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렸다.
- 감독
- 박진솔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조정연, 신혜수, 김나은, 박종규, 김현철
영화는 인연이다. 영화의 경계가 얇아지고 구분이 모호해지는 요즘 부쩍 그런 생각에 자주 잠긴다. 어떤 영화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2023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 괴물 >이 그랬다. 나는 이 영화를 칸영화제에서 한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국내 개봉 뒤 마지막으로 한번, 총 세 번에 걸쳐 극장에서 만났다. 공교롭게 <괴물>은 하나의 사건을 세 가지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다. 안팎으로 묘한 인연과 기시감에 사로 잡힌다. 하나의 사실이 어떤 경로를 경유하여 나에게 당도하는가. 영화는 결과를 산출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에 이르는 과정을 구태여 복기하는, 비유하자면 지나간 길의 얼룩을 다시 더듬어 본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다르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괴물>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영화였지만 여러 번 보면서 빠져들었던 건 나에게 당도하는 사실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비교하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이미 수 많은 평자들의 빼어난 분석들이 다 완료된 지금, 이 영화를 새삼 되돌아보며 딱 맞춰지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 복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분석이라기 보다는 인상의 차이를 비교하는 쪽에 가깝다. 다시 말해 영화 안팎의 (개인적인) 경험과 불순물들이 함께 섞여 들어간 기억의 기록이다. 세 번의 만남, 두 가지 감상, 하나의 얼룩 칸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괴물>은 대수롭지 않은 영화였다. 전작 < 브로커 >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는데, 경쟁작 중 제일 먼저 상영한다는 걸 알고 난 뒤 그저 그런 범작일 거라 판단했다. 대부분 초반에 상영되는 경쟁작들은 신인의 작품이나 수상권에서 먼 경우가 있는지라 멋대로 판단하고 영화의 최초 시사를 보지 않았다. 함께 간 다른 기자가 보고 온 뒤 영화에 대한 흥분과 열기를 전해주었고 뒤늦게 표를 구해 극장에 갔다. <괴물>은 나의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를 여지없이 부수어 주었고 뒤늦은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여기까진 평범한 반성의 이야기. 정작 의아했던 건 영화에 대한 기자들의 평가가 대체로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당 수 평자들이 ‘고레에다의 새로운 드라마와 안정된 연출’정도로 박한 평가를 내렸다. 박한 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많이 본 소재와 구성이라는 점이었다. 형식적으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 라쇼몽 >의 영향 아래 놓인 영화라는 단편적인 인상이 지배적이었고, 내용적으로는 작년에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루카스 돈트 감독의 < 클로즈 >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다. 요약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흥미롭긴 하지만 (그가 늘 그랬듯이) 무난하고 깔끔한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평이었다. 영화를 막 보고 나온 뒤 심장이 두근거리던 입장에선 얼핏 이해가 가면서도 납득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올해 칸영화제의 수상 결과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것이었는데, 무엇보다 <괴물>의 각본상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보다는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사카모토 유지는 이 영화가 본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여러 번 밝혔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겪었던 일이다. 신호가 빨간불이어서 멈췄는데 내 앞에 트럭이 한대 있었다. 그런데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는데도 한참을 꼼짝하지 않는 거다. 이상해서 경적을 몇번 울렸다. 잠시 뒤 트럭이 움직이고 나서야 휠체어에 탄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트럭은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때 사정도 모르고 경적을 누른 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가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씨네21 1433호, 괴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 인터뷰 ‘어쩌면 진실은 이야기 바깥에’ 중) 범상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통찰. 영화를 향한 상찬도 딱 그정도에 그쳤던 것 같다. 찜찜한 의문을 뒤로 한 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난 영화는 전혀 다른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개인적인 인상으로 작년 부산에서 가장 뜨거웠던 영화 중 하나는 <괴물>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아역 배우들이 내한한 게 열기를 달구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미나토와 요리 역을 맡은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배우는 의도를 초과하는 존재감을 스크린에 새겨 넣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놀라운 마법(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재능)은 어린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에 있다. 그의 카메라는 사실의 일부분을 무난한 방식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따르지만 그가 포착하는 대상은 현실에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난다. 단지 예쁘고 잘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시절에만 허락된 반짝임을 찾아내고 원석 그 자체의 생동감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은 재능과 감각이라는 헐렁하고 추상적인 단어 이외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마침 올해 부산에 < 아무도 모른다 >의 야기라 유야 배우가 <간니발> 홍보 차 방문해 있었기 때문에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올해 부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많은 설명을 쏟아냈다. 몇몇 멘트들은 배우들과 함께 하는 자리이기에 더욱 의미 있는 발언들도 있었다. 다시 본 <괴물>이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의도를 초과하는 장면들이었다. 소년들이 사실 어떤 관계였고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는지, 이야기의 전모를 알고 난 뒤 다시 보는 어른들의 시점은 어딘가 절박하고 애처롭다. 진실을 오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여기에 진실 따윈 없다.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와 담임 선생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이야기 역시 각각의 진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진실찾기의 추리에 매달리는 대신 매 순간 장면에 맺히는 시점의 가능성에 공을 들인다. 한 마디로 모두 진심으로 절박하다. <괴물>의 다중시점은 카메라의 본질적인 한계를 증명한다. 진실은 없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사실의 조각일 뿐이다. 정확히 진실이란 이야기 바깥 혹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깃드는 가능성에 가깝다.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괴물>은 그 소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야기의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를 추리하는 이야기의 구성에 홀리지 않고 각각의 인물들이 순간에 집중한다. 어떤 이야기인지 전체 꼴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알고 있기에 각 인물들이 느꼈을 절박한 감정들이 더욱 진심으로 다가온다. 진창에서 미나토를 찾아서 함께 걸어오는 장면에서 사오리, 아니 안도 사쿠라의 몸짓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전체를 초과한다. 미나토와 사오리가 나란히 선 뒤 걷는 이 장면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것에 온 힘을 쏟는다. 매 순간의 진실들을 포착하는 시선. 그렇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시선의 한계를 인지한다. 부분을 전체로 호도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순간 <괴물>은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으로 무게추를 이동한다. 아니 애초에 영화는 그 자리에 헐거운 장면들을 느슨하게 꽂아둔 채 있을 뿐, 이동한 건 내 마음이다. 두 번째 본 <괴물>은 결국 어떤 자리에서든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고레에다의 시선의 영화였다. 나를 되돌아보고 너를 상상하는 시간 마지막으로 2023년 끝자락, 겨울 한복판에서 <괴물>을 다시 본다. 다시 말하지만 정교한 이야기나 안정감 있는 구성, 빼어난 연기는 이미 설계도 수준으로 자세히 해설되어 있다. 이 글은 미처 닦아내지 못한, 어쩌면 영영 닦이지 않을 내 마음 속 얼룩에 대한 묘사다. 칸에서 영화를 보자마자 동료와 의견이 갈린 지점은 엔딩에 대한 해석이었다. 동료는 마지막 장면이 소년들의 완벽한 순간을 그리는 플래시백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소년들의 죽음 이후를 보여준다고 받아들였다. 폭우 이후 미나토와 요리는 함께 세상을 떠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두 사람만의 낙원으로 떠난 모습이다. 의도 했건, 무지했던 현실은 두 소년을 여러 방식으로 밀어냈고 두 사람만의 아지트를 찾아낸 소년들의 시간은 거기서 멈췄다,고 생각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엄마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아지트를 발견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비가 갠 장면의 연결 방식, 날이 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소년들을 잡아주는 희뿌연 장면의 톤까지 명백히 사후세계를 묘사한다고 받아들였다. 왜 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는지를 묻는다면 다양한 답변도 가능할 것이다. 왜 끝을 비극으로 마무리했어야만 했는지를 묻는다고 해도 설명할 논리들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세 번째 다시 본 날, 그것이 죽음과 이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이 이야기가 누가 괴물인지 찾거나 책임을 묻기 위한 진실 찾기 게임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건 변해가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절박한 얼굴,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황망한 얼굴, 세상 해맑게 서로를 마주보는 소년들의 화사한 얼굴이다. 그리고 마치 이야기의 벽을 깨는 듯한, 세상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트럼펫 소리와 교장 선생님의 헤아리기 힘든 얼굴. 이것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연결할지는 결국 스크린 앞에 앉은 내 몫이다. 문득 아직도 이야기의 빵부스러기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세 번을 마주한 뒤에야 손을 털고 일어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영화가 진실의 씨앗을 심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1년에 걸친 만남 끝에 어느덧 거울이 된 영화 <괴물>을 마주하며 이야기 바깥, 프레임 바깥, 나의 바깥을 그려본다. 2024년 <괴물>을 되돌아보며 너를 상상하는 힘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실감한다. 비가 갠 뒤 뽀샤시하고 포근해 보이는 소년들의 낙원, 그곳에서의 힘찬 뜀박질을 뒤로 한채 극장 바깥으로 나선다. 아직 겨울이다.
짧은 여행의 기록(2) 3-1: 내 나이 42세, 이젠 오직… 위트앤시니컬이 있는 대학로는 내게 추억의 장소다. 90년대 후반, 나우누리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니면 신촌이거나. 그래서 매일 밤 채팅을 통해 우정을 쌓아가던 라이터37(나희도)과 인절미(고유림)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내게는 반갑고도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때 그곳에서 그들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다가, 혹은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다가… 모두 동년배니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번쯤 마주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제 우리도 슬슬 관리해야 하는 나이인데 다들 건강은 괜찮은지…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번개’나 ‘추억여행’ 같은 걸 위해서가 아니다. 상을 (대신) 받기 위해서다. 처음 대리 수상을 부탁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3단계면 끝나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서는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으면 되는 것처럼. 1. 시상식장에 간다. 2. 상을 받는다. 3.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3단계면 끝나는 일이 맞긴 하다. 그 사이사이에 놓인 민망하고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제외한다면…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동양서림으로 들어가는데, 어쩌면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책을 구경하고 있는 김정환 선생(시인, 69세)의 옆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2018년에 출간된 내 책 [아무튼, 택시]에서 김정환 선생과의 에피소드를 가볍게 언급한 적이 있다. 바로 이렇게. …파마를 하고 며칠 뒤 김준성문학상 뒤풀이에서 김정환 시인을 만났다. 김정환은 내게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 생계형 서평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며 지금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후장사실주의 동인인 동시에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을 맡고 있는, 전에도 몇 번 선생님에게 인사드렸던 37세 금정연이라고 말했다. 젠장, 나는 자기소개가 정말 싫다. “뭐? 진짜?” 김정환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처럼 안 생겼는데.” 누군가 물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은 어떻게 생겼는데요?” “문학에 대한 고뇌로 얼굴이 아주 썩었지. 이인성처럼. 근데 여긴 달라. 얼굴에 문학에 대한 고뇌가 전혀 보이지 않아. 훤해. 잘생겼어. 나랑 똑 닮았어.” 김정환 시인은 1954년생이다. 그리고 윌리스를 닮았다…… 몇 주 후에 문학과지성사 시상식장에서 김정환 시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미안했소……” 나는 괜찮다고,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나는 시상식장을 나서며 두 번 다시 파마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문학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윌리스는 “내 나이 35세, 이젠 오직 돈 생각뿐이다”라는 밈으로 유명한 루이 말 감독의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작은 목소리로 인사한 다음, 그 상태로 시인을 지나칠 때까지 몇 걸음 걸어간 다음에야, 고개를 들고 위트앤시니컬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며칠 전에 새로 파마한 머리가 이마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시상식장에서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좋은 소식. 스무 명 남짓한 규모로 치러지는 시상식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다음은 나쁜 소식. 그중 절반이 나와는 조금 어색한 사이에 있는 ‘선생님’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시 부문 수상자인 신해욱 시인의 내가 모르는 지인들이다… 들어가자마자 오늘도 문학에 대한 고뇌로 가득해 보이는 이인성 선생(소설가, 70세)이 있어서 꾸벅 인사했다. 이인성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근데… 누구시더라? 나는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지금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후장사실주의 동인인 동시에 한때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며 선생님과 몇 번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던 42세 금정연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금정연이라고. 그러자 이인성이 말했다. 아, 금정연씨! 어떻게 지내시나? 요즘도 맨날 글 쓰고 그러고 있나? 나는 하하 뭐 그렇죠, 대꾸하며 마음 속으로 정지돈에게 과연 상금의 몇 퍼센트를 요구하면 좋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위: 영화 <앙드레와의 저녁식사>에 출연한 김정환 시인, 아래: 영화 < 강변호텔 >에 출연한 김정환 시인) 3-2: 복사꽃 그날 일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시간의 베일 뒤로 수치스럽고 민망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반딧불처럼 잔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태여 그걸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거라고 믿는다. 물론 좋은 기억들도 있다. 그것들에 대해서라면 언젠가 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영화 < 동사서독 > 중에서) 4-1: 꿈에 악!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나, 그리고 또 나밖에는… 오스스 몸이 떨려와서 주섬주섬 이불을 찾아 몸을 덮었다. 기억은 서서히 돌아왔다. 어제는 시상식이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를 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는데, 물론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취생몽사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테라, 기네스(생), 편의점에서 파는 세계맥주 몇 개… 나는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앉아 두서없이 떠오르는 간밤의 기억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복사꽃, 복사꽃 아님, 복사꽃,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어젯밤의 기억인가? 어쩌면 내가 ‘한영한사’ 마지막 연재를 준비한답시고 홍상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 아닌가? <강변호텔>과 < 소설가의 영화 >를 보며 시인으로 나오는 기주봉이 김정환 시인이랑 너무 똑같이 닮아서 영화를 보는데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아니 정확히 반대로, 어제 만난 김정환 시인이 <강변호텔>과 <소설가의 영화>에 나오는 기주봉과 너무 똑같이 닮아서 현실과 픽션이 뒤섞여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그냥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마지막 가설은 이내 기각되었다. 간밤에 실제로 꾸었던 꿈의 조각들이 의식 위로 불쑥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평론가 임재철과 대통령 윤석열과 영부인 김건희가 나오는 꿈이었다… 씻고 설거지 하고 어제 (대신) 받은 꽃다발 꽃병에 꽂고 나윤이랑 영상 통화했다. “아빠! 나 여기 안산 할아버지네 집에 있어!” 나윤이가 말했다. 나윤이 안산 할아버지네 집 가고 싶어했잖아, 가니까 좋아? 물으니 “응, 전에 할머니랑 아빠랑 같이 차 타고 왔잖아”라고 했다. 그래, 바로 어제… 그러다 갑자기 내일 서울 할머니네 집에 가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니까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나한테 안 물어봤잖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다음부터 꼭 물어보겠다고 했는데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인지 안 가겠다고 해서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행신에서 출발해서 광주송정으로 향하는 12시 18분 KTX-산천 417호 열차를 타기 위해 집에서 나섰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근처 복권방에 들러 로또와 연금복권을 한 세트씩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마지막으로 행신역에 왔을 때는 공사중이었는데, 공사가 끝난 지금은 제법 넓고 환해 보였다. 연휴의 첫날이라 그런지 엄마 아빠를 따라온 아이들이 많았다. 저마다의 속도로 걷고 뛰고 말하는 아이들. 나는 나윤이를 생각했다. 아이의 눈과 코와 입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표정들을, 무언가를 설명하기 전에 몇 번이나 곱씹는 말의 처음과 거기에 동반되는 손과 발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나는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요? 하는 질문이 절로 들었다… 물과 초코바를 사서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내 상식과는 달리 에스컬레이터가 중간에 있는 게 아니라 1호차 쪽에 있어서 18호차를 타려면 반대편 끝까지 걸어야 했다. 아마 5키로미터 정도는 걸은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미국의 철도 전쟁, 그리고 영화의 탄생에 대해 숙고했다(리베카 솔닛의 [그림자의 강]을 참고할 것). 거짓말이다. 그저 [마틴 에덴] 오프닝 시퀀스에 짧게 지나가는 기차 장면에 대해 조금 생각했을 뿐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로또와 연금 복권은 꽝이었다. 나는 대통령 꿈을 꾼 또 한 명의 복권 당첨자가 되는 대신 그냥 윤석열 대통령 꿈을 꾼 사람이 되었다. (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Railway Tracks. P.R.R. Quadruple Tracks Monmouth’ 아래: 영화 < 마틴 에덴 >의 한 장면) 4-2: 빵과 장미 김재욱이 너무 많다. < 커피프린스 1호점 >과 <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에 출연한 배우 김재욱, ‘안녕하세요 제니퍼에요’라는 유행어로 유명한 코미디언 김재욱, [쇼미더머니 11] 2차 예선에서 댐핑 좋은 붐뱁을 선보이며 심사위원 올 패스를 받은 래퍼 김재욱, 바로 오늘 내가 주문한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를 한국어로 옮긴 번역자 김재욱… 하지만 내가 아는 김재욱은 한 명뿐이다. 90년대 중반에 나우누리에서 만나 신촌과 대학로와 홍대와 그밖의 많은 곳들을 함께 싸돌아다니던 김재욱(아이디 gokjw). 지금 우리는 광주에 있다. 김재욱과 나. 광주는 두 번째였다. 그렇지만 처음이나 다름없다. 십년 전,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축의금을 내고,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광주에 도착해서 처음 느낀 건 빛이 다르다는 거였다. 과연 빛의 고을이었다. 우리는 광주송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문화전당역에서 내렸다. 마침 광주프린지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쏟아지는 사람들, 빛들, 노랫소리들. 금남로를 건너 김재욱이 검색해서 찾은 ‘맛집’을 향했다. 월계수식당. 김재욱은 특제 소스와 함께 비벼 먹는 삼선볶음밥을, 나는 우삼겹짬뽕을 주문했다. 없던 숙취까지 몽땅 가시는 맛이었다. 지금 내게 숙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직 GV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우리는 충장로를 걸어 광주극장을 향했다.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는 게 조금 신기했다. 식당이 있던 위쪽은 조금 북적북적한, 전국 어디에나 있는 ‘로데오 거리’ 같은 느낌이었다면 광주극장이 있는 아래쪽은 의상실과 금은방 등이 있는 좀 더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광주극장과 잘 어울리는 거리라고 해야 할까. 극장 바로 옆에는 < 김군 > 포스터가 크게 붙여진 ‘소년의 서(書)’라는 이름의 서점과 ‘빵과 장미’라는 이름의 빵집이 있었다. 물론 ‘빵과 장미’라는 이름은 켄 로치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빵과 장미>는 우리나라에서 2002년 5월 24일 개봉했다. 누적관객은 444명. 그 444명 중에 나도 있었다. 2002년의 초여름, 당시 만나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맞은편의 웬디스(Wendy’s) 2층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양배추 조각과 여기저기 묻은 빨간 케찹과 애드리안 브로디의 콧등 위로 떨어지던 햇빛 같은 것들이.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정말이지 시간은 늘 없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극장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중 하나)에서 서이제 작가와 함께 [마틴 에덴] GV를 하기 위해서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제 와서 내가 갑자기 극장을 찬양한다면 그건 제법 우스운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을 나도 안다. 나는 유운성 평론가가 말하는 ‘빛 마니아’가 아니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씨네필 테스트도 통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나는 우리의 기억이 형성되는 방식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고 싶다. 어떤 책의 페이지를 (다시) 펼쳤을 때 문득,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라도 종종 그것을 읽던 당시의 빛과 바람, 손에 들린 종이책의 감촉과 냄새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어떤 영화에 대한 기억은 극장과 분리할 수 없이 달라 붙어 나라는 관객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서울극장에서 본 바즈 루어만의 < 로미오와 줄리엣 >, 고등학교 시절 녹색극장에서 단체 관람했던 < 콘에어 >와 <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 이대 영화마당에서 교복을 입고 본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미성년자 관람불가), 동기들과 ‘국문학 입문’ 강의를 째고 강변 CGV에서 봤던 < 친구 >와 < 신라의 달밤 >, 군대에서 휴가 나온 기분으로 불광 CGV에서 친구와 함께 봤던 < 박쥐 >, 기타 등등… 그건 어디로도 닿지 않는 개인적인 기억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건 나의 기억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말처럼, 손상되기 쉽지만 기억은 과거를 되찾으려는 욕망의 원천이다. 그리고 욕망은 우리를 살게 한다. 기억이 없이는 ‘나’라는 존재도 없다. 꼭 있어야 하는 건지는 둘째치고… 그러니까 내 말은, 광주극장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는 거다. 얼마 전에야 광주극장에 처음, 그것도 일 때문에 가본 사람이 하기에는 조금 머쓱한 말이긴 하지만. 이 부분을 쓰며 나는 혹시 모를 기억의 오작동을 방지하기 위해 구글에 ‘광화문 웬디스’라고 친다. 나무위키의 ‘웬디스’ 항목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2018년 2월 17일에 올라온 클리앙 게시물이다. 제목은 이렇다: “광화문에서 웬디스 먹어봤으면 아재 인정” 어 인정… (빵과 장미, 외부와 내부) 4-3: (Unexpected) Guest Visit 그렇게 싸늘한 반응의 행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2015년 12월의 어느 날 정지돈과 함께 명동 CGV에서 했던 빔 벤더스 감독의 < 에브리씽 윌 비 파인 > GV에 버금갈 정도였다(당시 행사 직후 SNS에 ‘올해 최악의 지브이’라는 평이 올라왔다). 관객은 40명 남짓, GV가 시작할 때는 30명 정도였고, 끝날 때는 그보다 더 적었다. 몇 명이 되었건 모두들 많은 것을 잊고 복사꽃이 좋았던 것만 기억하시기를. 그러니까 서이제 작가의 멋진 말들만… (영화 < 마틴 에덴 > 중에서, 혹은 GV를 끝낸 어느 Guest의 마음) (참고로, 그날 내가 GV에서 (하려고) 했던 말들은 여기 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민망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한 마음으로 광주극장을 나서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로 몇 시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6시”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6시예요, 영화는 이미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광주에는 이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곧 나는 잃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을 큰 소리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 같아서 그 문장을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남자는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시계를 잃어버린 후로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을 수 없다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거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을 거요.” 그는 내가 6시라고 말한 후에야 6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고 보니 오늘 아홉 시간 동안 한 가지 생각만 하면서 쉬지 않고 걸어 다녔다는 걸 알게 된 것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고 말했다. “쉬지 않고 말이오. 왔다 갔다 한 게 아니라 곧장 앞으로만 걸어갔지. 그런데 이제 보니 원을 그리면서 걸어 다녔군. 미친 짓이지, 그렇지 않소?”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나는 자주 저 극장에 갔었다오” 하고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름을 곧 잊어버렸다. 나는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나 어느 날엔가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듯이 나도 어느 날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지. 웃지 마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무슨 일이든 언젠가는 마지막이 있기 마련이오. 웃지 마시오!” 4-4: 인터내셔널의 밤 (ㄱ) 트뤼포에 앉아서 트뤼포를 마셨다. 소설가 박솔뫼가 추천한 곳이었다. 나는 언젠가 ‘박솔뫼의 맛따라 멋따라’라는 제목으로 박솔뫼가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먹는 유튜브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기획은 여전히 유효하며 투자자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영화에 대한 우리의 오디오비주얼 에세이가 그런 것처럼… 다만 트뤼포는 솔뫼가 직접 가본 곳은 아니었고, 이름을 듣고 언젠가 가보겠다고 기억해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갔다. 한쪽 벽면이 DVD로 가득한 작고 아담한 느낌의 바였다. 손님도 많았다. 시그니쳐 메뉴인 트뤼포는 조금 달달한 우롱하이 같은 맛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분명 고다르라면 질색을 할 맛이라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사실이 아닌 것은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나의 다큐멘터리스트적인 본성이 발목을 잡았다. 고다르가 시가를 피우는 모습은 많이 봤다. 와인을 마시는 모습도 본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어디서? 나는 구글에 ‘did jean luc godard drink a lot?’이라고 검색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2002년 9월에 작성된 더글로브앤메일의 기사였다. 제목은 ‘외로운 밤들과 장 뤽 고다르와 함께 한 술자리(Lonely nights and drinks with Jean-Luc Godard)’. 25년간 토론토 국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올해 은퇴를 선언한 스티브 그레이브스톡의 부인인 케리 허프먼이, 남편이 영화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동안 자신은 ‘Festival Widow’나 다름없다고 자조하며 구술한 기사였다. 그렇지만 정말 멋진 순간들이 있긴 해요. 허프먼은 말한다.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지 내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스티브가 감독을 위해 준비한 칵테일 파티나 저녁 식사에 참석하기도 하죠. 그런 자리가 아니면 백만 년이 지나도 못 만날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장 뤽 고다르랑 같이 술을 마셨는데요. 정말이지 인상적인 사람이었어요. 모두들 그에게 푹 빠져서 자기들이 뭔가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지 뭐예요! 두 번째는 2015년 6월에 작성된 더스튜디오EXEC의 ‘장 뤽 고다르의 우유를 마십시다 캠페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하며 눈을 크게 뜨고 봤는데 알고 보니 패러디 기사였다… 상반된 분위기의 기사가 이어진다. ‘와인과 와인문화에 초점을 맞추는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고, 낫고, 빠르게 변해가는 위스키 업계에서 누구보다 빠른 소식을 전해주는 증류주 전문지’ [위스키 애드버킷]과 함께 M. Shanken Communications에서 발간하는 ‘좋은 삶과 시가의 세계를 즐기는 데 전념하는 잡지’ [시가광Cigar Aficionado] 1997년 9/10월 호에 실린 ‘프랑스 영화의 주저하는 천재’라는 제목의 인터뷰다. 인터뷰어는 LA타임스의 스콧 크래프트.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장 뤽 고다르는 극소수의 관객이 감상하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는 변화할 생각이 없다.” 25년 전에 이미 66세였던 고다르는 말한다. 나는 모든 종류의 영화를 하고 싶다. 모든 영화 속에 있고 싶고,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고 싶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나는 사운드를 발견한 감독 중 하나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사운드를 발견한 사람들의 슬픔도 알고 싶다. 요즘은 쫓겨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건 애플 컴퓨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스위스 시골에 은거하는 괴짜 예술 감독을 인터뷰 하라며 자기에게 돈을 쥐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노련한 저널리스트 크래프트는 곧이어 이렇게 쓴다. 몇 해 동안 고다르는 스위스에서 개당 20달러에 판매되는 코이바를 피워왔다. 하지만 그는 조금은 나른한 끽연가다. 인터뷰를 하며 그는 열두 번도 넘게 시가에 다시 불을 붙였고, 세 시간이 지나서야 한 대를 겨우 끝냈다. 값비싼 쿠바산 시가를 피우는 게 그의 유일한 부르주아적인 약점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전화를 통해 시가에 대한 그의 분명한 사랑에 대해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군요." 파리에 있는 그의 조수는 고다르가 자신의 영화 < 포에버 모차르트 > 때문에 우울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고다르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촬영 직전까지 기다리는데, 그것이 그의 습관이다… (ㄴ) 나 역시 원고를 쓰기 위해 습관처럼 마감 직전까지 기다리고, 때로는 마감이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그럴 때 담배는 도움이 된다. 나는 몇 해 전에 [담배와 영화: 혹은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끔은 영화를 증오하기를 깜박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흡연을 멈추기를 잠깐 멈추기도 한다. 사실 내가 담배를 끊은 건 아이가 생겨서였다. 그렇다면 오늘처럼 아이와 떨어져 밤을 보낼 때는 한 대쯤 피울 수 있는 거 아닌가? 혹은 두 대, 어쩌면 세 대 정도는… 트뤼포를 두 잔씩 마시고 우리는 트뤼포를 나섰다. 포플레이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광주극장의 김형수 이사가 추천해준 곳이었다. 바로 옆옆 건물이었는데, 그전에 담배를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아 십 미터 정도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갑자기 골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바로 직전까지는 늦은 시간의 종로 뒷골목 같은 느낌이었다면 갑자기 쿵쿵쿵! 비트가 쏟아지는 클럽, 클럽형 소주방, 혹은 대형 헌팅 포차…들이 연이어 있었다. 모두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그때야 김형수 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 가면 아주… 시끄럽죠, 혹자는 광주가 어떻게 이러냐고 하기도 하던데.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우리에게 물었다. 광주가 그러면 뭐,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음이 드럼 비트처럼 뿜어나오는 골목에서 우리 두 명의 늙은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금연 거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에어컨 실외기 뒤에서 담배를 피웠다. 보헴 시가 1미리. 오랜만에(어제 시상식장 뒤풀이에서도 강보원의 담배를 빌려 피우긴 했지만) 담배를 피우니 머리 끝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우리는 포플레이를 향해 올라갔다. 포플레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JBL4344 스피커와 가게를 꽉 채운 70년대 소울풍의 음악, 그리고 살 빠진 월터 화이트를 닮은 사장님을 제외하면. 사장님이 우리를 보았고, 우리도 사장님을 보았다.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우리가 방해를 했나, 나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쑥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제가 이 베이스를 좋아해가지고, 조금 크게 듣고 있는데 손님이 왔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에 앉았고, 사장님은 메뉴판을 주는 대신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베이스를 치는 건 흑인밖에 없어요. 그런 농담도 있잖아요. 신은 흑인에게 운동능력과 음악을 주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적절하진 않은 농담이지만요. 저는 아직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모르겠어요. 버드 파월이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경찰이 차를 세웠어요. 그리고 문을 열라고 하더니 운전대를 잡고 있는 파월의 손을 경찰봉으로 내려친 거죠. 한 대, 두 대, 세 대… 사정없이요. 미국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망가뜨린 거예요. 단지 흑인이 차를 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런 나라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돼?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런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파월 노래를 들으면 슬퍼요. 아무리 신나는 노래라도, 자꾸 그런 게 생각나서 여기가 너무 아파요. 아주 미치겠어요… 근데 그거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요? 김재욱이 물었다. 아시는군요! 사장님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세요? 우리는 몇 잔의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 사장님이 내려주는 커피도 그만큼 마셨다. 크림 치즈와 누텔라를 바른 크래커를 먹었다. 소울과 재즈, R&B를 들었고 조르디 사발이 연주하는 비올의 소리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에 대해서, 잃어버린 꿈들과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서, 변해버린 것들에 대해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제 아무 상관없는 것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그때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스콧 매켄지의 ‘샌프란시스코’와 스팅의 ‘셰입 오브 마이 하트’를 신청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일어나자 사장님이 계단 위쪽에 재떨이가 있으니 그곳에서 피우라고 했다. 좁은 계단 아래로 살짝 보이는 길거리는 술집 조명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반대로 우리 위쪽은 어두운 심연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담배를 끊은 우리 둘은 거듭해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계단 아래 빛 / 계단 위 어둠)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잔을 부탁했다. 사장님이 김재욱에게 메모장을 주고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써달라고 하더니 두꺼운 책을 뒤적이며 사주를 봐주었다. 똑닮은 자식이 있다고 나오네요. 김재욱이 자식은 없다고 하자 사장님이 말했다. 만약 자식을 낳으면 똑닮은 자식이 나올 거예요… 내년에 내게 딱 맞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연을 만난다고 나오네요. 이미 결혼을 했으면 어쩔 수 없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와우! 내년이죠? 43살부터 63살까지 20년 동안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시기네요. 영어로 골든 이어즈. 앞으로 20년 동안 전성기라는 말이에요, 무슨 일을 해도 잘 돼요. 축하합니다. 이렇게 좋은 사주를 보니 저도 좋네요. 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장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메모장을 들여다보았다. 일종의 데자뷰가 느껴졌다. 결혼 전에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갔을 때 내 소득증명서를 받아본 은행 담당자의 표정이 딱 그랬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슨 일인지 한동안 언성을 높이며 통화하던 사장님이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메모장을 들여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어요? 네, 결혼했어요. 아! 다행이네요. 이런 사주는 결혼 안 하면 큰일나는 사주거든요. 이유는 묻지 않았다. 어쩐지 겁이 나서 물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이 계속해서 말했다. 여태까지는 조금 일도 잘 안 풀리고 겨우겨우 살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망하거나 잘못되지는 않아요. 저를 믿으세요. 이건 진짜에요. 그리고 자식 복이 있어요. 나중에 자식 덕을 좀 볼 거예요. 내가 너무 사랑하고 나를 무척 사랑해주는 자식이 있어요, 라는 말을 듣는데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아이와 함께 지낸 후로 눈물이 많아졌다. 그리 좋은 사주는 아닌 모양이라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손님 술을 만들어준 사장님이 다시 책을 들춰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약간 노래방 보너스 타임 같은 느낌으로. “49살부터 69살까지 전성기네요! 정말 두 분 다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제가 이렇게 보는데 전성기가 지났으면 할 말도 없고 속상하거든요. 그런데 두 분은 이제 잘 될 일만 남았어요. 정말 축하합니다!” 나는 월트 화이트를 닮은 사장님에게 진심으로 몇 번이나 거듭해서 감사드렸다. 동시에 마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지나치게 영화적인 경험이 아닌가? 만약 내가 통 속의 뇌라면? 어떤 미친 홍상수가 끊임없이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는 거라면…? 견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영화 관객인가봐… (흑백 장면: <강변호텔>, 컬러 장면: < 엽기적인 그녀 >) 0-0: 집으로 그날에 대해서라면 약간의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다음 날로 우리의 시계를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아침. 우리는 광주극장에서 잡아준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아침밥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기차를 타러 광주송정역으로, 김재욱은 혼자 국군광주병원 옛터로. 광명역에서 내린 나는 택시를 타고 안산으로 갔다. 나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밥을 남기면 미스터 온실가스가 나오잖아.” 핑크퐁 기후변화 동요에서 온실가스의 존재를 알게 된 나윤이가 평소와 달리 밥을 싹싹 비웠다. 그러더니 박수 치는 엄마 아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향해 밥그릇을 들어보였다. 의기양양하게, 마치 상패라도 보여주듯이… 이어 아내가 내가 없는 이틀 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한번은 나윤이가 손을 뻗어 크게 움직이면서 “해가 이렇게 떠서 여기(가장 높은 곳) 오면 아침이고 이렇게 가면 저녁이야”라고 해서 아내가 이렇게 뜨면 바로 아침이고, 가장 높은 곳에 가면 점심이고, 이렇게 가면 저녁이라고 정정해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나윤이가 아니라고 짜증내서 한참 그걸로 이야기하다가 아내가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생각해, 하고 넘어갔는데 한참 지나서 나윤이가 귓속말로 소곤소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가 이렇게 뜨면 아침이야…”라고, 마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는 갈릴레오처럼… (미스터 온실가스) 한동안 [뽀롱뽀롱 뽀로로]에 푹 빠져 지내던 나윤이는 [아기상어]와 [핑크퐁],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바다나무], [꼬모], [따개비 루], [엉뚱발랄 콩순이] 등을 거쳐 요즘은 [캐치! 티니핑] 시리즈에 과몰입 중이다. 차에 탈 때마다 티니핑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고, 티니핑 인형을 안고 자고, 본인은 ‘사랑해 하츄핑’ 엄마는 ‘솔직해 끄레핑’ 아빠는 ‘다정해 꾸래핑’이라고 역할을 분배해 놀기도 하며, 티니핑 게임에서 나오는 카드를 모으고, 이빨을 닦거나 밥을 먹을 때면 아빠에게 티니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티니핑 놀이동산을 선물해주지 않을까봐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으려고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정작 [캐치! 티니핑] 애니메이션은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몇 번인가 보여주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게 바로 본편은 보지 않고 설정과 2차만 판다는 건가. 한 번은 내가 물었다. 나윤아, 왜 티니핑 만화는 안 봐? 그러자 나윤이가 말했다. “나는 안 봐도 다 알아.” 실제로 나윤이는 [캐치! 티니핑]의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노래나 스티커북이나 카드를 통해서 혹은 다른 친구들에게 들은 거 반, 스스로 지어낸 거 반. 어쩌면 지어낸 게 더 많을 수도 있고… 내가 프린세스 로미라고 하면 자꾸 “프린세스 로미가 아니라 롱이!”라고 고쳐주는 게 약간 짜증날 때도 있지만(‘로미’가 맞음), 안 봐도 다 안다는 나윤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다. 나는 한때 (상업 영화라면) 한국 영화와 미국 영화와 유럽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던 사람이다. 물론 미국 영화를 제일 많이 보고 한국 영화도 적지 않게, 유럽 영화는 가물에 콩나듯 보긴 했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더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고, 이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는 극장에는 전혀 가지 않고 1년 동안 보는 영화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와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고 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나. 그리고 영화. 영화는 어디에나 있다! 주말 밤, 아이를 재우고 아내와 함께 앉아 돌리는 채널 사이사이에. 어느새 씨네필로 가득해져버린 트위터 내 타임라인에. 책장에 꽂힌 책들 속에—특히 적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영화책들에 가득. 내가 구독하지만 보지는 않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화를 보는 정지돈과의 대화와 또 다른 사람들과의 스몰 토크 속에. 정말이지 영화는 어디에나 있고, 나는 내 손가락에서도, 발가락으로도, 나를 둘러싸고 있고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는 영화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람에 쓰여 있고,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정말 그렇다. 다만 내가 그것들을 보지 않을 뿐이다. 질문. 내가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영화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영화와 영화에 대한 담론, 플랫폼, 매체, 2차 컨텐츠, 기타 등등을 마구잡이로 섞어서 말하고 있다. 카세티가 말하는 ‘재배치’를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영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가—미세먼지나 방사능이 그런 것처럼—세상에 흘러 넘쳐서 좋든 싫든 우리는 영화의 영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국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한국 영화처럼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0-1: 잠언 영화가 꿈이라는 오래된 비유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더 이상 그것이 인간의 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극장이 꾸는 꿈이다. 영화는 기계들이 꾸는 꿈이고, 사물들이 꾸는 꿈이다. 세계가 꾸는 꿈이고, 그것은 종종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다. 0-2: 마지막 편지 친애하는 지돈씨에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제 차례의 마지막 원고를 보냅니다. 2년 가까이 이어진 우리의 원고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스티븐 샤비로의 [탈인지], 이언 보고스트의 [에일리언 현상학],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영화의 재배치’ 같은 글들을 읽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꿈이 아니라 사물들이 꾸는 꿈이라는 아이디어는 그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그건 어디로도 닿지 않은 채 공상에 더 가까운 짧은 질문의 형태로 남았을 뿐이지만요. 그때그때 떠올랐던 자잘한 아이디어를 하나의 원고로 만들기 위해 저는 쉼없이 자르고 붙이고 버리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춤을 춰야 하는 불운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왜 이런 압박을 느낀 걸까요? 그건 아마도 ‘한국 영화’가 제 안에 있는 것들, 너무도 강렬하게 발현하고 있기에 외면할 수 없던 많은 것들을 불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글을 쓴다는 것이 기호 속에 포착해 넣은 그 무언가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매번 글을 쓰고 나면 저의 정신은 그 문장들을 들여다보고 뒤집어보고 마치 새로운 양식인 것처럼 씹고 또 곱씹어보았습니다. 글을 써 나갈수록 수많은 질문들, 끝없이 속아나는 수수께끼들을 반추하게 되었고, 깨어 있는 삶과 잠들어 있는 삶, 저의 모든 삶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이 원고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도, 이제 원고를 보내드리는 것도 아마 이러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일 겁니다. 정처 없이 떠난 여정과도 같은 이 글에는 밝혀내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특별하기보다는 사소한 것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한국 영화’ 그리고 그곳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었기를, 그 존재가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글을, 이 책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K정연 0-3: 끝 “헤이 클로버, 캐치 티니핑 노래 틀어줘” 나윤이가 말하면 클로버는 “바이브에서 캐치, 티니핑 율동 동요 앨범을 재생할게요”라고 말하며(요즘 나윤이는 그 말을 따라 하는 데 재미 붙였다) 노래를 재생한다. 빛나는 마법을 보여줘 (캐치캐치!) 예쁜 마음을 모아 티니핑 타임 가끔 그건 내게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말이다. (구글 번역기에서 언어 설정을 잘못해서 발생한 오류, 그런데 이건 정말 오류일까?) *이 글에는 늘 그런 것처럼 다른 작품들의 인용이 있고, 대부분은 본문에 출처가 명시되어 있다. 가독성이나 여타 다른 효과를 의도하고 일부러 명기하지 않은 부분은 아래와 같다. 4-3 두번째 문단의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에서 해당 장의 마지막 "웃지 마시오!"까지의 내용은 토머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김현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모자])에서 아주 약간의 수정과 함께 인용했다. 0-0 중 “정말이지 영화는 어디에나 있다…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부분은 Wet Wet Wet의 노래 ‘Love Is All Around’의 가사를 조금 수정해서 인용했다. 0-2 편지라는 형식과 몇 개의 문형, 그리고 문장들은 뤽 다르덴의 [인간의 일에 대하여](조은미 옮김, 미행 펴냄)의 서문에서 빌린 것이다. 특히 “왜 이런 압박을 느낀 걸까요?”에서 마지막 문장까지는 아주 약간의 수정과 함께 그대로 인용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동시녹음 시대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우의 대명사는 고은정 일 것이다. 고은정을 모르더라도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라는 1970년대 영화의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각종 TV프로에서 패러디되어 마치 후시녹음 시대의 전형처럼 남아있는 그 목소리,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경아의 목소리가 바로 성우 고은정의 소리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않았어도 그 시대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나 말투는 왠지 익숙하다. 고은정을 위시한 많은 성우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와 말투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은정은 영화 후시녹음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 문화영화의 나래이터 때로는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더빙과 텔레비전 방송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고은정은 1936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6년간 일본에서 자랐다. [사진1, 2]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과 모친 김재순,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高犧鼎)과 모친 김재순(金在順),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채 6살이 안된 어린 그녀는 당구를 삼백 정도나 치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줏빛 카페트 위에서 연분홍 와이셔츠에 감색 망사 조끼 그리고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모와 보낸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강렬했다. 음악과 미술에 조애가 깊은 어머니는 사별하기 전까지 어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부지런히 키워줬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서 종소리가 난다 말할 만큼 충만한 감성과 관찰력을 지닌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헌신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와 새어머니로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송과 영화계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근성을 배웠다. 그녀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켰던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일컬어 시대를 살아낸 모성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죽음을, 청소년기에는 한국전쟁과 부친의 죽음을 겪었고 전후 재건기 대학생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그녀 또한 집안의 강인한 모계혈통을 이을 만한 여성이라 할 만한다. 그녀는 1954년 KBS방송극회원 1기 (서울중앙방송극단 연구원 1기) 즉, KBS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전파매체이던 시절, 인기 있는 라디오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후시녹음에서 당시 인기였던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청실홍실>(1956, 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의 전후파 여성 동숙(성우 정은숙 연기)의 말투를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하니 라디오드라마 성우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은정은 KBS방송극회원으로 선발되고 난 뒤 1955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도 합격하여 8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사진3] 1955~56년 KBS 아나운서시절, 국회부의장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장금자, 고은정, 강영숙, 라연수 이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보다는 동화구연에 더 뛰어났던 그녀는 아나운서 생활을 8개월 만에 정리했다. 목소리에 배어있던 바이브레이션은 아나운서의 발성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은 다소 경직되고 보수적이던 아나운서실의 문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발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와 나래이션을 도맡아 했지만,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해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던 시절의 그녀에게는 보도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어울렸다. 실제로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사진4] 1957년 KBS남산 사옥에서 찍은 KBS 방송극회원 1기생들. 왼쪽 뒤부터 김수일,고은정, 박용기, 김옥경, 윤미림, 오른쪽아래부터 이창환, 김소원, 심영식, 신원균 당시 KBS 방송극회원 동기생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그녀에게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영화를 즐겼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녀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로 통했을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 능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후에 방송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구술한 사건과 경험들은 늘 흥미롭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들려준 한국전쟁 경험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십대 문학소녀의 시선에서 전쟁과 피난의 여정은 친구와의 아쉬운 이별 이야기로 그려졌고, 9.28 수복 후 여군으로 생활하며 지낸 부산의 훈련소는 소공녀의 방으로 도치되었다. 물론 성장소설의 한 대목처럼 묘사된 그녀의 이야기 속에도 잔인하고 고된 현실은 존재한다. [사진5] 서울 수도여고 1학년 재학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사진. 왼쪽부터 고은정, 최도영, 최순림. 그녀는 9.28 수복 후 서울에서 여자의용군 2기를 모집할 때 예술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동덕여고 무용부, 한성여고 밴드부가 단체로 입대했고 그녀를 포함한 수도여고 학생 4명 또한 중창단으로 들어가 병과 훈련과 예술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정훈대, 첩보대, 전투부대, 예술대에서 활동했고 1, 2기생 중 우수자는 전선에 배치되어 현지 임관되기도 했다. 그녀는 1.4후퇴 때 의용군 예술대 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영도의 학교건물에서 내무반 생활을 이어갔다. 위문공연을 하며 종군할 생각으로 연습과 훈련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여고생 4명은 내무반 건물 한 쪽에 책을 쌓아 소공녀의 방을 꾸미며 막막한 전쟁기를 버텨갔다. 그녀는 내무반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가 제대를 하고 부산에 피난 와 있던 수도여고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신부님 댁에 기숙하면서 장갑을 짜고 수를 놓아 교통비를 마련해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그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쓰던 좁은 방에 씨레이션 박스로 책상을 만들고 보리밥풀로 교복의 각을 세울망정 벽에는 그리어 가슨, 그레고리 펙,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을 붙여 놓고 창 밖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 서정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견디려했다. 전쟁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휴전반대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규율부였던 그녀는 인기 많은 경기고 대대장과 안면을 트고 YMCA 영어강좌에 함께 참석하는 등 설레는 순간들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녀의 전쟁담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6]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 사진. 왼쪽 아래 황양자, 고은정. [사진7]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휴전반대시위 중 규율부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고은정 역사적인 사건을 정서가 도드라지는 개인사와 연결시켜 묘사하고, 감정이 고리가 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방식이 그녀의 구술이 지닌 논리이자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구술 채록문에서 가령 한국전쟁에 관한 사건은 각기 다른 주제로 다른 회 차에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기에 전쟁과 피난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숙명여대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한다. 이때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지원하게 된 KBS방송극회원 모집에 합격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어 친구와 함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도 진학을 결심한다. 그래서 백병원에 줄을 서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라벌예대 입학원서를 내고 남은 돈으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핫케익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기욕심 덕에 매일 정동의 KBS방송국과 남산 서라벌예술대학 그리고 청파동의 숙명여대를 발에 못이 박히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사진8] 1956~7년경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정동사옥 앞. 성우로서의 그녀의 기초체력은 연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은정는 성우란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면도날처럼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그녀는 끝까지 라디오를 떠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뛰어난 성우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데뷔했을 당시 이미 전문 성우로 이름이 알려진 동료들이 있었다. 작은 녹음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들이 경쟁하고 상처받고 번민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연습하던 대본들을 주워와 매일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역할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순간 귀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체 내부의 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듣는 소리로 인식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KBS 라디오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7)의 미라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박남옥 감독의 남편인 연출가 이보라의 연기지도로 관습화된 연기와 언어가 아닌 현장의 연기와 실제 언어를 반영하는 훈련을 통해 KBS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에서 19살 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어서 KBS 라디오드라마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9)에서 독한 장희빈의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 10년 뒤 텔레비전드라마 <장희빈>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9] 1959년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서있는 이들 왼쪽부터 성우 박동근, 백성희, 고은정, 정애란, 박순옥, 작가 이서구, 김소원, 오정환, 앉아있는 이들 왼쪽부터 나옥주, 오승룡, 장서일. 1959년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나온 사진 속 화사한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1954년에 KBS 성우로 발탁된 뒤 5년 만에 주연급 성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인기 라디오드라마가 방송 직후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성우 즉, 라디오연기자였던 고은정이 동명 영화의 후시녹음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술자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 자신이 했던 19살 경희를 연기한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 [사진10] <동심초>에 미망인의 딸 경희역으로 출연한 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고은정이 더빙했다. 애초에 좀 더 큰 비중의 역을 추천받았지만 본인에게는 라디오에서 했던 역의 연결이 중요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작이 돋보이는 엄앵란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경희 역을 고집했다고 한다. 엄앵란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그녀의 목소리 연기가 간절했기에 배우 엄앵란과 성우 고은정의 콤비 관계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엄앵란이 영화제 연기상 수상을 목적으로 후시녹음을 직접 했던 작품에서도 그녀의 도움과 보완이 필요했을 정도로 고은정은 엄앵란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영화텍스트 안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움직였고 때때로 개인사적인 궤적 또한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마저 닮아 보인다. [사진11]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이 축하연을 즐기고 있다.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에서 주최한 고은정과 엄앵란 사진전에서 보듯 대학 동문인 둘은 오랜 기간 동안 연기자로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대표적인 배우-성우 콤비로 자리매김한다. [사진12] 1960년대 초반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동아리 숙미회의 엄앵란·고은정 사진전에 참석한 고은정과 엄앵란 1963년 8월 방송문화상을 수상하는 고은정은 이미 당시 최고의 성우였다. [사진13] 1963년 8월 15일 방송문화상 수상식 현장. 공보부장관 임성희, 고은정. 엄앵란 뿐만 아니라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 까지 당대의 내노라할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전부 고은정을 거쳐 갔다. 영화 후시녹음에서 목소리 연기는 입모양에 맞춰 대사를 넣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배우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연기를 완성시켜주어야 했다. [사진14] 1960년대 후반 남산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1960년대 후반 남산에 있던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그녀의 표정을 보면 성우 또한 연기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영화 속 여배우의 표정에 소위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펑펑 쏟게 해달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을 때면 여배우가 얼굴을 가리거나 커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연기자가 대사를 실수한 채로 어영부영 넘어갈 경우 입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그 장면을 살려내는 것은 전부 성우의 몫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으로 연기의 몰입도가 부족하거나, 빠르게 진행되는 촬영현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은 후시녹음 단계에서 성우들의 연기로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후시녹음 된 한국영화에서 배우가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대사가 대본과 맞지 않아 성우가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이고 또 컷이 바뀔 때 웃음소리 등이 이어지는 경우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아 목소리로 연결을 맞춰 준 장면들이라 하겠다. 남산의 한양녹음실 위층에는 다방이 있어 녹음하다 잠시 다방에서 쉴 때면 연예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하니 녹음실과 주변 풍경 또한 영화촬영 현장만큼이나 분주했던 듯하다. 때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고 더빙을 탁월하게 잘 해준 성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역설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인 입도선매와 입도선매로 투자받을 수 있는 조건인 특정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그리고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지탱해야 하는 빠른 제작 속도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제작의 악조건은 촬영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성우들이 메워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성우들은 낮 시간에 라디오방송 녹음을 마치고 영화녹음실로 출근해 밤새 영화를 녹음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일하며 1960~70년대를 보내게 된다. [사진15] 1963년 만리동 녹음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며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 마지막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그들의 역할은 영화 텍스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녀의 영화후시녹음 작품목록을 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와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딧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연하고 공공연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채, 타인의 연기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녀는 1983년도를 마지막으로 영화후시녹음을 그만둔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도 동시녹음으로의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장비, 자본과 제작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1980년대 내내 여전히 성우들의 후시녹음은 이어졌다. 연기에 갈증이 있는 그녀는 영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온전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라디오가 항상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진16] 1963년 동아방송 개국 시 동아일보사 정문 모습. 그러나 방송계 또한 1960년대 초중반부터 민영방송국들이 대거 등장하며 성우와 탤런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속제를 추진하다보니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고수해 온 그녀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자, 엄연히 성격이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라디오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안타까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시리즈 <법창야화>(MBC, 최풍 각본, 고무송 연출, 1977)나 <고백>(MBC, 1975~76)같은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17] 1975년 2월 M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한 MBC 라디오드라마 <법창야화>팀.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고은정, 최풍, 김현직, 변웅전, 고무송PD, 아랫줄 왼쪽 두 번째부터 최선자, 김성옥, 홍성민. [사진18] MBC라디오 1인 드라마 <고백>팀. 성우 고은정이 홀로 엮어 나가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왼쪽부터 고무송PD, 첫 회 주인공이었던 가수 문주란, 고은정, 유현종 작가. 뿐만 아니라 인기 텔레비전 외화시리즈 <왈가닥 루시>(1971)의 루시, <사랑스런 지니>(1977)의 지니 역을 더빙해 텔레비전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1950년대 말 종각에 있던 한국 최초의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에서 이순재, 김승호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 성우가 아닌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목조건물인 HLKZ방송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로 목소리가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1970년대 다시 텔레비전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일치시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했던 그녀가 방송 매체의 변화와 보이지 않는 역할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1977년 작가로서의 이력을 새롭게 시작한다. MBC 라디오 각본공모에 <대니 할머니>로 당선되며 성우에서 작가로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2년간 동아방송의 동명 프로그램에서 직접 집필했던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 <고운정 미운정>을 출간한다. 이 책은 1996년에 다시 재간되기도 했다. 작가로 데뷔한 뒤 성우 일을 접고 세계를 돌며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은 성우의 명망 뒤에 숨겨지게 된다. 1977년 이후 그녀는 방송작가와 성우를 겸했고 영화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를 각색하고 정지영 감독의 권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19, 20]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에서 각색을 맡았고 수명(정윤희)의 정신과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그녀는 연극을 통한 연기활동을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왔다.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이보라 연출, 1958)와 <장희빈>(박동근 연출, 1959)으로 한창 바쁠 때에도 그녀는 제작극회 초기작인 연극 <불모지>(김경옥 연출, 1958)와 현대극회의 창립작인 연극 <칵테일파티>(이보라 연출, 1959)에 출연했다. 현대극회는 중앙방송국(KBS)과 기독교방송국(CBS)의 성우들과 작가 및 연출가인 이보라, 임희재, 조남사가 모여 만든 극단이다. [사진21] 1958년 7월 제작극회 4회 발표작 연극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왼쪽부터 효과 최창봉, 건너 띄고 이두연, 박현숙, 조동화, 건너 띄고 작가 차범석 작가, 연출 김경옥. 아랫줄 가운데 노인 분장을 한 고은정, 아랫줄 오른쪽 끝 안평선. [사진22] 1959년 10월 공연한 현대극회 창립기념 작 연극 <칵테일파티>(T.S 엘리엇 작, 이보라 연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꽃을 들고 있는 이가 박용기, 고은정, 연출 이보라, 이미경, 박기선, 오승룡. 둘째 줄 안경을 쓴 이가 각색 윤병일, 최을선 가운데 위쪽 분장하고 꽃을 들고 있는 신원균, 이우영, 최난희. 1962년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66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오사량 연출)에는 나타샤 김역으로 1968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동굴>(유인형 연출)에는 유애 역으로 열연했고 197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1972, 권오일 연출)에는 첼레스티나 역으로 유인촌과 함께 출연했다. [사진23] 1966년 5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 오샤랑 연출) 중 한 장면. 왼쪽이 나타샤 역의 고은정이다. [사진24] 1968년 4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동굴>(김승규 작, 유인형 연출)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정철, 민지환, 고은정, 백성희. [사진25] 1972년 7월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막스 프리쉬 작, 권오일 연출)의 출연진. 왼쪽 상단 유인촌, 아랫줄 가운데 첼레스티나 역의 고은정, 오른쪽 옆에 최병학, 건너 띄고 이수나, 고은정 뒤로 돈 후안 역의 황일청, 그 오른쪽에 미란다 역의 노경자. 그뿐 아니라 막역한 사이인 최은희 선생의 배우극장 멤버로 꾸준히 공연을 올렸고 지방 순회공연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성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공적인 영역의 활동 또한 활발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성우 에이전시를 만들어 처우개선에 힘썼고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성우, 작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전문성을 펼쳐왔다. 그러한 전문성과 노련함이 그녀의 구술채록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26] 1977년 단행본 『고운정 미운정』에 실린 작가 고은정의 소개 사진. 1950년 말 우미관에서 개봉한 서부영화들을 극장 영사실에서 더빙한 기억, 1971년 개봉 영화 <러브 스토리>(아더 힐러, 1970)의 영화홍보용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했던 경험, 영화후시녹음의 다양한 기술, 성우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 스타일,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녹음 방식 등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술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적 없고 영화와 관련된 수상을 해본 적 없는, 영화의 공적 기록과 역사에서 부재된 채 남아있는 그녀의 역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