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 감독
- 조나단 놀란, 리차드 J. 루이스, 프레드 토이, 닐 마샬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에반 레이첼 우드, 탠디 뉴튼, 제프리 라이트, 제임스 마스던, 에드 해리스, 안소니 홉킨스
“죽은 지 3일이 지난 용돌이가 되살아났다.” 저작권 개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던 시절의 < 괴시 >( 강범구 , 1980)는 사실상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합작영화인 <Let Sleeping Corpses Lie>의 표절작이라고는 하나, 여러 한국적 상황과 변주가 더해진 명실상부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기록돼 있다. 주인공이 백담사로 향하는 강원도 계곡에서 마주친, 초점 없는 얼굴로 느릿느릿 다가온 정체불명의 괴한에 대해 얘기하자, 마을 사람 누군가는 며칠 전 술 마시고 물에 빠져 죽은 용돌이에 대해 얘기하며 “용돌이가 살아 돌아왔나?” 라고 얘기할 뿐이다. 용돌이가 죽은 것은 경찰과 동행한 마을 사진관 주인이 직접 찍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한국영화계에 처음으로 좀비가 등장했다. 어쩌면 지금 관객들은 물 맑고 공기 좋은 대자연에서 마주친 좀비라는 점에서 < 곡성 >( 나홍진 , 2016)에서 외지인(구니무라 준)의 등장과도 같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제작 당시로 보자면, 누군가는 홍콩영화의 좀비 ‘강시’도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이후 수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했던 홍콩 강시 영화의 원조 <귀타귀>와 <괴시>는 1981년 4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개봉했다. <괴시>의 가장 독특한 점은 도시가 아닌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대만에서 온 강명은 강원도 백담사로 가던 길에 수지의 차를 얻어 타고 가게 된다. 미국에서 살던 수지는 5년 만에 한국을 찾아 언니를 만나기 위해 수리마을에 있는 별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언니는 건강 문제로 요양차 남편과 함께 강원도에 머물던 중이었다. 그런데 차가 낯선 곳에 이르러, 강명이 길을 살펴보려고 떠난 사이 수지는 계곡에서 첫 번째 좀비와 마주친다. 이후 그의 정체가 마을 사람들의 얘기와 경찰의 수사를 통해 3일 전 죽은 용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수지의 얘기를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결국 강명과 수지는 공동묘지 안치실에 찾아갔다가 용돌의 시체가 없음은 물론, 그 안에서 부활한 시체들에게 공격당한다. 그런 사이 강명과 수지의 뒤를 쫓던 형사와 집을 나간 수지의 형부도 좀비로 변하고 만다. 그렇게 마을 전체가 ‘괴시’로 인해 공포에 떨게 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좀비나 강시에 비해 괴시(怪屍)라는 제목 자체가 기괴하고도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거기에 더해 좀비물은 영화사적으로 완전한 영화적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좀비라는 존재에 어떤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느냐가 중요하다. 말하자면 좀비가 사람을 흡혈귀처럼 물어서 전염시킨다는 기본적인 상식(?)에 지속적인 변주가 더해지며 그 장르성이 확장되어왔다. 가령, 과거 좀비 영화의 좀비는 느리고 최근 좀비 영화의 좀비는 빠르다는 것이 가장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변화일 텐데, <웜바디스>(2012)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 뜬 좀비가 등장했고, < 부산행 >( 연상호 , 2016)에는 빛에 반응하는 좀비를 등장시켜서 터널에 머무는 시간을 긴장감의 요소로 훌륭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괴시>는 단순히 ‘느리게 걸어 다니는 옛날 좀비’라고 치부하기에는, 좀비 장르의 상업 블록버스터화를 이끌었던 <월드워Z>(2013),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의 존재를 알리며 무려 10시즌까지 이어지고 있는 AMC TV 시리즈 <워킹 데드>와 비교해도, 영화역사상 아마도 가장 내구성이 강한 괴력의 좀비를 등장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비 영화에서 ‘가장 확실한 제거 방법’으로서 좀비의 머리통을 권총으로 날려버리는 일이 <괴시>에는 불가능한 것은 물론, 좀비로 변한 수지의 형부 역시 차로 치어도 끄떡없이 일어나고 만다. 어쩌면 지금의 관객들, 혹은 좀비 영화의 팬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지점이 바로 거기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사진관에 걸려 있는 배우 율 브리너의 사진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이색지대>(1973)에서 율 브리너는 마치 좀비처럼 주인공을 끝까지 쫓아다니는 인조인간으로 등장했었고, 첨단과학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영화 속 휴양지 ‘웨스트월드’는 마치 사람들 모두 비밀을 쉬쉬하는 수리마을을 떠올리게도 한다. 억지 비유일 수도 있겠으나, <괴시>의 용돌이 역시 <이색지대>의 인조인간 율 브리너처럼 포기를 모르는 좀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시체를 다시 깨어나게 만든 것은 과학 실험 때문이다. 해충을 퇴치하는 초음파를 연구 중인 실험실에서 발생시킨 초음파가 시체의 신경을 건드려 부활시킨 것이다. 게다가 그 이전부터 수리마을에는 기형아가 발생한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과학자들은 이를 묵살해왔다. 좀비 창궐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 주인공이 실험실을 찾아가 “사람 잡는 기계를 당장 꺼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를 그저 미친 사람취급하며 외치는 “우리는 과학자에요!”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보통 좀비 영화에는 그 발생 원인에 대해 탐색하는 경우는 드문데, 신종 바이러스 문제와 결합하여 백신까지 만들어낸 <월드워Z>처럼 <괴시> 역시 원작의 설정처럼 환경파괴 문제로 나아간다. <괴시>의 초음파 실험실에 미국인 과학자가 있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 괴물 >(2006) 도입부에서 유독성 화학물질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한강에 흘려보냈던 미국인 장교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괴시>의 초음파 실험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의로 시작한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괴시>의 강범구 감독은 범죄 액션영화 < 북극성 >(1962)으로 데뷔한 뒤 황해, 김지미 , 박노식 주연 < 검은 꽃잎이 질 때 >(1963), 인기 가수 남진 주연 < 울려고 내가 왔나 >(1967), 남궁원 주연 < 국제 암살단 >(1971) 등 반공과 첩보 소재가 가미된 액션영화들을 주로 만들며 흥행 감독으로 인정받아왔다. 연출 경력의 후반기에는 < 일대영웅 >(1973), < 풍운의 권객 >(1974), < 사망탑 >(1980), < 몽녀한 >(1983) 등 대만이나 홍콩과의 합작영화들을 여러 편 만들며 실험성이 돋보이는 액션과 공포영화에 더욱 치중했다. <괴시>의 경우 원작이 된 해외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등 한국 장르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뚜렷한 자기만의 세계를 일군 감독은 아니지만, <괴시>를 비롯해 크리처 무비 <몽녀한> 등 그가 아니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들로 한국 장르영화의 외연을 의미있게 넓힌 감독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괴시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 쇼생크 탈출 > < 미져리 > < 미스트 > < 캐리 > < 돌로레스 클레이븐 > < 하트 인 아틀란티스 > < 그린 마일 > <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Apt Pupil > < 샤이닝 > < 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 보편적으로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거나 상업적 성공, 혹은 비평적 성과를 얻어낸 작품을 대략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봤다. 10편이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어느 소설가가 10편 이상의 ‘성공적 영화화’라는 결실을 얻어 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킹에게는 ‘망한 영화가 많은 원작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물론 그렇다. 비교적 근래에는 < 셀: 인류 최후의 날 >과 사이파이 채널의 드라마 <헤이븐>이 있었고 <공포의 별장>이라는 제목 등으로 세 번이나 만들어진 「세일럼스 롯 Salem’s Lot」들도 신통치 않았다. 더 옛날로 가 보면 수많은 똥망작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 옥수수밭의 아이들 > 시리즈 중 1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며 < 괴물 Graveyard Shift > 등 온갖 희한 야릇한 영화들로 필모그래피가 더럽혀져 있다. 이건 다작을 하는 작가의 숙명이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거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들 중에서도 스티븐 킹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적지 않다. < 초능력 소녀의 분노 Firestarter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초능력 소녀의 분노>라는, 시놉시스를 제목화 해버린 번역제의 1984년 영화 < Firestarter >가 있다. < 캐리 >를 감명 깊게 본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는 ‘유년판 과학 소설 풍 캐리’라는 측면에서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특히 번역제에 나와 있는 바로 그 ‘분노’ 시퀀스가 지니고 있는 후련함과 은근한 공포는 나에게 30년 이상 뚜렷하게 각인 돼 있다. 사실 스티븐 킹 원작 영화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대부분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B급 상상력으로 도배돼 있는 바람에 B무비로 직행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지금은 거장이 돼 버린 크로넨버그의 < 초인지대 Dead Zone >가 그랬고 메리 램버트의 < 공포의 묘지 Pet Sematary >라던가 호러의 제왕 존 카펜터의 < 크리스틴 > 역시 1980년대 B무비를 사랑한 이들이라면 꼭 거쳐 간 작품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 자신 역시 B무비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죽음의 무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킹은 꾸준히 B무비와 어울리는 스토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물의 반란’이다.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들 중 대중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소재들이 예의 ‘무생물의 반란’이다. 그중에서도 기계들이 인간을 해친다는 내용의 영화들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 써스펙트 >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시됐던 1995년 작 <맹글러 The Mangler>에서는 세탁 공장의 대형 프레스 다리미를 비롯한 기계가 인간을 학살한다. 2016년작 < 셀: 인류 최후의 날 >은 핸드폰의 전자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설정이었고, < 크리스틴 >은 저주받은 자동차의 이야기다. 이렇게 하드웨어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소재는 그야말로 B급 영화를 위해 최적화돼 있다. 진짜 사물을 배치하고 약간의 장치만 하면 되니까 아트 디렉션에서도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단편 「트럭」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두 번이나 영화화됐는데 그중 먼저 만들어진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는 킹이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전문가 평가와 박스오피스 성적 모두 실패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 웨스트월드 >나 < 코마 > 등에서 감독으로서의 재능 역시 증명한 것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언제나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의 안정적 간택을 받을만한 정서로 무장했던 마이클 크라이튼에 비해 스티븐 킹은 스스로 B급 정서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는 한마디로 러스 마이어의 그라인드하우스 영화들, 로저 코먼이나 조지 A 로메로의 저예산 호러들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그 유명한 콜라 자판기의 공격 신이라던가 신체 절단 장면들은 스티븐 킹이 이 영화를 어떤 태도로 만들었는지 증명하는 부분이다. 충격적인 장면을 무표정하게, 때로 잔혹 유머로 버무리는 애티튜드는 킹이 소설을 집필하는 자세와도 동기를 이룬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의 가장 후련한 부분은 바로 음악이다. 작가들만으로 이뤄진 밴드 ‘Rock Bottom Remainders’의 멤버이기도 한 스티븐 킹은 AC/DC의 노래들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채웠다. 특히 주제곡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Who Made Who’의 호방함은 이 영화가 지닌 자세와 격을 함께 한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평범한 감독이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은 대단했지만 안타깝게도 배우를 보는 눈과 다루는 방법에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바람에 이 작품은 나 같은 변태들만 좋아하는 컬트영화가 돼 버렸다. 스티븐 킹의 영화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의 원작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좋아하지는 않는 영화도 만들 수 있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영화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도 놀랍거나 안타깝지 않다. 그 무한한 의외성. 그래서 언제나 스티븐 킹의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2016년은 내게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기억될 한해다. 현실 세계에서건 극장에서건, 그동안 발화되지 않았든 혹은 쉽게 간과되었던 여성의 목소리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울림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흐름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나에게도 큰 감흥을 주었던 것 같다. 2016년 한해 사사롭게 마음에 품었던 영화 중 많은 작품이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거나 여성의 서사에 보다 주목한 작품들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 엘르 >와 < 아쿠아리우스 > < 아가씨 >와 < 줄리에타 >가 그런 작품들이다. 다시 한번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호흡을 맞춘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연이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 퍼스널 쇼퍼 >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와 <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 그리고 < 곡성 >은 불균질한 요소들의 충돌과 결합으로부터 생성된 미스터리한 기운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 패터슨 >은 영화의 리듬감이, <룸>은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였고 드라마 <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은 아이디어와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은(그러나 쉽게 일어나지 않는) 불길한 무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사롭게 고백하자면, 리스트를 꼽기 전에 < 비밀은 없다 >를 보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대신 이 영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손예진의 폭발적인 연기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한국 여자’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사정없이 깨부수는 동시에, 한국 여성 캐릭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멋진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지면에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인 영화들 중 가장 과격한 영화라고 할 만하다.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중 최고의 논쟁작이었던 < 엘르 >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이 할리우드에서 자국으로 돌아가 만든 < 블랙북 > 이후 10여 년 만에 연출한 장편영화로도 화제를 모았다. 영화 < 베티 블루 37.2 >(1986)의 동명 원작을 집필한 프랑스 작가 필립 지앙의 소설 「오...」(2012)를 영화화한 <엘르>는 폴 버호벤이 원래 미국에서 촬영하려 했던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투자자이든 배우이든 이 영화에 참여하는 데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버호벤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려 원작의 무대이기도 한 프랑스에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엘르>를 보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불륜, 강간, 관음, 사도마조히즘, 폭력. 온갖 종류의 금기에 노골적으로 현미경을 들이대는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모험심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여주인공이 괴한에게 광폭하게 강간당하는 첫 장면부터, 시나리오를 덮어버린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 엘르 >는 미쉘(이자벨 위페르)의 비명으로 포문을 연다. 그녀는 복면을 쓰고 집으로 침입한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사건은 암전된 화면 속에서 진행되고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괴한은 유유히 사건 현장을 떠나고, 남겨진 미쉘은 잠시 몸을 추스르더니 의연한 얼굴로 입었던 옷을 쓰레기통에 넣고 깨진 접시를 치운다. 그리고 목욕을 하며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섞인 거품을 바라본다. 이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왜 그녀에게 그런 짓을 했는가? 아직도 미쉘의 곁을 맴도는 전남편, 미쉘과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 미쉘에게 자꾸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는 옆집 남자, 게임 회사 대표인 미쉘에게 사사건건 불만을 털어놓는 부하 직원. 모두가 조금씩 의심스럽다. 미쉘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엘르>의 초반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띤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누가 범인일지 짐작해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건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르>의 핵심은 ’그 여자’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미쉘이라는 인물의 욕망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쉘의 삶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연쇄살인범이고, 어머니는 철이 없다. 전 남편은 제 앞가림을 못 하고 어리숙한 아들은 여자친구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에게 집착한다.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은 직장에서건 밖에서건 발정 난 동물처럼 추근대고 회사의 남자 직원 중 누군가는 미쉘이 게임 캐릭터에게 강간당하는 영상을 단체 메일로 뿌린다. 어쩌면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다양한 시련들 사이로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걸어나가는 미쉘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 엘르 >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미쉘은 선택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사회가 부여한 역할은 온갖 괴물이 출몰하는 1인칭 게임 속 주인공이지만, 그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게임의 콘솔을 잡은 플레이어가 되길 욕망하는 느낌이랄까(그런 점에서 시나리오 에이전시의 대표였던 원작 소설 속 미쉘의 역할이 게임 회사 대표로 바뀌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일례로 이 영화에서 미쉘이 가장 먼저 내리는 선택은 경찰에 성폭행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다. 기겁하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하고 엮이기 싫어. 이 얼간이 때문에. (‘연쇄살인범의 딸’이라는 오명 때문에) 내 인생을 재건하려고 정말 힘들게 싸웠어.” 그리고 덧붙인다. “미친놈은 잡아야지. 미친놈 해결하는 건 내 전공이야.” 그렇게 미쉘은 시스템보다 손도끼와 스프레이의 힘을 더 신뢰하는 여자다. 그 선택이 때로는 비윤리적이고 상식과 동떨어져있다 해도, 중요한 건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길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임을 깨부수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믿는 폴 버호벤의 고약한 취향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 성모상을 옮기는 옆집 남자를 창문으로 엿보며 자위를 하고, 성폭행범이 밝혀진 뒤에도 그와 은밀한 게임을 벌이며 사도마조히즘적인 욕망을 펼쳐 보이는 이 여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금기시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펼쳐 보이며 관객을 난감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 폴 버호벤의 장기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미쉘로 분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그녀의 근작 가운데서도 최고다. “이처럼 변태성을 탐험하는 작업을 하려면, 기쁨과 창의성을 가지고 (감독과) 저 멀리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이런 악보에 장단을 맞출 수 있는 배우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처럼, 이자벨 위페르는 스릴러와 블랙코미디를 오가며, 냉철한 커리어우먼과 비밀스러운 욕망을 지닌 여성을 넘나들며 폴 버호벤의 변화무쌍한 장단에 기꺼이 ‘놀아’난다. 비틀린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 엘르 >의 미쉘은 역시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 피아니스트 >의 에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는데, 하네케의 영화가 에리카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버호벤의 <엘르>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미쉘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다. 한편 < 엘르 >는 게임의 규칙을 아는 이들만이 헤아릴 수 있는 은밀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다. 미쉘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빠르게 습득한 뒤, 그녀가 매 순간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과 나누는 시선의 교환을 좇는 재미가 이 영화엔 있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초대로 한자리에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이 압권이다. 이 부르주아들은 점잖게 차려입고 샴페인 잔을 부딪히지만,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의 정체가 불륜남, 얼뜨기, (아마도) 강간범-정체가 밝혀지기 전이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우스꽝스러운 난장의 한복판에서 오직 미쉘만이 고고하다. 파티의 기저에 은밀하게 흐르는 욕망과 비밀스럽게 구축된 관계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각자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장단에 놀아난다. 이토록 야심만만하게 게임의 완전한 지배자가 되려 하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 때로는 괴물이 되기도 서슴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또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 폴 버호벤의 다음 영화는 < 블랙북 >과 <엘르>만큼이나 간극이 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