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담바라
- 감독
- 김양득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윤지효, 이영하, 유영국, 손영춘, 박현숙, 신성일, 방희, 김형자, 곽은경, 정순애, 양택조, 김지영, 정미경, 조학자, 조일봉, 이설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장르를 꼽는다면 ‘종교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멸종된 건 아니다. 최근 < 일사각오 >(권혁만, 2016) 같은 영화가 소박한 흥행을 거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야 >(2011)),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의자 >(2011)), 옥한흠 목사(< 제자, 옥한흠 >(2014) 등 종교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울지마, 톤즈 >(2010)나 < 소명 >(2009)처럼 오지의 성자들에 대한 작품도 있다. 다른 건 소속된 리그다. 최근 종교 관련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면, 1980년대의 종교 영화는 메인 스트림 안에 있었다. 이 영화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당시로선 큰 흥행인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으며, 사극일 경우 거대 예산이 들어간 대작이었다. 특정 종교의 역사, 인물, 교리 등을 테마로 삼는 종교 영화는 1980년대 상업영화의 한 축이었으며, 비록 그 종교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는 물론이고 증산도를 다룬 < 화평의 길 >( 강대진 , 1984), 무속을 소재로 한 < 피막 >( 이두용 , 1981) < 무녀의 밤 >( 변장호 , 1982) < 불의 딸 >( 임권택 , 1983) < 태 >( 하명중 , 1986) < 업 >(이두용, 1988) 등이 이어졌고, 수련을 통한 초능력을 다룬 < 단 >( 김행수 , 1986)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한 < 백백교 >( 최영철 , 1993) 등도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도 기독교와 가톨릭을 다룬 종교 영화들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사극, 전쟁 영화, 반공 영화 등에 걸쳐 실존적 철학과 이념적 갈등과 역사적 사실 등을 다루었다. 유현목 감독의 < 순교자 >(1965) 최하원 감독의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이성구 감독의 < 악마의 제자들 >(1974)과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1973) 당대 종교 영화 트렌드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조짐은 1970년대 말부터 있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주요작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기독교 영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던 걸까?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 동안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엔 전국 각지의 크리스천이 300만 명 이상 모였다. 이후 1974년엔 김준곤 목사의 엑스플로 대회가 있었고, 1977년엔 민족 복음화 성회, 1980년엔 세계 복음화 성회, 1984년엔 선교 100주년 대성회 그리고 88 세계 복음화 대성회 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 뉴스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접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자체 집계가 발표된다. 이른바 ‘대부흥의 시대’였다. 자고 나면 교회가 생겨나던 시절, 기독교 영화에 대한 잠재적 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이때 < 사랑의 원자탄 >(강대진, 1977)이 포문을 열었고 뒤를 이은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임원식 , 1981)는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다음 해 < 죽으면 살리라 >(강대진, 1982) < 하늘 가는 밝은 길 >( 김성호 , 1982)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손양원 주기철 안이숙 등이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들은 한참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 기독교인들에겐 일종의 교재였다. 실화 영화로서 이 작품들이 지닌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이며 극적인 감수성은 절절한 간증이 되어 신도들의 가슴을 쳤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최하원 감독은 < 초대 받은 사람들 >(1981)과 < 초대 받은 성웅들 >(1984)를 내놓는다. ‘천주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초대 받은 사람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약 15만 5,000명의 서울 관객을 모은 흥행작. <초대 받은 성웅들>은 ‘천주교 조선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대교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최인현 감독의 < 소명 >(1984)도 200주년 기념작. 이 작품들은 이승훈 김대건 이벽 등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린다. 특히 1984년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며 가톨릭의 열기가 뜨거웠던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주요 종교 영화들의 중심 테마는 순교와 박해였다. 이 영화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하드고어에 가까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랑의 원자탄>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상단 오른쪽)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결국 옥사한 그의 이야기는 <하늘 가는 밝은 길>과 <일사각오>로도 영화화되었다. (하단) 최하원 감독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초대 받은 성웅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 겪었던 박해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 초 기독교와 가톨릭이 이끈 종교 영화의 열풍은 종교적 이벤트와 신도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억압 받았던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영화들을 통해 기독교와 가톨릭은, 신분제 사회와 식민지 체제에서 평등 사상과 민족 정신을 주장하고 지켰던 종교로서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흥미로운 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사례다. 원래는 1977년에 제작되어 개봉 예정이었지만, 유신 정권은 이 영화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는 주기철 목사(신영균)의 모습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으로 여겼던 모양. 그래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영화는 19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종교 영화들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전진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기 충무로는 산업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떠오르던 종교 이슈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큰 흥행은 자극제 역할을 했고(이 영화는 속편이 기획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빛을 마셔라> <이천석 목사> 등도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독 영화인들의 모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1976년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으로 연예인 선교의 단초를 마련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개런티 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신영균 고은아 를 비롯 최민수 의 어머니인 강효실 , < 예수 천당 >( 홍의봉 , 1991)의 이영후 , 그리고 임동진 문오장 구봉서 곽규석 윤복희 (가수) 송도영 (성우) 등이 대표적 인물. 한편 종교적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독들도 등장했는데 복음주의적 입장의 강대진 감독은 <사랑의 원자탄>과 <죽으면 살리라>를(그런데 1984년에는 증산도에 대한 <화평의 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존주의적 입장의 유현목 감독은 < 사람의 아들 >(1981)과 < 상한 갈대 >(1984)를, 선교적 입장의 홍의봉 감독은 < 휴거 >(1990) < 천국의 비밀 >(1990) < 예수 천당 >을 내놓았다. 여기서 1980년대 종교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장호 감독과 이동철(본명 이철용) 작가다. 그들은 한국 종교 영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개념을 가져왔다. 기독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찬송가였다. 이 영화들의 OST는 대부분 찬송가 멜로디의 변주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이해 극적으로 살아난 안이숙의 이야기인 <죽으면 살리라>. 가수인 윤복희가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들려준다. 이 시기 기독교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는 ‘회개’였다.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에서 최자실 목사는 빈민촌에서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무당( 김을동 )이 회개하는 대목이다. 이동철 원작의 < 꼬방동네 사람들 >은 빈민촌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 중엔 고물 장수 목사가 있다. 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과부춤 >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이야기한다. 부흥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교회의 모습이 풍자된다. 그 시작은 <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2)였다.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신의 부름을 받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교적 체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 종교 영화가 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안요한(이영호)은 시력을 잃은 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판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동철 작가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리어카를 끌며 고물 장사를 하는 목사( 송재호 ) 캐릭터가 있는데, 그는 ‘꼬방동네’(빈민촌)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대형화와 함께 중산층화를 겪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 대한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민중 교회가 등장했는데, 이런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매체가 바로 영화였다. 이런 시각은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 <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 엄종선 , 1982) 같은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빈민 선교 이야기인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이기원 , 1990)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김수형 , 1982)은 한국 대형 교회의 상징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최자실 목사(송도영)의 일대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장호 감독, 이동철 원작의 <과부춤>(1984)은 본격적인 종교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한국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수작이다. 광적인 부흥회, 돈에 눈먼 목사, 교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도 등 <과부춤>은 ‘천만 기독교인’ 시대의 이면을 들춘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종교 없인 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멘털리티를 보여주며, 그 이면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에 대한 당대 기독교 영화의 관심은 불교 영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 만다라 >를 시작으로 1980년대 불교 영화는 끊임없이 속세와 종교적 깨달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광 스님의 이야기인 < 허튼 소리 >(김수용, 1986)를 비롯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1989)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그리고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 1989)까지 이 시기 불교 영화엔 사바 세계에 대한 미련과 번민이 있다. 종종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갇히기도 하지만(유난히 비구니 캐릭터가 많았던 건 그런 이유일까?), 관념적 화두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비구니>를 만들려 했지만, 촬영 도중 중단되어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와 정권은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조계종은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여 결국 중단 사태까지 간 것. 이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비구니>의 한을 풀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을 넘어, 세계 불교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전후로 충무로에 잠깐 불교 영화의 붐이 일었다. 실존주의자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시기 종교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초월적인 기적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사람들>에서 정혜(원미경)의 가슴에 십자가 빛이 새겨진다. 1980년대 종교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에게 달려가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었고, 불교계는 10.27법난(1980년)을 겪으며 초토화되었다. 가톨릭은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기복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고, ‘종교 과잉’과 ‘사이비’의 시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카오스 속에서 ‘영적 상품’으로 기획된 종교 영화들은 전반기엔 기독교 영화가, 하반기엔 불교 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80년대를 장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영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기업 자본에게 ‘종교’는 매력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부활한 건 2010년 전후 즈음.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신앙과 선교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일사각오>를 비롯 < 신이 보낸 사람 >( 김진무 , 2014) < 로마서 8:37 >( 신연식 , 2017) < 산상수훈 >(유영의, 2017) 등의 극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쟁투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개성이 뚜렷한 영화작가,”1) “화면이 수술대와 다름없는, 외과의사가 집도하는 것과 같은 연출,”2) “한국영화의 반역정신,”3)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함,”4) 이는 모두 김기영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한 논평들이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특이하고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김기영 감독은 대부분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1970년대 영화 불황기에 들어서며 그는 < 파계 > < 이어도 > < 흙 > 등 소설 원작의 문예영화를 몇 편 만든다. 그는 문학을 원작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스타일로 완전히 각색했다. 따라서 그의 문예영화에서 원작에의 충실성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의 영화는 문학을 저본으로 삼았을 뿐 당시 문예영화의 관습으로 포획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이야말로 관습을 깨뜨리는 새로운 시도로서 근본적인 예술성 개념에 부합하며 예술영화로서의 문예영화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파격과 확장이 불가(佛家)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파계>는 < 마음의 고향 >( 윤용규 , 1949) 이후 불교 문예영화의 맥을 잇는 영화이자 본격적인 불교 예술영화로 평가받는 < 만다라 >( 임권택 , 1981) 앞에 놓이는 작품이기도 하다.5) < 파계 >는 1973년 「사상계」에 연재된 고은의 동명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선승 법연당과 그의 제자 침해의 관계, 그리고 침해와 묘혼의 사랑을 플롯의 중심에 둔다. 여기에 서산암의 비구와 소원암의 비구니들을 통해 선승(禪僧)과 율사(律師)의 차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불제자들의 수련방식 등 불가를 둘러싼 다양한 사건들이 직조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원작의 내용을 철저하게 김기영 식 주제와 화법으로 끌어들여, 법통을 둘러싼 승(僧)들 간의 정치적 쟁투와 인간의 원초적 본능 문제를 부각시킨다. 이 영화는 선승을 가장하고 선사에 들어간 대학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는 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 영화의 중심 서사는 열반을 눈앞에 둔 고승 조실스님( 최불암 )이 법통을 물려줄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조실스님의 시자로 자란 침해 수좌( 김병학 )이고, 그의 경쟁자로는 “절이란 권위와 인격과 위대한 것이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경원 수좌( 조재성 )가 있다. 이 두 인물의 대립에는 어릴 때 절에 들어와 동승으로 자란 ‘올깨끼’와 나중에 철이 나서 스스로 불도를 선택한 ‘늦깨끼’, 그리고 선승과 법승 간의 갈등이 들어있다. 조실스님은 인자하고 푸근한 인상과는 달리 냉혹하고 교활하게 후보자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킨다. 그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물론 돌연한 선문답과 죽비 세례로 후보자들을 곤경에 빠뜨린다. 또한 식욕, 색욕의 시험에 들게 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부추긴다. 침해가 묘혼( 임예진 )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조실스님이 기획한 시험 중의 하나다. “내 법통이야. 그냥은 못 줘.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나중에는 시험으로 피투성이가 되는 걸 봐야 준다.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는 걸 봐야 줘.”라는 그의 외침은 김기영 표 고승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조실스님이 주도하는 시험들은 한국전쟁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며 현실과 접목된다. 스님( 신구 )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전쟁고아들을 구해 목숨을 걸고 피난시켰고, 절에 온 고아들은 배가 고파 가마솥에서 밥을 훔쳐 먹곤 했다. 이와 같이 속세의 극단적 참화인 전쟁과 그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인간의 밑바닥이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불가의 정진 과정과 연계된다. 이 과정에서 진정으로 배고파 보지 않거나 치열하게 색욕의 번뇌에 부딪혀 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겠느냐는 주제가 표출된다. 그러면서 ‘법통’은 생존의 문제가 되고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 또한 정치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맨 나중에 법통을 이을 유력한 후보자로 떠오르는 것은 ‘도심행자’(정한원)라는 의외의 인물이다. 이 부분은 원작과 완전히 다른 것이기도 하다. 도심은 침해의 친구로 침해와 함께 전쟁고아가 되어 절에 들어온 올깨끼이다. 그는 유난히 식욕이 강해서 진작 공부를 포기하고 침해가 법통을 잇게 하려고 뒷바라지를 한다. “먹지 않으면 승이 된다? 관두겠어? 먹지 않는 건 질색이야.”라는 대사는 본능에 충실한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빈 그릇을 깨라”는 화두를 “내 배고픈 것을 지독히 알아라! 그러면 남의 배고픈 것도 몸 저리게 알리라!”라는 깨달음으로 풀어낸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처절한 배고픔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며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을 때 진심으로 공감하고 돌아볼 줄 아는 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절의 양식을 훔쳐다가 병든 중생을 구한 사건은 그의 언행일치를 증명한다. 한편 법통에 매달렸던 침해는 조실스님의 공격적 시험에 맞대응하며 시험을 넘었음에도 법통을 받지 못한다. 조실스님은 침해가 사랑하는 묘혼을 데려다 침해 앞에서 옷을 벗긴다. 원작에서는 그러고 나서 큰스님은 곧바로 죽음에 이른다.6) 영화에서는 묘혼이 옷을 벗자 그녀가 황금 부처로 보이는 숏이 인서트 된다. 그리고 침해는 “여자를 이상하게, 여자를 타락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건 낡은 편견이다. 우리 젊은 사람은 여자를 그냥 건강하게 살려는 한 인간 그대로를 느낀다. 남자와 여잔 같은 거다. 옷을 벗으면 알 수 있을 겁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때 법통을 따기 위해서는 큰스님을 놀라게 하거나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묘혼의 만류를 물리치고 침해는 묘혼과 나란히 알몸이 된다. 이 과감한 행동 앞에서 조실스님은 “넌 젊다. 그리고 천재다.”라고 침해를 인정한다. “그러나 법통은 네 것이 아니야.”라고 결론짓고 쓰러진다. 죽어가는 조실스님을 붙들고 침해와 묘혼이 법통을 내놓으라고 울부짖는 것은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 장면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욕망의 표출로 인해 이 영화는 새로운 문예영화이자 파격적인 불교 영화로서의 힘을 얻는다. 동승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 마음의 고향 > 이후에 나온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에서 예술영화로 대접받은 예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파계 > 이전의 대표적인 영화로는 이광수 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내세운 < 꿈 >( 신상옥 , 1955/1967)이 있다. 그러나 <꿈>은 개봉 당시에 문예영화로 수용되지 않았다. 우선 원작이 이광수 소설이라고는 하나 그 토대가 된 조신몽 설화가 워낙 잘 알려진 옛이야기였기 때문에 ‘문예’로 인식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불교 관련 영화의 경우 기독교를 다룬 영화보다 예술영화로 인정받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종교의 금기가 일반의 도덕률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는 ‘개화’와 ‘서구 문명’을 상기시키며 자연스레 ‘근대문예’와도 겹쳐진다. 게다가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와 결합해왔기 때문에 1960~70년대 국가가 장려했던 ‘반공’과 ‘문예’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용한 제재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전근대적인 이미지를 지니는 데다 승려에게 요구되는 계율이 엄격하고 금기가 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는―갈등을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의 본질상― 금기의 위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는 시각적 매혹을 생명으로 삼는 매체이다. 상상에서만 가능했던 금기의 파괴가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시각적 매혹일 것이다. 그러니 불가를 배경으로 영화는 자연히 ‘파계’를 향하게 된다. < 마음의 고향 >부터 < 꿈 >과 < 파계 >는 물론, < 만다라 >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아제아제 바라아제 >( 임권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율의 위반을 보여주는 것은 이를 말해준다. 그러한 특질 때문에 불가 배경 영화에 대해서는 1970년대까지 외설적인 영화라는 기대 내지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었다. <파계>의 경우에도 지방 흥행업자들이 제목만 보고 “중들이 나오는 외설적인 영화”라 생각하여 제작비를 투자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다.7) 또한 그러한 측면에 대해서는 행정적 검열 이외에도 사회적 검열이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1967년 <꿈>이 개봉될 때 조계종 총무원장까지 나서서 상영을 반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검열은 비구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는 한층 더하여 외설 논란이 불거지고 불교계의 반발도 거세지곤 했다. 이미 <만다라>가 나온 지 3년 후인 1984년에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김지미 가 주연을 맡았던 < 비구니 >가 불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제작이 포기된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불교 영화를 둘러싼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 파계 >에 대한 불교계의 인정 및 정부의 보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선 ‘마성(魔性)’의 작가주의로 성 문제를 다루어 흥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작품성을 성취해온 김기영 감독에 대한 영화계의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김기영 감독이 동아수출공사로부터 국내 최고의 개런티를 받고 <파계>를 연출했다는 것8)은 그것을 입증한다. 한편 불교계에서는 이 영화의 제작을 마뜩해하지 않았으나 ‘파계’라는 제목과 달리 ‘성불(成佛)’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는 당시 한국영화를 둘러싼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한국영화의 불황 속에서 1974년 4월에 개봉한 < 별들의 고향 >이 크게 성공하자 “참신한 방화 만들면 관객들은 몰려든다”9)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편 1960년대 말 이후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아젠다 아래 정책적으로 전근대 전통문화가 소환되었다. 이때 무속이나 민속 등 근대 이후 비판받고 폄훼되어왔던 전근대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 와중에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파계>가 외설 논란을 잠재우며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고 여러 해외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한 것은 이와 같이 복합적인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불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성장담 내지 회고담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작을 김기영 식의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본능과 정치’라는 현실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으로 비화시킨 영화 자체에 있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불가와 승려의 생활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과감한 장면 구성, 그리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기발한 대사와 지금 봐도 충격적인 서사 전개는 이 영화의 파격을 구성하며 ‘외설’이니 ‘종교 모독’이니 하던 당시의 법적·사회적 논란을 넘어서는 에너지가 된다. 이로써 < 파계 >는 금기의 위반을 과감하게 재현하는 것은 물론 현실 문제와 종교적 질문을 접목시키면서도 예술영화로 인정받은 최초의 불교 영화가 된다. 이는 < 만다라 >에 앞서는 것으로, 1970년대에 이루어진 전위적인 영화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1)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도서출판 소도, 2004, 402~403쪽. 2) 김종원, 정중헌, 「우리 영화 100년」, 현암사, 2000, 290~291쪽. 3) 김수남, 「한국영화감독론 2」, 지식산업사, 2003, 182쪽. 4) 이효인 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 열린책들, 1994, 360쪽 5) 나중에 <만다라>의 촬영을 담당하는 정일성 감독이 이 영화의 촬영을 맡았으며, 그는 이 영화로 영평상 기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 소설에서는 큰스님이 죽기 전에 묘혼을 벗겨 보신 것을 두고 노승의 평생소원을 푼 것( “……하긴, 여섯 살부터 입산해서 주욱 중노릇만 했으니, 평생 소원이셨던가 보지요.”)이라는 추측과 아랫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교육의 일환(“이 놈아! 너는 몰라! 침해란 놈 가르치기 위해서야! 일체 중생 가르친 게야!”)이라는 주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결에 묘혼이 달아났는지 침해는 몰랐다. 침해는 여자보다 노승의 열반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 탄운 곡간의 가느다란 연기 끝이 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침해는 어디 갔는지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이다(고은 전집 제31권 「밤주막」(1977) 중 「파계」, 527~528쪽 참조). 7) <김기영 전작전: <파계> 이화시 GV VOD>, 2008.06.23. http://flash.koreafilm.or.kr/kofa2/play_trailer.html?file=trailer/MK004966_P03.mp4 8) 「<破戒>, 촬영 끝내 곧 開封」, 『매일경제』, 1974.6.28., 8면. 9) 「참신한 邦? 만들면 觀客들은 몰려든다」, 『동아일보』, 1974.6.7.,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