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정
- 감독
- 변지우, 이다은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나평화, 강해빈
< 웨건 마스터 >는 여러 면에서 이색적인 서부극이다. 예산은 999,370달러로 포드 서부극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하며, 흥행성적도 당시 포드 서부극의 평균수입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포드의 영화에 여러 번 등장했던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당대의 스타 대신 무명에 가까웠던 벤 존슨과 해리 캐리 주니어(무성영화 시절 포드 영화의 스타였던 해리 캐리의 아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포드의 배우라고 해도 좋을 평생의 영화적 동지였지만 영원한 조연이었던 워드 본드가 여기선 그나마 가장 알려진 배우였다. 또한 이 영화의 스토리는 포드가 스스로 작성했는데, 이것은 1930년 이후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이런 외적인 요소들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포드의 가장 개인적인 서부극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웨건 마스터 >에는 서부극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카우보이(여기선 말 장사꾼), 무법자, 인디언, 정착민 마을, 황야의 횡단, 마차의 질주, 총격전과 같은 전형적 서부극의 관습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술 취한 광대(철학자), 도박과 춤과 노래와 같은 존 포드 서부극의 특징적 요소들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포함한 어떤 서부극과도 닮지 않았다. 극히 단순하고 느리고 천하태평이며 사소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이 기이한 서부극을 두고 포드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했다. 앞서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이 최고의 서부극 마스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고전적 서부극 혹은 관습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그의 비전형적 서부극 중에서도 가장 일탈적인 이 영화를 가장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포드의 편에 선다면(사견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부극은 다시 정의되거나 정의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여기엔 문명과 황야, 동부와 서부, 질서와 무질서 같은 서부극의 기본적 대립항이 아예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착민 공동체도 인디언 마을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집단이며, 그저 마차의 경유지일 뿐이며, 악당들이 등장해 여정을 지체시키지만 짧은 액션만으로 퇴치되어 버린다. 말하자면 < 웨건 마스터 >는 가장 비서부극적인 서부극이다. 장르 연구가들이 포드의 서부극을 다루면서 <웨건 마스터>를 잘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곤경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곤경은 장르 연구가들의 것이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의 것은 아니다. <웨건 마스터>는 우리의 여정에서 가장 멋진 도착지 가운데 하나이며, 또 다른 걸작이다.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100여 명의 모르몬 교도의 마차 행렬과 그들을 이끄는 두 ‘웨건 마스터’(마차 행렬의 가이드이자 한시적 지도자)는 황야의 곤경과 무법자의 위협을 극복하고 모르몬의 정착지를 향해 순례를 계속한다.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극적 장치나 로맨틱한 연애담은 물론, 포드의 다른 걸작들에도 남아있는 감상적 정념조차 없다. 마차 행렬은 몇 차례의 고비를 겪지만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이것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 웨건 마스터 >를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표현한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기엔 마차 행렬의 ‘완만한 운동’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풍경이 있고 인물이 있다면, 풍경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의 움직임을 찍는다는 카메라의 가장 단순한 행위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는 비슷한 뉘앙스로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인물이 다음에 무엇을 하는가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그의 생동의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질베르토 페레스는 그냥 “소박하고도 위대한 영화”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 웨건 마스터 >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유연한 것이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 다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주제와 정조를 집약한 한 장면을 끄집어내 특별한 찬사를 바치고 싶어도, <웨건 마스터>는,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멈추기가 어렵다. 아마도 ‘완만한 운동’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부드럽고도 민첩한 이 영화의 생동감과 역동성이 교류하는 수려한 멜로디는 평자에게 달콤한 패배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 아름다움을 직접 말할 수 없다면, 이 특별한 서부극의 뭔가 다른 점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리라. #1 < 웨건 마스터 >의 이례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풍경의 위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들을 순례하면서 풍경의 초월성을 몇 차례 거론한 바 있다. 사건들이 닿을 수 없고, 물질적으로는 이야기 내부에 존재하지만 그것의 아우라가 이야기를 초월하는 풍경의 이중성은 포드 서부극의 발명이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의 풍경은 인물과 친화한다. 풍경과 인물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매우 가깝거나 거의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달리 말해 인물과 풍경이 서로를 건드린다고, 혹은 인물과 풍경이 동행한다고 말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포드의 다른 서부극에서는 이런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암석봉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으며, 주로 바위산 위에서 등장하는 인디언을 제외하고는 대개 멀리 암괴로부터 떨어져 평원을 걷거나 마차를 달린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 인물은 풍경을 쳐다보고 그것과 접촉하며 때로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샌디는 날카롭게 치솟은 한 암석봉을 쳐다보며 “언젠가 저걸 보고 산타페의 성당을 닮았다고 얘기했잖아”라고 말한다.(#1) #2 #3 #4 그들은 풍경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며, 때로 접촉하고 변형시키며 그들의 여정의 일부로 만든다. 움직임 혹은 완만한 운동이 사건의 일부로 재현되는 게 아니라 순수한 운동 자체로 제시되자 풍경이 움직임을 껴안은 형국, 달리 말해 운동의 초월성이 마침내 풍경의 초월성과 조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풍경과 인물을 함께 담는 쇼트들에서 인물들은 풍경과 가까이 있거나, 아니면 풍경이 보이지 않는 앙각 쇼트로 촬영된다. 마차 행렬을 바위산의 언덕에 길을 만들어서 오른 뒤 그들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2, 3, 4) 물론 이런 표현들은 모두 포드 서부극들에만 통용될 수 있다. 이야기를 지속시키려는 규범적 구심력과 이야기를 잊거나 폭파시키려는 탈규범적 원심력의 긴장이 포드 서부극의 특별한 활력을 빚어낸다. 모뉴먼트 밸리의 거대하고 황량하며 기괴한 형상은 후자의 원심력과 이야기를 넘어선 층위에서 내통한다. 포드의 인물들이 만취해 주정을 부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때로 이상심리의 광기를 보일 때, 혹은 이야기가 자신의 출발점을 잊은 듯 세부에 몰두할 때, 우리는 포드의 세계에 임한 취한 신의 손을 혹은 무심한 우주적 운명의 그림자를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에서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는 내통할 필요가 없다. 구심력의 규범이 사라지자 원심력은 기꺼이 풍경과 친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날뛰는 말(馬)들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말의 동작에 극의 많은 긴장이 걸려있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은 없다. < 웨건 마스터 >는 날뛰는 말들의 서부극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말은 인간의 통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고 그것으로써 인간의 서사에 봉사하지만, 휘파람, 총소리, 뿔피리 소리와 같은 모종의 자극에 날뛸 수 있다. 말이 날뜀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말이 날뜀으로써 말의 순응 능력에 의존한 인간의 운동,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지속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말과 황야의 영화인 서부극의 이상일 것이다. <웨건 마스터>가 그런 영화이다. 말이 순응할 때가 아니라 날뛸 때의 아름다움에 관한 영화이다. #5 말들은 언제 날뛰는가. 말 장사꾼이자 능란한 조련사인 샌디의 휘파람에 날뛴다. 해리는 보안관이 헐값에 말을 산 뒤 올라타자, 동료인 트레비스(벤 존슨)과 눈빛을 교환하고 휘파람을 분다. 말은 날뛰고 보안관은 간신히 매달리다 땅바닥에 처박힌다.(#5) 보안관은 살인강도인 클레그 일당을 추적하는 질서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모르몬교도를 추방하려는(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지만 떠돌이 약장사이자 광대패를 이미 추방한) 문명의 악덕의 집행자기이기도 하다. 포드는 여기서 굳이 이 보안관의 캐릭터를 탐구하지도, 혹은 그가 대변하는 문명과 질서의 본질을 사색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와 거래한 뒤 골려준다. 말이 날뛴다고 문명과 질서가 무너지진 않는다. 다만 동요할 뿐이다. 문명과 질서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동요로서의 유희, 유희로서의 동요일 뿐이다. 그 동요와 유희의 한가운데 날뛰는 말의 약동이 있다. 샌디는 극의 후반부에 다시 휘파람을 분다. 이때도 당하는 건 보안관 일행이다. 수배 중인 살인강도 클레그 일당은 마차 안에서 총을 겨눈 채 대기하고 있고, 보안관 일행은 마차를 수색하려던 중이다. 많은 인명이 희생될 지도 모를 위기의 순간에 해리는 휘파람을 불고 말은 다시 날뛴다. 또 한 번 혼쭐이 난 보안관은 다시 핏대를 내며 마차 행렬을 떠난다. 살육의 총격전은 저지되며 말의 날뜀으로 비로소 말과 인간의 운동은 지속된다. #6 날뛰지는 않지만 날뛰기 직전에 이르는 장면들도 있다. 워드 본드는 분노의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술을 마셔도 안 되는 모르몬교도 행렬의 대장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곧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다혈질의 사내다. 이 사내가 흥분할 때마다 말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동요한다.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한 이 장면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워드 본드의 흥분과 말들의 동요는 감탄스러울 만큼 너무나 적시에 이어져, 마치 계획된 동시화처럼 보인다. 이때 워드 본드와 말은 같은 기질 혹은 같은 운명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워드 본드도 말도 순응과 날뜀 사이를 오가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긴 순례, 오랜 운동을 지속할 것이다. 서사 안에서 종료되지 않는 그 순례는 아마도 그들의 삶 내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의 거친 움직임을 오해해 욕을 쏟아낸 워드 본드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말에게 사과하는 장면(#6)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7 #8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은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발견한 샌디의 외침과 총소리에 마차 행렬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장면(#7)이다. 지금 말들이 총소리에 놀라 날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마른 동물이 물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탈진해 있던 말들이 모종의 자극으로 호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워드 본드는 우왕좌왕하며 “말을 세워!”라고 외치지만, 말도 사람도 듣지 않는다. 그 맹렬한 속도에 흙바람이 몰아치며 마차에 매달려 있던 가재도구들이 우수수 떨어진다.(#8)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데, 가재도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감흥을 느끼게 할 줄은 < 웨건 마스터 >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말의 질주는 고결하고 무구한 천상의 운동이 아니다. 타는 갈증의 표현이라는 동물적 본능의 운동이고, 소중한 가재도구를 찌꺼기로 남기는 불완전한 운동이며, 소란과 무질서의 운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통제되지 않고 통제될 수 없는 움직임이 어떤 악덕도 조성하지 않는 운동, 물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단순하고도 투명한 운동이다. <웨건 마스터>를 순수한 서부극이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말의 순응과 날뜀이 운동의 투명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9 < 웨건 마스터 >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서부극을 잠정적으로나마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서부극은 인간과 말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약속의 땅을 찾아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의 영화다. 그 움직임은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운동이다. 비록 그 인물과 장소가 과거에 속한 것이라 해도 과거에 닫혀있지 않으며, 질베르토 페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미래에 열려있는 과거”이다. 황야의 순례자들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강을 건너고 있다.(계속)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에서 마지막으로 다룰 영화는 <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1940)이다. 자신의 땅에서 유배된 농부 가족의 이야기. 대공황의 여파와 오클랜드 지역의 오랜 가뭄 그리고 땅의 소유권을 독점한 은행과 대기업이 톰 조드의 가족과 이웃 소작농들을 축출한다. 서부로 떠나온 그들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착취와 무자비한 공권력이다.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 밀고자 The Informer >(1935)에 이어 그에게 두 번째 오스카 감독상을 안겼으며 미국 평자들 사이에서 포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종종 언급된다. AFI(The American Film Institute)는 이 영화를 영화사의 걸작목록에서 23번째 자리에 올려놓았고, 앤드루 새리스 Andrew Sarris는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스크린 스토리텔러를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바꿔놓았다”고 극찬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대릴 자눅 Darryl F. Zanuck 그럼에도 < 분노의 포도 >를 말하는 것은 망설여졌다. 다루기 까다로운 점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존 포드의 영화로는 드물게 메시지 중심적인 영화로 보인다는 점과 연관된다. 존 포드는 원작 소설의 사회적 분노와 정치적 발언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분노의 포도>는 사실상 좌파정치학의 메시지를 직접 드러낸 유일한 존 포드 영화이다(이 때문에 2차대전 이후 매카시즘 시기에 포드와 스타인벡은 친공산주의 혐의로 조사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수파로 알려진 존 포드가 이 영화에 얼마나 자신의 창의성과 진정성을 쏟았는지 가늠하기란 어렵다. 평자들이 다루기에 더욱 까다로운 또 다른 문제는 제작자 대릴 자눅의 깊은 연루다. 원작 소설의 판권을 사고 제작의 전 과정을 총지휘한 자눅은 존 포드의 용인 아래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을 직접 연출했고, 자신이 제작한 다른 영화에서도 그랬듯이 편집에 깊이 관여했다. 원작이 현실을 과장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자눅이 이주민 수용소에 위장 이주민을 파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요컨대 < 분노의 포도 >에는 포드와 자눅의 공동연출의 성격이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직접 다루기는 쉽지 않다. 존 포드의 정치학에 대해선 간략하게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작가를 말하는 데 있어 그의 정치학은 평자의 호기심의 대상이긴 하지만 주된 이슈는 될 수 없다. 발자크의 소설이 그의 부르주아 정치학을 배신하듯, 작품과 작가의 정치학은 종종 어긋난다. 더구나 이 연재의 2회에서 살펴봤듯이 존 포드처럼 종잡을 수 없는 모순과 복합성의 존재라면, 그의 정치학과 작품의 내면적 연관을 밝히려는 시도는 헛된 짓일 것이다. 다만 그의 작품이 거의 예외 없이 비판적이고 염세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라 일컬어지는 <역마차>에서조차 창녀와 무법자는 공동체에 통합되지 않고 문명의 저편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로저 에버트의 표현대로 이 영화가 ‘맑시즘과 초월론의 조우’라고 해도 포드가 자신의 신념을 벗어난 영화를 만들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I’ll be there speech’ < 분노의 포도 >가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원작과 공유한 계급정치학이 아니라, 정돈된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일종의 정치적-종교적 강론이 서사를 매듭짓는다. “이제 네 소식을 어디서 들을 수 있니?”라는 엄마의 슬픈 물음에 톰 조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 주위의 어둠 속에 있어요. 어머니가 계신 곳엔 어디에나, 가난한 자의 투쟁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경찰의 부당한 폭력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분노의 함성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아이들의 웃음과 굶주림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사람들이 제 손으로 기른 것을 먹고 제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 곳엔 어디에나 있을 거예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사무치게 구슬픈 노래 ‘The Ghost of Tom Joad’(1995)에도 인용되는 이 유명한 ‘I’ll be there speech’는 시적이며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이것은 포드의 방식이 아니지 않은가. 존 포드는 “영화는 말(words)이 아니라 그림(picture)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고, 현장에서 그가 하는 일 중 하나는 스크립트를 찢어내 대사를 줄이는 일이었다. 소설의 대사를 거의 그대로 옮겨온 이 감동적이지만 장황한 강론은 전과자이자 농부인 주인공의 말이라고 믿기 힘들며, 결말부에서 갑작스럽게 쏟아진다. 이 비약을 어떻게 봐야 할까. Bruce Springsteen - ‘The Ghost of Tom Joad’ 우리는 여기서 몇몇 예외(< 젊은 날의 링컨 > <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 등)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존 포드 영화가 한 개인의 온전한 사적 창작물이 아니라 프로듀서가 주도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 < 분노의 포도 >는 1939년에 출간돼 43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런데 영화 <분노의 포도>는 소설이 출간된 바로 그해 10월 4일부터 11월 15일까지 촬영되었고 이듬해 1월 24일에 개봉되었다. 믿기 힘들만큼 급박한 일정이다. 이것은 <분노의 포도>라는 영화가 제작자 대릴 자눅의 기민한 상업적 기획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 자눅은 라스트 신의 연출자였고 최종 편집자이기도 했다. < 분노의 포도 >에 대한 존 포드의 태도는 자료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1955년에 가진 조지 블루스톤과의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가 “내 암흑기 시절의 작품”이라며 ‘젊은 시절의 일탈’처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인터뷰들에는 정반대의 발언이 담겨 있다. 1973년, 월터 와그너와 가진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분노의 포도>는 자눅이 시켜서 만들었지만 농촌에서 가난하게 자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즐겁게 촬영했다”고 회고했다. 라스트 신도 자신이 자눅에게 연출을 권한 것이었다고 전했다.(「John Ford : Interviews」, ed. by Gerald Peary) 물론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없다. 실은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그는 인터뷰에서 종종 본심과 반대로 말했으며, 설사 본심을 말했다 해도,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창작가의 발언과는 무관하게 그의 작품을 즐기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그가 억지로 만들었으며 실패작이라고 간주하는 < 데이 워 익스펜더블 They Were Expendable >(1945)은 재평가되어야 할 걸작이다.(이 영화는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제작 배경과 관련된 사실을 다소 길게 적은 것은 한 가지 가설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작업한 존 포드에게, 앞서 언급한 몇몇 예외적 영화들을 제외하면, 포드 적인 주제도 포드 적인 이야기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포드 적인 방식, 혹은 포드 적인 쇼트, 포드 적인 리듬이 있을 뿐이다. 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포드 적인 ‘영웅’도 없다. 다만 포드 적인 ‘캐릭터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장이다. 태그 갤러거도 ‘Fordian Hero’를 주요 의제로 삼는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이 가설을 유지할 생각이며 이 점은 나중에 다시 논할 예정이다.) < 분노의 포도 >라는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동적인 연설이나 분노의 격정이 아니라, 포드의 방식이다. < 분노의 포도 >는 아름답다. 이 영화에서 존 포드와 처음 작업한 그렉 톨랜드(존 포드와는 <분노의 포도>와 < 롱 보이지 홈 The Long Voyage Home >(1940)을 찍었으며 이듬해 오슨 웰즈의 < 시민 케인 >을 찍었다)의 촬영은 다큐멘터리적 사실주의와 불길한 악몽의 톤을 부드럽게 넘나들고,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롱 테이크의 투 쇼트와 전통적인 쇼트-리버스 쇼트가 교차하며 우아한 리듬을 빚어낸다. 물론 여기에서도 < 젊은 날의 링컨 >에서처럼 헨리 폰다라는 특별한 배우의 육체와 음성이 그 속도와 리듬을 유연하게 조절한다. 헨리 폰다 많은 평자들은 존 포드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 분노의 포도 >를 시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시적인 것인가. 서정적 풍경, 혹은 시적인 대사인가. 하지만 그건 소재 혹은 촬영감독의 기예, 혹은 시나리오에 속한 자질이다. 그것만이라면 영화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는 옹색해질 것이다. 존 포드 영화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시적 감흥은 특정한 쇼트의 내부 요소들에만 국한되지 않은, 미장센과 움직임 그리고 그들의 배열 전체가 빚어내는 모종의 운율 혹은 오케스트레이션의 효과다. 그 효과는 분석의 언어가 직접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앞에서 톰 조드의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에 대해서 말했다. 원작소설에서는 이 대사가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의 구어체가 지닌, 현실의 구어와는 다른 특별한 문어적 화법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의 각성 과정이 장편소설의 긴 시간과 갖가지 사건들의 경험을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사건들의 극히 일부만 묘사되므로 톰 조드의 마지막 대사는 분명히 부자연스런 비약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비약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비약이 단순히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종의 운율을 빚어내 우리를 이성적으로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 설득한다는 것이다. 나는 앞서 이것이 존 포드의 방식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수정하려 한다. 이것은 존 포드의 또 다른 방식이다. 그 대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 비약을 성립시키는 존 포드의 방식이 경이롭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존 포드의 위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것일 뿐이다. < 분노의 포도 >를 둘러보는 우리의 여정은 이 비약에 관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그리고 간략한 해명에만 한정될 것이다. 초반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 1 # 2 # 3 우발적 살인으로 4년간 복역하고 가석방된 톰 조드는 전직 목사 케이시와 함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존 삼촌 집에 찾아온다. 그는 애타게 가족을 찾아 헤맸으므로 톰과 가족의 조우는 격정적일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그런데 사태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가족들은 지금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1). 식사를 차린 어머니는 문득 창밖을 쳐다보니 톰과 케이시가 등을 보인 채 서 있다(#2). 톰은 무심한 동네 청년과 같은 자세로 케이시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다. 이 장면은 정말 이상하다. 톰은 왜 바로 창을 통해 가족이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문밖에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왜 어머니가 부르자 그제서야 부드럽게 웃으며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일까(#3). 영화의 서사 내에는 단서가 없으며. 소설에는 이 이상한 순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 은밀한 공백 하나가 기입된다. 그것이 사건의 공백인지. 캐릭터에 관한 정보의 공백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사건의 흐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우리의 지각에 미세한 지각의 공백이라는 잔상을 남겨둔다. 아무것도 아닌 이 사소한 순간에 존 포드의 운율의 비밀이 담겨있다고 나는 느낀다. 유사한 계열의 쇼트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다. 막 출옥한 톰은 차주의 지시를 어기면서 자신을 태워준 고마운 트럭 운전수에게 갑자기 공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차를 내리면서 “내 죄목이 정말 궁금하겠지? 살인이야”라고 사납게 쏘아붙인다(#4). 우리는 톰이 왜 갑자기 악의적으로 변하는지 알 수 없다. 이 대목은 소설에 상세하게 나온다. 트럭운전수가 심문하는 듯한 말투의 온갖 질문들을 계속 던지자 톰은 더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하지만 영화에서 트럭운전수의 말과 태도에는 적의를 품을만한 점이 없다. 이 장면 역시 모종의 공백을 만들어내는데, 이번엔 분명히 캐릭터에 관한 정보의 공백으로 남는다. # 4 전자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 후자는 소설의 장면을 축약한 장면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정보의 공백을 만들어 온전한 감정이입을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공백들은 정보들과 동시에 축적되어가며 모종의 운율을 만들어낸다. 온전히 형식적인 것도 그렇다고 내용에만 귀속되지도 않는 이 운율의 구현자는 배우 헨리 폰다의 육체와 음성이다. 이 배우의 연기는 불가사의하다. 그의 조용한 몸짓과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듯한 망설임 혹은 사건에 연루될 수 없는 초연함이, 사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담담함과 분간할 수 없이 혼재되어 있다.(< 젊은 날의 링컨 >과 < 분노의 포도 >, 언젠가 다루게 될 < 도망자 >에서 헨리 폰다의 연기는 영화사에 남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들에서 폰다는 그의 육체와 음성만으로 시네마틱한 순간에 이른다.) < 분노의 포도 >에서 헨리 폰다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건을 넘어서는 과도함이다. 이 과도함은 격정이 아니라 일종의 제스처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사건에 온전히 종속되지 않는 초연함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트럭운전수에게 화를 낼 때, 그는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 화를 내야 하는 운명의 과묵한 수행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삼촌의 집 앞에서 서성일 때,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무거운 운명의 예감 앞에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몸짓과 음성에는 사건과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 빗금의 영역, 공백의 영역이 있다.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공백이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이 성립되는 이유가 납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사건의 공백, 정보의 공백, 그리고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공백이 이루는 전조의 계열이 없었다면, 마지막 순간의 비약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I’ll be there speech’는 깨달은 자의 격정적 간증이 아니라, 가혹한 운명의 담담한 수락 연설이다. 나는 이 연설을 헨리 폰다 아닌 어떤 다른 배우가 말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포드 적인 공백의 쇼트들, 헨리 폰다라는 특별한 자질의 육체가 마지막 순간의 비약을 기적적으로 성립시킨다. (대릴 자눅이 연출한 마지막 장면은 ‘I’ll be there speech’의 비약 이후에 덧붙여져 있다. 톰 조드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자눅이 수고했지만 내 생각에 이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불필요한 사족이다.) ‘영예의 시기’의 네 영화(< 젊은 날의 링컨 > < 역마차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 분노의 포도 >)를 말하면서, 각 영화의 서사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존 포드가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는 세간의 평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의 위대성은 다른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영화는 읽는 영화가 아니라 보는 영화다. 이 단순한 명제를 실행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존 포드의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시기의 영화에 대해 썼다. 다음 여정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을 갖고 생각하며 정하려 한다. 좋은 여름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