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와 루시
- 감독
- 켈리 라이카트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미셸 윌리엄스, 루시, 윌 패튼, 윌 올드햄, 존 로빈슨, 월리 돌튼, 래리 페센든, 존 브린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감독의 < 퍼스트 카우 >(2019)는 오프닝 타이틀 후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영화를 시작한다.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자연스럽지만, ‘man’은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 함의를 옮기기 위해 고심하게 하는 단어이다. man이 인간이라면 남성으로서(만) 인간이며, man이 남성이라면 인간 대표로서 남성(만)이다. <퍼스트 카우>는 블레이크에게,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20년대 서부 개척지라는 시공간에게 아무런 모순 없이 당연했을 인간-남성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고 해체하는 시도를 한다. 규범적 남성성 외부의, 즉 ‘인간’ 밖의 남성의 우정이 전면화 되고, 그 우정은 (개, 도마뱀, 올빼미, 고양이, 소와 같은) 동물과 여성, 즉 비남성-비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 <퍼스트 카우>는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진술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의심한다. 쿠키의 첫 등장은 단순하지만 다정하고 경쾌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버섯을 채집하는 섬세한 손으로 제시된다. 노란 버섯들 사이로 몸이 뒤집혀 노란색 배를 드러낸 작은 도마뱀을 조심스럽고 친절한 손길로 도와준다. 이 다정하고 충만한 분위기는 곧 외부의 사운드에 의해 깨진다. 쿠키는 떠돌이 모피 사냥꾼들의 무리에 고용된 요리사다. 사냥꾼들은 쿠키가 정성스레 채집한 버섯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들을 잡아서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위협하듯 말하거나 툭하면 주먹 다짐을 한다. 쿠키가 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환영 받지 못 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쿠키 자신도 비규범적 남성으로서 자신을 비애적으로 대하거나 이 세계에 안달복달하며 적응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대충 따돌리고 자신만의 텐트로 숨어들거나 도망가버린다.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 부츠를 장만해 신고 남자-인간들의 미개척지를 걷는다. 한편, 쿠키와 우정을 나누는 킹 루는 상승을 향한 도전에 불타는 기업가 기질로 충만해 있다. 개척지의 남성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성정을 갖추고 있지만, 인종적으로 남성-인간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 한다. 킹 루는 올빼미가 쿠키 일행의 텐트를 내려다 보는 날 밤 벌거벗은 채 나타나고, 쿠키로부터 온기와 먹을 것, 쉴 곳을 제공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연히 쿠키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작은 집으로 초대한다. 한참 숲길을 걸어 도착한 오두막에서 둘은 술을 나눠 마시고 킹 루는 장작을 패러 나간다. 오두막에 남겨진 쿠키는 잠시 어색해하다가 곧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쓴다. 이불을 털고 꽃을 구해와 오두막을 장식한다. 이후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 둘의 이러한 작은 일상들이다. 같이 먹을 것을 채집하고 집을 돌본다. 한 명이 빨래를 하면, 한 명은 낡은 옷을 기운다. 서부 개척 시대 백인-남성-인간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남성성 구현의 실패나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전에도 많다. 그러나 그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은 종종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매혹이나 열렬한 열망, 그리고 실현될 수 없음에 대한 비애, 자기연민을 동시에 노출한다. <퍼스트 카우>는 결론적으로 실패든 비애든 그러한 이상적 인간-남성 규범을 통한 남성성 탐구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이 두 남자의 이러한 필요에 의한 일상 노동으로 채운 시간을 보여주고, 애정 어린 다정함이 기반이 된 관계에 집중한다. 이 다정함의 관계는 인간- 남성의 규범적 관계를 전복하거나 감화시키기 보다, 즉 휴머니즘의 가치를 대체하기 보다 그 주변의 비인간적인 것들을 향한다. 쿠키는 ‘첫 번 째 소’(영화의 타이틀 롤!)의 우유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매일 밤 짜러 가지만, 소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닌 의존하는 공존의 자세로 소를 대하고 둘 사이에 애착이 형성된다. 영화에서 관객이 제일 먼저 보는 생명체는 개이다. 그리고 그 개 옆에는 여자가 있다. 개가 가장 먼저, 그리고 다음으로 여자가 이 둘의 오래 된 과거의 물질적 증거를 발굴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년들이었던 것이 (감독의 전작 <웬디와 루시>(2007)를 떠오르게 하는) 개와 여자로 바뀌었다. 영화는 종종 개와 소, 고양이, 올빼미와 같은 동물들이 무엇을 바라보는 눈이나 얼굴, 그리고 그들 시선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진행과 전혀 상관은 없지만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의 원주민 여성들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얼굴도 종종 포착한다. 즉,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에는 동물들과 원주민 (여성들)의 시점이 포함되어 있다. 쿠키와 루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지만, 영화에는 원주민 말을 하는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원주민 촌장의 아내와 영국에서 온 지역 권력자이자 ‘퍼스트 카우’의 소유자인 팩터의 아내이다. 두 여성은 서로 긴장 관계인 남편들 사이에서 말을 전달하는 도구거나 이국적 장식품처럼 기능하다가, 남자들이 방에서 사라지자 마자 자리를 옮겨 가까이 앉고 긴장이 전혀 없는 친밀하고 즐거운 얼굴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의 공기는 짐짓 대접하는 척하지만 허세와 과시, 긴장으로 가득 찬 남자들 사이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퍼스트 카우>는 이러한 다정함 관계와 비인간-남성적 시선들을 결코 이상화하지 않는다. 서부 개척 시대의 시간을 정복이 아니라 다정한 공존의 관계 비인간-남성적 시선들로 채우지만, 이것은 곧 부서지며, 영화의 시작부터 예정되어 있다. 1820년대로 가기 전, 영화는 현대를 경유한다. 관객은 두 주인공의 시체를 미리 보고서야 1820년대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개가 시체를 발견하기 앞서, 제시되는 것은 넓은 강에 굉음을 내는 거대한 증기선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기차나 마차가 지나가던 풍경을 포착하는 오프닝은 감독의 전작들과 겹쳐지며, 또한 영화의 끝에 감독이 경의를 표했던 피터 허튼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해 침범된, 조직된 자연이다. 그리고 ‘퍼스트 카우’가 배를 타고 지주 팩터의 소유지에 도착하는 모습은 이 증기선이 움직이는 모습과 겹친다. 쿠키가 공존과 애착의 관계를 소와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이 소는 등장할 때부터 개인의 사유재산, 가’축’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소유권으로 통제된다. 킹 루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쿠키의 관점과는 달랐다. 비버를, 소의 우유를 가공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채로 있는 미개척 서부는 킹 루에게 아직 역사가 시작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팩터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약탈권과 소유권은 보호되지만, 인종적 약자인 킹 루의 초기 자본축적을 위한 약탈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영토와 자원에 대한 독점 소유권과 강탈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초기 미국 개척 신화, 그리고 서부극과 다른 자리에서 서서 다른 시선들을 보여주지만, 역사의 진행에 대한 비관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종착점은 개와 함께 떠도는, 최종적으로는 그마저 함께 할 수 없는 <웬디와 루시>의 삶이다. 초기축적에 있어 불평등한 관계로 출발했던 자본주의는 소유권과 그 침탈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규칙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웬디와 루시>에서 웬디의 좀도둑질에 대한 마트 직원의 대사)며 웬디의 삶을 인간의 룰에서의 안착보다는 비인간 개와의 관계에서 애착으로 향하게 한다.
‘봉테일’이 화제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인데 아카데미 4관왕 이후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 된 것 같다. 봉테일은 그가 촬영현장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 미리 완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촬영에 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봉준호는 준비된 감독이다. 머리 속에 찍고 싶은 영화의 그림이 이미 완벽하게 들어 있으니 꼼꼼하고 치밀하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 살인의 추억 >(2003)에서 형사가 갖고 다니는 수첩에 농협 마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거나 < 기생충 >(2019)에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 등이 사례로 거론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디테일을 이렇게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영화에서 디테일이란 성격이 세심하다거나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디테일은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흥미로운 속성 중 하나다. <기생충> 1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일명 ‘믿음의 벨트’ 시퀀스가 있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의 가정부 문광을 내쫓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목.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택이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문광의 모습을 촬영하고 마침내 문광이 기침을 하는 사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끄집어내는 장면까지 5분여의 장면이다. 물 흐르듯 우아하게 편집된 장면들은 관객을 현란한 사기극의 현장에 초대한다. 기택 가족의 계획은 착착 맞아 떨어져서 그것이 악행이라 하더라도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심정이 된다. 마침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집어들 때 저절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여기서 봉테일은 소품이나 세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떻게 설계되고 이어지는가에 있다. 피자 가게에서 기택 가족이 피자를 먹으며 핫소스를 뿌리는 장면은 휴지통의 핫소스와 연결되고, 감정이 고조된 기택의 대사는 기우가 연기 연습을 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는 장면들이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으로 상승된다. 영화사에선 몇몇 범죄영화에서 이런 류의 디테일에 특별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줄스 다신의 < 리피피 >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같은 영화다. 범죄의 모의와 실행을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들로 디테일이 어떻게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장면들이 빈 틈 없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이런 극적 흥분은 잘 만든 액션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 본 얼티메이텀 >의 워털루 역 장면 같은 경우다. 제이슨 본이 비밀정보를 가진 기자와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워털루 역에 한번도 못 가본 관객도 그곳을 알 수 있게끔 정확하게 촬영됐다.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서 꼭 필요한 시각적 정보를 주기 때문에 관객 또한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 덕분에 영화는 현장에 있는 듯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아마도 우리는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알 것이다. 장소와 동선과 연기가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영화들은 배우들이 그냥 영화를 흉내 내는 느낌을 준다. 값 싼 전쟁영화 속 총격 장면에서 총소리만 나면 아무 데로나 나뒹굴며 죽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다. 디테일이 없으면 영화는 아이들의 병정 놀이가 되고 만다. 디테일이 특정한 장르영화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 흐트러지다 >에서 등장인물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자. 새로 생긴 슈퍼마켓의 식료품 가격이 얼마나 싼 지를 수치까지 들어 정확히 알려주는 대목에서 나루세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한 경제적 디테일을 더하며 비범해진다. 이처럼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난 혹은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는 장면은 흔하지만 그런 만큼 예리한 묘사가 필요하다. <기생충>에서 무선 인터넷을 잡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그렇듯 단순한 디테일로 많은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켈리 레이차트의 < 웬디와 루시 >에선 주인공이 수첩에 돈의 수입, 지출을 기록하는 장면으로 한눈에 그런 디테일을 전달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장면 하나만으로 주인공이 처한 난관이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작품 선정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에도 당연히 디테일이 들어간다.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 뮤직비디오에서 너무 반복해서 지겹게 느껴지는 장면 묘사,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디테일 같은 것을 보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디테일이 좋은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감독이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거나 자잘한 세부가 전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원래 디테일의 예술, 이라 그렇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로라 예년에 비해 사사로운 영화리스트를 선정하기가 몹시 힘들었던 한해였다. 챙겨보고 싶은 영화들을 충분히 보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마음에 크게 와닿은 영화도 드물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소 지쳐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건 단순히 영화를 수적으로 많이 본다는 물리적인 체험의 피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갈수록 영화를 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자극적인 소재와 긴 러닝타임, 현란한 속도의 뭇 영화들은 때때로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런 2017년의 영화로 켈리 레이차트 감독의 <어떤 여자들>을 선정한 건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담고 있는, 영화의 힘을 체감할 수 있게 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차의 모습으로 영화의 포문을 연다. 이 기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엇을 싣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기차가 어디론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그 여정의 일부라는 사실 뿐이다. 이는 곧 <어떤 여자들>이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의 과거와 미래는 켈리 레이차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녀에겐 중요하다. 영화는 미국 북서부 몬태나주에 살고 있는 네 여성의 현재를 조명하는데, 본인도 모르는 새 한번쯤 스쳐지나갔거나 지인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들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어쩌면 알 수도 있었을 법한 ‘어떤 여인들’로 남는다. 끝내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된 그녀들의 삶은 몬태나 특유의 황량하고 음울한 정서와 맞물려 미국 서부에 대한 낯선 풍경화로 기억될 듯하다. <어떤 여자들>은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변호사 로라(로라 던)다. 그녀는 상해배상 사건을 두고 윌이라는 이름의 의뢰인에게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승소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을 두고 8개월째 어거지를 쓰던 윌은 로라가 소개시켜준 나이 지긋한 남자 변호사 앞에서 순한 양이 된다. “내가 남자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내가 법을 설명해주고 사람들이 듣고서 알겠다고 말하면 정말 일하기 편했을 거야.” 로라는 한탄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총기 인질극을 벌이는 윌을 설득해야 하는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지나 두번째 에피소드는 몬태나 근교에 새로운 집을 짓고자 하는 지나의(미셸 윌리엄스) 이야기다. 켈리 레이차트의 대표작 <웬디와 루시>, 서부극을 여성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믹의 지름길>에 이어 미셸 윌리엄스는 다시 한번 레이차트의 여성 캐릭터로 분했다. 그녀가 맡은 지나는 강한 생활력과 결연한 의지를 가진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붕괴 직전이다. 지나의 남편과 딸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지나의 행동에 불평을 일삼거나 훼방을 놓는다. 그럴수록 지나는 새로운 집에 쓰일 사암을 구하는 일에 더욱 더 집착한다. 세번째 에피소드에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몬태나 도심과 멀리 떨어진 목장에서 말을 돌보는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턴)와 그녀가 듣는 학교법 특강의 파트타임 강사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그들이다. 우연히 두 사람은 특강이 끝난 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게 되고, 제이미는 베스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왕복 8시간의 거리를 운전하며 낮에는 로펌 변호사로, 밤에는 파트타임 강사로 일하는 베스에겐 타인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제이미와 베스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많은 경우 기회는 길 위에 있다. <웬디와 루시>의 웬디가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 아이다호에서 알래스카로 향하고, <믹의 지름길>의 세 가족이 삶의 터전을 떠나 오레건의 산길을 걷는 이유다. 하지만 길 위에서의 모든 기회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레이차트의 관심은 길 위에서 목적과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인물들에 머물러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풍경을 조명한다. 숲과 평야, 강과 사막, 도로와 거리. 21세기 미국영화가 쉽게 간과하곤 하는 인물과 풍경의 관계망이 곧 레이차트 영화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레이차트의 영화에서는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가 중요하다. 목적지보다 경유지가 중요한 기이한 로드무비, 그것이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다. <어떤 여자들>에서는 제이미와 베스가 등장하는 세번째 에피소드가 특히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들>의 풍경에는 전작과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올드 조이>(2006)부터 <어둠 속에서>(2013)까지, 레이차트는 대부분의 전작을 미국 서부의 오레건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미국 몬태나 출신의 작가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소설 세 편(국내에는 세번째 에피소드의 원작인 「트래비스 B」가 수록된 단편소설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이 출간됐다)을 원작으로 하는 <어떤 여자들>의 경우 소설과 마찬가지로 북서부 몬태나주를 영화의 주요 무대로 정했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미국에서도 인구 밀도가 낮기로 유명한 몬태나의 지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 <어떤 여자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단절감과 고독감은 레이차트의 어떤 영화보다 깊고 통렬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 여성은 성차별과 무관심이 만연한 현실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묘하게 닮아있는 이들의 삶은 계급과 환경에 따라 여성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 중 가장 상황이 나아보이는 사람은 로라다. 남성 의뢰인이 직업여성으로서의 그녀를 깎아내리고 신체적 위협을 가하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로라는 언제나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로라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 의뢰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다. 지나는 가족과 정서적으로 단절되어있지만 가장으로서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기회를 찾아 몬태나 근교를 배회하는 그녀는 행복한 가족 대신 멋진 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암담한 인물은 제이미다. 목장 노동자인 그녀는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존재로 묘사된다(그녀의 이름인 ’제이미’는 영화에서 단 한번도 호명되지 않는다). 말에게 사료를 주고, 개와 함께 눈 덮인 설원을 순찰하는 제이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 되는 베스도 첫번째 에피소드의 로라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블루칼라 노동자 출신의 어머니와 언니를 둔 베스는 변호사가 됨으로써 제이미의 운명으로부터 지금 막 벗어났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눈덩이처럼 늘어난 학자금 대출금 뿐이다. 이처럼 이야기의 시점이 전문직 여성(로라)과 가장 역할을 하는 어머니(지나), 블루칼라 노동자(제이미)로 이동할 수록, 영화의 배경이 몬태나주 리빙스턴의 도시에서 근교를 거쳐 시골로 이동할 수록,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한층 어둡고 잔혹해진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후반부,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는 베스를 찾아나선 제이미는 어두운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베스가 느꼈을 고독감을 체감한다. 하지만 베스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으리라던 희망이 무산된 뒤, 목장으로 가는 길의 황량한 초원 한복판에 멈춰서버린 제이미의 모습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이 장면에서 몬태나 주 출신의 신인배우, 릴리 글래드스톤의 표정은 정말 압권이다). 21세기 미국 여성들의 산산이 부서진 꿈, 그 황량한 좌절의 풍경을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는 고요하게 응시한다. 이처럼 남다른 속도와 감각을 지닌 한국 여성 감독의 출현을 2018년에는 기대해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