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맨
- 감독
- 토리우미 히사유키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모리카와 킨야, 시마모토 스미, 토미야마 케이, 니헤이 마사나리
2012년 유바리판타스틱영화제의 그랑프리는 폭력 전문 감독 이시하라 타카히로의 <오사카 폭력 사건>에게 돌아갔다. 심사위원 대상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스즈키 타이치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가장 큰 대중적 호응을 얻은 관객상은 작년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 울트라맨 사가 >였다. 하지만 영화제 내내 평론가와 관객들이 “그 영화 봤어?”라며 수군거렸던 영화는 따로 있었다. 오하타 하지메라는 신인 감독이 만든, 단편이라고 하기엔 길고 장편이 되기엔 부족한, 53분짜리 중편 영화 < 기묘한 사랑 >이다. 원제는 ‘へんげ’(?化). ‘원래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남’, ‘괴물’, ‘요괴’ 등의 뜻을 지닌 ‘헹게’라는 제목은 매우 직접적이며 정직하지만, 중의적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요시아키(아이자와 카즈나리)는 괴물로 변해간다. 제목 그대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로 끊임없는 변이를 보여주는 사람은 감독인 오하타 하지메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러닝 타임 안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호러 관련 인덱스를 끊임없이 펼쳐간다.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라는 부제로 시작하는 영화는 어느 병원 기록 화면을 보여준다. 2008년에 촬영된 영상엔 구속복을 입은 요시아키가 있다. ‘최면 요법 및 관념 운동’이라는 제목의 영상 속에서 요시아키는 바닥을 뒹굴며 극도의 발작 증세를 보인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면, 그 장면을 모니터로 보고 있는 요시아키가 있다. 과거 자신이 받았던 모습을 마치 추억을 되새기듯 다시 보는 남편이 케이코(모리타 아키)는 불만스럽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리지 말라며, CD를 부숴 버린다. 그렇다면 요시아키는 완치된 걸까? 아니다. 후배이자 의사인 사카시타(노부쿠니 테루히코)는 정기적으로 방문해 병세를 체크한다. 요시아키는 여전히 3일에 한 번씩은 발작을 하며, 제대로 된 외출을 못 한 지 2년이 넘었다. 그리고 수많은 벌레 같은 것이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어떤 상태인 걸까? 발작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의 정신세계에 대한 정확한 의학적 진단은 무엇일까? 하지만 < 기묘한 사랑 >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의외의 행보를 보여준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요시아키의 한쪽 발이 괴물처럼 변한다. 저예산 영화인지라 조악한 특수 분장으로 한눈에 합성수지로 만든, 마치 고릴라 가면 같은 고무 질감이 느껴지는 가짜 발임을 한눈에 알 수 있긴 하지만, 그의 변신은 예상치 못했고 자못 충격적이다. 여기서 우린, 혹시 이 영화의 모티브가 카프카의 「변신」은 아닌가 살짝 의심하게 된다.(게다가 요시아키는 벌레가 자신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던가!).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침울한 톤과 카프카가 만난 영화? 그런데 영화는 예상을 빗나간다. 다음 날 사카시타가 방문해 최면 요법을 걸자 요시아키는 소리를 지른다. “이소니레가니마레아모!” 그러자 유리잔이 깨지고, 요시아키는 발작을 일으키며 오른팔의 변이를 일으킨다. 결국 다시 병원에 격리되는 요시아키. 이후 의사 사카시타는 케이코를 찾아와 이상한 말을 한다. 요시아키가 내뱉은 말이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 언어라는 것이다(이 단어의 의미는 이후 ‘세계의 총의(總意)’, 즉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의 의식으로 밝혀진다). 동물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존재로 회귀하는 인간? 여기서 갑자기 영화는 오컬트 장르나 < 캣 피플 >(폴 슈레이더, 1982) 류의 호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병원에서 탈출한 요시아키는 괴물로 변해 밤에 사람들을 해치는 연쇄살인마가 된다.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그의 모습은 좀비와 다를 바 없으며, 밤에 변한다는 점에서 늑대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집으로 찾아온 요시아키. 아내는 퇴마사를 불러 남편 안에 있는 악령을 내쫓으려 하고, 영화는 갑자기 < 엑소시스트 >(윌리엄 프리드킨, 1973) 같은 퇴마 호러가 된다. 여기서 방심하면 안 된다. < 기묘한 사랑 >의 콘셉트는 앞으로도 서너 번은 더 변해가며, 후반부엔 급기야 도시 재난 영화와 괴수 영화와 만난다. 초반부에 순진하게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렸던 관객을 무색하게 만드는, 과격한 결말인 셈이다. 데뷔작을 맞이하는 오하타 하지메 감독의 태도는 쿨하면서도 야심 차고 진실하다. 이 영화에서 발작이나 변이 같은 현상은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요시아키가 어떤 외부적인 초현실적 존재에 의해 사로잡혀 이런 증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냄새를 피우지만, 솔직히 감독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 따위엔 관심 없어 보인다. 대신 그에게 중요한 건 눈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다리가 변하고, 팔이 변하고, 온몸이 변해 괴물처럼 되고, 사람을 죽여 시체를 뜯어 먹고, 얼굴이 뭉그러지고, 괴수가 되고…. 이 과정에 따라 영화는 ‘호러 판타지’라는 테두리 안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고, 관객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야 한다. 부족한 제작비 안에서 최선을 다한 특수효과와 특수촬영이 가상하고, 너무 티 나는 컴퓨터 그래픽이 조금 안쓰럽기도 하지만, 장르적 역동성이라는 콘셉트만 놓고 본다면 < 기묘한 사랑 >을 능가하는 영화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그러면서 영화는 일본 영화의 장르적 전통과 B 무비의 유산을 소중히 계승한다. 우린 < 기묘한 사랑 >을 보면서 이 영화가 한 부부의 러브 스토리라는 걸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극단적 사랑 이야기’라는 일본 영화 특유의 정서는 <기묘한 사랑>에서 진정한 극단을 만난다. 영화 첫 장면, 케이코는 뭔가 악몽을 꾸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다. 욕구 불만 상태다. 그녀의 욕망은 남편이 괴물이 된 후에 해소된다(직접적인 섹스 신을 보여주진 않지만). 그러면서 영화는 < 킹콩 >이나 < 미녀와 야수 > 같은 괴물-여성의 순애보 성격을 띠기도 하며, 케이코는 밤거리에서 남자를 유혹해 집으로 데려와 남편에게 ‘먹이’로 주기도 한다. 곤란한 정도로 뒤섞인 결합이며, 심각한 장르적 오지랖이다. 츠카모토 신야의 < 철남 >(1989)를 떠올리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다. <철남>이 사이버 펑크의 테마 안에서 저예산 영화의 상상력을 드러낸다면, < 기묘한 사랑 >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부터 카프카의 소설과 오컬트 무비와 괴수 영화를 가로지르는 신체 변형의 이야기다. 여기서 오하타 감독은 그 신체에, “현대 일본 사회의 병폐” 운운하며 사회적 의미를 담는다거나, “존재의 타자성” 등을 들이대며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무리수를 두진 않는다. 대신 괴물이라는 크리처를 각종 클리셰의 격전지로 만들고, 오로지 그 결과물과 장르적 쾌감 속에서 만족한다. 오타쿠의 과시적 욕구? 혹은 아날로그적 B 무비의 상상력에 대한 오마주다. 장르 영화의 매끈하고 판타스틱한 이미지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 기묘한 사랑 >의 어두운 화면과 조잡한 특수효과가 불편하고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겨우 53분이며, 이 시간만 투자하면 당신은 근래 들어 가장 ‘경제적인’, 홈 쇼핑 용어로 바꾼다면 ‘구성이 알찬’ 호러 한 편을 만나게 될 거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 이 영화는 내내 호러인 척 하지만, 감독은 서두부터 이 영화가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임을 못 박았고, 다소 기묘하긴 하지만 영화는 이 선언에서 단 한 순간도 이탈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린 믿는다. 그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케이코의 사랑을 통해 언젠가는 요시아키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임을.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행복할 것임을.
자, 가렛 에드워즈의 < 고질라 >를 보면서 ‘쇼와 고질라’와 ‘헤이세이 고질라’의 전통을 언급하며 유년기의 추억이 귀환한 듯 기뻐하는 평들이 딱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는 것부터 먼저 언급하며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째서 고질라가 유년기와 청년기의 추억일 수가 있지? 쇼와든 헤이세이든 내가 극장용 고질라를 처음으로 본 건 2000년대 이후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에게 진정한 첫 번째 고질라 영화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 고질라 >였던 것 같다. 이미 할리우드에서 다시 매만져진 일본인들의 전통을 목격한 뒤, 그걸 토대로 다시 일본인들의 전통을 거슬러 올라 머릿속에 입력시켰다는 이야기다. 문방구의 꽃,「괴수대백과」 만약 고질라가 내 안의 아주 미묘한 덕심을 살짝 건드리긴 했다면, 그건 오로지 80년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괴수대백과」 덕분이다. 이걸 기억하는 세대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80년대 문방구에서는 한국에 전혀 소개된 바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에 대한 번역본 해설지를 팔았다. 그게 또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꽤나 인기가 있었다. 나 역시 「괴수대백과」의 열렬한 팬이었다. 고질라와 가메라와 모스라와 킹기도라와 메카 고질라의 사진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것들을 진짜 스크린 속에서 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그 열망은 십여 년 뒤에나 겨우 DVD를 통해 이루어졌다. 마치「‘건담대백과」로 접한 <기동전사 Z건담>을 십수 년 뒤에나 카피본으로 겨우 (그것도 중간중간 더 이상 성인에게는 온전히 통하지 않는 과장된 감상주의를 감내해가며) 목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괴수물’을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본 게 언제냐고 묻는다면, 고질라나 가메라 대신, 입에서 꺼내는 즉시 살짝 웃음이 터지는 제목을 굳이 꺼내야만 한다.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이라면 기억할 < 비천괴수 >라는 제목 말이다. < 비천괴수 >는 60년대 신상옥 , 나봉한 같은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한국과 홍콩 합작영화가 쏟아지던 시절 성룡, 홍금보가 출연한 <용호문>(1975), < 사대철인 >(1977) 등 무협 영화를 만들었던 김정용 감독의 영화다. 합작영화 시절이 막을 내리고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도래한 80년대 초반, 그는 < 소림사 주방장 >(1981)이나 < 무림 걸식도사 >(1982)같은 코믹 무협영화들을 만들었다. 낯설다고? 80년대 토요일 낮에 당신은 TV로 이 영화들을 본 적이 있을 거다. 하여간 그는 90년대 후반까지도 조형기가 임화수를 연기하는 < 충무로 돈키호테 >(1999)같은 싸구려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영화를 만든 이 남자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게 격정적인 B급 영화가 바로 이 한국형 괴수물 <비천괴수>다. 뭔가 대단한 영화일 것 같다고? 확실히 대단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공룡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는 김 박사(왜 그 시절에는 다 김 박사인가!)가 실종된다. 잡지사에 근무하는 강 기자는 박사를 찾아 어느 작은 해안 도시로 간다. 알고보니 김 박사는 딸과 함께 숨어서 공룡의 존재를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다. 강 기자는 이러저러해서 김 박사의 가정부로 취직을 한다(왜?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자정신이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끝에 괴수가 부활해 인간들을 침공하기 시작한다(공룡이라더니 왜 괴수냐고? 그걸 나에게 물어봐야......). < 비천괴수 > 스틸 홍보물 당대의 국민학생들에게, 아니 적어도 내가 살던 지방 항구도시의 유년들에게, < 비천괴수 >는 센세이셔널한 블록버스터였다. 소문이 퍼지자 거의 주변 모든 학교의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거기에는 「괴수대백과」에 나올 법한 괴수들이 정유시설을 파괴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쓰나미를 일으키고(태풍이었던가? 어쨌든.....), 하여간 모든 걸 파괴했다. 그건 그야말로 당대 한국 영화의 어떤 괴수적 절정에 다름 없었다. “「괴수대백과」 괴수들이 다 나와!” 나는 친구들에게 소리를 빽빽 질러가며 <비천괴수>를 보라고 권했다. 그렇다. 「괴수대백과」의 괴수들이 이 영화에 다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이건, 알라바마주의 할매가 옆 동네 천을 하나씩 훔쳐다가 기워낸 퀼트 같은 영화였으니까. < 비천괴수 >는 80년대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카피라이트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는지에 대한 근사한 역사적 사료다. 사실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괴수의 스펙터클은 < 울트라맨 > 시리즈의 괴수 장면들을 불법으로 가져온 것이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돌아온 울트라맨>의 시고라스, 벰스타 등이고, 초기 울트라맨의 페스타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한번 상상해보시라. 한국형 괴수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제작자와 감독은 아무리 원화를 팍팍 투자해도 엔화로 만든 특촬물의 퀄러티를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어차피 한국에 전혀 들어오지 않은 일본 특촬물의 괴수 장면들을 조금씩 떼어다가 영화 속에 삽입하는 것이었을 게다. “자, 영화의 줄거리는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에서 따오는 거야. 공룡을 발견한 학자 이야기를 넣으면 근사하잖아? 응? 공룡이 아니고 괴수물 아니냐고? 한국 사람들은 괴수 이런 단어 잘 모르니까 일단 공룡으로 시작해. 그리고 그냥 해변 마을에 가서 배우들 데리고 도망치고 이런 거 찍은 다음에 편집하면 되는 거야. 괴수랑 사람이랑 직접적으로 컨택트하는 장면이 하나 쯤 있어 하지 않냐고? 그러면 발만 하나 만들어! 발만!” 발만! 당연히 괴수가 나오는 장면들과 실제로 찍은 인간들의 장면들은 도대체 붙을 리가 없다. 아마도 김정용 감독은 거의 제대로 된 대본도 없이 이 영화를 촬영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괴수가 도시를 파괴하는 장면 뒤에는 옅게 미소 짓거나 좋아서 박수를 쳐대는 인간의 리액션 씬이 등장한다. 아, 혹시 이것은 지구 종말의 날을 맞이한 인간들의 광증을 표현한 몽타주인가? < 비천괴수 > 최대의 명장면은 배우 김을동 이 마을에서 아기를 둘러업고 산으로 피신을 갔다가, 둘러업고 온 것이 아기가 아니라 베개라는 사실을 깨닫고 슬프게 오열하는 장면이다. 공포에 질려서 산으로 도망쳤던 김 박사의 딸은 그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도 기쁘게 웃어젖힌다. 나중에 <비천괴수>를 다시 봤더니, 이 영화의 진정한 괴수는 괴수가 아니라 김 박사의 딸이었다. 그러고보니 왜 한국형 괴수영화 속 아이들은 이토록 인간미 없는 사이코패스인가에 대한 논문을 누가 하나 써볼 법도 하다. 전설적인 < 대괴수 용가리 >에서 용가리와 춤을 추는 소년의 캐릭터와 함께 묶어서 말이다. < 비천괴수 >는 < 대괴수 용가리 >(1967), < 우주괴인 왕마귀 >(1967)로부터 시작된, 가난한 한국 B급 괴수영화의 계보도에서도 결코 진골은 될 수 없는 영화다. 두려움 없는 저작권의 테러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대괴수 용가리>를 극장에서 보기에는 너무 어렸고, 레이 해리하우젠의 몬스터들은 ‘괴수’라기보다는 뭔가 좀 다른 존재였다(그리고 심형래의 < 용가리 >를 온전히 즐기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들었다). 지금 삼사십대의 한국 몬스터 영화광들에게는 <비천괴수>가 주는 어떤 미묘한 향수를 도저히 거부할 길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건 마치, < 고질라 >를 보고 싶었으나 정작 알라바마주 동네 극장에서 상영하는 샘 커츠만의 거대 ‘칠면조 괴수물’ <자이언트 클로 The Giant Claw>(1957)가 생애 첫 괴수영화가 되어버린, 지금은 예순이 넘은 미국의 어떤 괴수광 노인이 느끼는 향수 같은 것과도 비슷한 것이리라. 뭐, 그런 느낌적 느낌일 거란 소리다. 김기주 남혜경 김다혜 문태선 감독: 김정용 각본: 이문웅 개봉극장: 오스카(서울) 관람인원: 2,741명(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