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
- 감독
- 구상범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김인권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윤희에게 >는 서간체 형식의 영화다. 오타루에 사는 수의사 쥰(나카무라 요코)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는 조카가 부치지 못하고 책상에 놓아둔 편지를 몰래 우체통에 넣어준다. 아마도 그 편지는 오래 그 책상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고모는 ‘Yun Hee’라는 수신자의 이름을 쥰을 대신해 불러준다. 그리고 그 편지는 윤희(김희애)의 딸 새봄(김소혜)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된다. 쥰과 윤희의 호명과 응답은 각자의 자리에서 반복해 불리고 쓰였지만 오랫동안 상대방에게 가닿을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마사코와 새봄은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오타루의 겨울에 20년 넘게 만나지 못하던 쥰과 윤희가 재회할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을 만들어 간다. <윤희에게>의 눈 내리는 하얀 오타루, 가닿지 못한 안부 묻기, 부치지 못하거나 잘못 도착한 편지, 필름사진, 상실의 감각, 오래 간직한 사랑은 어쩔 수 없이 < 러브 레터 >(이와이 슌지, 1999)의 노스텔지어를 떠올리게 한다. 상실한 것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은 과거에의 고착과 언뜻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윤희에게>는 분명 오래 전에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 그러나 <윤희에게>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서로의 편지에 응답하면서 쥰과 윤희 모두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성장의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보내고 받는 것에 시차가 발생하거나 어긋날 확률이 높은 편지, 촬영 속도가 늦고 인화의 과정이 필요한 오래된 필름 카메라, 오해가 발생하거나 이해가 늦을 수 있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번역과정은 단순히 아날로그적인 노스텔지어의 감성을 부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쥰과 윤희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가족에 의해 강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폭력은 사랑의 실패를 넘어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부인당하는 삶을 살게 했다. 윤희는 가족에게 ‘쥰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이후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른 나이에 오빠 친구와 반강제로 결혼한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대학도 가지 못한 윤희에게 엄마는 카메라를 선물한다. 새봄은 그러한 엄마의 서사를 모른 채 엄마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풍경과 사물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뒤늦게 새봄에게서 제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게 뒤늦은 시차의 발생이야말로 한국의 퀴어한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윤희는 자신의 욕망을 부인당한 후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주변 사람들도 외롭게 만든다. 그는 소통의 가능성을 닫는다. 쥰은 윤희에게 쓴 편지를 매번 부치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의 시작을 동일한 내용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윤희는 자신의 세계 내에 누구도 들이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을 온 몸으로 외치고, 쥰은 성적 정체성과 한국·일본 혼혈이라는 국적 정체성을 가능한 숨기며 안으로 파고든다. 둘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돈다. 부인당한 욕망과 정체성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윤희의 아버지와 오빠는 윤희의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려 들고 쥰의 아버지는 냉담함으로 일관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옛 말처럼 ‘두 사람이 만나려면 공동체의 지지와 포용적 환경이 필요하다.’ 로맨스는 개인적이거나 이자적인 것이 아니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 남성들 때문에 헤어졌지만, 새봄과 마사코라는 또 다른 가족이 꾸며준 조건 속에서 재회한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나서야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폭력적 상황은 어긋나고 도달하지 못한 소통과 시차를 만든다. 하지만 마사코와 새봄이 만든 삐끗한 송수신과 시차가 또한 둘을 재회하게 만든다. 마사코는 쥰의 편지를 대신해 부치고 새봄은 그 편지를 받고 오타루로 엄마를 데리고 여행을 온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제작 및 개봉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 알려진 < 질투 >(한형모, 1960)의 한참 늦은 응답 혹은 후일담처럼 여겨진다. 현재 <질투>는 필름 프린트는 소실되었고 시나리오만 확인 가능하다. <질투>에서 동성애자인 재순(문정숙)은 의붓 여동생 금이(전계현)를 좋아하고 둘은 실제로 연애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금이가 남자를 만난 후 재순의 욕망은 금이를 포함해 모두에게 부정 당한다. 재순의 욕망은 한국 전쟁 중 당한 성폭행으로 인한 남성혐오로 인한 부작용으로 취급되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교정치료를 받는다.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제 할 말 다하던 재순은 결말 장면에서 병원에서 나오며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꿈에서 깬 것 같다”고 말한다. 기이할 정도로 급작스럽고 밝게 묘사되는 이 장면에서 텅 빈 인형처럼 묘사되는 재순은 거의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다.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재순처럼 정신병원에 가지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도움으로 쥰을 재회한다. 한편, 2000년대 < 연애소설 >(이한, 2002), < 주홍글씨 >(변혁, 2004). < 끝과 시작 >(민규동, 2009) 같은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앞선, 10대의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고착화 된다. 그러나 결국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포획되고 봉합되며 과거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 <윤희에게>는 과거에서 맴도는 시간에서 벗어나 그 다음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 이 영화 전체의 형식이기도 한 편지는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윤희에게’ ‘쥰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중요하다. 임대형 감독은 한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퀴어영화’라고 호명하기도 했다. 하나의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고 뭉개는 것 또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이 될수 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조건으로 자꾸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빼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늦었지만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해야 한다. 새로운 퀴어 시간성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영화사에서 퀴어영화라 불릴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물론 ‘퀴어영화’라는 범주는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퀴어영화가 나오려면,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 공동체가 노력하고 바뀌어야 했던 것처럼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도 그러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실과 영화는 거리가 있지만 또한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당장 가시적으로 현실에 보이는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잠재된 현실, 보이지 않고 가려진 현실, 환상성, 꿈을 그려낼 수 있다. 쥰과 윤희가 각자의 꿈에서 잊지 않고 만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