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아이들
- 감독
- 테드 코넌트
- 제작년도
- 1954
신상옥 감독은 < 코리아 >(1954)를 만들면서 영화를 “온 몸으로 배웠다”고 썼다. 석굴암을 촬영하러 올라가다가 지프가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하기도 했고 추운 창고 건물에서 벌벌 떨면서 포터블 편집기로 편집을 하는 동안 “영화의 흐름과 감각”을 “몸의 한 부분으로 체화”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폐허에서 가산을 털어 만든 이 가난한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신상옥은 뒷날의 많은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된 작품이라고 술회한다. 특히 < 무영탑 >(1957)과 < 성춘향 >(1961)은 <코리아>에서 다룬 이야기의 일부를 독립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신상옥, 『난, 영화였다』, 랜덤하우스, 2007, 53~54쪽) 1960년대 초까지 신필름 기술력의 핵심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이형표 를 만난 것도 <코리아>의 후반작업을 하면서였다. 최은희 와의 스캔들로 선배 영화인들이 신상옥의 작품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공보처 산하 대한영화사의 사무장이었던 이형표였던 것이다. 당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었던 두 청년(신상옥은 1926년 생, 이형표는 1922년 생)은 공통점이 많았다. 식민 말기의 전시체제 아래서 예술에 심취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에 영화에 입문했다는 점이 일단 그렇다. 10대의 신상옥과 이형표는 둘 다 그림에 몰두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도피주의적 성향과 관련해서 보자면,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탐독하며 유럽의 관념철학에 빠졌던 이형표 쪽이 더 분명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을 쫓아 예술에 탐닉하는 것으로 험악한 세월을 견뎌내기로는 신상옥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유미주의적 성향은 1920년대에 태어나 10대와 20대 대부분을 전쟁 통에서 보냈던,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삶의 허무를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영화계에서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집단 따돌림을 당했던 신상옥 만큼은 아니지만, 이형표도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이형표는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공보원(USIS)에서 일했는데, 이때 이필우 휘하의 기술 인력들은 미공보원의 하청을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미공보원이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조직개편을 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영화인들은 그것이 통역을 했던 이형표 탓이라고 생각했고 이형표의 부역 전력을 발고했다. 이로 인해 이형표는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미공보원에서도 해고되었다. 영어 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과 교류를 쌓았던 덕에 그 이후에도 커리어를 쌓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도 그는 선배 영화인들의 미움을 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배들과 선을 그으며 활동했던 것은 오히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후 한국영화의 새 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보인다. 식민 말기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영화 만들기를 익혔던 선배들은 도제제도의 강력한 위계관계에 얽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기자재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전후 원조의 일부로 미국의 아시아재단이 한국에 들여와 설치한 휴스턴 자동현상기가 영화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던 것은 단적인 예다. <꿈>(1955) 아시아재단의 한국영화 원조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존 밀러(John Miller)는 ‘일거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구세대 영화인들 일부가 퍼뜨린 근거 없는 악소문 때문에’ 한국 영화인들 사이에는 자동현상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고 아시아재단 본부에 보고했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영화계의 낡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새로운 기자재에 훨씬 개방적이었던 젊은 영화인들에게 이 미국인 조력자가 더 호의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존 밀러는 전후 한국영화 중흥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가받은 이규환 의 < 춘향전 >(1955)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신상옥의 < 꿈 >(1955)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보았다. 탈식민의 과제를 안은 채 냉전체제로 편입되어갔던 1950년대의 시대적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존 밀러가 이규환보다는 신상옥에 주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상옥과 이형표 또한 냉전의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미래를 보았다. 멜로드라마로 대중영화의 흥행감각을 익히는 한편으로 영화사를 운영하며 기업적 발전을 모색했던 신상옥이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 (Theodore Conant)와 함께 휴대용 자기녹음기로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 >(1955)을 만들거나 파라마운트사의 <휴전 Cease the Fire)> 촬영에 참여하여 입체영화 기술을 경험하고, 16mm 코다크롬으로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미국 발(發) 신기술을 통해 시각적 체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신상옥이 제작, 감독하고 이형표가 촬영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1961)의 성공은 개인적 수준에서는 그들이 각자 1950년대 동안 쌓아온 역량이 결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식민지 문화로부터 냉전문화로의 변화가 극적으로 발현된 사건이었고 영화계 내부에서는 중심 인력의 세대가 교체되고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델로 한 새로운 산업 시스템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화기술의 유력한 출처이자 표준으로서 미국영화가 부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상옥- 최은희 의 <성춘향>과 홍성기 - 김지미 의 < 춘향전 >간의 대결이 <성춘향>의 승리로 귀결된 것은, 한국영화사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홍성기는 1924년 생으로 신상옥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일제 말에 만주영화협회에서 영화를 배웠고 선배 영화인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경작(競作) 소동이 영화계의 신구파 대결로 표출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춘향전>을 옹호하는 구파와 <성춘향>의 편에 선 신파의 대결은 신파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곧 신필름이 이끌어갈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구세대의 지원을 받았던 홍성기는 젊은 신상옥에게서 발견되는, 산업과 기술 그리고 영화미학에 대한 진취적인 비전과 모험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전 ‘춘향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만든다는 기획 자체가 애초에 신필름의 것이었거니와, 뒤늦게 제작에 뛰어든 홍성기 팀은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보여줄 만큼 신기술을 구사하는데 능숙하지 못했다. <춘향전>이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는지 처음부터 산업적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950년대 말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홍성기는 한국영화가 새롭게 도약하는 1960년대 초에 영화계의 주도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거의 테크니컬러에 육박하는, 현재까지도 퇴색하지 않은 <성춘향>의 아름다운 색감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적 성취였는지는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일반화된 1960년대 말 이후의 한국영화들과 견주어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1950년대 동안 미국영화의 신기술을 탐구해왔던 이형표가 영어로 된 기술서적을 열독하면서 장면마다 일일이 색온도를 재어가며 공들여 찍은 결과였지만, <성춘향>의 기술적 성공은 단지 아름다운 색감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유려한 카메라워크와 배우의 매력을 십분 살리는 효율적인 나눠찍기, 깊이 있는 공간구성은, 마치 초기 영화나 발성영화 초기의 작품들처럼 정면 롱 쇼트(tableaux)의 롱 테이크 위주로 구성된 <춘향전>과 현격히 구별된다. 기술이 예술적 표현을 제약하는, 신기술 도입 직후의 일반적인 상황을 뛰어넘은 <성춘향>의 성취는 기술이 예술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비용, 재능과 노력을 과감히 투여한 결과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는 많은 조명 장비가 요구될 뿐 아니라, <성춘향>에서처럼 커트를 자주 나눌 경우에는 그때마다 현장을 다시 세팅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상옥은 촬영에 필요한 코닥필름을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하여 사용했는데 여기에도 많은 돈이 들었다. (당시 많은 한국영화들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미군부대 주변의 암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자투리 필름을 구입해 썼다. 홍성기의 <춘향전> 또한 그와 같은 경로를 통해 필름의 많은 부분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감한 투자는, 결과적으로 서울 개봉관에서 관객 38만 명을 동원한 유례 없는 흥행 성공으로 보답 받았지만, 당시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를 가늠했을 때 이는 무모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성춘향> 이전에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서울 개봉관에서 불과 10만 명을 동원한 이규환의 <춘향전>이었다. 기존 시장에서는 회수할 수 없는 제작비를 투여한 <성춘향>은 한국영화의 시장규모 자체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치 할리우드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만들 때 그러했듯이, 신상옥은 <성춘향>으로써 영화시장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는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이끌었다. (실제로 셀즈닉은 신상옥이 모델로 삼았던 할리우드의 창의적인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험을 불사하는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이 신상옥의 추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대작 <성춘향>의 기획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성장해온 흥행산업의 잠재력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승산 없는 도박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와 전후 얼마 동안은 기술과 자본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공연예술이 대중오락의 중심을 이루었다. 1930년대부터 이미 융성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도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악극과 여성국극은 형편없는 기자재와 낮은 기술력, 자본의 빈곤으로 조악한 만듦새를 보여주었던 한국영화를 압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후 복구에 투여된 미국 원조자금의 일부가 영화계로 들어오면서 기자재가 갖춰지고 서울의 개봉관과 지방 극장들을 잇는 배급망이 확보됨에 따라 영화산업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악극과 여성국극의 작가와 레퍼토리, 배우들과 그들이 무대에서 발전시켜온 캐릭터들, 조명, 미술, 의상 분야의 스태프들을 흡수하면서 1950년대 말 한국영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흥행시장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성춘향>의 대중적 흡인력은 기술적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동안 대중과 교감하며 쌓아온 공연예술의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두 주인공 최은희와 김진규는 나이가 많아서 적역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면서 조연들이 마음껏 개성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을 만든다. 능청스럽고 익살맞은 악역(변학도)을 맛깔나게 소화한 이예춘 을 비롯하여 방자의 허장강 , 향단의 도금봉 , 그리고 양훈 , 김희갑 , 구봉서 같은 배우들은 악극에서부터 구축해온 캐릭터를 끌어와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고전 ‘춘향전’ 자체가 영화 뿐 아니라 공연예술을 통해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레퍼토리였는데, 특히 여성국극이 그려낸 화려하고 웅장한 스펙터클의 세계는 민족의 과거를 판타지의 무대로 만들곤 했다. 1950년대 후반의 사극영화들 대부분이 레퍼토리와 시각적 효과에서 여성국극에 빚지고 있거니와 특히 화려한 색감과 넓은 화면의 <성춘향>은 여성국극이 보여준 전통의 스펙터클과 판타지로서의 역사를 영화로 가져온 최고의 성공사례라고 할 만하다. 전통의 스펙터클을 통해 역사를 판타지로 구성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를 문화의 차원으로 회수하면서 특정한 미의식과 연관시키는 문화민족주의의 소산이다. 독립의 전망이 희미해져갔던 1930년대 이후에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정체성 확보를 주권의 회복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지역의 전통문화로부터 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신상옥이 말했듯이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 역사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한국의 역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났”던 세대, 다시 말해 민족국가의 학교제도 안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대신 전통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문화민족주의를 통해 역사에 대한 초월적인 감각을 습득한 세대에 속했다. 그와 같은 감각은 로컬리즘 담론과 그에 기반한 문학, 영화, 공연예술들을 통해 재생산되었으며, 신상옥이 말했던 것처럼 해방 이후까지도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되었다. <성춘향>은 미적 대상으로서 전통이라는 문화민족주의가 미국영화의 테크놀로지를 만남으로써 만개한 작품이었고 그런 점에서 냉전시대의 한국영화가 새롭게 출발하는데 식민의 문화적 유산이 어떻게 전유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였다. <성춘향> VOD 보러가기
테드 코넨트 (Theodore Conant)는 1952년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소속으로 한국에 왔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넨트(James Bryant Conant)는 하버드대학의 총장과 독일대사를 지냈고, 2차대전 중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수석고문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한 바 있었다. 통신병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테드 코넨트는 전쟁 후에 대학을 다녔고 로버트 플래허티의 조감독으로 < 루이지애나 이야기(Louisiana Story) >(1948)의 제작에 참여했다. 다수의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 쪽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의 지식 청년 테드 코넨트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역시 젊고 명민했던 이형표 를 만났다. 당시 화가이기도 했던 이형표 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제작하는 선전영화 <고집>의 통역 겸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의기투합했고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들었다. 그 중에는 화가 이형표를 주인공으로 삼은 < 한국의 미술가(Korean Artist) >(1955)도 있었고 한국전쟁을 다룬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 >(1955)도 있었다. <한국의 미술가>는 마닐라영화제에서, <위기의 아이들>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후일 테드 코넨트 는 이형표와 매우 긴밀하게(very closely) 작업했다고, 이형표는 테드 코넨트와 9년 동안 함께 살다시피 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테드 코넨트가 군산에서 퀘이커교도의 구호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1955년부터 국립영화제작소의 녹음 분야 고문으로 일했던 1960년대 초까지, 그의 통역을 담당했던 박익순 또한 두 사람이 항상 함께 작업했으며, 특히 편집은 거의 이형표가 맡았었다고 증언한다. 나는 이 독특한 협력관계가 한국 다큐멘터리의 ‘잊혀진 기원’의 중요한 한 장면을 이룬다고 주장하고 싶다. 영화사연구자로서 나는 ‘기원’을 찾아내고 그 이후의 많은 것들을 그 ‘기원’으로 회수하고자 하는 연구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기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과 함께 독립 다큐멘터리의 흐름이 부상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국가기관이 독점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기원’ 또는 ‘전통’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정적인 만큼 효과적으로 그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한미 양국의 두 청년이 함께 작업했던 이 사적인 다큐멘터리들은,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고도 미묘한,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당시 한국사회를 규정했던 권력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투영하고 있다. 2004년 이형표 감독과의 생애사 구술을 하면서 처음 이 영화를 접했던 나는, 5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구사하는 세련된 화법에 먼저 놀랐다. 국립영화제작소가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를 독점하고 있을 때도, TV 방송이 다큐멘터리 제작의 주도권을 국립영화제작소로부터 빼앗아온 1980년대 이후에도,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실천적 방법으로 시도되었던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에서도, 빌 니콜스가 분류한 이른바 “신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다큐멘터리의 설명적 양식은 도전받지 않았다. < 위기의 아이들 >이 나에게 가장 먼저 환기시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우리의 다큐멘터리 역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다이렉트 시네마의 관찰적 양식은 한국전쟁 당시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다른 다이렉트 시네마가 그러하듯이 현장음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 예외적으로 몇 번 끼어드는 한국 전통의 관악기 소리가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관념의 소산이었을 것이라는 혐의도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벽돌을 나르거나 미군과 ‘양공주’를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거나 양식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거나, 포탄을 맞아 뚫어진 학교 벽 안쪽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한글을 배우거나 이승만정권의 휴전반대 시위에 동원되거나 거리에 쓰러져 있거나. 이것이 이 영화가 그려낸 ‘위기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을 전쟁의 와중에 놓인 그 전쟁의 당사자가 그토록 냉정하게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한국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미국 신문들의 몽타주 위로 이것이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story)이며, 특히 역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질 일반적인 전쟁과 전투의 기록이 아니라 “아이들의 얼굴에 투영된” “어떤 전쟁”을 바라보는 다른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영어 자막이 흐를 때, 우리는 이 영화가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관대한(tolerant)’ 태도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서구 인류학자의 태도에 의해 지배될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아마도 테드 코넨트 는 그처럼 ‘관대한’ 서구의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박익순의 표현대로 한국인에게 근본적인 관심은 없었지만 한국을 “사랑”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에 고용되어 있으면서도 공공연하게 이승만의 독재를 비난할 만큼 용감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런데 그의 한국인 파트너였던 이형표 는? 그는 서울 사대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테드 코넨트 도 인정했듯이 자신보다 더 “민첩하고 훌륭한 카메라맨”이었지만, 미국문화의 수혜를 열렬히 원하는 제3세계의 지식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미국문화는 자신의 10대를 지배했던 일본의 식민지 문화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세계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미국 유력인사의 아들이었던 테드 코넨트는 이 총명하고도 열정적인 제3세계 친구를 위해 자신의 특권을 활용해서 서구의 최신 다큐멘터리들을, 음반들을, 영화이론서들을, 그리고 최고급 인쇄의 화집들을 외교 행낭을 통해 실어날랐다. 2차대전 이후 미국 다큐멘터리를 지배했던 다이렉트 시네마 양식이 놀라울 만큼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는 < 위기의 아이들 >은 바로 그들이 나누었던 독특한 ‘우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코넨트가 가져온 것은 한국에서 처음 보는 동시녹음이 가능한 휴대용 녹음기계나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최신의 영화경향만은 아니었다. 무릇 문화란 그 어떤 경우에도 단순히 도구일 수만은 없는 법이다. 한국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 전쟁이 낳은 비극에 대한 외부자의 관찰적 시선,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 또한 이형표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목, 즉 정치적 목적으로 아이들을 휴전반대 시위에 동원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때문에, 이형표 는 나이 80이 넘어서까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영화 < 위기의 아이들 >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 전력 때문에 빨갱이라는 의심을 받고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그는 “다시 떼들어갈까봐 무서워서” 코넨트에게 그 영화를 “줘버리고 말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위기의 아이들>을 상영한 후 이승만 정권의 관료들이 코넨트에게 “어떻게 공산주의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 수 있느냐”는 항의를 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그것은 단지 이형표의 피해의식이 낳은 기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덧붙여서. 테드 코넨트 는 < 위기의 아이들 >을 포함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관련 다큐멘터리들, 각종 서류들, 자료들을 콜럼비아 대학에 기증했고 그 중 일부가 한국영상자료원에 공유되었다. 그리고 이형표 감독이 사망한 후인 작년에 한국영상자료원 수집부의 최소원 씨를 만난 코넨트는 자신이 기증한 자료들을 “테드 코넨트와 이형표 콜렉션”이라고 이름 붙여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이형표는 비로소 그 시절 자신이 했던 일들에 이름을 새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