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 감독
-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자크 비두, 안느 크라프츠-타르나프스키
지난 8월 ‘영화와 공간: 홍콩’ 프로그램이 총 9,212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리에 마쳤다. ‘성공’이라는 말을 부연하기 위해 숫자를 동원해보면, 본 프로그램의 경우 317석의 시네마테크KOFA 1관에서 총 33회 상영했으니 평균 좌석점유율은 86.2%라 할 수 있다. 지난 주말(9월 3주)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한 작품은 < 살인자의 기억법 >이며, 주말(금~일) 평균 좌석점유율은 21.8%이다. 두 숫자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다. 이 글은 이 ‘성공’ 뒤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이자 때로는 가혹하기까지 한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램 담당자에 대한 이야기다. 2015년부터 특정 도시를 다룬 영화를 한데 모은 ‘영화와 공간’ 시리즈를 매 여름 선보이고 있는데, 우디 앨런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뉴욕 시리즈에 이어 올해 홍콩을 다룬 본 프로그램은 시네마테크KOFA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딱 떨어지는 주제에 유명 감독의 대표작으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수급이 일견 수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고전이라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젊고, 신작이라기에는 이제는 나이 들어버린 8, 90년대 작품이 주를 이루는 본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것은 그리 쉬운 편에 속하지 않는다. 하물며 한국영화 산업만큼 부침이 심했던 홍콩영화계는 저작권자를 찾거나 상영본을 수급하는 측면에서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와 공간’을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홍콩은 항상 마음속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도시였지만,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이런 고민 중에, 2016년 여름 한 통의 전화가 운명처럼 걸려왔다. 시작은 이러했다. 홍콩의 중국 반환 20주년을 기념해 홍콩특별행정구는 2017년에 글로벌 문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홍콩영화 세계 순회 상영을 계획하고 있었다. 본 특별 상영회의 실무를 맡은 홍콩국제영화제의 로저 가르시아 집행위원장은 당시 한국의 로컬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나는 ‘영화와 공간: 마틴 스콜세지 인 뉴욕’의 준비를 막 끝내고 내년 기획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이 얼마나 운명적인 만남인가? 어느 PD님의 소개로 부천에서 만난 우리 둘은 서로의 프로그램이 잘 맞아떨어진다며 기뻐하며, 자세한 건 이메일로 연락하자는 인사와 함께 흡족하게 미팅을 마치고 헤어졌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게 웬 행운이냐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이 운명의 이면에 그만큼의 고난이 함께 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다른 기관과 공동으로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낸다는 것은 같은 작업을 혼자 단독으로 하는 것에 비해 몇 배의 수고스러움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번 ‘영화와 공간: 홍콩’은 특히 이 사실을 더욱 혹독히 깨닫는 과정이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넋두리하자면 이렇다. <메이드 인 홍콩> DCP 수급으로 다급했던 26일의 흔적 첫째, 하루에도 수십 통씩 주고받는 이메일 폭탄이다. 2016년 겨울로 접어들면서 ‘영화와 공간: 홍콩’의 기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가르시아 집행위원장과 서로 적당한 작품을 추천하며 상영작 선정 작업을 마무리할 때쯤, 그와 내 메일에는 점점 한 명씩 참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프로젝트는 홍콩과 중국 내 4개 도시를 제외하고도 전 세계 10개 도시가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당연히 실무를 맡은 홍콩국제영화제 위원회는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감당하기 위해 집행위원장 외 기획은 물론 예산, 홍보, 상영본 운송 등을 담당하는 여러 명의 스태프가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영화와 공간’ 프로그램을 맡은 한국영상자료원의 담당자는 단 한 명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나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자세하게 소개할 일이 있겠지만,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램의 업무 프로세스는 영화제 프로그램팀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영화제가 기획부터 프린트 수급까지 단계별로 세분되어 분업화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반면, 이곳은 한 명의 담당자가 하나의 프로그램 전체를 관할하는 개별 책임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A라는 프로그램을 맡은 담당자는 A의 기획부터 상영작 선정은 물론 배급사에 연락해 상영료를 지급하고 상영본을 받는 작업까지 모두 담당한다. 그것뿐이랴. 시놉시스 정리부터 포스터와 리플릿을 어떻게 만들지, 한국어 자막을 대여할지 제작해야 할지를 확인하고, 개막식과 같은 부대 행사라도 진행하게 되면 게스트 섭외부터 심지어 개막식 사회자 대본 작성, 리셉션의 음식 메뉴까지 정해야 하는, 말 그대로 해당 프로그램의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홍콩국제영화제의 Tiffany, Pearl, Lemon, Shing, Nichol 등 몇 명의 담당자가 돌아가며 하루에도 수십 통의 이메일로 자신의 업무를 전달하고, 확인을 요청하면 우리 쪽은 담당자 혼자 그 모든 것을 결정하고 회신하고, 기안을 올리는 데 허덕여야 했다. 더군다나 본 프로그램 준비가 한창이던 올해 초는 ‘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를 마감하고, ‘시네마테크KOFA가 주목한 2016년 한국영화’와 ‘로버트 알트만 X 폴 토마스 앤더슨’을 막 시작할 때라 아침에 출근해서 쏟아지는 메일에 회신을 보내고, 수십 개의 기안을 올려 업무를 처리한 후 퇴근해도 다음 날 출근하면 다시 산더미처럼 똑같은 업무가 쌓이는 <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해롤드 래미스, 1993)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라 업무 강도가 평소 몇 배로 높았다. 둘째, 고난의 절정은 프린트 수급이었다. 앞서 말했듯 ‘영화와 공간: 홍콩’은 전 세계 10개 도시 순회 상영회의 일부이다 보니 몇몇 작품의 상영본은 다른 도시에서 상영한 직후 서울로 들어오기도 하고, 서울 상영 후 다음 도시로 바로 출고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말인즉슨 프린트 수급 일정이 매우 빠듯함을 의미한다. 통상 상영본은 최소 2주 전에는 입고되어 검수 과정을 거친 후 상영이 되는데, 이번 프로그램의 경우 상영 바로 며칠 전에 상영본이 입고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기획 초반부터 < 순류역류 >(서극, 2000)의 경우 디지털 복원은커녕 홍콩 내에서도 상영 가능한 필름 프린트를 찾기 어려웠다.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파리의 시네마테크프랑세즈에서 불어 자막본 35mm 프린트를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네마테크프랑세즈에 프린트 대여 협조를 요청하자 프린트 손상을 문제로 두 가지를 조건으로 대여를 허락했다. 하나는 상영을 단 1회로 제한하며, 나머지 하나는 상영 전 프린트 체킹 폼을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실제 프린트 검수를 담당하는 영사실에 이 사실을 알리자 난색을 표했다. 유럽의 경우 프린트 체킹을 사전에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프린트의 스크래치와 손상 정도를 일일이 기록함으로써 상영 전후의 손상 여부를 파악하고, 책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프레임 하나하나를 꼼꼼히 봐야 하는 이 과정은 보통은 몇 시간에서 프린트 손상이 심한 경우 며칠이 걸리는 수도 있는 작업이라 영사실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최소한 상영 일주일 전에는 프린트를 받아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영사실의 당부에 우리보다 앞서 상영하는 베를린 측에 상영 직후 바로 프린트를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기다리던 중, 7월 20일 페덱스로부터 드디어 연락이 왔다. <순류역류> 35mm 프린트가 인천 세관에 입고되었으며, 통관 심사에 걸려 있으니 필요 서류를 제출하라는 메일이었다. 해외에서 상영본을 수급할 때 인천 세관의 통관 심사에 걸리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이럴 경우 상영 후 원 귀속자에게 재반출됨을 증명하는 서류와 국내 통관을 위한 담보 설정 절차를 진행하면 된다. 서류를 모두 준비해 보내자 통관 절차를 시작하겠다는 답변과 함께 한국영상자료원의 다른 물건 중 하나의 관세 납부가 완료되지 않았으니 이 부분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페덱스로부터 받았다. 확인해 보니 다른 부서 담당자가 최근 해외에서 수집한 프린트가 있었는데, 아직 관세 납부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담당자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를 넘겼다. 통관은 보통 하루 정도 걸리기에 7월 21일에 통관이 완료되리라 예상하고, 주말인 22일과 23일에 영사실에서 프린트 검수를 할 수 있도록 페덱스에 토요일(22일) 특송을 요청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프린트가 일찍 도착해 다행(상영은 7월 29일이었다)이라고 생각하며 주말을 보낸 뒤 24일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영사실 담당자에게 프린트 상태를 물었다. 그런데 맙소사! 토요일에 프린트가 배송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잔뜩 화가 나서 페덱스에 전화를 걸었다. 왜 특급 배송이 이루어지지 않았냐는 항의에 페덱스의 답변을 듣고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부서의 관세 미납 탓에 <순류역류> 프린트가 아직 세관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해 통관 업무를 처리해 왔지만, 같은 사업자의 경우 한 건의 물건이라도 관세가 미납된 상태라면 나머지 다른 물건 역시 서로 상관관계가 없어도 억류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부랴부랴 해당 담당자에게 24일 중으로 관세를 납부해달라고 다시 한번 요청하고, 페덱스에 사정 설명을 했다. 다행히 25일 화요일 오후에 <순류역류> 프린트가 극적으로 상암동에 도착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다음 날 더 큰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드 인 홍콩> 외장하드만 빈 채 도착한 패키지 최대 위기는 ‘영화와 공간: 홍콩’의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26일에 터졌다. 큰 규모의 부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같은 부서는 물론 다른 부서 직원들까지 많은 도움을 주지만, 개막식 당일은 홍보물 데코레이션부터 리셉션 세팅, 개막식 리허설까지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오전부터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오후, 영사실로부터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오전에 도착한 < 메이드 인 홍콩 >(프루트 첸, 1997) DCP 외장 하드 박스를 열었는데, 하드 디스크가 없다는 것이다.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영사실로 뛰어 가보니 박스 안에는 하드 디스크 케이스부터 연결 잭까지 모든 것이 다 완벽히 들어 있지만, 정작 하드만 보이지 않았다. <메이드 인 홍콩> 상영은 약 26시간 후인 다음 날 오후 7시였다. 홍콩국제영화제의 필름 트래픽 담당자인 Shing에게 바로 메일을 썼다. 그 역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야 누가 이 황당한 상황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마치 메신저를 하듯 실시간으로 몇 번의 메일이 오가다 안 되겠다 싶어 하드만 쏙 빠져 있는 박스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Shing은 나보다 더 놀란 듯했다. 서울과 홍콩, 그리고 이전 상영 기관이었던 베를린, DCP 원본을 보유하고 있는 우디네 담당자들이 모두 참조된 상태에서 사태 파악하기 위해 서로 메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황인즉슨 베를린에서 상영을 하기 위해 DCP 하드를 영사기에 삽입해 파일을 복사한 뒤 하드를 빼지 않은 채 박스만 패킹해서 서울로 보낸 것이다.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백업 상영본으로는 DVD도 아닌 한글 자막 제작을 위해 모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초저화질 파일밖에 없었다. 만약 DCP를 받지 못한다면 다음 날 상영은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Shing은 우디네 측에 DCP 원본 파일을 이메일로 전송해달라고 요청했지만, 200기가가 넘는 용량의 파일이 정상적으로 들어오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마침 개막식 참석을 위해 극장에 도착한 가르시아 집행위원장도 이 황당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망연자실한 우리 둘과 달리 Shing은 재빨리 또 다른 대안을 제안했다. 홍콩에서 보유하고 있는 또 다른 DCP를 오늘 밤 항공 특송으로 발송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같은 아시아권이라지만, 반나절 만에 패키지를 받기도 어려울뿐더러, 세관에 걸리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눈앞은 깜깜했지만, 준비된 행사는 치러야 했기에 7시에 예정대로 개막식을 시작했다. 마치 기품 있는 실내악이 흘러나오는 파티장에서 긴박한 스코어가 중첩되어 흐르는 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이제 만 하루도 남지 않았다. 개막작 < 매드 월드 >(웡 춘, 2016)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뒷마무리를 하고 파김치가 되어 사무실로 돌아오자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메일을 여니 정말로 이탈리아로부터 200기가짜리 대용량 파일 링크가 도착해 있었다. 우선 전송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것저것 서류 정리를 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파일 전송 상태를 확인해보니 겨우 3%밖에 되지 않았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링크로 파일을 받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날 밤 홍콩에서 출발한 또 다른 DCP가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오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더는 앉아 있을 기력도 없어 컴퓨터를 켜 둔 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DHL 운송 내역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홍콩에서 출발한 DCP가 정말로 인천에 도착해 있는 것이 아닌가? 희미하게 희망이 보였다. DHL 통관팀에 연락해 혹시라도 세관 통관에 걸리게 되면 우선 물건부터 받은 후 통관 절차를 신청할 수 있도록 미리 협조를 구한 뒤 출근했다. 출근 후, 회의를 다녀오니 기적처럼 내 책상 위에 “EXPRESS 12:00”라고 크게 쓰여 있는 노란 DHL 패키지가 놓여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그렇게 그 날 오후 7시, 4K 디지털 복원된 <메이드 인 홍콩>이 시네마테크KOFA에서 무사히 상영되었다. 기적과 감동의 “EXPRESS 12:00” 지금까지 ‘영화와 공간: 홍콩’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 시네마테크KOFA의 프로그램 기획부터 영화가 스크린에 걸리기까지의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았다. 이토록 길게 넋두리를 한 이유는 어쩌면 어떤 관객은 스크린 뒤에 보이지 않는 이 과정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그램 담당자 역시 남모를 고충이 있으니 조금은 잘 봐달라는 애교 섞인 투정이라고 바라봐주길 바라서이다. 이번 ‘영화와 공간: 홍콩’도 담당자인 나 역시 꼭 보고 싶은 영화도 많았고 더 나은 매체로도 상영하고 싶었지만, 여러 현실적인 여건상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좌절감이 들 때도 있고, 이게 뭐라고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구는 걸까라며 스스로를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역시 시네마테크KOFA를 찾는 관객처럼 영화를 사랑했기에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인지라 그간 쌓였던 피로와 열패감은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순간 사그라든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난 앳된 얼굴의 장국영을 마주할 때 극장 안에 흐르던 그리움의 공기와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꽉 찬 객석을 바라볼 때, 그리고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램 덕분에 이번 여름이 행복했다는 관객의 짧은 후기를 확인하는 순간, 그래도 이 일을 선택하길 잘 했다는 보람을 느끼고, 다음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부산의 독립영화계에 200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들은 30대 전후의 젊은 감독들이고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조성봉 감독이 제주 4.3 학살에 대한 도전적인 기록인 < 레드 헌트:빨갱이 사냥 >(1997), < 레드 헌트 2: 국가범죄 >(1999)를 제작했고, 계운경 감독이 장애 여성의 사랑과 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 팬지와 담쟁이 >(2000)를 만들었다. 기채생 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부산, 광주 등의 지역 인디씬의 성립과 변화, 와해의 지점을 오랜 기간 기록했다. 새롭게 등장한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주축이 된 집단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나 시점에 차이가 있고,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수사에 대한 생각도 다르지만 부산독립다큐멘터리의 층이 세분화되는 지점은 이들로 인해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오지 필름’은 박배일 이 주축이 된 집단으로, 이들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현장에 찾아가 함께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 박배일은 <제제에게 가는 길>(2007), <내 사랑 제제>(2008), < 나비와 바다 >(2013)를 통해 장애인의 연애와 사랑,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면서 그들의 곁을 지켜보았다. 소외된 이웃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들만의 크리스마스>(2007), < 잔인한 계절 >(2010)은 이웃집 할머니, 분주한 도시의 후미진 곳에서 노동하는 환경미화원의 열악한 삶을 통해 한국사회의 시스템이 못 본 척 지나치는 그 지점을 찾아가 새벽과 밤의 시간을 공유하고 기록했다. 이후 박배일은 다른 지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옴니버스로 제작한 4대강 문제, 제주 강정 마을의 문제 등을 담은 영화를 거친 후에 < 밀양전 >(2013), < 밀양 아리랑 >(2014)에 이르렀다. 밀양 송전탑 설치를 맨몸으로 막기 위해 산을 오르는 밀양의 할머니들과 함께하기 위해 밀양에 머물면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몸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할머니들의 일상적인 삶을 관찰하면서 밀양에서 살아온 시간에 대해 기록하고 증언한다. 박배일의 카메라가 충돌의 현장을 마다치 않고 종횡무진하면서 관찰한 사건들은 한국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기본적인 인권이나 행복하게 살 권리를 함부로 훼손시키면서 공동체의 가치까지 허물어뜨리는지 낱낱이 폭로한다. < 밀양 아리랑 >( 박배일 , 2014) < 악사들 >( 김지곤 , 2014) ‘탁주조합’은 김지곤 과 그의 조연출을 맡았던 오민욱 이 함께 만든 집단이다. 이들은 함께 영화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예민한 영화적 감각을 통해 공간을 새롭게 직조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김지곤은 쇠락해가는 극장을 좁은 영사실을 통해서 바라본 < 낯선 꿈들 >(2008)과 극장 바깥에 존재하는 삶의 터전을 기록한 < 오후 3시 >(2009)를 통해 사라질 공간, 매혹으로서의 극장에 대해 접근하는 그의 감수성을 드러냈다. 이후 제작된 < 할매 >(2011), < 할매-시멘트 정원 >(2012) 연작은 우연하게 만난 산복도로의 할머니들의 삶과 무자비한 도시개발의 파괴력, 그로 인해 흩어져야 하는 할머니들의 친근한 공동체의 와해 과정을 기록한다. 김지곤의 카메라는 할머니들의 자리를 지키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순간을 중심축으로 구성해낸다. < 악사들 >(2014)은 속칭 ‘오부리’라고 불리는 악사들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면서 이들이 다시금 연주를 들려주는 순간을 기록한다. 오민욱 은 < 1987061020080610 >(2008), < 상 >(2012)을 통해 부산민주화운동의 뜨거웠던 투쟁을 과거와 현재의 시점에서 환기시키고 있다. 특히 <상>의 오래된 사물을 통해 그 순간의 기억이 현재 공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존재하는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오랜 기간 인간의 눈과 관심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 놓여 있던 사물을 통해 역사와 기억에 대해 미학적인 접근을 하는 방법은 이후의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 재 >(2013)와 < 범전 >(2015)은 부산의 장소가 어떤 방식으로 제도적 시선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 현재 그곳을 채운 개발의 흔적과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침투하는지를 실험적인 이미지와 바라봄의 체험이라는 감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재 >( 오민욱 , 2013) <사냥>( 김영조 , 2013) 이 외에도 김영조 의 제작사 ‘월요일 아침’은 다큐멘터리의 활성화와 후배 육성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김영조의 < 가족 초상화 >(2007), <목구멍의 가시>(2009)는 가족의 숨겨진 비밀과 가족사를 관통하는 문제들을 통해 한국사회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이 증폭시키는 감정이 인상 깊다. < 태백, 잉걸의 땅 >(2008), <사냥>(2013)은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들을 담백하게 관찰하는 사람 중심의 영화다. 또 현재 영화 제작보다 미디어 운동이나 풀뿌리 운동과 연관된 실천을 중심에 둔 ‘미디토리’의 대표인 박지선의 <전설의 여공>(2012), < 그림자들의 섬 >(2014)을 제작한 김정근 도 빼놓을 수 없다. 새로운 시선과 묵직한 삶이 교차하고, 미학과 정치가 예리하게 맞물리기도 하는 부산의 독립다큐씬의 활력은 감독들의 차기작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 김지곤은 할매 연작의 마지막 편을 제작 중이고, 김정근은 지하라는 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찾아다닌다. 박배일은 막걸리 생탁의 노동쟁의를 기록하고 있고, 오민욱 역시 부산의 잊힌 공간을 부지런히 오간다. 김영조는 영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중이다. 이들의 카메라가 운동으로 향하건, 투쟁이나 사색의 현장을 지칭하건 그들 모두는 부산이라는 지역과 장소를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카메라의 태도에 대해 고군분투한다. * 사진설명: 좌측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박배일 , 김지곤 , 오민욱 감독
우리영화의 사극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녔던 <카메라의 황소>. 고 최인현 감독은 90년 11월11일 타계했다. 영화계의 커다란 대들보 하나를 놓친 셈이 됐다. 인생 무상이 새삼 느껴지는 것은 그가 불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것. 단단한 체격에 늘 머플러를 둘러 메고 싱긋 웃음을 먹으면서 충무로를 거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필름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초부터 75년 이 회사 메이커 허가가 취소 될 때까지 영화 인생 모두를 신상옥 감독과 콤비로 일관한 그는 궁중의 복잡 미묘한 예의 범절은 물론 의상 소품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때를 영화계에서는 신상옥을 주축으로 좌최인현 우 이형표 라고 불렀을 정도. 최감독은 이때 이같은 모든 사극에 관한 것을 노트에 빼곡히 정리, 지니고 다녔는데 아마 지금은 후배이자 콤비였던 이은수 감독이 갖고 있을 것이다 임금 면전에서 물러 날 때는 뒤 돌아서지 않고 마주 한 채 뒷걸음으로 나가야하며 수행할때는 절대로 그림자를 피해 3보 뒤에서 따르되 지위에 따라 좌우로 갈라 서야 한다는 것은 그가 찾아낸 고증이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으나 요즘 가끔씩 제작되는 사극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엉터리가 자주 튀어 나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1962년 < 눈물어린 발자국 >으로 데뷔한 최감독이 활짝 꽃피운 것은 64년 본격적인 홍콩 합작으로 만든 < 달비 >. 중국 발음으로 <달기>라고 개봉한 이영화는 대히트, 대만 홍콩에서도 난리 법석을 피웠다. 당시 약1천만원 (현재 약1백억 추산)으로 신필름이 제작하고 홍콩이 배급을 맡았으며 일본 촬영기사를 데려다 만들었다. 주연은 신영균 과 당시 홍콩의 세계적 스타였던 린 다이 ,그리고 최은희 김승호 가 공연했다. 달기라하면 중국에서 가장 미녀였던 왕비 4명 중 하나로 진나라 때 인물. 반정에서 구사 일생한 왕자가 성장한 후 왕좌 복귀에 성공하지만 사랑하던 공주는 끝내 불에 산화한다는 얘기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곽 세트 등을 지어 불 태움으로써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이 작품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최감독은 < 태조 이성계 >(1965) < 태조 왕건 >(1970) < 이조상노비사 >(1974) < 홍길동 >(1976) < 집념 >(1976) < 관세음보살 >(1978) < 세종대왕 >(1978) < 소명 >(1984)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평생 만들어 낸 영화64편 중 사극만 30여 편이나 된다. 이같은 사실은 학계나 평단에서 깊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얼마전 KBS TV 드라마 < 용의 눈물 >로 공전의 히트를 한 모태이며 < 태조 왕건 >역시 같은 상황이다. 두 작품 모두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 했다는 것은 당시가 그 들의 전성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니까 TV에서 이성계를 연기했던 유동근 이나 왕건 역의 최수종 이 모두 신영균 의 남성미로 그려졌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아끼고 싶어하는 작품으로 < 李箱의 날개 >(1968)와 < 집념 >을 꼽곤 했다. 마지막 작품은 타계하기 6개월전 끝내고 9월달에 개봉한 < 친구야 친구야 >.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드라마틱 하지 않은가. 영화계에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집념>을 꼽는다. 동의보감이라는 제목으로 TV에서 방영했던 것을 원작자이자 각본도 썼던 이은성 씨가 '다시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제작하게 됐었다. 당시 최 감독은 허 준의 초상화까지 입수하여 사실적 묘사에 애를 썼으며 주인공을 맡았던 이순재 에게 이 같은 이미지를 계속 요구하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게 추억담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76년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최감독은 당시 '사람이 뜻을 세우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소신을 성취하는 인물상을 그리는 게 영화감독의 사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에 대한 해박한 현장 이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내색치 않았으며 평소 넉넉한 품새로 일관, 생활이 어려워 고양군으로 이사를 한 말년에도 낡은 차이지만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곤 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현장에서는 호랑이로 돌변, 한치의 착오도 용납치 않았다. 특히 수백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는 몹신(군중 장면)에 일가견을 가져 동료 감독들이 지원을 요청하면 흔쾌히 현장에 달려 가는 의리파이기도 했다. 80년이던가. 동남아 취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머무를 때일 게다. 느닷없이 최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서울에서는 TV만화 <캔디 캔디>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대인기인데 만화가를 만나서 영화화 권을 얻어다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그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단지 무기가 있다면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국제 저작권 연맹에 가입이 되지 않아서 거절하면 일방적으로 만들겠다고 얘기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작가 찾기에 나섰다. 물어물어 작가와 통화를 하니 여자가 아닌가. 만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는 자기이지만 판권은 출판사와 만화 영화사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결국 레스토랑 저녁 식사 대접에 근사한 외국인 전용 스탠드바에까지 가며 설득 끝에 다음날 판권을 얻어냈지만 자신을 꼭 촬영 현장에 초청해달라는 부탁이 첨부됐다. 귀국해서 보니 웬걸. 최감독과 스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만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는 우리 영화사상 드물게 흥행이 안되던 시기. 이를 어린이영화로 뚫어 보자는 기획이었으나 첫날만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뿐 파리를 날렸다. 겨우 본전 조금 넘겨 막을 내렸는데 이때 주연을 한 배우가 나중에 탤런트가 된 최선아이다. 물론 일본 작가에겐 전화로나마 사정해서 빌 수밖에. 그런데 그 작가가 오히려 위로를 하는게 아닌가. 일본에서 이미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후 그녀는 친구처럼 되었는데 90년 이후 신문사 간부가 된 이후로는 일본에 들러도 하루 이틀만에 돌아오니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도 슬하에 자식을 둔 할머니가 됐으리라.. 최감독은 1928년 10월 24일 생이니 생존했으면 75세이다. 경남 진주 태생으로 집안이 부호였다. 진주 농대를 나와 고등학교 교편 생활을 하다가 영화계에 입문한 ,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모두 고인이 된 소설가 이병주씨, 테너 섹스폰의 달인이었던 이봉조 씨와 동문이기도 하다. 사극 전문이니 그럴 법 할 것이라고 들 생각하겠지만 작가 신봉승 씨와의 우정은 너무 각별하다. 영화 평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작품이 된 < 친구야 친구야 >도 신봉승씨의 오리지널 작품이다. 출감한 운동권 학생의 사랑과 우정, 배신과 의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원 등을 다룬 이 영화는 범작 수준이었다지만 60이 넘은 세대로 고통의 세월을 산 젊은이들 얘기를 다루면서 시대를 읽고 싶어했을 것이다. 전영록 이 주연한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며 이리 뛰고 저리뛰고 했으리라. 술만 들어가면 '진주라 천리길'을 굵직한 목소리로 불러 제키던 최인현 . 한때는 흥행 성공으로 서울 삼청동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며 장안에서 몇대 되지도 않던 지프차를 타고 다니던 호기도 잇따른 제작 실패로 가정의 파국까지 불러왔으며 이 때문에 재기하려고 몸부림 쳤는지 모르겠다. 최감독의 타계가 안타까운 것은 그 동안 영화계의 의례로 상사 때마다 치러져 왔던 영화인장이나 영협 감독위원회장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소문 없이 가족장으로 묻힌 것 일게다. '허 허'하는 호걸풍의 웃음에 말술을 마다 않던 황소 같은 대인 최인현 감독도 덧없이 사라져 갔다. 김량삼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28. 10. 24일 경남 진주 출생 1950. 6 경남 진주 농과대학 졸업 1950. 9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정훈공작대장 근무 1951. 4 경남 대곡중학교 교사 근무 1990. 11. 16 향연 62세로 타계 <주요 경력> 1956. 10. 영화계 입문( 김소동 감독 극영화 < 아리랑 > 조감독) 1968. 4. < 삼현육각 >(전남일보 주최 백상영화제 수상작) 1968. 10. 최인현 프로덕션 설립 1970. 4. < 삼호 탈출 > 제10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수상 한국연극영화예술대상 작품 대상 수상 1986. 8. 공연윤리위원회 전문 심사위원 1989. 10. 은성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작품 연보> 1962 피어린 발자국 1963 쌍검무 1964 비련의 왕후 달기 / 사자성 1965 태조 이성계 / 정조성 / 한많은 대동강 1966 오복문 / 너와나 / 양반전 1967 천도화 / 총각원님 / 나그네 임금 / 풍운 삼국지 / 칠부 열녀 / 상감마마 미워요 / 두 나그네 1968 언니의 일기 / 백야 / 자주댕기 / 삼현육각 / 오월생 / 로맨스 마마 / 암굴왕 / 방랑대군 / 이상의 날개 / 순덕이 / 내 생애 단 한번만 1969 인의 여검객 / 부각하 / 동경의 왼손잡이 / 젊은이의 태양 / 춘원 이광수 / 만고강산 1970 일요일밤과 월요일 아침 / 굿바이 동경 / 엑스포 70 동경작전 / 삼호탈출 / 황금70 홍콩작전 / 동경의 무정가 / 태조 왕건 / 한없이 기다려도 / 극동의 무법자 1971 미워도 정 때문에 / 기러기 남매 / 암흑가의 공포 / 타이페이 3만리 / 고향을 묻지마라 1972 인간 낙제생 / 명동잔혹사(2화) / 어머님 용서하세요 / 아빠라 부르는 연인 1973 열궁녀 / 출발 1974 숙녀 초년생 / 이조상노비사 1975 소림사의 결투 1976 홍길동 / 집념 197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1978 관세음보살 / 세종대왕 / 안개 속의 여인 1979 영원한 유산 1981 캔디-캔디 1982 고통의 멍애를 벗으려고/ 젊음의 광장 1983 후송열차 / 사랑하는 전우야 1984 소명 / 자동차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 1985 쌍용 사람들 1987 마지막 선물 1988 우리 하나 되어 1990 친구야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