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 감독
- 우민호, 이석근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에드리언 줍, 존 거너리
천만 관객을 돌파한 < 변호인 >(2013)을 시작으로 < 강철비 >(2017)와 < 강철비2; 정상회담 >(이하 <강철비2>, 2020)로 이어지는 양우석 감독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느끼는 점은 이른바 ‘대중영화’라는 이름의 덕목이다. 그는 흔치 않게 선명한 장르에 기대기보다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 그중에서도 ‘정치’라는 영역으로부터 소재를 끌어올리는데, 세 작품 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물론 우민호 감독의 < 내부자들 >(2015) 이후 한재림 감독의 < 더 킹 >(2017)을 거쳐 ‘검사’가 주된 캐릭터로 등장하는, 굳이 표현을 갖다 붙이자면 ‘정치 스릴러’ 영화들이 한때 적잖이 붐을 이루긴 했으나, 그의 영화들은 이들과도 궤를 달리 한다. 특히 <강철비> 시리즈는 < 공동경비구역 JSA >(2000) 이후 < 웰컴 투 동막골 > < 의형제 > < 간첩 > < 용의자 > < 베를린 > < 공조 > 등으로 역시 붐을 이뤘던 ‘인간적인 얼굴을 한 북한 사람’이 등장하는 남북 소재 영화들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런 캐릭터보다 남북 관계라는 역학 관계에 더 치중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궤를 달리 한다. 그런 점에서 악착같이 자기만의 길을 걸으려 노력하며 동시대 대중영화가 쉽게 품기 힘든 스토리텔링으로 향한다는 뚝심의 감독이라고나 할까. <강철비>가 쿠데타 발생으로 치명상을 입은 북한 1호(김정은으로 예상되지만 실명을 쓰지는 않는다)가 남한으로 오게 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면, <강철비2>는 2021년을 배경으로 남북미 세 지도자를 한 곳에 모은다.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 정우성 ),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위원장( 유연석 )과 미국 대통령(앵거스 맥페이든)간의 남북미 정상회담이 북한 원산에서 열린다. 북미 사이에서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핵무기 포기와 평화체제 수립에 반발하는 친중 성향의 북한 호위총국장( 곽도원 )의 쿠데타가 발생하고, 납치된 세 정상은 북한 핵잠수함에 인질로 갇힌다. 그렇게 좁은 함장실 안에서 예기치 못한 진정한 정상회담이 벌어지게 된다. <강철비>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강철비2>도 가정법의 상상력으로 밀어붙인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 속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강철비>가 보다 현실적이지만 낯설었던 반면, <강철비2>는 오히려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낯설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벌어진 사건과 무관하게 영화 속 남북미 세 지도자가 현실의 그 세 지도자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빨간 넥타이의 미국 대통령은 누가 봐도 트럼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고(식성부터 성격까지 구구절절 유사점을 찾는 것 자체가 피곤할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다), 외모는 상당히 다르지만 북한 위원장 또한 김정은으로 연결짓는 것이 적절하며, 하늘색 넥타이의 대한민국 대통령도 외모나 연령대는 다르지만 ‘빨갱이 북에 가서 돌아오지마라’라는 글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왔다는 설정만 봐도 대략 속한 정당과 투영된 인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게다가 지금의 우리 관객은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먼저 만나고,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난 뒤인 2019년 6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북측으로 넘어가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남측으로 내려와 문재인 대통령과 3국 정상이 얼굴을 맞대는 모습을 연출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처럼 <강철비2>의 픽션은 현실의 논픽션과 어우러져 힘을 발휘한다. 북한의 내부 붕괴라는 시나리오가 1편과 2편을 모두 관통하고 있다면, 2편에서는 미국까지 끌어들여 현실의 트럼프 대통령이 최초로 북측 땅을 밟은 것처럼 ‘(또 하나의) 최초로 해외에서 죽은 미국 대통령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이 끼여든다. 그것이 오히려 소속 정당에 대한 이미지 개선과 동정론에 힘을 실어줄 것이란 얘기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황당하게 느끼는 관객이라면 ‘만화적 상상력’이란 표현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강철비2>는 통역가나 비서관도 없이 남북미 세 정상이 강제적으로 한 방에 갇혀 동고동락하는 설정을 밀어붙이는 모양새가 꽤 쓸모 있는 풍자란 생각이 들게 한다. 방귀를 뀐 누군가를 질타하고, 실내 흡연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보자면 그야말로 ‘애들 싸움’이나 다름없다. 이제껏 보아온 근엄한 ‘정상회담’이란 온데 간데 없다. 사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보통의 북한 병사들이다. 순수하게 ‘공화국 영웅’을 꿈꾸며 마음 한구석에서 평화를 향한 열망이 있는 그들은 폭주하는 호위총국장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이 팽팽한 밀실 스릴러가 보여주는 미덕의 대부분은 바로 거기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인간적인 얼굴을 한 북한 사람’이 등장하는 남북 소재 영화는 많았으되, 그 영화들의 북한 사람은 하나같이 대한민국 주인공의 시선에서 관찰당하는 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강철비2>는 <강철비>의 최정예요원 엄철우(정우성)보다 더 그 북한 사람들의 시점을 담아낸다. 북한 잠수함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어쩌면 처음으로 북한 그 자체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도, 혹은 북한에 가서 로케이션 촬영을 한 영화라고 적당히 거짓말을 보태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이제껏 보아온 남북 소재 영화들처럼 대한민국으로 온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거기 사는 그들의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영화 속에서 북한 사람들이 얘기할 때 그 자막을 넣어준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른바 ‘서울 표준말’로 자막을 넣지 않고 그냥 ‘북한말’을 소리 나는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으나, 가령 한국영화에서 제주도 사투리 장면이 나올 때 서울 표준말 자막을 쓰는 것처럼, 북한영화에서 북한 타 지역 사투리 장면에서 평양 표준말 자막을 쓰는 것이라도 봐도 될 것이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과 북의 영화가 서로의 영화관에서 자유롭게 동시 개봉을 하게 될 때, 평양 사람들이 <강철비2>를 보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한 인간의 업적과 과오, 명암이 고루 담긴 사실적 전기(傳記) 영화는 더욱 만들기 어려운 것 같다. 예전에 한 원로 가수의 전기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 몇몇 제작자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한 적 있다. 기획은 괜찮지만 내가 강조한 몇 개 에피소드 때문에 모두 힘들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분이 직접 TV에 나와 말씀하신 일화들인데요?” 하지만 당사자보단 그 일과 관련한 다른 이들의 반발이 거센 경우가 많다. 귀신같이 알고서 딴지를 걸어온다고 한다. 피해당사자보다 오히려 가해자 쪽에서 명예 훼손을 문제 삼고 나온다.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왜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내느냐? 내 자식들이 봐도 괜찮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 이런 입장을 가진 모두와 만나서 허락을 구하는 일은 힘들고 괴롭다. TV의 르포 프로만 봐도, 인터뷰만 요청했는데 경찰부터 부르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 에피소드를 빼려니, 이 인물을 묘사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럼 이 분의 전기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요?”, “그냥 픽션으로 만들어. 그게 편해.” 실화를 모티브로 한 범죄물이 주로 이런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가명의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가 나온다고 근원의 현실이 휘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고통이 전시에 그치거나, 2차 가해에 가까운 과도한 표현을 하거나, 연출의 시선이 가해자의 시점과 동일시되어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는 우를 범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꼭 모티브가 된 사건을 검색해본다. 영화에서 현실성과 사실주의를 담보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은 물론 표현의 자유이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다. 내가 오로지 남자들만 나와서 치받고 죽이는 완전 픽션을 볼 때 좀 더 안심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모사(模寫)하는 매체이기에 특별히 민감하게 현실과 선을 긋는다. 그래서 외국 영화의 엔드 크레딧 말미에는 ‘This is a work of Fiction. 이 작품에서 묘사된 이야기, 모든 이름, 캐릭터 및 사건은 허구적인 창작입니다…’로 시작하는 문구가 꼭 들어간다. ‘허구의 면책’을 명시한 조항은 즉 과거에 있었던 소송의 결과다.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 암살 사건을 영화화한 MGM의 1932년 영화 <Rasputin and the Empress>가 고소를 당한 이후로 할리우드 영화에 이와 같은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역시 언젠가부터 비슷한 문구를 넣고 있다.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개인과 단체의 프라이버시와 명예 훼손을 피하다보니, 한국 영화에선 존재하는 고유한 지명조차 없는 지명을 만들어 대체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땅값이 떨어진다고 지역 주민이 반발한다는데, 의외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 속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지역을 자주 접한다. 예민한 관객에겐 가짜 지명이 꽤나 신경 쓰인다. 2시간 동안은 이 픽션이 현실이라는 착각에 온전히 빠져들어야 하는데 적잖은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입장에선, 현실에 없는 지명을 지어내는 순간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 한국사회 같은 핍진한 작품을 쓰려 했는데, 대신 어떤 한국적인 총체의 원더랜드를 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가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차라리 한국 영화용 지명을 미리 정해서 영화사나 작품별로 공유해 쓰면 어떨까? 가령 상남자 픽쳐스라는 제작사에서 만드는 모든 남성폭력영화는 ‘한남시’를 배경으로 한다던가. 그럼 굳이 ‘유니버스’를 따로 만들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농담을 하는 중이다. 한국 영화 전체를 하나의 유니버스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한국 영화는 왜, 이른바 “다이내믹”한가? 한국이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한국의 근대사는 영화화해서 보고픈 온갖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 다이내믹 코리아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뒤흔들고 재정립한 몇 차례 이벤트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여러 번 영상화가 이루어진 10.26이다. 1979년 10월 26일, 종신 집권에 함몰해있던 독재자가 야심한 밤 별채에 여가수와 모델을 불러다 놓고 최측근과 술 마시며 놀다가 정보기관장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였던 유신이 멱살 잡아 끌어내려지듯 막을 내렸으나 민주주의 대신 신군부라는 새로운 도둑들이 나타나 또 다른 유혈을 불러왔다. 그 잔재와 상처는 지금도 남아 현재진행형이다. 유신의 망령까지 오래 남아서, 그 부왕과 영애를 신격화한 추종자들 세력도 여전히 건재하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정확한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궁정동 안가는 독재자의 권력을 국가와 괴리시켜놓은 은밀하고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날 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 경호실장과 충성 경쟁을 하던 2인자이자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못 하는 게 없었다고 할 만큼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가 왜 그날 갑자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되었을까? 거사는 사전에 계획되었나, 순간의 충동이었나? 그는 “혁명적 민주 투사”였을까,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 사건의 맥락 혹은 복선을 찾다 보면 또 다른 미스터리만 만날 뿐이다. 토사구팽 당한 뒤 정권을 저격한 회고록으로 살 길을 노리던 이전 정보부장은 시체도 찾질 못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그는 양계장 모이가 되었을까, 외교행낭 컨테이너에 실려와 청와대 지하 벙커 사격장의 표적이 되었을까? 신상옥 감독의 < 증발 >(1994)은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델로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5.16 군사정변부터 10.26까지 18년의 시간을 밀실에 갇힌 사내들의 히스테리와 궁정동 여인들의 비소로 채운, 유신의 형이상학적 다이제스트다. 만약 한국판 <살로 소돔의 120일>을 찍는다면 바로 이 영화 같을지 모른다. 당시 독재자 역은 (누구도 맡으려는 한국 배우가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계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초대 <스타트렉>의 ‘술루’ 역할로 유명하다)가 이강식 성우의 목소리로 연기한다. 주로 미국에서 찍은 걸로 알려져 있고, 배우의 동시 녹음과 성우의 후시 더빙이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뒤섞이며, 고증과 상관없이 현대 배경으로 옮겨 오프닝부터 곳곳에 80년대 시위 현장을 찍은 실제 기록 영상을 삽입한 이 영화는 아시아 어딘가에 있을 어느 정신 나간 독재정권을 그린 SF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까 조지 타케이가 극중에 그냥 영어나 일본어로 말해도 영화를 보는데 있어 위화감은 전혀 없었을 것 같다. 실제로 감독은 애초 이 영화의 배경을 남미의 가상 독재국가로 옮겨 찍을 계획이었다. 주연으로 진 핵크만을 내정했었다는 이야기가 옛날 뉴스 기록에 남아있다. 파리에서 붙잡혀 컨테이너에 실려 한국으로 온 전 국가보안부 장관( 김희라 )은 이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가 “혁명의 배신자”로서 독재자의 뜻에 반기를 든 계기는 과거 자신의 공작으로 파멸시킨 교수의 딸( 강리나 )과 우연한 조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당하는 끔찍한 폭력을 밀실의 모니터로 지켜보았다. 얄팍한 죄의식을 되갚아주기 위해 놓은 이중의 덫은 황당한 비약이지만, 파리에서 김희라가 요원들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강리나의 피아노 연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독재자 면전에 “누가 당신더러 십자가를 져달라고 했습니까?” 일갈한 친구의 처형을 목격한 현 보안부 장관( 신성일 )은 총구를 돌릴 대상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10.26을 다룬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영화일 < 그때 그사람들 >(2005)은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나온 영화들 중 단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정점에 도달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이 블랙 코미디는 이 글에서 다루는 10.26 소재의 작품 중 가장 희극적이지만, 의외로 객관적이고, 아마도 사실에 가장 근접한 해석이란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는 이 작품 이후 정치적인 소재를 놓고서 대범하게 낄낄거려본 적이 없다. 대책 없이 저질러진 거사는 예정된 실패를 향한다. 영화는 권력자와 2인자들 사이 암투보다는 그들 바로 아래의 하수인과 관련자들에게 집중한다. 엄한 시간 엄한 장소에 있었던 실무자들과 두 여인의 비애가 있다. 압권은 오프닝에서 “어르신”의 성은을 입은 딸의 몸값을 셈하러 왔던 극중 명칭 ‘철없는 엄마( 윤여정 )’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에필로그 속 그들의 말로다. 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이 한 짓들 보라는 식의 말투로, 관객의 입장에서 이 황당무계한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실소한다. 취조실에서 얻어맞는 정보부장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 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는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렇게 말하고 끝이다. 어르신의 실제 장례 영상이 나오는 엔드 크레딧에서 오열하는 시민들까지 보면 관객의 실소는 웃다 못해 울고 싶은 기분으로 변한다. 공교롭게도 현 시점에서 코로나 직전의 마지막 극장 흥행작이 되어버린 < 남산의 부장들 >( 우민호 , 2019)은 앞의 영화에서 관심 있거든 찾아보라고 한 그의 진술을 마지막 장면에 실제 음성으로 들려준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김충식의 논픽션이 바탕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을 실명으로 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이럴 거면 원작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그들의 이름을 이 시대에까지 볼드모트 취급을 해줘야 하나? 글 서두에서 장황하게 떠든 만큼,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쉬운 대목이었다. 겁쟁이들은 용감한 자가 먼저 간 길을 따라 가고 싶으니까. “이 영화는 1979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바탕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40일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 [남산의 부장들]을 바탕으로 실제 사건에 기초했으나, 일부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임을 밝힙니다.” 나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가 결말에서 굳이 실명의 인물들을 보여주며 끝내는 것이 영화적으로 옳은지 고민했다. 보안사령관의 수사 발표와 중앙정보부장의 최후 진술은 군더더기인가 아닌가?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 끝에 가선 픽션 밖의 사실을 갈구한다. 어떻게든 사건의 의미를 찾으려는 발버둥처럼. 그러나 결국 이것도 영화가 선택한 해석으로서의 사실일 뿐이다. 결국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마음이다. 누구는 왜곡이라 할 것이고 누구는 정론이라 할 것이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 선택을 안 하는 류의 패착을 나는 오히려 완전 픽션인 < 인랑 >( 김지운 , 2018)에서 보았다. <남산의 부장들>은 연출자의 선택이 분명한 영화다. 그날 밤에 각하에게 총을 쏜 부장은 적어도 혁명과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고민했다고 보는 믿음이다. 야간에 허가 없이 누구도 통행하지 못하는 불 꺼진 세계 속, 야근하는 부하를 불쑥 찾아와 손수 술을 따라주는 상관( 이성민 )이 살갑게 속삭인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손 안대고 코 풀기의 미학. 영화는 가장 야비한 용인술로서 권력자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서 조명이 꺼지고 권총을 바꾸러 내려간 부장( 이병헌 )이 돌아와 거사를 마치고, 흥건한 피에 미끄러진 다음 일어나 안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롱테이크로 찍어낸 장면은 연기와 연출과 기술이 합쳐진 한국 영화의 밀도가 지금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왔는지 가늠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그래서 10.26으로 야기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게 집어주는 미덕이 있다. 나라를 훔친 새로운 도둑.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묘사된 보안사령관( 서현우 )이 어둠 속에 나타나 씬을 훔치고 나라를 훔치는 장면은 섬뜩하다. 10.26을 다룬 이들 세 편의 영화는 거의 10년 주기마다 나온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10.26 소재 영화를 계속해서, 가능하다면 매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온갖 연출자와 작가와 배우들이 이 사건을 끊임없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표현해줬으면 좋겠다. 전 배역이 여배우들로만 이루어진 10.26은 나만 보고 싶은가? 완전히 작정하고 아이돌 주연의 BL로 만든 10.26은 어떤가? 가상 독재국가의 근미래 SF로 옮겨 외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10.26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날 밤의 진실은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현실은 아마도 그 어떤 작품의 묘사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고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활발한 해석은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진실을 요구한다. 10.26 사건은 근대사가 우리에게 준 한국 고유의 원천 스토리 콘텐츠다. 셰익스피어가 부럽지 않은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조합이 여기 있다. 반인반신이었던 국가 원수가 총 맞아 죽는 이야기는 전 세계 관객 대상으로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인류 보편적으로 재미있고 유익하며 교훈이 넘친다. 이미 죽은 자의 추종자들과 아직 살아서 침묵하길 원하는 자들은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 만들기를 계속 어렵게 만들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자유는 국가가 보안 아니 보호해주어야 옳다. 권력자들의 압제 아래 엄혹한 세월을 피와 눈물로 버텨온 피해당사자이자 그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보고 즐길 자격이 있다.
오늘은 영화 한편을 보자. 가까운 대한극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열 개의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옛날에 비하면 작고 초라해 보인다. 1968년 나는 이 극장이 자주 제작한 춘향을 만들었는데, 1,800명 중에서 뽑힌 홍세미의 간판이 무척 크고 화려했다. 프로를 살펴보니 외화보다 한국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아 흐뭇했으며 그 중에는 영광의 < 피에타 >도 붙어 있었다. 나는 개봉 첫날인 영화들 중 무작위로 < 간첩 >을 골랐다. 간첩이란 단어는 요즘 분명히 퇴색하고 잊혀진 죽은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살아있었다. 박력 있고 짧은 숏이 정신없이 이어져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간첩이란 고정관념을 넘어선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감독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제일 좋아한다. 남파 22년차 김명민 은 가짜 비아그라 장사이자 선량한 가장으로 남매를 키우며 생활고에 찌들어 지금은 간첩이란 정체성조차 가물가물하다. 남편 없이 시각장애아를 키우는 부동산 억척 아줌마 염정아 는 맵시가 있다. 한우를 사육하며 FTA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몸짱, 얼짱 정겨운 . 마누라가 죽고 혼자 사는 치근한 변희봉 . 이들 간첩은 완수해야 할 미션이 달갑지 않지만 ‘본분을 잊지 말라’는 북쪽 최고 암살자 유해진 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날로 달라지는 남쪽사회에서 살다보니 현실에 고통 받는 소시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15세 때 처음으로 간첩영화 <당신을 노리고 있다>를 봤는데 그 내용은 2차세계대전 때 적의 스파이를 경계하라는 계도성이 강했고, 간첩으로 나오는 배우가 험상궂었다. 그리고 먼 훗날 나도 감독이 되어 <고발>(이수근 이야기), <삐에로와 국화>(이병주 소설) 등 간첩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박노식, 신성일 같은 선남들을 출연시켰지만 반공이라는 계도성을 희석시킬 수는 없었다. 해킹 한 번에 미국 국방부 정보망까지 뚫리는 세상에 김명민은 정보수집의 사각지대에서 머물러야했고, 변희봉은 박통시절이 좋았다고 푸념한다. 날만 새면 친북세력 운운하며 싸움질하는 정치권이 잠시 야유 당한다. 유해진 은 변신을 잘하는 배우다. < 이끼 >에서 팔푼이로 열연했는데 이번에는 찬바람이 부는 냉혈한이 된다. 그가 서울에 나타났을 때, 간첩들은 비로소 사명감을 깨닫고 모여들지만 무장하라는 지시에 김명민 은 권총을 파묻어둔 자리에 고층아파트가 섰다고 했고, 염정아 는 총알이 없다고 한다. 정겨운 은 소가 권총을 밟아 고장, 변희봉 은 분실했다고 말해 혼쭐이 난다. 결국 이들의 작전은 북에서 6자회담에 참가했던 이승호를 암살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는 탈북해서 서울의 어떤 기관의 보호를 받고 숨어있었다. 암살단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단 1초도 착오가 없는 행동으로 그를 제거하려 들지만 경찰은 이미 그 정보를 쥐고 있다. 영화는 여기서 더욱 숨 가쁜 템포로 진행된다. 비 오는 밤 전선을 끊고 습격하지만 이승호는 이미 이동을 끝낸 후였다. 추격과 도주하는 차량이 무서운 속도로 묘사된다. 그리고 드디어 백주 노상에서 화려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충무로 시대를 살던 감독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압도적인 물량을 쏟아 붓고 있다. 수 십대의 자동차가 충돌해서 부서지고 불타고 그 사이를 누비며 저격수들의 불 뿜는 총성이 고막을 찢는다. 이때 드라마는 적과의 싸움보다 내무 분열로 반전된다. 김명민은 유해진을 공격한다. 두 사람은 초인간적인 격투를 벌이는데 고가도로에서 추락하면서도 치고받는다. 이 시간 운동장에서는 야구배트를 쥔 김명민의 아들이 납치의 표적이 된다. 나는 이 영화의 끝 장면을 굳이 밝히지 않지만 할리우드 액션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은 하고 싶다. 지금 남한에는 5만 명의 고정간첩이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실벽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평범한 척 하고 있다. 생각하니 오싹해진다. 이것만으로도 우민호 감독의 메시지는 충분하다. < 간첩 >은 분명히 추석 오락영화이다. 처음부터 상을 타고 예술 운운하는 헛소리는 하지 않고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완성도 높은 오락영화,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영화의 주류이며 영화산업의 조건이다. 나는 크레딧 끝에 떠오른 제작자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앞으로도 건전하고 재미있는 오락영화를 많이 만들어줄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