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없는
- 감독
- 마를렌 비냐요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지오바니
주상숙은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도 되는 걸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명의 브라질 영화를 원작으로 한 < 정직한 후보 >( 장유정 , 2019)는 기막힌 설정 한 줄이 큰 몫을 하는 영화다. 늘 거짓말을 하던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하게 되면서 겪는 해프닝이 핵심 요소다. 이런 설정이 재미있는 건, 정치인은 무릇 청렴한 공직자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도) 그렇지 않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단단하게 형성돼 있어서다. <정직한 후보>는 이런 사회적 인식을 가볍게 흔들어 코미디를 만든다. 하지만 참신한 설정에 기대는 서사일수록, 마무리가 중요한 법. 그런 맥락에서 <정직한 후보>의 ‘국민뻥쟁이’ 국회의원 주상숙이 ‘진실의 주둥이’를 얻게 된 후가 더 궁금했다. 먼저 짚고 갈 게 있다. 주상숙은 ‘뻥쟁이’ 시절부터 막나가는 진실 폭탄 발언을 할 때까지 한 번도 관객의 호감을 잃지 않는다. 주식 내부 거래, 사학재단 비리, 자녀 군입대 비리 등 ‘비리 3종 세트’를 시원하게 저지르는 데도 말이다. 이는 장유정 감독과 그가 주인공 성별까지 바꾸며 캐스팅한 배우 라미란 의 눈부신 컬라버레이션 덕분이다. 대중 영화의 주인공으로 잃으면 안 될 호감도와 가벼운 현실 풍자를 모두 잡아낸, 흔치 않은 성과다. 극중 주상숙은 거짓말을 못하게 된 후엔 노련한 선거전략가 이운학( 송영창 )을 기용해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하지만 밉지 않은 주상숙에게 용서할 수 없는 치부가 있다. 이미지 전략으로도 커버할 수 없어 이운학이 주상숙을 배신하게 되는 큰 문제다. 그건 주상숙이 살아 있는 할머니 김옥희( 나문희) 를 두고 ‘운명을 달리했다’고 공론화해 동정표를 얻은 과거다. 김옥희는 호적상으론 사망해, 숨어 살고 있다. 김옥희 건은 이 영화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갈피다. 절대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을 해버린 정치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극은 주인공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를 처벌할 것인가, 눈감아 줄 것인가. 여기엔 이 영화가 지닌 윤리적 결정이 있다. <정직한 후보>가 내놓은 답은 적당한 절충안이다. 정면 돌파는 하지 않으면서, 주상숙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한다. ‘데우스엑스마키나’처럼 김옥희는 이 중대한 거짓말이 탄로 나기 직전 적절한 시점에 사망하고, 주상숙은 정치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우연한 결과로 그녀의 ‘자폭’ 결정은 그녀 외의 많은 비리 정치인을 무더기로 고발하게 된다. 이후 주상숙은 죄값을 받고 가난하지만 선량한 정치인으로 거듭난다. 종합하면 극 중 세상사람들은 그녀가 멀쩡한 할머니를 죽었다고 한 거짓말은 끝내 모른 채로 영화가 끝난다. 이렇게 해결하지 못(안)할 결정적 악행을 왜 애당초 만든 것일까. 결말부엔 예전에 부패한 주상숙을 맹공격하던 젊은 정치인 신지선( 조수향 )이 과거 주상숙처럼 변한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은 순수한 정치인조차 변할 수 밖에 없는 정계 현실을 풍자한다. 누구도 다르지 않은 현실. 그 누구도 깨끗할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렇게 닳고 닳아버린 신지선에 비해 개과천선한 주상숙은 좀 더 괜찮은 인물로 비춰진다. <정직한 후보>는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적당히 부패했지만 자기 과오를 뉘우치는 주상숙을 끊임없이 끌어안는 영화다 (결국 주상숙은 서울시장에 도전한다). 이 세계엔 냉정한 심판자가 없다. 돌아보면 최근 한국 상업 영화와 드라마에서 악한 주인공을 단죄하지 않는 경향이 여럿 보인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용두사미’라는 평을 들으며 매듭지은 것도 비슷하다. 거짓말로 다른 이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한서진( 염정아 )은 마지막에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닫기만 할 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창작자도, 배우도, 관객도 나쁜 짓을 해온 주인공과 친밀해져 어느새 단죄하지 못하는 현상. 이런 서사적 경향의 기저에는 친소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보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것일까.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결말을 보면 악한 주인공을 매력있게 그리면서도 창작자가 주인공에게 갖는 단호한 윤리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직한 후보>의 유쾌하고 밝은 연출에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반문했다. “그래서, 살아 계시던 자기 할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한 정치인이 영원히 그걸 숨긴 채 적당히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서울시장에 도전한다고?”
이상한 일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2016)(이하 <설리>)에는 단 한 명의 죽은 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설리>는 2009년 1월 15일, 전 세계에 알려진 실화 사건에 기반한 일이다. 이 사건이 세계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55명을 태운 민항기가 사고로 인해 비상착수를 했는데, 승무원 한 명의 경미한 부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을 수 있었으나, 모두가 살아남게 된 사건. 미디어와 대중들은 그 기적적인 ‘생존’에 열광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반대로 그들 누구도 ‘죽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방점이 다르다. 어떻게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진부한 응답은 기장 설렌버거(설리)의 영웅담에 그치겠지만, 이스트우드는 자꾸만 현실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설렌버거의 실패를 상상한다. < 설리 >에 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전 그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죽음’을 기록하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지속된 그의 초기 서부극은 ‘죽은 자’가 귀환해 복수를 가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영화였다(< 평원의 무법자High Plains Drifter >(1973) < 페일 라이더 >(1985)).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영화들은 아예 유령학에 가까웠다. 이 유령학의 핵심에는 현재로 침입해오는 과거의 망령들, 죄의식, 혹은 죽은 자를 증언하는 강신술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라졌다. 가령 < 미드나잇 가든Midnight In The Garden Of Good And Evil >(1997)과 < 히어애프터 >(2010)는 죽은 자와 대화하는 자들에 관한 영화이다. 산자와 사자의 공존, 죽은 자들은 현세를 떠나지 못하고 자꾸만 말을 건네거나 복수를 감행한다. < 퍼펙트 월드 >(1994)나 < 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4)는 등장인물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화자들의 기억 혹은 편지에 관한 영화이다. < 미스틱 리버 >(2003)는 죽음이 예정된 자들의 벗어날 수 없는 잔혹한 숙명적 세계에 관한 영화이며,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 그랜 토리노 >(2008)는 아예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 자신의 죽음으로 마감하는 ‘비가’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그의 최고작들로 언급되는 < 용서받지 못한 자 >(1992)나 < 아버지의 깃발 >(2006)은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영화임과 동시에 ‘과거’의 망령 혹은 죄의식이 현재를 증언하거나 기억의 책무를 남기는 영화들이다. 그 과정에는 무수한 죽음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됐다. 2010년대, 그의 필모그라피는 흡사 바이오그라피 시네마에 가까웠다. 미국의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FBI의 에드가 후버를 그린 < 제이. 에드가 >(2011)나 이라크 전쟁에서 활동한 미군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에 관한 < 아메리칸 스나이퍼 >(2014) 그리고 이번 영화, 허드슨 강의 기적을 그린 < 설리 >까지. 특히 <제이. 에드가>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주인공의 ‘죽음의 순간’이 중요한 작품들이다. <제이. 에드가>에서 후버의 죽음은 무서운 권력을 창출하고 지배했던 역사적 인물의 비장함이 아니라, 자신의 침대 아래로 처박힌 한 인간의 늙고 추레한 살덩어리, 죽음 그 자체의 쓸쓸함에 관한 소묘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라크 전쟁이 만든 미국적인 영웅의 정당성과 딜레마, 그러나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그 이라크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살해당하고 마는 삶과 정치의 아이러니를 피력하는 작품이었다. U.S. Airways Flight 1549 [출처]huffingtonpost.com 그런데 < 설리 >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 속 한 구조대원이 한 승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는 날입니다.” 아마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우연적이건 필연적이건(혹은 주인공이건 주변 인물이건) 그 어떤 죽음도 묘사되지 않은 건 이 영화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아흔을 바라보는 미국의 완전작가 이스트우드는 이미 알고 있다. 위대하고 두터워 보이는 삶들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롭고 우발적인 방식으로(혹은 필연적인 숙명으로) 죽음의 순간들과 공존하는지 말이다. <설리>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눈 건 고작 208초의 순간이었다. 설렌버거 기장도 말하지 않는가. “42년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는데, 고작 208초의 시간이 나를 설명한다”고 말이다. 그 208초의 시간이 155명의 사람을 살렸고, 설렌버거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반대를 가정한다. 모두가 살아남았지만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던 그 208초의 운명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는 설렌버거의 비행기가 허드슨 강이 아니라 뉴욕의 마천루로 치달아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수한 죽음을 발생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 서사 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영화는 이내 그것이 주인공 설렌버거의 ‘악몽’임을 드러낸다. 미국의 영웅 설렌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순간, 자칫 죽음의 208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고통과 불확실성의 순간으로 영화 속 설렌버거는 자꾸만 소환된다. 조사위원회의 회의나 청문회에 불려 나가 그 시간을 진술하는 실제적 순간으로의 소환 외에도 그는 악몽과 환영, 기억의 방식으로 자꾸만 그 자리에 불려 나간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운 잠자리의 악몽으로, 꺼져있는 TV의 환각으로, 그리고 심지어 젊은 여성이 그의 볼에 감사의 키스를 한 직후에도 그는 창밖 뉴욕의 도심 풍경을 보며 자신의 비행기가 빌딩으로 충돌해 화염에 휩싸이는 환영을 보게 된다. 설렌버거는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돌아가는 지점은 사고의 순간, 그 208초의 시간 속이다. 죽음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으며, 명백한 자기 확신과 명예율로 살아가는 단독자들. 이런 캐릭터는 고전기 서부극의 남성 영웅들이었다. 6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레오네에 의해 그러한 반영웅 캐릭터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 단일하고 명백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어떠한 내적 균열과 불안 혹은 자기모순에 찬 존재들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 용서받지 못한 자 >를 만들었을 때, 그 영화는 단순히 서부극의 90년대적 부활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 이미지(반영웅 아이콘)를 해체하는 영화였으며 서부의 신화를 탈신화하는 영화, 이상화된 영화적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되돌리는 영화였다. < 아버지의 깃발 >은 그 정점에 있는 영화였다. “전장을 모르는 자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지. 선과 악, 영웅과 악당,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2차 세계 대전 중 이오지마에서 벌어졌던 참상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노인은 후대의 젊은이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웅은 국가나 사회의 필요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며, 그 영웅으로 호명된 존재 자체도 그 신화 속에서 희생되어 가는 존재들이었다. 영화 속 이오지마에 깃발을 꽂은 영웅으로 조작된 인디언 아이라와 위생병 닥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영웅의 거짓 선동 속에서 진짜 영웅들, 전장에서 무수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자리, 즉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며 항변하곤 하였다. < 설리 > 역시 명백히, 이스트우드가 늘 묘사해왔던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궤적에 있는 영화이다. 155명의 승객이 단 24분 만에 전원 구조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미디어와 대중은 즉각적으로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그를 대중사회의 영웅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 앞에 두려웠으며, 불안과 회의 속에서 자기 확신을 하지 못한 채로 ‘두려움의 반복강박’(꿈에서 같은 자리로 자꾸만 되돌아가는 악몽을 표현하는 프로이트 용어)에 시달린다.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어쩌면 위원회 결정에 의해 퇴직금과 연금을 박탈당하고 소유하고 있는 빚과 건물을 잃을지도 모르는 노후에 대해 걱정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155명 전원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과 책무감에 시달린다. <설리>(2016) <아버지의 깃발>(2007) 가장 심플하고 명백해 보이는 이스트우드의 이번 영화 < 설리 >는 의외로 그의 가장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조화된 걸작 <아버지의 깃발>과 같은 영화이다. 두 영화가 같다는 것은 서사적 구조와 테마, 그리고 ‘진짜’ 영웅들을 복권시키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설리>가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 아버지의 깃발 > 역시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노년의 닥(의무병 존 브레들리)의 악몽으로 시작된다. 꿈속에서 그는 2차 대전 중인 이오지마의 격전지에 홀로 서 있다. 고통에 찬 병사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정작 그는 아무도 없는 전장에 홀로 서 있다. 그는 텅 빈 전장에서 두려움과 죄의식에 눈물을 흘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죄의식과 두려움의 반복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은 이제 진짜 역사와 기억을 증언해야 한다. 이스트우드는 그 방법론으로서 ‘플래시백’을 사용한다(이스트우드의 주된 수사학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플래시백은 과거와 현재를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기능주의적 장치이지만, 이스트우드에게 플래시백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복권이자 진실의 구조이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자의 기억이자 증언이며 죄의식의 공유기법(서사적 시각화)이기도 하다. 먼저 < 아버지의 깃발 >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소급하는 영화이다. 3명의 영웅 중 닥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과거의 시간을 추적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로부터 2차 대전 중 벌어진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증언과 기억에 따른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당시 이오지마의 영웅으로 위장된 아버지들이 결국 어떻게 국가로부터 이용당하고 버려졌는지, 그 과정에 그 아버지들이 어떠한 부대낌과 죄의식을 평생 강요당해야만 했는지를 기록한다. 파편적인 증언들은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진실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걸작에 반열에 오른 진짜 이유는 영웅 신화의 진실을 폭로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순간 이후에 맞이하게 될 ‘애도와 상기’의 시간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라는 거짓된 깃발 퍼포먼스의 강요에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전장에서 내가 한 건, 내가 본 건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난 영웅이 아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국가에 의해 버려진다. 영화는 후반부 영웅으로 호명됐으나, 그 거짓 신화에 홀로 저항하고 거부했던 닥의 죽음을 묘사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닥의 아들은 “세상에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릴 위해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한 방식”으로서, 즉 애도의 방식으로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의 맨 마지막을 닥의 소망이미지로 대신한다. 잘려나간 시체들의 무덤이 아니라, 혹은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 전장의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로운 해변에서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으로 일군의 병사들이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닥의 시선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과 함께 오는 진짜 이오지마의 영웅들(평범한 군인들, 영웅 신화에 이용당한 병사들), 그리고 참혹한 전장의 풍경들. < 설리 >는 테마와 구조의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같은 영화이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며, 국가나 조직의 필요에 의해 영웅으로 조작된 사기극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로부터 손실의 책임을 강요당하는 일개 항공사 기장에 관한 영화이다. 국가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책무에 관한 영화이고, 그 과정의 완결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하고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을 이용해 영웅으로 올라서는 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통해 소소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수주의자로 낙인찍힌 이스트우드의 세계는 종종 남성 마초이즘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적 이상을 찬미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지점이 내재하지만, 그러나 우파 파시스트로 매도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시선과 태도가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적 정치 프레임에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평가한다면 우파는커녕 좌파 극단주의자로 매도될지도 모른다. 전쟁의 광기와 불모함, 국가 권력의 폭력과 기만, 정치적 조작을 폭로하는 영화들, 기계적 시스템의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영화들, 심지어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들이지 않은가) < 설리 >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그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수행해내는 소시민들의 일에 대한 책무와 공동체적 연대로부터 진짜 영웅성을 발견해내려는 의지의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설리는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나’라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승무원들, 승객들, 구조대원들)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무와 연대에 대해 언급하고, 엔딩 크레디트에 진짜 설렌버거를 통해 “155는 그저 생존자의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집합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 설리 >는 죽음을 통해 진실을 피력했던 이스트우드가 이번엔 죽음에 거의 가 닿을 뻔했던 삶의 순간으로부터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삶과 희망은 이스트우드에겐 낯선 화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음과 절망의 반대극이라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여전히 이 영화에서도 그는 젊은이들의 치기가 아니라 삶을 오래 살아낸 노장의 원숙함과 혜안이 사건을 해결하고, 냉정하고 수학적인 기계적 시스템의 세계(비행 시뮬레이션)가 아니라 ‘휴먼 팩터’라 말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선택을 신뢰한다.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이스트우드와 톰 행크스에게 트럼프 선거기간,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작업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했다. 이스트우드는 잘 알려진 대로 공화당원으로서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톰 행크스는 민주당 지지자였다. 이스트우드는 자기가 겪어온 역사적 시기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의 변화과정을 언급하며, 적어도 그는 사람에 따라 다른 정치적 의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이에 기자가, 타인의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리버럴리스트’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수긍했다. - 사족(그러나 < 설리 >가 올해의 베스트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 이스트우드는 < 설리 >에서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2001년 9.11의 트라우마를 상기한다. 민항기가 뉴욕의 빌딩과 충돌하며 빚어진 참상의 이미지들은 이 영화 속에서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재현한다. 두 재난은 모두 뉴욕이 주인공이었으며, 하나는 수천 명의 삶을 앗아간 재앙으로, 다른 하나는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삶의 미래로 이어졌다. 허드슨 강으로 비상착수하기 이전에 상황들, 설렌버거의 악몽과 환상, 그리고 실제 비상착수 당시 민항기가 강으로 저공 비행하는 순간의 위기를 직감한 불안한 목격자들의 시선 쇼트들은 명백히 9.11의 트라우마이자, 208초가 갈라놓은 죽음의 잠재적 이미지들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고기에 간신히 탑승했던 한 청년의 말처럼 ‘오늘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됐다. 불과 25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1,200명의 구조자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몰려왔다. 아침 출근 선박들과 전문 구조요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객을 가장 먼저 탈출시킨 승무원들의 행동들. 실제로 설렌버거는 승객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침몰해가는 항공기 내부를 두 번이나 들어가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승객들을 살펴봤으며, 제일 마지막에 빠져나왔다. 이 순간 우리에게 < 설리 >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와 겹쳐지고, 슬픔과 회한의 시간으로 내몰린다. 모두가 살아나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300여 명의 삶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의 출근 선박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던 것처럼 우리도 주변 어선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 그나마의 생존자들을 구출했지만, 그냥 거기서 멈춰버렸다. 제일 먼저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들, 납득 불가능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건과 시간이 아직 그곳에 침몰해있다. 위정자들의 음모와 태만, 폭력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 이스트우드는 모두가 살아남은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혹시 발생할지도 몰랐을 참사의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를 자꾸 상기하며 현재의 희망에 대해 역설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시대의 알레고리)에 따라 그 자리에서 수장당한 300여 명의 죽음에 대한 무력한 방관자로서의 트라우마, 죄의식과 분노.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이스트우드와 반대로 죽음 속에서 가상의 구원을 그려내는 것이다.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시작된 ‘희망의 고래(아이들을 제 몸에 실어 날아오는 고래 일러스트)’가 SNS에서 공유되고, 촛불을 든 광화문에서 가상의 증강현실로 등장하고, 다시금 어느 건축가에 의해 실제 ‘고래와 아이들’ 풍선으로 등장하기까지, 우리는 그저 가상의 상상물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위한하고 기억하고 애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트우드는 < 제이. 에드가 >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과 좌파 이념에 대해 폭력적인 척결을 자행했던 에드가 후버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개개인이 소중하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삶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다.” “도덕이 무너지면 선한 자는 아무것도 못하고, 악한 자는 번창한다.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위협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사회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절대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종종 임권택 을 공격하기 위해서 ‘따분한 계몽영화’라는 표현을 동원한다. 이 단정적인 범주와 싸우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다. 그건 공격적인 지시어를 꺼내 든 쪽도 마찬가지이다. 계몽은 매우 긴 철학적 토론의 역사를 지닌 개념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두 갈래 길의 교차로에 서 있다. 하나는 합리주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지식 사이에 스며든 권력 장치의 작동방식이다. 물론 여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칸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칸트는 1784년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본 다음 1798년 다시 한 번 약간 질문을 바꾸어 혁명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았다. 그사이에 놓여있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나치를 피해 망명길에 쓴 「계몽의 개념」에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계몽의 방식에 몸서리쳤다. 계몽이라는 이름의 후퇴. 이 역설적인 패배. 우리들이 계몽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꺼내 들 때 대부분은 이 책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글은 다른 단상들과 함께 1969년 4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하지만 푸코는 이 말을 재치 있게 뒤틀었다. 그는 계몽주의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계몽이라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라고 되물었다. 이 질문(을 빌린 대답)을 읽은 사람들은 그런 다음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에 있었던 지적인 불화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자리는 이 논쟁을 다루기에 적절치 않다. 하지만 나는 ‘계몽영화’라는 개념 속에 서로 완전히 대립적인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는 것만은 환기시키고 싶다. 종종 이 논제를 쉽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게으른 비평가들은 일련의 영화들에 대해서 (미처 정의내리지 못한) ‘계몽영화’라고 부른 다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그 영화들이 국가에 의해서 산업에 부과된 강제적인 수행인 것처럼 부른다.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도시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의 과정을 밟아나갔고 농촌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단계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 존재하는 (약간 따분한 표현이지만) 둘 사이의 간극에는 어떤 지체가 존재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단계가 있다. 여기에는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관계를 일시에 와해시키고 경작자의 농작물에 대한 노동의 결과를 자본주의 노동지대로 전화시키는 과정에는 토지의 소유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차액지대라는 다소 까다로운 잉여가치의 모순이라는 계산법이 기다리고 있다. 그 계산은 내 몫이 아니다. 이 과정에 국가가 폭력적으로 개입했을 때 예술이 항상 국가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도브첸코는 이 개입을 시적으로 옹호했다. (< 대지 Zemlya >(1930)) 부뉴엘은 처음에는 다소 에매한 입장을 취했다. (< 빵 없는 대지Las Hurdes >(1933)) 반대로 누군가는 이 개입을 필요한 악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였다. 물론 필요한 악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잘 알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평범한 악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 이 시기에 임권택 은 근심스럽게 그 폭력을 바라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제적인 과정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임권택은 (아주 직접적인 의미에서) 계몽교훈극 영화에 가담했다. 그건 사실이다. 아마 그 첫 영화가 < 아내들의 행진 >일 것이다. 1974년은 새마을 운동이 국가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해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 아내 >와 < 옥례기 >를 찍고 나서 새마을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이후’이다. 임권택은 자발적으로 계몽 교훈극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사태가 기묘한 것은 이 첫 번째 교훈극이라고 부르고 싶은 영화가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이때 임권택은 단순하게 계몽에 합류하는 이상으로 사회 안의 사람이 가져야 할 도덕에 대해서 선악을 구별한 다음 가혹하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때 공동체의 도덕은 다소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임권택의 도덕은 지나가 버린 공동체와 도래할 (혹은 해야 할?) 공동체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지금은 틀렸지만 그 비판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종종 모호하다. 그래서 다소 따분하게 여겨지는 훈고주의적 향수처럼 느껴지던 설교가 어떤 때는 갑자기 공허할 정도로 원칙적인 자리에 창백하게 머물면서 현실 안에서 거의 불가능한 비판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임권택의 일관성은 거의 무조건적인 충실함이다. 무엇에 대한? 여기에 이상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이웃에 대한 충실함. 이때 자기 자신의 주인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이웃의 자리에 대한 충실함이 지켜져야 할 때 여기에는 자기와 이웃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되어야 하는 전체선이라는 불길한 구름이 떠오른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구름.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덩어리. 건드릴 수 없는 자리에 떠 있는 저 그 무엇. 나는 여기서 구름이라는 표현을 단지 문학적 수사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붙잡을 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는 저 모호함이 종종 공허하게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저것이 마치 (이 말을 피하고 싶지만) 큰 타자처럼 아주 분명하게 머물고 있음을 환기시키고 싶다. 이 세계에는 어떤 권리도 없고 오직 의무와 책임만이 있다. 어떤 의무? 그것을 쳐다보아야 할 의무. 어떤 책임? 그 의무를 지켜야 할 책임. 그것이 이 세계에 머무는 방법이다. 임권택은 이 방법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종종 그 구름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 할 때 생긴다. 그때 임권택은 그 자리를 법정에 넘기거나(< 법창을 울린 옥이 >) 혹은 왕의 자리에서 명령하는(< 망부석 >과 < 십년세도 >) 형식을 취했다. 그런 다음에도 그의 영화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이 자리를 구태여 남겨 놓았다. 종종 임권택이 절제와 단호한 결정에 따른 결말을 마련했다고 설명하는 후기 영화들에서조차 그 자리는 좀 더 세련되고 때로 뒤로 물러나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김두한이 어린 시절의 친구 김동회가 혼마치깡의 일본 야쿠자 하야시 패의 앞잡이가 되어 대결을 청할 때 갑자기 지식인이었지만 거지패로 전락한 사내가 끼어들어 상대방의 민족의 도리를 외마디처럼 따져 묻는다. (< 장군의 아들 >) 나는 임권택의 영화 전편을 놓고 이 자리에 관한 긴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큰 타자의 자리를 가장한 국가의 요구와 임권택 스스로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자리를 채우려는 노력 사이에서 1970년대 혹은 80년대 초의 영화들이 겹치면서 사태를 까다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 복부인 >은 임권택 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순수하다고까지 말하고 싶은 계몽교훈극이다. 좀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1979년 10월 26일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유신을 국가의 이념으로 내세우고 새마을운동을 근대화의 정책으로 집행했던 장기집권 독재자인 대통령이 부마항쟁에 이어진 요정에서의 총격으로 사망한 다음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아주 잠깐 있었던 80년의 봄의 기운이 전혀 없다. 그건 그해 만든 다른 영화 < 짝코 >에서 그나마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런 열린 숨통의 약한 기운조차 없다는 점에서 더 이상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임권택은 정치적인 담론들 사이에 가까이 다가간 적이 없다. 물론 <복부인>은 우수영화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임권택의 영화는 우수영화에 선정되지 않은 영화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반공영화에 대한 반(反)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짝코>도 반공 우수영화로 선정되었다.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복부인>을 보고 난 다음 잠시 멈추게 되는 것은 부의 축적과정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경멸감이다. 그것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대한 분노라는 점에서 정치경제학적인 계몽의 관점에 선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고 그럼에도 여기에 그 과정에 대한 분석적 비판이 전혀 없다는 것이 어리둥절하다. 임권택의 새마을 운동 계보 임권택 은 돈을 종종 징그럽게 쳐다본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마주친 것은 돈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마치 임권택은 돈이 자본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전염병인 것처럼 대하면서 돈을 다루는 등장인물들의 관계 사이에서 그 누군가의 악에 의해 다른 누군가가, 혹은 그 전체가, 붕괴되는 대신 아무 문제 없었던 관계에 돈이라는 불순물이 끼어들어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 사이의 잉여가치에 의해 타락하는 것처럼 다루었다. 여기서 이 설명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요점이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형식 자체의 비밀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잉여가치의 이면에 숨겨진 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다룬다. 미처 보지 못했지만 형식 뒤에 숨져진 돈의 이면이 만들어내는 물신숭배 속에서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첫 번째 영화는 < 잡초 >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정한다. 그런 다음 그는 긍정의 계열과 부정의 계열 양쪽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전자의 계열이 ‘새마을 영화’인 < 아내들의 행진 > < 아내 > < 옥례기 >로 이어진다면 후자는 < 맨발의 눈길 > < 내일 또 내일 > < 복부인 > < 오염된 자식들 > 그리고 < 티켓 >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런 다음 마치 이것이 돈에 대한 이론적 실수인 것처럼 양쪽의 계열 모두 갑자기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권택이 함께 계몽교훈극의 양식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돈의 문제가 완전히 이야기에서 쫓겨난 것도 아니다. 다만 돈의 운동이 관계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관찰을 중단했을 뿐이다. 이 두 개의 계열에서 이상한 것은 한쪽에서 긍정적인 가치로 다루었던 부의 축적이 다른 한쪽에서는 수수께끼처럼 악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계열은 거의 공존하듯이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마치 임권택은 둘 사이에 아무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번갈아 두 계열 사이를 오갔다. 여기에 단순하게 시골과 도시의 대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서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티켓>은 이전의 영화들이 무대로 삼았던 서울로부터 강원도의 작은 항구도시로 물러난다. 물론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나는 부의 축적을 향한 ‘선한’ 의지가 있다. 다른 하나는 부의 효과에 의해 ‘나쁜’ 선택을 한다. 물론 그 둘이 결국 도달하는 차이는 정반대의 자리이기는 하지만 문득 그 결과를 바라보면서 그 둘이 서로에 대한 외설적 버전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둘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 복부인 >은 그 점에서도 좀 괴상해 보인다. 임권택 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희극에는 자신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약점을 고백하곤 했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무겁고 종종 어두우며 희극적인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낭만적인 기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따금 희극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1969년에 만든 시인 천상병의 기행에 관한 희극 < 신세 좀 지자구요 > 이후 임권택은 이 장르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복부인>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조금도 우습진 않지만 임권택은 그녀들의 행동을 다소 과장된 톤으로 우스꽝스럽게 다룬다는 점에서 희극에 가깝다. 이 영화는 이미 제목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한혜숙이 연기하는 한 여사가 달동네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복부인이 되어 처음에는 아파트 투기를 하다가 땅 투기에 나서고 그녀들을 상대로 커미션을 받던 부동산 업자가 사기를 치고 해외로 달아나려던 순간 경찰이 이들을 덮쳐 모두 감옥으로 간다. 희한하게도 이 영화에서 고등학교 동창으로 나오는 세 여자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서로에게 ‘여사’라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끝내 우리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익명의 존재. 그녀들은 누구나 그 자리에 불려갈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며 또한 누구도 그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경고가 거기에 있다. 한 컷으로 촬영된 들고찍기 두 번째 괴상한 점. < 복부인 >은 임권택 의 영화에서 가장 난폭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지닌 영화이다. 임권택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카메라를 들고 찍는 것을(hand_held) 선호하지 않는다. 그는 정교한 구도를 선호하며 종종 그 자리에 멈춰 서서(fixed) 등장인물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만 같은 거리를 선택한다. 더군다나 임권택은 <복부인>을 찍은 이듬해 그의 가장 명상적인 영화 중의 한편인 < 만다라 >를 그렇게 멈춰 선 채 망원렌즈로 멀리서 바라보면서(long_shot) 찍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촬영 스타일의 변화를 찾고 있지 않았다. 임권택은 사실상 < 족보 >에서 자기 스타일을 찾았고 그런 다음 그걸 밀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복부인>은 거의 예외적으로 인물을 따라 카메라를 들고 찍으면서 몹시 흔들리거나 때로 인물 동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당신은 이때 가벼운 경량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무시무시하게 무거운 미첼 필름 카메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이라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이 여기서 서정민에게 요구했을 카메라의 스타일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뉴스를 찍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복부인의 생태를 고발한다는 심정으로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르지만 <복부인>은 드물게도 (그리고 아마 거의 마지막으로) 1.33 사이즈로 찍은 영화이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이 영화의 화면을 보고 있으면 고전적인 4대 3 비율의 텔레비전 모니터가 떠오른다. 만일 스타일로 설명한다면 <복부인>은 <족보>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나중에 나타날 것의 준비라는 과정의 바깥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하게 불순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에 담긴 분노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보는 내내 그걸 느낀다. 그래서 그 과정 자체를 중단하고서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 어떤 대상이 여기에 있다. 이때 해야 할 그 무엇이 나중에 나타날 그 무엇을 방해하고 있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대목은 여기에 있다. < 복부인 >은 나중에 나타날 그 무엇과 타협할 수 없는 과정에 대한 부정적 계기인 것이다. 우리가 이걸 완전히 역전시켜서 물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복부인>에서 임권택 이 한 것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해야만 했다. <복부인>은 이야기 안에서 보기에는 도덕적이지만 형식적으로 이 영화는 임권택에게 윤리적인 결정이다. 그걸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그리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한다. 나는 지금 <복부인>의 미학적 결정을 물어보는 중이 아니다. 이 영화를 형식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간다면 너무 빈곤하고 앙상해서 누구라도 그냥 빨리 지나쳐가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여기에는 임권택이 이건 그렇게 해야만 한다, 는 어떤 태도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복부인>은 < 짝코 >가 만들어지던 해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고 < 깃발 없는 기수 >와 < 만다라 > 사이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다른 계열이 여기에 공존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복부인>은 < 내일 또 내일 >에서 < 오염된 자식들 >로 가는 그사이에 놓여있다. 여기에는 다루어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충동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진동의 목표는 형식 안에 통합될 수 없다는 어떤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내가 임권택의 내면을 말할 수는 없다. 그건 비평의 자리를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다. 임권택에게 돈은 미학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에서 더 있는 그 무엇이다. 후렴구 같은 반복. 더 있는 그 무엇. 그래서 때로 임권택의 계몽교훈극들은 마치 자본주의 바깥에 놓인 것처럼 시작한 다음 거기에 돈이 침입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다소 따분하게 설명하면 임권택은 고전경제학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고 그 잉여의 형식을 분석하는 자리로 밀고 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그가 보수주의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임권택이 단지 국책영화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수동적인 영화들을 추월해서 자발적으로 그 과정의 불행과 경제적 행위 뒤에 놓여있는 도덕적 타락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그는 무언가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심지어 자신의 영화 안에서 나타나야 할 과정의 형식조차 포기한다. <복부인>이 취한 다소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부정확해서 종종 도덕 교과서적)인 관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섬뜩해지는 순간은 그때 나타난다. 내내 돈의 교환관계에서 계약의 사법적 테두리 안에 머물면서 위법의 행위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하던 이야기에서 비교적 주변에 놓여있던 인물들이 한 여사와 함께 계급적 상승을 하는 동안 이따금씩 등장하다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주인과 노예의 전도된 관계로 도약을 시도할 때 임권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경멸의 태도를 취한다. 이를테면 한 여사의 어머니. 그녀는 영화에서 아주 가끔 등장해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한 여사를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변화를 과정 안에서 보면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한다. 하지만 아주 이따금 등장하는 어머니는 마치 그녀의 인격이 집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으로 이 신에서 저 신으로 옮겨갈 때 점프한다. 아니, 차라리 돈이 만들어낸 재산과 그에 따른 부의 축적이 가져온 새로운 관계에서 두 명의 다른 어머니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점이 있다. 돈은 인물과 사회 사이의 매개가 아니다. 돈이 가져오는 가장 큰 효과는 그 인물에 대한 타자로서의 또 다른 그 인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 인물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 된다. 좀 더 명료한 설명. 그 인물에 돈이 플러스 될 때 그 인물은 +a가 아니라 a라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혹은 이동하는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임권택은 모순이 발생할 때 그 안에서 어떤 종합도 시도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순이 점점 더 확장되면서 전체가 붕괴되어 간다. 다만 그는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몹시 무서운 사실. 아무리 모순이 확장되어도 세계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건 그의 경험주의적 진술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확장되어도 세계가 몰락하지 않을 때 세계는 끝이 없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물은 간신히 견디면서 점점 더 찌그러진다. 그때 항상 임권택이 선택하는 방법은 둘 중 한 가지이다. 그 과정에서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 때 이야기의 고정점이 되었던 인물을 삭제하거나 아니면 이야기 바깥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혹은 내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복부인>은 <짝코>와 동일한 결말을 맞는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다. 혹은 <만다라>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으면 참선의 세계에서조차 그런 결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세계가 남는다. 혹은 지옥이 기다린다. 세 번째 괴상한 점, 혹은 맨 처음의 질문. < 복부인 >이 계몽교훈극의 형식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의 교훈은 어딘가 당혹스럽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긴 설교가 나온다. 한 여사를 비롯한 세 명의 복부인은 토지 사기를 당하기 직전 현장을 덮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구조받듯이 경찰서에 잡혀 온다. 이때 마침 그녀들이 땅 투기에 치마 바람으로 바깥으로 나도는 동안 내기 화투에 빠진 남편들이 타짜들의 짜고 치는 도박에 걸려들기 직전 마찬가지로 현장을 덮친 형사들에게 구조받듯이 경찰서에 잡혀 온다. 나는 일부러 복부인과 그녀들의 남편을 거의 반복하듯이 썼다. 그런 다음 그 둘은 우연히도 운 나쁘게 같은 경찰서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 복부인과 남편의 대면, 그리고 남편의 일장연설 양쪽을 번갈아 본 다음 “지금이 어느 땐데 정신 못 차리고 이래?”라고 야단치는 형사에게 한 여사의 남편이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형식을 빌려서 긴 설교를 한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사기를 해서 얼마의 돈을 땄든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기 앉아있는 복부인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노름판에서의 희생자들은 그 판에 끼어든 사람들로 끝나지만 저들 복부인들의 투기는 사기 도박꾼들보다도 훨씬 반사회적인 해악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저 여자들 때문에 주택과 땅값은 천장을 모르고 뛰고 결국 그 대가를 마지막으로 치르는 것은 저 여자들의 투기와는 하등 관계없는 영세민이요, 실수요자들입니다.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하게 찍혔고 그러면서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 대사를 하는 동안 마치 경청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약간 웅변을 하는 것처럼 하는 이 설교는 < 복부인 >이 일종의 교육극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환기시킨다. 그들은 교훈을 얻기 위해서 시련을 겪었고 이제 설교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이 대사가 끝나면 암울한 감옥이 보여지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영화는 끝난다. 대사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 대사 안에서 땅 투기와 도박 중에 어느 쪽이 더 “반사회적 해악”인지를 따지거나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잘못을 따져 물을 자격이 있느냐고 바보같이 반문하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 이 대사는 <복부인>이라는 계몽교훈극이 주는 교훈이라는 것이 요지이다. 그런데 이때 이 대사에는 어떤 교훈도 없다. 한 여사를 비롯한 세 명의 복부인이 경찰서에 온 것은 경찰의 부동산 사기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의 투기 과정이 드러나 함께 검거된 것이지 그녀들의 땅 투기 과정에서 “투기와 아무 상관 없는 영세민들이요, 실수요자들의” 고발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또한 이야기에서 세 명의 복부인은 서울 인근 지역의 재개발 지구의 농토를 소유하던 할아버지를 속이긴 했지만 그녀들은 그 과정에서 영세민들과 거의 어떤 불화도 겪지 않았다. 그 땅은 내놓은 물건이었으며 그녀들은 중개업자로부터 그 땅을 사들인 다음 되팔았다. 여기에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거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여사는 자신의 남편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교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거시적인 경제적 관점을 도입한다면 그녀들은 시차 간 차액을 이용하여 부당한 착취를 한 것이긴 하지만 <복부인>은 그런 관점과는 멀리 있다. 그녀들이 부동산 중개업자 송 사장을 통해 그 정보를 미리 취득하기는 했지만 여기는 지금 1980년이고, 그때 서울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투기는 행정과 자본 사이의 부의 재편과정의 일부였다. 몹시 끔찍한 이야기지만 정확하게 이 시기부터 대통령들도 부동산에 뛰어들어 친인척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외의 명단이 있지만 나는 논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이제 막 한강 이남에서 강남이 세워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는 야만의 시간이 시작하던 영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설교는 교훈의 형식을 빌려 무엇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이 대답을 구하기 위해 그저 마지막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면 끝내 대답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 복부인 >은 영화가 시작하면 공항에 남편이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서 중동에서 (아마도) 장기간 일을 한 다음 지금 막 귀국하는 길이다. 그런 다음 장모를 만나 호언장담하면서 그동안 600만 원이나 벌었으니 이제 집도 사서 이런 달동네를 벗어나자고 말한다. 그가 되돌려 받는 말은 그 돈으로 어떻게 집을 살 수 있느냐는 대답이다. 600만 원이나 벌었다는 가치의 평가와, 600만 원밖에 벌지 못했다는 대답 사이의 간극. 단순하게 말하면 남편의 노동에 대한 임금의 가치가 느리게 축적되는 동안 재빠르게 상승한 사회 자본의 가치가 추월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꿈은 즉각적으로 좌절된다. 그건 이미 그가 아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예고된 일이다. 그의 집은 마치 등산을 하는 것만 같은 계단을 따라 올라간 달동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엔 택시도 가지 못한다. 아내는 택시비를 낸 다음 잔돈을 받기 위해 운전기사와 승강이를 벌이고 그런 다음 남편으로부터 ‘쪼순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한 여사는 주택 청약금을 든 아파트를 보기 위해 나갔다가 거기서 복부인으로 나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얼떨결에 그녀들에게 당첨 순위인 아파트 청약번호를 넘긴 다음 며칠 후에 600만 원을 번다. 동일한 액수. 당연한 말이지만 돈은 질적으로 다른 모든 대상을 동일한 가치의 척도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남편이 중동에서 그 돈을 벌기 위해 팔아야 했던 노동력의 양과 시간은 한 여사가 단 며칠 동안 별다른 노력 없이 아파트를 환매한 차액과 동일한 교환가치의 수치가 된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로 전화된 노동의 형식을 내용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전자이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 영화들은 과격한 정치적 해결을 제시하지만 대답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켄 로치는 매번 도식의 덫에 걸려든다. 후자를 선택하고 이 문제의 핵심으로 인물을 끌어당긴 다음 그 심연까지 들여다본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 소매치기 >이다. 물론 임권택 이 브레송의 방법을 따른 것은 아니다. 브레송은 그 간극 자체를 영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서 먼저 돈과 손의 운동을 보여준 다음 그 운동을 감옥으로 이동시킨다. 미셀은 마지막 순간 안타깝게 독백하듯이 말한다. “당신에게 이르는 길은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이었을까” 두 영화가 모두 감옥에서 끝났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다. 하지만 <복부인>은 <소매치기>가 아니다. 임권택은 이 계보의 한쪽 끝을 건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형식과 내용 사이의 매듭이 어떻게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실재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수수께끼에 이르는지를 다루지는 않는다. <복부인>은 다만 형식의 효과 안에서 내용에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형식을 다시 내용으로 전도시키는 과정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 관해서 약간 도식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 여사가 자신의 동창인 박 여사와 정 여사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남편은 이야기의 뒤편으로 물러난다. 한 여사의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남편은 이따금 등장하며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뀐다. 이때 임권택 은 < 복부인 >의 이야기를 사회로 확장하는 대신 가족 안에 머물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시피 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복부인>은 근본적으로 홈드라마이다. 이것이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의 장황한 설교가 영화 자신과 조응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두 사람 사이에서 거의 바깥으로 나간 남편이 자기의 원래의 자리에로 되돌아오려는 재귀적 주체의 자리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마치 이 마지막 장면은 <복부인>이 설교의 신과 나머지 영화 전체 둘로 나뉘어 있으며 이 신에서 다른 부분 전체가 미처 말하지 않은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반대로 이 설교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반문이 거기 고스란히 따라온다. 임권택은 이 설교를 단지 아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야 하며 남편은 (다시 한 번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주체의 정립을 위한 헛소리에 가까운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임권택의 많은 영화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아내가 나서야 했으며 그녀들은 남편과 역할을 바꾸거나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거나 때로 그녀 혼자 자립해야만 했다. 남편의 설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다시 한 번 영화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과 그의 아내 한 여사(와 딸과 장모)가 살고 있는 집은 영세민들의 동네였으며 한 여사가 복부인 동창들을 만나게 되는 아파트 분양 현장에 간 것은 그녀 가족의 실수요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집(home)과 집(house) 사이의 간극이 있다. 그런 다음 이 둘은 내용으로서의 집과 형식으로서의 집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 둘이 조응하는 대신 형식으로서의 집은 갑자기 내용에 구멍을 뚫은 다음 새로운 네트워크로 빠져나가면서 자기의 형식에 조응하는 새로운 참조틀로서의 내용을 찾기 시작한다. 이 공식은 여러 차례 임권택의 영화에서 반복되었다. 이제 서로 다른 두 개의 내용을 갖게 된 형식으로의 집은 자신의 (확대)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내용에 집중하면서 낡은 내용을 형식에 대한 형식으로 전도시키기 시작한다. 간단하게 한 여사와 남편 사이의 부부관계는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복부인>은 기이할 정도로 남편과 한 여사 사이에서 부부관계를 보여주는 그들만의 아주 사소하거나 은밀한 장면이 없다. 그런 장면이 비어있어도 될 만큼의 알리바이를 제공할 수 있는 (다소 상투적이라 할지라도) 남편이 한 여사에게 이 관계에서 실패하거나 무심하게 대하는 어떤 순간도 없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남편이 중동에서 벌어온 600만 원이 집을 사는데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곧장 부동산의 네트워크 안으로 뛰어든다. 임권택은 이 간극이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난장판이라고 파악한다. 그는 여기에 어떤 영화적 형식을 부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권택에게 영화에서 형식이란 절대적으로 그 인물의 외재적 내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오로지 재귀적으로 경청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들어야만 <복부인>이 지닌 계몽교훈극으로서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내용이 형식의 타락에 대한 방어선이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만일 그걸 지키지 못하면 내용 자체가 소외의 모습으로 형식에 대한 형식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임권택의 도덕은 여기서 나온다. 그는 대상이 자신이 지닌 내용을 포기하고 형식이 압도할 때 타락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때 형식으로부터 내용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은 둘 중 하나이다. 대가를 치러야 하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그때 내용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야만 이 셈은 비로소 성립된다. 임권택의 도덕이 처음 시작할 때는 항상 보수적인 자리에서 시작하거나 때로는 국책 홍보의 일부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그 자리를 추월해서 자신의 도덕을 집행하기 시작할 때 섬뜩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이다. 갑작스러운 ‘끝’ 네 번째 괴상한 점, 혹은 영화 이후의 시간. < 복부인 >의 마지막 설교의 장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어떤 화해의 시간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자기 자신을 위한 반성의 시간이 없다. 설교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끝난다.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저들, 이라고 부른 다음 용서할 수 없는 자들, 이라고 단호하게 판결을 내린다. 남편은 아내를 용서할 생각이 없으며 아마 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그럴 것이다. 남편은 사기도박의 피해자이고 아내는 부동산 투기의 사기조작에 일부 가담했지만 동시에 피해자의 신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약간의 벌금을 내고 경찰서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 부부는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다음 남편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와 함께 살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아내의 반론은 여기에 없다. 계모가 되어 남의 자식에게 애정을 베풀면서 자기 자식을 홀대하며 평생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낳은 자식과 마주해서 서로의 입장을 길게 논쟁하다시피 전개했던 < 둘째어머니 >를 생각해보면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기에는 형평성을 잃고 있다. 누가 보기에도 여기에는 남편의 오만이 있다. 이 설교의 앞부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사기를 해서 얼마의 돈을 땄든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기 앉아있는 복부인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노름판에서의 희생자들은 그 판에 끼어든 사람들로 끝나지만...(중략)” 남편은 자기의 자리를 희생자의 자리에 가져다 놓은 다음 복부인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소 까다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복부인의 “반사회적 해악”을 비판하기 위해서 왜 이 자리에 와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그 전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한 여사는 종종 집에 늦게 돌아오긴 했지만 언제나 귀가를 했으며 그녀는 자신의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나 딸을 걱정했으며 남편이 속을 썩인다고 말을 하면서 여전히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동안 춤바람이 나긴 했지만 다른 남자들과 성적인 교제를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약간 조롱을 섞어 말하자면 그녀가 부동산 투기를 하고 다니는 동안 남편이 사회경제적인 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갑자기 세상의 모순을 깨닫게 된 것도 아니다. 그동안 남편이 한 것이라곤 화투밖에 없다. 그런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왜 이 자리가 필요해진 것일까. 나는 이 장소가 경찰서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임권택 은 교훈의 순간 종종 법정이나 경찰서, 혹은 교실과 같은 제도 기구의 장소를 선택한다. 그런 다음 그 설교를 제도의 담론처럼 환유시킨다. 임권택이 이루어낸 환유의 설교를 하는 장면에서 미학적으로도 가장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떤 한계까지 밀고 나아간 순간이 < 티켓 >에서 정신병원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복부인>에서 순서는 이렇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결국 타락한 형식이 마지막에 도착할 장소는 경찰서일 것이다. 한 여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맨발의 눈길 >) 혹은 미쳐버리는(<티켓>) 것은 여기에 올바르지 않은 목적지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계몽교훈극이다. 이때 이 장소에 형식의 외곽으로 물러나면서 형식이 되어버린 남편이 같은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여기서 남편이 한 여사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 하나는 둘 모두를 사법의 무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그 형식을 바라볼 수 있는 내용의 일그러진 시선이 필요해진다. 남편은 우월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여사의 자리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노름판과 부동산 투기. 타짜들에게 속아 판에 앉아있는 도박 화투의 희생자들. 부동산 투기 전문가들에게 속아 판에 앉아있는 부동산 복부인들. 이 둘 사이에 비스듬히 세워진 거울이 그 둘을 마주 보게 만든다. 회화에서의 관점의 이동에 의한 잉여지식의 자리. 이때 내용은 형식을 내면화하고 주관화시키지 않으면 그 형식이 본래적으로 출발했던 내용의 도착적인 욕망을 읽어낼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재귀적 주체의 자리에로 돌아가기 위해 이 말을 할 때 그 설교는 고스란히 그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한 여사의 반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구태여 그 말을 해야 한다면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은 그 반복을 찍지 않았다. 혹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 중요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계몽교훈극의 대답은 언제 와야 하는가. 영화가 끝난 이후로 미루어 놓아쐽옳求짙옛틈句옜덫옛호옰颱督쳐杞옳求짙? 임권택 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자리를 영화 안에 남겨놓았다. 이때 이 대답이 구조 안의 일부가 되는 것이 옳은가, 라는 반문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교훈이 목적론적이 되는 것은 옳은가. 그래서 많은 계몽교훈극들은 이 대답을 사후적으로 남겨놓기 위해 그 자리를 영화 바깥에 포함시켜 왔다. 임권택은 그 자리가 가진 불편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안에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그의 영화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유지된 거의 유일한 태도이다. 종종 임권택의 영화를 본 다음 설명적이라고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도 이 불평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에 대해서 물어볼 때마다 다소 몸서리를 치듯이 끄덕이며 대답한다. 잘 아는 것 같죠, 그런데 그걸 정말 알아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여기에는 어떤 화해도 없다. 그는 이 화해가 심지어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겠다. 그러니 그걸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오fot동안 생각해왔다. 그런 다음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임권택의 영화는 그 말이 영화 전체의 활동 자체를 통해서만 제대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 말이 올바른가는 내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은 그 활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계속) 1980년 9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세경흥업 각본 윤삼육 촬영 서정민 조명 김강일 편집 김희수 음악 정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