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 대운동회
- 감독
- 아키야마 카츠히토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나츠키 리오, 차명화, 이토 미키, 윤소라, 히사카와 아야, 유남희, 사카구치 아야, 이진화, 카와타 타에코, 강미형, 소우미 요코, 박수옥, 카와카미 토모코, 송덕희, 야지마 아키코, 기경옥, 야마구치 유리코, 이연희, 오카무라 아케미, 김순영, 타카하시 미키, 이시즈카 운쇼, 이종혁, 나카타 코지, 한상덕, 오리카사 아이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에서 양지훈 은 대학교 축구 동아리에서 만난 ‘아는 형’을 보러 일본에 간다. 재일조선인인 ‘형’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양지훈을 초대하고, 양지훈은 그 여정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촬영한다. 이후 <도라지>에 <불고기>를 덧붙여 장편 분량으로 편집된 < 도라지 불고기 >(2025)에는 <도라지>의 브이로그 영상을 시청하는 형의 모습을 촬영한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는 양지훈이 <도라지>를 제작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일본에 방문해 촬영을 이어 나갔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가 당사자를 대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도 그 이미지를 당사자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특수하고 유일무이한 이미지가 아닌, 그저 범박한 모습으로 말이다. 양지훈의 영화에서 이들은 재일조선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키사다 이사오의 < GO(고) >(2001)나 최양일 의 <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1993)처럼 미묘한 차별을 통과하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조선학교에 다녔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추억하고, 불고기를 먹고, 가라오케에 간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형’과 그의 친지들, 조선학교의 관계자들을 포함한 재일조선인들의 얼굴은 모두 블러 처리된 형상으로 등장한다. 얼굴을 탈각한 형상들은 평범함의 분신들인 것처럼 스펙터클 없음을 재차 강조해 드러낸다. 양지훈 감독은 한 토크 자리에서 출연진들의 얼굴을 가린 이유에 대해 “욕망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내 얼굴만을 드러내는 게 정당한 것 같다”라고 말한 적 있다. [1] 그의 말에 의하면 얼굴은 욕망하는 자의 언어다. 여기서 욕망이란 자신의 부분을 드러내는 노출증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그 얼굴에서 욕망을 소거할 수 없다는 난감함을 수렴하는 최소한의 진실의 단위인 셈이다. 한편, 그날의 대화에서 좀 더 흥미로웠던 대목은 양지훈 감독이 이렇게 덧붙였을 때다. “제가 (말하면서) 자꾸 욕망이란 말을 써서 욕망이란 말을 안 써보겠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가 정말 ‘욕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 이 말이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맺혀 있는 소거법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욕망이라는 말을 덜어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는 감독으로서 무대에 서 있는 상황이 이미 충분히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기에 ‘욕망’이라는 말을 거듭 입에 올리는 것을 경계했을 수도 있다. 혹은 ‘욕망’이라는 단어가 대상과 촬영자 사이의 관계를 손쉽게 일축해 버린다는 편리함에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의 강직한 성정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욕망’을 다른 언어로 대체하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욕망’이라는 말의 자리가 여기저기로 산재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양지훈에게 있어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소거법은 있는 것을 그대로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당연시되는 것들의 제자리를 흐트러뜨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이는 <도라지 불고기>에서 촬영 대상의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자신의 얼굴만을 드러내기로 한 결단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도라지 불고기>에는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가더라도 조선학교를 다닐 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형’의 얼굴이 없다. 주민등록을 할 수 없어서 신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한 ‘형’의 얼굴도 없다. 운동회에서 찬가를 부르고 아이치 새교사 준공식에서 축하공연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집단화된 이미지를 거쳐 이중으로 익명화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 얼굴을 모두 삭제하고 감독 자신의 얼굴을 대체한 것이라고 말해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유빈은 <도라지>에 이어 <불고기>를 보았을 때 윤리의 측면에서 언어화하기 어려운 어긋남을 감지했다고 말하며 “얼굴은 삭제된다고 하더라도 얼굴이었다”라고 쓴다. [2] 얼굴이 블러 처리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그 얼굴의 빈자리들과 관계 맺는다. 어쩌면 그 흐릿한 형상은 우리가 그 얼굴을 마주하더라도 그 얼굴로부터 필연적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한계를 포착한 미래 시제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시선이 반사되어 맺힌 표면이다.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 자꾸만 부재하는 것의 의미를 대입하려는 관객의 관성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처럼 자꾸만 한발 앞서나가 기대되는 것을 지우는 영화의 전략은 한편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반응을 과도하게 결정화한 결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허나 궁극적으로는 그 소거된 자리에 다큐멘터리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불고기>에서 인터뷰를 하러 온 ‘형’은 준비된 조명을 보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하는 거야?”라고 물으며 당황해한다. 그러자 카메라 뒷편에 있던 양지훈 감독은 “폭력적으로?”라고 되묻는다. ‘형’은 감독의 말을 정정하지 않은 채 “어”라고 답한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차이지만 ‘본격적으로’와 ‘폭력적으로’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물론 형이 ‘본격적으로’라고 말했을 때 은연중에 ‘폭력적으로’라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직 ‘잠재적으로 발화되지 않은 말’이다. 양지훈은 그 잠재성을 기어코 수면 위로 드러내며 다큐멘터리의 폭력성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을 두고 < 포수 >(2022)에서 인터뷰 자리에 준비된 조명을 보고 자신을 주인공처럼 만들어 준다면서 기뻐하는 할아버지의 반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양지훈은 다큐멘터리에 전제된 폭력성을, 할아버지를 기쁘게 한 몫으로 상쇄하는 듯한 은밀하고도 발칙한 교환의 현장을 목격하게끔 한다. 그 현장을 더 이상 암묵적인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영화에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포수>는 기이한 전복적 쾌를 충족시키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편, <불고기>에서도 양지훈은 대상의 현실에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폭력성을 숨기는 대신 선취하여 보여준다.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대화’로 재구성함으로써 카메라를 든 순간 영화적 현실이 이미 물리적 현실에 개입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좌)", " 포수 (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 불고기>는 트린 T. 민하가 선언했던 것처럼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는 다큐멘터리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반(反)다큐멘터리다. 우리는 영화가 객관성의 허구를 폭로하는 방식으로만, 영화적 현실과 재현된 현실이 뒤섞이는 방식으로만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맞닥뜨려야 한다. <도라지 불고기>는 “숭고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보편의 개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진정 과시적인 자의 겸손한 영화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신화에 열성적인 구멍을 내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 에스퍼의 빛 >(2024)을 두고 정재훈 감독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3] 라고 말(해야만)했던 것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이 말은 “<에스퍼의 빛>이 다큐멘터리인가?”라는 고루한 반문을 상대하는 것이다. <도라지 불고기>와 <에스퍼의 빛>은 다큐멘터리라는 역사의 사장된 빈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당연시 여겨지게끔 만드는 요소들을 지워냄으로써 재현의 관성으로부터 누락된 반(反)역사에 다가가려 한다.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온함을 통해 다큐멘터리는 다시 한 번 갱신된다. *** [1] 해당 발언은 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의 “클럽시네마”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토크 “‘자기’가 되는 방법 : 카메라, 몽타주, 나”에서 발췌했다. 도미니크 카브레라의 <환송대 다섯 번째 샷>을 상영한 뒤 양지훈, 이예진, 황예지 작가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 [2] 임유빈, 「얼굴≠얼굴」, 『도라지불고기』, 2025, 59쪽. [3] 정재현, “ 온라인도 물리적 공간이다, <에스퍼의 빛> 정재훈 감독 ”, 《씨네21》, 2025. 11. 6. 김예솔비(영화평론가) l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
한 번 쯤은 달리기를 해봤을 것이다. 운동회의 릴레이든, 체력장의 오래달리기든 하다못해 트레이드 밀을 달린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호흡의 중요성이야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릴레이를 할 때는 바통을 움켜쥔 채 단박에 내달렸을 것이며, 오래달리기를 할 때는 앞으로의 거리를 생각하며 페이스를 조정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너무 많이 삼켜서도 너무 빨리 내뱉어서도 안 된다. 적절한 호흡이 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 성긴 듯 급박한 호흡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두 가지 흐름의 호흡을 통해 방콕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살인극을 그린다.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성긴 호흡과 감정적 이음새로 이뤄진 액션의 급박한 호흡이 바로 그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엄밀히 따져 영화는 극을 견인하는 치밀하고 뚜렷한 개연성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 개연성은 부족할지언정 분명 존재하며 그가 진정 필요한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정보를 전하는 영화의 흐릿한 흐름이 전략적 호흡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관객은 러닝타임을 따라가는 내내 이야기의 명확한 인과성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인남(황정민)’이 왜 하필 일본으로 떠났는지, 어쩌다 암흑가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심지어 복수의 원인이 되는 ‘영주(최희서)’와 과거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남의 대사와 엘리베이터 속 단 하나의 총격 씬만이 둘의 과거를 압축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인남은 그저 시간이 흘러 영주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과 그녀의 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음을 듣고 방콕으로 향한다. 인남의 대척자 ‘레이(이정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이는 인남이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남을 쫓는다. 형제의 과거가 간략히 언급되긴 하나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흘러가는 줄곧 맹목적 복수의 이유를 뒷받침할 형제의 우애나 연인의 사랑 더 나아가 조명될 법한 인남의 부성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죽어버린 과거의 인연만이 복수를 헐겁게 부여잡을 뿐 복수를 담아두는 줄거리의 개연성과 호흡은 다소 느슨하고 성겨 보인다. 이는 영화가 복수극이 아닌 살인극으로 전환되는 이유기도 하다. 더하여 이런 전개에 앞서 느슨한 개연성은 하나의 전략으로 영화적 전환을 뒷받침한다. 치밀한 복수의 이유와 계획이 제시되었다면 영화는 호쾌하게 질주할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족한 개연성은 극을 이끄는 하나의 주요한 호흡으로 거듭난다. 이는 급작스레 시작되는 복수의 긴장감을 내뱉는 날숨의 과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터 몰아쳐 올 액션의 시작을 전제하는 주요한 바탕으로서 영화의 장치가 된다. 영화는 이렇게 개연성의 필요를 물으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속도감 있는 액션이다. 듬성하니 채워진 복수의 뒤를 짚어 가던 관객은 점차 희미해지는 복수 대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받는다. 바로 인남과 레이의 쫓고 쫓기는 액션 활극이다. 사실 이런 영화적 변환은 복수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의 장소가 방콕으로 옮겨온 뒤 인남은 복수의 단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고문하며 살해하지만 결국 영주의 복수라는 근원에 닿지 못한다. 레이 역시 인남을 향한 살의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즉 이들의 파괴 행위는 곧 복수라는 행위의 파괴이다. 결국, 관객과 두 인물이 새로운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둘의 파괴 행위를 호쾌한 액션으로 재생하며 이전의 헐거운 개연성은 오히려 복수를 벗어던질 장점이 된다. 아이만은 살려 줄 수 없느냐 말하던 인남이 어느 순간 태도를 바꾸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쫓아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인남이 레이에게 전하는 대사이다. 이는 곧 영화의 내적 전환을 확언한다. 관객은 레이에게 향하는 인남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의 목적성이 변화하였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초반 영주의 복수와 아이의 행방을 위해 피를 흘렸던 인남에게 새로운 목적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자 내러티브적 선택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연인의 복수(그 이유 역시 확실치 않고 불친절한)를 성긴 호흡으로 채워 왔다. 남은 시간 앞으로 내달리기에는 그 이유도 호흡도 부족하다. 새로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그렇기에 인남은 복수가 아닌 살인을 선언한다. 자신과 작은 아이의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 힘든 곳에서 그는 인간의 살인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인남과 레이의 싸움은 후반부로 향할수록 속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변화했고 헐거운 복수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피 끓는 투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호흡의 매개는 무엇일까. 둘의 이야기가 액션을 위주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영화는 분명 그 원동력을 가져야만 한다. 영화의 줄거리가 다소 힘을 잃었다고 해도 단지 그렇게 둘 수 없음만은 분명하다. 벌어져 가는 영화를 단단히 부여잡는 것은 바로 인남과 레이 두 주인공이 내뿜는 뜨거운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점차 벌어져가는 복수를 접합시킬 아교이자 호흡이다. 이들이 가지는 맹목적 살의와 파괴성은 피를 연료로 삼아 영화를 불태운다. 하늘을 적시는 붉은 노을과 둘의 싸움으로 불타는 거리의 연기는 두 남자의 매연인 것이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치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으로 달려가는 관객의 호흡을 다시 한번 정렬시킨다. 많은 대사는 필요치 않다. 둘의 눈빛과 부딪히는 육체만으로도 다소 심심했던 영화의 흐름은 활기를 띈다. 이런 영화적 흐름은 레이의 대사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왜 그렇게 인남을 죽이고 싶어 하냐는 질문에 레이는 “더 이상 이유는 중요치 않아.”라고 답한다. 그렇다. 이는 곧 영화적 변화를 매듭짓는 결정타이며 극의 마무리를 내정하는 한 줄이 된다. 줄곧 언급했듯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와 그 과정에서 살인과 생존으로 옮겨갔다. 두 인물은 더 이상 복수의 원인과 결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자 한다. 끈적한 살의를 품은 액션은 성기던 영화의 호흡을 급박하게 바꾼다. 치밀하지 못했던 복수로 비어있던 스크린의 빈틈은 이렇게 투쟁적인 들숨으로 가득 찬다. 마침내 숨은 영화의 말미 턱을 뚫고 뛰쳐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인남과 레이는 부서진 자동차 속 피투성이가 된 채 나란히 죽어간다. 레이의 대사가 인상 깊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인남은 레이를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행동도 없다. 이는 곧 인남의 긍정이자 레이의 긍정이다. 둘은 죽어가는 와중 서로의 곁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몸은 문제가 아니다. 인남도 레이도 어느새 복수의 이유를 잃은 채 그저 서로를 죽이고자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앉아있더라도 더는 숨을 들이마셔 달릴 힘이 없다. 달릴 수 없다면 멈춰야 한다. 성긴 호흡으로 시작된 발걸음이 이리도 빠른 헐떡거림으로 바뀌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다. 느린 듯 성큼성큼 나아갔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전력을 다하는 달음박질이 되었다. 호흡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거칠어져 흐트러진다. 영화가 빨라지는 만큼 거칠게 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 어떤 달리기라도 결승선은 존재한다.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위해 달렸든 주자는 결국 결승선에서 멈춰 선다. 복수로 시작해 살인이란 생존으로 달려갔던 인남과 레이. 둘은 단지 죽음이란 선에 멈추었을 뿐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가 청년 문화와 만나면서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 하길종 , 1975)을 낳았다면, 그 반대편엔 당대의 하이틴 문화를 담은 < 고교얄개 >( 석래명 , 1976)가 있었다. 전자가 유신 시대와의 불협화음이었다면, 후자는 순응적인 화음에 가까웠다.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 등 ‘국책 영화’가 창궐했던 1970년대, 이른바 ‘얄개 영화’는 십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명랑 드라마로 사랑 받으면서 한편으론 ‘어른’들의 가치관을 별 저항 없이 수용했다. 여기엔 ‘우수 영화 제도’라는 미끼도 있었다. 좋은 영화로 선정되면 제작사에게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 하나가 주어졌던 것. 이후 심사 대상에서 하이틴 무비가 제외되자 이 장르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75년 < 여고 졸업반 >에서 시작해 1978년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까지, 고등학생들의 로맨스와 일상을 다루었던 그 영화들은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쏟아지다 갑자기 사라졌던 시한부 트렌드였던 셈이다. 그 중심은 임예진 - 이덕화 커플의 '진짜진짜' 시리즈와, 이승현 - 김정훈 콤비의 '얄개' 시리즈였는데, 전자가 순애보라면 후자는 코미디에 가까웠고, 특히 <고교얄개>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간판 스타 같은 영화였다. 귀여운 반항아들의 요절복통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유신 시대라는 시대 배경을 감안할 때 <고교얄개>는 의외로 복잡한 텍스트다. 이 영화는 1970년대 국가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담아내면서, 한편으론 그 시절 억눌린 청소년들을 위한 작은 해방구 역할을 했다. 체제 선전과 대리 만족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묘한 프로파간다 영화였던 셈이며, 그 어떤 국책 영화보다 순수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첫 신은 예배 장면이다. 주인공 두수(이승현)는 미션 스쿨에 다니는데, 이때 강당을 가득 채운 까까머리 교복 차림 남학생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집단주의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두수는 돌발적 행동을 하는 개인이다. 낙제 때문에 유급을 한 두수는 입시나 교칙 같은 제도를 거부한다. 그저 학교 생활이 지루하기에 매일처럼 장난을 일삼고, 우연히 알게 된 여학생 인숙( 강주희 )과의 로맨스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두수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 십대이다. 하지만 유신 시대의 세계관에서 두수는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꿈도 없는 '잘못된' 청소년이다. 그러기에 '교화(敎化)의 서사'가 시작된다. <고교얄개>의 이야기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은 두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주변 인물들의 노력이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부모와 국어 교사인 백상도( 하명중 )와 그의 하숙집 딸인 인숙 그리고 같은 반 친구인 호철(김정훈)까지 이 과정에 동원된다. 특히 호철과의 관계는 핵심이다. 두수의 장난으로 안경이 깨진 호철은 다리를 다쳐 학교를 나오지 못한다. 어떤 죄책감을 느낀 두수는 호철의 집을 찾아간다. 이층 양옥에 사는 부잣집 아들 두수와 달리,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고 있는 호철. 이때 호철이 두수에게 하는 말은, 영화의 테마를 지나칠 정도의 직설법으로 전한다. “두수야, 저길 좀 봐. 저 장관을 이룬 즐비한 고층 건물들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겠니. 모두가 피와 땀이 이뤄놓은 기적이야. 난 비탈진 언덕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어. 발길은 가볍고 마음은 늘 무럭무럭 자라지. 난 열심히 공부해야지, 어서 자라야지, 그리고 저 많은 빌딩 속에 뛰어들어 주인공이 되어야지. 난 늘 이렇게 결심한단다.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다만 불편할 따름이지. 얄개야, 우리에겐 밝고 희망찬 내일이 있어. 그 풍요한 내일의 세계를 이룩하려면, 학생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이 시기 청소년들을 길들이기 위한 산업화 이데올로기의 성공 신화와 성장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화한 호철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버지의 법'을 체득한 소년이다. 여기서 <고교얄개>는 호철을 두수가 따라야 할 인간형으로 설정한다. 두수는 호철처럼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호철처럼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며 '호철화'된다. 이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두수를 '유신 청소년'으로 교화하며, 그 대가로 '인숙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이성애적 로맨스의 성공을 선사한다. 두수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고교얄개>는 밝은 구석이 많은 영화다. 두수가 만들어내는 악의 없는 유머의 에피소드들은 관객을 미소 짓게 하며,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 같은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될 정도로 재치 있는 언어 유희였다. 남녀 학생들의 하이킹이나 운동회의 차전놀이는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을 즐기다가도, 학교 건물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표어(“오늘의 안보 없이 내일의 번영 없다”)나 “북괴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이나 '근대화 연쇄점'이라는 동네 구멍가게 간판을 맞닥트리게 되면, 군대식 사회였던 '1970년대'를 환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고교얄개>는 분열증적이면서도 순응을 요구하는, 당대의 시대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 고교얄개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