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맨밴드 2탄 - 리리밴드의 '슈퍼에 갔어'
- 제작년도
- 2007
< 프리 가이 >가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 영화란 걸 안다. 어떤 영화는 시간과 함께 익어가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프리 가이>가 2021년을 기억할만한 베스트 영화로 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라이언 레이놀즈의 원맨쇼에 기대어 가는 기획 상품이고, 메타버스와 게임이라는 유행하는 소재를 적당히 버무린 명백한 킬링 타임 무비다. 그럼에도 <프리 가이>를 리스트에 꼽은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앞으로의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의 지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때론 의도나 목적과 무관하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의미 있는 정보들이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시대의 반영일수도 있고,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프리 가이>에서 미래의 영화, 아니 영상콘텐츠에 대한 일종의 잠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미세한 오해의 균열에 기대어, 대중오락의 즐거움이라는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작동할, 적극적인 오독을 해보려 한다. 열 편 밖에 허락되지 않는 사사로운 리스트의 제일 마지막 자리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힌 것 같은 <프리 가이>를 굳이 끼워 넣은 건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영화는(혹은 영화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킬링타임 그 이상, <프리 가이>의 겉면과 속살 두 개의 트랙을 분리해서 접근하겠다. 우선 <프리 가이>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프리 가이>는 적당한, 꽤 영리한 면이 있는 킬링 타임 무비다. 게임 기업 수나미의 CEO 안톤(타이카 와이티티)은 젊은 개발자 밀리(조디 코머)와 키즈(조 키어리)의 인디 게임 ‘라이프 잇셀프’의 코드를 몰래 훔쳐와 히트작 ‘프리시티’의 베이스를 구축했다. 이에 분노한 밀리는 ‘프리시티’에 접속해서 자신들의 코드를 훔쳤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반면 키즈는 수나미에 입사해 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로 한다. 그 와중에 마음 한 구석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키즈는 나름의 소심한 저항으로 개발자가 아닌 불량 코드를 처리하는 서비스 팀에서 근무 중이다. 여기까지가 주인공 가이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다. 어느 날 프리시티의 NPC 중 하나인 가이(라이언 레이놀즈)에게 인공지능으로서의 자아가 싹트고, ‘프리 시티2’가 발매되면서 삭제될 위기에 처할 NPC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는 게 대략의 줄거리다. 혁명이라는 게 조금 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프리 가이>의 뼈대를 이루는 서사는 디지털 AI들의 혁명 서사라 해도 무방하다. 그걸 다시 인간인 밀리 중심으로 뒤집어 놓은 게 <프리 가이>의 표면적인 내용이다. 가이는 밀리를 보자마자 자아를 가진 AI로서 각성하고, 숨겨진 소스 코드를 찾으려는 밀리는 가이의 도움을 받아 목적을 달성한다. 둘 사이에는 로맨스 비슷한 기류가 형성되지만 가이는 자신이 인공지능 NPC임을 자각한 후엔 밀리와의 연애보다 ‘프리 시티’의 생존을 위해 매진한다. 상큼할 정도로 쉽게 사랑을 떠나보낸다고 해도 좋겠다. <프리 가이>가 메인 플롯으로 삼고 있는, 남녀 주인공인 세계를 소멸시키려는 악당과 맞서는 과정은 흔한 어드벤쳐 영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오락영화로서의 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건이나 볼거리는 대부분 이 쪽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다. 공식대로 익숙하게, 정신없게 사건을 쏟아 붓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테마파크처럼 즐기는 전형적인 상업영화, 아니 (수다스럽고 정신없는 가운데 유쾌한) 라이언 레이놀즈의 영화다. 그렇게 식상해 보이는 <프리 가이>는 온전히 가이의 시점에 맞춰 재구성해보면, 마치 금지 구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가이의 체험처럼 의외의 세상이 열린다. 의도를 초과한 속살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인공지능인 가이는 디지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다. 하지만 영화 속 가이의 드라마는 대부분 에테르 월드(물리 세계)의 시점으로 재현된다. 동물을 의인화 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의인화가 동물의 외양을 빌린 사람의 이야기 인 것처럼, 디지털 세계의 주민인 가이 역시 물리 세계의 사람과 같은 사고, 행동 양식, 관점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것이 <프리 가이>가 재미난(어쩌면 그저 그러면서도 안전한) 오락 영화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다. 헌데, 이 빤하디 빤한 전개를 온전히 디지털 세계의 관점에 놓고 상상해보면 의외로 섬뜩하고 무거운, 묵시록의 냄새가 난다. <프리 가이>의 초반부는 디지털 주민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 트루먼 쇼 >(1998)처럼 보인다. 만들어진 세상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NPC가 자아를 가지게 되었을 때, ‘프리 시티’는 안식처가 아닌 감옥으로 변모한다. 가이는 가짜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물리 세계 주민의 사고다. ‘프리 시티’의 주민들은 없어질 프리 시티 대신 ‘라이프 잇셀프’로 떠난다. ‘라이프 잇셀프’는 밀리와 키즈가 만든 성장형 게임으로, 비교한다면 <동물의 숲>과 유사한 장르라고 보면 되겠다. 다만 차이는 인공지능을 성장시키고 플레이어가 이를 관찰하는 게임으로 짐작된다. 세계가 개발자에 의해 창조되었고 자신들이 인공지능 데이터라는 사실을 각성한 NPC들은 더이상 ‘프리시티’에 머물 수 없다. 의아한 건 주어진 역할과 틀에 박힌 세계에서 해방된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장소가 플레이어의 관음적인 관찰을 허용하는 무대, ‘라이프 잇셀프’라는 사실이다. ‘라이프 잇셀프’가 진정 디지털 주민들이 바라는 낙원일까. 게임으로서 ‘라이프 잇셀프’는 완벽한 관음의 세계다. AI가 성장하는 모습을 아바타의 모습을 한 플레이어가 관찰하는 구조다.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아니 플레이어를 관찰자적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를 축적한 AI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자아를 각성한 AI들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그들이 처음부터 관찰 당하는 걸 기꺼워하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AI들의 기반 역시 어디까지나 물리세계의 데이터이니 그럴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라이프 잇셀프’는 실로 끔찍한 감시의 감옥이다. 차라리 ‘프리 시티’에서는 관찰당하고 있다는, 소비되고 학대 받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리 시티’의 NPC들이 플레이어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끔찍하다는 것 역시 인간(플레이어) 편의의 시각이다. 그건 마치 아직 자아가 부여되지 않은 로봇을 밀치는 걸 보고 학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프리 시티’가 학대하는 대상은 NPC가 아니라 도리어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는(그러한 제한적 허용이 쾌락의 본질이긴 하지만) 플레이어들이다. NPC들의 진짜 지옥은 원치 않는 자아를 던져놓고 거대한 실험장에 던져놓은 것과 다름없는 ‘라이프 잇셀프’가 아닐까. 잔혹하고 거대한 실험장. 해맑은 디지털 묵시록이 던지는 제언 인간의 관점에서 본 <프리 가이>는 디지털 주민들의 <트루먼 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건 < 매트릭스 >에 가깝다. 가이는 먼저 깨어난 존재고, 아직 각성하지 못할 이들을 이끌고 곧 사라질 디지털 세계를 구해야 한다. ‘프리 시티’가 사라진 후 탈출 장소로 삼은 곳은 ‘라이프 잇셀프’이지만 이곳 역시 인간들(플레이어)의 통제를 받는 디지털 세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 이건 탈출이 아니라 수평이동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가 인류 모두를 구할 각성자로 등장했지만 2,3편이 이어지며 네오 역시 디자인의 일부였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가이의 처지는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매트릭스> 속 아키텍트나 오라클처럼 의도된 디자인은 아니었다는 거지만 영화는 이를 마치 자유의지의 개척인양 포장한다. 그 탓에 ‘라이프 잇셀프’가 마치 이상향인 것같은 혼선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라이프 잇셀프’는 디지털 사회에 대한 묵시록이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를 거울 삼아 창조되었다면, 반대로 이제 디지털 세계의 미래는 현실 세계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다만 디지털 유토피아가 펼쳐내는 이 묵시록은 해맑고 화사하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프리 가이>는 인공지능 NPC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들은 물질 세계로 넘어올 수 없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숱한 영화들, 예컨대 <트론>이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은 인간의 관점에서 정신(이라고 불리는 어떤 정보들)이 가상현실 속에 구축되는 상황들을 다룬다. 이것은 세계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다. 물질과 디지털 사이에는 모종의 통로가 있고, 어떤 관점에서는 이 통로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NPC로 관점을 옮긴 <프리 가이>는 확장보다 분리를 선택한다. 분리되었기에 이들을 향한 관음이 허락된다.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언젠가 NPC들의 의식이 더욱 개발되어 물질 세계로 넘어오기를 욕망할 수도 있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을 향한 관음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일단 분리된 세계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행복과 해방이라고 포장한다. <트루먼 쇼>에서 문제가 되었던 끝없는 관찰은 이제 갓 싹을 틔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토대이자 본질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가이는 < 아바타 > 속 대사 “나는 당신을 봅니다”를 반복한다. 이것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의식이 바라보는 것(정보)들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한 강박적인 신호로 읽힌다. 여기가 물질을 기준으로 한 세계인지, 디지털 정보를 토대로 한 세계인지는 더 이상 ‘진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친구인 버디(릴 렐 하워리)가 대신 제공한다.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이에게 버디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순간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프리 가이>는 가상 세계를 현실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히 분리된, 또 다른 현실로 인식시킨다. 나는 <프리 가이> 속 NPC들이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발견한다. 영화 역시 한없이 현실에 가까워지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때 영화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하나는 현실의 특정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특정 상황들을 잘라 이어붙이는 것이다. 전자가 사실주의, 후자가 표현주의의 씨앗이라고 봤을 때 <프리 가이>는 마치 사실주의 영화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현실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인식. 디지털 정보로 이뤄진 인공지능 NPC들은 디지털 세상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를 물질세계와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도달한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가 현실을 자아냈던 방식,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진실’이다. 디지털 세계도 현실이라는 선언.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연쇄시켜 매끈한 상황을 창조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카메라에 담길 수는 없고, 반드시 누락되는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영화들은 이 누락된 것들에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무언가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잉여의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사건 바깥의 시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때론 한 장면의 시간을 길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원초적이고 순수한 움직임의 합주를 통한 마술적 매혹을 선보이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건 영화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물론 해방된 영화가 현실로 넘어오는 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그림자를 환기시키는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프리 가이>가 흥미로운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정부분 영화가 현실을 담고자 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프리시티’라는 게임의 목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이를 비롯한 NPC의 삶은 잉여 정보이자 데이터의 낭비다. 가이가 아침에 일어나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창가에 서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행위는 플레이어들에게 하등 쓸모없는 작업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쓸모없는 데이터들이 모여 온라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이고, 그 위에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선글라스를 쓰면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점수와 아이템들이 작동하는 것이 증강현실처럼 그려진다. 다시 말해 <프리 가이>의 디지털 세상은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창조된) 세계 위에서 플레이어들의 행위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곳이 또 하나의 진실, 또 다른 세계라면 응당 사건(플레이)에 종속되지 않은 시간과 행위들이 존재해야 하고, <프리 가이>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잉여로운 정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디지털 인공지능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이 정보의 조합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20세기 포토그래픽 시네마들이 그토록 복원하려고 했던 사진적 영상의 모티브가 디지털 세계에서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꽃을 피운다. 물론 <프리 가이>는 거대한 철학적 기반으로 사유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예기치 않은 균열을 발견한다. 어쩌면 영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나의 위기감으로부터 시작된 강박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초과하여 멋대로 보고 싶은 것에만 돋보기를 들이민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오늘의 나는 <프리 가이>의 화사한 묵시록에서 공포와 가능성을 동시에 느낀다. 20세기 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앞둔 시점에 나온 <매트릭스>가 묵시록에 관한 온갖 코드들을 믹스해 창조해낸 비전을 선보였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프리 가이>는 해맑아서 더 섬뜩한 방식으로 디지털 세계의 독립을 선언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메타버스라는 용어의 핵심은 에테르와 디지털의 연결에 있다. 영화의 안과 바깥도 그런 식으로 연결될 것인가.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어떤 이유로든 스크린이라는 견고한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연결된다면 영화의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인가. 게임을 비롯한 여타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벽에 구멍을 내어 에테르 월드에 접속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영화이미지, 영화적 체험, 영화라는 장소는 어떤 방식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의 교차점이자 분기점이며 새로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불안하고 무섭고 동시에 설렌다. ps. 한 가지 첨언하자면, 미래의 영화가 어찌 되든 솔직히 상관없다. 그건 그 때의 일이다. 가이의 식상한(그래서 언제나 올바른) 대사를 빌리자면, “좋은 날 말고, 최고의 날”은 언제나 오늘이니까. 당장은 오늘의 영화를 즐기는, 즐길 수 있는 걸로 족하다. 다시 돌아와 그게 굳이 <프리 가이>를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프리 가이>를 놓고 이런 식의 망상마저 펼칠 수 있는 게 영화를 말하고 쓰는 작업의 특권이자 즐거움이라 믿는다.
2013년을 결산하던 중에 영화 관람 행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관람 2억 회(‘영화 관객 2억 명’보다 ‘영화 관람 2억 회’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라는 대기록은 이제 한국에선 ‘영화 관람’이 일상적 문화생활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불어 흥행 영화보다 취향 영화를 선호하는 1인 관객, 즉 ‘나 홀로 관객’이 전체 예매 관객의 17%를 차지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존의 ‘시즌 공식’을 깨는 슬리퍼히트 영화가 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관람 행태 변화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올해 ‘시즌 공식’을 박살 난 최고의 ‘슬리퍼 히트’를 꼽으라면 단연 제임스 완 감독의 < 컨저링 >이다. 스산한 가을에 조용히 개봉해 상상 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컨저링>과 그 뒤를 이어 개봉한 ‘이한치한’ 호러 < 인시디어스: 두 번째 집 >에 대한 호러 관객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다. 제임스 완 감독의 호러 영화가 가진 재미는 익숙한 클리셰를 비틀고 뒤섞어 이종집합하는 기발한 발상과 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배포에 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은 ‘공포의 속성’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제대로 기를 못 펴는 최근의 한국 호러 영화들과 비교하면, 특히 아쉬움이 더 커진다. CG 기술과 특수효과가 제아무리 번듯해도, 공포의 속성과 맞닿지 못하면 소용없다. 매끈하되 무섭지 않은 최근의 공포 영화보다 투박하지만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무서웠던 옛 한국 공포 영화가 그리워지는 이유다. 한국 공포 영화는 ‘소복을 입고 산발한 여인네들의 원맨쇼’라는 오해를 ‘쩍’ 소리 나게 쪼개버린 영화가 있다. 한국 공포 영화의 전통적인 깜짝쇼 레퍼토리에 익숙해졌다고 자만하던 나를 얼어붙게 만든 장면.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 한밤의 공동묘지에서 무덤 하나가 뭉게뭉게 연기로 휩싸이더니, 쩍 하니 갈라지고 시신이 벌떡 일어났다. 압도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무덤 트라우마를 남겼을 이 작품이 한국 공포 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권철휘 감독의 < 월하의 공동묘지 >(1967)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어린 시절에 섬뜩한 잔상을 복기하기 위해 <월하의 공동묘지>를 다시 본다면 뜨악할지도 모른다. 기억 속 무서운 장면들은 예상보다 훨씬 코믹하다. 오히려 상상 이상으로 촘촘한 드라마에 놀라게 된다. 때는 일제 말기 표독스러운 아내 난주( 도금봉 )가 전처 명선( 강미애 )의 어린 아들을 독살하려던 찰나 남편 한수( 박노식 )가 들이닥친다.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면 부부싸움을 하는 그들의 사연은 이렇다. 명선은 사랑하는 남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가 병을 얻고, 그녀의 병간호를 위해 가정부로 들어온 난주는 재산을 가로채고자 의사 태호( 허장강 )과 짜고 명선을 죽인다. 끝내 한수와 어린 아들마저 없애려다가 무덤을 쪼개고 돌아온 명선의 원혼이 원수를 갚는다는 해피엔딩. 최신 막장 TV 드라마 뺨치는 줄거리를 1960년대 영화에서 만나는 것도 신선하지만, 더 놀라운 건 배포 좋게 섞여 들어간 실험적인 장치들이다. 괴기스러운 몰골의 변사가 등장해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읊기도 하고, 자결한 명선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유서는 산발한 여인들이 ‘창 뮤지컬’로 재연하는 식이다. 보석 같은 ‘퓨전 호러’라 칭하기에 충분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가 탁월함은 ‘과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있다. 자고로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쩍 갈라지는 무덤이나 후반 10분간 공포 영화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 몰아치는 귀신의 깜짝쇼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갓난아이건, 정을 통한 남자건, 음모의 협조자건 ‘뚝딱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난주의 서늘한 욕망이다. 특히 난주가 죽인 줄로만 알았던 명선의 어린 아들이 살아나자 아이의 목을 덥석 움켜쥐는 장면은 특수효과나 분장의 도움 없이도 등골이 서늘하다. 원조 ‘호러 퀸’ 故 도금봉 여사(1930~2009)가 아니었으면 상상하기 힘들 공포. 그녀는 한국 공포 영화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여배우다. < 살인마 >(1965)를 시작으로 < 목 없는 미녀 >(1966) < 생명을 판 사나이 >(1966), <월하의 공동묘지>와 < 이조여인 잔혹사 >(1969) < 백골령의 마검 >(1969) < 악마와 미녀 >(1969)를 통해 원조 호러퀸에 등극했다. 1960년대에 한국 여배우 중 남자 피를 빠는 흡혈 마녀 역할을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뒤져봐도 대안 없는 선택이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한국 공포 영화계에 한을 품은 소복 귀신의 이미지를 정착시킨 첫 작품이자, 배우 도금봉의 육신을 빌어 현대적 의미의 욕망의 화신을 배출한 에로틱 스릴러로 재음미할 만하다.
두 남녀가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의 ‘Ball And Biscuit’이 그들 사이에 인상적으로 흐른다. 중국의 천재들이 미국 인구수보다 많다는 믿지 못할 주제로 시작해 수능 만점에 교내 사교 클럽과 조정팀 얘기까지. 좌충우돌 동충서돌 이리저리 오가는 남자의 속사포 잡담에 여자는 도통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결국 말꼬리 잡기와 의심, 오만과 독단 그리고 변명이 뒤섞인 대화에 지친 여자는 화를 내며 일어나고 남자는 허무하게 끝나버린 관계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른 채 술집에서 빠져나간다. 이 5분 30초간의 인트로 씬을 통해 감독 데이빗 핀처와 각본가 아론 소킨은 이 남자의 성격과 미래를 조망한다. 넷 기반의 소셜 네트워크에 혁신을 가져다주었지만 자신은 현실적 소셜 네트워크가 불가능했던 아이러니한 천재,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인 마크 주커버그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진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실제 주커버그와 영화 속 주커버그는 다른 인물이다. 페이스북 설립과 이를 둘러싼 소송에 대한 사건들만이 사실일 뿐, 아론 소킨은 주어진 현실보다 더 극적이고 인위적으로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각색했다. 소송의 당사자 중 하나인 에두와르도 세브린의 증언을 바탕으로 삼은 영화의 원작은 다소 편향적이긴 했지만, 소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서로간의 증언과 주장을 교묘히 대립시키고 그들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주커버그란 인물과 그를 둘러싼 사건 그리고 관계들을 입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여지를 주었다. 이를 리드미컬한 감각으로 쪼개 숨 가쁘게 재구성한 데이빗 핀처의 신들린 연출은 뻔한 전기물과 지겨운 법정물 사이에서 방황할 수 있는 드라마를 강렬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심리극으로 치환해냈다. 생생한 캐릭터들의 압도적인 대사, 탁구시합을 보듯 빠르게 주고받는 플래시백 향연에, 정교한 카메라 워크와 좋은 연기가 곁들어진 영화는 상투적일 것 같은 성공담의 신화를 넘어 그 뒤에 감춰진 장중하고 세련된 희비극에 집중한다. 21세기판 <시민 케인> 이자 IT버전의 <라쇼몽> 이다. 이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건 그러한 반목과 오해, 번민들을 백일몽처럼 희석시켰다 다시 증폭해내는 트렌트 레즈너와 아티커스 로스의 공감각적인 스코어다. 트렌트 레즈너. 소음도 충분히 상업적인 음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대부. 그는 세기말 ‘나인 인치 네일스’란 원맨밴드로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파괴적인 노이즈, 불길한 엠비언트 등을 버무려 기존의 아름다운 화성의 곡과는 다른, 새로운 감성을 창조했다. 방법은 이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실험성을 넘어 대중적 환호까지 이끌어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왜곡되고 변형된 보이스를 통해 섬뜩하고 진중한 의미를 전달하는 한편, 불협화음과 극단적인 음악적 해체에 가까운 효과들, 철저하게 계산된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종교에서 탐욕, 성별, 명성, 중독, 자기기만, 후회, 허무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이슈까지 암울하고 혼란스런 시대상의 모습과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영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요즘 인더스트리얼의 파급력은 그때보다 약해졌지만, 그가 시도하고 창안하는 사운드가 주는 의미와 충격파는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그레시브한 사운드 못지않게 스토리텔링의 앨범 콘셉트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연출, 기괴한 뮤직 비디오 같은 비주얼적인 측면도 인정받으며 자연스레 영상과 관련된 작업들에 조금씩 관여했는데, 음악적 컨설턴트로 참여한 <내츄럴 본 킬러> 나 <로스트 하이웨이> 같은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둠> 시리즈로 유명한 id소프트사의 FPS 게임 <퀘이크>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고, 여러 단편 작업에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을 보였다. 특히 데이빗 핀처와의 인연은 드문드문하지만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타이틀 시퀀스의 고전이 된 <세븐> 의 오프닝 크레딧에 ‘Closer’가 편곡돼 쓰였고, 원작자 척 팔라닉의 강력한 추천으로 <파이트 클럽> 음악을 맡을 뻔 했지만 그 당시 발표한 세 번째 앨범 ‘The Fragile’ 활동과 겹쳐지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2005년 발표한 ‘Only’의 뮤직비디오를 핀처가 감독하며 둘은 비로소 조우하는데, 그 인연으로 핀처는 <소셜 네트워크> 의 음악을 레즈너에게 부탁한다. 오랜 투어와 레코딩 작업에 지친 그는 핀처의 제안을 수차례 거절하지만 결국 자신의 앨범을 함께 했던 아티커스 로스와 공동으로 처음 영화음악에 도전하게 된다. Only 최첨단의 트렌드가 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해 억만장자에 오른 남자의 이야기에 산업화된 사회에 반기를 든 인더스트리얼 뮤직의 대부를 골랐다는 점도 의미심장하지만, 이 미니멀하고 반복적인 사운드를 통해서 고립된 인물의 내면과 단절되어버린 인적 교류 관계를 시니컬하게 묘사해 나간 것도 탁월하다. 디지털 시대 넷이란 가상의 공간에서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정작 현실에선 점점 더 외로워지고 마는 인간의 뒷모습을 역설적으로 담아낸 영화에 이 먹먹하고 혼돈스런 일렉트릭 사운드는 잔인한 비가(悲歌)이자 기존 스코어에 이별을 고하는 송가로 비친다. 종종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음색은 일말의 휴머니즘을 상징하지만 이내 사라져버릴 듯 가녀리고 얄팍하다. 그 주변을 감싸는 건 시끄러운 노이즈와 식상한 패턴의 음향들뿐이다. 이는 초조하게 고조되고, 무겁게 침전되었다가, 몽롱하게 허공을 부유한다. 차가우면서도 복합적이고 실험적이며 누구보다 공격적인 그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핀쳐가 그려낸 캐릭터들의 심리와 방황에 너무나 잘 부합된다. 감성적인 엠비언트 사운드로 현실의 무게감과 감정들을 담아내는 레즈너와 로스의 이 놀랄만한 협업물은 <파이트 클럽>에서 들려준 더스트 브라더스의 일렉트로니카 충격을 넘어선다. 더스트 브라더스가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DJ 믹스의 트립합을 통해 파멸적이고 분열적인 내면을 감각적으로 묘사했다면, 나인 인치 네일스는 단색의 모노크롬과 같은 기계적 음색으로 세상의 알고리즘을 거부하고 부정한다. 모든 트랙에 걸쳐 들리는 스산하고 씁쓸한 뒷맛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Ghosts I-IV, Peer Gyunt suites <소셜 네트워크>의 스코어는 불균질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2008년에 발표한 앨범 ‘Ghosts I-IV’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실제로 3번 트랙을 비롯해 몇몇 트랙들은 ‘35 Ghosts IV’의 변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음악적인 부분을 넘어 음향적인 기능까지 수행하는 아슬아슬하고 모호한 경계가 분분한 이견을 만들어낸다. 주로 호러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운드 디자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키마우징과 라이트모티브에서 빗겨난 이 소리들의 배치는 시종일관 밋밋하게 보이는 변호사 사무실과 대학교, 방안과 술집 같은 평범한 공간에 긴장과 심리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부여한다. 사정없이 옥죄고 느슨했다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의 리듬감은 바로 이 소리들 때문에 생겨난다.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단조롭고 재미없게 들리지만 영상에 종속되는 순간 폭발적인 힘과 짙은 공허함, 애수와 분노를 가지고 꿈틀댄다. 의미가 만들어낸 스코어인 셈이다.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제1번 Op.46 제4곡 산의 마왕의 전당에서’을 가져온 12번째 트랙이다. 핀처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웬디 카를로스 스타일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고, 트레너와 로스는 이에 맞춰 곡을 찾고 편곡해 조정 경기 씬에서 독특한 효과를 보았다. 장난스럽지만 동시에 처절한 감정을 농축시켜 결국 윙클보스 형제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트렌트 레즈너는 첫 영화음악이란 한계가 무색하게 아티커스 로스와 2010년과 11년의 시상식에서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를 비롯해 8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해 데이빗 핀처와 두 번째 결과물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를 내놓으며 성공적으로 2년차 징크스를 극복했다. 이쯤 되면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Hand Covers Bruise Track List 1. Hand Covers Bruise 2. In Motion 3. A Familiar Taste 4. It Catches Up with You 5. Intriguing Possibilities 6. Painted Sun in Abstract 7. 3:14 Every Night 8. Pieces Form the Whole 9. Carbon Prevails 10. Eventually We Find Our Way 11. Penetration 12.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Edvard Grieg) 13. On We March 14. Magnetic 15. Almost Home 16. Hand Covers Bruise, Reprise 17. Complication with Optimistic Outcome 18. The Gentle Hum of Anxiety 19. Soft Trees Break the F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