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질듯한 이 가슴을
- 감독
- 이상언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이동진, 김애경, 하명중, 조경희, 서지숙, 김만, 한국남, 손성진, 이강령, 장훈, 왕정치, 송천미
수첩에 제목이 빼곡할 만큼 많은 영화에 출연한 고기환은 출연작 DVD를 받기 위해서 길을 나선다. 의외로 여겨질지 모르나, 실제 감독들은 완성 후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DVD를 잘 건네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으론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제작과 동시에 와이드릴리즈 되는 상업영화의 룰과 달리, 독립영화의 유통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 누군가의 장롱과 서랍 속에 고이 담겨 있는 영화 또한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기환과 감독의 만남은 각각 독립적인 챕터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 코미디의 외피를 가지고 있는 ‘영화에 관한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설정을 곳곳에 드러낸다. 총을 겨누는 소품 스태프, SF영화를 연상시키는 공간과 앵글, 실패한 영화감독을 상징하는 다양한 설정들, 제작현장에서 펼쳐지는 연출과 배우 사이 극도의 긴장까지. 기환은 그들 각자의 자리를 이동하며, 상황을 담담하게 마주하거나 혹은 기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뜻밖에 리얼리티를 만나게 된다. ‘영화는 페니스다.’ 라는 궤변을 펼치던 학회장 선배는 치약외판원이 되어 있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라던 세쌍둥이 감독은 이젠 뿔뿔이 개인 작업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천재감독 이상일은 스스로 패배자라 칭하고, 사교왕 오대교는 두문불출하는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다. 아날로그만을 고집하던 순지는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다. 디지털은 반칙인 것 같다는 필름에 대한 아련한 로망은 낭만적이지만 부질없는 투정이다. 룸메이트인 동신 또한 그에게 DVD를 주지 않았던 감독으로 드러난다. 노란 체크무늬의 빈티지 종이가방에 DVD가 쌓여 갈수록, <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의 사연은 늘어간다. 웃음이 잦아질수록, 마냥 유쾌할 수 없는 서늘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영화 만들기의 치열한 과정과 그 앞의 첩첩산중을 조금이나마 공감한다면 말이다. 세계를 창조할 것만 같던 자신감도, 협업의 위대함도, 아날로그의 기원성도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시스템은 견고하고, 감독들은 가난하고 무력하며, 매체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 채 너무 빨리 변해가고 있다. 배우이자 감독인 구교환 은 작품에 직접 출연하고 연출하며,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감독들의 사연을 능청스럽게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라는 욕망 앞을 서성거렸던 이들에 대한 일종의 우정 어린 헌사라고나 할까. 영화는 희극적인 설정과 더불어, 위트 있는 대사와 배우들의 감칠나는 연기로 코미디 영화의 전형을 이어나간다. 순지역의 고보결과 세쌍둥이 감독역의 백성철은 전작 < 거북이들 >에 이어 출연하여 반가움을 더한다. 구교환 을 포함한 이들의 연기는 전형적인 코미디영화의 과장법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독특한 정서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엉뚱하고, 모자라고, 외로운 캐릭터들로써 영화의 서사구조상 완전한 패배자이다. 이를테면 쓰레기들과 함께 담겨 있는 종이가방 속에 DVD들과 같은 처지이다. 언뜻 독립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구교환의 영화에서 그들은 전혀 다르게 조직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역할에 충실한 듯하지만, 무거운 역할놀이를 한순간 벗어던진다. 구교환은 그 짧은 찰나를 통해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혀 다른 생명력을 갖게 된다. 연기하는 기환의 메소드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다.
어떤 영화를 초이스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문득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가 뭘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결국은 필자가 출연한 영화가 가장 잘 아는 영화이자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으로 집어보다 보니 어느덧 열 편 이상의 장·단편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아직 주연작은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럼 주연급(?)의 영화는 무엇이었나 생각하다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 위대한 선수 >이다. 엉겁결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얼렁뚱땅 출연한 영화의 연기가 제일 좋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후로도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2주 전에도 다른 영화에서 또 회사원으로 출연했으니 말이다. 결국 직장생활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직장인의 생활연기를 자주 한 셈이다. < 위대한 선수 >는 제목처럼 거창한 영화는 아니지만 결국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선수들인 아버지들의 고단한 일상을 블랙코미디로 표현한 영화다. 영화의 매 순간은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이자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포함된 우스꽝스런 풍경의 연속이다. 그러나 보고 나면 정말 씁쓸해지는 블랙코미디에 충실한 영화라 할 만하다. 힘찬유통의 사내 체육대회의 일환인 축구경기를 생중계하는 과정을 그린 <위대한 선수>는 왜 축구를 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사장의 취향이 축구라 그저 영문도 모르고 우왕좌왕 축구경기를 준비하는 사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노동의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직장에 매여서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쉴 틈 없이 달리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직장인들을 은유하는 이 영화는 직장이라는 또 다른 전쟁터에서의 계급관계와 가족 내에서 그저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서 가장으로서의 힘도 권위도 잃어버린 아버지를 우스꽝스럽게 그러나 아주 처절하게 그리고 있다. 기다리는 사장은 오지 않고 결국 축구경기를 하지도 못한 채 그저 이리저리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멀리서 보면 소동에 가까운 희극이지만 한 뼘 앞에서 보면 그들 각자의 웃지 못할 비극을 그리고 있다. 불행히도 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좀처럼 체감 경기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더욱 이 영화의 현재성은 돋보인다. 코미디를 코미디답게 만든 작품이자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 있는 이 작품에서 코미디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기에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위대한 선수>다. 전형성을 가진 인물들과 비현실적일 것 같은 상황이지만 우리 주변의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을 그린 <위대한 선수>는 단편영화다운 간결함과 뚜렷한 메시지, 그 틈을 밀도 높게 메우고 있는 에피소드들이 잘 버무려진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애정 어린 헌사라 할 만하다. 4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당시로써는 드물게 단편영화로서는 거의 최초에 가까운 레드카메라로 촬영한 < 위대한 선수 >는 필름에 가까운 화질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과 지금은 많이 알려진 배우들의 출연으로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곽도원, 이상훈 등 많은 영화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고 여주인공은 이 영화 이후 걸그룹 ‘에이프릴 키스’에서 해즌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필자도 해설자 역으로 출연했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자면 축구경기를 준비하는 회사원들의 모습과 이를 중계하는 모습을 따로 찍었기에 필자는 촬영장에서 오로지 캐스터 역할의 이상훈 씨와만 연기를 했다. 그저 보이지 않는 축구를 상상하며 멘트를 하고 액션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스스로를 훌륭한 연기자라 우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치고 힘든 자들이여 이 영화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