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사
- 감독
- 배준호
- 제작년도
- 2002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에서 양지훈 은 대학교 축구 동아리에서 만난 ‘아는 형’을 보러 일본에 간다. 재일조선인인 ‘형’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양지훈을 초대하고, 양지훈은 그 여정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촬영한다. 이후 <도라지>에 <불고기>를 덧붙여 장편 분량으로 편집된 < 도라지 불고기 >(2025)에는 <도라지>의 브이로그 영상을 시청하는 형의 모습을 촬영한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는 양지훈이 <도라지>를 제작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일본에 방문해 촬영을 이어 나갔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가 당사자를 대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도 그 이미지를 당사자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특수하고 유일무이한 이미지가 아닌, 그저 범박한 모습으로 말이다. 양지훈의 영화에서 이들은 재일조선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키사다 이사오의 < GO(고) >(2001)나 최양일 의 <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1993)처럼 미묘한 차별을 통과하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조선학교에 다녔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추억하고, 불고기를 먹고, 가라오케에 간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형’과 그의 친지들, 조선학교의 관계자들을 포함한 재일조선인들의 얼굴은 모두 블러 처리된 형상으로 등장한다. 얼굴을 탈각한 형상들은 평범함의 분신들인 것처럼 스펙터클 없음을 재차 강조해 드러낸다. 양지훈 감독은 한 토크 자리에서 출연진들의 얼굴을 가린 이유에 대해 “욕망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내 얼굴만을 드러내는 게 정당한 것 같다”라고 말한 적 있다. [1] 그의 말에 의하면 얼굴은 욕망하는 자의 언어다. 여기서 욕망이란 자신의 부분을 드러내는 노출증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그 얼굴에서 욕망을 소거할 수 없다는 난감함을 수렴하는 최소한의 진실의 단위인 셈이다. 한편, 그날의 대화에서 좀 더 흥미로웠던 대목은 양지훈 감독이 이렇게 덧붙였을 때다. “제가 (말하면서) 자꾸 욕망이란 말을 써서 욕망이란 말을 안 써보겠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가 정말 ‘욕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 이 말이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맺혀 있는 소거법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욕망이라는 말을 덜어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는 감독으로서 무대에 서 있는 상황이 이미 충분히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기에 ‘욕망’이라는 말을 거듭 입에 올리는 것을 경계했을 수도 있다. 혹은 ‘욕망’이라는 단어가 대상과 촬영자 사이의 관계를 손쉽게 일축해 버린다는 편리함에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의 강직한 성정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욕망’을 다른 언어로 대체하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욕망’이라는 말의 자리가 여기저기로 산재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양지훈에게 있어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소거법은 있는 것을 그대로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당연시되는 것들의 제자리를 흐트러뜨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이는 <도라지 불고기>에서 촬영 대상의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자신의 얼굴만을 드러내기로 한 결단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도라지 불고기>에는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가더라도 조선학교를 다닐 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형’의 얼굴이 없다. 주민등록을 할 수 없어서 신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한 ‘형’의 얼굴도 없다. 운동회에서 찬가를 부르고 아이치 새교사 준공식에서 축하공연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집단화된 이미지를 거쳐 이중으로 익명화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 얼굴을 모두 삭제하고 감독 자신의 얼굴을 대체한 것이라고 말해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유빈은 <도라지>에 이어 <불고기>를 보았을 때 윤리의 측면에서 언어화하기 어려운 어긋남을 감지했다고 말하며 “얼굴은 삭제된다고 하더라도 얼굴이었다”라고 쓴다. [2] 얼굴이 블러 처리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그 얼굴의 빈자리들과 관계 맺는다. 어쩌면 그 흐릿한 형상은 우리가 그 얼굴을 마주하더라도 그 얼굴로부터 필연적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한계를 포착한 미래 시제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시선이 반사되어 맺힌 표면이다.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 자꾸만 부재하는 것의 의미를 대입하려는 관객의 관성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처럼 자꾸만 한발 앞서나가 기대되는 것을 지우는 영화의 전략은 한편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반응을 과도하게 결정화한 결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허나 궁극적으로는 그 소거된 자리에 다큐멘터리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불고기>에서 인터뷰를 하러 온 ‘형’은 준비된 조명을 보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하는 거야?”라고 물으며 당황해한다. 그러자 카메라 뒷편에 있던 양지훈 감독은 “폭력적으로?”라고 되묻는다. ‘형’은 감독의 말을 정정하지 않은 채 “어”라고 답한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차이지만 ‘본격적으로’와 ‘폭력적으로’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물론 형이 ‘본격적으로’라고 말했을 때 은연중에 ‘폭력적으로’라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직 ‘잠재적으로 발화되지 않은 말’이다. 양지훈은 그 잠재성을 기어코 수면 위로 드러내며 다큐멘터리의 폭력성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을 두고 < 포수 >(2022)에서 인터뷰 자리에 준비된 조명을 보고 자신을 주인공처럼 만들어 준다면서 기뻐하는 할아버지의 반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양지훈은 다큐멘터리에 전제된 폭력성을, 할아버지를 기쁘게 한 몫으로 상쇄하는 듯한 은밀하고도 발칙한 교환의 현장을 목격하게끔 한다. 그 현장을 더 이상 암묵적인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영화에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포수>는 기이한 전복적 쾌를 충족시키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편, <불고기>에서도 양지훈은 대상의 현실에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폭력성을 숨기는 대신 선취하여 보여준다.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대화’로 재구성함으로써 카메라를 든 순간 영화적 현실이 이미 물리적 현실에 개입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좌)", " 포수 (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 불고기>는 트린 T. 민하가 선언했던 것처럼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는 다큐멘터리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반(反)다큐멘터리다. 우리는 영화가 객관성의 허구를 폭로하는 방식으로만, 영화적 현실과 재현된 현실이 뒤섞이는 방식으로만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맞닥뜨려야 한다. <도라지 불고기>는 “숭고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보편의 개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진정 과시적인 자의 겸손한 영화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신화에 열성적인 구멍을 내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 에스퍼의 빛 >(2024)을 두고 정재훈 감독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3] 라고 말(해야만)했던 것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이 말은 “<에스퍼의 빛>이 다큐멘터리인가?”라는 고루한 반문을 상대하는 것이다. <도라지 불고기>와 <에스퍼의 빛>은 다큐멘터리라는 역사의 사장된 빈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당연시 여겨지게끔 만드는 요소들을 지워냄으로써 재현의 관성으로부터 누락된 반(反)역사에 다가가려 한다.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온함을 통해 다큐멘터리는 다시 한 번 갱신된다. *** [1] 해당 발언은 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의 “클럽시네마”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토크 “‘자기’가 되는 방법 : 카메라, 몽타주, 나”에서 발췌했다. 도미니크 카브레라의 <환송대 다섯 번째 샷>을 상영한 뒤 양지훈, 이예진, 황예지 작가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 [2] 임유빈, 「얼굴≠얼굴」, 『도라지불고기』, 2025, 59쪽. [3] 정재현, “ 온라인도 물리적 공간이다, <에스퍼의 빛> 정재훈 감독 ”, 《씨네21》, 2025. 11. 6. 김예솔비(영화평론가) l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그들 각자의 터전이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스카이프(Skype)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이 썰렁한 재회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저들 사이의 간극은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분리된 세 장소의 지리적 거리감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여고 시절을 동고동락한 세 친구가 스무 살이 되면서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묘사하는 < 성적표의 김민영 >(2022)은 물리적 거리감을 실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은유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우정이라는 감정을 고요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는 ‘김민영’을 평가 대상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는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환상과 추억으로 일상을 확장하는 내러티브의 궤적은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가볍고 우울한 자화상을 따라간다. 도입부는 임박한 시험을 앞두고 삼행시 동아리를 작파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의 마지막 회합을 보여준다. 이날 이후 세 친구의 길은 갈라진다. 몽상가 기질의 정희는 수능을 보던 날 시계를 지참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소년 정일(임종민)에게 손목시계를 주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작별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정희는 우연히 정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청주 나달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누구도 가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간다.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를 벗어나지 않은 좁은 활동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테니스클럽 홍보를 위해 자신의 그림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여고 시절부터 모임 결성을 즐겼던 민영은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청자켓 동호회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수산나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확보하여 옛 친구들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여름방학 동안 민영이 머무는 서울 집을 방문한 정희는 친구를 초대한 뒤 그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있는 민영에게 어색함을 느낀다. 민영의 마음은 서울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는데 보탬이 될 성적(학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성적에 집착하는 대학생이 된 민영과의 재회는 정희에게 명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성공에 대해 조용한 자각을 준다. 뚜렷한 근거 없이 학점 교정을 탄원하는 시시한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민영에게 성적표를 남기고 정희는 돌아선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을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우정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한다. 느린 서사의 진행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곳곳에 뿌려진 건조한 유머는 안도감을 제공하면서 몽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정희의 본성을 포착하는 것을 돕는다. 이재은, 임지선 공동감독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던 두 친구의 나란했던 자리가 조금씩 이지러지는 순간들을 제시하면서 한동안 마음에 남는 애틋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드게임, 햇반, 배드민턴 라켓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상경한 정희의 재회에 대한 상상은 슬프게도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다. 앉은뱅이 책상과 노트북을 떠나지 않는 민영은 정희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져버렸다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의 소홀했던 학업성취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상하려 한다. 점차 한국적으로 변해가는 민영의 위선에 비해 정희의 상상의 나래는 실제 우정 장면과 상상의 우정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는다. 홀로 남겨진 정희는 민영의 일기와 개인 영상을 발견하고 민영의 우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이는 여고 시절의 친우(親友)가 멀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도록 이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아의 희생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집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표면화되는 상황의 장면 연출은 탁월하다. 민영이 단 하루로 시한을 한정하였으나 정희의 목적은 옛 시절처럼 민영과 ‘룸메이트’가 되는 것이다. 여고 시절 기숙사 방과 군에 간 민영의 오빠 자취방은 미묘하게 대조된다. 여고 시절 기숙사에서 나란했던 정희와 민영의 침대는 일치된 이상을 향하고 있던 존재의 조건을 묘사한다. 민영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평이 난 도시인 대구가 너무 한국적이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친구 정희에게는 냉담하다. 자취방에서 두 사람의 배치와 자세, 카메라 위치는 엇갈리는 두 친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문과 거울, 방바닥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들, 신체적 제스처 따위가 교착된 관계를 보여주면서 두 인물을 분리하는 촉매가 된다. 민영의 과업에 동참하여 교수에게 탄원 메일을 작성하는 것을 돕는 정희에겐 나의 친구가 좀 유치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한편, 민영은 정희의 선택을 무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현실적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장 서사의 상투형은 경쟁적인 입시 제도로부터 비롯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학위, 직업, 가족을 형성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이다. 사회적 기준이 제시하는 표준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의 고충은 성장 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이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주제이기도 하나 이 영화는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을 지지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길을 묘사하는 무미건조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을 창안해냄으로써 통상의 성장담과 다른 길을 간다. 눈치조차 성공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희는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바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민영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피어날 수 있을까? 두 공동감독은 점차적으로 서로 분리되어가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 여성들의 내면적 삶을 유머와 솔직함, 연민으로 다룬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풍으로 상상된 제주 여행 삽화는 진부한 공간을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는 정희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소원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순간들은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잘 다루어지고 있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신뢰하게 한다. 정희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할 수 있고, 환상과 오류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하기보다 현실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학력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평판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본다. 정희는 민영의 우월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만 우정을 회복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민영이 그녀를 계속 무시하는 동안에도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정희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나는 민영의 일기는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며,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소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친절한 태도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바탕으로 정희는 친구의 더 나은 자질을 칭찬하는 동시에 민영의 위선과 결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성적표를 작성한다. 정희는 ‘한국인의 삶’에 F를 주면서, 좁은 땅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보다 덜 한국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문화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제시하는 이 사려 깊은 드라마는 일탈적인 공상의 강렬함을 소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정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성숙한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완전했던 세계의 파괴, 우정의 몰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공동 감독은 ‘삼(3)’이라는 숫자를 통해 이를 암시한다. 숫자 삼(3)의 논리는 무엇인가? 수비학(數秘學)에서 지혜와 이해, 창의의 수로 간주되었던 삼(3)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획된 시간의 세(3) 축, 탄생,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삼(3) 주기로 약호화된다. ‘조화’와 ‘일체감’, ‘통일성’을 상징하는 삼(3)은 세(3) 개의 꼭짓점을 연결한 삼(3)각형처럼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호재와 악재는 세(3) 단계를 거쳐 온다고 하며, 가장 이상적인 스토리의 구성은 삼(3)막의 행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내쳐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3)의 해체, 몰락에 관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다. 삼(3)행시 짓기 동아리로 하나가 되었던 세(3) 친구의 분리는 삼(3)행시 모임을 중단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삼(3)행시는 단어를 이루는 세(3) 음절을 모체로 하나의 문리(文理)를 조형해내는 행위인 바, 그 결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게 된다. 문학적 깊이마저 지니게 되는 저들의 삼행시는 그저 말을 지어내는 놀이를 넘어 진짜 ‘시’를 닮게 된다. 하나로 뭉쳐 삼(3)행시를 짓던 세(3) 친구는 세(3) 도시로 흩어지며 셋(3)으로 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생은 따라야 할 목록, 결의안의 지침처럼 간단하다. 문제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희가 관리하는 테니스 코트의 경기로 환원하자면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완강한 완력으로 라인을 타고 공을 보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담장 바깥에서 담장 안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하는 테니스공들처럼 스핀이 많이 걸린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겸손하고 소박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그 깊이를 체감하게 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환멸을 묘사한다. 감춰진 감정들이 많은 이 영화는 이별은 감상적일 수 없으며 매우 가혹하지만 필요하다는, 희소성 있는 주제를 다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깊고 그윽한 숲속 어딘가, 정희가 그린 곳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우리들의 친구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곳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6.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사방지 >는 1980년대에 양산되던 사극 에로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사방지>는 조선 세조시절 『실록』에 기록된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실록』에 따르면 양반가 종인 사방지가 주인집 과부 며느리인 이씨와 놀아난다는 소문이 돌아 조사해보니 그가 음낭과 음경을 갖고 있어 고발당했다고 한다. 이 고발은 세조가 자신의 사위인 정현조를 보내 살피게 할 정도로 큰 스캔들로 발전한다. 그리고 사방지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어지사지, 즉 간성임이 밝혀진다. 조정은 사방지를 시골로 쫓아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권력자들이 관대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기보다는 그를 기존의 인간 질서를 벗어난 존재, 즉 비-인간으로 봤기 때문에 큰 죄를 내리기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해당하는 법을 비-인간에게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방지는 추방된 곳에서 다른 여성들과 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씨와도 다시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세조는 이 소식을 듣고 사방지를 관노비로 내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이씨 부인의 아들 역시 관직을 얻지 못하게 하는 등 불이익을 받았지만 그를 인간 범주에서 제외하지는 않는다. 이씨 부인의 행위는 그저 인간의 비도덕성으로 규정된다. 영화 <사방지>는 사방지(이혜영)의 존재를 처음부터 ‘비-인간’의 범주에 놓는다. 영화가 묘사하는 ‘비-인간’은 한편으로는 위계적으로 인간보다 못한 짐승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사방지의 출산 장면이 재현되는 오프닝은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불길한 기운을 강조하고, 영화는 그의 존재를 뱀, 달팽이 같은 짐승들로 직유한다. 사방지의 등장에는 늘 뱀이나 달팽이의 클로즈업 쇼트가 돌발적인 충격으로 삽입된다. 하지만 사방지의 비인간적 면모는 동시에 그가 보통의 인간을 넘어선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걸 증명한다. 인간과 동물, 여성과 남성의 양가적 특징을 다 가진 그는 양성 모두를 홀리는 성적 매력, 세심함과 대담함, 자수와 같은 정교한 기술과 놀라운 체력, 아름다운 외양과 지성 모두를 갖춘 이로 묘사된다. 이소사(방희)와 사방지의 만남은 운명적인 사랑으로 묘사된다. 이소사는 처음부터 사방지의 비범함을 알아챈다. 이소사와 사방지의 만남은 성적 은유로 가득 차 있다. 폭포에서 몸을 씻던 이소사 앞에 똬리를 튼 큰 뱀이 등장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훔쳐보던 사방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채 나뭇가지로 그 뱀을 들어 무심하게 던져버린다. 이 장면은 낭만적인 구원자로서의 사방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의 남성 성기를 직접적으로 은유한다. 이소사는 뱀을 보고 놀라는데 이는 사방지의 남성성에 대한 매혹과 경탄을 장면화 한다. 이상할 정도로 뱀을 보고도 평정을 유지하는, 동물 근친적인 사방지의 태도는 그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영화는 이소사가 사방지를 사랑하게 된 것이 단지 그의 남성 성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려 한다. 이소사의 사랑을 통해 사방지의 비인간성은 특별함과 비범함이 된다. 즉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평범함과 비루함, 세속적인 기준을 초과한 인간이다. 그는 ‘대물’로 성적으로 여성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자를 보호하는 낭만적인 구원자이며, 천자문도 읽고 자수에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졌다. 이소사 뿐 아니라 다른 여자와 남자들도 색다른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이소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절에서 밥이나 짓는 애인 줄 알았는데 이런 재주가 있다니. 날마다 너를 새롭게 보는구나.” 물론 이 영화는 에로영화로서도 충실한 기능을 하며 이 대사를 계기로 둘은 동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계급 불평등과 그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는 멜로드라마가 되면서 일반적인 에로영화를 넘어선다. 이소사와의 관계가 들통이 나고 양반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소사는 사방지를 배신한다. 사랑하는 두 여자 사이의 차이는 젠더나 섹슈얼리티보다 계급에서 두드러진다. 무녀 모화는 자신의 남편이 양반가의 씨내리로 사용된 후 살해된 복수를 위해 사방지를 이용한다. 자신을 도구화하려는 모화의 계략과 납치를 비난하던 사방지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함께 복수에 참여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모두 자신들에게 직접 가해를 한 개인이나 가문이 아니라 양반이라는 계급 자체에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모화는 포주 노릇을 하며 양반가 마님들에게 돈을 받고 사방지와의 성적 관계를 제공한다. 그들의 재산을 갈취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성적 규범과 도덕성을 자신들의 우월한 특징으로 내세우는 양반의 계급적 위선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 설정은 이소사에 순정을 갖고 있던 사방지가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성애적인 씬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곧 사방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복수를 하는 것이 자해 행위임을 깨닫게 된다. 성적 도구가 된 사방지는 그 자체로 비인간화 된다. 모화는 “넌 달팽이의 혼을 타고 나서 음지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를 통제하려 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달팽이의 클로즈업 몽타주가 끼어든다. 사방지는 그렇게 여러 번에 걸쳐 비인간화된다. 하지만 그의 비인간성은 신체적 특징에 있다기보다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 등에 의해 그를 비인간화하고 그 행위들을 합리화하려는 ‘인간들’에 의해 구성된다. 사방지는 결국 “전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짐승도 아니에요.”라고 절규한다. 그는 정체성의 혼란, 소속감에의 결여를 겪으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사방지는 “부처님이 계시다면, 왜 저 같은 저주받은 생명을 만드셨습니까. 남자도 여자도 아닌 병신을 말입니다.”라고 울부짖는다. 이소사와의 재회가 이뤄지지만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엔딩씬에서 자신의 남성 성기를 잘라 버리는 사방지의 신체훼손은 특정 성별로의 결정이나 ‘정상성’에의 순응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둘 간의 사랑과 갈등은 단순히 가부장제 억압의 결과나 ‘에로 영화’의 성적 대상화된 장치로 설명되기 어렵다. 사방지를 여자로 알면서도 그를 사랑한 이소사의 섹슈얼리티, 사방지와 이소사의 주요 갈등인 계급과 신분, 간성에 대한 다채로운 반응 규범과 질서를 초과한다. 아마도 이러한 묘사가 가능한 것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는 이소사의 자살과 사방지의 성기 절단이라는 파격적 비극으로 끝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도 단순하게 분류되지 않는 그/녀들의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겨 놓는다.