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큐어
- 감독
- 케이어 버로우스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예이자 피겨로아, 톰 바버 더피, 필리파 카슨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나면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얕은 부감으로 촬영한 것뿐인 대화 신이다. 이 신은 카메라와 대상 간의 거리 감각을 왜곡하는 것을 목표로 찍혔는데 두 인물의 대화를 보여주기 위함인지 카메라는 처음에 시계 반대 방향으로 패닝하다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의 회전 방향은 불규칙하게 흘러간다. 이 신이 낯설어 보인다면 연출자 에두아르도 윌리엄스가 360도 VR 카메라, 즉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방사되는 여덟 개의 렌즈를 사용하여 영상을 촬영하는 구형 카메라로 촬영했기 때문이다. VR 카메라의 특성과 작업방식 덕분에 윌리엄스는 후반 작업을 할 때 신의 구도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는 촬영할 때와 다른 형태로 장면을 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의 형태와 질감, 조형에 있어 실험을 멈추지 않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신가 윌리엄스는 10년 간의 커리어 동안 노마드와 같은 여정을 통해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도입해 왔다. 디지털과 셀룰로이드 포맷(16mm)을 혼합하여 촬영한 < 인류의 상승 >(The Human Surge, 2016), 고프로(GoPro) 360으로 촬영하여 < 인류의 상승 3 >로 진화하는 단초를 제공한 초현실적인 질감의 단편영화 <파르시>(Parsi, 2019), 내시경 카메라를 내장 기관 속으로 삽입하여 인체 해부도를 그려낸 <매우 긴 지아이에프>(A Very Long GIF, 2023)까지, 하나같이 영화 표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들이다. 글로벌 환경 아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불안한 젊은이들의 행적을 연결한 <인류의 상승>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상승 3>는 페루, 스리랑카, 대만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청년들의 삽화를 뜨개질한다. 중심 서사랄 것이 없는 이 영화는 국가, 캐릭터, 대화의 사이에서 방황하는데, 1편의 네트워크 내러티브 구조를 완전히 유동적인 스타일로 재구성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인간이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가는지에 대한 놀이의 영화를 발명하였던 윌리엄스는 걷고, 말하고, 시시덕거리는 십대들의 목적 없는 여행이 호수와 평원, 언덕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마술적인 시청각 조형술을 통해 연출한다. 야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인물들과 달리 윌리엄스의 예술적 야망은 원대하지만 결코 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 자연스럽고, 더 가벼우며, 더 장난스러운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들은 마치 웜홀을 통과한 것처럼 그들 각자의 거처에서 튀어나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구의 친구들과 함께한다. 표랑하는 존재의 상태와 연결을 시각화하기 위해 다수의 상황은 화면 안과 화면 바깥에서 동시에 펼쳐지거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쇼트 또는 매치 커트, 쇼트-리버스 쇼트 편집 따위의 영화적 관습을 회피하면서 몰입형 스토리텔링에 도달하는 시퀀스들을 제시한다. 롤 플레잉 게임(RPG)이나 가상현실 영상에서처럼 360도 기술의 한계를 넘어 이미지에 기묘한 단절과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 물결과 같은 파장 효과, 형상의 굴절, 비디오 스트리밍이 지연될 때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흐름, 리듬이 개입하는 순간들이다. 이러한 재현의 불완전함은 영화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파노라마적인 풍경 쇼트의 흐름을 방해하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정지 상태, 즉 육체와 우주가 만나고 인간과 풍경이 합치되는 듯한 초월의 느낌을 자아낸다. 동시대 영화감독들과 달리 윌리엄스의 모든 작업은 이론의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감각적인 호기심에 이끌려 진행되어왔다. <인류의 상승 3>에 나오는 인물들은 1편에서처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에 갇히지 않는다. 거주의 장소로부터 해방된 이들은 여러 장소를 순간 이동하며 이동의 경로를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교차한다. 느슨하게 떠돌고 표류하는 놀이의 분위기뿐 아니라 오류, 예측 불가능성, 탈 중심성 등은 전작으로부터 이어진다. 극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명상적인 여정을 통해 안정된 개념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스토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 러닝타임 내내 저들은 꿈, 환각, 이미 보았거나 앞으로 보게 될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며, 한 신 안에서 두 가지 언어의 교환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광경과 소리, 말들이 누적되면 단일한 타임라인으로 내러티브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부질없어진다. 표면의 물리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신들은 확장된 공간에서 이를 통합하는 능력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윌리엄스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경로들은 한눈에 보지 못하는 무한한 수의 잠재적 경로에 대한 인식을 활성화한다. 우리들 앞에 놓인 상황을 실재라고 가정하면, 잠재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상을 실재와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상승 3>를 보는 것은 실재 현실과 가상 현실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 공존하는 전례 없는 체험이 된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제한적인 아트하우스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노정된 예술영화의 상투형을 탐구하는 것에 만족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의 야심은 광대하며, 심지어 <인류의 상승 3>에서 시네마의 존재론적 가소성(可塑性)을 시험한다. 영화가 비디오 게임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증거 중 하나이다. 게임 속 인물은 전통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여러 장소들을 이동하는 ‘아바타’에 가깝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의 미학에 부분적으로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윌리엄스의 미학은 특정 기술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술이 미학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인류의 상승 3>는 ‘가상’이라고 부르는 효과가 가상현실의 기술적 작동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영화 제작의 고정된 프레임을 해체하려 한다.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에서 ‘연결’에 대한 감각과 마찬가지로 매체들의 경계와 기원, 쓰임, 효과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미지를 믿는 감독과 현실을 믿는 감독’이라는 앙드레 바쟁의 이분법에 윌리엄스는 도전한다. 그는 카메라가 실제 세계와 마주하는 순간에 영화의 본질이 있다고 믿는 ‘존재론’의 전제를 붕괴 직전까지 밀어부친다. 열대우림의 울창한 숲속을 탐사하는 한 장면에서, 인물들이 큰 나무 주위에 모여 있을 때 카메라는 인간 피사체를 떠나 윙윙거리는 곤충을 따라가며 몇 초 동안 이 생물체의 클로즈업을 담는다. 촬영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윌리엄스는 곤충을 발견하고 사후에 프레임에 담는 대안을 구상했다. 윌리엄스의 방법론은 촬영의 순간 카메라가 현실에 임하였고 함께 존재했는가, 라고 하는 실존적인 계율에 의문을 던진다. <인류의 상승 3>의 마지막 부분에서 윌리엄스는 명료한 설명을 제공한다. 원숭이가 천천히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기나긴 쇼트를 촬영할 때, 카메라는 피사체에서 서서히 멀어지면서 360도 회전한다. 회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덟 개의 렌즈 이음새가 이미지를 만화경처럼 흐릿하게 표현한다. 이미지가 확대 및 축소됨에 따라 픽셀화되고, 이미지와 현실의 구분이 디지털 노이즈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이 반역적인 이미지들의 안무가 끝나갈 즈음 번개가 번쩍하며 페루의 작은 산 정상으로 순간 이동한다. 공상과학의 영역으로 발을 디디는 것처럼 보이는 이 클라이맥스 신에서는 일곱 명의 십대 청년들이 산을 오르면서 이야기하는데, 360도 VR 이미지가 삼중으로 왜곡된다. 여기서 기술의 효용성은 그 차이와 특성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인해 때때로 3D 이미지와 2D 평면 사이의 접점이 노출되는데, 이는 윌리엄스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다. 5분 정도 지속하는 이 신들의 연결에서 줄기차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정글을 촬영하기 위해 제자리에 고정된 직후 나무를 지나서 프레임 상단에 위치한 들쭉날쭉한 교차점에 초점을 맞춘 다음 그 주위를 회전하여 어지럽고 만화경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쇼트를 이어 안개에 휩싸인 경사로를 따라 산 정상으로 향하는 단체 하이킹을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시각화한다. 각각의 장소들, 그들 장소의 이동은 비현실적이고 기괴하며 외계의 공간 감각을 자아내는데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디지털 오아시스,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뒤집히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하늘과 땅은 구부러지고 왜곡된다. 얼굴과 몸은 줄무늬로 분해될 것처럼 보이고, 중력조차도 선택적이 되어 일부 사람들은 붕붕 뜨거나 공중제비를 돌기도 한다. 순간, 리얼리즘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놀이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변형되는 이 기이한 언덕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을 변위된 촉각의 영역으로 바꾸어 관객들이 자신의 신체를 새로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윌리엄스의 목표와 맞닿는다. <인류의 상승 3>은 평범한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영화이다. 영상을 보면서 발견한 것들은 새로운 장소, 낯선 장소, 현실보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의 인상을 주는데 이미지의 질감뿐만 아니라 다양한 촬영 상황에서 이러한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은 경이롭다. 비디오 게임을 배신하는 기괴한 시각적 기법과 모호한 주제와 철학적 레토릭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지루함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현대영화에 대한 기대를 거스르는 창작 방법을 활용하여 새로운 네트워크가 세상과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낸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의 담대한 실험은 영화 이미지의 해체, 세계화에 대한 탐구, 다성적 테크놀로지의 공존이 만들어내는 비디오 아트를 하나로 녹여 버그에 비견할만한 시네마 쿠테타를 기도(企圖)하고 있다.
한국 영화아카데미 심화과정에서 내놓은 4번째 장편 영화들 중에 한 편인 < 밀월도 가는 길 >은 참 복잡한 영화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조는 고향 인천에 찾아온다. 그리고 웜홀의 존재를 믿던 특이한 친구 기정을 떠올린다. SF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기정은 왕따였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동조는 웜홀에 대한 집착이 점점 커지는 기정이 버겁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해 그 둘은 나란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이후 사라진 기정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지만 그를 다시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동조는 이미 비어있는 기정의 예전 집을 찾아가 그를 모티브로 쓴 소설로 탄 상장과 상금을 조용히 올려놓고 떠난다. 마치 뒤늦은 속죄를 하듯이. 라고 내용을 요약해 보지만, 사실 요약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는 감독의 욕심이 굉장히 많다. 현실, 비현실, 현재,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이야기, 멋진 앵글을 만들려는 노력이 빚어낸 사진엽서에 나올 것 같은 장면들이 그렇다. 하지만 과욕이다. 이야기는 벌려놓은 판을 수습도 잘 안되고, 카메라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친 채 부유한다. 민망한 유머는 덤이다. 잘 만들었다고는 보기 힘든 영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그저 `망작`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실패한 데뷔작으로 치부하기는 불편한 기분이 든다. 잘 납득은 안 가지만, 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 나는 동기화 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한 시퀀스에 있었다. 동조와 기정이 일진 패거리들에 잡혀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는 끔찍한 장면. 이 장면의 잔혹함만 떼고 본다면 아마 학원폭력을 다룬 여러 영화들과 비교를 해도 높은 순위에 자리할 정도다. 이 장면은 마치 폭주기관차 같다. 구타, 피는 물론이고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아주 질 나쁜 린치까지도 이어진다. 가해자, 피해자는 물론 침묵하는 비겁자가 모두 한 공간에 존재한다. 감독은 그것을 똑바로 보라는 듯 망설임 없이 까발려 스크린에 뿌린다. 마치 이 시퀀스를 위해 존재하는 영화인 듯 파워풀하게 보여지는 폭력에서 나는 스스로를 본다. 나는 어디에 서 있었나? 그간 한국 독립 영화 진영에서는 학교 폭력을 다루는 인상적인 작품도 적지 않았다. < 밀월도 가는 길 >은 학교 폭력을 다룬 많은 영화 사이에서 수작의 카테고리에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정호 감독이 보여준 파워풀한 연출은 지금껏 나오지 않은 다른 종류의 영화가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데뷔작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어떤 감독이든 평생 단 한번만 주어지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밀월도 가는 길>을 뛰어난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