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진실누나에 이어 진영이형까지 우리 곁을 떠난 그 현장
- 제작년도
- 2010
봉준호 감독의 영화 < 마더 >(2009)에서 엄마 혜자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부족해서 앞가림 못하는 아들 도준이 있다. 아들을 지켜보느라 손가락이 잘려도 아픈 줄 모를 만큼, 도준은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들이 살인죄로 잡혀가자, 누명을 썼다고 철썩같이 믿고 결백을 밝히려고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결백을 밝힐만한 걸 잘 기억해보라는 혜자에게 아들은 묻는다. “엄마, 그때 왜 나 죽이려고 했어?” 혜자는 잠깐 “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이 죽으려고 했겠어”라고 말하지만 금세 아들 걱정으로 생각이 넘어가고, 그 일이 응어리가 되었을 거라고 면회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아들에게 응어리가 풀리는 혈자리에 침을 놓아 주고 싶어한다. 혜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남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욕해도 내 자식은 무죄라고 외치는 엄마, 문제가 된 아들을 어쩌지 못해 자신의 응어리에 침을 놓고 잊어내려고 춤추는 엄마. 종일 아들만 쳐다보는 혜자의 얼굴에서,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엄마의 다른 자식이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하루 종일 뭐,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야?” 윤인호 감독의 영화 < 마요네즈 >(1999)에서 딸 아정이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전화해 불안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관심 받고 싶어한다. 늦게 들어와서 내가 힘드니 딸에게 일 그만두라 말하며 응석 부리던 철없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남의 아들에게까지 이입해서 “너 엄마 없니?”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 속에서 딸의 엄마는, 아들의 엄마와 다른 존재 같다.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화에 아들의 엄마가 나오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공감을 호소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 열한번째 엄마 >( 김진성 , 2007)처럼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자식으로 보듬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우리형 >( 안권태 , 2004)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은 있어도, 깊은 이해와 고통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딸의 엄마는 다르다. <마요네즈>처럼 엄마는 딸에게 자신을 이해하길 강요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 < 애자 >( 정기훈 , 2009)처럼 보살핌을 받는 것은 아들이여도 엄마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딸이라고 말하는 영화도 있다. 일단 엄마와 딸이 등장하면, 둘 사이를 특별한 관계로 묶는 것은 너무 당연한 듯이 보인다. 스릴러 영화 < 오로라공주 >( 방은진 , 2005)에서 순정이 죽은 딸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순정은 어린 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빠 이제는 알아요.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어린 딸은 오로라공주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시키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아빠를 이해한다는 내용이지만, 엄마가 딸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순정의 표현대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부르는 이 행동은 벌이다. < 비밀은 없다 >( 이경미 , 2015)에서도 노래로 엄마와 딸의 감정을 엮는다. 딸 민진과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아빠가 바람 핀 상대에 대한 분노고, 엄마를 지키기 위해 복수할 계획을 담고 있는 가사다. 오로라공주의 딸이 중학생이라서 자발적인 공감을 형성하기 어려웠다면, <비밀의 없다>에서의 딸은 중학생인 만큼 스스로 엄마에게 공감한다. < 미성년 >( 김윤석 , 2018)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중학교 2학년인 주리와 윤아는 미성년자이지만 정신은 영화 안의 어른에 비교해 매우 성숙해있다. 그리고 그 성숙한 정신은 엄마에 대한 이해나, 엄마의 부족한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리는 바람 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고민하고, 윤아는 바람 핀 상대의 아이를 꼭 낳겠다는 엄마를 세상의 비난 속에서 지키기 위해 고민한다. 주리의 엄마 영주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윤아는 처음부터 엄마가 겪을 고통을 이해하고 걱정하고 있었고, 윤아의 엄마 미희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 이해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엄마와 딸이 이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에 관해서, 엄마와 딸의 신체적 유사성이나 같은 여성으로 사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미성년에서 미희가 윤아에게 “엄마는 아들이 생겨서 든든해”라고 말하는 부분 같은 지점이다. 윤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엄마의 보호자 역할까지 하는 와중에, 엄마는 왜 아직 뱃속에 있는 아들에 대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일까. <마더>에서 혜자는 도준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형사를 만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느냐고 조롱당하는 도준이지만, 반쯤은 남성무리 안에 들어가 있는데 혜자는 이들에게 “도준이와 형제같은” 사람들이라며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딱 그 절반만큼 형사는 혜자에게 친절하고, 진태는 돈을 받았지만 혜자를 위해 일을 해 준다. 그 덕분에 혜자는 남자 무리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력이든 무력이든, 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무리이고, 혜자가 이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들의 존재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남편을 비롯해, 형사와 같은 권력을 가진 남성집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단이 없다. 결국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받는 존재는 권력과 무력을 가지지 못한 딸의 친구이다. 힘이 있는 집단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딸보다 아들의 존재가 필요해 보이는데, 이런 증거는 < 박쥐 >( 박찬욱 , 2009)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주 수요일, 라여사의 집에서는 마작판이 열린다. 공간은 라여사의 것이지만, 마작판의 구성원은 아들 강우의 지인들이다. 그들은 각자 의사, 형사와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 밖에서는 의사의 아내인 이블린과 강우의 아내 태주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마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명백히 눈에 보이는 계급이 존재한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 공동경비구역 JSA >(2000)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계급과 소속에 상관없이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류하는 장면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예시까지 들지 않아도, 남자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부엌 바닥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우가 죽으면서 이 권력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인들은 모두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혜자처럼 죽은 아들을 통해 입성한 권력 있는 남성들에게 도움을 처하면서도, 아들자식이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전복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것을 제지할 능력은 없다. 이런 의심 속에서, 영화 < 박화영 >( 이환 , 2017)에서 화영은 이런 영화들이 말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거스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영은 마치 아들의 엄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화영은 엄마를 자처하며 엄마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자식이 때리면 때리기 좋은 곳을 내미는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화영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룹 안에서 화영은 여자로 여겨지지 않는데, 화영 또한 당연히 엄마를 이해하는 다른 많은 딸들처럼 엄마를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를 찾아가 욕설하고, 인터폰 너머에 있는 엄마에게 침을 뱉는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지켜준 가짜 딸이 자신을 희생물로 삼고 도망간 뒤에 또 새로운 딸을 데리고 와, 그들이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떠든다. 그 속에서 “너네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대사는 오히려 반대로 나는 들어줄 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엄마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토로할 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박화영은 아름답지 않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아들이 권력자에게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는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짐작이, 엄마의 희생적인 애정이 정말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의심스럽게 느끼게 한다. 엄마와 딸은 정말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관계를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흐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한국의 딸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이 영화들에서처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지, 정말 딸이라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엄마의 사랑이 아들과 딸에게 동등하다고 느끼는지. 혹은 박화영처럼 딸은 가질 수 없는 아들의 엄마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기억(記憶) 그리고 각인(刻印) :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단편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 필자는 일찍부터 감성이 발달해 있었던 모양이다. 감성과 관련한 기억에 관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림과 관련한 기억들이 특별하다. 그래서 이번 추천애니메이션은 ‘기억’으로 화두를 열고자 한다. 아직도 나룻배가 있던 낙동강 하류 을숙도에서의 기억은 정확히 나이 7살 때이다. 쌍둥이 남동생에게 갑자기 찾아온 맹장염으로 우리형제는 남들이 농담으로 얘기하는 ‘유치원을 중퇴’하게 되었고, 퇴원 후 바람도 쏘일 겸해서 부산에서 멀지 않은 갈대밭으로 유명한 을숙도의 연못 딸린 조그만 공원을 찾았다. 공원 가운데는 여러 갈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수와 황금빛 능금색 비단잉어들이 여유롭게 노니는 제법 근사하게 가꾼 연못이 있었는데, 그 주변에서 남자 중학생 2명이 야외이젤을 펴고 연못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화판에 그려진 수채화를 처음 본 순간, 투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맑은 그림에 현기증을 느꼈고, 밀려오는 감동으로 넋을 잃고 한참동안 자리를 뜨질 못했다. 또한 한 손에 팔레트를 끼고, 다른 한 손에 있는 붓이 움직일 때마다 사진과는 또 다른 생기를 더해가는 사생화 작업 과정은 지금도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감성적, 문화적 충격이었고 내 머리와 가슴에 뚜렷하게 각인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물학자 데즈몬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이라는 저서에서 ‘기억’들 중에서 강하게 인식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는 기억을 ‘각인(刻印)’이라고 했다. 모리스는 이 책에서 기억과 각인에 대한 내용과 아울러 동물학의 입장서 본 인간의 행태를 여러 가지 예시들로 흥미롭게 풀이하고 있다. 필자는 을숙도 소풍이후 그림을 늘 그렸고, 시간 나는 대로 미술을 접하면서 50십 줄이 되어가는 지금도 디지털 콘텐츠라는 새로운 문화 예술 산업 트렌드에 발맞추면서 어릴 적 좋아했던 그림과 관련된 업(3D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다행(多幸)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러 차례의 해외여행 중에서 ‘프랑스’ 하면 생각나는 것들 중에는 와인에 궁합 잘 맞는 살라미 햄, 느끼한 ‘퐁듀’, 잿빛 대리석 고건축물이 즐비한 파리 시내, 초록바다에 쪽빛 하늘을 담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 앞의 앙티브 바닷가와 만개한 웃음들이 넘치는 미술관 뒷골목 재래시장, 멀건 카레국물에 생선살을 발라 만든 값비싼 ‘부이야베스’와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값싸고 신선한 단 맛이 나는 체리가 부둣가 노점상 수레 위에 수북했던 마르세이유 항구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찐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프랑스행 비행기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보았던 마이클 두독의 단편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위한 출장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파리 드골공항을 경유, 스위스 제네바공항까지 약 14시간의 긴 여정을 위해 여러 권의 책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준비해서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서 제공하는 작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받아 노트북 앞에 놓고 마이클 두독 드 비트(Michael Dudok De Wit)의 작품들 중에서 안시와 관련된 작품을 볼까하면서 작가의 세 번째 단편애니메이션인 ‘아버지와 딸(Father and Doughter)’이라는 제목에서 엔터키를 눌렀다. 고공공포에 대한 두려움과 좁은 이코노믹 좌석에 대한 불편함은 사이다 섞은 막걸리 맛과 비슷한 화이트 와인 맛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고, 잔잔히 흐르는 아코디언 음률로 시작되는 오프닝은 작품에 대한 적절한 기대감을 주었다. 이 작품은 2000년 네덜란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 제 73회(2001년) 아카데미상 단편애니메이션상, 2001년 안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그리고 오타와, 자그레브, 히로시마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4대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면서 세계 각국의 주목을 끌었고 우리나라 PISAF에서도 초청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여러 나라의 관심을 가지게 했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대상의 영광을 마이클 두독에게 돌렸을까? 작품의 도입부는 애잔한 기억을 담을 의지로 와트만 수채화용지에 갈색 잉크로 수묵 기법을 적용시켰는데 미루나무가 길게 자란 강변의 너른 들판을 아버지와 딸이 자전거를 타고 가로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배로 가려다가 언덕위로 올라와 사랑스런 딸을 한동안 다시 보듬고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사라져 간다. 이 장면에서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에피소드’의 영상언어를 풀어가는 작가의 재치, 예리한 관찰과 예민한 감각을 읽을 수 있는데, 강가의 배로 바로 가지 않고 다시 언덕을 올라와 딸을 안아주는 애틋함과 앞날의 비애를 암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에피소드’에 대한 아이로니컬한 예시가 되겠지만 최근 코미디방송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의 ‘발레리NO’라는 코너에서 남자의 거시기가 두드러지는 발레복과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발레리노들의 애로(隘路)를 일련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재미있게 연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린 딸의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귀환에 대한 기대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작가는 자전거에 딸린 기억의 편린들을 엮어 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연애와 결혼, 자녀 양육, 중년기, 노년기에 접어들어 힘없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항상 아버지와 헤어진 강변의 그곳을 자전거로 찾다가, 결국 오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말라버린 강으로 직접 찾아 나서고 마침내 저세상의 아버지를 죽음을 통해 만나게 된다는 내용으로 한 여자의 성장과정과 일대기를 짧고 빠르게 이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짧은 작품이 울음을 견디기 힘들게 하고 필자의 기억에 생생할까? 어린 시절 자전거와 얽힌 아버지에 대한 강한 인상(각인)은 자전거를 동행한 변함없는 딸의 기억과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동경으로 일관하고 있다. 과연 일생을 바쳐 아버지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기다릴 수 있을까? 아버지를 기다리는 애잔한 감정을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자전거와 관련한 에피소드로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 좀 더 몰입하게 되고, 특별한 딸의 감정이 점증적으로 이입 된다. 아버지와 딸과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귀환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을 담은 스토리는 1924년 일본 도쿄제국대(지금의 동경대) 우네노 히데사부 교수와 그의 충견 ‘하치’의 변함없는 신뢰와 우정과도 비견하다. 아키다 견 ‘하치’는 주인의 죽음 후에도 10년간 시부야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다고 한다(이 실화는 리처드 기어 주연의 ‘하치 이야기’로 각색되어 2009년 개봉되었다). 그리고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가 마이클 두독 더 비트 특유의 갈색 모노톤 수묵 표현기법과 캘리그라피 필법은 함축적이면서도 스토리의 집중력을 더해준다. 전깃줄도 자동차도 없는 곧게 뻗은 강둑길, 조용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미루나무, 낭만과 여유를 함께하는 자전거 타기, 찰랑거리는 잔물결소리가 들려오는 강가, 어두운 밤길에 기러기 알보다 길게 비친 자전거 조명등, 충만한 황혼의 요란한 참새 떼 등 유기농 같은 영상들을 엮은 몽타주 기법을 통해 표현한 영상언어는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의 반영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작가는 천천히 흐르는 어두운 분위기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변화 있는 화면구도로 긴장과 이완을 유지시키고, 빠른 시간 전개와 정확한 훅업, 매치 컷 등 다양한 연출로 느슨한 분위기의 속도에 대한 완급을 적절하고 조화롭게 맞추어 간다. 특히, 자연과 물리적 현상에 대한 작가의 세밀한 관찰과 묘사, 그리고 정확한 동작과 개성 있는 캐릭터의 움직임에 대한 섬세한 표현은 유럽 문화와 예술인들이 갖는 한끝 차이의 문화적 우위에 대해 ‘모짜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살리에르식 보리(Bodhi)’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난 영상자료원의 칼럼 ‘그림 없는 글자 책’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창의적인 생활과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필요하다면 0.5Cm의 축석까지도 만들어 쌓는 섬세한 근성들이 모여 문화 대국을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영어와 수학학원이 넘치는 도시에 우리나라 인구의 80%가 모인 이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해 여유와 낭만, 느린 변화와 사색의 패러다임에 대한 욕구불만이 ‘아버지와 딸’을 보던 필자를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은 아닐까? 8분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의 터지는 울음소리를 참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한 잔 와인의 알콜 기운이 사라질 즈음에야 턱에 고인 울음을 감출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감독 마이클 두독 드 비트는 1953년 네덜란드에서 출생하여 스위스와 영국에서 미술을 공부하였고, 1978년 영국 웨스트 서리 예술대 졸업 작품으로 첫 단편애니메이션 ‘인터뷰(The Interview)’를 제작하였다. 1992년 ‘청소부 톰(Tom Sweep)’을 통해 본격적인 독립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4년 아카데미상 단편애니메이션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수도승과 물고기(The Monk and Fish)’를 제작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풍경과 낙동강 하류 근처 을숙도의 고즈넉한 작은 연못가의 중학교 형들의 사생 작업에 대한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이 다뉴브 강변의 잔물결(배경음악 ‘사의 찬미’는 원래 루마니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변의 잔물결’의 앞부분이고, 한편 이곡은 요한시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영향을 받았다)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함께 타던 자전거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그립게 기다리는 애틋함에 대한 기억들이 교차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음과 찐한 감동을 창조한 마이클 두독 드 비트의 ‘아버지와 딸’에 찬사를 보내면서, 성인 독자들에게는 와인 한 잔을 곁들여 감성적으로 한 번 보시고, 관련학과 대학생들이시라면 술이 깬 뒤 아름다운 영상에 대해 차근히 한 번 더 분석해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