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전(총희의 연)
- 감독
- 윤백남
- 제작년도
- 1925
- 출연
- 김우연, 안종화, 이채전, 유수준
정기적으로 필름을 교환하며 영화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상영하는 영화상설관이 서울에 등장한 것은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한 1910년이다. 초기 상설관은 대부분 황금정과 남대문통을 잇는 소위 ‘진고개’의 일본인 상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산골 딸깍발이’가 아니면 출입을 꺼릴 정도로 비가 오면 유난히 흙이 질었다는 진고개는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미쓰이(三井) 상점, 히라다(平田) 상점, 미쓰코시(三越) 오복점 등 후에 백화점이 되는 진고개의 대형 잡화상점들은 양복, 포목, 과자, 기계류 등 없는 것 없이 다 갖춘 듯 했다. 흔히 남촌이라고 불렸던 이 거리는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들의 소비 욕망도 강하게 자극했다. 그래서 진고개에서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가는 조선부인들”은 “여기 물건만 몇 가지 사준다면 몇 번이든지 개가해 갈 것”이라고 빈정거림을 샀다. “일본말이 서투르니 물어보기도 힘들고 공연히 코 밑에 가져다 향내만 맡느라고 쭝긋쭝긋” 1 하는 양복 입은 조선신사가 우스워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종로로 대변되는 북촌 일대는 남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황량하고 어둠침침해 보였다. 그러나 진고개에서 호기롭게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살 배짱이 없는 조선인들에게는 종로가 실질적인 유흥 공간이었다. 1916년부터 해마다 4월부터 10월까지 종로에서는 전등불이 켜지는 밤이 되면 시끌벅적한 야시(夜市)가 열렸다. 대략 오후 7시부터 12시 사이에 열리는 야시는 ‘싸구려, 싸구려’라고 외치는 소리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는 소리가 한데 뒤엉켜 소란스러웠다. 상인들은 무조건 ‘만병통치약’이라고 외쳐대거나 물건들을 흔들어대면서 손님을 끌었다. 사주쟁이, 관상가, 작명가도 모여들고, 약장수와 장기꾼도 모여들었다. 고무신, 머릿기름, 참빗부터 지팡이나 구두, 만화경, 석유램프나 호롱 등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다양한 상품이 길거리 좌판 위나 천막 아래 전시되었다.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종로 야시에 구경 오는 사람들은 “살 것이 있거나 없거나 밤이면 이 거리를 한 번 거닐기 때문에 사람의 물결을 이루어 서로 헤치고” 다녔다. 2 남촌이든 북촌이든 서울의 극장은 도시의 여가와 유흥, 소비의 경험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남촌이 일본인 거리, 북촌이 조선인 거리로 이원화되어 있던 만큼 극장 공간의 경험은 식민지의 경험과 중첩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상설관에서는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가 번갈아가며 함께 해설하기도 했지만,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 등 조선인을 상대로 한 상설관들이 생겨나면서는 변사의 해설 언어와 관객의 종족적 구성, 그리고 흥행 프로그램이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영화상설관 시대에 ‘활동사진 구경 가기’는 문화의 경험인 동시에 ‘종족성(ethnicity)’의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먼지 많고 시끄러운 종로 야시의 구경꾼들이 조선인 변사의 해설로 영화를 관람하며 도시의 피로를 위무 받는 북촌 상설관의 관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극장은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오락장이다. 1925년 여름, 서울의 밤거리에 나선 어느 기자는 종로 야시를 지나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극장을 취재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학생과 신사, 기생 등 각계각층의 관객들이 “하룻밤 놀이터”를 향락하는 “여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 3 그런 극장이 소위 ‘일반 민중’에게 완전히 문턱을 낮춘 것은 1926년에 관람료를 ‘최하 10전’까지 인하하면서이다. 그해 여름 극장가는 불경기에 시달린 끝에 파격적인 관람료 인하를 감행했다. 신문에는 관람료가 대인(大人) 30전, 소인(小人) 20전이라고 광고하면서도, 실제로는 극장 앞 호객이나 가두선전으로 ‘10전 관객 몰이’를 하는 식이었다. 극장들은 관람료 인하뿐 아니라 일주일에 한두 번씩 프로그램을 교체하면서 주말과 휴일에는 상영 횟수를 늘리는 전략으로 관객을 더 확보하려 애썼다. 상설관끼리 제 살을 깎아먹는 무모한 경쟁이라는 우려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시적인 이벤트가 ‘10전 관객’을 상설관의 새로운 관객층으로 흡수하면서 관객의 폭을 넓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가 조사한 1926년 한 해 동안 경기도 영화상설관의 관객 수 통계를 살펴보면, 관람료가 인하되었던 8월부터 10월 사이에 관객이 몰리면서 상반기에 비해 관객이 급증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4 위의 글에서 최승일은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가 ‘10전 관객’을 얻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영화 제작비를 생각하면 10전이라는 관람료는 터무니없이 저렴하지만, 도시의 하층계급 노동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에서 영화가 ‘대중오락의 패왕’이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26년 가을, 단성사에서 개봉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로서 조선영화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자체의 예술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다. 6.10 만세 등 민족적 감정이 분기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그리고 ‘10전 관객’의 흡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아리랑>은 이 ‘10전 관객’을 민족 혹은 ‘조선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함으로써 조선영화의 영역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10전 관객 몰이’는 일시적이었을지라도, <아리랑>이 거둔 성공과 그에 대한 입소문은 수년간 <아리랑>이 조선 전역을 순회하며 관객을 끌게 했다. “일반 대중은 <아리랑>으로 하여 활동사진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5 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1) 双S生, 「대경성광무곡」 『별건곤』 1929년 1월호, 82~3쪽. 2) 유광열, 「종로 네거리」 『별건곤』 1929년 10월호, 68쪽. 3)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4)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8쪽. 5) 안동수, 「영화수감(映畫隨感)」 『영화연극』 1939년 11월호, 45쪽. 상단 그림. 조선일보 기자의 서울의 밤 순례기 (사진은 극장의 관람석) 출처: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서울의 밤은 오다. 때는 일곱 시 반! 종로 큰 거리에 군데군데 벌려 있는 각 극장, 활동사진관 등의 손[客] 끄는 유창한 주악(奏樂) 중에 서울의 밤은 어두워간다. 피리, 나팔, 북, 장구 등의 소리와 북악, 인왕의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온종일 뜨거운 햇살에 시들고 시든 억만 장안 사람을 다시 삶의 무대로 불러들여 온갖 연극을 짓게 한다. 돈 있는 탕자는 기생을 다려 홍등녹주(紅燈綠酒)에 무르녹고 돈 없는 건달은 막걸리 한잔에 거리를 헤매며 야시(夜市)의 복판 공원의 벤치에도 사람의 물결이 이루기 비롯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흥겨운 주악을 따라 쏘는 듯한 등불 빛을 몸에 실으며 이곳저곳의 극장 문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도 역시 수백수천을 이루어 그들의 자취가 끊일 여덟 시경부터는 문 닫힌 극장 안에서 오직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때때로 문틈을 새어 길거리로 흘러나올 뿐이다. 이것이 오직 서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유일의 향락장이다. 아래위층 객석에는 수백수천의 각 계급 각 방면의 젊은 남녀가 희미한 전등 빛에 싸여 죽은 듯 고요히 앉아 있으나 그들의 날카로운 눈은 어둠에서 활약을 하고 까닭 없는 머리는 고요한 속에 음분(淫奔)을 짓는다. 무대와 스크린을 바라보고 좋아하고 웃는 학생이 있으면, 부인석의 아양피는 기생들을 건너다보고 어리석은 기쁨을 짓는 점잖다는 신사도 있다. 이리 하는 동안에 시간은 자꾸 간다. 아홉 시, 열 시! 지루한 중에 십분 휴식이 돌아온다. 기생 건너다보는 신사들은 일분일초라도 휴식을 더 늘이려 한다. 그러나 힘없는 어린이, 학생들은 휴식을 오히려 지루하다 소리친다. 이리하여 극장의 밤이 깊어가고 서울의 밤이 깊어간다. 최후의 일각. 닫혔던 극장 문이 후다닥 열리면서 봇물이 터지듯 사람의 물결이 밀려나온다. 그들의 머리에는 주마등 같이 지금 본 양극(洋劇)이 번듯번듯 거린다. 철없는 아이는 흉내를 내며 시시덕거리고 뜻깊은 젊은이는 머리를 기울여 묵상에 잠기면 탕자와 춘녀는 손에 손을 쥐어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耶)” [필자 주: “어찌 서로 만나기가 늦었던고.”, <운영전>의 한 구절] 를 부른다. 이리하여 여유있는 사람들 하룻밤 놀이터의 문이 닫힌다 2.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4~9쪽. (부분 발췌) -키네마-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정복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대체상으로 소설은 지식적, 사색적이고, 영화는 시선 그것만으로도 능히 머리로 생각하는 사색 이상의 작용의 능력을 가진 까닭이다. 또한 경제상으로도 하룻밤에 3, 40전만 내던지면 몇 개의 소설–연출–직접 사건의 움직임을 보는 까닭이며, 또한 소위 바쁜 이 세상에서 짧은 시간을 가지고서 사건의 전적(全的) 동작을 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우리의 힘으로(돈은 말고) 되는 영화가 있어온 지 햇수로는 삼 년도 못 되는데 벌써 기십종(幾十種)은 넘었으리라. 스튜디오도 없이 만들어내는 영화가 벌써 10개를 넘은 지 오래다. 날 흐린 날은 박지도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 해나 번쩍 나면 5전짜리 레프가 번쩍거린다. 5전짜리 레프가 사람의 몸뚱어리에 가로 벗기일 때 “자- 훌륭한 예술이오”, “박읍시다” 하는 소리가 산모퉁이 집 속, 길가에서 일어난다. 이리하여 돈 천 원이나 잡아먹은 조선의 영화가 단성사, 조선극장에서 봉절(封切)이 된다. 사람은 물밀듯이 들어온다. 그리하여 연극이 없는 불쌍한 이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연극을 구경하는 셈으로 몰려들어 고개를 치켜들고 앉아 있다. 백의(白衣)가 영화면(映畵面)에서 펄펄 날린다. 이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도 회포 깊은 정경이냐? 민틋한, 아주 기운을 잃은 듯한 산모퉁이가 나오면서 여기저기, 어린 솔이 자라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한심한 일이다. 우리는 그 배경 속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2, 3의 고대 소설을 각색해낸 것 외에는 <장한몽>, <농중조>를 봤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감독이라는 이가 옷 한 벌을 못 얻어 입어 여름옷을 가을철에 입고 있으면서, 배우들은 점심 한 끼 똑똑히 못 얻어먹어서 눈이 퀑 들어가는 것을 당하면서 박아낸 것이다. 참으로 생각하면 필름에서 주림에 울던–피–눈물–탄식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그나마 자기들의 마음대로 똑똑한 것 하나 박아보지 못하고, 그 알뜰한 돈 천 원이나 내놓는 대자본가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남이 다 구워먹고 남은 찌꺼기를 건져다가 또다시 구워내어, <장한몽>, <농중조>나 얻어 보는 꼴이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또 보는 이들의 형편은 어떻고? 조선의 팬들의 주머니가 넉넉하기는 꿈에도 없을 일이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론 채니 [필자 주: Lon Chaney.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23)>,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925)> 등에 출연한 미국의 영화배우] 씨의 일주일 봉급만(1만5천원) 가지면, 적어도 우리 땅에서 그것 가지고 영화 다섯은 만들 만한, 이런 하늘과 땅의 차이, 어찌하여 요 모양일까? 그러나 여기에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이 있으니, 그것은 <아리랑>, <아리랑>이 그것이다. 공연히 학교에 다니다가 미쳤다는 주인공은 지금의 현실 속에 부대끼는 우리는 그가 왜 미쳤는가를 다시금 중언부설(重言復說)도 하기 싫다. 다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과 가판 장인 듯한 바깥 기둥에는 ‘청년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긴 두루마기 자락을, 써늘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일하려 다니는 농촌의 인텔리겐치아인 박선생. 서울 가서 공부하다가 귀향한 대학생이 양복에다 고깔을 쓰고 농민들과 같이 “풍년이 왔다네. 풍년이 왔다네~”를 부르고 춤추는 씬. 이것이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우러난 영화다. 청년회의 깃발이 날리면서 회원들의 행렬이 보인다. 얼마나 그리운 이 장면이냐? 화려하고 정묘한 장면이 없는 대신에, 침울하고 비통한 오뇌(懊惱)의 못 견딤이 이 장면에 나타난다. 기교로 말해도 영화의 역사를 수십 년이나 가진 일본 영화의 그것보다 못지않다. 나는 일본의 소위 신(新)영화라는 것을 남 못지않게 보았지만, 이른바 일본이면 일본의 참된 냄새나는 영화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다만 광선이 없고 세트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단 2년 동안의 조선의 영화계에서 이런 수확이 있는 것을 못내 기뻐한다. 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의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려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 개의 거상(巨像)이다. 어쨌든 더욱 조선에서 모든 것을 빨리 실어다가 우리들에게 보여줄 것은 다만 영화밖에는 없다. 오전짜리 레프야? 길이 활동하기를 바란다. 조선의 문화도 차차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너 나 할 것 없이 영화, 영화 한다. 한 개다, 한 개. <아리랑> 한 개다. 또 이후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느냐, 조선의 영화계여? 현대의 문명은 아무리 해도 라디오·스포츠·키네마이다. 언제나 이들의 문명(文明)도 우리와 거리가 가까워지려는고? (끝)
소중한 인물은 당대에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 말이 더욱 실감난다. 그때 내가 왜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을까,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미비한 언급에 대해 확인하지 못했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집안을 뒤져서라도 그분의 희귀 자료들을 얻어오지 못했을까. 그때 깨달았다면 불완전한 영화 역사의 한 조각이라도 더 메울 수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안종화 (安鍾和)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02년 서울에서 태어난 안종화 선생은 나운규와는 동갑이지만 영화계에서는 선배였다.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첫 작품 < 해의 비곡 >(1924)에 이월화 와 함께 주연을 맡고, 이후 자신이 끌어들인 나운규 에게 데뷔의 기회를 준 < 운영전 >( 윤백남 감독)에 출연했다. 하지만 1930년 < 꽃장사 >로 메가폰을 잡으며 감독이 된 뒤 잇따라 < 노래하는 시절 >(1930), < 청춘의 십자로 >(1934), < 은하에 흐르는 정열 >(1935), < 인생항로 >(1937) 등 여섯 편을 내놓고, 광복 후에도 < 수우(愁雨) >(1948), < 나라를 위하여 >(1949), < 춘향전 >(1958) 등 7편을 연출하여 모두 13편을 남기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영화측면비사>(춘추각,1962)라는 귀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경험과 주변의 얘기를 담은 이와 같은 주관적인 회고담은 객관적인 정사(正史)가 놓친 일들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맺은 인연의 끈 내가 안종화 선생을 직접 뵌 것은 제주도에서였다. 동국대학 3학년 때인 1959년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해 2월 월간 <사상계> 신인작품 추천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신출내기 시인이었다. 1년 전 <현대문학>과 경쟁하던 문예지 <문학예술>에 첫 추천을 받았으나 폐간되는 바람에 등용 지면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다소 들뜬 기분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이때 나는 ‘안종화 감독이 영화 <견우 직녀>를 찍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종화 선생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본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닐 때였다. 그는 이웃에 있는 연극영화과의 교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분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그저 막연히 한국영화 초창기에 활약한 영화인이라는 정도, 국도극장에서 본 < 사도세자 >(1956)의 감독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이 영화에는 몇 달 전 전창근 감독의 < 단종애사 >로 나란히 데뷔한 황해남 과 엄앵란 이 출연했다. 그들이 나 또래의 나이라서 더욱 관심이 갔었다. 나는 안 선생이 묵는 데가 서울여관임을 확인하자 무작정 숙소로 찾아갔다. 이 여관은 제주시 번화가 칠성통에 있는 남궁다방 바로 뒤에 있었다. 내가 서울여관으로 찾아갔을 때는 촬영 팀이 다음 날 예정된 로케이션에 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 가운데 조감독인 황학봉 이 눈에 띄었다. 뒷날 영화 < 무기와 육체 >(1968) 한 편을 내놓고 후속작을 기다리다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다. 나보다 두 살쯤 위였지 않나 싶다. 가깝진 않았지만 다행히 서울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의 도움으로 마침 방에서 나온 안종화 선생을 뵐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시 쓰는 친구라며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고 소개해주었다. 선생은 내가 서라벌예술대학을 다녔다고 하자 마치 제자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일반적인 예술가와는 다른 인자하고 기품 있는 선비의 모습이었다. 뒤에 확인됐지만 과묵하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스태프 가운데는 황학봉 과 마찬가지로 뒤에 감독이 된 진천 (陳天)과 김성수 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각기 조명과 기록을 담당했다. < 견우 직녀 >는 당시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구전설화를 추식이 각색한 것이다. 출연진은 김삼화 를 비롯한 이예성 , 이경희 , 김정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이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촬영 장면이 궁금했고, 좋아하는 배우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 진행상 도움이 된다고 믿었는지 안 선생은 나의 동행을 묵인해주었다. 첫 로케지는 북제주군에 있는 안덕계곡이었다. 화창한 여름날, 그늘도 없는 계곡 양쪽 벼랑에는 들백합이 만발했다. 계곡에는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흘렀다. 그만큼 물이 맑았다. 여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직녀(김상화)가 멱을 감다가 나무꾼에게 옷을 빼앗기는 장면이 촬영되었다. 그 배경은 나중에 찍은 천지연폭포 화면과 연결되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으로 한 달 가까이 제주에 머물며 촬영을 마친 <견우 직녀> 팀은 부산 서면의 로케이션을 거쳐 상경했다. 이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1960년 늦가을 명보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러나 흥행엔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알게 된 안종화 선생과는 1960년대 중반까지 드물게나마 만날 수 있었다. 윤봉춘 감독과 공동 연출한 < 애정삼백년 >(1962)을 촬영할 무렵에는 우연히 명동 거리에서 만나자 손을 꼬옥 잡으며 기대가 크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 무렵 나는 영화평론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슴 저리게 하는 것은 1965년 12월 20일 서울 YMCA홀에서 열린 월간 영화예술사 제정 제2회 영화예술상 시상식 때의 모습 때문이다. 선생은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유공영화인 패를 받기 위해 참석했던 것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선생의 자리로 찾아가 인사를 하자 불편한 몸을 겨우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아무 말 없이 손만 꼭 쥐시는 것이었다. 이미 말을 잃은 상태였다. 초점이 흐린 그의 눈에 어느새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선생을 본 마지막 모습이다. 세상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뒷날 내가 대학의 강의시간에 선생의 저술을 활용하고, 뒤늦게 찾아낸 < 청춘의 십자로 >의 공개 자리에서 해설을 하게 될 줄을, 아니 이 작품이 근대 문화재로 등재하는 데 선정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안종화 선생 역시 제주도와 인연이 깊은 분이었다. 데뷔작 < 해의 비곡 >을 촬영하기 위해 왔던 이 섬에 무려 35년 만에 다시 찾아와 < 견우 직녀 >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체계를 제대로 갖춘 한국영화사를 서술하는 것은 현장 영화인들의 ‘숙원’이었다. 나운규 서거 20주기를 맞은 1957년에 영화계의 총의를 모아 이루어진 < 아리랑 >( 김소동 )의 재영화화 작업이 그 포문을 열었다. 나운규라는 영화인을 통해 ‘민족’영화사의 기원을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곧 본격적인 영화사 서술로 이어졌다. 1959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영화사 편찬 작업이 불발로 그친 이후에, 한국영화인협회는 1969년, 마침내 <한국영화전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영화인협회의 의뢰를 받아 <한국영화전사>를 집필한 이영일이 이 책의 후기에서 스스로를 ‘편저자’로 지칭하고 있음은 단지 겸양이 아니다. <한국영화전사>는 협회가 기획한 한국영화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이었을 뿐 아니라, 협회에 소속된 많은 영화인의 구술 증언을 그 뼈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영일은 스스로 술회한 것처럼 “영화계의 숙원을 구현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떠맡은 대리인이었던 것이다. 영화사 연구가 제도화된 학문 분과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현장 영화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사를 세우는 일에 그토록 헌신해왔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우리는 역사를 서술하는 일이, 직업적 전문성으로 무장한 역사가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역사를 역사가의 손에 놓아두지 않고 그들 스스로 역사가가 되고자 했던 것일까? 물론 <한국영화전사> 그 자체가 그들이 직접 써야만 했던 ‘역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의 기치 아래 일제강점기의 영화 유산은 남한 영화의 전사(前史)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남한의 영화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과 자아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전사>를 저류하는 발전사관과 냉전적 사고방식은 1990년대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었을지언정, 이 책이 자리매김해놓은 한국영화사의 빛나는 걸작과 뛰어난 작가들은 여전히 그 명성을 잃지 않았다. 그 오래 지속되어온 영향력에 의심의 시선을 던지는 순간, 맞닥뜨려야 하는 본질적 질문은 앞서 던졌던 바로 그것, 즉 왜 현장의 영화인들은 그들 스스로 역사가가 되고자 했는지일 것이다. < 나운규 일생 >( 최무룡 , 1966)을 볼 때 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현장의 영화인들이 영화로 쓴 영화사며, 특히 나운규 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를 구성하고 있는 <한국영화전사>의 영화 판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부터 경성촬영소에 이르기까지, 또 < 운영전 >( 윤백남 , 1924) 에서 < 오몽녀 >( 나운규 , 1937)에 이르기까지 당시 영화계의 상황과 영화 제작 현장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기는 해도,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영화가 그려낸 그 시절의 모습이 흡족할 수는 없다. 후대의 여러 ‘전문적인’ 역사가들에 의해 당시 영화계와 관련한 많은 새로운 사실(史實)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 예컨대 < 아리랑 > 상영 당시 실제로 임석 경관의 제재가 있었는지, 나운규가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는 것은 이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심문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1957년의 <아리랑>에서 <한국영화전사>까지를 관통하면서 십수 년간 지속되어온 현장 영화인들의 역사 쓰기에 대한 열정과 욕망이 나운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묻는 편이 더 현명한 일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독립운동가로서 나운규 의 형상이, 후반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몸을 불사르는 예술가로서 나운규의 형상이 압도적이다. 이는 <한국영화전사>가 그려낸바, 민족운동의 지사이자 강렬한 예술의지에 불타는 예술가로서의 영화작가 형상에 정확히 부합한다. 굳건한 민족의식과 예술의지를 가진 영화작가야말로 일제강점기 이래 한국의 영화사를 지탱해온 주축이었다는 것, 그것이 <한국영화전사>와 < 나운규 일생 >이 공히 주장하는 바다. 하지만 민족운동가와 예술지상주의자 사이의 간격은 넓고도 깊다. <한국영화전사>에서도 영화를 계몽적 도구로 바라보는 태도와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정황이 종종 목격되기는 하지만, 둘 사이의 모순은 영화 < 나운규 일생 >에서 훨씬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독립운동가 박용운의 유지를 받들어 “잠든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영화를 선택했던 나운규 가 자학과 자기연민에 빠져 기생의 치마폭에 파묻혀 살 때, 또 그러던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 < 오몽녀 >의 촬영 현장에서 마지막 레디고를 부르고 쓰러질 때, 관객은 영화 속 나운규가 보여준 급격한 변화의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나운규 의 극적인 변화가 영화 속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영화감독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차라리 민족영화의 시원(始原)이자 한국영화인들의 지향점으로 구성되어야 했던 역사적 인물 나운규의 무게가 영화 속 캐릭터의 일관성과 설득력을 앗아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영화전사>가 이영일의 것만은 아닌 것처럼 < 나운규 일생 > 또한 영화감독 최무룡 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운규 일생>은 ‘걸작의 재발견’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로 쓴 영화사 <나운규 일생>이야말로, 반세기 가까운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영화사 서술의 특정한 관점을 재고하는 자리에서라면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작품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