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신도
- 감독
- 원진량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유덕화, 서소강, 사녕
순전히 입소문과 호기심만으로 영화를 찾아본 게 오랜만이다, 라는 점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이 혼란에도 영화제를 ‘onsite’로 지켜낸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벌(에게 존경과 격려를!)에서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보다 표를 구하기 힘들었다는 입소문이 돌았고, 어떤 감독은 영화 보는 내내 언제 전지현 이 나오는지 기다렸지만 끝내 등장하지 않아 제목이 왜 저런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농반진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관객과 감독이 주고 받은 문답들이 알 수 없는 암호들이었다는 전언. 본 사람들은 다 재미있게 봤다며 말하지만, 막상 어떤 게 좋았는지 물어보면 영화 외적인 이야기만 하더라는 점이, 게으른 몸을 움직여 영화를 찾아보게 만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카오스가 지구에 떨어져 고대인은 절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카오스가 통제하는 어둠의 별이 되어버린 지구지만 살아남은 소수의 고대인들은 영력을 하나로 모아 이곳 일랜시아를 창조하고 대피했다.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며. 저곳 세상에서 일랜시아를 창조한 이들은 생존한 소수의 고대인들이지만, 이곳 세상에서 일랜시아를 창조한 이들은 게임회사 넥슨이다. 1999년에 출시된 게임이니 이제 20년이 되었고 넥슨의 방치로 업데이트는 물론 아무런 서비스도 제공되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추억의 게임이 되었지만, 생존한 고대인들인 양 일랜시아를 지키고 있는 지구인들이 있다. 전쟁을 피해 산속 깊은 곳 동굴로 숨어들었다가 종전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탈영병처럼, 일랜시아를 지키는 이들은 기술과 자본이 결합해 창조하는 새로운 게임에는 관심이 없다. 약간의 자조와 은밀한 연대감과 결속력, 그리고 추억이 더해져 유지되는 일랜시아 공동체 일원들은 대부분 20대 중. 후반인데,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감독이 직접 길드원들을 만나 각자 본캐들의 사연과 이유를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일랜시아를 지탱하는 세계관과 규칙을 보여주고, 이 세계를 창조한 게임회사 넥슨의 방치와 무관심에 분노를 표하고, 그 방치로 인해 형성된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컴퓨터 화면이 종종 등장하고, 인터뷰와 길드원들의 MT장면들이 날 것처럼 담긴 영화. 어떤 게임이든 중독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야, 라는 이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평에 공감하려면 게임이든 뭐든 중독의 경험이 있어야 할 터. 화면 가득 등장하는 컴퓨터 게임화면과 난무하는 그들만의 용어라는 장벽을 건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공을 절감하며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다. 물론 쉬운 유혹들과 떡밥들은 존재한다. 98년 IMF시절에서 시작해 넥슨 노동조합의 이야기까지, 일랜시아라는 게임이 거쳐온 20년의 세월에 담긴 한국사회의 변화와 등장하는 청년세대의 불안의 징후들은 영화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맥락과 층위들을 제공한다. 이들에게 반칙은 매크로라는 신기술이고, 노력해서 성취한다는 기본 규칙에 위배되는 행위들. 이런 행위들은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일랜시아라는 곳에서도 쉽게 통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와 일랜시아를 맞대어 비교하면서 이 영화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이들이 일랜시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고 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졸업영화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여기저기서 입소문을 타면서 게임 유저가 만든 최초의 게임다큐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게임회사 넥슨의 임원진들이 영화를 봤고, ‘버려진 게임’ 일랜시아와 같은 클래식 게임에 대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일랜시아를 지켜온 이들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지가 너무 궁금해지는 대목. 전쟁을 피해 동굴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탈영병은 사회로 복귀해서 과연 행복해졌을까? 이렇게나 사랑스런 영화로 완성해낸 감독이 원하는 게 이런 변화들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용산지역에는 상설극장이 아닌 가설 형태로 극장이 처음 들어섰다. 가장 먼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용산무동연희장(龍山舞童演戱場)인데, 용산의 넓은 빈터에 천막을 두른 가설 형태의 연희장이었다. 이 같은 가설 형태의 연희장은 극장이 존재하지 않던 조선에 근대식 상설 연희장이 설립되는 데까지 중간적인 위치를 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료] 용산좌 신년 광고(《조선신문》, 1913.01.01) 용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상설극장은 용산좌다. 1906년 말 용산 영정(榮町)에서 개관했다. 현재 용산 원동교회 근처에 있었으며, 개관 당시 좌주는 사사베 모쿠자에몬(笹部杢左衛門)이었다. 1911년 5월에는 다케모토(竹本水朝) 일좌(一座)가 조루리의 일종인 오사카 여성 기타유(大阪娘義太夫)를 공연했고, 1912년 2월에는 나카무라 카시쿠(中村かしく) 일좌가 나니와부시를 연극(芝居)으로 상연했다. 1913년 신년 광고를 보면, 당시의 흥행주는 아시자와 쓰야(蘆澤つや)라고 한다. 일본의 전통 연희를 주로 상연하던 용산좌는 1917년 개성좌(開盛座)로 개칭되었다. 개성좌의 흥행주는 계약에 따라 자주 바뀐 듯하다. 예컨대 1924년 1월 5일자 《조선신문》에 게재된 개성좌의 광고를 보면 “용산 영정 개성좌 하타다흥업부(畑田興業部)”라고 기록된바, 당시 개성좌는 하타다 흥업부가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성좌는 소규모 흥행 회사들이 일정 기간 대관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성좌와 같은 작은 극장은 공연에 대한 기록보다는 사건 사고로 신문 지면에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인용해 보자. 7日 午前 한 時頃에 市內 元町 3丁目 開盛座 2層에서 불이 이러나 一時 騷動을 하얏스나 卽時 鎭火되얏다는데 原因은 화로불에서 불이 붓흔 것이라 하며 損害는 약 6圓假量이라더라. 1 11월 7일 오전 1시경에 개성좌 2층에서 화롯불에서 옮겨 붙어 화재가 발생하여 일시 소동이 일어났으나 금방 진화되었다는 기사이다. 또 다른 기사는 배우가 되고자 개성좌에 들어간 한 여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그 어머니가 용산경찰서에 신고한 사건을 보도한다. 이것도 인용해 보자. 시내 죽첨뎡 이뎡목 이십륙번디(市內 竹添町 二六) 최성녀(崔姓女)의 둘째딸 박뎡옥(朴貞玉)은 금년 열여섯 살 되는 어엽분 소녀인바 배우 되기가 소원이여서 자긔 어머니의 승락으로 구룡산에 잇는 개성좌(開城座) 2 라는 연극단에 드럿든바 다닌 지 몃칠 되지도 안어서 지난 이일부터는 집에도 도라오지 안코 전긔 연극단에도 나오지 안음으로 그의 어머니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을 해 본 결과 연극을 가릿킨 하고 시고가티 부터단이든 전긔 개성좌의 남자 배우 백운옥(白雲玉)(23)이란 자가 유인하여 가지고 시내 주교뎡 모처(市內 舟橋町 某處)에 은거하였다는 말을 듯고 지난 삽아일에 룡산경찰서(龍山警察署)에 호출하여 동 서에서는 그날로 백운옥이란 자를 인치한바 백운옥은 사실을 자백하엿다 하며 엄중히 설유한 후에 내여 보내리라더라. 3 16세 처녀를 배우 시켜준다며 유인하여 가출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개성좌의 남자 배우가 조선인인 것을 보면 이 즈음에는 조선인 극단이 개성좌를 대관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가 천연두에 걸려 극장을 비롯해 그 일대를 소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와 시내의 도박꾼들이 미생정(弥生町) 유곽에서 도박을 하다 일망타진당한 사건도 기록이 있다. 구용산에 자리했던 개성좌는 사건 사고로 먼저 기억되는 공간으로 1940년대 초반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 사쿠라좌의 1916년 신년광고(《경성일보》, 1916.01.05) 구용산에 용산좌와 그 후신인 개성좌가 있었다면, 용산역 정면의 신용산에도 극장이 있었다.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가 이끄는 일본의 신극 단체인 예술좌(藝術座)가 1915년 11월 공연했던 장소가 용산의 사쿠라좌였다. 한자로는 ‘櫻座’ 혹은 ‘佐久良座’라고 표기한다. 사쿠라좌는 1910년 5월 건물을 낙성하고 8월부터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던 시기로, 개관 당시의 좌주는 야마네 효스케(山根兵助)였다. 아래의 기사는 사쿠라좌에서 흥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내용이다. 龍山 新市街 山下町 에 建築 中 이던 大劇場 櫻座 ᄂᆞᆫ 內部 의 設備 ᄀᆞ 旣 히 完成 되얏슴으로써 來月 上旬 부터 日本 大阪 一等 俳優 ᄅᆞᆯ 招聘 하야 演劇 을 開始 하기로 目下 交涉 中 인 同座 ᄂᆞᆫ 前 朝鮮日之出新聞社 記者 ᄅᆞᆯ 聘 하야 顧問 으로 定 하고 諸般 의 改善 을 謨 한다더ᄅᆞ 4 조선 내 일본어 신문인 조선일지출신문사(朝鮮日之出新聞社)에 근무했던 기자를 고문으로 하여 문을 연 사쿠라좌는 연극 등 무대 공연을 주로 흥행했으나, 1915년 무렵 용광관(龍光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전문적으로 상영하게 된다. 용광관은 1917년 1월 현재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와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닛다연예부에서는 용관관 관리를 위해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를 출장원으로 파견했다. 용광관은 훗날 이름을 용산극장으로 바뀌었다. 용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룡관(京龍館)은 경성 외곽의 극장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영화관이었다. 1920년 12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를 비롯해 이시즈카 가네키치(石塚謙吉), 다니구치 가메타로(谷口龜太郞) 등 경성의 일본인 유지들이 경성과 용산 사이 과거 연병장 자리에 활동사진관 설립을 출원, 주식을 발행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자본금 20만원에 불입금 5만원 규모의 주식회사 경룡관을 조직했다. 그리고 1921년 7월 19일 활동사진관 경룡관을 개관했다. 경성부 한강통 3번지 14에 자리한 경룡관은 활동사진, 기타 흥업에 관계된 일체의 사업 및 부대사업을 목적으로 했다. 주식회사 경룡관의 주요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대표 이시하라 이소지로와 이사 이시즈카 가네키치, 다니구치 가메타로 외에도 다테야마 가쓰요시(立山勝喜), 우에다 헤이자부로(上田兵三郞), 마에카와 도요지로(前川豊次郞), 진나이 시게키치(陳內茂吉) 등 이사진과 감사 도이 가즈요시(土井一義), 가네코 도요조(兼古禮藏) 등이 있었다. 5 주식회사 경룡관은 1923년 주식회사 성남연예(城南演藝)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관 직후 경룡관은 닛카쓰 연맹에 가맹하고 닛카쓰의 영화들을 주로 상영했다. 그러나 1922년 5월 곳카쓰(國活) 직영으로 바뀌었고, 1923년 5월부터는 각종 연희물을 상연하며 경룡좌(京龍座)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924년 1월에는 중앙관(中央館)과 공영 형태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직영관이 되어 마키노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1941년 10월 3일, 경룡좌는 극장을 새롭게 정비하고 이름을 성남극장이라 바꾸었다. 1943년 당시 성남극장은 홍계 계통의 극장으로 객석은 총 750석 규모였으며, 흥행주는 우에다 도모요시(上田友義)였다. 해방 후에도 존속하던 성남극장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영화 관람 문화가 크게 변하던 2003년 폐관하게 된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 “개성좌에 소화(開盛座에 小火)”, 《매일신보》, 1928.11.08. 2) 원문의 "개성좌(開城座)"는 개성좌(開盛座)의 오기로 추정된다. 3) "여우 견습 유인(女優見習誘引)", 《중외일보》, 1930.01.15. 4) “사쿠라좌의 무대 개시(櫻座의 舞臺開始)”, 《국민신보》, 1910.08.19. 5) 『朝鮮銀行會社要錄』, 中村資良, 東亞經濟時報社, 1921년판, 232쪽. * [사진] 1921년 개관한 경룡관 외관(《경성일보》, 1921.07.20) [자료] " 小野 小林 兩 判事 龍山 方面 에 出動, 룡산극장에 생긴 사건 殺人 事件 檢證次 로", 《동아일보》, 1930.11.09 금 八 일 경성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소야 ( 小野 ), 소림 ( 小林 ) 량 판사는 동부 서긔 통역을 대동하고 목하 공판 진행 중의 피고 매원진웅 ( 梅原辰雄 ) 에 대한 상해치사 ( 傷害致死 ) 사건의 검증 ( 檢證 ) 을 하기 위하야 시내 룡산 ( 龍山 ) 방면에 출장하얏는데 사건은 금년 봄 룡산극장 ( 龍山劇場 ) 에서 대소롭지 안흔 일로 피고 조선 사람과 말다틈을 하다가 그를 ᄯᅡ려 죽게 한 것이라는 바 검증 여하에 ᄯᅡᆯ하서는 피고의 범죄 소위가 살인죄로 될는지도 모르리라 하야 매우 주목된다고 한다 . [자료] " 京城 에 天然痘 發生, 龍山 開盛座 에서 興行師 가 發病 ", 《매일신보》, 1938.03.29. 선만 각지를 순회 중에 잇든 『 만사이 』 사 림정웅 ( 萬歲師 林靜雄 )(44) 일행 八 명은 지난 十二 일 입성하야 부내 영정 ( 榮町 ) 개성좌 ( 開盛座 ) 에서 흥행 중이엇섯는데 지난 卄一 일 밤 림정웅은 별안간 몸에 열이 올라 시름 へ 알코 잇섯슴으로 무슨 병인지를 몰르고 잇든 중 卄八 일 오후 령시 三十 분경 부 위생과 ( 府衛生課 ) 의사가 출장 진단한 결과 의외에도 진성 천연두 ( 眞性 天然痘 ) 로 판명되어 동 좌 일대는 잠시 동안 대소동을 이르키엇는데 부 위생과에서는 즉시 룡산서 ( 龍山署 ) 와 협력하여 가지고 동 환자를 순화병원 ( 順化病院 ) 으로 옴기고 좌원 ( 座員 ) 八 명의 다니든 곳과 개성좌 원정 ( 元町 ) 一 정목 영정 ( 榮町 ) 일대와 그 부근 전부를 대소독하는 한편 이튼날 卄九 일 오전 十 시부터는 영정 ( 榮町 ) 원정 ( 元町 ) 一 정목 경정 ( 京町 ) 대도정 ( 大島町 ) 일부의 거주자 약 三 천여명을 원정 소학교 강당 ( 小學校 講堂 ) 으로 소집하여 가지고 임시 종두를 행하기로 되였다 . 그리고 림정웅은 황군위문 ( 皇軍慰問 ) 차로 룡산 육군병원 ( 陸軍病院 ) 에서 출연한 일이 잇섰고 그 외 연병정 ( 練兵町 ) 에서도 二 , 三 일간 유숙한 일이 잇섯슴으로 이곳까지도 전부 대소독을 하여 예방에 노력을 하고 잇는데 아직ᄭᅡ지 발병자는 림정웅밧게 업다고 한다 .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펼쳐진 풍경도 달라진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는 폐부를 저미는 날카로운 대사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그 중 유난히 뇌리 깊숙이 박힌 저 대사가 요즘 자꾸 되살아난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음을 표현한 대사지만 내겐 텍스트와 해석의 묘를 압축하고 있는 말로 다가왔다. 사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본 것을 말한다는 건 적지 않은 용기와 확신이 필요한 일이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보편적인 정답의 존재를 믿는 메아리가 거대한 조류로 변해, 작지만 용기 있는 의견들을 순식간에 삼키고 지나가기 십상이다. 최근 < 택시운전사 >와 < 군함도 >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둘러싼 담론의 탁류를 접하며 가벼운 회의에 사로잡혔다. 지금, 새삼 서광제 감독의 < 군용열차 >를 꺼내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다. 1938년 제작된 <군용열차>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영화로 분류된다. 실제로 당대의 대다수 관객들에겐 이른바 어용영화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당대엔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 군용열차 >는 두 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영화다. 하나는 얽히고설킨 남녀의 통속극, 다른 하나는 친일 어용의 열차기관사 이야기다. 당대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열차 기관사 점용은 기관사들의 선망의 대상인 군용열차를 몰 기회를 얻는다. 점용의 성공 뒤에는 오빠를 철도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생이 된 동생 영심의 희생이 있다. 영심은 점용의 절친 원진과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원진이 영심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기생집에서 데려올 거액의 몸값이 필요한데 평범한 원진은 도저히 그 돈을 구할 길이 없다. 한편 점용의 주변을 맴돌다 혼쭐이 난 수상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원진에게 접근하여 점용이 모는 군용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을 알려 주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원진은 업무수첩을 훔쳐 남자에게 전달하지만 이내 가책을 느껴 괴로워하다 점용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국 군용열차를 파괴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점용은 군용열차 기관사의 꿈을 이룬다. 점용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일본 제국의 승리와 동양영원평화를 위해’ 매진하는 철도기관사의 이야기다. 점용은 황국신민으로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용열차를 노리는 테러리스트, 그러니까 독립군의 계획을 분쇄한다. 이를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고 친구를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 영화의 뼈대를 차지하며 이목을 사로잡는 건 영심과 원진의 애틋한 로맨스 파트다. 반면 영화에서 점용의 심리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사실상 거의 전무하다. 당위나 설득 없이 충성과 보국이라는 답변을 반복하는 점용의 캐릭터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능에 가깝다. 일제강점기를 버텨온 남녀의 안타까운 현실을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내지는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기계적 알리바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원진과 영심의 캐릭터는 피와 살이 도는 생생함을 안긴다. 원진은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조선 청년의 애환을 안타깝게 드러낸다. 영심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당대의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 지점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문학에 빈번히 등장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누이’의 변형이라 할 만한 설정이다. < 군용열차 >는 몇몇 장면에서 연출적 괴리를 숨기지 않는다. 가령 원진이 독립군과 이야기 할 때 영상과 음성이 불일치하는 장면들을 보며 제작 후 녹음 과정에서 불가피한 수정이 가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원진이 황국신민의 의무를 외치면서도 굳이 한복을 입고 선로에 뛰어드는 것도 의아하다. 프로파간다적인 주제와 충돌할만한 단서들을 곳곳에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읽기란 이야기의 틈새에서 좋은 질문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간혹 창작자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던 시대의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 군용열차 >는 친일어용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일제 치하의 아픔과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당대 일본인, 친일어용 지식인, 핍박받는 조선인 등 어떤 위치에서 보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를 감상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본래 습자지처럼 붙어있되 전혀 다른 성질의 두 서사를 분리해내기 위해서는 본래 적극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촘촘한 거름망을 지난 지금 우리가 <군용열차>에서 친일영화의 뼈대를 발라내고 그에 저항했던 속살을 발라먹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표리부동한 양식에서 최근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고전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평자의 위치와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 고전은 시간을 거스른 시금석이 되어 당대에는 쉽게 읽어 내지 못하는 정보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래된 영화가 끊임없이 되살아나 생명을 유지하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서 있는 위치가 바뀔 때마다 영화는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