성공했고 비평가들로부터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오즈가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1936년에는 매년 써 오던 일기를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오즈는 슈벨트와 카롤린을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어머니와 아들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그런데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그만 고개를 떨군다. 아들은 약간 부끄럽지만 금방 그런 어머니를 미소를 머금으며 쳐다본다. 두 개의 영화는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오가기 시작한다. 오즈의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서 있지만 빌리 홀스트는 화면의 크기를 바꿔 가면서 두 연인을 보여주다가 밀밭 사이를 걸어가는 카롤린을 따라 수평으로 바람결처럼 쫓아간다. (horizontal_tracking)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체계, 다른 리듬, 다른 원칙, 다른 배우, 다른 국적, 단지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멀리 있다. 여기서는 어느 쪽도 어느 쪽에 안주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오즈는 <미완성 교향악>의 장면을 그대로 가져오긴 했지만 <외아들>의 진행 리듬에 맞추어 잘랐기 때문에(decoupage) 기괴하게도 원래 영화의 장면은 알겠는데 빌리 포르스트의 리듬을 가늠할 수가 없다. 뭐랄까, 여기엔 잘 설명하기 힘든 불화 속의 무효가 있다. 오즈는 <미완성 교향악>으로부터 아무 것도 이용하지 않는다. 두 영화 사이의 침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에서 분할의 관계는 일단 구조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립적이고, 더 적대적이며, 더 주관적이고, 더 분명하게 서로의 주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말하자면 여기서 (그것이 원래의 의도인지 아닌지를 주장하긴 어렵지만) 결국 쇼트가 연결된다는 것은 서로를 잡아당기면서(attraction) 다시 한 번 에이젠쉬테인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이젠쉬테인이 종종 인용한 윌리엄 브레이크의 말. “내가 체계를 세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Film en douze tableaux > (장 뤽 고다르, 1962) 두 번째 예. 물론 가장 잘 알려진 예는 고다르의 < 비브르 사 비 >이다. 12개의 장으로 나뉘어진 이 영화 세 번째 장 <아파트 관리인, 폴, 잔 다르크의 수난, 저널리스트>에서 안나는 극장에서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을 본다. 하지만 오즈처럼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insert_shot)이 먼저 나온다. 고다르는 그걸 약간 카메라를 비스듬히 누여서 한밤중에 극장에 매달려 있는 두 개의 네온사인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여기가 극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왼쪽에 매달린 사인인데 CINE만 보이고 MA는 꺼져있다. 이 극장이 별 인기없는 변두리 극장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아마도 그런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라면 지금 하는 영화는 철지난 영화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오른쪽 아래 비스듬히 < JEANNE D’ARC >라고 제목이 걸려있는 네온사인이다. 잘 알려진 잔 다르크에 관한 영화는 세 편인데 하나는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 >이고 다른 하나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으로 나온 (빅터 플레밍 연출의) < 잔 다르크 (Joan of Arc) >,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 잔 다르크 재판 (Le proces de Jeanne d’Arc) >이다. 그런 다음 한참 뒤에 자크 리베트는 <잔느 성처녀>라는 제목 아래 <전쟁터>와 <감옥>을 찍었다. (나는 여기서 구태여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셈에 넣지 않았다. 물론 몇 편의 잔 다르크 영화가 더 있다) 다만 브레송은 고다르가 <비브르 사 비>를 찍고 있을 때 그 영화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고다르(의 주인공들)은 보러갈 틈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구태여 한글 제목 옆에 원제를 병기한 것은 아래 비스듬히 보이는 제목 < JEANNE D’ARC >라는 네온사인은 아무래도 <비브르 사 비>를 위해서 제작한 것 같기 때문이다. 드레이어의 영화 앞에는 < La passion... >이 붙어있고 빅터 플레밍은 영어식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째 장을 시작하면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고 표기했지만 이것이 영화 제목이라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극장 간판이 보이고 난 다음 나나는 극장에 들어간다. 화면을 향해서 바라보는 관객을 오른쪽에서 수평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화면에서 무슨 영화를 상영중인지 알 수가 없다. 불이 꺼져있기 때문에 영화를 상영중이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 소리도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무슨 영화를 상영중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것이다. 뒤에 앉은 남자는 따분하게 바라보고 있고, 앞에 앉은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는다. 나나는 그들을 지나 더 뒤에 가서 앉는다. 고다르는 나나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그 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팔코네티의 커다란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잔혹연극으로 알려진) 앙토넹 아르토가 연기하는 사제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이 구형되었음을 알려주러 온 그 유명한 대목이다. 사제는 약간 비웃는 듯도 하고 또 그만큼 가련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 소식을 전한다. “사형이 결정되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묻는다. “무슨 형인가요?” “화형입니다” (물론 이 대사는 자막으로 진행된다) 그때 아무런 분장도 하지 않은 채 머리를 짧게 깎은 팔코네티가 연기하는 잔 다르크는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는 눈꺼풀을 참아가면서 극심한 두려움을 참아낸다. 그저 단지 이 얼굴을 클로즈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피로에 지친 피부. 자기도 모르게 감기는 것만 같은 눈. 생명이 거기서 증발하고 있다. 그때 그 얼굴은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만 같은 시선. 드레이어는 그 장면에서 기적에 가까운 쇼트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자기의 시선을 거두는 것만 같은 표정. 영화에서 불가능의 성립. 그때 고다르는 재빨리 이 클로즈업에 나나가 마치 넋을 잃어버린 것처럼 바라보는 클로즈업을 이어 붙인다. (reverse_shot) 물론 잔 다르크의 시선 없는 표정은 나나의 얼굴이 바라보는 시선과 (노엘 버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접합되지 않는다. 그때 이 접합의 핵심은 나나를 (앞의 쇼트인) 잔 다르크에서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나를 (다음 쇼트인) 사제가 바라보는 것처럼 연결시키고 있다. 시네마데크에서 머물러 살다시피 한 고다르는 이 쇼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고다르는 나나가 영화(속의 잔 다르크)를 바라보는 모습을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상상선을 따라가면서 찍었다. 영화 이론은 이 장면을 고다르가 브레히트를 따라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마치 누군가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찍었다고 다소 따분하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설명한다. 누가? 바로 우리가. 그래서 이 장면을 우리에게 영화란 훔쳐보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도덕적인 쇼트라고 불렀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나의 쇼트를 잔 다르크를 바라보는 시선의 이미지라고 설명하는 대신 사제가 바라보는 쇼트라고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판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사제는 두 사람을 겹쳐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한 명은 물론 잔 다르크지만 다른 한 명은 나나가 된다. 물론 이 두 개의 쇼트는 단순하게 교환되지 않는다. 고다르의 믿음. “씬을 어디까지 지속해야할 지를 아는 것은 이미 몽타주이다” (<나의 멋진 근심, 몽타주>) 지속의 문제는 동시에 중단의 문제이다. 이때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킬 것이라는 결정은 본다는 동사가 주어와 목적어 사이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는 고다르가 영화를 종종 (구조주의자들과 아무 연관 없이) 언어처럼 다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두 개의 주어. 하나의 목적어. 그 사이에서 고다르는 동사를 구부러뜨린다. 영화 안의 영화를 영화의 안과 바깥으로 나누는 대신 영화 바깥을 영화 안으로 밀고 들어간 다음 두 명의 주인공을 영화 안에서 바라보게 만들 때 나나는 잔 다르크의 자리로 간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나의 눈물을 정말 브레히트적인 방법으로 쳐다볼 수 있게 된다.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설명하면서 중단을 끌어들인 다음 거기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도 비유할만한 감정이입의 전도를 본다. 고다르는 그 방법을 영화적인 판본으로 조금 더 밀고 나아간다. 나나는 잔 다르크처럼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화형을 당하게 될 자신의 운명을 거기서 말 그대로 자기 눈으로 자신의 미래를 본다. 마지막 장면. 총에서 불을 뿜으면서 추운 겨울날 대낮 거리에서 버림받은 개처럼 죽게 될 신세. 임권택 은 조금 다른 경로를 따라간다. < 장군의 아들 >에 갑자기 다른 영화가 침입하는 순간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첫 번째 편이고, 다른 한 번은 두 번째 편이다. 그리고 세 번째 편에는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이 없다. 두 번 모두 물론 오즈처럼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고다르처럼 감정교육의 프로그램에 따라 구성한 것도 아니다. 임권택은 우리에게 충분히 준비를 하게 만든다. 우선 세 편의 <장군의 아들> 중 첫 번째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을 둘러싼 줄거리에 관한 약간의 설명. 이제 막 수표교 굴레방 다리 거지패을 떠돌던 김두한은 극장표를 얻었다가 그것 때문에 종로패 ‘똘마니’들과 시비가 붙고 거기서 보여준 주먹 솜씨 때문에 쌍칼의 눈에 든다. 하지만 김두한은 극장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쌍칼은 그런 김두한을 우미관의 주먹패 우두머리인 김기환에게 데려간다. 아직 김두한의 솜씨를 모르는 김기환은 그에게 극장 안에서 상영 전에 좌판을 메고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군것질 거리를 파는 일을 맡긴다. 임권택은 여기서 삶을 불어넣기 위해 김두한의 생활을 묘사하는 디테일을 살려 놓는다. 이 장면을 둘러싸고 겹겹이 종로의 시장통 일상생활이 담기고(insert_shot) 여기서 쇼트는 종종 초상화와 장르화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그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단지 활기를 불어넣거나 혹은 화면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려든다기보다 그 이상으로 종로 거리 자체를 하나의 고유한 시간 질서를 지닌 세계로 이끌어 올린다. 말하자면 여기서 이 일상의 디테일들은 다른 시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질서의 리듬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 사이에서 인물과 일상 사이의 친화성이라는 관계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임권택이 영화 안에 영화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시간의 질서라는 리듬 안에서 찾아야 한다. < 국경 > ( 최인규 , 1939) 김두한이 우미관에서 일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영화의 무대는 종로 2가 89번지에 자리한 극장 앞으로 옮겨온다. 한국영화사 속에서 수많은 영화 이야기가 여기서 모이고 흩어지곤 했던 전설적인 우미관은 1912년 12월 9일 개관을 한 1,000석 규모의 대형극장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극장이었다는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미관은 한국전쟁 중에 전관 소실되었고, 휴전 이후 다시 문을 열었지만 1959년 화재로 전소한 후 재개봉관으로 바뀌었고 그 이후 쇼 무대와 영화를 번갈아하면서 역사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은 1939년이다. 단성사와 함께 경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극장. 오늘 오후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이 우미관 앞에서 종로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벼르던 대결을 벌일 것이다. 그 하루를 시작하면서 종로 빵집 유리창 너머로 우미관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간판이 슬쩍 보인다. 간판에는 < 國境 >이라는 제목과 함께 그 아래 감독 崔寅奎 , 그리고 주연에 金素英 , 李錦龍 , 崔雲峰 , 이라고 써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국경>은 한국영화사에 두 편이 있다. 한편은 1923년 1월 24일 단성사에서 단 하루 개봉하고 (기술상의 이유로) 간판을 내린 김도산 의 연출 작품이고, 다른 한편은 1939년 5월 20일에 개봉한 최인규의 연출작품이다. 나는 < 장군의 아들 2 >와 < 일대종사 >의 상상의 연표를 재구성하면서 이 두 편의 영화 사이에서 1940년에 서로 우연히 스쳐지나가듯 이어진 서로 다른 계절의 각자의 대결에 대해서 셈했다. 그 셈에 따르면 < 장군의 아들 > 일편은 그 전해인 1939년의 이야기일 것이며 여기서 상영중인 <國境>이 최인규의 영화인 것은 연대기적으로 당연하다. 하지만 <국경>은 한국영화사 속에서 사라진 영화중의 한편이기 때문에 <장군의 아들>에서 사용된 장면은 임권택 이 연출한 영화(found_footage)이다. 하지만 여기에 약간 복잡한 문제가 있다. 이때 임권택 은 간판에 최인규 의 < 國境 >를 내걸고 있지만 그걸 장면에 담으면서 이 영화를 참고한 것 같지 않다. KMDb의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K국경지대의 밀수단 두목 이금용 에게는 애첩 김소영 이 있었다. 애첩 김소영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 한다. 한편 이금용의 부하 전택이 는 김소영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전택이는 김소영을 도와 밀수단 소굴에서 탈출한다. 이금용 일당이 그들을 추격한다. 격투가 벌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전택이는 사력을 다해 이금용 일당을 때려눕히고 김소영과 함께 국경을 넘어간다”라고 되어있지만 아마도 이 줄거리는 1923년에 만든 김도산 의 < 국경 >의 줄거리인 것 같다. 같은 KMDb의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국경지대의 밀수단 두목의 애첩과 그 부하간의 사랑을 위한 도피행각을 그린 영화”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최인규의 <국경>은 김도산 영화의 리메이크가 아니다. 좀 더 믿을만한 최인규의 <국경>의 줄거리 소개는 다소 장황하지만 이렇게 이어진다. “압록강 상류 어느 벽촌에 사는 빈농에 사는 김용태에게는 외딸 영자와 그의 약혼자 이세림이 있었다. 세림은 어렸을 때부터 용태가 키워온 고아였다. 늙은 용태에게는 그들의 성장과 혼례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을 키우기 위하여 생긴 채금(債金)이 항상 붙어 다녔다. 어여쁜 영자에게 딴 마음을 두고 있는 박동일도 그 채권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용태에 대한 그의 수단을 볼 때 양자로써의 세림의 눈에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 세림은 동일에게 얼마만한 기한을 약속하고 영자나 용태에게 아무 말 없이 마을을 떠나 신의주 밀수자들의 무리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꿈꾼 일확천금의 꿈은 흩어지고 몸까지 상하여 가지고 그는 뜻에 없는 귀향을 하게 된다. 세림이가 돌아온 그날 밤 세림과 동일 사이에는 영자를 중심으로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를 두려워하여 사랑하는 양인(兩人)이 아무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날 수 있게 하려는 마음으로 용태는 늪에 몸을 던지나 한편 세림도 또한 그릇하여 칠성이란 백치의 사내를 죽이게 된다. 이리하여 고향은 그들에게 안주(安住)를 허락지 않고 세림은 치사죄로 팔년의 징역을 간다. 영자는 감형운동으로 평양에 공소(控訴)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팔았으나 결국 무죄는 안 되고 삼년의 감형이 되었을 뿐이다. 그 대신 영자는 몸값 삼백 원 때문에 상술집 계집으로 창녀라는 윤락의 길을 밟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림에 대한 사모의 염(念)은 영자로 하여금 여급으로까지 구하여낼 수 있었다. 마을의 비극 이래 동일은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행방불명이 되나 삼년이 지난 어떤 날 안동에서 영자와 기이한 해후를 한다. 영자는 그가 너무나 양심적 인간으로 변한 것에 고민하나 그러나 압제(壓制)할 수 없는 복수지념(之念)에 이끌려서 품었던 비수로 동일을 찌를 때 도리어 실수하여 절벽에 다리를 떨어져 다리를 상한다. 일 년 후 절름발이가 된 영자는 동일의 호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애처로운 여자였다. 어떤 날 밤 은(銀)밀수를 밀고한 이가 밀수자에게 붙들렸을 때 영자는 비로소 동일을 떠나서 살 수 없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운명의 장난! 영자는 그저 동일의 품에 안겨서 흐느껴울 뿐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아름다운 생활을 꿈꾸면서 평양의 감옥을 나온 세림이가 본 영자는 이미 동일의 아내였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스런 어린 것까지 있었다. (끝)” (동아일보 1937년 5월 7일자, 이 소개 중 한자를 한글로 표기했으며, 지금과 다른 맞춤법 일부를 수정한 이외에 그대로 옮겼다) 그러나 < 장군의 아들 > 속의 <國境>을 보고 있으면 임권택은 김도산의 판본과 최인규의 판본 어느 쪽도 따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간판에 따라 최인규의 <국경>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점이다. 최인규의 판본은 토키영화이며 개봉 당시에 이 영화는 “빼어난” 녹음으로 당시 신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최인규 자신도 “보기 좋은 영화의 첫째 조건으로 나는 화면과 음향이 깨끗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철학적인 것보다도 그 형식이 미려한 것을 취하고자 합니다. (...) 내가 <국경>을 연출하는 데 취한 첫 의도는 그렇게 화창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라고 대답했다. 임권택은 (꼭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한국영화사 안에 존재하는 <국경>을 영화 안으로 가져온 다음 최인규의 영화와 상관없는 <國境>을 만들 때 이 디테일은 단지 시대적인 고증과 상관없이 (혹은 심지어 그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미 영화 안의 영화로부터 영화의 일부에로 옮겨간 것이다. 그런데 <국경>은 너무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다소 까다로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임권택이 영화 안에서 얼마나 디테일의 세부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國境>이 <장군의 아들> 서사 안에 개입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일부를 연결하거나 혹은 어떤 계기, 전환의 순간, 희미하지만 둘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 설명을 시작하는 사건(이나 인물 사이)의 환유, 아니면 결정적인 궤도의 이탈, 때로 전혀 상이한 맥락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 개의 상황 사이의 텔레파시,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國境>은 내게 단지 일부가 잘못된 지식이 아니라 잘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무언가 다른 것을 지칭하면서 거기 그렇게 머물고 있는 측면 원근법적 장치의 일부가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나는 먼저 영화와 영화 안의 영화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우미관에서 상영하는 < 國境 >의 간판을 보여준 다음 영화가 상영하는 극장 안까지 들어오기 위해서 임권택 은 거의 굽이굽이 안을 돌아가듯이 한참을 극장 건물 안 여기저기를 돌아본 다음에야 비로소 객석으로 들어온다. 표를 사지 않고 창문을 넘어 몰래 화장실 변기통 밑에 숨어 있다가 영화를 보려는 아이들을 따라가는 것은 단지 한 시대의 풍속이라기보다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서사의 경제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이 아이들은 김두한의 어린 시절을 압축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김두한을 상상하는 우리들의) 감정적인 진동판을 건드린다. 그런 다음 붙잡힌 아이 중의 하나를 끌고 가서 대걸레로 씻겨주고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객석에 들어설 때 (그게 다소 상투적이라 할지라도) 인격의 일부로서의 행동을 보여주는 절차가 된다. 하지만 임권택은 영화 <國境>을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김두한의 동선을 끊어낸다. 누구라도 여기서는 멈칫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마치 줄거리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슬그머니 극장 무대 커튼을 걷고 (관객이 얼마나 찼는지를 보기 위해) 객석을 몰래 쳐다보는 변사의 얼굴이 보인다. ( S#_1) 나는 여기까지 보면서 단 한 번도 변사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어떤 소개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갑자기 시선의 방향이 옮겨갔다. 마치 여기서부터 극장이라는 건축이 자기의 시선을 갖고 활동하듯이 슬그머니 시선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임권택의 연출이 종종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내기의 순간, 슬그머니, 라는 보이지 않는 단락(短絡). 마치 그걸 우리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순간적으로 마치 암전된 것처럼(fade_out) 검은 화면을 그 사이에 넣기라도 한 듯 카메라 앞을 완전히 가로 막았다가 지나쳐서 변사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마치 막이 다시 열리는 듯 한(wipe_out) 검은 화면의 순간적인 이동. 변사가 의자가 앉으려는 순간 저 멀리 왼쪽 화면 끝에서 거의 같은 동작으로 극장 맨 끝자리보다 더 뒤에 자리한 입검석(立檢席)에 일본 경사 두 명이 앉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극장 불이 꺼지고 변사가 대사를 낭독하기 위해 책상 위의 전등을 켠다. 저 멀리 영사실에서 영사기의 불빛이 한줄기 쏟아져 나온다. 말하자면 영화가 시작된다. ( S#_2) 갑작스러운, 차라리 이제까지 < 장군의 아들 >을 보던 관객들에겐 난데없는 흑백화면에 그려진 그림. 그때 변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국경, 아 살얼음 치는 국경!” (voice_over) 나는 여기서 멈칫 설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1.85 사이즈의 영화가 없다. 그런데도 <國境>은 태연자약하게 이 화면 사이즈로 시작한다. 물론 위아래를 잘라낸 것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1.33 화면은 무조건 양 옆을 검게 만들 것이다. (black_masking) 그러면 <國境>과 <장군의 아들>은 서로 완전하게 떨어져나가게 될 것이다. 임권택은 두 영화 사이를 흑백과 칼라로 나누는 정도에서 멈춘다. 그런 다음 그 둘을 변사의 목소리로 이어 붙인다. ( S#_3) 이어지는 변사의 목소리. “조선과 만주를 가르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한 많은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느냐. 서해로 가느냐, 태평양으로 가느냐,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이때 화면은 이미 영화가 시작한 극장 안으로 김두한과 소년이 들어오는 것을 보여준다. ( S#_4) 즉각적인 질문. 그렇다면 <國境>의 첫 장면을 김두한은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약간 까다로운 논제와 마주치게 된다. 만일 우리가 김두한을 경유하지 않고 영화 안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sight)이 머무는 자리(site)는 어디인가? 나는 뒤늦게 극장 안에 도착한 김두한이 만들어낸 균열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여기서 김두한이 <國境>을 본다기보다는 <國境>을 보는 김두한을 본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때 뒤이은 <國境>의 장면은 김두한이 그 장면을 보기 때문에 되돌아왔다기보다는 마치 잠시 김두한에게 한눈을 팔았기 때문에 원래의 화면에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 S#_5) “한편 여기는 국경도시 의주, 쫓기는 사나이들이 있었으니 앞선 사나이는 김영철이오, 또 한 사나이는 박동일이었다” (변사) 당연한 말이지만 임권택은 무성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단지 흑백으로 찍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장군의 아들>을 따라온 우리에게) 이 첫 화면의 구도와 질감은 이상하게 보인다. 전체 구도가 모두 초점 거리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deep_focus) 약간 과도할 정도로 밝게 찍혔다.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한국영화는 아직 디지털 색 보정이 도입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넣어두기 바란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인물로부터 카메라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이 전체를 보여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master_shot) 경사진 이 동네의 지붕들과 저 멀리 하늘이 조금이나마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너무 멀리 있다. 물론 회화를 염두에 두고 무대와 같은 구도(tableau)를 만든 초기 무성영화에 관한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와 운동)의 이론이 있다. (David Bordwell, Ben Brewster, Noel Burch, Richard Abel, Charles Musser, Thomas Elsessar, Tom Gunnung, AND...) 하지만 그걸 염두에 두어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이다. 인물의 동선을 화면 아래쪽에 배치한 다음 왼쪽 골목에서 나와서 오른쪽 담벼락에 몸을 숨긴다. 이때 김영철과 박동일은 단지 아래서 찍었기 때문이 아니라(low_angle)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코트자락에 감춰지기는 했지만 거의 무릎까지 보인다. (knee_shot)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나타난 인물들도 화면 아래 부분에서만 오갈 뿐이다. 만일 이 장면을 보기 위해서 귀로 듣는 대신 자막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면 당신은 김영철과 박동일을 추적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자막에 가려 거의 보지 못할 것이다. 추적자를 다른 길로 따돌린 것을 보면서 김영철이 박동일에게 (변사) “동일아, 우리 하루삔에서 만나자” 라는 대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하자면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마치 그 장면에서 대사를 클로즈업 하듯이 다가가서 다시 찍은 것(bust_shot)은 쇼트 분할의 낭비이다. ( S#_6) 임권택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 나는 처음 볼 때 다시 영화 안의 영화에서 빠져나와 김두한에게 돌아오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 S#_7) 다음 장면은 내리막길에서 서로 재회를 기약하며 손을 흔들면서 각자의 길을 떠나는 두 사람을 할 수 있는 한 멀리서 찍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듯 변사는 목소리를 높인다. (변사) “이들은 왜 쫓기는 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가” 마치 김두한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혹은 이 세 개의 쇼트는 한 씬이기 때문에 서로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듯, 서로 이어 붙어있다. 그런 다음 마치 대꾸를 하듯이 영화 안의 영화를 보는 영화 장면의 쇼트가 연이어 세 개 이어진다. ( S#_8) 변사는 영화에 빠져든 표정으로 마치 웅변이라도 할 것처럼 낭독한다. (변사) “아! 드디어 때는 바야흐로 시베리아에서 휘몰아쳐오는 북풍한설이 매운 기세로 휘몰아쳐오는 엄동시절에...” ( S#_9) 재빨리 이어 붙은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 순사. 한 명은 <國境>에는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객석을 쳐다보기를 반복하고 다른 한 명은 대본을 들여다보면서 변사의 낭독을 감시한다. (변사) “.... 조선의 백성들은 추위와 허기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 S#_10)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영화에 완전히 빠져든 김두한과 그가 데리고 들어와 옆에 앉힌 (몰래 화장실을 통해 공짜로 영화 구경을 하려다 붙잡힌) 소년(과 그 곁의 몇몇 관객)을 보여준다. 그때 변사의 낭독은 절정에 달하고 있다. (변사) “아! 조선의 백성들아, 백성들아!” 이 세 개의 쇼트에 대한 세 가지 질문. 첫째, 영화 안의 영화로부터 나와서 <國境>을 바라보면서 진행 되자 변사의 낭독에는 대사가 없고 지문만 있다. 단지 영화가 영화 안의 영화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國境>의 대사 안으로 침입할 수 없다는 듯이 갑자기 이야기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두 번째, (앞의 질문에 이어서) 게다가 이 지문은 줄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일제 식민지 강점하 조선의 상황에 대한 심정의 비분강개에 가까운 웅변이지 지금 진행 중인 <國境>을 위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세 번째. 낭독하는 변사와 입검석의 두 명의 일본 순사, 그리고 김두한과 소년, 이 세 개의 쇼트는 각자 영화 안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접합되어 있다. 변사는 <國境>의 목소리라는 방식으로 영화 안의 영화 바깥에서 활동하는 기계장치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이 쇼트는 ( S#_8) 영화 안의 영화의 외부적 확장이다. 혹은 이 쇼트를 보는 것은 <國境>의 장면을 청각적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의 ‘본다’라는 설명이 서로 다르게 활용되고 있음을 유심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반대로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 순사는 ( S#_9) 영화 안의 영화를 쳐다보고 있지만 동시에 <장군의 아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역사적 기호 이외의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 이 쇼트는 양쪽 모두에 기생한다. 그 당시의 모든 영화는 그렇게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다시 검열 받았다.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순사는 1939년 영화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개봉관에는 입검석이 반드시 맨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영화 검열을 위한 자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 대한 감시의 체제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극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언제나 그런 장소는 의견의 광장이자 일순간에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권력은 언제나 공개적인 장소를 감시했다. 내가 아니라 푸코가 한 말이다. 입검석은 1939년 극장의 일부이다. 그런 다음에야 영화 안의 영화를 보는 김두한의 쇼트가 등장한다. ( S#_10) 김두한(과 소년)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영화에 빠져들어서 바라본다. <國境>은 <장군의 아들>과 직접적으로 접합되지 못한 채 우회의 경로를 택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國境> 안으로 되돌아간다. ( S#_11) 옥순의 집 안 방문 앞에서 문을 열고 옥순이 나와 김영철과 포옹을 한다. (변사) “옥순아! 하루삔으로 가자, 어서! 어서!” 영화 안의 영화로 돌아가자 변사는 재빨리 다시 복화술사처럼 영철의 목소리를 대신 한다. 두 가지 지적. 첫 번째, 신기할 정도로 정교하게 영화 화면과 목소리를 연결한 때 두 번 모두 영철의 목소리만이 일치한다. 두 번째. 이 화면은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이상하다. 이 구도는 의도적으로 방문을 중심에 놓은 다음 양 옆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왼쪽은 조명이 닿지 않아 그림자마저 생겼다. 나는 전체 화면을(master_shot)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집의 구조를 알지 못한다. 이때 방문을 중심으로 이 화면은 기묘하게도 1.33 사이즈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내게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정면으로 찍은 구도이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면 쇼트와 마주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장군의 아들>에서 두 사람을 세워 놓은 다음(two_shot) 정면으로 찍는 경우는 없다. 구태여 그렇게 앉은 장면은 하야시 구미(組)가 다다미 실내에 앉아있는 일부 쇼트들뿐이다. 정면으로 인물을 찍으면 영화는 다음 장면의 진행에서 심각한 문제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찍었다. 그때 이 장면은 두 사람을 장면 분할 없이 진행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영철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장면을 변사로 옮겨갔다. ( S#_12) 변사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아가면서 옥순의 대사를 낭독한다. (변사) “못가요, 못가요! 부모 형제를 놔두고 어찌 만리타국으로 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런 다음 목소리를 바꾸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영철의 대사를 한다. (변사) “옥순아, 우리는 가야 한다” 이 정면쇼트는 오랜 시간 동안 내게 머물러 있었다. 뭐랄까, 여기서 만들어진 이상한 디테일의 사실감이 <장군의 아들> 전체의 어느 장면보다도 1939년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나는 구태여 여기서 느꼈다, 는 말 대신 만들어졌다, 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이 만들어낸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그런 다음 화면은 ( S#_13) 영철이 옥순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변사) “부모냐 사랑이냐, 망설이던 옥순은 애인을 따라 나서고 말았으니 이들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장면은 <國境>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처럼 현대적인 방법으로 찍혔다. 카메라는 집을 나서는 옥순과 그녀를 잡아 이끄는 영철을 재빠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서(pan_shot) 동시에 눈에 보이게 이동하고 있다. 멀리 사라져가는 두 연인은 <國境>의 두 번째 장면, 김영철과 박동일이 쫓기던 그 골목으로 사라져간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 장면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國境>이 한창 상영되고 있을 때 김두한(과 소년)이 앉아있는 뒤편 입구, 그러니까 입검석 바로 옆에 난 문으로 종로패 사내가 두리번거리면서 들어온다. ( S#_14) 그가 김두한에게 귓속말로 이르자 김두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영화를 보다 말고 나간다. 물론 변사는 아랑곳없이 더 열을 올리며 낭독을 한다. (변사) “여기는 압록강, 김영철과 옥순은 인정 많은 어부를 만나 쪽배를 구할 수 있었으나, 아 그러나 아뿔싸, 그 자가 경찰의 끄나플일 줄이야, 그 누가 꿈엔들 알았으랴” 김두한이 우미관 앞마당에 나왔을 때 막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이 대결을 벌이기 위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 S#_15_16) 영화 속의 영화 <國境>은 여기까지이다. 그런 다음 김두한도, 임권택도, 영화도 <國境>을 잊어버린 채 진행된다. 두 번째 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의 환기. < 國境 >을 보는 내내 이상한 것은 자막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당시의 관객들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변사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막은 당시 영화의 일부였다. 무성영화에서 무자막 형식이 시도된 것은 1924년 프리드리히 W. 무르나우의 (종종 <최후의 인간> 혹은 미국 개봉제목인 < 마지막 웃음 >으로 알려진) <밑바닥 인간(Der Letzte Mann)>에 이르러서다. 물론 지금 <國境>을 보는 건 1939년의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영화사에서 무자막 형식의 무성영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무자막 무성영화의 역사는 매우 짧다. 왜냐하면 첫 번째 토키영화 <재즈 싱어>가 1927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잠시 후에 다시 이 질문에로 돌아올 것이다. 두 번째 영화 안의 영화는 < 장군의 아들 >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온다. 약간의 설명. 김두한이 구치소에서 나오자 혼마치깡 하야시 구미(組)가 기다렸다는 듯이 새벽에 기습을 한다. 어이없이 패배한 다음 김두한은 종로 한복판에서 종로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야시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한다. 뒤이어 구치소에서 종로패의 두목인 김기환이 출소한다. 상황을 파악한 김기환은 김두한과 함께 혼마치깡의 사쿠라(櫻) 카페에 가서 하야시와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는다. 여기서 그만 술에 취한 김두한은 모자를 두고 온다. 그래서 사쿠라 카페의 여주인 세츠코는 김두한에게 모자를 돌려주기 위해 종로를 찾아온다. 둘은 종로 빵집에 마주 앉지만 김두한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종로패 중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워싱톤을 부른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워싱톤이 그녀에게 묻는다. “무슨 말이었습니까?” 세츠코는 약간 수줍게 대답한다. “영화도 구경할 겸해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워싱톤이 김두한에게 “영화를 보러 왔대요”라고 전해주자 김두한이 호기롭게 대답한다. “내가 보여주겠다고 그래”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상영중인 영화 간판을 보여준다. ( S#_1) 영화 제목은 <最後の復?>. 내게 1940년 일본영화 연감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감독 이름이 나를 미심쩍게 만든다. 감독 池田忠雄(이케다 다다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이 시기에 활동한 일본 영화인 이케다 다다오는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오즈 야스지로의 1930년 영화 <아가씨>를 시작으로 1947년 <세입자 인명록>까지 각본을 썼다. 그런 다음 노다 고고와 함께 오즈는 < 만춘 >을 쓰고 그의 유명한 가족의 순환이라는 우주로 들어선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동명이인의 영화감독이 있을지 모른다. 또한 <最後の復?>라는 영화가 정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경국립근대미술관 내 국립영화박물관에서 <最後の復?>는 검색되지 않으며 이케다 다다오는 각본작가의 이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하필이면 (누구라도 떠올렸겠지만) 김두한을 찾아온 카페 여주인의 이름은 <만춘> 이후 오즈 영화의 영원한 노처녀 하라 세츠코(原節子)와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오즈로부터의 연상을 멈출 생각이다. 김두한은 호기롭게 세츠코를 대동하고 우미관 극장문으로 들어선다. ( S#_2) 우미관 안쪽에서 들어서는 김두한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것이 전부인 장면. 입구에 기도가 서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도 끊지 않고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이제 더 이상 첫 번째 이야기, 그러니까 작년의 김두한이 아니다. 앞에 서있던 기도도 김두한에게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어서 옵쇼, 라고 목청 높여 인사를 한다. 그는 여기에 늘 이런 식으로 드나들 것이다. 뒤를 따라오던 세츠코는 기도를 보고 멈칫 서서 망설인다. 김두한은 들어서다 말고 돌아서서 그냥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자 그녀는 기쁜 기색으로 따라 들어간다. 그 뒤를 따라오던 종로패 부하들은 멀리 서서 그 모습을 보면서 “개판이다, 개판이야”라고 빈정거린다. 아마도 돌아온 김기환은 하야시 구미(組)에게 세금까지 바쳐 가면서 종로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고 김두한은 그런 상황에서 일본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장면은 우미관 간판과 영화 안의 영화 <最後の復?> 사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임권택 은 다시 한 번 우미관 극장 안의 디테일을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설명이긴 하지만 김두한은 세츠코에게 우미관을 소개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장면 진행은 다소 교묘해 보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영화 안의 영화 < 國境 >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장면으로 타이틀 자막이 있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타이틀 자막을 보여주는 대신 우미관에 매달려있는 간판 <最後の復?>를 정면으로 보여주면서 제목과 감독, 주연배우, 여기에 더해 이 영화의 장르가 찬바라(チャバラ,칼과 칼이 ‘찬찬찬’ 부딪치는 시대 활극물(時代 活劇物)) 라는 것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장르에 성차(性差)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40년 경성 종로에 있는 유명한 극장 우미관에서 하는 찬바라 영화를 보러 세츠코가 찾아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설정이다. 경성에 영화관이 단 하나 뿐은 아니었으며, 그 시대에 찬바라 영화는 남자들의 장르이며 나미나(淚, 멜로) 영화는 여자들의 장르라는 식으로 멋대로 구분해버린 다음 찬바라를 여자가 보는 것은 흉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는 시절이었다. 당신은 모던 걸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반박하고 싶을지 모른다. 세츠코는 혼마치깡에서 종로까지 김두한을 찾아오면서 기모노를 입고 온 여자이다. 그런 다음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신식의상을 입은 적이 없다. 게다가 그녀는 하야시 오야붕이 종로패 김기환과 화해(를 빙자한 협상)의 술자리를 가질 때 찾아갈 만큼 고급 요정의 마담이다. 그러므로 세츠코는 ‘가오(顔)’를 중요시여길 것이다. 그런데도 김두한을 만나서 영화를 보겠다고 한 다음 우미관에 <最後の復?>를 보러왔다. 당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반대로 말하면 모자를 돌려주기 위해 종로까지 찾아온 세츠코에게 고맙다고 김두한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한 다음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치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데려온 것이 아니다. 게다가 김두한은 이미 이 영화를 여덟 번이나 보았다. 그렇다면 왜 <最後の復?>를 보러 온 것일까.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싶어 온 사람은 임권택이다. 몇 가지 가설. 첫 번째, 세츠코를 따라서 (일본 영화사전의 분류에 따라) ‘인정(人情)’ 영화나 ‘연애(戀愛)’영화를 보러 간다면 원래의 영화인 < 장군의 아들 >이 만들어놓은 ‘다찌마와리’로 돌아오는데 (임권택의 표현을 빌리면) “애를 먹거나” 아니면 “한참 다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가설에 더 기대고 싶다. 임권택은 <장군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이 1970년대에 보낸 ‘다찌마와리’의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 보고 싶었다고 몇 차례고 대답했다. 아마도 그 대답을 <장군의 아들> 일편에서 만족스럽게 얻었을 것이다. 1990년의 관객들은 기꺼이 이 영화를 환영했고 비평적으로도 환대를 받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를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은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후 ‘살아남은 거장’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지만 <장군의 아들> 이전에 흥행의 시장에서 성공한 적이 없다. 다른 한 가지. 1980년대 비디오의 백화제방을 통과하면서 성장한 (아마도 박찬욱으로 대표되는) 완전히 새로운 시네필 세대는 B급영화와 컬트영화들을 새로운 고전의 반열에 올리면서 비평의 엄숙주의와 전투를 벌였고 영화와 미학 사이에서 새로운 접속 방식을 찾아낸 다음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긴장을 때로 통과하고 때로 가로 막으려는 도그마와 전투를 벌이면서 새로운 바깥의 출구를 찾고 있었다. <장군의 아들>은 제 시간을 찾아서 도착했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두 번째 <장군의 아들>을 만들면서 영화 안의 영화로 자신이 1970년대에 만들었던 ‘다찌마와리’ 영화들보다 더 천대받았던 ‘으악새’ 영화를 끌어안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엑스트라들이 일제히 ‘으악’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고 충무로 내에서조차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장르. 물론 그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언가 여기에는 대면의 느낌이 있다. 물론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가면 안 된다. 여기가 비평의 임계점이다. 나는 재빨리 우미관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아니, <最後の復?>로 들어갈 생각이다. ( S#_3)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두한이 세츠코와 함께 우미관에 들어서자 다음 쇼트는 <最後の復?>의 장면이다. <國境>과 같은 점. 두 영화 모두 흑백으로 찍었다. 그리고 영화 안의 영화 장면을 보여줄 때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 풍경의 중계 없이 곧장 영화 안의 영화를 보여준다. 다른 점. <最後の復?>는 토키영화이다. 그러므로 <國境>에서 볼 수 있었던 변사가 없다. 물론 상당한 기간 동안 토키와 무성영화는 공존하였으며, 일본영화에서 토키는 1931년에 만든 <이웃집 부인과 나의 아내>에서 시작되었다. 오즈도 한참을 망설인 다음 1936년에야 첫 번째 토키영화 < 외아들 >을 만들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두 번째 다른 점이다. 여기서 <最後の復?>는 1.33 사이즈로 상영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제까지 1.85로 진행되던 화면에서 양옆을 어둡게 한 다음 첫 장면을 볼 수 있다. 임권택은 이 화면 사이즈를 만들면서 단지 양 옆만을 어둡게 잘라내는 대신(masking) 위아래도 지워내면서 화면 전체를 영화 안의 영화라기보다는 영화관에서 바라보는 기분을 내면서 두 편의 영화, 영화 안의 영화와 그 영화를 바라보는 영화를 공존시키고 있다. 그때 이 장면에서 바로 앞 장면, 그러니까 김두한이 세츠코와 함께 우미관에 들어서던 장면의 구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군의 아들>은 좁은 세트를 넓게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양옆을 펼쳐놓거나 수평으로 만든 쇼트들의 구도로 진행된다. 그건 세 편 모두 그렇다. 다만 대결 장면을 벌일 때에만 종종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실내로 들어간다. 그런데 우미관이 야외에 지어진 세트인데도 불구하고 김두한이 세츠코와 우미관에 들어설 때 극장 안에서 두 사람이 들어서는 것을 수직의 구도로 찍었다. 출입구이기 때문에 양 옆은 유리문으로 닫혀 있고 오로지 앞과 뒤로만 인물의 동선이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 쇼트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김두한이 들어선 다음 나가려다 말고 뒤 돌아서서 세츠코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그래서 우미관으로 두 사람이 들어간 다음 그 뒤를 따라오던 종로패들이 “개판이다, 개판이야” 대사까지 모두 하는 장면을 고정된(fixed) 카메라로 편집없이 모두 찍었기 때문에(long_take) 심리적으로 길게 느껴진다. 물론 이 쇼트를 불필요한 편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롱 테이크로 찍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이때 이 방법은 전형적인 학습의 쇼트이다. 무엇을 위한 학습? 1.85를 좁은 구도로 좁혀놓은 다음 어떤 개입도 없이 이어진 쇼트에서 1.33의 구도로 전개될 <最後の復?>를 준비하고 있다. ( S#_3) 숲속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가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고 화면 바깥에서, 아마도 그녀의 뒤에서, 그러니까 화면 오른쪽 바깥에서 그녀를 쫓아오면서 “거기 서”라는 소리가 일본어로 들린다. 이때 자막은 오로지 지금 영화를 보는 당신을 위해서만 제공된다. 만일 1940년 우미관에서 그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위해서였다면 당연히 화면 왼쪽에 세로 쓰기로 씌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1937년 내선일체를 강요한 일본은 이듬해 조선어 교육 금지를 명령하였으며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1940년은 창씨개명이 요구된 해였다. 그날의 우미관 관객들은 일본어로 영화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달려가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숲속을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같은 속도와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카메라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쫓는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을 따라서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이동한다. ( S#_4) 교과서에서 금기시된 방법.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냥 반복한다.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 S#_5) 왼쪽에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 더 멀찍이 물러나서 이동하던 카메라를 저 멀리 있는 세 그루의 나무가 멈춰 세우기라도 하듯이 거기 그렇게 문득 서 버린다. 나무 뒤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한 남자. 우리는 협객물의 약속을 잘 알고 있다. 여인이 자객들에게 쫓길 때 그 앞에 나타나는 남자는 언제나 구원자이다. 이 낯선 남자를 향해서 자객들은 저마다 “비켜라” “누구야”를 외치지만 모두들 흠칫 물러선다. 이 세 개의 쇼트는 모두 수평의 동선과 구도로 진행된다. 하지만 세 번째 쇼트 다음 장면은 낯선 남자와 자객들 사이의 ‘찬찬찬’ 검술 살진(殺陣)이 아니라 <最後の復?>를 보고 있는 김두한과 세츠코의 모습이다. 세츠코는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지만 김두한은 따분한 표정을 짓다가 하품마저 하고 만다. ( S#_6) 물론 내용이 재미없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화면에서는 칼을 빼든 자객들로부터 “죽여라”(voice_out_of_frame)는 외침이 터져나오면서 이제 막 결정적인 활극장면이 펼쳐질 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은 영화 안의 영화 <最後の復?>를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면) 김두한이 아니라 세츠코를 경유해서 보는 중이다. 서사의 차원에서 설명은 단순하다. 우미관은 김두한의 ‘나와바리’이고 게다가 <最後の復?>은 찬바라 영화이기 때문에 김두한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달리 할 일이 없을 때마다, 혹은 순전히 재미로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건 하나도 이상한 제스처가 아니다. 내 질문은 거기에 있지 않다. 김두한과 세츠코의 쇼트는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자리에 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쇼트는 마치 <最後の復?>의 결정적 순간을 보려는 관객들, 그러니까 영화 안의 영화를 보려는 우리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려는 의도의 자리에서 몰입의 리듬을 방해하고 있는 중이다. 김두한과 세츠코의 감정적 관계는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니며 이후에도 (함께 영화를 본 다음 데이트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들의 궁금한 기다림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음 쇼트는 다시 영화 안의 영화로 돌아간다. ( S#_7) 기모노 여자는 나무 뒤에 서서 바라보고 있고 낯선 남자는 자객들과 일대 사로 대결을 한다. 이때 이 장면의 구도는 기이하게도 남자와 자객들 사이의 일대 사의 대결이 막 시작되려는 광경을 눈 앞에 펼치는 대신 나무 뒤에 숨은 기모노 여인의 뒤에 (두 개의 뒤라는 말을 염두에 두어서 이 장면을 다시 보라) 서서 바라보고 있다. 칼 바람소리와 비명소리가 날 때 기모노 여인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close_up) 쳐다보고 있다. ( S#_8) 낯선 남자는 자객 네 명을 모두 쓰러트린 다음 조금도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은 채 칼을 절도있게 칼집에 넣는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여자가 나와 무릎을 꿇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고 (카메라가 서 있는 맞은 편으로) 성큼성큼 걸어 떠나간다. ( S#_9) 김두한은 그걸 보다가 하품을 하면서 눈을 감고 잠이라도 잘 기세다. 그러자 영화에 빠져들었던 세츠코는 김두한을 보면서 “面白くないですか (재미없습니까?)”라고 물어본다. 그 말을 못알아듣자 손바닥을 가로 흔들며 “ゼミ(재미) ないですか” 라고 다시 물어본다. 일본말을 못하는 김두한은 변명이라도 하듯이 손가락 여덟개를 펴 들고 “나, 저 (영화) 여덟 번째야, 여덟 번”이라고 말한다. 세츠코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는다. 그런 다음 장면은 없다. 그 낯선 남자가 누구인지, 기모노 여인은 왜 쫓겼는지, 그 여인의 운명은 어찌되었는지, 자객들의 복수는 이루어졌는지, 무엇보다도 최후의 복수는 성공했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는 거기서 끝나고 화창한 초여름날 야외에서 데이트하는 김두한과 세츠코로 옮겨간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왜 영화 속의 영화를 거기서 끝내도 괜찮은 것일까. 얼핏 보면 거기서 <最後の復?>의 한 시퀀스가 끝났기 때문에 우미관 극장 안의 씬과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의 숲 속의 대결 씬을 맞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때 내 반론은 그렇게 되면 김두한과 세츠코의 이야기도 거기서 끝난 다음 재빨리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사의 진행에서 차라리 방해라고 할만한 두 사람의 고궁에서의 데이트 장면에로 옮겨간다. 이 씬은 우미관 장면의 감정적인 연결이다. 여기서 핵심은 세츠코가 김두한의 손가락 여덟 개를 펼쳐든 모습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제스처에 있다. 입을 가리고 웃을 때 세츠코는 이미 기모노 여인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 그녀의 운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복수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 제스처는 영화 안의 영화가 더 이상 영화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거절의 동작이다. 왜 거절의 제스처가 성립하는 것일까. 나는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의 타이틀이 미처 우미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마치 영화 속에 삽입(indert_shot)되었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 영화는 김두한이 보고 싶어서 세츠코와 온 것이 아니라 세츠코가 보고 싶어서 김두한이 함께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의 영화에 이끌리는 시선은 김두한이 아니라 세츠코를 중심으로 이끌린 응시와 그 반응이다. 심지어 김두한은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는 하품을 하고 눈을 감고 금방이라도 잘 것만 같다. <最後の復?>에서 우리가 보는 첫 장면은 이 영화를 보는 세츠코와 일치를 시키기라도 하듯 숲 속을 달리는 기모노의 여인으로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 다소 기계적인 동일화의 도식을 따라가볼 생각이다. 물론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이 장르영화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여기서 시선의 네트워크가 불러 일으키는 문법적인 전이 효과만을 계산에 포함시킬 것이다. 그런 다음 문득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 낯선 남자가 등장하기까지의 장면( S#_3_4_5)은 단조롭긴 하지만 이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하품을 하는 김두한과 곁에서 온통 영화에 빠져든 세츠코가 화면을 바라보는 장면( S#_6) 이후는 마치 영화를 보는 쪽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를 분리해낼 수 있다면 기모노 여인을 구하러 나타난 낯선 남자가 자객들과 마주하는 장면( S#_5) 다음 쇼트는 ( S#_7) 나무 뒤에서 기모노 여인이 숨어서 대결을 바라보는 것을 그녀 뒤에서 찍은 장면이다. 두 개의 쇼트 사이에 김두한과 세츠코의 장면이 없었다면 이 두 개의 쇼트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혹은 순간적으로 연결시킨다 할지라도 이상할 정도로 어색해보인다. 왜 그렇게 이상해진 것일까. 그건 대결을 나무 뒤에 숨어서 훔쳐보는 기모노 여인의 얼굴(close_up)을 보기 위해서이다. ( S#_8) 그렇지 않으면 대결이 중심에 있는 화면에서 그 바깥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잘라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흥을 깨는 일이다. 그때 이 여인의 얼굴은 세츠코가 이 씬을 바라보면서 감정을 몰입하는 주관적인 쇼트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를 바라보는 세츠코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영화 안의 영화 바깥으로 나갔다 되돌아올 필요없이 두 쇼트를 하나로 겹쳐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동일화 효과이다. 말하자면 쇼트의 경제성. 기모노 여인이 아니라면 이 순간 세츠코는 도대체 누구에 의지해서 <最後の復?>를 보고 있겠는가. 가장 이상한 쇼트는 낯선 남자가 자객들을 물리치고 나자 나무 뒤에 숲어있다가 나타나는 기모노 여인의 장면이다. ( S#_9) 그녀가 무릎을 꿇고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지만 낯선 남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난다. 나는 그녀가 나타난 방향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 어떤 원칙으로 이 숲길에 상상선을 그은 것일까. 숨어서보던 그녀는( S#_7) 반대쪽 방향에서 나와서( S#_9) 인사를 한다. 두 가지 원칙. 첫째, 네 개의 쇼트는 카메라가 모두 정지해 있다. 그러기 위해서 액션 장면을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지만 장면의 성질로 볼때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서 찍었다. 둘째, 이 네 개의 쇼트는 180도를 기준으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찍은 것일까. 유일한 이유. 언제든지 진행을 중단할 수 있다. 네 개의 쇼트는 어떤 원심력도 갖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 떨어져나간 것이다. 이때 이 쇼트의 진행을 멈출 수 있는 절단의 힘은 그저 세츠코가 관심을 잃으면 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最後の復?>를 보는 까닭은 세츠코가 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그때 세츠코가 영화 속의 영화로부터 눈을 거두고 감두한에게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영화 안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라도 한듯 세츠코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김두한을 보는 것은 하나의 중단이자 새로운 연결의 신호이다. 아쉽지만 <最後の復?>는 이 순간 이미 끝난 것이다. < 장군의 아들 3 > 엔딩 아쉽지만 < 장군의 아들 > 세 번째 편에는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 그러니까 김두한과 김동회가 힘을 합쳐 혼마치깡에 쳐들어가 하야시 구미(組)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세 편의 <장군의 아들>에서 수없는 대결장면이 있었지만 이렇게 혈겁(血劫)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광경은 거의 유일하다. 그런 다음 김동회는 김두한을 부축하여 떠난다. 그런데 김두한은 종로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이 장면은 내게 두 가지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나는 이제 이 긴 연작이 끝났다는 작별인사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힘겹게 비틀거리면서 떠나가는 두 남자. 여기에는 그 동안 김두한을 둘러싸고 등장했던 어떤 인물도 곁에 없다. 그들은 마치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하나의 계열의 소멸. 더 이상 작동할 것이 남아있는 않은 장르 기계. 저물어가는 석양의 햇살. 여기에 남은 쓸쓸한 기호들. 물론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그저 덧붙여진 감상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의 감상을 더 할 생각이다.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장군의 아들> 일편에서 본 영화 속이 영화 < 國境 >에서 찍지 않은 쇼트를 본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이 장면만을 마치 기억 속의 한 장면처럼 희미해보이게 찍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fog_filter) 나는 김두한과 김동회가 사랑도 잃고 조국도 잃고 오직 그 둘만이 서로를 의지하며 그들의 유일한 고향인 종로를 떠나는 뒷모습에서 김영철과 박동일의 마지막 모습, 아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國境>의 마지막 장면을 본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보았다. 물론 이 설명은 그저 부질없는 소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중얼거렸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 사이의 화해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에서 영화 속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세르주 다네가 말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부활의 시간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 둘이 대립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과거에로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할 때 그와 동시에 이미 본 영화의 과거의 시간이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설명하고 싶다. 나는 영화 안의 시간을 무한정 팽창시키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거의 유일한 임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이야기 끝, 그리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