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수 용팔이
- 감독
- 설태호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박노식, 최지희, 장혁, 윤희, 김칠성, 이강조, 최무웅, 천장수, 심상현, 한명환, 박옥초, 김창남, 김여제, 김지영, 장춘언, 박정주
1. 이 연재에서 이야기한 적 있는 < 팔도사나이 >(1969)는 김두한이라는 한국 남성 대중문화의 강력한 형상만을 만들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종로의 주먹 김두한이 지역으로부터 올라온 도전자들에게 판판이 승리를 거두며 서울을 정점으로 한 전국토의 위계화라고 할만한 것을 이루어냈다면, 대동강, 무등산, 영도다리 출신임을 내세우며(이 노골적이고 단일한 지역적 상징물들은 일종의 지역의 인덱스화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도전장을 내미는 팔도의 ‘쎈’ 사나이들 중에서도 단연 가장 막강한 대중적 소구력을 지녔던 것은 박노식이 분한 광주 용팔이일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박노식 은 한국영화에 처음으로 언어를 통한 지역적 질감이라는 것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 5인의 해병 >(1961)에서 시골 출신 병사역을 맡은 박노식은 이 캐릭터 ‘촌놈’이 전라도 사투리를 써야 잘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는 전라도 순천 출신이다) 감독 김기덕은 그의 군대생활을 떠올리며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 영화의 성공은 방언 사용에 대한 한국영화의 금기를 깨트렸다. 1967년의 기념비적 국책영화 < 팔도강산 >에서 다시 한번 광주 사위로 전라도 사투리를 리드미컬하게 구사해냈던 박노식이 “나가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용팔이인데 말시!”라는 일성과 함께 용팔이로 도착하고 있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보인다. 곧 이 캐릭터는 <팔도사나이> 시리즈의 주역으로 발돋움한 데(< 돌아온 팔도사나이 >) 이어 ‘용팔이’ 시리즈 뿐만 아니라(< 남대문 출신 용팔이 > < 역전 출신 용팔이 > < 운전수 용팔이 > < 신입사원 용팔이 > < 방범대원 용팔이 > 등) 여타의 무수한 영화들에 진한 자취를 남겼다.(<맨발로 올라왔다> <맨주먹으로 올라왔다>) 1970년대 스스로 감독을 겸하기 시작한 박노식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역할의 절반은 용팔이였다. 싸구려 액션영화들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용팔이야말로 이 시기 한국영화가 담아내었던 동시대성의 핵심 표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너무 과장이 아니냐고? 아니 정말로 그렇다. 용팔이는 그 자체로 급격한 이촌향도와 확장일로의 도시가 요구하는 염가의 노동력의 구상화라고 해도 무방해보인다. 1970년대 도시 변두리와 읍내의 열악한 재개봉관을 채운 액션영화는 홍콩식 권격영화와 더불어 ‘김두한’과 용팔이가 채우고 있었다. 전자가 합작이든 위장합작이든 아시아 시장의 공통성(‘아시아’라는 말이 불러일으킬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공통성은 소위 아시아적 ‘가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시장의 공통성이란 이 지역 일대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마련해둔 계급적, 젠더적 공통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일종의 국제성에 어필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철저하게 내수용으로 기획되었다. 아마도 이 시장과 관객의 문제야말로 왜 유독 이 후자의 영화들이 그토록 지배 이데올로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가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영화들의 거의 대부분은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등 70년대 ‘우수영화’의 포맷을 기꺼이 빌려오고자 했다. 무엇보다 김두한과 용팔이가 횡행하는 소위 70년대 협객영화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이들 모두가 과거를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를테면 <김두한 속 4부>에서 김두한이 그의 부하들에게 이제 폭력배의 시대는 갔고 새 시대가 왔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변할 때, 이것은 얼마나 유신(維新)의 이념에 근사하게 합치되는 것인가. 2. <돌아온 팔도사나이>는 용팔이가 과연 누구였는지, 무엇을 대변하는지, 그리고 이 존재의 열망과 취약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일 것이다. 이미 영화의 시작 전에 형님 호는 조직을 해산했고, 부하들에게 깡패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용팔이(박노식)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역시 한때 수중의 폭력을 즐겨 과시하였으나 이제 과거와 손을 끊고 새 사람이 되어 건실한 일꾼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짐꾼이 되어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던 용팔이는 어느날 사업가로 성공한 옛 동료에게 아내 옥희(사미자)를 뺏긴다. 분노한 용팔이는 이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돈에 혈안이 되어 우정까지 저버린 용팔이 앞에 호의 장성한 아들 철용이 나타나 결투를 신청한다. 용팔이는 이 결투로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친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돈 때문에 아내를 잃은 자가 한때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으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론 이 과정이 심히 급작스러워서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지만) 개과천선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진정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이 인물이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이 매번 좌절된다는 데에 있다. 간단히 말해 용팔이가 주먹을 쓰려는 순간 그럴 수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때마다 형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형사는 말 그대로 ‘불쑥’ 등장한다. 어느날 용팔이는 자신을 자처하는 가짜 용팔이를 만난다. 이 가짜에게 주먹을 들어 응징하려는 순간 홀연히 등장한 형사가 용팔이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우리는 법치국가의 민주시민입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실 때는 법에 호소하면 정당한 판결을 내려줍니다.” 용팔이가 가짜 용팔이와 대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거울을 통해서 마치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낸 형사는 다음 숏에서 용팔의 팔을 잡음으로써 이 상황에 개입한다. 이 형사의 등장은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의 등장을 예고하는 어떤 단서도 앞의 장면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통한 이 맥락없는 등장은 이 형사를 전지적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나 용팔이를 보고 있다. 형사의 말에 용팔이 박노식이 그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아이고 내가 공부를 좀 했으면 그 법인지 뭔지 알 거인데 말입니다잉 미치겠네라우, 아이구 요 새끼가 말입니다잉 남의 이름을 빌려서 용팔이 행세를 했는데 그것이 사기로 들어갑니까, 강도로 들어갑니꺼? 내가 참 대갈통이 나빠가지고.” 용팔이는 형사의 말대로 결국 주먹을 쓰지 않지만,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는 박노식의 제스처는 희극적이면서 또 도발적이다. 이 제스처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은 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나는 머리가 나빠서 법에 대해 잘 모르겠소. 용팔이(와 더불어 도시 변두리와 읍내의 열악한 재개봉관을 채우고 있는 관객)에게 마련된 자리란 최대치로서 치안과 노골적인 국가 시책이 가닿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순치(馴致)의 대상으로서 그는 법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법이 범/법을 지적하고 포획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법으로서 성립, 유지시킨다는 명제, ‘범죄의 식민화’(푸코)의 더할나위 없이 적합한 사례이다. 용팔이는 감옥을 들락날락한다. ‘성격적 결함’이 종종 그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만, 그는 매순간 갱생의 의지를 불태운다. 무엇보다 ‘경찰’이 그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눈을 부라리며 머리를 툭툭치는 저 제스처로 돌아가보자. 이것이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박노식이 분출하는 과장되고 기묘한 에너지 때문이다. 힘이 세고, 다혈질이며, 우직하면서 비굴하고,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잔인함을 발산하는 박노식의 용팔이는 종종 체제순응적인 내러티브의 층위와 상관없이, 과시적인 제스처를 통해 가진 자와 배운자에 대한 은밀한 희롱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팔도사나이>에서 용팔이는 민족의식의 고취를 역설하는 ‘점잖은’ 역사 교수에게 억지로 바보춤을 추게 한다. 식자들에 대한 조롱에서 비롯되는 이 ‘난감한’ 활력이야말로 이후 박노식이 수행한 용팔이 캐릭터의 핵심 정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한편으로 하층 계급 남성들의 노골적인 판타지를 고스란히 체현해내고 있는 이 캐릭터는 아직 그 어떤 정향적인 긍정성도 내포하지 않았지만(이를테면 1980년대의 ‘건강한’ 민중성에 관한 담론들과 용팔이 사이에는 아직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배우고 못 가진 자의 분노를 우스꽝스럽게 분출시키며 지배담론과의 거리를 미묘하게 확보해나간다. 물론 치안의 대상이라는 저 근본적 취약함을 간직한 채 말이다. 요컨대, 도시로 이주한 저학력 남성 노동자들의 적절한 반영물로서 박노식 용팔이는 1970년대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민중’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단위에 미처 끼지 못한 선(先) ‘민중’적 존재, 혹은 잉여화된 바로 그 존재들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3. 1971년 박노식은 그의 첫 번째 연출작인 < 인간 사표를 써라 >를 찍었다.(일설에 의하면 이 영화는 폭력사건으로 유치장 출입이 잦았던 이 스타가 “이게 뭔가? 나는 왜 이렇게 사고를 저지르는가?” 대오각성(?)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1) )그로부터 박노식은 1976년의 <방범대원 용팔이>와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까지 5년 동안 무려 13편의 영화의 연출과 주연을 맡는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주었다.(참고로 그의 마지막 연출작은 미국 이민에서 돌아온 1983년의 영화 < 돌아온 용팔이 >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호화로운’ 파괴를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아마도 한국영화사 내에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독자적 계보를 찾을 때 첫 번째로 불려져나와야 할 목록들일 것이다. 악취미에 가까운 스타일의 과잉, 폭력과 섹스가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인 이미지들에 대한 열렬한 탐닉, 넘쳐나는 신체훼손과 넘실거리는 자기 과시. 박노식은 그 속에서 사연많은 킬러와 용팔이 사이를 오가며 거의 박노식 유니버스라고 할만한 것을 창조해내었다. 이 영화들은 박노식이라는 배우-감독의 유니크한 개성의 유감없는 발현이자, 무엇보다 이 영화들이 소구했던 바로 그 관객들의 취향, 소망, 판타지의 가장 적나라한 형상들이라는 점에서 더할나위 없이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 중에서도 박노식이 잔학한 조총련계 야쿠자이자 도쿄로 건너간 촌뜨기 용팔이의 1인 2역을 맡고 있는 < 왜? >(1974)는 정말로 필견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라! 1) 오승욱,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신동아』, 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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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정치와 군사, 외교 등의 공적인 영역에서부터 개인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현재까지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으며 같은 민족을 향해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전쟁의 고통은 지속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수많은 참전 군인과 이산가족이 있다. 영화계에도 이러한 아픔을 가진 실향 영화인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설태호 감독이다. 함경남도 단천 출생의 설태호 감독은 청진의과대학 재학 시절,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으로 징집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망치던 중 후퇴하는 국군과 함께 1950년 12월 24일 흥남부두의 마지막 피난선에 몸을 실은 이후 다시는 가족을 만날 수도, 고향 땅을 밟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계에 데뷔해 오랫동안 반공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면서도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해가 될까봐 본명인 설태호라는 이름 대신 가명인 설봉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다. ‘엉터리’ 시나리오 작가, 이만희 감독을 만나다 전쟁 중에 월남한 설태호 감독은 미국연합고문사령단 소속의 KLO에 입대해 거제도에서 군 생활을 했고, 전쟁 후 이 부대가 해산되자 해병대 문관으로 복무했다. 이러한 군 생활 경험은 스펙터클한 전쟁영화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군인들이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고뇌와 그들만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창조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해병대 문관 제대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우연히 송국 감독을 만나게 되고, 영화 시나리오를 써볼 것을 제안받았다. 평소 책도 많이 읽었고, 소설을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터라 쉽게 생각하고 한 편의 사랑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렇게 쓴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가 < 첫사랑 >( 송국 , 1958)이었다. 설태호 감독은 자신의 첫 시나리오에 대해 ‘엉터리 같은 이야기’라고 회고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영화계에 내디딘 발은 당시에 연출력 있는 감독이던 정창화 , 양주남 감독과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이 감독들에게 영화의 콘티와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만희 감독과 인연이 이어졌다. 전쟁 반공영화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의 조연출을 마치고, 이만희 감독과 함께 을 공동연출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를 마친 후 반공수기 한 편을 보고 영화화할 것을 결심한다. 그것이 구술자가 각본을 쓰고 감독한 < 살아야할 땅은 어디 냐>(1963)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반공영화 감독 설봉으로 자리매김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여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코믹액션 활극 ‘용팔이 시리즈’의 탄생 1970년 대양영화사 한갑진 사장이 찾아와 정의로운 깡패가 주인공인 영화를 연출할 것을 제안했다. 설태호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유일수 와 함께 이 아이디어를 코믹액션 활극으로 바꾸어놓았고, 주인공을 맡은 박노식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캐릭터를 덧씌움으로써 ‘용팔이 시리즈’가 탄생했다. < 남대문 출신 용팔이 >(1970)를 시작으로 < 역전출신 용팔이 >(1970), < 운전수 용팔이 >(1971) 등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설움을 해소해줌으로써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설태호 감독은 인기를 얻은 작품은 계속 시리즈로 만들고, 아류작들이 양산되는 영화 제작 관행으로 영화의 질이 점점 떨어지는 것에 회의를 느꼈고, 다시 반공영화를 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동아방송 라디오의 인기 연속극이던 <실화극장> 시리즈 중 <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1973)을 시작으로, < 원산공작 >(1976), < 캐논청진공작 >(1977), < 도솔산 최후의 날 >(1977) 등은 흥행 성공과 함께 우수영화로 선정되고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또한 1970년대부터 국군영화제작소에서 장편 극영화를 연출했는데, < 땅울림 >(1980)과 < 에미의 들 >(1992)은 작품성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다. 설태호 , 현재진행형 감독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는 설태호 감독에게도 시련을 가져다주었고, 이후에는 극영화보다는 군 영화 제작에 주력하며 1990년대 중반까지 현장에서 연출했다. 하지만 설태호 감독은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피난선을 탔던 자신의 기억을 영화화하고자 신상옥 감독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와 함께 노력을 기울였으며, 지금도 새로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현재진행형의 감독이다. 그의 구술에는 한국영화계뿐만 아니라 군영화제작소의 영화 제작 환경과 전쟁영화의 군 제작 지원 등 상업영화계에만 몸담았던 감독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6.25전쟁에 참전한 실향 영화인으로서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적극적으로 증언했다. 1.4후퇴 때 만난 한신 장군과의 일화를 담아낸 < 도솔산 최후의 날 >(1977), 포로수용소의 실상과 젊은 군인들의 고뇌를 담아낸 < 거제도 포로수용소 >(1992) 등에 묘사된 직접 경험과< 땅울림 > < 에미의 들 > 등에 흐르는 그의 실향민으로서, 이산가족으로서 느끼는 아픔 그 모두를 녹여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주 매혹적인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다 그만한 사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호칭들을 붙여줄 것이다. 그렇다, 나도 주저 없이 이 시대 충무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영화감독 설태호 를 그렇게 부르고 싶다. 그와 함께 있는 맥주집안은 늘 안온했고, 그와 함께 있는 충무로 뒷골목의 막걸리 집은 노상 정이 넘쳐흘렀다. 또한 설태호 감독이 함께 하는 영화사 안은 항상 웃음꽃이 피고 또 피고 또 피어났다. 눈이 오고 비가 내려 촬영이 펑크나거나 연기자의 스케줄이 안 맞아서 촬영이 마냥 지연돼도 설태호 감독은 기다림에 지친 스태프들을 위해서 기꺼이 삐에로가 돼 주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설태호 감독과 같이 하는 술자리에선 전혀 술값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충무로가 늘 따듯한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주머니가 가벼운, 그래서 춥고 긴 겨울이 많은 영화인들을 힘들게 했다. 영화 일이 많은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많았으니까..그래도 영화예술을 한다는 긍지, 자부심 하나로 충무로를 떠나지 못했던 그 춥고 서러운 긴 세월, 충무로의 그 이름 없는 골목들은 많은 영화인들이 남몰래 흘린 눈물이 눈발이 되어 흩날리도 하고, 때론 웃음이 넘쳐흐르는 초원이 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그 세월에 설태호 감독의 곁에 있으면 겨울에도 추운지 모르고 폭염 속에서도 더운지 모르게 그렇게 많은 영화인들이 그와 함께 충무로를 지켜 갔다. 단세포적으로 말하면 술값이던 밥값이던 늘 설태호 감독이 도맡아 내는 그는 한마디로 호구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주머니가 비어도 배불렀고 없어도 얼큰하게 취했으니까... 설감독은 자기 아닌 남이 돈 내는 것을 보는 스타일이 이 아니다. 술값을 다 털어 내고 차비가 없으면 집에 까지 한시간 반을 걸어 간 적이 한 두 번도 아니였다. 난 설태호 감독을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와 만나면 어느 자리에서건 늘 허허 웃는 위트와 유모어가 넘치는 스트레스 해소제였고 활력소였고 그는 윤활유였다. 그래서 인지 설감독 주위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자주 만나는 그의 친구들 그 누구도 얻어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밥값이나 술값을 계산하는가? 궁금하겠지요? 간단하다. 술값이던 밥값이던 설감독 보다 먼저 내는 비법이 있다. 먹기 전에 들어가면서 카운터에 설감독 모르게 넉넉히 돈을 내고 먹고 나올 때 잔금을 받는 수법이다. 이에 당황한 설감독은 아예 먹으러 갈 집에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하면서 술값을 아무 한 테도 받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는 거다. 이차 삼차 갈 집도 대략 정해진 단골집이 있으니까 한 십 여 군데다가 미리 전화를 해놓는 데는 먼저 돈을 내고 싶어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거다. 영화계에는 설태호 감독과 절친했던 선후배 동료들이 많았으나 그 중에도 멜로드라마를 잘 만드는 김기 감독, 청소년드라마의 선두주자 김응천 감독 (작고),그리고 이 세 감독의 시나리오를 단골로 써서 공급했던 나 이렇게 네 사람을 충무에서는 사 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설태호 감독은 유모어 감각이 남 다르다. 시나리오 심사를 들어가서 하루에 수 십 편의 시나리오를 읽는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심사에 설태호 감독이 참여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하루의 고된 심사가 끝나고 저녁회식 자리에선 설 감독의 좀 야한 유모어가 튀어나오고, 자중은 배꼽을 잡고 나뒹굴어지는 웃음 바다가 되기 때문이다. 동료 심위원들과 유모어 대회를 열면 언제나 일등은 설태호 감독이 따놓은 당상이였다. 설태호 감독은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이다. 19세때 홀홀 단신 남하한 실향민, 한시도 잊어 본적이 없는 이북 단천에 두고 온 어머니. 설감독의 모친은 중견 탈렌트 나문희 씨를 쏙 빼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나문희씨가 나오면 그녀를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에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내가 말야,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돼 가지고 이북에 가서 오마니를 만나면 난 총살을 당해도 다시는 오마니 곁은 떠나지 않을 게야, 여기 있는 아내와 자식들한테는 몇 십 년을 지극 정성 다 했지만 오마니 한데는 단 하루도 효도를 해보지 못한 후래자식이니끼니' 그렇게 말하면서 설감독은 술잔을 꼭 쥐고 그 주름진 눈가에 이슬을 묻히곤 했다. 이산에 아픔의 멍우리를 풀지 못한 한 때문 이였을까, 설태호 감독은 유독 반공영화나 군사영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냈다. 정창화 감독과 이만희 감독에게서 연출수업을 받고 1963년 설태호 의 감독 데뷔작 ' 살아야 할 땅은 어디냐 ' 허근욱 의 실화소설이 바탕이 된 실향민의 고통을 담은 방공영화였다. 같은 해 해병문관이었던 체험이 밑그림이 된 ' YMS504의 수병 ' 1965년 ' 신화를 남긴 해병 ' ' 위험한 보수 ' 1967년 ' 0호작전 ' 이렇게 반공영화와 군사영화만을 고집스레 만들어 오던 설태호 감독은 일정기간을 자신의 특기인 유모어와 해학이 넘치는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1970년 ' 운수대통 일보직전 ' 연이어 같은 해 ' 남대문 출신 용팔이 '가 대박을 터트린다. 당시의 쾌남아 스타 박노식 을 주연으로 출연시켜 장안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코믹 액션 ' 조폭 마누라 ' 신라의 달밤 ' ' 달마야 놀자 ' 그 이상의 코믹액션 붐을 일으키면서 연이여'용팔이' 씨리즈가 탄생한다. ' 역전 출신 용팔이 ' ' 운전수 용팔이 ' ' 신입사원 용팔이 '가 황금알을 낳으며 한 시대를 풍미 한다. 1970년대는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정치 경제 사회는 끝간데를 모르게 암울한 시대였다. 억압에 시달리고 궁핍에 찌들고 숨쉬기조차 답답하던 그 시대에 용팔이 씨리즈는 시민들의 탈출구였다. 일자무식 시골 청년 용팔이 ( 박노식 )가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 와서 벌이는 해프닝, 무식한 촌놈이 얼렁뚱땅 돈을 벌고 여차하면 주먹과 발길질로 약아 빠진 서울 놈들 코피 터트리는 그 통쾌함에 수많은 관객들이 참았던 숨통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렇게 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설태호 감독은 방향을 틀고 이산의 아픔을 다시 되새기듯 반공영화와 군사영화로 몰두하기 시작한다. 1973년 제2회 한라 문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을 연출하고 1973년 간첩 잡는 귀신 오제도 검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 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 '에 윤정희 최무룡 을 출연시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여간첩 영화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뒤를 이어 ' 특별수사본부와 여대생 이난희 사건 '이 극장가를 강타 하며서 여간첩 영화들이 줄을 잇기 시작한다. 설태호 감독은 바람돌이처럼 '용팔이' 바람을 일으켰고 '여간첩'을 소재로 다시 바람 몰이를 하고 나서 기수를 또 다시 군사영화로 돌렸다. 1976년 제15회 대종상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한 ' 원산공작 '을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서 흥행감각과 예술감각을 두루 갖춘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견고히 했다. 설감독은 여세를 몰아 연속적으로 군사영화를 만들어 갔다. 1977년 ' 케논 청진공작 ' ' 도솔산 최후의 날 '' 수병과 제독 '' 제3공작 ' 대형 전쟁영화 ' 땅울림 '등 계속 군사영화를 만들어 갔고 설감독은 잠시 쉬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마지막이라 할 극영화 역시 군사영화인 걸작 '에미의 들'을 연출하여 춘사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다고 설감독이 군사영화와 반공영화, 그리고 코믹액션 영화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설태호 감독은 멜로드라마와 어린이들의 따듯한 사랑이 담뿍 담긴 영화들도 연출하였다. 1974년 ' 사랑이 있는 곳에 ' 1975년 ' 십 년 만에 외출 ' 1984년 안성기 주연의 ' 깊고 깊은 그곳에 ' 그리고 설태호 감독은 제작까지 겸한 대만 로케이션 작품 ' 스잔나의 체험 ' 1987년 ' LA 용팔이 '를 가지고 영화 팀들에게 유독 입국을 힘들게 했던 미국 로케이션도 감행했다. 어린이들의 정과 휴먼 드라마로는 1978년 ' 슬픔을 저 별들에게도 '' 누가 이 아픔을 ' ' 둘도 없는 너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설태호 감독은 뼈에 사무치는 이산의 한을 안고 국군 홍보영화도 수 십 편을 연출한 한마디로 한국영화계에서는 반공군사 영화에 대가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70 고령인 지금도 살태호 감독은 청춘 같은 의욕에 불타 극영화 한편이라도 더 만들려는 의지와 정열로 충무로를 그리워하며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상훈 (시나리오작가) / 2002년 <프로필> 1929. 5. 26 함경남도 단천 출생 1963 < 살야할 땅은 어디냐 > 데뷔 작품명 1963 살야할 땅은 어디냐 / YMS504의 수병 1965 신화를 남긴 해병 / 위험한 보수 1967 0호 작전 1970 운수대통 일보직전 / 남대문 출신 용팔이 / 역전 출신 용팔이 1971 운전수 용팔이 / 신입사원 용팔이 1972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 혈보산천 1973 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 / 특별수사본부와 여대생 이난희 사건 1974 어둠속의 목격자 / 사랑이 있는 곳에 / 암살지령 1975 십년만에 외출 1976 원산공작 / 보루네오에서 돌아온 덕팔이 1977 케논청진공작 / 둘도 없는 너 / 도솔산 최후의 날 1978 대동강 출신 / 수병과 제독 / 슬픔은 저별들에게도 1979 제3공작 / 누가 이 아픔을 1980 땅울림 1981 복수는 내게 맡겨라 1984 깊고 깊은 그 곳에 / 스잔나의 체험 1987 LA용팔이 1988 햄버거 쟈-니 1992 에미의 들 수상 경력 1976 < 원산공작 >제15회 대종상 감독상 1973 <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제2회 한라문화제 감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