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배우를 만나다 - 우연정
- 제작년도
- 2008
본인이 이원세 감독을 처음 만난 때는 1969년 초 가을로 생각된다. 태창흥업에서 ' 문정왕후 ' < 나봉한 감독> ' 마지막 편지 ' < 최훈 감독> '돌아오지 않는 다리' < 고영남 감독>등의 작품을 계속 쓰고 있을 때였다. 이원세 감독이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있을 때인데 하루는 태창흥업의 제작상무인 최재호씨가 본인에게 좋은 친구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하며 소개해 준 이가 바로 이원세 감독이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구, 잘 생긴 얼굴하며, 귀를 덮은 더벅머리, 당시 우리가 좋아하는 사나이 모습이었다.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김수용 감독이 연출해 크게 성공한 작품 ' 수전지대 '의 시나리오를 쓴 이가 이원세 라는 사실에 금방 그와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 작가와 감독 지망생이 만났으니 작품 하나쯤은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고 의기투합, 경비는 최재호씨가 충당해 줘, 본인과 이원세 감독은 제주도로 급행, 작품 쓰기에 전력을 다 했다. <하니문 · 하우스>라던지 <성산 일출봉>, <외돌개>며 <사자바위>, 우리가 가 보지 않은 제주 구석은 없었다. 제주에 온지 두 달 만에 '꿀맛'이라는 제명의 작품을 완성했다. 신성일 , 문희 가 주연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녹음을 마치자 문공부에 영화 검열을 신청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명 '꿀맛'이 문제가 되었다. 남의 집 아내를 사랑한 불륜이 어째서 '꿀맛'인가? 제명을 바꾸라는 통첩이 떨어졌다. 이원세 감독은 자기의 첫 작품의 제명도 사랑스러웠던지 여러 곳에 '꿀맛' 제명을 쓰게 해 달라고 했지만, 서슬이 퍼렇던 군사정권이었고, 가는 곳마다 정보부 파견관이 있어, 그들의 말이 곧 법이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제명을 ' 잃어버린 계절 '로 바꾸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주인공 소라는 결혼식을 올리고 시집의 큰 목장에 들어오지만, 남편은 오랜 항해를 위해 집을 비우게 된다. 소라는 시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나, 치미는 뜨거운 열기로 긴 밤 잠 못 이루곤 한다. 이 목장 하인의 아들인 정신 이상자가 몰래 소라의 침실을 가끔 훔쳐 보곤 한다. 천우신조였을까 ? 넓은 목장 안에 꿀 채집 차가 들어온다. 소라 앞에 양봉쟁이 청년이 나타나 반찬도 얻어 가고, 물도 얻어 먹으며, 그만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의 유희를 정신 이상자가 가끔 몰래 훔쳐 봄은 물론이다. 시아버지는 소라의 불륜을 알고 오래도록 고민 하다가 소라를 청년에게 주려고 결심, 청년을 불러 소라를 부탁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이제는 자유라며 굳게 쓸어 안고 또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이 광경에 질투를 느낀 정신 이상자는 양봉쟁이 청년을 살해하고 만다. 이에 소라도 목장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1971년 8월에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관객 9만여 명이 든 작품이었다. ' 기로 , 72' ' 흑지 , 72' ' 나와 나 , 72' 이 작품은 최무룡 , 하명중 , 우연정 이 주연한 작품인데 스토리는 <대학 중퇴생인 유진이 외삼촌의 부름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외삼촌이 준 자가용 한대를 가지고 귀국한다. 부산에서부터 가지고 오는 차로 인해 재일 교포로 인정받게 되고, 가짜 교포 행세를 하느라 사기도 치고, 점점 범죄의 포로가 돼 슬프게 살다가 가짜 이름인 <히라오까 유지로>로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이 작품으로 <청룡 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받는다. ' 방년 18세 , 73' ' 석양에 떠나라 , 73' ' 특별 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 74'는 신일룡 , 윤소라 , 이대엽 이 주연했으며,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배태옥은 해방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철저한 공산주의 신봉자인 남편 황룡에게 휘말려 남노당 당원으로 조국에 침입해, 경찰에 잡혀 형을 받아 수감생활을 할 때 6. 25사변이 터져 서울의 감옥은 깨어지고, 배태옥은 석방 돼 <서울여성동맹위원장>이 되고, 공산당을 위해서 온갖 악행을 다 부린다. 9. 28 수복이 되자, 월북하지 못한 배태옥은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를 받으나, 과거 독립운동을 했다는 공 때문에 20년으로 감형, 20년의 옥살이하고 난 그 인생은 이미 끝나 있더라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아세아 영화제>에 출품돼 윤소라 씨가 <주연 여우상>을 수상한 바 있다. ' 특별 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 74' ' 아빠하고 나하고 , 74' ' 만나야할 사람 , 74' ' 빵간에 산다 , 74' ' 인간 단지 , 75' ' 특별 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 , 75' ' 꽃과 뱀 , 75' ' 목마와 숙녀 , 76' ' 광화문통 아이들 , 76' ' 엄마 없는 하늘아래 , 77' ' 악어의 공포 , 77' ' 속 · 엄마 없는 하늘아래 , 77' ' 철새들의 축제 , 78' ' 병아리들의 잔칫날 , 78' ' 전우가 남긴 한마디 , 79' 는 진봉진 , 장혁 , 전영선 이 주연한 <40번 뺏기고, 38번 찾은 158고지의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적의 천년 요새를 파괴하기 위해서 특공대가 조직되고, 여럿의 특공대가 전사 하면서 적의 천년 요새에 침투, 시한폭탄을 장치하고 살아 남은 대원들만 귀대하는 순간, 적에게 발견돼 적의 추격을 받는다. 이에 늙은 장상사가 나서며 적들을 자기가 막을 테니 모두 떠나라고 외친다. 대원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장상사를 버리고 자리를 떠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이 작품으로 80년 <백상대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 땅콩껍질 속의 여자 , 79' ' 돛대도 아니 달고 , 79' ' 태양을 훔친 여자 , 79' '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80' 이 작품은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는 소설가 조세희 의 작품을 영화한 것이다. 주연은 안성기 , 신우철 , 장미희 가 했으며, <행복동에 사는 난쟁이 김불이의 가족이 일으키는 부동산 투기의 전말을 그린 영화다>. 이 작품의 우수성을 이제 다시 말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할 이야기는 하고 가야할 게 아닌가? 유신 독재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이미 두 차례나 지나 간 터에 <행복동>처럼 못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떠들 때 이 영화가 나왔으니 문제였다. 그러나 대종상 영화제가 며칠 남지 않은 날 <문화공보부>의 영화 담당자가 이원세 감독에게 전화를 했단다. 이번 영화제에 귀하가 연출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으니 그 날 모두 양복을 입고 나오도록 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단다. 그런데 이원세 감독의 작품이 사회성을 망각했다는 이유로 영화제 시작 두 시간 전에 딴 작품들로 바뀌었다니, 그때의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그때 정말 영화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나중에 미국에 살면서 이원세 감독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 하늘이 부를 때까지 , 80' ' 매일 죽는 남자 , 80' '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 80' ' 하와의 행방 , 82'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82' ' 3일 낮 3일 밤 , 83' ' 이방인 , 84' ' 그 여름의 마지막 날 , 84' 이 영화는 하재영 , 나영희 , 박근형 이 주연했으며, 스토리는 <대학 지하 서클에서 공산주의 이론으로 자라난 영철은 학교 소요 사태의 주범이 돼 경찰에 쫒기자, 일본으로 밀항, 조총련의 신기화를 만나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간다. 그러나 영철은 북한의 엉터리 선전을 보자 북한 탈출을 시도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북의 손에 희생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대종상 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 여왕벌 , 85'는 이혜영 , 조용원 , 이주성 주연이었고, 스토리는 <영어회화 선생인 미희는 외국인과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자 방황하며, 이태원의 <여왕벌>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첫사랑의 남자 경수가 악의 수렁에 빠져 있는 미희를 구출하려고 하지만 미희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한편 동생인 정희가 미국인을 데리고 나타나 언니에게 과시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 스티브란 사나이는 다름 아닌 미희에게 사랑의 상처를 준 남자며, 그가 하는 일은 여자를 울리는 악한 사나이의 표본이었다. 미희는 동생을 구출하려고 스티브를 유혹해 그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또 반미 사상이 깊이 깔려 있다고, 수시로 정보부에서 오라는 호출이 수십 번이었단다. 이때야말로 영화를 그만 두고 평범하게 살겠다고 결심했노라고 이원세 감독은 후일 본인에게 말한 바 있다. 처남의 <미아리 양말 공장>도 망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 독촉도 받고, 정보부에서의 태도가 이원세 감독이 조국을 떠난 커다란 원인이었으리라. 본인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 뉴욕 Ch. 25 한국 텔레비전 방송국의 보도담당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사무실을 꾸미기 위해 <크리스마스 · 트리>를 사려고 <롱아일랜드> 큰 시장엘 나갔다가 먼 발치서 아는 얼굴을 언뜻 보게 되었다. 분명 이원세 감독의 얼굴이었으나 당시 <크리스마스 · 트리>를 팔고 있는 모습만으로는 이원세 감독으로 짐작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눈을 여러 번 의심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이원세 감독이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미아리>에서 <양말공장>을 하는 처남의 사업이 잘 안돼 이원세 감독이 영화계 여러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처남의 공장을 도와주는 처지라고 하던데 그 공장이 쓰러지고, 이원세 감독은 빌린 돈에 떠밀려 미국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으나, 이원세 감독 이야기를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문화공보부>로부터 11개 부문이나 <노미네이트>됐다가 수상 두 시간 전에 다른 작품으로 바꿔진 일이며, 이태원 <여왕벌>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그린 것이 <반미사상> 때문이 아니었냐고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을 해 대 고국을 떠나 미국에 오게 됐노라고 이야기했고, 그 이유 중에는 가까운 영화계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 처남을 도와주고 공장이 망해, 돈을 돌려주지 못한 것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뉴욕에 함께 살면서 가끔 이원세 감독을 만나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인 배순미 여사와 외아들 승준이도 잘 크고, 공부도 잘하고 있다고 했다. 그후 이원세 감독이 큰 상가에 점포를 연 일이며, 그가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살던 어느 날 본인이 이원세 감독, 전우열 감독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영화계를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북 영화제'나 한번 해 보자고 제의했고, 두 사람도 찬성해 뉴욕 제1회 '남북 영화제'를 주동진 님의 주선으로 열게 되었으며, 북에서 엄길선, 홍영희 , 오미란 등 <인민배우> 8명이 참석했고, 우리 남에서도 신성일, 태현실 등 10여명이 참석해 아주 훌륭한 영화제가 되었다. 이원세 감독,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형이 뉴욕에 안 계신 이유를, 여러 사람이 본인에게 들려 주었지만 이형! 나는 압니다. 몸이 좀 불편해 사람을 만나는데 조금은 부담스런 모습이지만 열심히 그 치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형! 어서 빨리 그리다 만, 초상화를 완성해야 하지 않습니까?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이원세 감독! 이두형 (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40년 11월 16일 평양 출생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국학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1년 < 잃어버린 계절 >로 데뷔 <수상 경력> 1973 청룡상 신인상( 나와 나 ) 1974 아세아영화제 주연여우상(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 1981 백상대상 감독상( 전우가 남긴 한마디 ) 1984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그 여름의 마지막 날 ) <작품 연보> 1972 기로 / 나와나 1973 방년18세 / 석양에 떠나라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1974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 아빠하고 나하고 / 만나야 할 사람 / 빵간에 산다 1975 인간단지 / 특별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 / 꽃과 뱀 1976 목마와 숙녀 / 광화문통 아이 1977 엄마없는 하늘아래 / 악어의 공포 / 엄마없는 하늘아래(속) / 1978 철새들의 축제 / 엄마없는 하늘아래(병아리들의 잔칫날) 1979 전우가 남긴 한마디 / 땅콩껍질 속의 연가 / 돛대도 아니달고 / 태양을 훔친 여자 1980 매일 죽는 남자 / 하늘이 부를 때까지 / 그대앞에 다시 서리라 1981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2 하와의 행방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83 3일낮 3일밤 1984 이방인 / 그여름의 마지막 날 1985 여왕벌
우연정 (禹演征. 본명 朴希子)은 1970년도 노진섭 감독의 ' 사랑을 빌립시다 '로 영화배우가 되었고 10년 뒤인 80년도에 이원세 감독의 ''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를 끝으로 배우생활을 마감했다. 직업 배우에게 10년 경력은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연정은 그 10년 동안 10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고 70년대 중반까지 가장 주목받는 신세대 여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대학 다닌 여배우가 흔치않던 당시에 서울 예고와 숙명여대 무용과를 다닌 재원이란 점과 재학중에 어느 스타킹회사가 주최한 '제1회 전국 각선미대회'에 뽑힌 화제인물이란 점이 그녀의 줏가를 높였다. 실제로 감독들은 영화속에서 그녀의 미모와 각선미와 유연한 몸매를 어껗게 성공적으로 상품화 하느냐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정 의 최대 강점은 예리한 감각과 활달한 성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항상 남보다 한발 앞서는 감각과 화술과 사교술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한 두감독에게 얽매이지 않고 이감독 저감독 여러 감독의 다양한 영화에 출연할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활달한 대인 관계 덕이라고 본다. 문학에도 재질이 있어서 시도 쓰고 수필도 썼다. 그녀는 두권의 책을 써내어 화제를 일으켰다. 80년도에 펴낸 '그대앞에 다시 서리라'와 90년도에 나온 '삶의 무대에는 아무도 대신 서주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전자는 그녀가 골수암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후 그 비참하고 절박했던 생활을 그린 투병기인데 한동안 베스트 셀러가 되었었다. 후자는 그 뒤 10년을 치열하게 살면서 겪고 깨달은 삶의 단상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로 한 여성지에 연재된후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뜻밖의 암선고로 임신 6개월만에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을 때 나는 내 인생이 완패했다고 단정했었다. 그런데 절망 속에서도 한가닥 살고픈 마음을 내 주위에서 항상 불러 일으켜 주었고 그것이 어언 10년이 되었다. 여러 배색으로 짜여진 나의 목발인생. 그 10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는 지금 나는 이렇게 허탈한 것이 ,이렇게 상처투성이 인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90년도에 펴낸 '삶의무대--'책머리에 우연정 은 이렇게 썼다. 다리를 잃은 脚線美의 여왕 필자가 우연정 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년도 ' 그대앞에 다시 서리라 '의 시사회장에서 였다. '각선미의 여왕'이라던 우연정이 한창 나이에 오른쪽 다리를 통째로 들어 내고 외다리로 서서 연기한 눈물 겨운 영화다. 다리를 잃은 각선미의 여왕이라니, 그 심신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그녀가 생사의 고비를 넘으며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그 투병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인데 채 치료가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우연정은 항암제주사를 맞으며 그 어려운 촬영을 해냈다. '--다리의 절단도 문제였지만 항암제 주사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 정말 카메라가 머물 곳이 없었다. 감정을 잡고 연기를 하다보면 그냥 가발이 벗겨져 버리는 것이다.--그걸 주으러 다니는 사람이 소품부에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기도 했다.--10센티의 다리만 있어도 의족착용이 쉽다는데 대퇴부 절단의 불편은 엄청났다.' '목욕 도중 다리에 이상이 온 것을 발견하는 장면을 찍을 때 머리카락이 다 빠진 나에게 이원세 감독은 수건을 쓰게 했다. 탕 안에서 내 얼굴 표정만 찍고 나를 안아 밖으로 나오게 해주면 두다리가 있는 대역이 들어가 멀쩡할 때의 다리를 찍고, 다시 나를 탕안에 넣어주면 소스라치는 표정을 찍고 ,다시 대역이 들어가 분장한 다리를 찍고--이때 연출부에서 우리를 준비시킬 때 이렇게 불렀다. 얼굴 스탠바이--,다리 스탠바이--,다시 얼굴 스탠바이--' 보통의 결심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고역이었으나 우연정 은 계속되는 통증과 항암치료의 고통을 극복하고 이를 해낸 것이다. 그 초인적 집념의 배경을 그녀는 수기에 이렇게 썼다. '죽음의 그림자만이 뒤따를 때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더없는 힘이 되었다-스탭들과 촬영장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나의 살아있음의 확인이었고 스탭들은 다시 돌아오는 나에게 항상 박수를 쳐 주었다.' '幸運'으로 演技 開眼 사족같은 얘기지만 필자는 당시 영화담당 기자로 뛰면서 우연정 출연 영화는 데뷔작에서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거의 다 보았다. 대표작을 꼽는다면 ' 나와나 '( 이원세 감독') ' 들국화는 피었는데 ' ( 이만희 감독) ' 빵간에 산다 ' (이원세 감독) ' 행운 ' ( 주동진 감독) ' 나는 살아야 한다 ' ( 최하원 감독 ) 그리고 위 의 ' 그대앞에 다시 서리라 ' 를 들수 있다. 이중 '나와 나'는 데뷔 2년생인 우연정 에게 72년도 대종상의 신인연기상을 안겨주었다. 대종상의 부문상중 가장 경쟁이 심한게 이 신인상이기 마련인데 우연정은 이 상을 쟁취함으로서 순탄한 연기가도를 보장 받은 셈이었다. 위에서 지적했듯 우연정에게는 각기 내로라하는 야망있는 감독들이 출연 교섭을 해왔으며 그래서 그녀는 애정 멜로영화 스파이 추리영화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박노식 의 ' 작크 '같은 액션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섭렵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연정의 영화속 캐릭터는 대부분 그녀의 이미지 그대로 활달 발랄한 첨단 여성이었다. 비극속의 청순가련형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신세대 여성상이었고 그게 제격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주동진 제작 감독의 ' 행운 ' 이다. 국내 굴지의 영화 제작자로 당시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을 가졌던 주동진이 감독으로 변신하면서 그 야망을 쏟은 영화인데 그만큼 규모나 물량 면에서 화려했다. 출연진도 김진규 도금봉 신일용 백일섭 쓰리보이 이기동 튀스트김 등 당대의 인기스타들이 동원된 가위 올 스타 캐스트다. 이 영화에서 우연정 은 6명의 남자배우 상대역으로 주연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일약 대기업의 후계자가 된 처녀 재벌 총수역이다. 6명의 신랑 후보들이 이 일등신부를 차지하려고 펼치는 갖가지 구애작전이 주요 내용인데 새마을 노래가 깔리고 변화하는 서울, 국토개발 건설현장이 배경을 이룬다. 히로인이 선택하는 신랑감은 결국 겉멋 든 미남이 아니고 묵묵히 일하는 산업 일꾼이라는 것으로 70년대 정부시책에 맞춘 정책영화의 하나이다. 하지만 우연정 은 이 작품에서 놀기 좋아하는 철없는 말괄양이에서 권위 있는 기업주로 변모해 가는 心象을 비교적 잘 그려냈다. 그래서 이작품으로 연기개안을 했다는 평을 들었다. 사업가로 다시 섰다 우연정 의 마지막 영화 '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 는 실화를 사실 그대로 그리는데 충실한 작품이다. 까닭에 이 영화에서 웃음이나 유머같은 영화적인 재미를 찾을 여유는 없다. 넌 픽션 영화의 함정이다. 하지만 우연정에게는 삶의 의욕을 되찾게한 기념비적인 영화이며 필생의 역작임에 틀림 없다. 관객의 평판도 대단해서 그해 대종상의 특별상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그녀에게 상을 안겨주었다. 매스 컴은 다투어 우연정의 '인간승리'를 보도했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이제 우연정 은 그녀가 거둔 인간승리의 결실들을 바라보며 경기도 부평의 안락한 아파트에서 안정되고 넉넉한 50대를 보내고 있다. 생후 6개월에 엄마와 함께 영화에 나왔던 큰딸 민들레(23)는 러시아 볼쇼이 무용학교에서 무용공부를 하고 돌아와 광고모텔을 하고있으며 그 아래 민나리 민비 두딸은 현재 대학 연극영화과 재학중이다. 엄마를 닮아 포토제닉한 미모의 세 자매는 기회가 되는대로 영화에 나갈 생각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31살에 영화배우의 꿈을 접고 인생 完敗의 절망감에 빠졌던 우연정 --그러나 그녀는 절망과 불구를 딛고 일어나 사업가로 훌륭히 성공했다. 타고난 사업수완을 살려서 한때 4개의 요식업체를 경영했고 인천 송도와 부평에 고층 빌딩을 지었다. 건축업 빌딩 임대업등 우연정은 억척스레 일했고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각계각층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두다리 인간보다 더 바삐 뛰어왔고 지금도 뛰고 있다. 활기를 잃지 않는 밝은생활 덕인지 우연정의 얼굴은 밝고 편안하다. 무엇보다도 30대의 미모를 아직 잃지않고 있는게 놀랍다. 조관희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49년 4월 17일 전주 출생 1971년 숙명여자대학교 무용과 졸업 1971년 노진섭 감독 < 사랑을 빌립시다 > 데뷔 <주요 경력> 1980 골수암으로 우측다리 절단 투병기 영화화 1982 신앙을 통한 암투병 간증으로 전국 순회 1985 KBS주최 영광의 얼굴 수상 1991 중국 등소평 주석의 子 '등풍방'의 초청으로 아태장애인 대회 참석 1992 중국 국영방송 C-TV출연 2000 MBC 주부교실 강사 전국순회 강의 30~40회 현재 EURO SYSTEM 대표, 한국장애인 복지신문사 부이사장,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 이사, 한국장애인문인협회 이사, BETTER LIFE이사 <수상 경력> 1972~1980 한국영화 및 홍콩영화 90여 편 주연 청룡상, 대종상, 여우주연상 등 다수 수상 <주요 작품>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 나와 나 , 몸 전체로 사랑을 , 행운 , 배따라기 등 다수
김영효 감독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사내 냄새가 물씬 풍긴다. 훤칠한 키에 호남형 마스크, 거기에 굵고 무게 있는 목소리를 지닌 그에겐 겉으로 발산하는 카리스마도 있다. 내가 느끼기엔 속으로는 정감도 넘친다. 김영효는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그가 연출한 액션 영화도 시원시원하고 아름답다. 그가 감독한 30여 편의 영화 중 대부분이 액션물이지만 그의 영상은 살벌한 액션이 아니라 정감 넘치는 액션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스트를 자처했다. 김영효는 액션 영화를 통해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얼마큼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보여준 후 가능하면 휴머니즘으로 봉합한다. 액션 영화 감독으로서 아름다운 액션을 추구하는 목표 의식도 있었겠지만 그가 청년 시절 문학도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영효 는 처음 배우 지망생이었고, 감독 데뷔 전에 영화에 출연했었다. 모두에 잠깐 언급했지만 배우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마스크다. 그래서 김영효의 영화 입문은 배우로부터 출발한다. 1958년 신상옥 이 감독한 < 지옥화 >에 김영효 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지옥화>의 단역 출연은 신상옥의 다음 작품인 < 어느 여대생의 고백 >에 주연급으로 출연하기 위한 봉사였다. <지옥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신상옥으로부터 다음 작품인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 주연급으로 출연시킨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러나 촬영에 들어갈 때는 김영효가 출연하기로 한 그 배역에 한국무용가인 최현 으로 결정되었다.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지옥화>와 같은 해인 1958년 개봉되었는데 흥행에 성공했다. 이 영화는 흥행 성공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영화로서 작품성도 평가받아 이때부터 신상옥은 전성시대의 화려한 출발을 했다. 약이 오른 김영효 는 보란 듯이 배우로 성공하고 싶었다. 마침 당시 국내 최고 시설의 촬영 스튜디오인 안양촬영소(후에 신필름으로 넘어감)를 가진 수도영화사에서 신인 배우와 감독을 공모했다. 그 당시 수동영화사는 사장이 홍찬 인데, 홍사장은 영화사 외에 극장과 신문사를 소유한 막강 인사였다. 김영효는 연기부에 응모 당당히 합격했다. 그때 연기부 동기생으론 조문진 감독이 있었다. 마침내 김영효는 1959년 정비석 원작 소설을 박상호 가 감독한 < 낭만열차 >에 김동원 의 아들로 출연했다. 주연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낭만열차>는 흥행에 실패했다. 만약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으면 김영효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배우로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다. 김영효 는 그때 자신을 한번 돌아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군대에 갔다 온 직후라 얼굴은 뼈만 앙상했다.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면서 김영효는 영화는 포기할 수 없지만 배우의 꿈은 일단 접고 감독으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그의 영화 인생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김영효 는 1931년 2월 17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해주지만 강원도 철원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해방이 되자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한 김영효 집안은 서울 광희동에 살았는데 그때 앞 뒤 집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가 이신명 감독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신명 도 영화감독은 아니고 야구협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영효는 그 무렵 한 동네 친구인 이신명, 국민대 1년 선배인 강범구 감독, 박상호 감독과 어울렸다. 강범구는 1962년 < 북극성 >으로 감독 데뷔했는데 그때 마침 액션물 < 밤은 말이 없다 >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김영효는 동네 단짝 친구인 이신명과 함께 강범구가 감독한 <밤은 말이 없다>의 조감독으로 들어갔다.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스스로 접고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새출발 한 것이다. < 밤은 말이 없다 >의 제작자 이재관 은 촬영 현장에 나와 조감독으로 활동하는 김영효 를 눈여겨 보면서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이 책임지고 감독으로 데뷔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김영효는 이재관으로부터 감독 데뷔작으로 건네받은 시나리오가 <현금에 손대지마라>였다. 김영효는 감독 데뷔의 부푼 꿈을 안고 시나리오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콘티을 작성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이 영화의 감독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당시 최고의 톱스타였던 여배우의 반대로 그 여배우와 친한 이모 감독에게 돌아갔다. 김영효는 또 가슴 쓰라린 좌절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김영효 는 내가 쓴 시나리오로 당당하게 감독 데뷔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3개월을 칩거하면서 시나리오 < 반역 >을 탈고했다. 그는 탈고한 시나리오를 들고 이재관 을 찾아갔다. 이재관은 시나리오를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고는 '됐어, 훌륭해!''를 연발하면서 자신이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제작 준비 과정에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재관은 김영효에게 친구인 서대문 주먹 보스를 소개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김영효는 마침내 자작 시나리오 <반역>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반역>은 일본군 관동지구 특부대장 아라이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 독립군을 체포하여 박해를 가했다. 어느날 체포된 독립군 중에 아버지가 끼어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라이는 총뿌리를 일본군에 돌려 독립군을 탈출케 하고 자신은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는 활극물로 박노식 , 이민자 , 김혜정 이 출연했다. 1966년 2월 26일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했다. 일상은 로맨티스트요, 영화는 모더니스트인 김영효는 1966년 <반역>으로 데뷔한 이후 < 춘풍 >(1968), < 황야의 외팔이 >(1970), < 오륙도 이무기 >(1978), < 화요일 밤의 여자 >(1980),< 가까이 더 가까이 >(1986) 등 30여 편을 감독했다. 액션물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했고, 액션물로 감독 데뷔한 김영효지만 때로는 산뜻한 멜로물과 화사한 청춘물을 연출, 장르의 다양성을 꾀하기도 했다. 남진 , 우연정 주연의 < 그대 변치 마오 >는 뮤지컬이고 < 대학시절 >은 청춘물이다. 김영효 감독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위 2편과 데뷔작 <반역>을 꼽았다. 액션물을 주로 감독하고 액션 감독이란 브랜드를 지니고 있었는데 의외로 멜로물과 청춘물에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시절 문학서적을 탐독했던 문학도였고 일상에서는 멋을 알고 감정이 풍부한 성격 탓이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효 감독에 대해 세 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제명의 영화를 감독했고, 두 번째는 감독이 된 이후 액션영화에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연으로 출연했고, 세 번째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나에게 따뜻한 악수의 손을 내민다, 김영효가 감독한 <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 >(1974)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는 제일 긴 제명의 영화다. 마산 교도소에 수감중인 사형수의 옥중 결혼식 실화를 영화한 것이다. 또 김영효가 영화감독이 되고 난 후에 영화배우로 용기있게 나선 것은 좌초된 영화배우에의 꿈을 한번쯤 되살리고 싶은 잠재된 욕망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영효는 영화인이건, 영화 밖의 사람이건 간에 누구와 만나도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폭 넓은 대화를 나누는 친화력의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다, 김영효는 영화를 만드는 일 외에 영화계 발전과 영화인 친목을 위해서도 의욕적인 활동을 해왔다.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을 8년 6개월이나 했다. 오랜 기간 동안 감독협회를 운영하면서 김영효는 회원 간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고 협회의 위상을 높였다. 지금도 그가 영화와 영화계를 사랑하는 마음엔 변화가 없다, 언제봐도 청년 같은 열정의 모습이지만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지 칠순을 넘긴 김영효는 요즘 둘째 딸 은주의 감독 데뷔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부인 심두섭과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 은주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감독 데뷔 준비중이다. 후배 감독들의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원로 김영효 감독의 목소리는 아직도 쩡쩡하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31년 2월 17일 강원도 철원 출생 1959 국민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 < 반역 >으로 감독 데뷔 <주요 경력> 한국영화감독분과 이사, 한국영화권익위원장 (주)우성사 기획실장 및 고문, 한국영화인협회 감독협회 회장 삼선 영화법 개정 운동 본부장 <작품 연보> 1965 반역 1966 상처뿐인 사나이 1967 춘풍 /한녀 1968 지옥에서 온 신사 1969 심야의 난입자 1970 황야의 외팔이 1971 홍콩의 카포네 1973 대학시절 / 대학생 1974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 그대 변치마오 / 비에 젖은 입술 1975 사랑을 빌려드립니다 1976 구삼육 사건 1977 맨주먹의 소녀들 1978 오륙도 이무기 / 소림 백호문 1979 혈육마방 1980 화요일밤의 여자 / 요 / 1986 가까이 더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