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 감독
- 남태제, 김성환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김진선, 오순자, 황분희, 신용화, 이상홍, 오연재, 이은정, 이진섭, 이균도, 김추자, 감복순, 조영남, 이선옥, 신정숙, 서수남, 김경순, 김채연, 김석화, 한경현
< 두고 온 산하 >의 영화적 성격은 그 시작과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무명 용사를 위한 영화”임을 밝히는 자막에서부터 분명히 제시된다. 물론 이 작품을 연출한 이강천 이 빨치산에게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 피아골 >(1955)의 감독이었다는 점에서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두고 온 산하>의 제작자가 ‘국방부 정훈국’이라는 점은 그 기대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피아골>은 반공영화의 극단적 이분법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다 해도, 그렇다고 반공영화의 전형성에서 온전히 탈피한 작품은 아니었다. <두고 온 산하> 역시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대적 한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영화에 가깝다. <두고 온 산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된 석빈( 김진규 )이 소련이 지배하는 북한 사회와 갈등을 겪다 남한으로 탈출하는 이야기를 기본 줄거리로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석빈과 소련군 장교 시렌코프( 김승호 )의 딸 쏘냐( 모니카 유 )의 러브스토리와 석빈을 사모하지만 러시아 통역관으로 일하며 소련군에 몸을 바쳐야 하는 정숙( 김지미 )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멜로드라마적인 감정을 영화에 불어넣는다. <두고 온 산하>가 <피아골>에 비해 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 고발적인 태도를 심도 깊은 영상 속에 구현한 리얼리즘적인 양식 속에 멜로드라마, 모험 및 전쟁 영화 등의 다양한 장르적 테크닉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이강천의 연출 스타일이다. 석빈과 쏘냐가 데이트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또한 석빈이 감옥에서 탈출한 영화 중반부 이후 벌이는 도망과 추적의 시퀀스는 이강천이 할리우드식의 액션 장르 연출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즉, <두고 온 산하>는 전체적으로는 리얼리즘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할리우드의 다양한 장르의 관습을 연출 스타일로 끌어들이며 극적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도 <두고 온 산하>가 리얼리즘 영화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시 북한의 실상을 여과 없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보다는 당대의 열악한 제작 여건을 (어쩔 수 없이) 리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물론 거함과 꽤 많은 단역을 동원한 흥남부두 철수 장면만 놓고 본다면 ‘국방부 정훈국’이 제작한 영화다운 스케일을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김승호와 일련의 한국 연기자들이 모형으로 만든 큰 코를 얼굴에 붙여 러시아인인 척 연기하는 모습이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등 여러 영화적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두고 온 산하>는 당대의 영화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제작 여건의 한계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자리한다. 이와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연출은 한국 전쟁 당시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극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 종반부의 장면들이다. 사운드 없이 특히 화면만 남은 다큐멘터리 영상에 후시로 녹음된 사운드를 입혀 영화적 허구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연출은, ‘규모의 스펙터클’이 불가능했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당시 영화인들의 악전고투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두고 온 산하>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서구(또는 근대)에 대한 당대의 분열적 태도가 러시아의 묘사 속에 그대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방식이다. <두고 온 산하>는 남한 사회의 체제적 우월성을 굳이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의 억압적 사회 체계의 부정적 면모를 부각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로서의 남한 사회를 자연스럽게 이상화, 합리화하는 쪽에 가깝다. 북한과 남한의 극단적 비교는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정적 화법’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다. <두고 온 산하>는 석빈과 쏘냐의 로맨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정숙의 비정숙한 삶의 태도를 반복적으로 대조한다. 러시아군에게 강간을 당했던 정숙은 오히려 러시아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어 그들을 몸으로 유혹하며 살아가는 여성이다. 즉, 정숙은 러시아적 삶의 태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타락한 여성인 셈이다(영화 후반부에 정숙의 이러한 태도가 위장이었고, 그녀의 진심은 전혀 달랐음이 드러난다). 그 대척점에 있는 러시아 장교의 딸 쏘냐는 자유와 순수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석빈과 쏘냐의 연애 장면이 할리우드 청춘영화에 영향을 받은 동경의 대상으로서 자유로운 이상적 사회의 구현처럼 보인다면, 러시아적 삶에 익숙해진 정숙이 북한군 장교를 유혹하는 등의 장면 등은 전형적인 타락한 여성/서구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는 서구에 대한 우리의 양가적이고 분열적 태도, 그러니까 서구에 대한 동경과 불안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고 온 산하>가 그려낸 북한의 이미지는 서구에 대한 남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 즉 ‘우리 안의 타자’를 투영한 결과다. 이러한 면에서 <두고 온 산하>는 우리가 북한의 이미지를 통해 만나게 되는 대상은 결국 우리 안의 타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두고온 산하> VOD 보러가기 →
한국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기록들을 살펴본다면, ‘1964년 겨울’은 매우 중요한 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7인의 여포로>(검열후 <돌아온 여군>으로 제명 변경)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북괴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던 일련의 사건은 1964년 12월 11일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지속되었으며,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권력을 독점한 국가 권력의 존재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이만희를 구속시켰던 법률적 근거는 ‘검열법’이 아니라 ‘반공법’이었다. 하지만 검열이 단지 법률 조항의 위반 문제만이 아니라 상상의 범위를 제한하고 실천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권력 효과의 문제라고 봤을 때, 1964년 겨울,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은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 감각을 설정하는 동시에, 영화의 재현 가능성의 범위를 규정한 문제적인 검열 사건이었다. 중요한 점은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검열이 단선적이거나 일관된 논리로 점철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4.19 혁명의 정치적 열망을 일부나마 군부 정권의 통치성 내부로 포섭하려했던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반공영화’라 할지라도 체제의 우월성을 기계적으로 선전하는 차원을 넘어 이념 대립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나아가 냉전 체제의 모순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1) 그러나 1964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민적 저항(6.3 학생운동)을 법질서를 중단하는 계엄령을 통해 무화시키는 순간은 박정희 체제의 통치 전략이 근본적으로 수정된 시점이었다. 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내적인 논리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데, <7인의 여포로>(1965)와 <남과 북>(1964)의 검열 과정은 그 분기점을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은 영화 검열을 둘러싼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이 작품은 <7인의 여포로>와 함께 반공영화의 가능성과 표현의 임계를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관객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던 해당 영화는 이념을 초월한 사랑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는데, 신파적인 감성으로 넘쳐나는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은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반공영화에서 공산주의자가 인격이 소거된 채 성격화되지 않은 인물로서 그려졌다면, <남과 북>에서는 사랑을 찾아 전선을 넘어온 공산주의자 장일구 소좌(신영균)의 내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산주의자를 재현하는 방식 또한 매우 극적으로 전환되게 되는데, 이는 이산 멜로드라마의 문법이 반공영화에도 적용됨으로써 공산주의자에 대한 영화적 표상이 달라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전환의 과정은 북한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북한에 대한 발화를 금기시했던 이전 시기와 달리 “북한에 대한 유동적인 지식 일반의 흐름을 관장하고 주시하는 가운데 최종적인 유통 여부와 진위를 판별하여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는” 2) 방식으로 체제가 변화된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 1] 영화상영 허가신청서 어찌 보면 매우 불온한 영화가 어떻게 검열에 통과될 수 있었을까.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검열 문서철을 보면, <남과 북>은 극동흥업 주식회사의 이름으로 1964년 11월 11일 ‘영화 제작 신고서’와 ‘배역 명단’ 및 전속배우 활용에 관한 요강을 준수한다는 ‘서약서’가 공보부에 제출되면서 제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원작자인 한운사가 직접 각색을 하고, 극동흥업의 사장인 차태진이 제작을 맡아 만들어진 영화는 1964년 12월 8일에 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제작 기간은 약 한 달이 못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사 검열을 위해 제출된 필름은 총 35미리 12권 8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검열을 위해 원본 네거티브가 제출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복사본을 모두 포함하여 8편의 필름이 제출되었다는 점은 해당 영화에 대한 제작사의 흥행 기대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서철을 통해 볼 때, 상영 허가를 위해 실사 검열이 신청된 일자는 1964년 12월 29일이고, 검열이 완료된 시점은 12월 31일이었다. 상영허가가 유효한 기간은 검열이 완료된 시점으로부터 1년이기에, 영화는 1965년 12월 30일까지 8편의 복사본에 대해 상영 권한을 갖게 된다. 박정희 체제의 검열 권력을 사유하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화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이념을 초과한 사랑이 서사의 중심으로 제시되면서 북한과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특히, 영화를 이끌어가는 신영균(장일구 역)의 스타 페르소나는 스크린의 안팎에서 민족계몽을 이끄는 지도자이자 개발주의적 근대화를 이끄는 실천가, 영웅적인 국군이자 미성숙한 군인들을 남성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소비되었던 만큼, <남과 북>의 공산주의자 형상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점은 이와 같은 영화적 표현이 당대의 검열 과정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림 2] 영화검열 기안지 #1 기안지(1964년 12월 31일) 기안자 : 공보부 영화과 행정주사 이달형 기안년월일 : 1964년 12월 31일 (중략) 제한사항: 화면 2개처, 대사 6개처 [그림 3] 전언통신문 #2 전언통신문(1964년 12월 31일) 송화자 : 중앙정보부 5국 보안과 김 조정관 수화자 : 영화과 행정사무관 이영희 국산극영화 <남과 북> 검열의견 통보 극동흥업주식회사 제작 <남과 북>에 관한 검열 의견을 다음과 같이 통보하오니 허가에 반영조치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제한 요청사항 가. 보초가 “신세한탄”하는 대사 삭제 나. 장일구 대사 중 “목숨 걸고 애인 찾는다.” 삭제 다. 이 대위 대사 중 “어떤 …38선” 삭제 라. 미군대위 나오는 화면 전체 삭제 마. 장일구 대사 중 “북녘하늘 어머니 돌려보내주시요” 삭제 바. 장일구와 이 대위가 “어깨동무하고 술 먹는 장면” 화면 삭제 검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해당 영화는 대사 6개 처와 화면 2개 처를 삭제하는 것으로 검열에 통과된다. 기안지와 전언통신문 사이에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이는 문서 작성 과정에서의 실수로 보인다. 제한 요청 사항을 분석해보면,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해석상의 문제가 야기되는 부분은 대사가 삭제되나, 미국이 등장하는 장면과 장일구와 이대위(최무룡 분)가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마시는 장면은 화면이 전체적으로 삭제된다. 이는 ‘감상적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서 민족 개념을 분화하고 전유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통치 전략이 검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영화는 관람등급 신청에서도 별다른 제한 사항 없이 ‘국민학교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는다. 즉,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 규범 아래서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좇는 한 인간으로서 공산주의자를 그리는 방식은 당대의 검열 기준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영화는 1965년 1월 1일에 개봉한 후 11일 만에 6만 관객을 돌파하여 1965년 1월 21일에 복사판 상영 허가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화가 상영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해당 영화는 갑작스럽게 문제적인 작품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림 4] 내무부 의견서 <남과 북> 내무부 의견서 수신처 : 공보부(1965.2.5)/결재(2.8) 치안국장 귀하 영화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남과 북”(아카데미 극장 상영 중) 줄거리 38선에서 괴뢰 소좌가 애인을 찾아 투강하여 왔으나 그녀는 이미 국군 대위와 결혼한 처가 되고 말았으며 이 사실로 인하여 국군 대위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소좌는 자살하고 국군 사단에서는 소좌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단장 이하 뒤흔들리는 설명 영화임. 영화 감상 후 나의 의견 1. 괴뢰 소좌는 자유를 동경하여 투강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관계로 투강하였으며 동괴뢰 소좌는 남성적이고도 용감하며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 성으로 묘사되었고. 2. 투강장교 1명으로 말미암아 전 사단이 휘둘리는 것은 국군의 위신에도 관계가 있고 3. 괴뢰 소좌에 비하여 국군대위는 연약성이 엿보이고 있음. 결론 본 영화 괴뢰 소좌를 동 영화의 주연으로 등장시켜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영웅화한 스토리임으로 수준이 얕은 대중 에게는 결과적으로 괴뢰군의 훌륭한 것만을 남기게 될 우려가 있고 또한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예술공세에 있어 노골적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데에 부합되는 느낌이 있었음 . - <남과 북>, 검열 문서철.(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1965년 2월 5일, 내무부에서는 공보부 치안국장에게 <남과 북>과 관련하여 의견서를 제출한다. 의견서에는 해당 영화가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사용하는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는 소견을 담고 있다. 문서 작성자는 전선을 넘어 온 “괴뢰소좌”가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이라는 점과 “투강 장교 1인에 전 사단이 휘둘리게” 묘사한 점 그리고 괴뢰소좌에 비해 국군대위가 연약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그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다. 이는 중앙정보부에서 검열을 실시한 이후 명기한 ‘제한 요청사항’과도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구도와 배우의 페르소나 자체를 의구심에 부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다. 당시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고 활발히 상영 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남과 북>은 1965년 2월 5일에 이르러 ‘불온한 텍스트’로서 발견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의 불온성이 누구에게 소구되는가라는 문제와 남성성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는 “수준이 얕은 대중”에게 “연약성을 엿보이는” 국군과 대조적으로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인 “괴뢰소좌”를 부각시킴으로써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내무부에서 갑작스러운 의견서를 공보부에 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65년 2월 5일은 이만희 감독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이 제출된 날이기도 하다. 영화에 각인된 성별화된 이미지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법률적인 문제로 전환시킨 해당 공소장으로 이만희는 긴급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례적인 내부무 의견서는 그래서 단순한 요식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무부 의견서가 상당한 수준의 의혹을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 대한 추가적인 제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미 상영 중인 작품의 제작자들에게 용공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지 않았나하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후 1965년 4월 22일, 제작사는 영화의 추가 상영을 위한 16미리 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그에 따른 검열 당국의 입장은 해당 영화가 “1964년자 당부 허가번호 제3595호로 신규상영 허가된 바 있는 영화”이기에, “상영을 허가하고 별첨 허가증을 교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다. 영화를 둘러싼 이적성 혹은 용공성 시비는 일단락된 듯 보이나, 4년이 지난 1969년 1월 13일, 정익진이라는 사람의 탄원서가 제출되면서 또 다시 시비에 휩쓸리게 된다. 영화는 1968년 5월 29일 재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신청자는 합동영화주식회사의 곽정환으로 되어 있다. 검열 후 제한사항은 “본편 영화 신규 검열시와 같음(화면 단축 2, 대사 삭제 6)”이라는 판정을 받고 상영이 허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재상영되는 국면에서는 해당 영화가 홍보 수단으로 삼은 ‘전장 실화에 기반한 영화’라는 문구가 문제로 부각되게 된다. [그림 5] 영화상영허가확인의뢰, 국방부 문서, 극영화 “남과 북” 검열 합격에 관한 확인 통보 국방부 1969.1.13. 수신 정익진(서울시 용산구 *****) 제목 전장 실화 전사 확인 건 귀하가 1968. 12. 30부로 제출한 육군 제 9사단 전장실화 확인 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신함. 질문: 1953. 4. 18 중부 전선 제9사단에 괴뢰군 소좌 장일구가 자기 사단의 총공격 작전 명령지도와 보급창고의 위치도를 가지고 귀순한 사실 여부에 대한 전사기록상의 확인. 장익진이라는 이가 제기한 탄원에 대하여 국방부는 전사기록상에 그와 같은 기록이 없음을 확인 후 이를 통보해준다. 이후 그는 “이 영화가 1965~1969년 현재까지 전국에 상영 중인데 내용상 ‘1953. 4. 18. 휴전 전 제 9사단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자막(S#4)에 크게 박아 선전하고 있는데 공보부 검열 허가 시 이 허위조작 여부를 어떻게 검토하여 허가하였는지”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또한 “국방부 검열관계는 어떻게 행정처리가 됐는지 여부”를 회부해주기를 요구하면서 행정 당국의 검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근거로 검열 합격을 취소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검열 당국이었던 공보부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실화를 근거로 하여 극화된 것이거나 순전한 픽션으로 구성된 것인가의 여부”는 개의치 않고 “영화 제작자가 영화법에 제정한 절차에 따른 요식행위를 구비하여 검열 신청한 경우 그 내용이 관계 규정(검열기준)에 저촉되는가를 검토하여 검열합격 여부를 결정, 시행”함을 밝히며, 검열 과정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린다. 그러나 해당 소원은 영화가 전사(戰史)를 위조하여 제작되었음으로 이를 제작한 자들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용공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검열 합격 취소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사건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1970년 6월 12일에 이르러 소원의 취지가 불분명하고 소원의 기한이 말소되어 허무하게 기각된다. 한 개인의 탄원으로부터 시작된 1969년의 용공시비는 해프닝으로 끝이 났으나 이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개인이 이를 전유하여 국가의 검열 절차를 문제 삼음으로써 국가의 의도를 초과하여 구성된 과잉된 반공적 주체성의 곤란함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1. 이에 대한 논의는 졸고, 「반공의 감각과 불화의 양식 – 박정희 체제 하의 ‘반공영화’를 읽는 방법론에 대한 고찰」, 2015년 1월 극예술학회 발표자료집 참조. 2. 4.19와 5.16 이후의 시간 속에서 북한에 관한 언설들에 가해진 극단의 공포정치(조용수의 필화사건)와 달리 북한에 대한 논의 자체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해 볼 때, 박정희 체제는 “북한이라는 정체에 대해 적어도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접근을 요청”했으며, 북한에 대한 지식과 표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관리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 장세진, 「원한, 노스텔지어, 과학」, 『사이』 제17호, 도서출판 역락, 2014, 147-150쪽.
청계천 복원사업은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무수한 사연을 쌓아왔던 공간은 세파를 겪으며 모양새를 고쳐오다, 급기야 산업화 열기에 덮여 버렸다. 하층민의 눈물도 판잣집과 함께 밀려났다. 2005년 다시 얼굴을 드러낸 청계천은 이름처럼 맑아, 금세 관광명소로서 도시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물줄기와 다른 거대한 인공의 모형이었다. 복잡다단한 서울의 단면으로써 바라보노라면 미묘한 심상이 이는 까닭이다. 김경묵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청계천의 개 >가 제작될 즈음은 청계천의 낯선 인공성에 막 적응해 가려는 참이었다. 영화 속 도시는 서울이었지만, 그것은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때 새마을운동이라 불렸던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고 있는 건설의 땅, 마초와 공안이 들끓고 있는 감시의 도시. 영화는 그곳에 머물러 있는 가련한 영혼에 마법처럼 줌인해 들어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환상성은 압도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영화를 내내 지배한다. 인어의 전설을 구슬프게 읊조리는 가운데, 카메라는 일렁이는 물결을 넘어 폭포에 다다랐다, 저 멀리 바라보던 인어를 담는다. 이내 프레임은 고정되고, 액자 밖의 공간으로 나아가 흐느끼는 사람을 만난다. 기괴한 행동을 보이는 그/그녀가 섹슈얼리티에 도취하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틈입한다. 단박에 들어도 폭력적인 소음은 명시적인 협박을 남긴 채 사라진다. “넌 내가 될 수 없어, 영원히.” 되고자 하는 욕망과 가로막는 권력 사이에서 우리는 그/그녀와 함께 꿈결 같은 영화 속으로 깊숙이 미끄러진다. ‘지금도 꿈인지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내레이션의 고백이 암시하듯 < 청계천의 개 >의 시공간은 좀체 가늠하기 어려운 초월성을 갖고 있다. 인물이 놓인 공간은 익히 알고 있는 도시이지만, 그것의 리얼리티를 주장하기 어렵다. 때문에 타이틀이 말하고 있는 ‘청계천’은 앞서 언급한 2005년 복개된 청계천과 같지 않다. 어쩌면 무관하다 보는 것이 더 옳겠다. 영화는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의 세계를 분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자는 인어의 전설을 꿈꾸듯, 또 다른 자신을 욕망한다. 본디 사진 속에 갇혀 있던 원형적 욕망은 방 안에 머물다, 어떤 자극 이후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후부터 영화는 그/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혹은 성장하는 수행적 성찰적 로드무비로서 기능한다. 세계에서 그/그녀는 많은 이들을 만나고, 사건을 겪는다. 처음에 그는 장님이었고, 우연히 말하는 개를 만난다. 개를 풀어주는 대가로 눈을 뜨고 호감의 대상을 찾지만, 그때부터 공안의 집요한 표적이 된다. 쫓기는 가운데 다다른 곳은 명품이 즐비한 땅, 자본은 그/그녀를 구분치 않고 소비를 부추긴다. 남자는 그렇게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그녀의 욕망은 곳곳에서 시종일관 위태롭다. 위협의 시선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도망 길은 끝이 없고 아득하며 미로와 같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어지럽게 오가는 < 청계천의 개 >는 파격적인 이미지와 형식적인 실험, 주술적 캐릭터의 등장으로 내러티브를 한없이 해체한다. 하지만 반대로 분명한 서사구조 아래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자가 된 여자가 괴물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은 남자가 방안에서 벌이는 은밀한 폰섹스와 오버랩 된다. 눈을 뜬 남자는 이 두 가지 정사씬을 끔찍하게 내려다본다. 그의 욕망의 이곳과 저곳은 결국 감시와 통제, 권력이 허용하는 그곳까지였던 것이다. 기묘한 아이러니를 통과하며 남자는 자신이 해방되지 못한 결여된 주체임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작품에 오프닝과 엔딩은 치밀한 대구로서 영화의 비전을 증명하고자 한다. 장님인 채 밀고 갔던 페인트 길은 세계를 통과하고 만신창이가 된 남자 앞에 다시금 나타나 방향을 제시한다. 좁은 길을 묵묵히 통과한 후 물에 이르러, 그/그녀는 함께 청계천의 폭포 앞에 서 있다. 인공의 물은 가짜이지만, 그 또한 세찬 폭포를 일군다. 거대한 모형을 지그시 바라보는 뚜렷한 주체적 시선이야말로, < 청계천의 개 >가 말하고자 하는 장대한 각성의 시작이리라. 영화는 욕망을 금기하는 낙인이 선연한 사회의 심연을 스크린에 투사한 후, 주체에게 초현실적인 체험을 겪게 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일깨운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도전은 거칠지만 파괴적이다. 감독의 내레이션은 마지막으로 영화 속 충격을 정서적으로 매만진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 속에 세계를 액자에 걸어두고, 진짜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역시 영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치 그가 ‘깨어나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